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도는 이야기 — 베토벤이 이름 모를 여인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 세 통을 남겼고, 그 여인이 누구인지는 끝내 아무도 못 밝혀냈다고들 합니다.
사실은 — 세 통이 아닙니다. 1812년 7월 6일 아침부터 7일 아침까지, 세 번에 나눠 쓴 열 장짜리 한 통입니다.
이 글에서는 — 원본에 실제로 적힌 것과 200년 동안 덧붙은 이야기를 한 줄씩 구분해 봅니다.
1827년 3월, 베토벤이 죽고 며칠 뒤였습니다. 비서 역할을 하던 안톤 쉰들러와 오랜 친구 슈테판 폰 브로이닝은 작곡가의 방을 정리하다가 옷장 서랍 하나를 열었습니다. 그 안에는 그림 몇 장과 돈, 그리고 종이 두 뭉치가 있었습니다. 한 뭉치는 1802년에 동생들 앞으로 쓴 유서였습니다. 베토벤이 귀가 멀어 간다는 사실을 처음 종이에 적었고, 나중에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라 불리게 되는 바로 그 원고입니다.
문제는 다른 뭉치였습니다. 연필로 급하게 눌러쓴 작은 종이 열 장. 받는 사람 이름도, 봉투도, 주소도, 우표 자국도 없었습니다. 첫 줄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의 천사, 나의 전부, 나 자신.” 마지막 줄은 이렇습니다. “영원히 그대의, 영원히 나의, 영원히 우리의.”
이 열 장은 그 뒤로 200년 동안 클래식 음악사에서 가장 오래 논쟁된 수수께끼 가운데 하나가 됐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한국어로 옮겨질 때마다 첫 문장부터 자주 어긋납니다. 흔히 “부치지 못한 세 통의 편지”라고 부르지만, 베를린에 실물로 남아 있는 원본은 세 통이 아닙니다. 사소해 보이는 이 오차는 사람들이 200년 동안 원본의 형태보다 전설처럼 굳어진 설명을 먼저 읽어 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여기까지는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확인된 사실 편지는 지금도 실물로 남아 있습니다. 베를린 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청구기호는 Mus. ep. autogr. Beethoven 127입니다. 누구든 도서관 목록에서 찾아볼 수 있는 번호입니다.[1]
먼저 편지 자체를 보겠습니다. 잉크가 아니라 연필로 썼고, 작은 종이 열 장에 급한 글씨가 이어집니다. 베토벤은 평소 편지를 잉크로 썼지만, 여행 중이거나 책상이 없을 때는 연필을 꺼내 쓰곤 했습니다. 연필이라는 단서만 봐도 한 가지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지금 자기 집에 있지 않습니다.
편지 안에는 날짜가 있습니다. 하지만 절반뿐입니다. 베토벤은 “7월 6일”이라고만 적었고, 연도와 장소는 남기지 않았습니다. 편지를 받을 사람이라면 그게 몇 년, 어디에서 쓴 편지인지 당연히 알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200년 뒤에 낯선 사람들이 이 편지를 읽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미제 사건의 절반은 여기서 시작됐습니다.
남은 절반은 이름입니다. 편지 열 장 어디에도 받는 사람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나의 천사”, “나의 전부”, “그대” 같은 말만 반복됩니다. 그러다 마지막 부분에 딱 한 번, 베토벤이 평생 다른 어디에도 쓴 적 없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unsterbliche Geliebte — 불멸의 연인. 훗날 사람들은 이 한마디를 편지의 이름으로 삼았습니다. 편지 안에서 스쳐 지나간 단어가 200년짜리 제목이 된 겁니다.
받는 사람 이름이 비어 있는 편지는, 읽는 사람이 저마다 답을 채워 넣는 빈칸이 됩니다. 이 글의 나머지는 사람들이 그 빈칸에 무엇을 넣어 왔는지를 따라가는 이야기입니다.

세 통이 아니라, 세 번 나눠 쓴 한 통
확인된 사실 원고에는 시각 표시가 세 번 나옵니다. 순서대로 “7월 6일 아침”, “월요일 저녁 7월 6일”, “좋은 아침, 7월 7일”입니다.[2] 그러니까 편지 세 통이 아니라, 한 통을 세 번에 나눠 쓴 것입니다.
차이가 사소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세 통이라면 세 번 부치려다 세 번 실패한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나 한 통이라면 장면이 달라집니다. 남자는 아침에 쓰다 멈추고, 저녁에 다시 펴서 이어 쓰고, 다음 날 아침 침대에서 또 이어 씁니다. 꼬박 하루 동안 그 종이에서 손을 떼지 못한 셈입니다.
세 대목의 온도도 다릅니다. 아침 대목은 비교적 사무적입니다. 그는 먼저 여행 이야기를 꺼냅니다. 길이 끔찍해서 마차가 망가졌고, 마부 두 명과 말 네 마리를 붙여 겨우 도착했다는 내용입니다. 그러고는 에스터하지 공작도 평소 다니는 큰길로 말 여덟 마리를 몰고 왔는데 자기와 똑같은 일을 겪었다고 덧붙입니다. 사랑 고백 한복판에 굳이 이런 이야기를 적어 넣는 사람입니다. 말 네 마리로 귀족의 여덟 마리와 같은 고생을 했다는 사실이 어지간히 자랑스러웠던 모양입니다.
저녁 대목에 이르면 문장이 흐트러집니다. “그대는 괴로워하고 있습니다”로 시작해, 두 사람이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7월 7일 아침, 그는 다시 씁니다. “침대에 누웠는데 벌써 생각이 그대에게 달려갑니다, 나의 불멸의 연인.” 훗날 이 편지를 부르는 이름이 된 표현이 여기서 나옵니다. 자다 깨서 눈을 뜨자마자 이어 쓴 문장입니다.
연도는 어떻게 알아냈을까요
연도가 적혀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학자들은 먼저 종이 자체를 살폈습니다. 1950년대부터는 워터마크를 대조했습니다. 워터마크는 종이를 만들 때 생기는 제조사 무늬로, 같은 묶음에서 나온 종이에는 같은 무늬가 남습니다. 이 편지의 무늬는 1812년 여름 베토벤이 쓴 다른 편지들의 종이와 맞아떨어졌습니다.[1]
둘째 근거는 편지 안에 있었습니다. 베토벤은 편지에서 에스터하지 공작을 언급했는데, 실제로 공작이 그해 여름 테플리체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셋째 근거는 달력이었습니다. 베토벤은 편지의 두 번째 부분에 “월요일 7월 6일”이라고 적었습니다. 7월 6일이 월요일이었던 해를 찾으면 후보가 크게 줄어들고, 1812년이 그 조건에 맞습니다.
결론은 1812년 7월 6~7일, 보헤미아의 온천 마을 테플리체입니다. 보헤미아는 오늘날 체코 서부에 해당하고, 테플리체는 현재 체코 북서부에 있는 도시입니다. 편지 속 에스터하지 언급과 무심코 적은 요일 하나가 연대 측정의 실마리가 됐습니다.
날짜가 잡히자 그 전후의 일정도 중요해졌습니다. 베토벤은 7월 14일에 작가 라헬 파른하겐에게 편지를 씁니다. 프라하에서 마지막 저녁을 함께 보내지 못해 미안하다, 스스로도 무례하다고 생각했지만 미리 알 수 없던 사정이 생겼다는 내용입니다.[1] 그 마지막 저녁은 7월 3일이었습니다. 약속을 깨게 만든 그 “사정”이 무엇이었는지는 편지에 적혀 있지 않습니다. 사흘 뒤 베토벤은 테플리체에서 연필을 꺼냅니다.
부치지 못한 게 아니라, 부치려던 편지였습니다
확인된 사실 편지 안에는 우편 사정이 그대로 적혀 있습니다. 베토벤은 여기서 “K.”로 가는 우편이 특정 요일에만 나간다고 썼고, 학자들은 이 “K.”를 카를스바트로 읽습니다.[2]
이 한 문장에서는 세 가지가 드러납니다. 첫째, 상대는 테플리체가 아니라 편지를 부쳐야 닿는 거리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둘째, 베토벤은 그 거리와 우편 일정을 이미 알아본 상태였습니다. 셋째, 그가 아침에 급히 연필을 움직인 이유도 여기서 설명됩니다. 우편 마감에 맞춰 편지를 보내려 했던 겁니다.
그래서 “부치지 못한 편지”라는 표현도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이 편지는 처음부터 부칠 마음이 없었던 글이 아니라, 부치려고 요일까지 확인한 사람이 쓴 글입니다. 다만 지금 확인되는 것은 열 장의 편지가 봉투도 없이 서랍에 남았다는 사실뿐입니다. 도중에 마음을 접었는지, 쓴 뒤 따로 옮겨 적어 부치고 원본만 남겼는지, 아니면 만나서 직접 말했는지는 편지만으로 알 수 없습니다.
확실한 건 하나입니다. 15년 뒤 베토벤이 죽었을 때, 이 열 장은 그가 평생 숨긴 유서 옆에 놓여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도 쉽게 보일 수 없는 두 문서를 같은 서랍에 넣어 둔 채, 그는 15년을 더 살았습니다.
가장 많이 읽힌 대목은 지워진 두 줄입니다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는 연필로 여러 번 덧그었다가 지운 자리가 있습니다. 지우고 또 지우는 사이 종이가 눌린 흔적입니다. 그 아래로 겨우 읽히는 말은 이렇습니다. “이제 자러 가야 합니다 — 오, 나와 함께 가 줘요, 나와 함께 가 줘요.”
해석 연구자들이 이 두 줄에 매달리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편지 전체에서 베토벤이 유일하게 지우려 한 문장이 하필 이 문장이라서입니다. 두 사람의 관계가 마음에만 머문 게 아니었다고 보는 쪽은 이 지워진 자리를 가장 강한 근거로 듭니다.[1]
물론 이것은 읽는 사람의 판단이지, 편지가 직접 말해 주는 사실은 아닙니다. 베토벤이 왜 그 문장을 지웠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부끄러워서였는지,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는지, 상대가 읽고 곤란해질까 봐서였는지도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다만 200년 동안 가장 많이 확대되고 가장 많이 인용된 대목이 베토벤이 보이지 않게 하려 했던 두 줄이라는 점은 기억해 둘 만합니다.
이야기가 눈덩이처럼 커진 순간
설(說) 편지를 처음 세상에 꺼낸 사람은 안톤 쉰들러였습니다. 그는 10년 넘게 편지를 보관하다가 1840년에 낸 베토벤 전기에서 그 상대를 줄리에타 귀차르디라고 못 박았습니다. 베토벤이 〈월광〉 소나타를 헌정한 바로 그 백작 영애입니다.
지금 이 주장을 지지하는 학자는 사실상 없습니다. 줄리에타는 편지가 쓰이기 여러 해 전에 이미 베토벤의 삶에서 멀어졌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 이탈리아에 살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줄리에타 귀차르디라고 부르는 이름도 실제로는 이탈리아식 줄리에타가 아니라 독일식 율리에였습니다. 베토벤이 헌정사를 이탈리아어로 쓰며 적은 이름이 그대로 굳어 200년 동안 통용된 셈입니다.[1] 쉰들러가 왜 그렇게 썼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다만 그가 베토벤 관련 기록을 손댄 정황은 이후 여러 건 드러났습니다.

이야기를 키운 또 한 사람은 작가 베티나 폰 아르님입니다. 베티나는 1812년 테플리체에 있었고, 베토벤과 괴테의 첫 만남을 주선했다고 알려졌습니다. 나중에는 본인도 불멸의 연인 후보로 거론됐습니다. 문제는 그녀가 남긴 기록의 신뢰도입니다. 학계에서는 베티나가 펴낸 《괴테와 한 아이의 서신》 상당 부분을 꾸며낸 내용으로 봅니다.
동시대 사람들도 이미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외교관 카를 아우구스트 파른하겐은 1856년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베티나는 베토벤이 자기를 사랑했고 결혼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죄다 거품이고 꿈이다.”[5] 참고로 베티나는 1811년에 이미 결혼한 상태였습니다.
설(說) 베토벤 일화 중 가장 유명한 장면도 베티나에게서 나왔습니다. 테플리체 길에서 황족 일행과 마주치자 괴테는 모자를 벗고 옆으로 비켜섰는데, 베토벤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그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베토벤이 나중에 괴테에게 “당신은 저들에게 예를 너무 차렸다”고 말했다는 대목까지 덧붙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여러 번 그림으로 그려졌고 교과서에도 실렸습니다. 하지만 확인할 수 있는 근거는 베티나의 편지 두 통뿐입니다. 괴테도, 베토벤도, 그 자리에 있었다는 신하들도 이 일을 평생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베티나가 이 일화를 책으로 펴낸 때도 1835년, 사건이 있었다는 여름에서 23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장면이 매력적일수록 사람들 입을 거치며 더 그럴듯한 이야기로 다듬어지기 쉽습니다.
전문가들이 한꺼번에 속은 적도 있습니다
1911년, 독일 음악잡지 《디무지크》에 베토벤의 미공개 편지 한 통이 실립니다. 편집진은 원고를 여러 전문가에게 따로 보내 감정을 맡길 만큼 조심스럽게 접근했습니다. 전문가들은 서로 상의하지 않았지만 모두 진품이라고 답했습니다.
하지만 그 편지는 가짜였습니다. 그 잡지에 글을 쓰던 파울 베커가 직접 꾸며 낸 편지였고, 영국 평론가 어니스트 뉴먼이 그해 안에 정체를 밝혀냈습니다. 얼마 뒤 베커 본인도 자신이 꾸민 일이라고 자백했습니다.[1]
더 중요한 대목은 그다음입니다. 위조자가 자백한 뒤에도 여러 베토벤 연구자는 편지가 가짜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신문과 학술지에는 그 편지가 의심할 여지 없는 진품이라는 글이 계속 실렸습니다. 마침 줄리에타 설이 힘을 잃어 가던 시기였고, 그 편지는 그 설을 다시 떠받칠 만한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결론을 먼저 정해 두면, 전문가의 감정도 그 결론에 맞춰 흔들릴 수 있습니다.
전문가들도 여기서 갈립니다
해석 지금 학계에서 유력하게 거론되는 후보는 사실상 둘입니다. 안토니에 브렌타노와 요제피네 브룬스비크입니다. 어느 쪽에도 결정적 증거는 없고 남아 있는 것은 정황뿐이지만, 그 정황이 양쪽 모두 꽤 그럴듯합니다. 그래서 논쟁이 끝나지 않습니다.
안토니에 설을 가장 설득력 있게 제기한 사람은 미국의 베토벤 전기 작가 메이너드 솔로몬입니다. 그는 1972년 논문에서 이 가능성을 처음 제기했고, 1977년 전기에서 본격적으로 다뤘습니다. 핵심 근거는 온천 마을의 숙박 기록이었습니다. 당시 온천 마을은 방문객 명단을 만들어 관리했는데, 그 기록에 따르면 안토니에 부부는 1812년 7월 3일 프라하에 도착한 뒤 곧 카를스바트로 향했습니다. 베토벤도 같은 날 프라하에 있었고, 편지 속 “K.”도 카를스바트로 읽을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의 동선이 맞아떨어지는 셈입니다.

두 사람이 가까웠던 것은 분명합니다. 안토니에는 1809년 빈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유품과 방 마흔 개짜리 저택의 미술품을 정리하느라 3년을 머물렀고, 베토벤은 그 집을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안토니에가 아플 때 베토벤이 옆방에서 피아노를 쳐 주고 말없이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이때 전해집니다. 베토벤은 어린 딸 막시밀리아네에게 짤막한 피아노 삼중주를 써 주며 “내 어린 친구가 피아노를 더 즐기기를”이라는 쪽지도 붙였습니다.[4]
약점도 뚜렷합니다. 안토니에는 남편 프란츠와 여섯 아이가 있는 기혼 여성이었고, 두 사람 사이에 연애가 있었다고 보여 주는 문서는 한 장도 없습니다. 남아 있는 것은 정중한 친구 사이의 편지뿐입니다. 솔로몬 본인도 절대적 확실성은 없다고 못 박았습니다. 반대편에서는 그가 처음부터 안토니에에게 유리한 조건을 세워 놓고 후보를 걸렀다는 비판이 나옵니다.
해석 요제피네 쪽은 다른 종류의 증거를 제시합니다. 이 경우에는 두 사람 사이에 연애 감정이 오갔다는 사실이 문서로 확인됩니다. 베토벤이 요제피네에게 보낸 연애편지 열세 통이 1957년에야 한꺼번에 공개됐고, 그 뒤 추가 자료가 나오면서 지금 확인된 편지만 열다섯 통이 넘습니다.[3] 쉰들러가 1840년에 줄리에타를 지목했을 때는 아무도 이 편지들의 존재를 몰랐던 겁니다.

편지의 어휘도 겹칩니다. 1812년 편지의 “그대 — 그대 — 나의 전부, 나의 행복” 같은 표현은 1804~1809년 요제피네에게 쓴 편지에도 이미 나옵니다. 베토벤이 요제피네를 부르던 호칭도 “나의 유일한 연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둘은 결혼할 수 없었습니다. 요제피네는 백작 미망인이었고 베토벤은 작위가 없는 평민이었습니다. 당시 법으로는 귀족 여성이 평민과 재혼하면 앞선 결혼에서 낳은 귀족 자녀의 후견권을 잃었습니다. 요제피네가 1806년 겨울에 베토벤에게 보낸 답장에도 그 사정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당신의 청을 들어주려면 저는 신성한 끈을 끊어야 합니다. 믿어 주세요, 의무를 다하느라 가장 괴로운 사람은 저입니다.”[3] 베토벤을 택하려면 아이들을 잃어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1812년 여름의 요제피네는 더 불안한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두 번째 남편 슈타켈베르크 남작과의 결혼은 이미 파탄이 나 있었고, 무리한 영지 매입 실패로 재산도 크게 줄어든 뒤였습니다. 오스트리아 음악학자 리타 슈테블린이 2000년대에 찾아낸 문서를 보면 남작은 그해 7월 전반부에 집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요제피네는 6월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프라하에서 리베르트를 만나고 싶다. 아이들은 절대 내주지 않겠다.”[3]
다만 여기서 멈춰야 합니다. 프라하에 가려 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실제로 갔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요제피네와 남편의 일기는 1812년 6월에 뚝 끊겼다가 두 달 뒤에야 다시 이어집니다. 하필 가장 궁금한 몇 주가 통째로 비어 있는 셈입니다. 어느 쪽도 우세를 선언할 만큼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고, 영어권 학계는 대체로 솔로몬의 안토니에 설에 무게를 두면서도 확정된 결론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후보가 아홉 명까지 늘어난 과정
지금은 유력 후보가 둘로 좁혀졌지만, 한때는 훨씬 많은 이름이 거론됐습니다. 줄리에타 귀차르디, 요제피네의 언니 테레제 브룬스비크, 가수 아말리에 제발트, 피아니스트 도로테아 폰 에르트만, 테레제 말파티, 에르되디 백작부인, 베티나 폰 아르님, 동생의 아내 요한나까지 후보 명단은 아홉 명 안팎으로 불어났습니다.[1]
후보가 새로 등장하는 방식은 대체로 비슷했습니다. 연구자가 새 자료를 발굴해 그 안에서 베토벤을 흠모하는 문장을 찾고, 그 여성이 1812년 여름 당시 보헤미아, 오늘날 체코 서부에 해당하는 지역 어딘가에 있었다는 기록까지 붙이면 새 후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음 연구자가 이동 경로와 날짜를 다시 맞춰 보면 많은 주장이 오래 버티지 못했습니다. 아말리에 제발트는 7월 초 프라하에 없었던 것으로 확인돼 탈락했고, 테레제 브룬스비크는 일기 속 “루이”가 베토벤이 아니라 미가치 백작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며 후보군에서 정리됐습니다.
1954년에는 특히 무리한 주장도 나왔습니다. 정신분석학자 에디타·리하르트 슈테르바 부부는 불멸의 연인이 여성이 아니라 베토벤의 조카 카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편지가 쓰인 1812년에 카를은 여섯 살이었습니다. 편지의 연애적 언어와 실제 수신인 조건을 함께 보면, 이 주장은 자료 해석이라기보다 정신분석 이론을 편지에 강하게 대입한 사례에 가깝습니다.
결국 200년 동안 또렷하게 늘어난 것은 결정적 증거가 아니라, 편지의 수신인으로 거론된 후보들의 목록이었습니다.
미노나라는 이름 하나가 남긴 것
이 논쟁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날짜가 있습니다. 요제피네의 딸 미노나는 1813년 4월 8일에 태어났습니다. 1812년 7월로부터 대략 아홉 달 뒤입니다.
아홉 달이라는 간격은 눈에 확 들어오지만, 그것만으로 결론을 낼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뒤에 벌어진 일들은 묘합니다. 1812년 8월, 요제피네는 별거 중이던 남편과 새 계약서를 씁니다. 아이들의 후견권을 지키는 대신, 남편이 언제든 자신을 떠날 수 있다는 조항을 받아들인 문서였습니다. 슈타켈베르크는 미노나가 태어나자 실제로 떠났습니다.[3]
설(說) 그 딸의 이름을 두고도 이야기가 하나 붙어 있습니다. 미노나(Minona)를 거꾸로 읽으면 ‘아노님(anonim)’, 곧 익명이 된다는 말입니다. 다만 요제피네가 그것을 의도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우연한 철자 놀이에 200년 뒤 사람들이 의미를 덧붙인 쪽에 가깝습니다.
정작 요제피네의 말년은 낭만적으로 포장할 구석이 없습니다. 1814년에 슈타켈베르크가 경찰을 대동하고 와 어린 세 딸을 데려갔고, 요제피네는 그 뒤로 아이들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요제피네는 빚과 병에 시달리다 1821년 3월 31일, 마흔둘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같은 해 베토벤은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 두 곡을 쓰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놓지 못한 이유
받는 사람의 이름이 비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빈칸은 누구든 자기 해석으로 채울 수 있었습니다. 쉰들러는 줄리에타를 후보로 내세웠고, 베티나는 자기 자신을 떠올리게 할 여지를 남겼습니다. 그렇게 해석이 덧붙으면서 그 뒤 100년 동안 후보는 아홉 명까지 늘었습니다.
이 빈칸은 19세기가 그려 낸 베토벤의 초상과도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귀가 멀어 가면서도 인류를 위한 음악을 쓴 고독한 영웅, 그러나 세속의 사랑만은 이루지 못한 남자. 여기에 이름 없는 연인 한 사람을 더하면 이야기는 완성됩니다. 문제는 그 이야기를 완성한 쪽이 편지가 아니라, 편지를 읽는 사람들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설(說) 1994년 영화 〈불멸의 연인〉은 전혀 다른 답을 제시했습니다. 상대가 동생의 아내 요한나였다는 설정입니다. 각본가가 만든 이야기이고, 이 설을 지지하는 학자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한국에서 이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는 데에는 이 영화의 영향이 컸습니다.
덧붙이자면 그해 여름의 베토벤은 실연에만 잠긴 사람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7월 19일에는 괴테를 처음 만나 며칠간 어울렸고, 그 여름 교향곡 8번을 쓰기 시작해 10월에 완성했습니다. 이 곡은 베토벤의 아홉 교향곡 가운데 가장 짧고, 유난히 밝고 장난기 있는 작품입니다. 그 편지를 쓴 뒤 몇 주 지나지 않아, 베토벤은 전혀 다른 표정의 음악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 여름의 소리를 직접 들어 보면
편지가 쓰인 1812년 전후, 베토벤이 붙들고 있던 곡은 교향곡 7번이었습니다. 그해 봄에 완성한 이 곡은 이듬해 초연에서 관객이 2악장을 다시 들려 달라고 요구할 만큼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리듬 하나가 곡 전체를 밀고 가는 힘이 워낙 뚜렷해서, 훗날 바그너는 이 곡을 ‘춤’에 비유했습니다. 글 맨 위에 걸어 둔 전곡 영상도 이 작품이니, 2악장부터 틀어 놓고 읽어도 좋습니다.
편지를 쓴 바로 그 여름에 착수한 곡은 교향곡 8번입니다. 이 곡은 짧고 빠른 데다 곳곳에 장난기가 숨어 있습니다. 2악장에서는 목관이 똑딱거리는 짧은 스타카토를 계속 깔고, 3악장에서는 호른과 클라리넷이 서로 박자를 놓친 듯 어긋나며 들어옵니다. 그래서 이 음악만 놓고 들으면, 같은 시기에 깊은 상심을 겪은 사람이 쓴 곡이라고 단정하기가 어렵습니다.
편지의 정서와 더 가까운 곡은 따로 있습니다. 1816년에 쓴 연가곡 〈멀리 있는 연인에게〉입니다. 연가곡은 여러 노래를 하나의 이야기처럼 엮어 놓은 묶음을 말합니다. 이 작품에서는 여섯 곡이 쉬지 않고 이어지며,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있는 사람에게 노래를 부쳐 보내는 남자의 독백이 펼쳐집니다. 마지막 곡에서 그는 이 노래들을 받아 달라고, 그대가 다시 부르는 순간 우리 사이의 거리가 사라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편지를 알고 들으면, 이 마지막 곡의 바람이 조금 더 무겁게 들립니다.
빈칸이 만든 다른 이야기들
먼저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입니다. 쉰들러가 불멸의 연인으로 지목한 줄리에타 귀차르디에게 헌정된 곡이고, 그 지목의 근거도 사실상 이 헌정 하나였습니다. 헌정 당시 줄리에타는 베토벤의 제자였고 나이는 열일곱이었습니다. 지금은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는 설이지만, 곡은 남았습니다. 수신인이 비어 있던 편지 하나가 어떻게 한 작품의 이야기까지 바꾸었는지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다음은 교향곡 5번입니다. 편지와 직접 관련은 없지만, 기록의 빈틈을 후대의 말이 채우면 어떤 신화가 만들어지는지 보여 주는 또 다른 사례입니다. 베토벤은 그 유명한 네 음을 두고 “운명이 문을 두드린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 말을 처음 전한 사람도 쉰들러였습니다. 같은 사람이 비슷한 방식으로 두 개의 신화를 만들었고, 두 이야기는 모두 200년 가까이 살아남았습니다.
참고 자료
- [1] Wikipedia (영어) — Immortal Beloved (원본 물성·연대 확정·후보사·1911년 위조 사건) ↩
- [2] Wikipedia (독일어) — Unsterbliche Geliebte (원문 3부 구성·소장 이력) ↩
- [3] Wikipedia (영어) — Josephine Brunsvik (13통 공개·후견권·슈테블린 연구·미노나 출생) ↩
- [4] Wikipedia (영어) — Antonie Brentano (솔로몬 설과 반론·헌정 이력) ↩
- [5] Wikipedia (영어) — Bettina von Arnim (테플리체 일화의 출처 문제·파른하겐 일기) ↩
이어서 듣기 — 편지가 남긴 소리들
편지 한 통에서 이어지는 추천 글을 모았습니다. 같은 여름에 시작된 곡, 같은 오해 속에 놓였던 곡, 그리고 편지로만 관계를 이어 간 다른 음악가들의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