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3년 11월 6일 새벽 3시,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가 숨을 거뒀습니다. 향년 쉰셋. 공식 사인은 콜레라였고, 끓이지 않은 물을 마셔 균에 감염됐다는 것이 당시 의사들의 진단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비창》을 “스스로 죽음을 예감하고 쓴 유서 같은 교향곡”으로 기억합니다. 초연 9일 만에 작곡가가 죽었으니 그럴듯한 이야기지요. 그런데 막상 그가 죽은 정황을 들여다보면, 정작 의심스러운 쪽은 음악이 아니라 죽음 자체였거든요.
방역 규정상 콜레라 사망자의 시신은 즉시 밀봉해야 했는데, 그의 시신은 며칠씩 공개됐고 조문객들이 얼굴에 입을 맞추기까지 했습니다. 개인위생에 결벽증 수준으로 철저하던 사람이 하필 콜레라 대유행 한복판에서 끓이지 않은 물을 들이켰고요. 게다가 “그가 자살을 강요당했다”는 폭탄 같은 주장은 사후 86년이 지난 1979년에야 터져 나왔습니다. 130년이 넘도록 서양 음악사 최대의 미스터리로 남은 차이콥스키의 죽음을, 남아 있는 단서만으로 차분히 따라가 봅니다.
- 작품
- 교향곡 6번 b단조 《비창》(Pathétique), Op. 74
- 작곡가
-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1840–1893)
- 작곡
- 1893년
- 초연
- 1893년 10월 28일, 상트페테르부르크 — 작곡가 본인 지휘
- 구성
- 4악장, 약 45분 (피날레가 조용히 사그라드는 이례적 구조)
- 비고
- 초연 9일 뒤 작곡가 사망. 음악사상 가장 논쟁적인 죽음의 주인공
끓이지 않은 물 한 잔
1893년 11월 1일 저녁, 차이콥스키는 동생 모데스트, 조카 블라디미르 다비도프, 작곡가 글라주노프와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알렉산드린스키 극장에서 오스트롭스키의 연극을 봤습니다. 공연이 끝난 뒤 일행은 넵스키 대로의 라이너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겼지요.
당시 도시는 콜레라가 퍼지던 중이었습니다. 1892년부터 창궐한 이 전염병은 러시아 전역을 강타했고, 보건 당국은 모든 음식점에 물을 반드시 끓여 내라는 지침을 내린 상태였습니다. 차이콥스키가 물 한 잔을 청하자, 웨이터는 지금 끓여 둔 물이 없다고 답했습니다.
상황은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1892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처음 보고된 콜레라는 러시아 70여 개 지역으로 번졌고, 감염자 50만 명 가운데 22만 명이 목숨을 잃어 치사율이 45퍼센트에 달했습니다. 빈민가가 특히 참혹했지만 부유층도 안전하지 못했습니다. 10월 13일에는 하루 확진이 200건까지 치솟았고, 차이콥스키가 사망한 11월 6일 무렵에야 68건으로 잦아드는 추세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끓이지 않은 찬물을 달라고 고집했습니다.
일행이 한사코 말렸지만, 그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콜레라가 무섭지 않아요.”
그러고는 그 물을 마셨습니다.
이는 전기 작가 알렉산드르 포즈난스키의 기록에 묘사된 장면입니다. 사건이 정확히 이 순서대로 흘렀는지까지 단언할 수는 없지만, 차이콥스키가 끓이지 않은 물을 마셨다는 사실만큼은 여러 증언에서 공통으로 확인됩니다.
여기서 첫 번째 의문이 생깁니다. 친구 헤르만 라로슈는 그가 평소 위생에 극도로 예민한 사람이었다고 증언했거든요. “그는 병에 걸리지 않으려고 위생에 지나칠 만큼 신경을 썼다. 내가 보기에 그는 위생의 진정한 달인이었다.” 《페테르부르크 가제타》의 기자도 같은 의문을 던졌습니다. “그토록 청결하게 살던 차이콥스키가 대체 어떻게 콜레라에 걸렸단 말인가?”

쉰셋의 마지막 나흘
다음 날 아침, 평소라면 거실에서 차를 마셨을 차이콥스키가 침대에 누워 설사와 복통을 호소했습니다. 동생 모데스트가 의사를 부르자고 했지만 그는 마다하고 대신 간유를 삼켰습니다.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사흘이 지나자 콜레라의 전형적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는데도 그는 끝까지 진료를 꺼렸지요. 결국 의사를 불렀습니다. 먼저 달려온 사람은 평소 가깝게 지내던 주치의 바실리 베르텐손이었고, 그가 형인 레프 베르텐손을 추가로 부르고 나서야 콜레라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당시 의료진의 기록에 남은 병세는 콜레라의 교과서적 경과를 그대로 따라갑니다. 처음에는 멈추지 않는 설사와 구토로 몸의 수분이 급격히 빠져나가는 ‘설사기’가 오고, 이어 맥박이 잡히지 않을 만큼 혈압이 떨어지고 피부가 푸르스름하게 변하는 ‘허탈기(algid stage)’로 넘어갑니다. 탈수가 극에 달하면 신장이 버티지 못하고 멎지요. 문제는 비소 중독의 초기 경과도 이와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격렬한 구토와 설사, 탈수, 그리고 장기 부전 — 훗날 자살설이 끈질기게 살아남은 의학적 빈틈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이후 그의 상태는 호전과 악화를 오갔습니다. 잠시 나아지는가 싶다가도 이내 다시 무너졌고, 신장 기능까지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성 이삭 성당의 사제가 찾아와 종부성사를 집전했지만, 차이콥스키는 이미 주변을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1893년 11월 6일 새벽 3시, 그는 끝내 눈을 감았습니다. 불과 9일 전 교향곡 6번 b단조, Op. 74 《비창》을 초연했던 무대가 그의 생애 마지막 무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두 번째 의문이 제기됩니다. 차이콥스키를 진료한 바실리·레프 베르텐손 형제는 주로 상류층 환자를 보던 의사였거든요. 당시 콜레라는 빈민층의 병으로 통했기에, 이 형제가 실제 콜레라 환자를 진료해 본 적이나 있었는지가 의심스럽습니다. 실제로 바실리 베르텐손은 훗날 “콜레라 발병 사례를 직접 본 적이 없었다”고 시인했습니다. 정작 차이콥스키의 병세는 “전형적인 콜레라”라고 확신하듯 진단했으면서 말이지요.
콜레라 환자의 이상한 장례
차이콥스키가 사망한 직후 벌어진 일들은 한층 더 의아합니다.
콜레라 사망자 처리 규정은 분명했습니다. 전염을 막기 위해 시신은 즉시 관에 넣어 밀봉해야 했고, 대중 공개는 엄격히 금지됐습니다.
그런데 차이콥스키의 시신은 동생 모데스트의 아파트에 그대로 안치됐습니다. 집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수많은 조문객이 자유로이 드나들었습니다. 심지어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교수이자 첼리스트였던 알렉산드르 베르즈빌로비치는 만취한 채 고인의 머리와 얼굴에 입을 맞췄습니다.
콜레라로 죽은 사람의 시신에 입을 맞춘 겁니다.
작곡가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자서전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사인이 콜레라였는데도 추도 미사에는 누구나 참석할 수 있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 구절은 훗날 일부 편집본에서 슬그머니 삭제됐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몹시 불편하고 감추고 싶은 문장이었던 모양이지요.

훗날 ‘발레 뤼스’를 창립하는 전설적 기획자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는 당시 대학생 신분으로 비보를 듣고 달려갔습니다. 그는 아파트 문이 활짝 열려 있었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회상했습니다. 결국 림스키코르사코프, 성악가 니콜라이 피그네르, 그리고 디아길레프 세 사람이 검은 모닝코트 차림으로 소파에 뉘어 있던 시신을 직접 들어 테이블 위로 옮겼고, 이때 디아길레프 본인은 고인의 발을 잡았다고 증언했습니다.
“우리 셋만 아파트에 있었다. 차이콥스키가 죽자 집안 사람들은 모두 도망친 뒤였다.”
콜레라 환자가 죽었는데 방역 조치는 없었고, 시신은 대중에 공개됐으며, 정작 유족과 측근은 감염을 피해 달아났습니다. 정황상 앞뒤가 맞지 않는 구석투성이지요.
이에 포즈난스키는 반박 논리를 폅니다. 1893년 봄 중앙의료위원회가 콜레라 사망자의 공개 추도를 예외적으로 허용했고, 차이콥스키의 직접 사인은 콜레라가 아니라 그로 인한 후속 패혈증이어서 전염 위험이 낮았다는 겁니다. 《페테르부르크 가제타》에 실린 의료 보고서도 사망 사흘 전인 11월 3일에 이미 콜레라 증세 자체는 멎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시신의 입술과 콧구멍에 계속 소독제를 발랐으니 만취한 첼리스트가 입을 맞췄어도 크게 우려할 일은 아니었다는 설명이지요.
나름 설득력 있는 주장입니다. 다만 림스키코르사코프가 남긴 “이상하다”는 문장이 훗날 왜 감춰지고 삭제됐는지는 답해 주지 못하죠. 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그 한 줄을 지웠을까요.

의문은 또 있습니다. 당시 알렉산드르 3세 황제는 차이콥스키의 장례 비용 전액을 자비로 부담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제국극장 감독부에 장례 총괄을 지시했고, 카잔 성당에서의 대규모 추모 예배도 허가했습니다. 수용 인원 6천 명인 성당에 무려 6만 명이 입장을 신청했고, 결국 8천 명이 성당 안을 빼곡히 채웠습니다. 러시아 황제가 일개 예술가의 장례에 이토록 마음을 쏟은 것은 푸시킨 이후 처음이었습니다.
치사율 높은 콜레라로 죽은 사람의 장례에 황제가 직접 나서고, 8천 명이 좁은 성당에 운집했습니다. 사인이 정말 콜레라였다면 이는 대단히 무모하고 위험천만한 결정이지요. 만약 콜레라가 아니었다면, 황제가 그토록 성대한 장례를 치러 준 이면에 그럴 만한 다른 이유가 숨어 있었을 겁니다.
1979년, ‘명예 법정’이 등장하다
차이콥스키가 떠난 지 86년이 흐른 1979년, 러시아 음악학자 알렉산드라 오를로바가 충격적인 가설을 발표했습니다.
차이콥스키의 죽음이 다름 아닌 자살, 그것도 타의에 의한 ‘강요된 자살’이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오를로바의 가설은 이렇습니다. 차이콥스키가 졸업한 황실 법률학교 동문들이 비공식 ‘명예 법정’을 열었습니다. 소집 이유는 그의 동성애 문제였습니다. 제정 러시아에서 동성애는 엄연한 처벌 대상이었거든요. 한 동문이 차이콥스키의 관계를 알고 황제에게 탄원서를 내려 했고, 이 일이 공론화되면 작곡가 개인은 물론 명문 법률학교 전체의 명예가 땅에 떨어질 것을 두려워한 동창들이 비밀리에 법정을 열어 그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 명령했다는 내용입니다.
나아가 그가 독약을 마셨고 이를 콜레라로 감쪽같이 위장했다는 추측도 덧붙였습니다.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는 독은 비소(砒素)입니다. 심한 복통과 구토, 설사를 동반하는 비소 중독 초기 증상이 콜레라와 육안으로 구별하기 어렵기 때문이지요. 콜레라 진료 경험이 전무했던 베르텐손 형제가 비소 중독을 콜레라로 오진했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대목입니다.
이 가설은 발표되자마자 세계 음악학계를 거세게 뒤흔들었습니다. 만약 사실이라면, 차이콥스키의 마지막 교향곡 《비창》은 단순한 걸작을 넘어 문자 그대로 그의 ‘유서’가 되니까요. 생전 조카 다비도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교향곡의 프로그램은 수수께끼로 남겨 두겠어. 아무도 풀지 못할 수수께끼로”라고 적었던 구절도 전혀 다른 무게로 읽히게 됩니다.
하지만 이 가설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바로 직접 증거가 없다는 점입니다. 오를로바가 내세운 근거는 법률학교 동창의 미망인에게서 전해 들었다는 구두 전언(傳言)뿐이었습니다. 명예 법정의 회의록도, 참석자의 육성 증언도, 사용된 독의 종류도, 그 어느 것 하나 입증된 바가 없거든요.
그렇다면 왜 하필 1979년이었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려면 소련이라는 배경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소비에트 음악학계는 차이콥스키를 ‘국민 작곡가’로 떠받들면서도 그의 동성애만큼은 철저히 함구했거든요. 모스크바 근교 클린의 차이콥스키 기념관이 보관한 방대한 편지와 일기는 출판 과정에서 조용히 검열됐고, 동성애를 암시하는 대목은 점잖게 도려내졌습니다. 죽음을 둘러싼 민감한 기록 역시 같은 운명이었지요.
오를로바가 자신의 가설을 조국에서 발표할 수 없었던 것도 그래서입니다. 그는 1979년 미국으로 망명한 뒤에야 비로소 이 주장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86년이라는 긴 침묵은 증거가 없어서라기보다, 증거를 들여다보는 일 자체가 오랫동안 금기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련이 무너지고 문서고가 조금씩 열린 지금까지도 결정적 한 장은 끝내 나오지 않았고, 바로 그 공백이 음모론과 반박이 130년 넘게 평행선을 달리게 만든 토양이 되었습니다.
두 이론의 팽팽한 대치
반대편에서 전기 작가 포즈난스키는 콜레라 사망설을 굳건히 지지합니다. 그의 논거는 통계적으로 명료합니다. 1892~93년 러시아 전역에서 50만 명을 훌쩍 넘는 사람이 콜레라에 감염됐고 치사율은 45퍼센트에 육박했으며, 이 병은 상류층도 비껴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대유행 시기에 끓이지 않은 물을 마신 것은 그저 안일하고 어리석은 행동이었을 뿐, 그것이 곧 자살의 증거가 될 수는 없다고 선을 긋지요.
두 주장을 나란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콜레라 사망설: 끓이지 않은 물 음용 → 콜레라균 감염 → 사망. 당시의 심각한 대유행 상황과 부합. 포즈난스키를 비롯한 다수의 전기 작가가 지지.
- 자살 강요설: 명예 법정 회부 → 독극물 음독 → 콜레라로 위장. 비정상적 시신 처리, 주치의의 콜레라 임상 경험 부족, 위생에 철저하던 인물이 끓이지 않은 물을 마신 부자연스러움을 간접 근거로 삼음. 오를로바와 전기 작가 데이비드 브라운이 지지.
양측 모두 결정적 단서는 내놓지 못합니다. 콜레라 사망설이 시대 배경에 비춘 ‘상식적’ 결론이라면, 자살 강요설은 공식 발표 이면의 ‘설명되지 않는 의문들’을 파헤치려는 논리적 시도라 할 수 있지요. 두 이론 모두 빈틈을 안고 있고, 그 빈틈을 메워 줄 핵심 증거는 이미 130년도 더 전에 역사의 뒤안길로 묻혔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어느 쪽 손을 들어 주든 《비창》이라는 음악의 무게는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자살이었다면 이 교향곡은 유서가 되고, 사고였다면 작곡가가 자기 죽음을 예언이라도 한 듯한 소름 끼치는 우연이 됩니다. 어느 쪽이든 듣는 사람을 놓아 주지 않지요.
악보로 따라가는 마지막 악장
《비창》을 둘러싼 미스터리의 핵심은 결국 4악장에 있습니다. 보통의 교향곡은 화려한 빠른 악장으로 끝맺는데, 차이콥스키는 정반대로 가장 느리고 어두운 악장을 맨 끝에 놓았거든요. 음악이 환호가 아니라 한숨으로 끝나는 구조입니다.
특히 1악장 도입부의 그 유명한 하강 선율과, 4악장에서 현악기가 서로 음을 주고받으며 만들어 내는 주제는 악보로 보면 더 또렷합니다. 귀로는 한 줄의 선율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제1·제2 바이올린이 음을 한 음씩 번갈아 던지며 짜낸 일종의 ‘착시’거든요. 마지막 음표는 ppp(피아니시시모),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여린 음으로 허공에 흩어집니다.
직접 악보를 펼쳐 보고 싶다면 저작권이 풀린 원전을 IMSLP의 교향곡 6번 Op. 74 페이지에서 무료로 내려받을 수 있습니다. 위 4악장 영상을 틀어 두고 총보를 한 장씩 넘기다 보면, 이 곡이 왜 ‘소리로 쓴 유언’이라 불리는지 손끝으로 느껴집니다.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의 무덤
차이콥스키의 장례식은 1893년 11월 9일 카잔 성당에서 거행됐습니다. 이후 유해는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의 티흐빈 묘지에 안장됐지요. 이 묘지에는 그보다 먼저 떠난 러시아의 거장들 — 보로딘, 글린카, 무소르그스키 — 이 잠들어 있었고, 훗날 림스키코르사코프와 발라키레프도 이곳에 묻힙니다.
수많은 거장의 묘비 사이에서도 차이콥스키의 무덤은 유독 참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사철 헌화된 꽃이 수북이 쌓여 있고요. 그의 음악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들이 두고 간 마음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130년 넘도록 풀리지 않는 죽음의 미스터리에 이끌려 찾아온 호기심 어린 발걸음도 섞여 있을 겁니다.
《비창》 4악장이 ‘슬픈 곡’이라는 오해를 따로 짚은 글에서 다뤘듯, 이 교향곡의 피날레는 생명의 불꽃이 서서히 사그라지듯 끝을 맺습니다. 작곡가 본인이 자신의 비극적 결말을 미리 내다보고 썼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결과적으로 이 곡은 그가 세상에 남긴 가장 솔직한 작별 인사가 되었지요.
진짜 사인이 콜레라였든 독극물이었든, 변하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의 마지막 교향곡이 서양 음악사상 가장 처연한 결말을 지닌 작품이라는 점입니다. 비극적 죽음이라는 배경이 이 곡을 더 애절하게 들리게 만든 것인지, 아니면 본래 그런 절망을 품고 태어난 곡인데 우리가 그 깊이를 미처 몰랐던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느 쪽이든 《비창》 4악장의 마지막 음이 사라진 뒤 찾아오는 그 무거운 정적 — 어쩌면 그 고요 속에 우리가 찾는 진실의 해답이 숨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이 절친한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며 태어난 걸작이듯, 위대한 음악은 종종 깊은 상실에서 피어납니다. 다만 차이콥스키의 경우는 결이 조금 다릅니다. 그의 음악이 타인의 상실에서 잉태된 것이 아니라, 종국에는 작곡가 자신이 영원한 상실의 대상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