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곡가
-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 곡명
- 레퀴엠 d단조 K. 626
(Requiem in D minor, K. 626) - 작곡
- 1791 (미완성, 쥐스마이어 보완)
- 초연
- 1793년 1월 2일, 빈
- 조성
- d단조
- 편성
-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독창, 합창, 바셋혼 2, 바순 2, 트럼펫 2, 트롬본 3, 팀파니, 현5부, 오르간
- 연주 시간
- 약 55분
1791년 7월의 빈.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의 집 앞에 낯선 사내가 나타났더군요. 회색 외투를 깊게 걸친 그는 자신의 이름도, 누구의 의뢰인지도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가 요구한 것은 단 하나, ‘레퀴엠’을 작곡해 달라는 것뿐이었죠. 이 글에서는 모차르트 《레퀴엠》(Requiem, K.626)을 둘러싼 탄생 비화와 미완성의 진실, 그리고 핵심 감상 포인트를 파헤칩니다. 클래식 음악에 갓 입문한 분들부터 이 곡의 이면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은 분들까지, 200년 넘게 풀리지 않은 매혹적인 미스터리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겠습니다.

회색 외투의 사내 — 익명 의뢰의 전말
그해 여름, 모차르트는 이미 극도로 지쳐 있었습니다. 《마술피리》(Die Zauberflöte) 작곡에 매달려 있던 와중에, 프라하에서 열리는 레오폴트 2세의 대관식을 위한 오페라 《티토 황제의 자비》(La clemenza di Tito)까지 다급하게 의뢰받은 상황이었죠. 몸은 쇳덩이처럼 무거워졌고, 주머니 사정은 늘 얄팍했습니다. 회색 외투의 사내가 찾아온 것은 바로 그 위태로운 빈틈이었네요.
의뢰인의 진짜 정체는 프란츠 폰 발제크 백작(Franz von Walsegg)이었습니다. 스투파흐 성에 거주하던 28세의 이 젊은 귀족은, 그해 2월 갓 스무 살이 된 아내 안나를 떠나보낸 직후였습니다. 발제크 백작에게는 아주 은밀하고도 기이한 취미가 하나 있었습니다. 당대 유명 작곡가들에게 돈을 주고 곡을 의뢰한 뒤, 연주회에서 마치 자신이 작곡한 양 발표하는 것이었죠. 오늘날로 치면 일종의 ‘고스트라이팅(대필)’을 즐긴 셈입니다. 프란츠 안톤 호프마이스터 같은 작곡가들 역시 이런 방식으로 그에게 작품을 넘겼다는 사실이 안톤 헤어초크의 기록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이 기막힌 내막을 알 턱이 없었셈입니다. 의뢰인이 대체 누구인지, 왜 이토록 기를 쓰고 익명을 고집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죠. 훗날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Constanze Mozart)는 남편이 이 의뢰를 수락한 직후부터 기이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회고했습니다. 모차르트가 “누군가 나에게 독을 먹였고, 이 레퀴엠은 다름 아닌 내 장례식을 위한 곡”이라며 불안하게 중얼거렸습니다.
과연 그의 말대로 누군가 독을 탔던 것일까요? 독살설은 후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입에 오르내렸지만, 현대 의학계는 그의 사인을 류머티즘열이나 신장 질환에 따른 합병증으로 결론짓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차르트 자신이 느꼈을 죽음의 공포만큼은 결코 가짜가 아니었습니다. 서른다섯 살의 천재 작곡가가 자신의 장례 미사곡을 직접 써 내려가고 있다는 처절한 감각. 이것이야말로 《레퀴엠》 전체에 짙게 스며든 절박함의 진짜 원천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발제크 백작의 중개인, 즉 ‘회색 외투의 사내’는 실제로는 백작의 사업을 돕던 관리인 요한 조르겐프라이(Johann Sortschan)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죽음의 사자가 아니라, 현실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평범한 집사에 가까운 인물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평범함이 모차르트의 쇠약해진 상상력을 더욱 기괴하게 자극했는지도 모릅니다. 이름을 숨긴 의뢰인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무표정한 메신저. 하루가 다르게 건강이 악화하고 있던 모차르트에게 이 모든 상황은 죽음을 예고하는 초자연적인 징조처럼 다가왔을 겁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쓴 음악 — 1791년 가을의 모차르트
1791년 9월, 모차르트는 지친 몸을 이끌고 프라하에서 돌아왔겠네요. 야심 차게 올린 오페라 《티토 황제의 자비》 초연은 대중의 냉담한 외면을 받았고, 설상가상으로 그의 건강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했습니다. 그럼에도 천재의 펜촉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9월 30일, 빈의 비덴 극장에서 초연된 《마술피리》가 그야말로 대성공을 거둡니다. 열광하는 관객들의 환호성을 무대 뒤에서 전해 들으며, 모차르트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그 환희의 순간도 잠시였습니다. 10월에 접어들자 모차르트는 스스로 침대에서 일어나기조차 힘들 만큼 급격히 쇠약해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생의 불꽃이 꺼져가던 바로 이 시기에 《레퀴엠》 작업이 그 어느 때보다 맹렬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병상에 누운 채로 악보를 펼쳐 두고, 애제자 프란츠 크사버 쥐스마이어(Franz Xaver Süssmayr)에게 입으로 일일이 음표를 지시하며 결사적으로 작곡을 이어갔는군요.
쥐스마이어는 1766년 오스트리아 슈바넨슈타트에서 태어나 크렘스뮌스터 수도원에서 음악을 익힌 전도유망한 젊은 작곡가였습니다. 1788년부터 빈에 머물며 모차르트의 든든한 제자이자 허물없는 친구로 지냈으며, 프라하 여행까지 동행할 만큼 각별한 사이였죠. 오페라 《티토 황제의 자비》에서 세코 레치타티보(대사 부분)를 스승 대신 작곡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은, 모차르트가 생의 마지막 순간에 유일하게 기대고 신뢰했던 음악적 동반자였습니다.

운명의 1791년 12월 4일 밤, 모차르트는 가까운 친구들을 병상으로 불러 모아 완성된 《레퀴엠》의 일부를 함께 불렀습니다. 그러나 여덟 번째 곡인 라크리모사(Lacrimosa, ‘눈물의 날’)에 이르자, 그는 돌연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이 진혼곡의 마침표를 자기 손으로 결코 찍지 못하리라는 비극적인 직감 때문이었기도 합니다. 결국 다음 날인 12월 5일의 차가운 새벽,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서른다섯이라는 너무도 이른 나이에 숨을 거두고 맙니다.
여기서 가슴 아픈 비하인드 스토리를 하나 더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모차르트의 장례식은 12월 6일, 빈의 슈테판 대성당에서 조촐하게 치러졌습니다. 성당을 출발한 초라한 장례 행렬은 도시 외곽의 성 마르크스 묘지로 향했는데, 그가 정확히 어느 흙더미 아래에 묻혔는지 그 누구도 기록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당시 빈의 장례 규정상, 귀족이 아닌 일반 시민은 묘비명도 없는 공동묘지에 합동 매장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 작곡가의 무덤이 어디인지조차 영영 알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 이것은 주인을 잃고 미완성으로 남겨진 《레퀴엠》 못지않게 서글프고 잔인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 첫 번째 추천: 모차르트 레퀴엠 전곡 — 위의 플레이어에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쥐스마이어의 펜 — 미완성을 완성한 손길
모차르트가 숨을 거두었을 때, 《레퀴엠》이 놓인 상황은 참담했이랄까요. 첫 곡인 인트로이투스(Introitus, 입당송)만이 온전하게 오케스트레이션되어 있었죠. 키리에(Kyrie)부터 오페르토리움(Offertorium)까지는 성악 파트와 통주저음(basso continuo)의 앙상한 뼈대만 잡혀 있었을 뿐, 관현악 편곡은 미완성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세쿠엔티아(Sequentia) 중 라크리모사는 겨우 8마디를 끝으로 허망하게 끊겨 있었습니다. 상투스(Sanctus), 베네딕투스(Benedictus), 아뉴스 데이(Agnus Dei)로 이어지는 후반부는 모차르트의 자필 악보에 단 하나의 음표조차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아내 콘스탄체의 사정은 몹시 절박했습니다. 의뢰인 발제크 백작에게 어떻게든 완성된 곡을 넘겨야만 나머지 사례금을 받아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거운 빚에 시달리던 그녀에게 이 돈은 곧 생존이 걸린 문제였더군요. 다급해진 콘스탄체는 먼저 모차르트의 동료였던 요제프 아이블러(Joseph Eybler)에게 곡의 완성을 간곡히 의뢰했습니다. 아이블러는 세쿠엔티아 부분의 오케스트레이션을 시도하며 애를 썼지만, 라크리모사에 이르러 결국 펜을 내려놓고 맙니다. 감히 거장 모차르트의 신성한 영역에 자신의 얄팍한 음표를 덧칠하는 엄청난 중압감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이 무거운 과제는 제자 쥐스마이어의 몫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꽤 대담한 선택을 내렸습니다. 스승이 남긴 흩어진 스케치와 메모들—콘스탄체의 표현을 빌리자면 “종이 조각들(Zettel)”—을 긁어모아 뼈대를 세우고 나머지 여백을 채워나갔습니다. 끊어져 있던 라크리모사의 8마디 이후를 과감하게 이어 나갔고, 상투스와 베네딕투스, 아뉴스 데이는 아예 새롭게 작곡해 넣었네요. 마지막 곡인 코무니오(Communio)는 앞서 완성된 인트로이투스와 키리에의 선율을 그대로 재활용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이러한 결정이 생전 모차르트의 은밀한 지시였는지, 아니면 쥐스마이어 자신의 독단적인 판단이었는지는 오늘날까지도 뜨거운 논쟁거리로 남아 있습니다.

쥐스마이어가 빚어낸 완성본을 향한 세간의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립니다. 그의 오케스트레이션이 천재 스승의 경지에는 턱없이 모자란다는 혹평은 발표 직후부터 꼬리를 물었습니다. 당대의 한 날카로운 비평가는 “쥐스마이어의 작곡에는 번뜩이는 독창성도, 깊은 시적 여운도 없다. 그저 멜로디가 매끄럽고 민속적인 매력이 약간 묻어날 뿐이다”라고 깎아내렸죠. 하지만 그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모차르트의 진짜 의도를 가장 가까운 곁에서 생생하게 전해 들은 유일한 인물이라는 사실만큼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는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던 스승의 거친 숨소리와 구술을 직접 받아 적었던 단 한 사람이었으니까요.
여기서 실소를 자아내는 의외의 사실이 하나 더 등장합니다. 쥐스마이어는 우여곡절 끝에 완성한 악보를 발제크 백작에게 제출하며, 서명란의 날짜를 “1792”년으로 적어 넣었셈입니다. 스승 모차르트의 유려한 필체를 그럴듯하게 흉내 내려 애썼지만, 바로 이 날짜 표기에서 어설픈 꼬리를 밟히고 맙니다. 모차르트는 1791년에 이미 세상을 떠났는데 자필 악보에 버젓이 1792년이라고 적혀 있으니, 삼척동자가 봐도 앞뒤가 맞지 않는 노릇이었죠. 하지만 의뢰인인 발제크 백작은 이런 허술함에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에게 진짜 작곡가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이 곡을 자신의 이름으로 번듯하게 발표할 속셈이었으니까요.
결과적으로 발제크 백작의 음흉한 계획은 철저히 좌절되고 맙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콘스탄체가 남편의 유족을 돕기 위해 기획한 자선 공연에서 이 《레퀴엠》을 덜컥 먼저 연주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1793년 1월 2일, 빈의 야한 궁전(Jahn’scher Saal)에서 울려 퍼진 이 역사적인 공연을 통해 세상은 비로소 이 장엄한 진혼곡이 다름 아닌 모차르트의 유작이라는 사실을 똑똑히 알게 되었습니다. 발제크 백작은 길길이 날뛰며 분노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된 콘스탄체의 돌발 행동을 막을 방도는 없었습니다. 물론 백작 자신도 그해 12월 14일 비너 노이슈타트에서 기어코 이 곡을 자기 이름으로 내걸고 지휘했다는 웃지 못할 기록이 남아 있더군요. 하지만 그때쯤 빈 음악계에서 이 곡의 진짜 주인이 모차르트라는 사실은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는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있었습니다.

끝나지 않는 논쟁 — 누구의 레퀴엠인가
쥐스마이어의 완성본이 세상의 빛을 본 이후, 이 장엄한 진혼곡을 둘러싼 팽팽한 논쟁은 200년이 넘도록 식지 않고 있습니다. 이 긴 논란을 관통하는 핵심 질문은 단 하나입니다. 과연 이 곡의 어디까지가 천재 모차르트의 숨결이고, 어디부터가 제자 쥐스마이어의 붓칠인가?
우선 역사적으로 확실한 부분부터 짚어보겠습니다. 첫 곡인 인트로이투스(Requiem aeternam)는 오케스트레이션까지 모차르트가 생전에 온전히 직접 완성했습니다. 이어지는 키리에의 복잡한 이중 푸가 역시 모차르트의 또렷한 자필입니다. 세쿠엔티아의 디에스 이레(Dies irae)부터 콘푸타티스(Confutatis)까지는 성악 파트와 통주저음의 앙상한 스케치만이 남아 있었고, 훗날 쥐스마이어와 아이블러가 이를 바탕으로 살을 붙여 오케스트레이션을 완성해 냈습니다. 가장 극적인 대목은 라크리모사입니다. 모차르트는 겨우 8마디까지만 악보를 써 내려간 뒤 영영 펜을 놓았네요. 그토록 유명하고 애절한 “눈물의 날, 그날이 오면”의 선율이 단 8마디 만에 허망하게 허공에서 끊어져 버립니다.
진짜 짙은 안개에 휩싸인 구간은 상투스 이후부터입니다. 쥐스마이어는 당당하게 이 부분을 “오롯이 나의 작곡”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현대의 음악학자들 사이에서는 모차르트가 병상에서 구두로 치밀한 지시를 남겼을 가능성, 혹은 지금은 안타깝게 유실되어 버린 스케치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아내 콘스탄체가 증언했던 그 무수한 “종이 조각들”이 과연 어떤 악상을 품고 있었는지, 그리고 대체 어디로 감쪽같이 사라졌는지는 여전히 음악사의 거대한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20세기와 21세기에 접어들며 이 미완의 퍼즐은 한층 더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됩니다. 쥐스마이어의 다소 투박한 버전에 깊은 불만을 품은 깐깐한 음악학자와 작곡가들이 앞다투어 자신만의 ‘대안적 완성본’을 세상에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프란츠 바이어(1971), 리처드 모더(1995), 로버트 레빈(2005)의 작업이 대표적이며, 2005년 이후에만 무려 열한 가지가 넘는 새로운 판본이 쏟아져 나왔셈입니다. 이 각각의 버전들은 모차르트 고유의 작곡 양식을 집요하게 학술적으로 분석해, “만약 모차르트가 살아있었다면 분명 이렇게 썼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추정에 단단히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무척 흥미로운 역설이 발생합니다. 음악학적으로는 그토록 매서운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르는 쥐스마이어 버전이, 정작 실제 연주 현장에서는 여전히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압도적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차가운 학술적 정확성과 뜨거운 음악적 생명력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진리를, 바로 이 곡이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는 셈입니다. 쥐스마이어의 완성본에는 분명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투박한 구석이 존재하지만, 오히려 그 투박함 속에 병상의 스승을 지켜보던 제자의 생생한 슬픔과 진짜 감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고 느끼는 연주자와 청중이 셀 수 없이 많기 때문입니다.
차이콥스키의 비극적인 죽음을 둘러싼 무성한 논쟁이 그의 마지막 교향곡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 것처럼, 모차르트의 죽음을 에워싼 기이한 미스터리 역시 《레퀴엠》을 감상하는 우리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깊은 잔상을 남깁니다. 작곡가의 처절한 죽음과 그의 남겨진 작품이 이토록 소름 돋게 밀접하게 얽혀 있는 경우는 길고 긴 클래식 음악사 전체를 통틀어도 결코 흔치 않습니다.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6번 《비창》이 그 궤를 같이하는 또 다른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겠죠. 이 두 걸작은 모두 죽음의 발소리를 예감한 천재 작곡가가 세상에 남긴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유서’로 영원히 읽히고 있습니다. 차이콥스키의 죽음을 둘러싼 논쟁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
악장별 감상 포인트 — 어디를 들어야 하는가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전체 8개 섹션, 14개의 소단위로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곡을 감상하는 데는 약 50~55분이 소요되죠. 이 장엄한 여정에 처음 발을 들이는 분들을 위해, 절대 놓쳐선 안 될 핵심 감상 포인트를 짚어드리겠겠네요.
첫 번째로 귀 기울여야 할 대목은 인트로이투스(Introitus, 입당송)입니다. D단조의 짙고 어두운 안개 속에서 바순과 바셋 호른이 모방 대위법으로 주제를 조심스레 제시합니다. 이 선율은 헨델의 장례 안셈 《시온의 길은 슬퍼하고》(HWV 264)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생의 벼랑 끝에 선 모차르트가 마지막 작품에서 바로크의 거장 헨델을 인용했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의미심장합니다. 거장에 대한 깊은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이를 자신만의 음악적 언어로 완벽히 재해석해 냈으니까요. 7마디의 기악 도입부가 지나고 합창이 등장할 때, 베이스가 먼저 주제의 포문을 열고 다른 성부들이 차례로 그 뒤를 따르는 구조는 형언할 수 없이 장엄하고도 애달픕니다.
두 번째 핵심은 키리에(Kyrie eleison, 자비송)입니다. 인트로이투스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쉼 없이(아타카, attacca) 휘몰아치는 이중 푸가인데, 이 주제 선율에는 소름 돋는 비밀이 하나 숨겨져 있습니다. 네 개의 음표를 선으로 이어보면 선명한 십자가 모양이 나타납니다. 바흐와 헨델, 하이든도 즐겨 썼던 이른바 ‘십자가 음형(cruciform melody)’입니다. 모차르트는 자신의 마지막 붓놀림에 신앙과 죽음의 묵직한 상징을 음표로 아로새겼습니다. 대주제와 맞물리는 반주제 역시 헨델의 《데팅겐 안셈》(HWV 265) 마지막 합창에서 가져온 멜로디입니다.
세 번째는 세쿠엔티아(Sequentia, 부속가)의 디에스 이레(Dies irae)와 라크리모사(Lacrimosa)입니다. ‘진노의 날’이라는 뜻을 품은 디에스 이레는 오케스트라와 합창의 폭발적인 에너지가 문자 그대로 쏟아져 내리는 악장입니다. 현악기의 격렬한 트레몰로, 심박을 요동치게 하는 싱코페이션(당김음) 리듬, 그리고 금관악기의 파멸적인 반복 화음이 최후의 심판을 눈앞에 생생히 그려냅니다. 반면 라크리모사는 12/8박자의 느릿한 라르게토(Larghetto)로 진행되며, 모차르트가 남긴 마지막 8마디에 그의 스러져가는 영혼이 처절하게 응축되어 있습니다. “눈물의 날이여, 죄 많은 인간이 재에서 일어나 심판받을 그날이여.” 이 비통한 가사를 따라 한없이 추락하는 선율의 하강 곡선은 클래식 음악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비가(悲歌)로 꼽힙니다.
네 번째로 튜바 미룸(Tuba mirum)의 극적인 순간도 결코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들어라, 나팔 소리를”이라는 가사와 함께 테너 트롬본이 웅장한 독주로 등장합니다. 이는 라틴어 ‘투바(tuba)’를 독일어 ‘포자우네(Posaune, 트롬본)’로 해석한 모차르트의 탁월한 선택이 반영된 결과입니다. B♭ 장조의 아르페지오가 서늘한 비반주 상태로 공간을 가르며 울려 퍼진 뒤, 베이스 독창이 그 선율을 거울처럼 모방하며 뒤따릅니다. 네 명의 독창자가 무대 위로 차례차례 등장하는 이 숨 막히는 구성은 마치 한 편의 오페라 명장면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다섯 번째, 콘푸타티스(Confutatis)에서 레코르다레(Recordare)로 넘어가는 아득한 흐름에 주목해 보십시오. 콘푸타티스는 지옥의 불구덩이와 천국의 구원이 빚어내는 극단적인 대비가 압권입니다. 남성 합창의 거칠고 포효하는 포르테(forte)가 저주받은 자들의 절규를 묘사한다면, 여성 합창의 가녀린 피아노(piano)는 한줄기 빛 같은 구원을 애타게 갈구합니다. 단 하나의 악장 안에서 이토록 극렬한 대비가 교차하는 구조는 훗날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 5악장을 예견한 선구적인 형태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이어지는 레코르다레는 무려 130마디에 달하는 이 진혼곡에서 가장 방대한 악장으로, F장조의 3/4박자가 빚어내는 간절한 기도의 분위기가 듣는 이의 영혼을 압도합니다.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 5악장
마지막으로 코무니오(Communio, 영성체송)의 룩스 에테르나(Lux aeterna)입니다. 이 대목은 놀랍게도 첫 곡인 인트로이투스의 음악이 고스란히 되돌아오는 수미상관의 순환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만약 쥐스마이어가 이 방식을 택한 것이 병상에 누운 모차르트의 치밀한 지시 때문이었다면, 이는 그야말로 경이로운 설계가 아닐 수 없는군요. 영원한 안식을 염원하던 첫 기도가 곡의 맨 끝자락에 다시금 장엄하게 울려 퍼지며, 작품 전체가 마침내 거대한 하나의 원(圓)을 완성하기 때문입니다. 캄캄한 죽음에서 잉태되어 영원한 빛으로 귀결되는 완벽한 궤적. 숱한 논란을 낳은 미완성작이라는 치명적인 한계 속에서도, 이 곡이 우리에게 벅찬 완결감을 선사하는 진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악보와 함께 듣기
악보 원본은 IMSLP에서 무료로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레퀴엠 d단조 K.626 악보 보기 (IMSL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