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가 작명한 게 아닙니다. ‘미사 in B단조’라는 제목은 작곡자가 죽고 95년이 지난 1845년, 취리히의 Nägeli와 본의 Simrock 두 출판사가 합작해 첫 곡 조성을 멋대로 따다 붙였습니다. 27곡 중 B단조는 단 5곡, D장조가 12곡인데도 그렇게요.
제목부터가 거짓말이죠. 그리고 이건 이 곡이 가진 거짓말 중 가장 작은 겁니다.
- 작곡가
-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 - 곡명
- B단조 미사, BWV 232
- 작곡 기간
- 1733년 (Kyrie+Gloria) ~ 1748–49년 (전곡 완성)
- 악장
- 4부 27곡
I. Missa (Kyrie + Gloria)
II. Symbolum Nicenum (Credo)
III. Sanctus
IV. Osanna · Benedictus · Agnus Dei · Dona nobis pacem - 편성
- 5성 합창 · 5명 독창
플루트 2, 오보에 2 (오보에 다모레 포함), 바순 2
호른 1 (코르노 다 카치아), 트럼펫 3
팀파니
현5부, 통주저음 - 연주 시간
- 약 1시간 50분
- 초연
- 1859년 4월 12일, 라이프치히
카를 리델 지휘 리델-페어아인 - 헌정
- 1733년 부분 헌정 (Kyrie+Gloria만)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 3세
1733년 7월의 진짜 사연
한국어 해설지가 한 줄로 처리하는 문장이 있습니다. “1733년, 바흐는 작센 선제후에게 미사를 헌정했다.” 이 한 줄이 거의 모든 걸 가립니다.
헌정한 건 미사가 아니라 두 곡뿐
바흐가 1733년 7월 27일 드레스덴에 보낸 건 ‘미사’ 전체가 아닙니다. Kyrie와 Gloria, 두 곡뿐이죠. 나머지 25곡은 그때 존재하지도 않았어요.
그리고 이 두 곡을 어떻게 보냈는지가 결정적입니다. 21개 파트보를 자비로 필사하고, 자비로 제본해서 보냈거든요. 라이프치히 토마스교회 칸토르 월급으로는 결코 가벼운 지출이 아니었습니다. 절박했다는 뜻이에요.
음악 헌사가 아닌 청탁서
같이 보낸 청원서를 펴 보면 ‘예술적 봉헌’ 같은 단어는 한 줄도 없습니다. 본문은 단호합니다. “Hofkomponist 직함을 내려주시기를 가장 비천한 마음으로 간청드립니다.”
음악 헌사가 아닙니다. 취업 청탁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라이프치히 시당국과 한창 갈등 중이던 칸토르가 외부 직함을 따서 시의회를 압박할 카드를 만들고 싶었던 거죠. 1730년 시의회에 보낸 ‘Entwurff’ 편지에서 바흐는 “라이프치히 음악 환경이 처참하다”고 썼습니다. 외부 직함은 그 갈등의 협상 카드였어요.
3년간 오지 않은 답장
당시 바흐 나이 48세. 이 정도 거장이면 즉답이 와야 정상이라고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답장은 1736년 11월 19일에야 왔어요. 무려 3년 4개월 뒤죠.
그 3년 사이 바흐는 두 번 더 드레스덴을 직접 방문했습니다. 다시 가서 “그 청원 어떻게 됐습니까” 묻는 입장에 서야 했던 겁니다. 음악의 아버지라는 호칭이 무색한 모양새였죠.
받은 직함도 명예직이었습니다. ‘Compositeur bey Dero Hoff-Capelle’ — 궁정악장이 아니라 “궁정악단 산하 작곡가”. 월급도 없고, 드레스덴에 가서 일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명함 위 한 줄.
가톨릭 군주에게 보낸 루터교 신자의 편지
여기서 한 겹 더 기형적인 부분이 있어요. 헌정 대상인 아우구스트 3세는 가톨릭이었습니다. 폴란드 왕위를 잇기 위해 아버지 강건왕 시절(1697)부터 작센 통치 가문이 가톨릭으로 개종한 상태였거든요.
그런데 작센 영토 자체는 여전히 루터교였습니다. 군주는 가톨릭, 신민은 루터교. 이 기형적인 종교 풍경 속에서 평생 루터교 신자였던 바흐가 가톨릭 미사 통상문(Ordinary)을 정확히 가톨릭 군주에게 보낸 셈입니다.
“미사 통상문은 루터교에서도 일부 사용된다”는 익숙한 변호가 있죠. 사실은 사실입니다. 단, 이 정도 길이로, 이 정도 정성으로, 이 정도 가톨릭 양식으로 쓴 사례는 루터교 전통에 없습니다. 청탁의 종교적 시그널은 명확했어요.
참고로 1733년 2월 1일, 강건왕 아우구스트 2세가 사망합니다. 새 선제후가 즉위하면서 작센 전역에 5개월간 국상이 선포되고, 공공 음악은 금지됩니다. 라이프치히도 마찬가지로 침묵했어요. 학자들은 이 침묵의 5개월 동안 바흐가 Kyrie와 Gloria를 작곡했을 거라고 봅니다. 시간이 남아돌았으니까요.
바흐를 원하지 않은 드레스덴 궁정
왜 답장이 3년이나 늦었을까요. 단순합니다. 드레스덴 궁정 입장에서 바흐는 그렇게 매력적인 카드가 아니었던 겁니다.
드레스덴의 진짜 스타, 하세
1733년 드레스덴 궁정 음악계의 No.1은 요한 아돌프 하세였습니다. 오페라계 슈퍼스타. 베네치아·나폴리에서 명성을 쌓은 뒤 드레스덴에 합류한 인물이었고, 선제후 부부가 직접 좋아하는 작곡가였죠.
그의 부인은 이탈리아 메조소프라노 파우스티나 보르도니, 그러니까 당시 유럽 최고 디바였습니다. 부부가 함께 드레스덴 무대를 장악한 시기였어요. 18세기 음악사에서 ‘Hasse’는 ‘Bach’보다 훨씬 큰 이름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거꾸로 알고 있을 뿐이고요.
No.2는 첼렌카
2순위는 보헤미아 출신 얀 디스마스 첼렌카였어요. 가톨릭 종교음악 전문, 이미 1710년대부터 드레스덴 궁정 콘트라베이스 주자로 일하고 있던 인물. 새로 합류한 외부인이 아니라 내부 인사였습니다.
가톨릭 미사를 작곡한 경력만 따져도 첼렌카는 바흐와 비교가 안 됐습니다. 미사 21곡, 레퀴엠 3곡, 시편 다수. 드레스덴 궁정 가톨릭 예배당에서 매주 자기 곡이 연주되던 사람이었거든요.
1723년 작곡한 〈Missa Sancti Spiritus〉만 봐도 그래요. 그 무렵부터 첼렌카의 미사는 드레스덴 가톨릭 궁정 예배당의 단골 레퍼토리였고, 1733년 시점이면 이미 십여 곡의 미사가 무대에 오른 상태였습니다. 바흐가 두 곡짜리 ‘Missa’를 부쳤을 때 드레스덴 입장에선 “또 미사 한 사람”이었지 “거장 신곡 도착”이 아니었던 거죠.
객원 신청자에 가까운 바흐
이 구도에서 바흐의 자리는 명확합니다. 외부 객원 신청자, 그것도 2~3순위. 라이프치히에서 일하는 루터교 신자가 가톨릭 군주의 궁정에 자기를 끼워달라고 청한 형국이었어요. 받아준 것 자체가 너그러운 처사였던 거죠.
‘음악의 아버지’라는 호칭은 19세기 독일 민족주의가 만들어낸 신화입니다. 1730년대 현실에서 바흐는 라이프치히 시의회에 시달리고, 드레스덴 궁정에 무시당하고, 함부르크 자리도 떨어진 한 명의 중년 칸토르였어요. 그 사실을 빼고는 1733년 헌정의 의미가 절대 안 보입니다.
16년의 공백, 그리고 죽기 직전의 짜깁기
1733년에 두 곡을 보내고, 1736년에 명함만 받고, 그 뒤로 16년이 흘렀습니다. 바흐는 이 곡을 잊은 듯 살았어요. 칸타타 200곡 이상을 새로 작곡하고, 푸가 기법을 정리하고,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출판했습니다. 미사는 책상 서랍 안에서 묵고 있었던 거죠.
그러다가 1748년경, 죽기 1~2년 전에 갑자기 다시 꺼냅니다. 시력은 거의 잃었고, 손은 떨리고 있었어요. 그때 27곡짜리 거대한 미사를 완성합니다. 어떻게 그 짧은 기간에 그 분량을? 새로 안 썼거든요. 옛날 곡들을 끌어다 짜깁기한 겁니다.
Crucifixus의 출처는 1714년 칸타타
가장 유명한 곡 중 하나인 Crucifixus를 봅시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노래하는, 깊고 무거운 합창. 이 곡의 원본은 1714년 바이마르에서 작곡한 칸타타 BWV 12 ‘Weinen, Klagen, Sorgen, Zagen’ 첫 합창입니다.
이 칸타타가 어떤 곡인지 잠시 보면 의미가 더 또렷해져요. 1714년 4월 22일, 부활절 3주 후 ‘Jubilate’ 일요일 예배용. 그해 3월 바흐가 바이마르 궁정에서 콘체르트마이스터로 막 승진해 매달 칸타타를 한 곡씩 의무 작곡하던 시기, 그 의무 안에서 빚은 청년기 곡입니다. 29세였어요.
📜 악보 보기 (IMSLP · IMSLP 전집 (BWV 232 스코어))
지점: BWV 232 Crucifixus 마디 1-12 / BWV 12 Weinen Klagen 합창 첫 마디 비교
바소 오스티나토 패턴이 그대로입니다. 반음씩 내려가는 그 4마디 베이스 라인. 35년을 묵힌 곡을 미사 한복판에 박아 넣은 거죠. 가사만 ‘Weinen Klagen’에서 ‘Crucifixus’로 바꿔 끼웠어요. 음악적으로 본질은 같은 곡입니다.
이런 사례가 한두 곡이 아닙니다. Patrem omnipotentem은 BWV 171에서, Gratias agimus는 BWV 29에서, Qui tollis는 BWV 46에서. 학자들은 27곡 중 16~18곡이 기존 곡 재활용이라고 봅니다. 즉, 이 미사의 60% 이상이 옛날 곡의 짜깁기인 셈이고요.
마지막 곡과 8번 곡, 같은 음악
전체 27곡 중 가장 마지막에 놓인 Dona nobis pacem.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로 끝맺는 장엄한 합창입니다. 그런데 이 곡, 8번째 곡 Gratias agimus tibi와 음악이 동일합니다. 가사만 다르게 붙였을 뿐, 음표는 똑같아요.
📜 악보 보기 (IMSLP · IMSLP 전집 (BWV 232 스코어))
지점: Dona nobis pacem 첫 마디 vs Gratias agimus tibi 첫 마디 동일 비교
학계의 공식 해석은 “회귀 구조의 천재성”입니다. 시작과 끝이 같은 음악으로 묶이며 미사 전체가 하나의 원환을 이룬다는 거죠. 그럴듯합니다.
덜 그럴듯한 해석도 가능합니다. 시간이 없었다. 새로 안 썼다. 같은 곡을 두 번 썼다. 어느 쪽이 더 정직한 설명인지 판단은 듣는 사람 몫이지만, 이 두 해석이 동시에 옳을 수도 있다는 게 핵심입니다. 천재의 회귀 구조이자 마감 임박 작가의 처리법. 둘 다 사실일 수 있어요.
Et incarnatus est, 떨리는 손글씨의 증거
그럼에도 새로 작곡한 곡이 한 곡 있습니다. Credo 안에 박힌 ‘Et incarnatus est’ — “성령으로 잉태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죽기 1년 전 작곡한 것으로 추정되는, 바흐 생애 마지막 합창 중 하나죠.
1989년 일본 학자 고바야시 요시타케가 베를린 국립도서관이 소장한 자필 악보(P 180)를 정밀 분석했습니다. 결과는 잔혹했어요. 음표 간격이 일정하지 않고, 잉크가 번지고, 음자리표가 흔들리고 있었거든요. 시력 상실의 직접 증거였습니다.
고바야시는 단순히 “글씨가 떨린다”는 인상을 넘어, 음표 머리의 크기 변동, 음자리표의 기울기, 페이지 하단으로 갈수록 음표 간격이 좁아지는 패턴까지 추적했습니다. 시력이 점점 떨어지는 사람의 손이 종이 위에서 어떻게 무너지는지 그대로 기록된 페이지였어요. 글씨체가 아니라 시력의 시간선을 읽어낸 분석입니다.
📜 악보 보기 (IMSLP · IMSLP 전집 (BWV 232 스코어))
지점: Et incarnatus est 자필 악보 클로즈업 (Berlin P 180)
더 인상적인 건 이 곡이 원래 따로 있던 곡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같은 가사 ‘Et incarnatus est’는 원래 바로 앞 곡 ‘Et in unum Dominum’ 이중창 안에 포함돼 있었어요. 바흐는 죽기 직전에 그 가사를 떼어내 별도 합창으로 새로 썼습니다. 27곡 구조 자체가 만년의 재구성이라는 뜻이죠.
참고로 P 180 자필 악보는 지금도 잉크가 종이를 갉아먹는 ‘iron gall ink corrosion’ 진행 중입니다.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의 결정적 근거였죠. 곡도 사람도 종이도, 천천히 무너지면서 살아남고 있는 셈이고요.
자기 곡을 한 번도 듣지 못한 사람
1750년 7월 28일, 바흐는 라이프치히에서 사망합니다. 미사를 완성한 지 1년쯤 됐을 때예요. 그가 살아서 들은 이 곡은 단 한 곡, Sanctus뿐이었습니다.
살아서 들은 건 Sanctus 한 곡뿐
Sanctus는 1724년 라이프치히 크리스마스 예배에서 단독으로 연주됐습니다. 그게 끝입니다. Kyrie와 Gloria도, Credo도, 마지막 Dona nobis pacem도, 바흐는 자기 귀로 들은 적이 없어요. 종이 위에서만 존재한 곡이었던 거죠.
그리고 이건 단순한 비극이 아닙니다. 이 미사는 처음부터 연주가 불가능한 길이로 설계됐어요. 약 1시간 50분에서 2시간. 동시대 가톨릭 미사 평균 길이가 20분에서 40분 사이였으니까, 3배에서 6배 깁니다. 어느 교회도 이 미사를 전례에 쓸 수 없었습니다.
비극·게으름·사후 평판용 사이
여기서 솔직하게 물어볼 만합니다. 바흐는 정말 이 곡을 듣고 싶었을까요. 듣고 싶었다면, 처음부터 연주 가능한 길이로 썼을 겁니다. 짧게 잘라서 부분 연주라도 시도했을 거고요.
안 했어요. 본인이 시도조차 안 했습니다. 이걸 단순한 비극으로만 보면, 작곡가의 의도를 놓칩니다. 이 미사는 어쩌면 처음부터 ‘내 사후 평판용’으로 설계된 작품이었을 가능성이 있어요. 살아서 못 듣는 게 아니라, 살아서 들을 생각이 없었던 거죠.
비극이라는 단어가 너무 쉬운 답입니다. 게으름이라는 단어도 너무 가혹하고요. 진실은 그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죽음을 앞둔 작곡가가 자기 작품 전체를 정리하면서, 이 거대한 미사를 마지막 자리에 놓고 종이 위에 봉인한 것. 그게 더 정확한 그림인 것 같습니다.
109년 침묵의 진짜 이유
바흐가 1750년에 죽고 전곡 초연이 1859년에 이뤄졌습니다. 109년의 공백. 이 침묵이 단순한 망각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오해예요. 의도된 침묵이었습니다.
C.P.E. 바흐의 1786년 발췌 연주
아버지 사후 36년 만인 1786년 4월 4일, 둘째아들 C.P.E. 바흐가 함부르크 자선 콘서트에서 Credo 부분만 발췌해 연주했습니다. 이게 사후 첫 공개 연주죠. 단, 프로그램에는 ‘바흐 미사’ 라벨이 붙지 않았어요. 그저 ‘신경(信經)’ 한 곡으로 소개됐습니다.
왜 라벨을 붙이지 않았을까요. 1786년 함부르크는 개신교 도시였거든요. 가톨릭 미사 통상문을 그대로 연주한다는 사실은 정치적으로 거북했던 겁니다. 아들 입장에서는 아버지 곡이 묻히는 한이 있어도 ‘미사’ 라벨은 피해야 했어요.
멘델스존의 외면
1829년, 20세의 멘델스존은 베를린에서 마태수난곡을 부활시킵니다. 바흐 사후 79년 만의 첫 부활. 음악사의 결정적 순간이었죠. 그 직후, 그가 다음 카드로 B단조 미사를 꺼냈을 거라고 짐작하기 쉽지만 사실은 다릅니다. 손도 안 댔어요.
이유는 멘델스존의 스승 첼터의 편지에 남아 있습니다. 1827년 첼터가 괴테에게 보낸 편지. “이 곡은 너무 가톨릭적이라 독일 청중에 안 맞는다.” 베를린 징아카데미 도서관에는 18세기 후반부터 부분 사보가 있었어요. 학습용으로만 활용됐고, 공개 연주는 의도적으로 미뤄졌습니다.
마태수난곡은 살리고, B단조 미사는 묻은 까닭이 그겁니다. 마태수난곡은 루터교 정서에 정확히 들어맞는 독일적 텍스트였습니다. B단조 미사는 가톨릭 라틴어 통상문이고, 게다가 18~19세기 독일 음악계는 강한 민족·종교 색채를 띠고 있었거든요. 첼터의 한 줄이 결국 30년의 침묵을 더 만들어낸 셈이죠.
출판가가 27년을 기다린 곡
한 가지 더. 1818년, 취리히의 Hans Georg Nägeli가 직접 이 미사를 출판하겠다며 구독자 모집 광고를 냈습니다. 출판가 입장에선 의지가 있었던 거죠. 그런데 그 광고와 1845년 첫 출판 사이에 27년이 더 흘렀어요.
의지가 있어도 시장이 따라오지 않았던 겁니다. 가톨릭 라틴어로 된 2시간짜리 합창곡을 사 줄 19세기 초 독일어권 구독자가 얼마나 됐겠어요. Nägeli는 1836년 사망했고, 결국 그가 시작한 일은 본의 Simrock과 합작 형태로 1845년에야 책이 됩니다. 자필 악보가 출판되기까지 95년, 광고가 책이 되기까지 27년이 더 필요했어요.
첫 삽을 뜬 비단 상인
1859년 4월 12일, 마침내 라이프치히에서 전곡 초연이 열립니다. 지휘자는 카를 리델. 그런데 이 사람의 이력이 묘해요. 직업 음악가 출신이 아니거든요. 비단 무역상이었습니다. 본업으로 돈을 벌고, 취미로 합창단을 이끌던 아마추어 지도자.
유럽 직업 음악계가 109년간 손도 안 댄 곡을, 비단 상인 한 명이 자기 합창단을 끌고 처음 무대에 올린 겁니다. 그것도 일부 악장을 잘라낸 단축본으로요. 전곡 무삭제 초연은 한참 더 뒤로 미뤄지고요.
‘클래식 음악 정점’ ‘바흐의 영적 유언’ 같은 호칭은 이 1859년 이후, 19세기 후반에 형성됩니다. 그 전엔 그냥 너무 길고, 너무 가톨릭적이고, 너무 어려운 짜깁기 미사였어요. 호칭의 무게는 곡 자체가 만든 게 아니라, 130년간 후대가 천천히 발라준 옻칠인 셈이고요.
그럼에도 165년 살아남은 곡
여기까지 읽고 나면, 이 곡을 들을 마음이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짜깁기에 청탁용에 자기가 못 들은 곡. 무슨 영적 유언입니까.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막상 1859년 이후의 165년간, 이 누더기는 살아남았어요. 카라얀이 녹음했고, 헤레베헤가 녹음했고, 리프킨이 녹음했고, 일본의 스즈키도 녹음했습니다. 매년 부활절 즈음마다 어디선가 누군가가 이 2시간짜리를 끝까지 연주합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짜깁기여도 그 35년 묵힌 합창 한 곡이 진짜 좋고, 청탁용 Kyrie여도 그 도입부 5도 화음이 정말 깊고, 마감 처리한 Dona nobis pacem여도 그 회귀의 무게가 실제로 가슴을 누르거든요. ‘천재의 영적 유언’이라는 거짓 신화를 다 벗겨내도, 곡 자체에 남는 무게가 있는 겁니다.
천재 신화 없이 듣는 게 더 정직한 감상법이에요. 청탁이고 짜깁기여도 좋은 건 좋은 거고, 좋은 까닭은 작곡가가 천재라서가 아니라 그가 평생 쌓은 35년치 합창 음악의 누적이 결국 한 곳에 모여서니까요. 신화를 빼고 들으면, 곡이 더 잘 들립니다.
구체적인 권유 하나 보태자면, 부활절 직전 토요일 늦은 오후가 가장 잘 들립니다. 도시 소음이 살짝 가라앉고 해는 길어지는 시간대. 그때 Kyrie 첫 5도 화음을 켜 놓고 식탁 정리든 빨래든 천천히 해 보세요. 짜깁기든 청탁이든 미완이든 다 잠깐 잊혀집니다. 천재 신화도 잊혀지고요. 종이 위에 봉인됐던 것이 275년 만에 거실에 풀리는 그 감각, 그게 이 곡이 165년간 살아남은 이유입니다.
추천 연주 영상
편파 리뷰입니다. 객관적 나열이 아닌, 실제로 무엇을 먼저 들을지 추천하는 글이고요.
- Philippe Herreweghe / Collegium Vocale Gent (1996, Harmonia Mundi) — 역사주의 정통의 정점입니다. 무난해서 재미없다는 사람도 있지만, 그게 정직한 거예요. 처음 듣는다면 여기서 시작하는 게 합리적입니다.
- Joshua Rifkin / Bach Ensemble (1982) — OVPP(One Voice Per Part) 실험. 합창단 없이 솔로 5명 + 오케스트라만으로 녹음해 학계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처음 들으면 황당, 두 번째 들으면 납득. 18세기 실제 연주 환경에 가장 가까운 가설이에요.
- Herbert von Karajan / Berlin Philharmonic (1974) — 거대 낭만주의의 끝판입니다. 완벽하게 다듬어졌고, 완벽해서 바흐가 듣고 싶었던 그 소리는 절대 아니에요. 안티테제로 들으면 진가가 보입니다.
- Masaaki Suzuki / Bach Collegium Japan (BIS) — 일본 바흐 학파의 정수. 깨끗함이 무기예요. 헤레베헤 다음 두 번째 사이클로 권할 만합니다.
- Netherlands Bach Society / Jos van Veldhoven (All of Bach) — 무료 영상으로 시작점 잡기 좋습니다. 소규모 편성, 리허설 영상까지 공개돼 있어 입문용으로 최적이고요.
🎬 Herreweghe / Collegium Vocale Gent
악보와 함께 듣기
Netherlands Bach Society의 ‘All of Bach’ 프로젝트가 전곡 연주 영상을 무료 공개해 두었습니다. 악보를 따라가며 들으시면 도움이 됩니다.
📜 악보 보기 (IMSLP · IMSLP 전집 (BWV 232 스코어))
지점: 1733년 헌정 표지 자필 페이지 (Missa BWV 232a)
자주 묻는 질문
이 곡이 2시간이나 되는데 끝까지 들어야 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