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곡가
-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 - 곡명
- B단조 미사, BWV 232
(Mass in B minor) - 작곡 기간
- 1733년 (Kyrie+Gloria) ~ 1748–49년 (전곡 완성)
- 악장
- 4부 27곡
I. Missa (Kyrie + Gloria)
II. Symbolum Nicenum (Credo)
III. Sanctus
IV. Osanna · Benedictus · Agnus Dei · Dona nobis pacem - 편성
- 5성 합창 · 5명 독창
플루트 2, 오보에 2 (오보에 다모레 포함), 바순 2
호른 1 (코르노 다 카치아), 트럼펫 3
팀파니
현5부, 통주저음 - 연주 시간
- 약 1시간 50분
- 전곡 초연
- 1859년 4월 12일, 라이프치히
카를 리델 지휘 리델-페어아인 - 헌정
- 1733년 부분 헌정 (Kyrie+Gloria만)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 3세
바흐 본인이 지은 이름조차 아닙니다. ‘미사 in B단조’라는 그럴싸한 제목은 작곡가가 세상을 떠나고 무려 95년이 흐른 1845년에야 붙었거든요. 취리히의 Nägeli와 본의 Simrock, 두 출판사가 손잡고 첫 곡의 조성을 쓱싹 따서 마음대로 붙인 이름에 불과합니다. 전체 27곡 중에 B단조는 고작 5곡뿐이고 오히려 D장조가 12곡으로 가장 많건만, 출판사의 상술 덕에 이 엉뚱한 간판이 영원히 굳어지고 말았죠.
첫인상인 제목부터가 유쾌한 사기극인 셈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이 위대한 작품이 품고 있는 거짓말 중 가장 작고 귀여운 수준입니다. 속물적인 청탁, 교묘한 짜깁기, 죽음을 눈앞에 둔 봉인, 그리고 무려 109년에 달하는 길고 긴 침묵까지. 포장지를 한 꺼풀씩 벗겨낼 때마다, 우리가 ‘클래식의 정점’이라 떠받드는 이 우아한 걸작의 꽤나 낯선 민낯이 고개를 내밀지도 모르겠네요.

1733년 7월, 단 한 줄의 미사여구로 가려진 진짜 사연
웬만한 한국어 해설지를 펼치면 항상 단 한 줄로 요약해 버리는 마법의 문장이 있습니다. “1733년, 바흐는 작센 선제후에게 미사를 헌정했다.” 참으로 기품 있고 깔끔한 요약이지만, 얄밉게도 이 한 줄이 사건의 본질을 완벽하게 덮어버리고 맙니다. 번지르르한 헌정사 뒤에 도대체 어떤 속사정이 도사리고 있었는지 그 장막부터 한번 들춰보지요.
미사 전체를 바쳤다는 건 착각, 실상은 단 두 곡
바흐가 1733년 7월 27일 드레스덴 궁정으로 띄워 보낸 건 결코 거대한 ‘미사’ 한 편이 통째가 아니었습니다. 포장을 뜯어보면 오직 Kyrie와 Gloria, 딱 두 곡이 전부였거든요. 그럼 남은 25곡은 어디 갔냐고요? 애초에 그 시점의 지구상에는 존재조차 하지 않는 곡들이었으니까요.
여기서 결정적인 대목은 이 두 곡을 ‘어떻게’ 포장해 보냈는가 하는 점입니다. 놀랍게도 21개에 달하는 파트보 전체를 바흐 본인의 지갑을 털어 필사하고, 자비로 번듯하게 제본까지 마쳐서 부쳤습니다. 당시 라이프치히 토마스교회 칸토르가 받는 빤한 월급봉투를 생각하면 결코 만만히 넘길 지출이 아니었죠. 주머니를 쥐어짜면서까지 막대한 비용을 감수할 만큼 그의 처지가 무척 절박했다는 뼈아픈 증거입니다.
고상한 음악 헌사가 아닌, 노골적인 취업 청탁서
악보와 함께 동봉된 청원서를 찬찬히 읽어보면 헛웃음이 나옵니다. ‘예술적 봉헌’처럼 우아한 단어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한 줄도 없거든요. 편지의 본문은 구차하기보단 차라리 단호한 목적의식을 뽐냅니다. “Hofkomponist 직함을 내려주시기를 가장 비천한 마음으로 간청드립니다.”
순수한 음악 헌사가 아니라, 적나라한 취업 청탁입니다. 한 걸음 더 들어가 볼까요? 당시 라이프치히 시당국과 멱살잡이 직전까지 갈등을 빚고 있던 칸토르가, 번지르르한 외부 직함을 하나 따내서 콧대 높은 시의회를 압박할 카드를 만들고 싶었던 겁니다. 실제로 1730년 시의회에 들이밀었던 ‘Entwurff’ 편지를 보면 라이프치히의 음악 환경이 처참하다고 대놓고 불평을 늘어놓았거든요. 외부 직함이라는 타이틀은 그 지긋지긋한 진흙탕 싸움의 강력한 협상 카드였던 셈이지요.
3년 4개월이나 무소식이었던 야속한 답장
당시 바흐 나이는 마흔여덟이었습니다. 이 정도 반열에 오른 거장이라면 즉답이 와야 마땅하다고 생각하기 십상이죠.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어요. 답장은 1736년 11월 19일에야 당도합니다. 무려 3년 4개월이나 흐른 뒤였지요.
그 피 말리는 3년 사이 바흐는 무려 두 번이나 드레스덴을 직접 찾아가는 수고를 감수합니다. 굳이 다시 찾아가서 “그 청원 어떻게 됐습니까” 하고 물어야 하는 기막힌 처지로 전락한 거예요. 훗날 위인전마다 찬란하게 새겨질 ‘음악의 아버지’라는 위엄 넘치는 호칭이 이 순간만큼은 머쓱해지는 모양새입니다.
그렇게 온갖 굴욕을 견디며 기어코 받아낸 직함마저 실상은 빛 좋은 개살구였습니다. ‘Compositeur bey Dero Hoff-Capelle’, 즉 거창한 궁정악장이 아니라 그저 “궁정악단 산하 작곡가”라는 꼬리표였죠. 매달 나오는 월급도 없고, 드레스덴으로 출근하지도 않아요. 오직 명함 한구석에 폼나게 박아넣을 얄팍한 한 줄. 그걸 손에 쥐겠다고 꼬박 3년을 매달렸던 겁니다.
가톨릭 군주의 밥상에 올라간 루터교 신자의 미사
여기서 상황이 한 겹 더 기묘하게 꼬여 들어갑니다. 헌정 대상인 아우구스트 3세는 가톨릭이었거든요. 폴란드 왕위를 이어받기 위해, 이미 아버지 강건왕 시절(1697)부터 작센 통치 가문이 통째로 가톨릭으로 개종한 상태였으니까요.

여기서 재미있는 모순이 발생합니다. 정작 작센 영토 자체는 여전히 굳건한 루터교였단 말이죠. 군주는 가톨릭이고 신민은 루터교를 믿는 이 엇갈린 종교 풍경 속에서, 평생토록 뼛속 깊이 루터교 신자였던 바흐가 하필 가톨릭 미사 통상문(Ordinary)을 정조준하여 가톨릭 군주에게 떡하니 골라 보낸 거예요.
물론 바흐를 방어하기 위해 “미사 통상문은 루터교에서도 일부 쓰인다”는 음악학자들의 익숙한 변호가 있죠.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토록 방대한 길이로, 뼈를 깎는 정성까지 담아, 심지어 이 정도로 가톨릭 양식에 충실하게 맞춰 쓴 사례는 루터교 전통 어디를 뒤져봐도 없었어요. 구직을 향한 이 간절한 청탁이 보낸 종교적 신호는 누구라도 알아챌 만큼 충분히 또렷했던 까닭입니다.
은밀한 타이밍의 비밀도 덧붙여야겠습니다. 1733년 2월 1일, 강건왕 아우구스트 2세가 세상을 떠납니다. 새 선제후가 왕좌에 즉위하면서 작센 전역에 무려 5개월간의 국상이 선포되었고, 공공 음악이 일제히 멈춰 섰어요. 라이프치히 역시 똑같은 침묵에 잠겼고요. 학자들은 바로 이 멈춰버린 5개월의 휴식기 동안 바흐가 펜을 들어 Kyrie와 Gloria를 썼으리라 봅니다. 당장 예배에 쓸 곡을 연주할 일이 없으니, 이력서용 대작에 매달릴 시간이 남아돌았으니까요.
드레스덴은 바흐를 원하지 않았다
왜 답장이 3년이나 늦어졌을까요? 그 해답은 의외로 싱겁습니다. 드레스덴 궁정 입장에서 바흐는 굳이 탐낼 만한 매력적인 카드가 아니었던 거예요. 이미 그 자리엔 훨씬 거대한 이름들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거든요.
드레스덴의 진짜 스타, 하세
1733년 당시 드레스덴 궁정 음악계의 1인자는 요한 아돌프 하세였습니다. 그야말로 오페라계의 슈퍼스타였죠. 베네치아와 나폴리를 누비며 화려한 명성을 쌓은 뒤 드레스덴에 입성한 인물로, 선제후 부부가 대놓고 총애하던 작곡가였습니다.

그의 부인은 이탈리아의 메조소프라노 파우스티나 보르도니로, 당시 유럽을 주름잡던 최고의 디바였습니다. 잘나가는 부부가 나란히 드레스덴 무대를 쥐락펴락하던 시기였죠. 18세기 음악사에서 ‘Hasse’는 ‘Bach’를 한참이나 압도하는 이름이었습니다. 단지 그 무거운 저울추가 19세기에 이르러 통째로 뒤집혔을 뿐이죠.
2인자는 가톨릭 미사의 전문가 첼렌카
그 뒤를 잇는 2인자는 보헤미아 출신의 얀 디스마스 첼렌카였습니다. 가톨릭 종교음악에 뼈가 굵은 데다, 1710년대부터 드레스덴 궁정의 콘트라베이스 주자로 근속해 온 든든한 내부 인사였죠. 바흐처럼 이제 막 문을 두드린 뜨내기 외부인이 아니었습니다.
가톨릭 미사 작곡 경력만 줄 세워봐도 첼렌카는 바흐와 애당초 비교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미사 21곡, 레퀴엠 3곡, 거기에 다수의 시편까지. 드레스덴 궁정 가톨릭 예배당에서 매주 자신의 곡을 번듯하게 울려 퍼지게 하던 실세였거든요.
1723년에 작곡한 《Missa Sancti Spiritus》 하나만 살펴봐도 상황은 뻔합니다. 그 무렵부터 첼렌카의 미사는 드레스덴 가톨릭 예배당의 굳건한 단골 레퍼토리였고, 1733년이면 이미 십수 곡이 무대에 오르고 난 뒤였죠. 그러니 바흐가 달랑 두 곡짜리 ‘Missa’를 부쳤을 때, 드레스덴 궁정이 받은 인상은 “거장 신곡 도착”이 아니라 그저 “또 미사 한 사람”에 가까웠던 겁니다.
객원 신청자에 가까웠던 바흐
이 기울어진 구도 속에서 바흐의 위치는 명확합니다. 잘해봐야 외부 객원 신청자, 그것도 2~3순위에 불과했죠. 라이프치히에서 일하는 꼿꼿한 루터교 신자가 가톨릭 군주의 궁정에 제발 자리 하나만 내달라고 비집고 들어간 형국이었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받아준 것 자체가 퍽 너그러운 처사였던 셈입니다.
‘음악의 아버지’라는 근엄한 호칭은 어디까지나 19세기 독일 민족주의가 곱게 빚어낸 신화입니다. 1730년대의 진짜 바흐는 라이프치히 시의회에 이리저리 시달리고, 드레스덴 궁정에는 철저히 무시당하며, 함부르크의 구직 자리에서도 쓴잔을 마셔야 했던 한 명의 피곤한 중년 칸토르였어요. 이 서글픈 사실을 빼놓고서는 1733년 헌정의 진짜 의미가 끝내 보이질 않거든요.
16년의 공백, 그리고 죽기 직전의 짜깁기
1733년에 두 곡을 띄워 보내고 1736년에 달랑 명함 한 장을 건져낸 뒤로, 무려 1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바흐는 마치 이 곡을 머릿속에서 새까맣게 지운 듯 살았어요. 칸타타 수백 곡을 쉴 새 없이 쏟아내고, 《푸가의 기법》을 정교하게 다듬으며,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번듯하게 출판하는 그 기나긴 시간 동안, 이 불운한 미사는 캄캄한 책상 서랍 구석에서 하염없이 먼지만 맞고 있었거든요.
그러다 1748년경, 세상을 떠나기 불과 1~2년 전에 갑자기 이 묵은 악보를 다시 꺼내 듭니다. 시력은 이미 거의 잃어버렸고 손마저 덜덜 떨리던 쇠락한 시기였죠. 그런 성치 않은 몸으로 무려 27곡짜리 거대한 미사를 뚝딱 완성해 냅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 짧은 기간에 그 방대한 분량을 채워 넣었을까요? 그 해답은 헛웃음이 나올 만큼 허탈합니다. 아예 새로 쓰지 않았거든요. 서랍 속에 잠자던 옛날 곡들을 이리저리 끌어다 교묘하게 짜깁기한 겁니다.
Crucifixus의 출처는 34년 전 칸타타
가장 널리 알려진 유명한 곡 중 하나인 Crucifixus를 한번 살펴볼까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묵묵히 노래하는, 그 깊고 무거운 합창 말입니다. 이 비장한 곡의 원본은 놀랍게도 1714년 바이마르 시절에 썼던 칸타타 BWV 12 《Weinen, Klagen, Sorgen, Zagen》의 첫 합창입니다.
이 칸타타의 정체를 잠깐만 들여다봐도 앞뒤 맥락이 한결 또렷해집니다. 1714년 4월 22일, 부활절 3주 후 ‘Jubilate’ 일요일 예배용으로 작곡된 곡이거든요. 그해 3월, 바흐는 바이마르 궁정에서 콘체르트마이스터로 막 승진한 터라 매달 칸타타를 한 곡씩 의무적으로 뽑아내야만 하던 팍팍한 시기였습니다. 바로 그 무거운 의무감 속에서 빚어졌던 스물아홉 살 청년기의 앳된 합창인 셈이죠.
📜 악보 보기 (IMSLP · BWV 232 전집 스코어)
지점: BWV 232 Crucifixus 마디 1–12 / BWV 12 첫 합창의 베이스 라인 비교
반음씩 미끄러지듯 내려가는 그 4마디의 바소 오스티나토가 거의 고스란히 살아있습니다. 장장 34년을 푹 묵힌 베이스 라인을 미사의 정중앙에 시치미 뚝 떼고 박아 넣은 거예요. 합창단이 부르는 가사만 ‘Weinen Klagen’에서 ‘Crucifixus’로 슬쩍 갈아 끼웠을 뿐, 음악을 지탱하는 뼈대는 완벽하게 똑같은 곡이지요.
이런 노골적인 재활용 사례가 비단 한두 곡에 그치는 게 아닙니다. Patrem omnipotentem은 BWV 171에서, Gratias agimus는 BWV 29에서, Qui tollis는 BWV 46에서 고스란히 끌어왔거든요. 학자들은 전체 27곡 중 자그마치 16~18곡이 기존 곡을 재활용한 결과물이라고 봅니다. 미사 전체 분량의 60% 이상이 옛 곡들을 정교하게 기워 만든 짜깁기라는 계산이 나오는 셈이지요.
마지막 곡과 8번 곡은 완전히 같은 음악
27곡 중 가장 마지막에 장엄하게 놓인 Dona nobis pacem.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로 끝을 맺는 묵직한 합창이지요. 그런데 이 곡, 8번째 곡인 Gratias agimus tibi와 음악이 소름 돋게 동일합니다. 합창단이 부르는 가사만 살짝 다르게 바꿔 붙였을 뿐, 오선지 위 음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거든요.
📜 악보 보기 (IMSLP · BWV 232 전집 스코어)
지점: Dona nobis pacem 첫 마디 vs Gratias agimus tibi 첫 마디
이에 대한 학계의 우아한 공식 해석은 “회귀 구조의 천재성”입니다. 시작과 끝이 같은 음악으로 단단히 묶이면서, 미사 전체가 완벽한 하나의 원환을 이룬다는 거죠. 꽤나 그럴듯하고 멋들어진 설명이에요.
반면 조금 덜 그럴듯하고 세속적인 해석도 가능합니다. 단순히 시간이 없었다, 새로 쓸 여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같은 곡을 두 번 우려먹었다. 어느 쪽이 더 정직한지는 오롯이 듣는 사람의 몫이겠지만,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핵심은 이 두 가지 엇갈린 해석이 동시에 옳을 수 있다는 점이에요. 천재가 빚어낸 기하학적인 회귀 구조이면서, 동시에 마감에 턱밑까지 쫓긴 노대가의 다급한 처리법. 아이러니하게도 둘 다 진실일 수 있거든요.
Et incarnatus est, 떨리는 손글씨가 남긴 잔혹한 증거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새로 쓴 곡이 딱 한 곡 존재합니다. Credo 한복판에 깊숙이 박힌 ‘Et incarnatus est’ — “성령으로 잉태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쯤 작곡한 것으로 추정되는, 바흐 생애 최후의 합창 중 하나예요.

1989년, 일본의 학자 고바야시 요시타케가 베를린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자필 악보(Mus. ms. Bach P 180)를 현미경 보듯 정밀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는 꽤나 잔혹했어요. 꼿꼿해야 할 음표 간격이 들쭉날쭉 무너지고, 잉크가 속절없이 번지고, 음자리표마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거든요. 다가오는 시력 상실을 고발하는 적나라한 직접 증거였지요.
고바야시의 통찰은 단순히 “글씨가 떨린다”는 막연한 인상 비평을 가뿐히 넘어섰습니다. 음표 머리의 미세한 크기 변동, 음자리표의 아슬아슬한 기울기, 심지어 페이지 아래로 쫓겨갈수록 비좁아지는 음표 간격까지 집요하게 추적했어요. 빛이 꺼져 가는 사람의 위태로운 손끝이 하얀 종이 위에서 어떻게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지가 고스란히 기록된 처절한 페이지였습니다. 단순한 글씨체 감정이 아니라, 시력이 소멸해 가는 잔인한 시간선을 기어코 읽어 낸 분석이지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더 깊은 인상을 남기는 대목이 있거든요. 사실 이 곡은 원래부터 독자적으로 존재하던 곡이 아니었습니다. 똑같은 가사인 ‘Et incarnatus est’는 본래 바로 앞 곡 ‘Et in unum Dominum’ 이중창 안에 얌전히 들어 있었거든요. 바흐는 죽기 직전, 굳이 그 가사만 떼어내어 별도의 합창으로 완전히 새로 썼습니다. 즉, 27곡이라는 거대한 구조 자체가 만년에 이뤄진 치열한 재구성의 산물이라는 뜻이지요.
참고로 이 불운한 P 180 자필 악보는 지금 이 순간에도 독한 잉크가 종이를 갉아먹는 ‘iron gall ink corrosion’이 실시간으로 진행 중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훼손의 과정이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의 결정적 근거가 됐어요. 위대한 곡도, 그걸 써 내려간 사람도, 심지어 악보라는 종이마저도, 각자의 속도로 천천히 무너지면서 동시에 질기게 살아남고 있는 셈이지요.
자기 곡을 한 번도 온전히 듣지 못한 사람
1750년 7월 28일, 바흐는 라이프치히에서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필생의 미사를 완성한 지 겨우 1년쯤 지났을 무렵이었어요. 평생을 음악에 바친 그가 살아서 직접 들은 이 곡은 놀랍게도 단 한 곡, Sanctus뿐이었습니다.
살아서 자기 귀로 들은 건 Sanctus 단 한 곡
유일한 예외인 Sanctus는 1724년 라이프치히 크리스마스 예배에서 단독으로 연주됐습니다. 정말이지 그게 전부예요. 화려한 Kyrie도, 장엄한 Gloria도, 굳건한 Credo도, 그리고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Dona nobis pacem도, 정작 바흐 본인은 단 한 번도 자기 귀로 생생하게 들어본 적이 없거든요. 창조주의 귀에 닿지 못한 채, 끝까지 차가운 종이 위에서만 존재한 곡이었던 거죠.

그리고 이 기막힌 사실은 우연이 빚어낸 단순한 비극이 아닙니다. 애당초 이 미사는 처음부터 실황 연주가 불가능한 어마어마한 길이로 설계됐어요. 무려 약 1시간 50분에서 2시간. 동시대 가톨릭 미사의 평균 연주 시간이 20분에서 40분 사이였으니, 남들보다 무려 3배에서 6배나 깁니다. 현실적으로 그 어느 교회도 이 거대한 미사를 실제 전례 의식에 쓸 엄두조차 낼 수 없었어요.
비극과 게으름, 그 아득한 사이 어딘가
여기서 솔직하게 물어볼 만합니다. 바흐는 정말 이 곡을 듣고 싶어 했을까요? 진심으로 듣고 싶었다면 애초에 연주 가능한 길이로 썼을 겁니다. 정 안 되면 짧게 뚝 잘라 부분 연주라도 시도했겠지요.
그런데 안 했어요. 작곡가 본인이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이 대목을 그저 눈물겨운 비극으로만 읽는다면 작곡가의 진짜 의도를 빤히 놓치게 됩니다. 이 거대한 미사는 어쩌면 처음부터 철저하게 ‘내 사후 평판용’으로 설계된 작품이었을지 모릅니다. 살아서 못 들은 게 아니라, 살아서 들을 생각이 애초에 눈곱만치도 없었던 거예요.
비극이라는 단어는 너무 쉬운 답안지입니다. 반대로 게으름이라는 단어는 너무 가혹하고요. 진짜 진실은 아마도 그 사이 어딘가에 있겠지요. 죽음을 코앞에 둔 노대가가 자기 음악 인생 전체를 묵묵히 정리하면서, 이 거대한 미사를 가장 마지막 자리에 고이 놓고 종이 위에 단단히 봉인해 둔 것 — 그게 진실에 훨씬 더 가까운 그림일 겁니다.
109년 침묵의 진짜 이유
바흐가 1750년에 세상을 떠나고, 전곡 초연은 1859년에야 비로소 이뤄집니다. 자그마치 109년의 공백이죠. 이 아득한 침묵을 사람들의 단순한 망각으로 치부해 버리면 곤란합니다. 이 긴 시간의 상당 부분은 아주 철저하게 의도된 침묵이었거든요.
아들이 라벨을 숨긴 1786년 연주
아버지 사후 36년 만인 1786년 4월 4일, 둘째 아들 C.P.E. 바흐가 함부르크 자선 콘서트에서 Credo 부분만 떼어내 발췌 연주합니다. 이게 사후 첫 공개 연주였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프로그램에는 ‘바흐 미사’라는 라벨이 붙지 않았습니다. 그저 ‘신경(信經)’이라는 단출한 한 곡으로 소개됐을 뿐이지요.
아들은 왜 라벨을 슬쩍 숨겼을까요? 1786년 당시 함부르크는 뼛속까지 개신교 도시였거든요. 가톨릭 미사 통상문을 날것 그대로 연주한다는 사실 자체가 정치적으로 꽤나 껄끄러웠던 겁니다. 아들 입장에선 아버지의 곡이 묻히는 한이 있더라도 ‘미사’라는 불경한 단어만큼은 기를 쓰고 피해야만 했어요.
멘델스존조차 외면한 곡
1829년, 스무 살의 멘델스존이 베를린에서 마태수난곡을 부활시킵니다. 바흐 사후 79년 만의 첫 부활이자 음악사의 결정적 순간이었지요. 그 기세라면 다음 카드로 곧장 B단조 미사를 꺼냈을 법도 한데, 현실은 달랐어요.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멘델스존의 스승 첼터의 편지에 고스란히 남아 있어요. 1827년 첼터가 괴테에게 보낸 한 줄을 보시죠. “이 곡은 너무 가톨릭적이라 독일 청중에 안 맞는다.” 베를린 징아카데미 도서관엔 18세기 후반부터 부분 사보가 분명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학습용으로만 돌았고 공개 연주는 의도적으로 미뤄졌거든요.
마태수난곡은 살려내고 B단조 미사는 차갑게 묻어버린 까닭이 바로 그겁니다. 마태수난곡은 당시 루터교 정서에 아주 찰떡같이 들어맞는 독일어 텍스트였어요. 반면 B단조 미사는 불경스러운 가톨릭 라틴어 통상문이었고, 강렬한 민족주의와 종교 색채를 띠고 펄펄 끓던 19세기 독일 음악계의 입맛엔 좀처럼 어울리지가 않았지요. 첼터가 남긴 그 짧고 무심한 한 줄이 결국 30년이라는 기나긴 침묵을 덧대고 만 셈입니다.
출판가가 27년을 기다린 곡
여기에 얄궂은 사실을 한 가지 더 보태지요. 1818년, 취리히의 한스 게오르크 네겔리가 자청해서 이 거대한 미사를 출판하겠다며 야심 차게 구독자 모집 광고를 냅니다. 적어도 출판가 쪽에선 이걸 팔아보겠다는 의지가 뚜렷하게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그 첫 광고를 낸 시점과 1845년 실제 첫 출판 사이에는 또다시 27년이라는 세월이 맥없이 흘러가 버렸어요.
출판사의 의지가 제아무리 충만해도 차가운 시장이 도무지 따라와 주질 않았던 겁니다. 낯선 가톨릭 라틴어로 꽉꽉 채워진 2시간짜리 합창곡 악보를 선뜻 지갑을 열어 사 줄 19세기 초 독일어권 구독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됐을까요? 결국 네겔리는 1836년에 책이 나오는 걸 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그가 야심 차게 시작했던 프로젝트는 본의 짐로크와 손을 잡는 합작 형태로 무려 1845년에야 겨우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나옵니다. 바흐의 낡은 자필 악보가 빳빳한 활자가 되기까지 장장 95년, 야심 찬 광고가 실제 책이 되기까지 무려 27년의 세월이 더 필요했던 거죠.
첫 삽을 뜬 사람은 비단 상인
1859년 4월 12일, 마침내 바흐의 본거지 라이프치히에서 역사적인 전곡 초연이 열립니다. 지휘봉을 잡은 사람은 카를 리델. 그런데 이 사람의 이력서가 참으로 기묘해요. 번듯한 직업 음악가 출신이 아니거든요. 그의 진짜 본업은 비단 무역상이었습니다. 낮에는 열심히 비단을 팔아 돈을 쓸어 담고, 밤에는 고상한 취미로 합창단을 이끌던 아마추어 합창 지도자였지요.
콧대 높은 유럽의 직업 음악계가 장장 109년간 손도 대지 않던 이 저주받은 걸작을, 비단 상인 한 명이 자기 취미 합창단을 이끌고 와서 처음으로 무대 위에 떡하니 올린 겁니다. 그것도 너무 길어서 일부 악장을 가차 없이 뎅강 잘라낸 단축본 형태로 말이죠. 토씨 하나 빠지지 않은 온전한 전곡 무삭제 초연을 보려면, 그 뒤로도 한참을 더 인내심 있게 기다려야만 했고요.
‘클래식의 정점’이나 ‘바흐의 영적 유언’ 같은 거창한 호칭은 전부 이 1859년 초연 이후, 즉 19세기 후반에야 비로소 덧붙은 것들입니다. 그전까지 이 곡은 그저 너무 길고, 지나치게 가톨릭적이며, 연주하기엔 턱없이 어려운 짜깁기 미사에 불과했거든요. 호칭이 지닌 묵직한 무게감은 곡 자체가 뿜어낸 게 아니라, 후대 사람들이 130년에 걸쳐 붓을 들고 천천히 발라준 두꺼운 옻칠인 까닭입니다.
그럼에도 165년을 살아남은 곡
여기까지 읽고 나면 이 곡을 굳이 찾아 들을 마음이 싹 가실지도 모릅니다. 노골적인 청탁용 묶음에 여기저기 기워 만든 짜깁기, 정작 쓴 사람은 살아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곡이니까요. 이쯤 되면 영적 유언이라는 찬사가 민망해질 지경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참으로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정작 1859년 이후의 165년 동안, 이 기구한 누더기는 아주 끈질기게 살아남았거든요. 카라얀이 웅장하게 녹음했고, 헤레베헤가 투명하게 녹음했고, 리프킨이 실험적으로 녹음했으며, 일본의 스즈키도 기어이 녹음했습니다. 해마다 부활절 즈음이 오면 지구 어딘가에서는 반드시 누군가가 이 2시간짜리 대작을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해 내지요.
살아남은 이유는 의외로 단순합니다. 짜깁기라 한들 그 34년 푹 묵힌 합창 한 곡이 기막히게 훌륭하고, 구직 청탁용 Kyrie라 한들 그 도입부 화음이 사무치게 깊으며, 마감에 쫓겨 급히 처리한 Dona nobis pacem이라 한들 돌아오는 선율의 무게가 실제로 가슴을 묵직하게 누르거든요. ‘천재의 영적 유언’이라는 거추장스러운 신화를 싹 다 벗겨 내더라도, 곡 자체에 고스란히 묻어나는 절대적인 무게가 분명히 있는 겁니다.
오히려 번지르르한 신화 없이 듣는 쪽이 훨씬 더 정직한 감상법입니다. 빤한 청탁이고 짜깁기라 해도 좋은 건 그저 좋은 거고, 그게 좋은 진짜 까닭은 작곡가가 하늘이 내린 천재여서가 아니라 그가 평생을 바쳐 켜켜이 쌓아 올린 34년 치 합창 음악이 마침내 한 자리에 집대성됐기 때문이니까요. 겹겹이 칠해진 신화를 걷어 내면, 역설적이게도 음악이 외려 더 투명하게 잘 들립니다.
듣는 법에 대한 구체적인 권유를 하나 보태자면, 부활절 직전 토요일 늦은 오후가 가장 잘 어울립니다. 번잡한 도시 소음이 살짝 가라앉고 해는 유난히 길어지는 바로 그 시간대. 무심하게 Kyrie 첫 화음을 켜 놓고 식탁 정리든 밀린 빨래든 천천히 해 보세요. 짜깁기든 청탁이든 혹은 미완이든, 그 눅눅한 사실들은 다 잠깐 잊힙니다. 부담스러운 천재 신화도 같이 잊히고요. 하얀 종이 위에 옴짝달싹 못 하고 봉인되어 있던 낡은 음악이 275년 만에 거실 허공으로 사르르 풀려나는 기묘한 감각 — 바로 그 감각이 이 곡이 165년을 버티며 살아남은 궁극적인 이유입니다.
먼저 들어 볼 세 가지 연주
지극히 편파적인 리뷰입니다. 기계적이고 객관적인 나열이 아니라, 지금 당장 스피커로 무엇을 먼저 켤지 딱 집어 고르는 글이에요.
- 필리프 헤레베헤 / 콜레기움 보칼레 헨트 — 역사주의 정통의 정점을 찍는 명반입니다. 18세기 연주 환경에 가장 가까운 시대악기와 소규모 편성으로 곡의 고유한 결을 아주 정직하게 보여주지요. 처음 딱 한 장만 고르겠다면 여기서 시작하는 게 가장 합리적입니다. 단, 극적이고 화려한 스펙터클을 기대하는 분께는 다소 슴슴하고 담백하게 들릴 위험이 있습니다.
- 조슈아 리프킨 / 바흐 앙상블 (OVPP) — 웅장한 합창단 없이 파트마다 달랑 한 명씩, 솔로 다섯에 오케스트라만으로 덜컥 녹음해 버려 학계를 왈칵 뒤집어 놓은 파격적인 실험이에요. 처음 들으면 황당하지만, 두 번째엔 고개를 끄덕이게 되죠. 18세기 실제 연주 규모에 가장 가깝다는 도발적인 가설입니다. 물론 풍성한 합창의 압도적인 울림을 원하는 분께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베를린 필 (1974) — 거대 낭만주의가 도달한 끝판왕이지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다듬어졌고, 얄궂게도 바로 그 숨 막히는 완벽함 때문에 정작 바흐가 머릿속으로 듣고 싶었을 소리와는 가장 거리가 멉니다. 모범 정답이 아니라 아주 훌륭한 안티테제로 들을 때 비로소 진짜 진가가 보입니다.
악보와 함께 듣기
네덜란드 바흐 소사이어티의 ‘All of Bach’ 프로젝트가 이 거대한 전곡 연주 영상을 고맙게도 무료로 공개해 두었습니다. 상단 플레이어에서 그 영상을 바로 켤 수 있으니, 아래 IMSLP 악보를 나란히 띄워 두고 마디를 찬찬히 따라가며 들어보세요. 어느 순간 바흐가 꿰매놓은 기막힌 짜깁기의 솔기가 두 눈에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할 겁니다.
📜 악보 보기 (IMSLP · BWV 232 전집 스코어)
지점: 1733년 헌정 표지 자필 페이지 (Missa BWV 232a)
자주 묻는 질문
이 곡이 2시간이나 되는데 끝까지 들어야 하나요?
‘미사 in B단조’인데 B단조 곡이 5개뿐이라는 게 무슨 소리인가요?
바흐가 자기 곡을 그렇게 많이 재활용한 건 표절 아닌가요?
루터교 신자였던 바흐가 왜 가톨릭 미사를 작곡했나요?
카라얀 녹음과 헤레베헤 녹음 중 어느 쪽으로 시작해야 하나요?
바흐의 다른 방으로 이어지는 문
한 곡의 진짜 얼굴은 옆방의 곡들과 나란히 놓일 때 더 또렷해지거든요. B단조 미사의 속물적인 청탁과 절박한 짜깁기, 그리고 그 길고 기구했던 침묵의 발자취를 끝까지 따라오셨다면, 이제는 같은 손이 빚어낸 다른 음악과 같은 장르의 거대 합창들도 함께 들어 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