베토벤의 생애와 음악 — 귀가 멀어서 위대해진 게 아닙니다

독일 본의 궁정 악사 집안에서 빈의 장례 행렬까지 56년. 교향곡 아홉 곡과 피아노 소나타 서른두 곡을 남긴 사람의 연대기.

한 줄로 — 스물여덟에 귀가 나빠지기 시작해 마지막 10년은 거의 듣지 못했는데 하필 그 10년에 가장 큰 곡들이 나왔습니다.

딱 하나만 듣는다면 — 교향곡 5번 c단조. 네 음짜리 짧은 덩어리 하나로 30분을 끌고 가는 설계가 첫 15초 안에 다 드러나요.

이 글에서는 — 본의 유년부터 빈의 장례 행렬까지, 생애를 따라가며 대표작과 그를 여는 열쇠말을 한자리에 묶어 봅니다.

이름
루트비히 판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생몰
1770년 12월 17일 세례 ~ 1827년 3월 26일
국적
독일 본에서 태어나 1792년부터 빈에서 활동
시대
고전주의 후기에서 낭만주의로 넘어가는 길목
주요 장르
교향곡·피아노 소나타·현악 사중주·협주곡
대표작
교향곡 3번 《영웅》, 교향곡 5번 c단조, 교향곡 9번 《합창》

베토벤은 자기 출생연도를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본의 성 레미기우스 교회 세례 기록에는 1770년 12월 17일이라고 남아 있지만, 정작 그는 자신이 1772년생이라고 믿고 살았습니다. 1810년에 처음 세례증명서를 받아 든 뒤에도 서류 뒷면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1772년 — 이 증명서는 잘못된 것 같다, 나보다 먼저 태어난 루트비히가 있었으니.”

마흔이 될 때까지 자기 나이를 남이 말해 준 대로 받아들인 셈입니다. 이 착오가 어디서 비롯됐는지는 지금도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어린 신동처럼 보이게 하려고 두 살을 낮춰 말했다는 설명이 오래 통용됐지만, 전기 작가 메이너드 솔로몬은 아버지의 조작보다 베토벤 자신이 끝까지 붙든 착각에 더 무게를 둡니다.

흔히 알려진 베토벤 이야기는 대개 이렇게 요약됩니다. “귀가 멀었는데도 굴하지 않고 위대한 음악을 썼다.” 절반은 맞지만, 실제 순서는 조금 다릅니다. 베토벤은 처음부터 굴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서른한 살에 한 번 완전히 무너졌고, 유서를 써서 서랍에 넣어 둔 뒤에야 삶의 방향을 바꿨습니다. 무대에서 연주하는 사람이 아니라, 종이 위에서 음악을 완성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요제프 카를 슈틸러가 1820년에 그린 베토벤 초상화. 붉은 스카프를 매고 미사 솔렘니스 악보와 펜을 들고 있다
1820년의 베토벤. 손에 든 악보는 완성까지 4년을 끌던 《미사 솔렘니스》다.

아버지가 깎은 두 살

본은 쾰른 선제후의 궁정 도시였고, 베토벤 집안은 3대째 그 궁정 음악가로 살았습니다. 할아버지 루트비히는 베이스 가수로 들어와 궁정 악장까지 오른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 요한도 테너였지만 할아버지만큼 자리 잡지는 못했고, 대신 술에 빠져 살았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실패를 아들의 건반 위에서 만회하려 했습니다. 1778년 3월 26일, 그는 쾰른에서 아들의 첫 공개 연주회를 열며 “여섯 살짜리 신동”이라고 광고했습니다. 실제 나이는 일곱 살 세 달이었습니다. 두 살 가까이 어려 보이게 만들었든 한 살 남짓 줄였든, 아버지가 아들의 나이를 상품 정보처럼 다뤘다는 사실은 그대로 남습니다.

다행히 이 소년에게는 제대로 된 스승이 붙었습니다. 1780년 무렵 본에 부임한 궁정 오르가니스트 크리스티안 고틀로프 네페입니다. 네페는 열 살짜리에게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통째로 물렸습니다. 당시 바흐는 이미 반쯤 잊힌 옛사람이었으니, 유행 지난 교재로 기본기를 다진 셈입니다. 이때 익힌 바흐식 어법은 40년 뒤 후기 현악 사중주에서, 여러 선율이 맞물려 돌아가는 푸가로 되살아납니다. 1782년, 열한 살 베토벤의 첫 출판 악보가 나옵니다. 남의 주제를 가져다 아홉 번 변형한 건반 변주곡이었습니다.

독일 본에 있는 베토벤 생가의 분홍색 외벽 건물 전경
본가르트가세 20번지, 지금은 베토벤하우스 박물관이 된 생가의 현재 모습이다.

1787년 봄, 열여섯 살 베토벤이 빈으로 떠납니다. 목적은 모차르트였습니다. 두 사람이 실제로 만나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확실한 기록이 없습니다. “저 젊은이를 주목하게,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걸세”라는 모차르트의 말은 후대에 붙은 이야기로 보는 견해가 우세합니다. 확실한 건 그가 2주 만에 본으로 돌아왔다는 사실과 그 이유뿐입니다. 어머니 마리아 막달레나가 결핵으로 위독했습니다.

어머니는 1787년 7월 17일에 죽었습니다. 마흔이었습니다. 그 뒤 아버지는 술을 걷잡을 수 없이 마셨고, 열여덟 살 아들은 궁정에 청원을 넣어 아버지 봉급의 절반을 자기 앞으로 돌려받습니다. 동생 둘을 먹이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베토벤은 열여덟에 가장이 됐습니다.

이 시기가 베토벤의 음악에 남긴 건 정서가 아니라 태도입니다. 베토벤은 평생 후원자들에게 고용인처럼 굴지 않았는데 그 배짱의 뿌리가 여기 있습니다. 궁정이 아버지를 어떻게 다뤘는지, 그리고 그 궁정에서 자기 몫을 어떻게 뜯어내야 하는지를 열여덟에 이미 몸으로 배웠습니다.

“하이든의 손에서 모차르트의 정신을”

1792년 11월, 스물한 살 베토벤은 다시 빈으로 떠납니다. 이번에는 본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출발을 앞두고 본의 후원자 발트슈타인 백작은 그의 방명록에 유명한 문장을 남겼습니다. “끊임없는 노력으로, 하이든의 손에서 모차르트의 정신을 받으라.” 모차르트는 그 열한 달 전에 세상을 떠났고, 하이든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이름난 작곡가였습니다.

덕담은 근사했지만 실제 수업은 삐걱거렸습니다. 하이든은 바빴고 제자의 숙제를 꼼꼼히 보지 않았으며, 베토벤도 그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결국 베토벤은 하이든에게 알리지 않고 다른 선생에게 대위법, 곧 여러 선율을 맞물려 쓰는 작곡법을 따로 배웠습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끝까지 서먹했지만, 베토벤은 피아노 소나타 세 곡(Op.2)을 하이든에게 헌정했습니다.

빈에서 베토벤은 작곡가이기 전에 피아니스트로 먼저 이름을 얻었습니다. 1795년 3월 29일 부르크테아터에서 자작 피아노 협주곡으로 공개 데뷔했지만, 그 전부터 이미 귀족 살롱에서는 소문난 연주자였습니다. 당시 빈 귀족 사회에서는 두 피아니스트를 마주 앉혀 놓고, 상대가 낸 주제로 그 자리에서 곡을 만들어 겨루는 즉흥연주 대결이 인기 있는 놀이였습니다. 베토벤은 이런 대결에서 좀처럼 지지 않았고, 패한 상대가 울면서 나갔다는 증언도 여럿 남아 있습니다.

베토벤이 어떻게 생계를 꾸렸는지도 여기서 짚어 두겠습니다. 그는 궁정이나 교회에 정규직으로 고용된 적이 없습니다. 대신 몇몇 귀족 후원자가 돈을 모아 그를 빈에 머물게 하는 방식이 자리 잡았습니다. 1809년, 루돌프 대공과 킨스키 공작과 로프코비츠 공후는 베토벤에게 연 4,000플로린을 종신 연금으로 지급하기로 계약합니다. 조건은 단 하나, 빈을 떠나지 말 것. 이 계약은 작곡가 개인을 도시의 중요한 자산으로 붙잡아 두려 했던 상징적인 사례였습니다.

빈이 먼저 알아본 베토벤은 작곡가보다 피아니스트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피아니스트로서의 기반이 가장 먼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서른한 살, 유서를 씁니다

귀가 이상해진 건 1798년 무렵부터입니다. 처음에는 이명이 찾아왔고, 조용한 소리부터 하나씩 사라졌습니다. 1801년에 그는 본의 옛 친구인 의사 프란츠 베겔러와 바이올리니스트 카를 아멘다에게 증상을 털어놓는 편지를 씁니다. 극장에서는 배우의 대사를 들으려고 오케스트라 바로 앞까지 나가 앉아야 했고, 멀리서 부는 목동의 피리 소리는 아예 들리지 않았습니다.

가장 무서운 대목은 베토벤이 이 사실을 숨겨야 했다는 점입니다. 피아니스트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난청은 생계와 평판을 동시에 흔드는 문제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무뚝뚝하다고 오해하도록 내버려 뒀습니다. 대화를 피한 이유가 성격이 아니라 들리지 않아서였다고 밝히는 순간, 음악가로서의 자리 자체가 위험해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1802년 여름, 그는 의사의 권유로 빈 외곽의 조용한 마을 하일리겐슈타트에 머무릅니다. 하지만 청력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해 10월 6일, 그는 두 동생 카를과 요한 앞으로 긴 편지를 씁니다. 이 동생 카를은 뒤에 나올 조카 카를의 아버지입니다. 부치지 않은 그 편지가 지금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라고 부르는 문서입니다.

1802년 하일리겐슈타트 유서 첫 페이지 필사본. 독일어 옛 필기체로 동생들에게 보내는 글이 적혀 있다
유서 첫 장. 맨 윗줄에 “나의 형제 카를과 [ ]에게”라고 적혀 있고 동생 요한의 이름 자리는 끝내 비워 두었다.

내용에는 변명과 고백과 유언이 뒤섞여 있습니다. 그는 왜 사람들을 피했는지, 남들이 누리는 것을 자신은 왜 누릴 수 없었는지 적었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을 진지하게 생각했다는 고백도 남겼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죽지 않았을까요. 답도 직접 써 두었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다 꺼내 놓기 전에는 세상을 떠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 문서를 서랍 깊숙이 넣어 두었습니다. 25년이 지난 1827년 3월 그가 죽자 비서 안톤 쉰들러와 친구 슈테판 폰 브로이닝이 유품에서 찾아냅니다. 이 문서는 그해 10월 활자로 공개되면서 베토벤 신화의 출발점이 됩니다.

그런데 유서를 쓰던 바로 그해에 그는 교향곡 2번 D장조를 끝냈어요. 밝고 활기찬 곡인데, 3악장에는 귀족들이 추던 우아한 춤곡 미뉴에트 대신 더 빠르고 거친 3박자 악장인 스케르초를 놓았습니다. 죽음을 적어 놓은 손과 그 음악을 쓴 손이 같습니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고통을 음악으로 승화했다”는 설명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베토벤의 음악은 그때그때의 상태를 그대로 적은 일기가 아니라, 절망 속에서도 따로 밀고 나간 작업이었습니다.

영웅의 시대 — 표지가 찢긴 교향곡

1803년부터 그의 곡은 갑자기 커집니다. 교향곡 3번 《영웅》은 그때까지 나온 어떤 교향곡보다 길었습니다.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교향곡이 대개 25분 안팎이었던 데 비해, 이 곡은 50분 가까이 이어집니다. 관객을 한 작품 앞에 한 시간 가까이 붙잡아 둔 셈입니다. 교향곡이 이렇게 긴 시간 동안 하나의 생각을 밀고 나갈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에는 새로운 시도였습니다.

표지 이야기는 제자 페르디난트 리스의 회고에 남아 있습니다. 원래 표지에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베토벤은 한때 나폴레옹을 혁명의 이상을 실현할 인물로 보았지만, 1804년 5월 그가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랐다는 소식을 리스가 전하자 크게 분노했다고 합니다. “그자도 결국 평범한 인간이었군!” 베토벤은 그렇게 외치고 표지를 찢어 바닥에 던졌습니다.

교향곡 3번 영웅의 필사 악보 표지. 보나파르트 헌정 문구가 지워지고 종이가 긁혀 나간 흔적이 남아 있다
필사 악보 표지. 헌정 문구가 있던 자리는 종이가 뚫릴 만큼 긁혀 나갔다.

1806년에 출판된 악보에는 이런 제목이 남았습니다. “신포니아 에로이카 — 한 위대한 인간의 추억을 기리기 위하여.” 나폴레옹이라는 특정한 이름은 빠졌고, 그 자리는 이름 없는 위인의 이미지가 대신 채웠습니다. 곡은 이미 그전에 무대에 올랐습니다. 사적 초연은 1804년 6월 9일 로프코비츠 공후의 저택에서, 공개 초연은 1805년 4월 7일 안 데어 빈 극장에서 열렸습니다.

이 시기 그는 무리한 공연도 벌입니다. 1808년 12월 22일, 안 데어 빈 극장에서 자기 신작만으로 네 시간짜리 연주회를 열었습니다. 교향곡 5번과 6번이 같은 날 초연됐고, 피아노 협주곡 4번, 미사 C장조 발췌, 콘서트 아리아 《아, 배신자여》, 마지막의 합창 환상곡까지 한꺼번에 올렸습니다. 12월 빈의 극장에는 난방이 없었고 리허설은 부족했습니다. 합창 환상곡은 연주 도중 무너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고, 관객은 얼어붙은 채 자리를 지켰습니다. 오늘날 가장 유명한 교향곡 두 곡이 세상에 처음 나온 자리는 그런 아수라장이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그는 오페라에도 매달립니다. 《피델리오》는 1805년 11월에 초연됐는데, 하필 프랑스군이 빈을 점령한 직후였습니다. 객석에 앉은 사람 대부분이 프랑스 장교였고 공연은 사흘 만에 내려갔습니다. 그는 이 작품을 1806년과 1814년에 두 번 더 뜯어고칩니다. 서곡만 네 개를 썼습니다. 평생 오페라를 딱 한 편 남긴 사람이, 그 한 편을 10년 동안 놓지 못한 셈입니다.

이 시기에 달라진 것은 길이만이 아니라 곡이 향하는 방향이었습니다. 그전까지 교향곡의 마지막 악장은 대개 분위기를 가볍게 정리하는 자리였습니다. 베토벤은 마지막 악장을 결론이 도착하는 장소로 바꿉니다. 5번에서 c단조의 어둠이 C장조의 밝은 소리로 뚫고 나오는 순간이 가장 또렷한 예입니다.

불멸의 연인, 그리고 텅 빈 10년

1812년 7월 6일과 7일, 보헤미아(지금의 체코 서부)의 온천 마을 테플리츠에서 그는 연필로 열 쪽짜리 편지를 씁니다. 받는 사람 이름이 없고 주소도 봉투도 없습니다. “나의 천사여”로 시작해 “영원히 그대의 것, 영원히 나의 것”으로 끝나는 이 편지가 죽은 뒤 유품에서 나옵니다. 보내지 않은 편지였습니다.

편지의 상대가 누구였는지는 200년이 넘도록 밝혀지지 않았고, 그사이 추측만 무성해져 후보로 지목된 인물만 늘어 갔습니다. 안토니 브렌타노가 가장 유력하게 꼽히지만 확정된 적은 없습니다.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본인 말고 아무도 몰랐으니까요. 다만 이 열 쪽짜리 편지를 한 줄씩 뜯어 읽어 보면, 그 여름 테플리츠에서 남은 단서가 어디까지 좁혀지는지는 보입니다.

편지 이후 베토벤은 곡 쓰는 속도가 눈에 띄게 떨어집니다. 1813년부터 몇 해 동안 그는 대작을 거의 내지 못합니다. 이유는 하나가 아닙니다. 후원자들이 잇따라 죽거나 파산하면서 안정적으로 받던 연금이 하나둘 끊겼고, 나폴레옹 전쟁으로 재정이 바닥난 오스트리아가 1811년 화폐 개혁을 단행하면서 갖고 있던 돈의 가치도 5분의 1로 떨어졌습니다.

결정적인 건 1815년 11월, 동생 카스파르 카를의 죽음입니다. 동생은 아홉 살 아들 카를을 남기며 유언장에 아내와 형이 공동 후견인이 되라고 적었습니다. 베토벤은 제수를 후견인 자리에서 밀어내기 위해 소송을 걸었고, 재판은 5년 동안 귀족 법정과 시민 법정을 오갔습니다. 그는 이름 앞의 ‘van’을 귀족 칭호처럼 내세웠지만, 귀족이 아님이 드러나자 사건은 시민 법정으로 내려갔습니다. 이 치열한 공방전이 5년 동안 어떻게 뒤집히고 또 뒤집혔는지를 보면, 베토벤이라는 사람의 고집과 집착이 소송 기록 속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같은 시기 베토벤은 청력이 나빠질 대로 나빠져 연주자로서는 다시 무대에 설 수 없게 됩니다. 1814년 4월, 피아노 삼중주 《대공》을 직접 연주한 뒤로 그는 다시 무대에서 피아노를 치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작곡가 루이 슈포어의 기록에 따르면, 피아노 조율이 심하게 어긋나 있었는데도 베토벤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소리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강한 대목에서는 건반을 부술 듯 내리쳐 현이 튀었고, 여린 대목에서는 소리가 아예 나지 않았습니다.

1818년 무렵에는 청력이 거의 남지 않아, 베토벤은 의사소통을 종이와 펜으로 하기 시작합니다. 방문객이 할 말을 공책에 적으면 베토벤이 목소리로 답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오늘날 ‘대화 수첩’이라 부르는 이 공책이 139권이나 남은 덕분에, 그가 무슨 커피를 마셨고 어떤 정치 이야기에 화를 냈는지까지 전해집니다. 세상에서 가장 잘 기록된 침묵입니다.

이 10년은 공백이 아니었습니다. 베토벤은 대작을 많이 내지 않았을 뿐 계속 작곡했고, 이 시기에 익힌 방식들이 곧 후기 양식으로 이어집니다. 32곡 피아노 소나타의 마지막 다섯 곡도 전부 이 구간에 걸쳐 있습니다. 스물일곱 해에 걸친 소나타 32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가 보면, 마지막 다섯 곡에서 형식과 소리가 왜 갑자기 달라지는지 더 분명해집니다.

9번, 그리고 “그래야만 하는가”

베토벤은 1822년 가을부터 교향곡 9번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고, 1824년 2월에 자필 악보를 마쳤습니다. 실러의 시 〈환희의 송가〉에 곡을 붙이겠다는 생각은 젊은 시절부터 거의 서른 해 동안 품고 있던 구상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구상을 교향곡 안에 어떻게 넣느냐였습니다. 교향곡에 사람 목소리를 들여보내는 일은 그때까지 거의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형식의 파격이었습니다. 4악장에서 바리톤은 “오 벗들이여, 이런 소리가 아니라”라고 노래하며 앞선 세 악장을 밀어냅니다. 자기 곡 안에서 자기 곡을 반박하게 만든 장치입니다.

초연은 1824년 5월 7일 빈 케른트너토어 극장에서 열렸습니다. 실제 지휘는 극장 지휘자 미하엘 움라우프가 맡았고, 베토벤은 무대에 서서 각 부분의 빠르기만 제시했습니다. 단원들은 미리 지시받은 대로 베토벤의 손이 아니라 움라우프를 봤습니다.

연주가 끝나고 객석에서는 큰 환호가 터졌지만, 베토벤은 계속 악보를 보고 있었습니다. 알토 성악가 카롤리네 웅거가 다가와 베토벤의 몸을 돌려 객석을 보게 했습니다. 그 순간에야 그는 사람들이 손수건과 모자를 흔드는 광경을 봤습니다. 다만 이 장면이 스케르초 직후였는지, 곡 전체가 끝난 뒤였는지는 증언마다 다릅니다. 이 곡이 30년의 구상 끝에 초연 무대까지 걸어온 길은 베토벤 말년의 승리와 불안을 함께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성공 뒤에 최악의 2년이 옵니다. 1826년 7월 29일, 열아홉 살 조카 카를은 시계를 전당포에 맡겨 돈을 마련하고 권총을 산 뒤 바덴 근교 라우엔슈타인 성터로 올라갑니다. 첫 발은 빗나갔고, 두 번째 총알이 관자놀이를 스쳤습니다. 다음 날 지나가던 마차꾼이 그를 발견했습니다. 카를이 데려다 달라고 한 곳은 삼촌 베토벤의 집이 아니라 어머니의 집이었습니다. 베토벤이 소송까지 벌이며 후견인 자리에서 밀어냈던 바로 그 제수의 집이었습니다.

그해 가을, 베토벤은 조카를 데리고 빈을 떠나 동생 요한의 시골 영지 그나이센도르프에 머무릅니다. 그곳에서 1826년 10월에 현악 사중주 16번 Op.135를 끝냅니다. 마지막 악장 악보 머리에 그는 이렇게 적어 두었습니다. “어렵게 내린 결심.” 느린 화음 위에는 “그래야만 하는가?”가 놓이고, 이어지는 빠른 주제 위에는 “그래야만 한다!”가 붙습니다.

이 문답의 출처를 두고는 다소 사소한 이야기가 따라다닙니다. 밀린 돈을 받으러 온 사람과 벌인 실랑이에서 나왔다는 설입니다. 어느 쪽이든 남은 것은 같습니다. 베토벤은 자기 삶의 마지막 완성작으로 남은 악장의 머리에 질문을 쓰고, 그 밑에 답을 적어 넣었습니다. 그가 정말로 마지막까지 손댄 작품은 이보다 조금 뒤, 현악 사중주 13번 Op.130에 새로 붙인 피날레였습니다.

1827년 3월 26일, 그리고 2023년

1826년 12월, 그나이센도르프에서 빈으로 돌아오던 그는 지붕 없는 마차를 탔고, 추위 속에서 하룻밤을 보냅니다. 이후 폐렴으로 병상에 누운 뒤 다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배에 찬 물을 빼내는 천자 시술도 네 차례 받았습니다. 죽기 직전 몇 달 동안은 조카 카를이 병상을 지켰고, 베토벤은 전 재산을 그 조카에게 남기는 유언을 씁니다.

1827년 3월 26일, 베토벤은 쉰여섯에 죽습니다. 사흘 뒤인 3월 29일, 알저그룬트의 교구 성당에서 장례가 열렸고 빈의 학교와 극장은 이날 모두 문을 닫았습니다. 목격자들이 전한 인파는 1만에서 3만 명까지 갈리지만 대개 약 2만 명으로 보는데, 당시 빈 구시가지 인구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숫자였습니다. 관 옆에는 훔멜이 섰고, 슈베르트와 체르니는 횃불을 들었습니다. 추도사는 극작가 프란츠 그릴파르처가 썼으며, 슈베르트는 그 이듬해 세상을 떠나 베토벤 옆에 묻힙니다.

1827년 3월 29일 빈 거리를 가득 메운 베토벤 장례 행렬을 그린 당대 그림
1827년 3월 29일의 장례 행렬을 그린 당대 그림. 관을 따라가는 사람보다 길에 선 사람이 훨씬 많다.

사인은 오랫동안 논쟁거리였습니다. 부검에서 간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는 기록은 있었지만, 왜 그렇게 됐는지는 오래도록 물음표로 남아 있었습니다. 중요한 단서는 2023년 3월 22일에 나옵니다. 국제 연구진은 진품으로 확인된 머리카락 다섯 타래를 분석해 베토벤의 게놈을 평균 24배 깊이로 읽어냈고, 그 결과를 학술지 《커런트 바이올로지》에 실었습니다.

결과는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베토벤에게는 간 질환에 취약해질 수 있는 유전적 소인이 있었고, 여기에 음주와 B형 간염 감염이라는 위험 요인이 겹쳤을 가능성이 제시됐습니다. 다만 연구진은 이 세 요인의 조합이 유력할 뿐 무엇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는 확정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둘째, 정작 그를 평생 괴롭힌 청력 상실의 유전적 원인은 찾지 못했습니다. 셋째, 아버지 쪽 계보 어딘가에서 기록과 다른 혈연이 섞여 든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베토벤은 자기 생년도 정확히 모른 채 살았고, 아버지 쪽 혈통마저 서류와 달랐습니다. 연구진은 2023년에야 그의 유전자를 읽어냈습니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면, 베토벤이 스스로 정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하나뿐입니다. 나이도 혈통도 청력도 그의 선택이 아니었지만, 악보 위에 남긴 선택만은 끝까지 그의 것이었습니다.

이 여덟 곡이면 그를 압니다

아래 여덟 곡은 시대순이 아니라 입문 순서에 가깝게 놓았습니다. 곡마다 해설 글을 따로 붙여 두었으니 끌리는 곡부터 들어가면 됩니다. 일단 하나 틀어 놓고 읽어 보세요.

교향곡 5번 c단조 Op.67

네 음으로 시작한 동기가 30분 동안 곡을 끌고 갑니다. 그 짧은 덩어리는 1악장 내내 형태를 바꿔 돌아오고, 3악장에서 저음으로 웅크렸다가, 4악장에서 C장조로 뚫고 나옵니다. 어두운 조성에서 밝은 조성으로 건너가는 이 설계는 이후 100년 동안 교향곡의 기본 문법이 됩니다. 베토벤이 이 네 음을 두고 “운명이 문을 두드린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는 비서 쉰들러가 전했습니다. 다만 쉰들러는 사후에 증언을 조작한 이력이 있어 학계에서 신뢰받지 못합니다. ‘운명’ 이야기 말고도 이 곡에는 벗겨 낼 신화가 두 개 더 있습니다.

가디너와 혁명과 낭만 오케스트라의 2016년 실황. 옛 악기로 연주해 관악기 소리가 훨씬 거칠게 튀어나온다.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 Op.27-2

1악장이 느리고 3악장이 폭발하는 구조입니다. 당시 소나타는 빠른 악장으로 문을 여는 게 상식이었으니, 순서를 뒤집은 셈입니다. 베토벤 본인이 붙인 부제는 “환상곡풍의 소나타”였고 달빛은 그의 말이 아닙니다. 작곡가가 죽고 5년쯤 지나 평론가 루트비히 렐슈타프가 1악장을 두고 호수의 달빛 같다고 쓴 게 굳었습니다. 남이 붙인 별명이 어떻게 곡 전체의 인상을 바꿔 놓았는지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바렌보임의 연주. 1악장을 느리게 끌지 않고 흘려보내서 3악장의 낙차가 더 크게 들린다.

교향곡 3번 《영웅》 Op.55

표지 이야기는 앞에서 했으니 이번엔 소리 이야기입니다. 1악장 첫머리에 서주가 없습니다. 화음 두 방이 전부이고 곧장 주제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2악장이 장송 행진곡입니다. 축하곡의 자리에 장례 음악을 놓은 이 배치가 곡 전체의 성격을 정합니다. 이 곡을 둘러싼 신화에는 뜯어볼 균열이 다섯 군데나 있습니다.

2악장 장송 행진곡을 들어 보면 이 곡이 왜 승리의 음악으로만 읽히지 않는지 알 수 있다.

교향곡 6번 《전원》 Op.68

5번과 같은 날 초연된 쌍둥이인데 성격은 정반대입니다. 악장마다 제목이 붙어 있고 4악장에서는 실제로 천둥이 칩니다. 새소리를 흉내 낸 대목이 분명히 있는데도 베토벤은 악보에 굳이 “그림보다 감정의 표현”이라고 적어 두었습니다. 베토벤이 왜 굳이 그렇게 못 박았는지를 알면 이 곡은 풍경 묘사보다 감정의 기록에 가깝게 들립니다.

4악장 폭풍이 5악장으로 넘어가며 잦아드는 이음매를 눈으로 확인하기 좋은 실황이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Op.73

협주곡은 보통 오케스트라가 먼저 나와 무대를 깔아 준 다음 독주자가 등장합니다. 이 곡은 첫 화음 직후 피아노가 바로 튀어나오며 그 순서를 뒤집습니다. 또 베토벤이 자기 협주곡을 직접 초연하지 못한 첫 사례이기도 합니다. 귀 때문이었습니다. 황제라는 이름도 그가 붙인 게 아닙니다. 그 이름이 어디서 왔는지부터가 이 곡의 별명과 수용사를 보여 주는 이야깃거리입니다.

길렐스는 이 곡을 화려하게 몰지 않는다. 2악장에서 손을 얼마나 덜 쓰는지 들어 볼 만하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Op.61

1806년 초연은 실패했습니다. 독주자가 악보를 받은 게 공연 직전이었습니다. 그래서 거의 초견으로 연주했다는 이야기가 따라다닙니다. 그 뒤 이 곡은 40년 가까이 묻혀 있다가 1844년에 열두 살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이 작곡가 멘델스존의 지휘로 살려냅니다. 팀파니 네 번으로 문을 여는 시작이 유명한데 그 리듬이 곡 전체를 관통합니다. 묻혀 있던 곡이 열두 살 소년의 활 끝에서 되살아난 과정은 그 자체로 극적입니다.

힐러리 한의 연주. 첫 팀파니 네 번이 이후 어디서 다시 나오는지 따라가며 들으면 다르게 들린다.

피아노 소나타 23번 《열정》 Op.57

1804년에서 1806년 사이, 그러니까 《영웅》과 같은 시기의 곡입니다. 열정이라는 이름은 출판사가 나중에 붙였습니다. 1악장과 3악장이 f단조로 몰아붙이고, 가운데 2악장만 조용한 변주로 숨을 돌립니다. 3악장은 끝에서 속도를 더 올립니다. 보통 마지막에 힘을 빼는 대신 더 밟는 구성입니다. 소나타 32곡의 지도 위에서 이 곡이 어디쯤 서 있는지를 알고 들으면 무게가 다르게 느껴집니다.

조성진의 1악장 실황. 첫 주제가 저음에서 올라오는 대목의 손 모양이 그대로 보인다.

교향곡 7번 A장조 Op.92

리듬 하나로 밀어붙이는 교향곡입니다. 특히 2악장은 같은 리듬 패턴을 반복하면서 악기를 하나씩 얹어 가는 방식인데, 초연 때 이 악장만 앙코르를 받았습니다. 바그너는 이 곡을 두고 춤의 신격화라고 불렀습니다. 그 표현도 이 리듬 때문에 나온 겁니다. 1813년 초연은 전쟁 부상병을 위한 자선 연주회였고 무대에 살리에리와 훔멜과 슈포어가 단원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이 리듬이 곡 전체를 어떻게 지배하는지가 7번을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2악장만 따로 들어도 좋다. 같은 리듬이 몇 번 반복되는지 세다 보면 어느새 끝나 있다.

교향곡 9번 《합창》 Op.125

이 글 맨 위에서 재생되는 영상이 바로 이 곡이니 따로 붙이지 않았습니다. 70분 넘는 곡이고 앞의 세 악장을 다 듣고 4악장에 도착해야 그 유명한 선율이 왜 그렇게 단순한 모양인지 이해됩니다. 실러의 시가 붙기 전에 낮은 현이 먼저 그 선율을 말없이 꺼내 보는 대목이 있습니다. 노래가 되기 전의 노래입니다. 그날 케른트너토어 극장에서 벌어진 일의 전말은 그것만으로 한 편 분량입니다.

그를 여는 네 개의 열쇠말

하나, 짧은 조각 하나로 밀고 가기. 모차르트가 아름다운 선율을 여러 갈래로 펼쳐 보이는 작곡가였다면, 베토벤은 짧은 조각 하나를 붙들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작곡가입니다. 교향곡 5번의 네 음이 가장 극단적인 예입니다. 이 방식 덕분에 그의 곡은 길어져도 쉽게 흩어지지 않습니다. 처음 듣는 곡이라도 첫 30초에 나온 짧은 조각을 기억해 두면 나머지가 훨씬 잘 들립니다.

둘, 스케르초. 고전주의 교향곡의 3악장은 원래 미뉴에트가 놓이던 자리였습니다. 베토벤은 이 자리에 스케르초를 적극적으로 들여놓았습니다. 둘 다 3박자 계열이지만, 스케르초는 속도가 더 빠르고 악센트가 예상 밖의 곳에 걸립니다. 궁정의 춤을 떠올리게 하던 악장이 긴장과 추진력을 만드는 악장으로 바뀐 것입니다.

셋, 커진 가운데 부분. 소나타 형식은 대체로 주제를 내놓는 제시부, 그 주제를 쪼개고 부딪치게 하는 발전부, 앞의 주제가 다시 돌아오는 재현부로 이루어집니다.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의 곡에서는 발전부가 비교적 짧은 편이었지만, 베토벤은 이 가운데 부분을 크게 늘렸습니다. 《영웅》 1악장에서는 발전부가 제시부보다 깁니다. 베토벤의 음악이 논쟁처럼 들린다면, 대개 이 발전부를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넷, 후기 양식. 1818년 이후의 곡들은 앞 시기와 결이 다릅니다. 푸가가 자주 나오고, 변주가 길어지고, 악장 사이의 경계도 흐려집니다. 어린 시절 네페를 통해 접한 바흐의 대위법이 말년에 다시 중요한 언어로 떠오른 셈입니다. 후기 현악 사중주들이 당대에 “미친 사람의 음악” 취급을 받은 이유이자, 20세기 작곡가들이 그 곡들을 교과서처럼 뜯어본 이유이기도 합니다.

베토벤은 언제부터 귀가 안 들렸습니까?

1798년 무렵부터 이명과 난청이 시작됐다고 봅니다. 1801년에는 친구 베겔러와 아멘다에게 증상을 적어 보냈고 1802년 하일리겐슈타트 유서에서 절망을 털어놓습니다. 완전히 듣지 못하게 된 시점은 1818년 전후로 봅니다. 이때부터 그는 방문객이 공책에 말을 적는 ‘대화 수첩’을 썼습니다. 무대에서 피아노를 친 마지막 공개 연주는 1814년 4월이었습니다.

교향곡 5번을 ‘운명’이라고 부른 사람은 누구입니까?

베토벤이 “운명이 문을 두드린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는 비서 안톤 쉰들러가 전했습니다. 다만 쉰들러가 베토벤 사후 대화 수첩을 위조하거나 없앤 사실이 훗날 밝혀져, 그의 증언은 신뢰도가 낮습니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만 작곡가 본인의 말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한국과 일본에서 쓰는 ‘운명 교향곡’이라는 제목은 서구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지 않습니다.

‘불멸의 연인’은 결국 누구입니까?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편지는 1812년 7월 6~7일 테플리츠에서 연필로 쓴 열 쪽짜리 문서이고 수신인 이름도 주소도 없이 사후 유품에서 나왔습니다. 안토니 브렌타노가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히지만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남아 있습니다. 다른 후보로 요제피네 브룬스비크 등이 거론됩니다.

베토벤은 어떤 곡을 몇 개나 썼습니까?

널리 세는 기준으로 교향곡 9곡, 피아노 소나타 32곡, 현악 사중주 16곡, 피아노 협주곡 5곡, 바이올린 협주곡 1곡, 오페라 1편(《피델리오》)입니다. 이 밖에 서곡·가곡·미사·실내악이 많습니다. 《피델리오》는 1805년 초연 후 1806년과 1814년에 개정되어 서곡만 네 개가 남았습니다.

베토벤의 사인은 무엇입니까?

1827년 3월 26일 빈에서 만 56세로 죽었고 직접 원인은 간 질환으로 봅니다. 2023년 3월 학술지 《커런트 바이올로지》에 실린 머리카락 게놈 분석은 간 질환에 걸리기 쉬운 유전적 소인과 B형 간염 감염 흔적을 확인했습니다. 다만 이 연구도 청력 상실의 유전적 원인은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참고 자료

이어서 듣기 — 베토벤 한 사람을 열두 갈래로

위에서 훑은 생애의 장면마다 이어 들을 곡이 하나씩 붙어 있습니다. 마음에 걸린 대목부터 골라 들으면 됩니다.

참고 자료

  • Beethoven-Haus Bonn, 디지털 아카이브·전기 자료 — beethoven.de
  • Beethoven-Haus Bonn, 《Beethoven’s Capital》(후원·연금·재정) — internet.beethoven.de
  • Staatsbibliothek zu Berlin, 대화 수첩(Konversationshefte) 소장 안내 — 현존 139권 — staatsbibliothek-berlin.de
  • Tristan Begg 외, 《Genomic analyses of hair from Ludwig van Beethoven》, Current Biology (2023) — cell.com
  • Max Planck Society, 베토벤 게놈 연구 해설(Johannes Krause) — mpg.de
  • Theodore Albrecht 편역, 《Beethoven’s Conversation Books》, Boydell Press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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