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과 조카 카를 — 10년을 끈 양육권 전쟁, 그리고 방아쇠

형수를 '밤의 여왕'이라 부른 편지. 그리고 저당 잡힌 시계 한 개로 산 권총 두 자루.

작곡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사건
조카 카를의 후견권 소송
당사자
베토벤(당시 45~50세)
형수 요한나 판 베토벤(1786~1869)
조카 카를 판 베토벤(1806~1858)
발단
1815년 11월 15일, 동생 카스파어 카를 판 베토벤 사망
소송 기간
1815년 ~ 1820년 (약 5년)
거쳐 간 법원
란트레히테(귀족 법원)빈 마기스트라트(시민 법원)항소법원
결말
1820년 4월 8일 베토벤 최종 승소
1826년 7월 카를 자살 시도, 생존
같은 시기의 작품
《미사 솔렘니스》(1819~1823)
교향곡 9번 ‘합창'(1822~1824)
1차 기록
유언장과 부기, 법원 판결문, 대화 수첩 139권

떠도는 이야기 — 병으로 죽은 동생을 대신해, 술과 추문에 찌든 형수에게서 어린 조카를 구해내 헌신적으로 키운 자상한 삼촌. 베토벤의 인간적인 한 장면으로 자주 소개되는 이야기입니다.

사실은 — 그 ‘구출’은 법정을 다섯 해 오르내린 소송이었고, 아이는 삼촌의 관리 아래 열아홉에 자기 머리에 권총을 겨눴습니다.

이 글에서는 — 어디까지가 헌신이고 어디부터 집착이었는지, 유언장과 판결문과 편지를 날짜순으로 놓고 하나씩 가려봅니다.

1826년 7월 29일, 빈에 살던 열아홉 살 청년이 시계를 저당 잡혔습니다. 그 돈으로 산 물건은 권총이었습니다. 며칠 전에 이미 한 자루를 사뒀으니, 이걸로 두 자루가 됐습니다.

다음 날 청년은 빈에서 남쪽으로 30킬로미터쯤 떨어진 온천 마을 바덴, 라우헨슈타인 성의 무너진 담벼락으로 올라갔습니다. 두 자루에 화약을 채우고 첫 번째 총구를 머리에 댔습니다. 첫 발은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두 번째 발은 관자놀이를 스쳤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이튿날 지나가던 마차꾼이 피투성이 청년을 발견했습니다. 마차꾼이 어디로 데려다주면 되겠느냐고 묻자, 청년이 댄 주소는 삼촌 집이 아니라 어머니 집이었습니다. 청년의 이름은 카를 판 베토벤. 삼촌의 이름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입니다. 나중에 경찰이 이유를 묻자 카를은 짧게 답했습니다. “삼촌이 나를 너무 괴롭혔다.”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였습니다. “삼촌이 나를 더 낫게 만들려 할수록, 나는 더 나빠졌다.”

국내에 널리 퍼진 이야기는 정반대입니다. 위대한 작곡가가 자상한 삼촌이 되어, 몹쓸 형수에게서 어린 조카를 구해 품에 안았다는 그림. 따뜻하고, 기억하기도 쉽습니다. 그런데 그 ‘구출’ 서사의 끝에 왜 총성이 있을까요? 유언장과 판결문을 날짜순으로 늘어놓고 보면, ‘구출’보다 ‘어머니에게서 떼어낸 일’에 가까운 장면이 자꾸 나옵니다.

바덴의 라우헨슈타인 성 폐허를 그린 19세기 소묘
바덴의 라우헨슈타인 성 폐허. 카를이 방아쇠를 당긴 곳이 이 언덕 어디쯤이었다.
붉은 스카프를 두르고 미사 솔렘니스 악보를 든 베토벤 초상, 요제프 카를 슈틸러 1820년경
1820년의 베토벤. 손에 든 건 《미사 솔렘니스》 악보다. 이 초상을 그리던 해에 그는 형수와의 소송에서 최종 승소했다.

죽어가는 동생이 마지막으로 쓴 한 줄

확인된 사실 1815년 11월 15일, 베토벤의 동생 카스파어 카를 판 베토벤이 결핵으로 죽었습니다. 앓기 시작한 건 3년 전인 1812년부터입니다. 죽기 하루 전인 11월 14일, 그는 유언장을 작성해 외아들 카를의 후견인으로 형 루트비히를 지목했습니다. 원래 문장에는 “아내와 함께”라는 말과 “공동”이라는 말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두 마디를 지운 사람은 베토벤 자신입니다. 훗날 그는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아이의 교육처럼 중요한 문제에서 그런 나쁜 여자와 묶이고 싶지 않았기에, 동생에게 그렇게 하도록 시켰다.” 죽어가는 동생의 유언장에서, 형이 동생을 시켜 아내를 지운 셈입니다.

그런데 같은 날, 동생은 유언장에 짧은 부기를 덧붙여 아내 요한나를 공동 후견인 자리로 되돌려 놨습니다. 형이 지운 문장을 동생이 다시 적어 넣은 셈입니다. 부기에 남은 문장은 유언이라기보다 애원에 가깝습니다.

“내 형과 아내 사이에는 화합이 없다. 아이의 행복을 위해 신께서 두 사람에게 화합을 허락하시기를. 이것이 죽어가는 남편이자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이다.”

그 소원은 하루도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 카를은 아홉 살이었습니다. 1806년 9월 4일생, 외아들. 그리고 아버지가 묻힌 지 며칠 만에 아이는 어른들의 재판 서류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카를 판 베토벤으로 알려진 젊은 남성의 19세기 초상
삼촌과 어머니가 다섯 해를 다툰 그 아이, 카를 판 베토벤. 뒷날 그는 흉터를 가리려 머리카락을 관자놀이 쪽으로 빗어 내렸다.

확인된 사실 11월 22일, 귀족과 지주의 사건을 다루는 상급 법원 란트레히테는 요한나를 후견인으로, 베토벤을 공동 후견인으로 정했습니다. 엿새 뒤인 11월 28일, 베토벤은 형수가 후견인 자격이 없다는 소를 냈습니다. 그리고 1816년 1월 9일, 그는 단독 후견인이 됐습니다. 아이는 두 달 만에 어머니 곁을 떠났습니다.

1816년 2월 2일, 베토벤은 카를을 카예탄 잔나타시오 델 리오(Cajetan Giannatasio del Rio)가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넣었습니다. 베토벤은 어머니의 면회도 제한했습니다. 요한나가 학교로 찾아오면 교장이 먼저 베토벤에게 알렸고, 베토벤은 자기 동의 없이는 형수가 아이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법원 명령까지 받아냈습니다. 아홉 살에서 열 살로 넘어가던 아이의 하루가 그렇게 짜였습니다.

진주 목걸이 2만 플로린, 그리고 ‘밤의 여왕’

베토벤이 형수를 밀어낸 데는 명분이 있었습니다. 요한나에게는 전과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소송이 벌어지기 불과 4년 전 사건입니다.

확인된 사실 1811년 7월 19일, 요한나는 진주 목걸이를 위탁받아 대신 팔아주기로 했습니다. 값은 2만 플로린. 당시 궁정 작곡가급 인사의 연봉이 수백 플로린에서 수천 플로린 사이였으니, 목걸이 하나가 웬만한 사람 평생 벌이에 맞먹는 물건이었습니다. 요한나는 그 목걸이를 팔지 않았습니다. 대신 자기 집에 강도가 든 것처럼 꾸몄습니다.

궤짝을 부수고 찬장을 열어젖힌 뒤, 저녁에 ‘도난’이 발견되자 진주를 자기 손가방 안에 숨겼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데리고 있던 하녀 안나 아이젠바흐를 범인으로 지목했습니다. 경찰은 아이젠바흐를 며칠간 신문했고, 증거가 없어 풀어줬습니다.

그해 8월 초, 요한나는 그 진주 목걸이 세 줄 가운데 한 줄을 목에 걸고 있다가 붙잡혔습니다. 신문 끝에 나머지 두 줄을 4천 플로린에 팔아넘겼다고 자백했습니다. 재판은 12월 27일에 시작됐고, 12월 30일 요한나는 횡령과 무고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형량은 중노동 1년. 쇠고랑을 차고, 고기 없는 식사를 하고, 맨 널빤지 위에서 자고, 간수 말고는 누구와도 말을 섞을 수 없는 조건이었습니다.

형량은 남편이 손을 써서 두 달로, 다시 한 달로 줄었습니다. 끝내는 황제에게 올린 탄원 덕에 재판 전 구금 기간으로 갈음됐습니다. 재판 기록에는 요한나가 여러 사람에게 수천 플로린의 빚을 지고 있었다는 사실도 남았습니다. 남편이 관청 서기라 돈을 넉넉히 주지 않는다는 게 그녀의 항변이었습니다.

베토벤은 이 전과를 법정에서 그대로 무기로 꺼냈습니다. 편지에서 형수를 부르던 별명이 그의 속내를 보여줍니다. ‘밤의 여왕’ — 모차르트 《마술피리》에 나오는 그 악역 말입니다. 1826년 9월의 편지에서는 형수를 “극도로 타락한 인간”이라 적고, 성격을 “악하고 악의적이며 음흉하다”고 썼습니다. 소송이 끝나고도 6년이 지난 시점의 문장입니다.

‘판(van)’이라는 세 글자가 판을 뒤집다

여기서부터가 이 소송의 진짜 이상한 대목입니다. 1818년 법정에서 다툰 쟁점은 아이가 어디서 더 잘 자라느냐가 아니었습니다. ‘판 베토벤’이라는 성이 귀족이냐 아니냐였습니다.

확인된 사실 당시 오스트리아에는 신분에 따라 갈리는 두 종류의 법원이 있었습니다. 귀족과 지주는 란트레히테로, 평민은 빈 마기스트라트라는 시민 법원으로 갔습니다. 베토벤의 사건은 처음부터 귀족 법원에서 다뤄졌습니다. 그의 이름에 붙은 네덜란드어 ‘van’을 사람들이 독일 귀족의 ‘von’으로 읽어줬기 때문입니다.

네덜란드어 van은 그저 ‘~의’ ‘~에서 온’을 뜻하는 말입니다. 작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베토벤은 그 오해를 굳이 바로잡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자신에게 유리한 판이 깔렸다고 믿었습니다.

그 판은 1818년 12월에 무너졌습니다. 요한나가 그해 9월과 10월에 세 차례 소를 냈고 모두 기각됐지만, 12월 3일 카를이 삼촌 집에서 도망쳐 어머니에게 달아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아이는 경찰 손에 붙들려 다시 삼촌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법원은 12월 11일 세 사람을 한자리에 불렀습니다.

그 심리에서 베토벤은 결정적인 사실을 흘리고 맙니다. 자기도, 죽은 동생도 귀족임을 증명할 서류를 가진 적이 없다고 인정한 겁니다. 귀족 법원은 즉시 손을 뗐습니다. 사건은 평민 법원으로 넘어갔고, 이듬해 1월 11일 그곳에서 다시 심리가 열렸습니다. 아이는 그 사이 어머니 집에 머물렀습니다.

💡 사실은요 — 이 대목을 두고 흔히 “베토벤이 법정에서 자기 가슴과 머리를 가리키며 ‘내 귀족의 증표는 여기 있다’고 외쳤다”는 장면이 인용됩니다. 이 일화는 베토벤의 조수였던 안톤 쉰들러가 남긴 기록에서 나왔습니다. 쉰들러의 서술은 뒷날 위조와 삭제가 확인된 자료라, 학계에서는 이 장면을 확정된 사실이 아니라 후대 전승으로 다룹니다. 법원 기록에 남은 건 훨씬 건조합니다. 증명 서류가 없다는 진술, 그리고 관할 이송 결정입니다.

평민 법원의 판단은 냉정했습니다. 1819년 9월 17일, 마기스트라트는 아이가 “이 교육기관에서 저 교육기관으로 공처럼 이리저리 던져졌다”고 적으며 요한나에게 양육권을 돌려줬습니다. 그 사이 베토벤은 카를을 나라 밖으로 빼돌리는 방안까지 검토했고, 제자이자 후원자였던 루돌프 대공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항소심에서 그가 실제로 한 일

패소한 베토벤은 물러설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1820년, 그는 빈에서 손꼽히는 변호사를 붙여 항소했습니다. 친구이자 법률가였던 요한 밥티스트 바흐가 변론을 맡았습니다. 이 대목까지는 법대로 밟은 절차입니다.

이와 달리 정당하지 않은 쪽도 있습니다. 그는 항소법원의 판사 한 명과 재판부 구성원 두 명을 따로 만나 “사적인 대화”를 나눴습니다. 본인도 그게 어떤 일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편지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런 일이 알려지면 문명 세계의 비난을 살 것이다.” 알면서 했다는 뜻입니다.

1820년 4월 8일, 항소법원은 베토벤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친구 카를 페터스를 공동 후견인으로 두는 조건이었습니다. 요한나가 그해 7월 황제에게 올린 마지막 탄원마저 기각되면서, 다섯 해를 끈 소송의 승자가 정해졌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권리를 전부 잃었습니다.

판결 직후 카를은 요제프 블뢰힐링거의 기숙학교로 보내졌습니다. 도착하자마자 그는 또 도망쳤고, 또 끌려 돌아왔습니다.

이 사건을 ’10년 싸움’이라 부르는 글이 많지만, 법정 소송 자체는 1815년부터 1820년까지 다섯 해입니다. 다만 베토벤이 카를의 학교와 편지와 하루 일과를 쥐고 있던 기간은, 동생이 죽은 1815년부터 총성이 울린 1826년까지 꼬박 열 해였습니다. 판결문이 정리한 것은 관할과 권리였을 뿐, 삼촌의 통제는 그대로였습니다.

승소한 삼촌이 조카에게 한 일들

법이 정리해 준 관계 안에서, 카를의 하루는 삼촌의 손바닥 위에 있었습니다. 학교를 바꾸고 편지를 뜯어보고, 어머니를 만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귀가 먼 베토벤이 필담에 쓴 대화 수첩은 지금도 139권이 전해지는데, 거기엔 음악 이야기만큼이나 소송 메모와 조카를 단속하는 지시가 빼곡합니다.

피아노 레슨 — 재능 없다는 대답

베토벤은 조카에게 피아노를 시켰습니다. 선생은 카를 체르니. 베토벤 본인에게 배운 제자이자, 지금도 전 세계 피아노 학원에서 손가락 연습곡으로 이름이 남아 있는 그 사람입니다. 체르니의 보고는 짧고 정확했습니다. 이 아이에게는 음악 재능이 거의 없었습니다.

베토벤은 화를 냈습니다. 아이의 적성이 아니라 자기 설계도가 틀렸다는 통보로 받아들인 겁니다. 주변 친구들은 이쯤에서 손을 놓으라고 여러 번 권했습니다. 그는 듣지 않았습니다. 여러 전기는 그가 조카의 아버지가 되는 일에 매달렸다고 입을 모읍니다.

“너의 착하고 충실한 아버지가”

그렇다고 이 관계가 폭력과 감시만으로 채워진 것도 아닙니다. 1825년 5월 17일 카를에게 보낸 편지에서 베토벤은 첫머리를 “내 아들아”로 열고, 끝에 “너의 착하고 충실한 아버지가”라고 서명했습니다. 삼촌이라는 단어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돈도 실제로 썼습니다. 카를의 또 다른 삼촌 요한이 1825년 6월 10일 조카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네 삼촌이 너를 위해 쓴 돈이 1만 플로린은 넘을 거다. 그 대신 네가 그에게 얼마나 많은 걱정과 슬픔을 안겼는지, 젊을 땐 그런 게 안 보이지만 나이가 들면 훨씬 잘 알게 될 거다.” 어른들 눈에는 헌신이었고, 아이 쪽 계산서는 아무도 열어보지 않았습니다.

1825년, 열아홉 살의 카를은 빈 대학에 들어가 어학을 공부했습니다. 사업 감각이 있어서 삼촌의 금전 거래를 대신 처리하기도 했습니다. 이 무렵 베토벤은 시골로 거처를 옮겼는데, 조카를 놓아준 건 아닙니다. 친구들을 시켜 카를의 동선을 살피게 했습니다.

형수는 정말 ‘밤의 여왕’이었나

해석 오랫동안 전기들은 베토벤 편에 서서 이 이야기를 썼습니다. 요한나는 방탕한 악녀, 베토벤은 아이를 구한 구원자. 선악이 깔끔하게 갈리는 구도입니다. 20세기 후반 이후의 연구는 이 구도를 흔들었습니다.

전기 작가 메이너드 솔로몬은 베토벤의 집착을 심리 쪽에서 읽습니다. 알코올 중독인 아버지 밑에서 어린 나이에 두 동생의 보호자 노릇을 떠맡았던 사람. 그가 조카에게서 아들과 가족의 자리를 한꺼번에 구하려 했다는 해석입니다. 결혼도 자식도 갖지 못한 마흔다섯 살에게 카를은 마지막 기회처럼 보였는지도 모릅니다.

설(說) 요한나를 순전한 악녀로 보는 해석도 다시 검토되고 있습니다. 전과가 있었던 건 기록으로 분명합니다. 1804년에는 부모가 그녀를 절도로 고발한 일도 있었습니다. 소송에서 진 1820년 6월에는 혼외 딸 루도비카 요한나를 낳았습니다. 당대 빈의 시선으로 보면 흠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기록에는 다른 것도 남아 있습니다. 요한나는 아들을 데려가려고 세 번, 네 번 소를 냈고, 질 때마다 다시 냈습니다. 1824년에는 형편이 어려워 베토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베토벤은 자기 돈을 내놓는 대신, 카를의 교육비로 떼어 가던 그녀의 미망인 연금 절반을 돌려주는 선에서 응했습니다. 최근 연구자들은 요한나를 악녀라기보다 ‘가난하고 흠도 많았지만 아들을 놓지 않은 어머니’에 가깝게 봅니다.

한쪽을 성인으로, 다른 쪽을 괴물로 몰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기록이 분명히 말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아이는 두 어른이 벌인 소송의 한복판에 방패도 없이 서 있었습니다. 이기는 쪽이 누구든, 그 재판에서 지는 사람은 언제나 카를이었습니다.

총성으로 가는 길

1826년, 카를은 삼촌에게 군인이 되고 싶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베토벤은 격노했습니다. 그가 조카에게 그려둔 미래는 학자이거나 음악가였지, 군복 입은 청년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설계한 인생을 조카가 거부한다는 사실 자체를 견디지 못한 겁니다.

원하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압박, 대학에서 겪은 실패, 쌓이는 빚, 한순간도 놓아주지 않는 감시. 열아홉 살이 감당하기엔 너무 많았습니다. 그해 7월, 카를은 권총 한 자루를 샀습니다. 7월 29일에는 시계를 저당 잡혀 두 번째 권총을 샀습니다. 그리고 이 글 맨 앞의 언덕으로 올라갔습니다.

총성 뒤의 처리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기괴합니다. 자살을 시도한 청년에게 병원과 함께 종교 상담이 처방됐습니다.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자살 시도는 병이 아니라 죄에 가깝게 다뤄졌습니다. 9월에 퇴원한 뒤에야 삼촌의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목적지는 보헤미아의 부대, 삼촌이 그토록 반대하던 바로 그 길이었습니다.

떠나기 한 달 전, 베토벤의 건강이 무너졌습니다. 카를은 1826년 12월 내내 삼촌의 병상을 지켰습니다. 카를이 부대로 떠난 건 해가 바뀐 1827년 1월 초입니다. 그가 떠난 바로 다음 날, 베토벤은 마지막 유언장을 작성해 전 재산을 조카 앞으로 남겼습니다.

※ 이 글은 200년 전의 역사적 사건을 다룹니다. 지금 마음이 많이 힘들다면 혼자 견디지 마세요 — 자살예방상담전화 1393(24시간).

살아남은 조카의 나머지 32년

1827년 3월 26일, 베토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카를은 사흘 뒤 빈으로 돌아와 장례를 지켰습니다. 그가 유일한 상속인이었지만 아직 성년이 아니어서, 후견인 자리는 얄궂게도 어머니 쪽 친척인 야코프 호체바르에게 넘어갔습니다. 소송 때 요한나의 법률 대리인이었던 사람입니다.

카를은 1832년 군에서 나와 카롤리네 나스케와 결혼했습니다. 딸 넷과 아들 하나를 뒀고, 아들의 이름은 루트비히 요한이었습니다. 농지 관리로 생계를 꾸려보려 했지만 크게 되지는 않았고, 두 삼촌에게 물려받은 유산으로 부족함 없이 살았습니다. 그는 1858년 4월 13일 간 질환으로 죽었습니다. 쉰한 살이었습니다.

어머니 요한나는 아들보다 오래 살았습니다. 1869년, 여든셋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소송에서 진 뒤로 반세기를 더 살면서, 이긴 사람과 사건의 한복판에 있던 아들이 차례로 먼저 가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왜 ‘자상한 삼촌’ 버전만 살아남았나

사실관계가 이렇게 복잡한데도 대중의 머릿속에 남은 건 조카를 품은 위대한 삼촌 쪽입니다. 낭만주의 시대는 천재를 신화로 빚고 싶어 했습니다. 귀가 먼 고독한 거장이 어린 조카를 거둬 키운다는 그림은 그 신화에 딱 맞았습니다. 맞지 않는 조각은 조용히 빠졌습니다.

초기 전기 작가들의 몫도 큽니다. 특히 말년의 베토벤 곁에 있었던 안톤 쉰들러는 자료를 자기 입맛대로 손본 것으로 악명 높습니다. 그가 베토벤 사후 대화 수첩 상당수를 없애고 가짜 대화를 끼워 넣었다는 사실은 20세기 후반 필적 연구로 밝혀졌습니다. 자기가 그리고 싶은 스승의 초상에 맞춰 증거까지 고친 셈입니다.

그 편향된 기록 속에서 요한나의 목소리는 통째로 지워졌습니다. 한쪽 진술만 살아남으면 그게 곧 역사가 됩니다. 여기에 영화와 소설이 각색을 얹으면서, ‘불멸의 연인’이 누구냐는 오래된 수수께끼와 뒤엉켜 삼촌 서사는 더 미화됐습니다. 고통받는 예술가일수록 우리는 그를 착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야 그 음악을 마음 편히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이야기를 대할 때 필요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과, 사람을 신화 없이 보는 눈. 위대한 작곡가와 서툴고 잔인했던 보호자는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둘을 함께 인정하는 쪽이 그를 더 정확히 이해하는 길입니다. 이 신화가 어떻게 굳는지는 그의 교향곡 3번 ‘영웅’을 둘러싼 이야기에서도 똑같이 반복됩니다.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리라’를 쓰던 손

이제 음악 쪽으로 가 보겠습니다. 이 소송의 시기는 베토벤의 창작이 가장 메말랐던 때, 그리고 곧이어 최후의 대작들이 터져 나온 때와 정확히 맞물립니다.

소송이 가장 격렬하던 1815년부터 1819년 사이, 베토벤의 완성작은 눈에 띄게 줄어듭니다. 완성작이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이 침묵이 전부 소송 탓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가 법정 서류와 조카 문제에 매달린 시기와 정확히 겹치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다 1820년 승소로 한 국면이 닫히면서, 미뤄져 있던 후기 대작들이 잇따라 쏟아집니다. 《미사 솔렘니스》(1819~1823)와 교향곡 9번(1822~1824)이 그 시기의 결과물입니다. 앞 초상화에서 그가 손에 쥐고 있던 바로 그 악보입니다.

교향곡 9번 4악장, 실러의 시를 가사로 붙인 합창은 이렇게 외칩니다.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리라.” 온 인류를 형제로 끌어안자는 노래입니다. 그런데 이 합창을 쓰던 시기의 베토벤은, 정작 친조카 한 명과 다투느라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법정 싸움은 1820년에 끝났지만 감시와 갈등은 그 뒤로도 몇 해를 더 갔습니다.

안토니오 파파노와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9번 4악장. 합창이 들어오는 순간부터 끝까지 한 번에 들을 수 있는 실황이다.

해석 같은 시기의 《미사 솔렘니스》 마지막 악장에는 ‘도나 노비스 파쳄’, 곧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라는 라틴어 기도가 붙습니다. 베토벤은 그 악보 머리에 직접 한 줄을 적어 넣었습니다. “안과 밖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 법정에서 형수와 진흙탕 싸움을 벌이던 사람이 평화를 달라는 문장을 오선지에 새기고 있었습니다. 이 어긋남을 알고 나면 그의 후기 음악에 깔린 긴장이 어디서 왔는지 조금 보입니다.

가디너가 지휘한 《미사 솔렘니스》 실황. 마지막 악장에서 평화를 청하는 그 기도가 어떻게 흔들리는지 들어볼 만하다.

같은 상처가 흐르는 세 곡

베토벤의 다른 곡들에도 ‘가족’이라는 주제가 묘하게 스며 있습니다. 이 뒷이야기를 품고 들으면 세 곡이 조금 다르게 다가옵니다. 첫째는 바이올린 협주곡입니다. 초연에서 외면당하고 오래 잊혔다가 열두 살 소년의 손에서 되살아난 곡입니다. 버려졌다 돌아온다는 점에서, 카를을 향한 베토벤의 뒤틀린 집착과 어딘가 겹칩니다.

둘째는 교향곡 8번입니다. 작곡가 본인은 아꼈는데도 200년째 둘째 자식 취급을 받아온 교향곡입니다. 편애와 서열, 인정받지 못한 자식이라는 주제가 이 이야기의 정서와 그대로 포개집니다. 셋째는 교향곡 4번. 유명한 5번의 그늘에 가려, 값만 받고 떠넘겨진 곡처럼 취급받았습니다. 베토벤의 세계에서는 누군가가 늘 밀려나 있었습니다.

베토벤이 조카 양육권 소송을 실제로 벌였나요?

사실입니다. 1815년 동생 카스파어 카를이 죽은 뒤, 베토벤은 조카 카를의 후견권을 두고 형수 요한나와 법정에서 다퉜습니다. 1816년 1월 단독 후견인이 됐다가 1818년 사건이 시민 법원으로 넘어가며 후견권을 잃었고, 1820년 4월 항소심에서 영구 후견권을 다시 얻었습니다.

양육권 다툼은 몇 년이나 걸렸나요?

법정 소송 자체는 1815년부터 1820년까지 약 5년입니다. 다만 베토벤이 카를의 학교와 생활을 관리한 기간까지 포함하면, 동생이 죽은 1815년부터 카를이 자살을 시도한 1826년까지 약 10년에 이릅니다.

‘van’이 귀족 칭호가 아니라는 게 왜 재판에서 중요했나요?

당시 오스트리아는 신분에 따라 관할 법원이 달랐습니다. 귀족은 란트레히테, 평민은 빈 마기스트라트에서 재판받았습니다. 네덜란드어 van은 ‘~의’라는 뜻일 뿐 작위가 아닙니다. 1818년 12월 베토벤이 귀족 증명 서류가 없다고 인정하면서 사건은 시민 법원으로 넘어갔고, 그곳에서 그는 후견권을 잃었습니다.

조카 카를은 그 뒤 어떻게 됐나요?

1826년 7월 바덴의 라우헨슈타인 성 폐허에서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했으나 살아남았습니다. 회복한 뒤 보헤미아에서 군 복무를 했고, 1832년 제대해 카롤리네 나스케와 결혼했습니다. 딸 넷과 아들 하나를 뒀으며 1858년 4월 13일 쉰한 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형수 요한나는 정말 나쁜 어머니였나요?

1811년 진주 목걸이 횡령과 무고로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은 확인된 사실입니다. 다만 그녀를 순전한 악녀로 그리는 이미지는 베토벤 쪽에 치우친 자료와 후대 각색의 산물이라는 지적이 많습니다. 최근 연구자들은 흠이 많았지만 아들을 끝까지 놓지 않은 어머니 쪽으로 다시 평가합니다. 사실과 해석을 구분해서 봐야 합니다.

참고 자료

이어서 듣기 — 베토벤이라는 사람의 뒷면

이 이야기가 흥미로웠다면 아래 다섯 편이 결이 맞습니다. 신화가 만들어지는 방식, 인정받지 못한 곡들, 그리고 젊은 죽음의 그림자까지 — 이유는 하나씩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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