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리오즈 – 환상교향곡, Op.14

짝사랑에 미쳐 아편을 삼키고 꿈에서 그녀를 죽였다

작곡가
에크토르 베를리오즈
(Hector Berlioz, 1803–1869)
곡명
환상교향곡 Op. 14
(Symphonie fantastique, Op. 14)
작곡
1830
초연
1830년 12월 5일, 파리
조성
C장조 (1악장)
편성
플루트 2(피콜로), 오보에 2(잉글리시 혼), 클라리넷 2(E♭ 클라리넷), 바순 4, 호른 4, 트럼펫 2, 코르넷 2, 트롬본 3, 오피클레이드 2(튜바), 팀파니 4, 큰북, 작은북, 심벌즈, 종 2, 하프 2, 현5부
악장 구성
5악장
I. Rêveries – Passions (c단조/C장조)
II. Un bal (A장조)
III. Scène aux champs (F장조)
IV. Marche au supplice (g단조)
V. Songe d’une nuit du Sabbat (C장조)

1악장. 몽상 – 정열
2악장. 무도회
3악장. 들판의 정경
4악장. 단두대로의 행진
5악장. 마녀들의 밤의 꿈
연주 시간
약 50분

1827년 9월 11일, 파리의 한 극장

스물네 살의 청년이 객석에 앉아 있습니다. 의대를 중퇴하고 아버지의 분노를 등진 채 음악의 길을 택한,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작곡가. 그의 이름은 에크토르 베를리오즈입니다.

무대 위에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오필리아 역을 맡은 아일랜드 출신 여배우 해리엇 스미스슨이 미쳐가는 장면을 연기하는 순간, 베를리오즈의 심장이 멈춥니다. 비유가 아닙니다. 그는 훗날 회고록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번개에 맞은 것 같았다.”

그날 이후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에크토르 베를리오즈 초상
에크토르 베를리오즈 초상, 1863년경 (BNF Gallica)

읽히지 않는 편지들

베를리오즈는 스미스슨에게 편지를 보내기 시작합니다. 한 통, 두 통, 수십 통. 그녀는 단 한 통도 읽지 않았습니다. 만남 자체를 거부했습니다. 파리에서 가장 주목받는 셰익스피어 여배우에게, 이름도 없는 작곡 지망생의 구애는 소음에 불과했을 겁니다.

요즘으로 치면 DM을 수백 개 보냈는데 전부 ‘읽씹’당한 셈입니다.

해리엇 스미스슨 초상
해리엇 스미스슨 초상, George Clint 作 (1820년대)

보통 사람이라면 포기했을 겁니다. 하지만 베를리오즈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 짝사랑의 광기를 통째로 음악에 쏟아붓기로 합니다. 프릭스 드 로마(로마 대상)에 거듭 낙선하며 쌓인 울분까지 더해져, 1830년 — 마침내 다섯 번째 도전에서 로마 대상을 거머쥔 바로 그 해에 — 전대미문의 교향곡이 탄생합니다.

제목: 《환상교향곡》. 정식 부제는 「어느 예술가의 생애의 에피소드(Épisode de la vie d’un artiste)」. 베를리오즈는 이 곡을 단순한 교향곡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야기로 프로그래밍한 것입니다.

처음 듣는다면 — 이것만 알고 들으세요

환상교향곡은 처음 듣는 분도 충분히 즐길 수 있습니다. 다만 몇 가지를 미리 알고 들으면 감동이 열 배는 깊어져요.

① 이데 픽스(idée fixe)를 기억하세요
1악장 첫머리에 플루트와 바이올린으로 제시되는 긴 멜로디가 있습니다. 이것이 ‘이데 픽스’ — 사랑하는 여인을 상징하는 선율입니다. 이 선율은 5악장 모두에 등장하되, 매번 모습이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아름답고 떨리는 사랑, 나중에는 찌그러지고 기괴한 마녀춤으로. 이 변화를 따라가는 것이 이 곡의 가장 큰 재미예요.

② 4악장에서 드럼 소리를 기다리세요
4악장 ‘단두대로의 행진’. 약 4분가량의 긴 행진곡 끝에 이데 픽스가 마지막으로 울리다가 — 갑자기 뚝 끊깁니다. 그 직후 관현악 전체가 ‘쾅’ 하고 한 방을 날립니다. 그것이 단두대의 칼날이 떨어지는 소리입니다. 준비하고 들으셔도 놀라게 되더군요.

③ 5악장 초반 종소리와 장송 미사를 들으세요
5악장이 시작되면 무대 뒤에서 종이 울립니다(튜바로 연주합니다). 그리고 중간에 「Dies Irae(진노의 날)」— 장례 미사에서 쓰는 그레고리안 성가가 등장합니다. 이것이 이데 픽스와 뒤엉켜 지옥의 파티가 됩니다.

④ 악장 사이 박수는 참는 것이 원칙이에요
클래식 공연장에서는 악장 사이에 박수를 치지 않는 것이 관례입니다. 4악장에서 5악장으로 넘어갈 때 특히 긴장감이 이어지니, 그 침묵을 함께 즐겨보세요.

⑤ 줄거리를 한 줄로 요약하면
“짝사랑에 절망한 예술가가 아편을 먹고 — 사랑한 여자를 죽이는 환각을 보고 — 단두대에서 처형되고 — 마녀들의 파티에서 그녀의 망령과 만나는 꿈.” 이걸 알고 들으면 5악장이 하나의 이야기처럼 들려요.

아편을 삼킨 예술가의 다섯 가지 환각

이 곡의 줄거리는 베를리오즈 자신이 직접 썼습니다. 그는 프로그램 노트를 작성해 청중에게 배포했는데, 이것이 음악사 최초의 공식 프로그램 노트 중 하나로 꼽혀요.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한 젊은 예술가가 사랑에 절망하여 아편을 삼킵니다. 치사량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아편은 그를 죽이지 않습니다. 대신 다섯 개의 환각 속으로 빠져듭니다.

1악장 ‘몽상과 열정’ (Rêveries – Passions) — 약 12분

사랑에 빠지기 전의 막연한 우울, 그리고 그녀를 본 순간의 폭발. 여기서 처음 등장하는 멜로디가 있습니다. 베를리오즈는 이것을 ‘이데 픽스(idée fixe)’, 즉 강박관념이라 불렀습니다.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이 선율이 반복됩니다. 집착의 사운드트랙이지요.

악장은 느린 서주로 문을 엽니다. c단조의 어둡고 막연한 분위기 — 아직 사랑을 만나기 전, 까닭 모를 우울에 잠긴 예술가의 내면입니다. 베를리오즈는 회고록에서 이 ‘막연한 영혼의 병(le vague des passions)’을 자신이 직접 겪은 감정으로 묘사했어요. 이 안개 같은 도입이 한참 이어지다가, 음악이 C장조로 환히 밝아지는 순간 이데 픽스가 솟아오릅니다.

약 1분 30초쯤, 현악과 목관이 조용히 주고받는 대화가 끝나고 플루트와 바이올린이 길고 가는 선율을 시작합니다. 이것이 이데 픽스의 첫 등장입니다. 천천히, 꿈꾸듯이. 사랑에 빠지기 직전의 두근거림입니다. 악장 후반부에서 이 선율이 오케스트라 전체로 폭발하는 순간도 놓치지 마세요 — 베를리오즈는 여기서 처음 본 순간의 충격을 그렸거든요.

2악장 ‘무도회’ (Un bal) — 약 6분

화려한 왈츠가 울리는 연회장. 하프 두 대가 만들어내는 왈츠 속에서, 갑자기 이데 픽스가 슬쩍 비집고 들어옵니다. 군중 속에서 문득 그녀의 얼굴이 스칩니다. 잠깐 등장했다가 다시 왈츠 속으로 묻혀요. 이 ‘슬쩍 끼어드는’ 순간을 찾아보세요.

한 가지 숨은 디테일. 베를리오즈는 훗날 이 악장에 코르넷(코르넷 아 피스통) 독주 선율을 덧붙이는 선택지를 남겼습니다. 정식 악보에는 없는 옵션이지만, 왈츠를 한층 화사하게 꾸며주는 이 코르넷 파트를 살리느냐 빼느냐는 지금도 지휘자마다 갈리는 대목이에요. 뒤투아나 가디너의 녹음에서는 이 코르넷이 들리니, 듣고 비교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3악장 ‘들판의 정경’ (Scène aux champs) — 약 16분

가장 긴 악장입니다. 잠시 평화로운 전원. 시작 부분에서 오보에와 잉글리시 혼이 멀리서 답하는 목동의 대화를 들으세요. 베를리오즈의 지시에 따르면, 잉글리시 혼 연주자는 무대 뒤편에 서서 연주해야 합니다. 오보에가 무대에서 부르면, 잉글리시 혼이 먼 곳에서 답하는 것입니다. 공간감을 활용한 이 배치는 1830년 기준으로 전례가 없었어요.

중간부에서 이데 픽스가 은은히 흐릅니다. 전원의 평화 속에서도 그녀에 대한 생각을 놓지 못하는 예술가의 불안. 바이올린의 떨림이 점점 고조되다가 다시 가라앉기를 반복합니다.

악장 막바지에 목동의 대화가 다시 나오는데, 오보에만 답하고 잉글리시 혼은 침묵합니다. 목동이 불렀는데 아무도 답하지 않는 것입니다 — 버림받은 느낌. 그리고 직후 팀파니 네 대가 천둥처럼 울립니다. 평화로운 풍경이 순식간에 불길한 어둠으로 바뀌는 순간이지요.

여기까지는 아름답습니다. 4악장부터 지옥이 시작됩니다.

환상교향곡 악보 표지
환상교향곡 악보 표지 (1845년 초판)

4악장 ‘단두대로의 행진’ (Marche au supplice) — 약 5분

안드레스 오로스코에스트라다 지휘, hr 심포니 오케스트라(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 전곡 실황. 4악장 단두대의 일격(약 41분 지점)과 5악장 마녀춤을 한 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어요.

예술가는 환각 속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살해합니다. 그리고 사형을 선고받고 단두대로 끌려갑니다. 행진곡이 울립니다. 무겁고, 잔혹하고, 기묘하게 흥겹습니다.

이 악장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마지막 30초입니다. 행진이 절정에 달한 뒤, 조용히 이데 픽스가 한 번 울립니다. 그녀의 얼굴이 떠오른 겁니다. 그리고 오케스트라 전체가 무겁게 한 방을 날립니다(ff 일격). 뚝. 끊깁니다. 관현악의 둔탁한 일격. 머리가 떨어졌습니다. 그 뒤 금관이 짧게 울리고 — 끝. 처형이 완료되었습니다. 이 일격 전후 3초가 이 교향곡 전체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이지요.

1830년에 이런 음악을 썼다는 게 믿기십니까. 훗날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 초연장을 폭동으로 만들기 83년 전의 일입니다.

5악장 ‘마녀들의 밤의 꿈’ (Songe d’une nuit du Sabbat) — 약 11분

지옥의 파티가 열립니다. 괴물과 마녀가 모여들고, 장송 미사곡 ‘디에스 이레(Dies Irae)’가 울려 퍼집니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서 — 이데 픽스가 다시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고귀하고 아름다운 멜로디가 아닙니다. 찌그러지고 왜곡된, 천박한 춤곡으로 변해 있어요.

사랑했던 여인이 마녀가 되어 춤추고 있는 겁니다.

세 가지 순간을 기다리세요. 첫째, 시작 직후 첼로와 콘트라베이스가 기묘한 소리를 냅니다(콜레뇨 주법 — 활털(말총) 대신 활대의 나무 부분으로 줄을 두드립니다). 1830년 당시로서는 거의 들어본 적 없는 음향이라, 마른 뼈가 부딪히는 듯한 그 소리에 청중이 어리둥절했다고 해요. 둘째, 무대 뒤에서 종이 울리고 이데 픽스가 찌그러진 E플랫 클라리넷 소리로 등장합니다. 사랑의 선율이 가장 천박하게 일그러지는 순간입니다. 셋째, 그 직후 트롬본과 튜바가 ‘디에스 이레’ 성가를 연주합니다. 이 셋이 겹치며 마지막 푸가풍의 마녀춤으로 폭주하지요.

짝사랑의 끝이 이렇습니다. 숭배가 환멸로, 환멸이 악마화로. 베를리오즈는 자기 내면의 가장 어두운 곳을 송두리째 오케스트라에 펼쳐놓았습니다. 악마와 계약했다는 소문이 돌던 파가니니조차 이 곡을 듣고 감탄했을 정도예요.

베를리오즈 캐리커처
거대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베를리오즈를 풍자한 캐리커처

이데 픽스 — 음악사의 혁명

환상교향곡이 지금까지 교과서에 실리는 이유는 스캔들적인 러브스토리 때문만이 아닙니다. 이 작품이 음악의 문법을 바꿔놓았기 때문이지요.

그 핵심에 있는 것이 ‘이데 픽스(idée fixe)’입니다. 직역하면 ‘고정관념’ 또는 ‘강박관념’입니다. 정신의학 용어이기도 했어요 — 1830년대 당시 심리학에서 어떤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병적 집착을 뜻했습니다. 베를리오즈는 이 임상 용어를 음악 기법의 이름으로 가져온 겁니다.

기법 자체는 간단합니다. 하나의 멜로디를 정해놓고, 5악장 전체에 걸쳐 이 멜로디를 반복·변형시킵니다. 그런데 변형의 방식이 드라마틱하더군요.

  • 1악장: 플루트와 바이올린이 연주하는 길고 섬세한 선율. 처음 만난 순간의 떨림.
  • 2악장: 왈츠 리듬 속에 이데 픽스가 비집고 들어옵니다. 군중 속에서 문득 그녀의 얼굴을 본 것처럼.
  • 3악장: 들판의 목가적 분위기 속에서 이데 픽스가 잠시 평화롭게 흐릅니다. 하지만 불안이 완전히 가시지 않습니다.
  • 4악장: 행진곡이 끝나기 직전, 이데 픽스가 잠깐 울리다가 뚝 끊깁니다. 단두대의 칼날.
  • 5악장: 이데 픽스가 다시 등장하지만 — 처음과는 전혀 다릅니다. 박자가 뒤틀리고, 악기가 찌그러지고, 사랑의 선율이 저속한 마녀춤으로 변해 있습니다. 숭배가 환멸이 되었습니다.

이 기법이 왜 혁명적이냐고요?

베를리오즈 이전에도 주제 변형 기법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데 픽스처럼 하나의 선율이 극적인 의미를 띤 채 전악장에 걸쳐 심리적으로 변형된 것은 없었어요. 이것은 단순한 작곡 기법을 넘어 ‘음악으로 심리를 그리는’ 언어였습니다.

한 세대 뒤, 리하르트 바그너가 악극을 작곡하며 ‘라이트모티프(Leitmotiv)’ 기법을 본격적으로 발전시킵니다. 특정 인물이나 감정, 상황을 대표하는 짧은 선율을 작품 전체에 걸쳐 반복하는 것이지요. 지금도 영화 음악에서 쓰이는 그 기법 — 《스타워즈》의 ‘다스베이더 테마’, 《반지의 제왕》의 각 캐릭터 테마가 바로 이 전통 위에 있습니다.

그 라이트모티프의 먼 조상이 베를리오즈의 이데 픽스입니다. 바그너보다 한 세대 가까이 앞섰습니다.

1830년, 스물여섯 살의 청년이 짝사랑의 광기를 쏟아내며 만든 교향곡이 — 그 후 190년이 지나도록 영화와 드라마와 게임의 배경음악이 되는 전통을 만들어낸 겁니다.

환상교향곡의 혁신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베를리오즈는 오케스트라 편성 자체를 전례 없는 규모로 확장했어요. 하프 두 대, 잉글리시 혼, E플랫 클라리넷, 종(벨), 네 대의 팀파니 — 당시 기준으로는 파격적인 편성이었어요. 이 거대한 편성으로 그는 각 장면에 필요한 음색을 정교하게 배치했습니다. 3악장에서 잉글리시 혼으로 그린 목동의 외로운 피리 소리, 5악장에서 E플랫 클라리넷이 찌그러뜨리는 이데 픽스 — 이런 ‘음색의 드라마’는 훗날 관현악법 교과서의 표본이 됩니다.

실제로 베를리오즈가 1843년에 출간한 《관현악법 대론(Grand traité d’instrumentation et d’orchestration modernes)》은 역사상 가장 체계적인 관현악법 교재 중 하나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비롯한 후대 작곡가들의 필독서가 되었습니다. 환상교향곡은 그 이론의 실험장이었던 셈이지요.

디에스 이레 — 5악장에 끌려나온 죽음의 성가

5악장에서 트롬본과 튜바가 무겁게 깔아놓는 그 선율, ‘디에스 이레(Dies Irae)’를 따로 짚어볼까요. 이 곡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열쇠거든요.

디에스 이레는 ‘진노의 날’이라는 뜻의 라틴어로, 13세기에 만들어진 중세 성가입니다. 죽은 자를 위한 미사, 즉 레퀴엠에서 최후의 심판을 노래하는 대목에 쓰였습니다. 수백 년 동안 장례식장에서 울리던, 그 시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죽음의 멜로디’였어요. 가톨릭 국가 프랑스의 청중에게는 더더욱 그랬습니다.

베를리오즈는 이 신성한 성가를 마녀들의 파티 한복판에 끌어다 놓습니다. 그것도 경건하게가 아니라 — 빠르고 천박한 춤곡으로 비틀어서요. 거룩한 진혼의 노래가 악마의 무도회 반주로 전락하는 셈입니다. 1830년 청중에게 이건 단순한 인용이 아니라 도발이었습니다. 교회의 가장 엄숙한 음악을 조롱한 것이니까요.

그런데 바로 이 도발이 거대한 전통의 출발점이 됩니다. 베를리오즈가 디에스 이레를 ‘죽음의 음악적 기호’로 활용한 뒤, 수많은 작곡가가 같은 선율을 가져다 썼어요. 리스트의 《죽음의 무도(Totentanz)》,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Danse macabre)》, 그리고 라흐마니노프 — 그는 《죽음의 섬》,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교향적 무곡》에 이르기까지 평생 디에스 이레에 사로잡혔습니다. 오늘날에도 이 선율은 영화에서 불길함을 암시할 때 단골로 등장합니다. 《샤이닝》의 오프닝, 《라이온 킹》의 한 장면에도 숨어 있지요.

죽음을 표현하고 싶을 때 작곡가들이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는 그 멜로디 — 그 관행의 문을 연 사람이 스물여섯 살의 베를리오즈였습니다.

피아노도 칠 줄 모르던 혁명가

여기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 관현악의 색채를 음악사에서 가장 대담하게 다룬 이 작곡가는, 정작 피아노를 칠 줄 몰랐습니다.

당시 거의 모든 작곡가는 피아노 앞에서 화성을 더듬으며 곡을 썼습니다. 베토벤도, 쇼팽도, 리스트도 그랬지요. 그런데 베를리오즈는 달랐어요. 그가 다룰 줄 아는 악기는 플루트와 기타뿐이었습니다. 화성을 손가락으로 확인할 수단이 없으니, 모든 소리를 머릿속에서 직접 조립해야 했습니다. 역설적이지만 바로 그 점이 그를 자유롭게 만들었습니다. 피아노 건반의 한계 안에서 사고하지 않았기에, 그는 처음부터 오케스트라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악기로 상상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의 출발점은 음악이 아니라 의학이었습니다. 시골 의사였던 아버지는 아들도 의사가 되기를 바랐고, 베를리오즈는 1821년 파리로 올라가 의대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해부 실습실의 광경에 진저리를 치고는 오페라 극장으로 도망쳤어요. 결국 의학을 접고 음악원에 들어간 그를, 아버지는 한동안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로마 대상도 순탄치 않았습니다. 프랑스 작곡가의 등용문이었던 이 상에 그는 여러 차례 도전했다가 번번이 미끄러졌습니다. 심사위원들에게 그의 음악은 지나치게 거칠고 규칙을 무시한 것으로 보였던 모양이에요. 환상교향곡을 쓴 바로 그 1830년에야 마침내 1등상을 받습니다. 이미 세상을 뒤흔들 교향곡을 완성해 놓고도, 제도권의 인정은 그 뒤에야 따라온 셈이지요.

피아노도 못 치고, 의대에서 도망쳤고, 권위 있는 상에는 거듭 떨어졌던 이단아. 그가 음악의 문법을 바꿔놓았다는 사실은 묘한 위안을 줍니다. 정석을 밟지 않은 사람이 가장 멀리 갔으니까요.

1832년의 반전 — 해리엇이 객석에 앉은 날

1830년 12월 5일. 파리 음악원 대강당은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프랑수아 아브네크가 지휘봉을 들었고, 베를리오즈는 흥분과 공포가 뒤섞인 채 어딘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 음악회가 자신의 전부를 걸었던 작품의 첫 번째 공연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정작 이 교향곡의 주인공 — 해리엇 스미스슨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그 무렵 파리를 떠나 있었고, 베를리오즈라는 이름을 들어봤다 하더라도 그냥 스쳐지나가는 팬 정도로 기억했을 겁니다. 수십 통의 편지를 보내온 그 집요한 청년이 자신을 위해 50분짜리 교향곡을 썼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겠지요.

초연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청중은 놀라움과 혼란 사이에서 갈렸습니다. 누구도 이런 교향곡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단두대, 마녀, 아편 — 교향곡의 소재로는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었어요. 하지만 프란츠 리스트는 즉시 이 곡에 매료되어 피아노 독주용 편곡 작업에 착수했고, 파리 음악계에는 ‘베를리오즈’라는 이름이 확실히 각인됩니다.

반전은 2년 뒤에 일어납니다. 1832년, 베를리오즈는 환상교향곡의 개정판 연주회를 엽니다. 이번에는 뒤이어 《레리오(Lélio)》라는 독백극을 함께 붙였어요. 레리오는 반쯤 자전적인 작품으로, 환상교향곡의 꿈에서 깨어난 예술가가 직접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도 이데 픽스가 다시 울립니다.

어떤 경위로 그날 스미스슨이 그 연주회에 왔는지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앉았고, 프로그램 노트를 읽었고 — 그리고 그 ‘예술가’가 바로 베를리오즈 자신이며, 그 ‘사랑하는 여인’이 자신임을 알았습니다.

5년 전 무대에서 오필리아를 연기하던 그 여배우가, 지금 자신의 이름을 건 교향곡 앞에 앉아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녀가 벼락에 맞았습니다.

둘은 만났고, 사랑에 빠졌고, 1833년에 결혼합니다. 교향곡 한 곡이 편지 수백 통이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낸 거예요. 프란츠 리스트가 피아노 편곡까지 만들며 열광했던 이 곡은, 작곡가의 인생까지 바꿔놓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끈질긴 프러포즈는 아마 이 음악회였을 겁니다. 다만 5년이 걸렸다는 게 문제지만요.

결혼과 결별 — 현실이 된 환상의 끝

하지만 현실의 사랑은 환상교향곡만큼 극적이지 못했습니다. 결혼 초기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어요. 언어 장벽이 첫 번째 문제였습니다. 스미스슨은 프랑스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고, 베를리오즈의 영어 역시 유창하지 않았습니다. 무대 위의 오필리아를 사랑했던 베를리오즈에게, 일상 속의 해리엇은 점점 낯선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스미스슨의 연기 경력도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파리 관객의 취향은 빠르게 변했고, 한때 셰익스피어 열풍을 이끌었던 그녀의 인기는 사그라들었습니다. 1833년 결혼 무렵에는 이미 무대에서 입은 부상과 빚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경제적 곤란이 두 사람의 관계에 그림자를 드리웠지요.

베를리오즈 쪽도 사정이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파리에서 음악가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았고, 비평가 겸 칼럼니스트로 글을 쓰며 수입을 보충해야 했습니다. 두 사람의 아들 루이가 태어났지만, 아이의 존재가 불안정한 가정에 안정을 가져다주지는 못했어요.

1840년대 초, 베를리오즈는 가수 마리 레치오와 연인 관계에 들어갑니다. 머지않아 스미스슨과의 별거가 시작되었고, 둘 사이의 연락은 점차 끊겼습니다. 스미스슨은 건강이 급속히 악화됩니다. 뇌졸중이 반복되며 반신불수 상태에 이르렀고, 파리 외곽의 작은 집에서 거의 혼자 지내야 했어요. 베를리오즈는 별거 중에도 그녀의 생활비를 보내며 완전히 등을 돌리지는 않았습니다.

1854년 3월 3일, 해리엇 스미스슨은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53세. 베를리오즈는 회고록에서 그녀의 죽음을 담담하게 기록했지만, 환상교향곡을 연주할 때마다 그 1827년의 밤을 떠올리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베를리오즈가 사랑한 것은 정말 해리엇 스미스슨이었을까요, 아니면 무대 위의 오필리아라는 환상이었을까요. 어쩌면 둘 다였을 겁니다. 그리고 그 구분이 불가능한 감정 — 집착과 숭배, 광기와 창조가 뒤엉킨 그 감정이 — 20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콘서트홀을 가득 채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상교향곡은 베를리오즈의 가장 위대한 유산으로 남았습니다. 오늘날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가 이 곡을 레퍼토리에 반드시 포함시키며, 특히 신진 지휘자의 역량을 시험하는 작품으로도 자주 선택돼요. 거대한 편성의 균형, 극단적인 다이내믹, 그리고 각 악장의 캐릭터를 살려내는 능력이 한꺼번에 요구되기 때문이지요.

역사상 가장 위험한 러브레터는 이렇게 완성되었습니다. 음악으로 쓴 자서전이라면, 차이콥스키의 《비창》도 빠질 수 없습니다.

어떤 연주로 들을까 — 명연 가이드

환상교향곡은 녹음마다 인상이 꽤 달라지는 곡입니다. 같은 악보인데 단두대의 일격이 묵직한 연주가 있고, 5악장 마녀춤이 광기로 번뜩이는 연주가 있어요. 처음 음반을 고르는 분께 네 갈래를 추천합니다.

  • 샤를 뮌슈 · 보스턴 심포니 — 이 곡의 고전으로 꼽히는 연주입니다. 프랑스 출신 지휘자 뮌슈는 1950~60년대에 보스턴 심포니와 여러 차례 이 곡을 녹음했는데, 격정적인 추진력과 즉흥적인 열기가 일품이에요. ‘베를리오즈는 뮌슈로 시작하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닙니다.
  • 콜린 데이비스 — 평생 베를리오즈를 파고든 지휘자입니다. 영국 출신답지 않게(?) 베를리오즈 전문가로 통했고, 런던 교향악단·콘세르트헤바우 등과 남긴 여러 녹음은 균형과 서사가 탄탄합니다. 광기보다 구조를 또렷하게 듣고 싶을 때 좋아요.
  • 존 엘리엇 가디너 · 혁명과 낭만 오케스트라 — 시대악기 연주입니다. 1830년 당시의 악기와 주법으로 되살린 음색이라, 오피클레이드의 거칠고 컬컬한 저음이나 양가죽 팀파니의 둔탁한 타격이 그대로 들려요. 베를리오즈가 실제로 들었을 소리에 가장 가깝다는 평을 받습니다.
  • 샤를 뒤투아 · 몬트리올 심포니 — 색채와 투명함으로 정평이 난 콤비입니다. 데카 특유의 화려한 녹음과 어우러져, 환상교향곡의 정교한 관현악법을 한 음 한 음 또렷하게 들려줘요. 음향적 쾌감으로는 손에 꼽힙니다.

위 영상의 오로스코에스트라다 / hr 심포니 실황은 무료로 전곡을 화면과 함께 볼 수 있어, 첫 감상으로 특히 좋습니다. 지휘자의 손끝과 단두대의 일격을 눈으로 같이 확인할 수 있거든요.

악보와 함께 듣기

환상교향곡 전곡 — 총보를 따라가며 들을 수 있는 영상입니다.

악보를 눈으로 따라가며 들으면, 이데 픽스가 어떻게 변형되는지 한눈에 보입니다. 특히 4악장 마지막 부분에서 이데 픽스가 끊기는 순간과 5악장에서 찌그러진 형태로 재등장하는 순간은 악보로 확인하면 훨씬 강렬하더군요.

악보를 처음 읽는 분이라면 1악장 도입부의 이데 픽스 선율만 눈으로 따라가 보세요. 플루트와 제1 바이올린 파트에 C장조로 제시되는 40마디짜리 긴 선율입니다. 이 선율의 형태를 기억해두면, 이후 악장에서 변형될 때 ‘아, 이것이구나’ 하고 알아볼 수 있어요.

원본 악보는 IMSLP에서 누구나 무료로 열람 가능하거든요. → 환상교향곡 Op.14 악보 보기 (IMSLP)

자주 묻는 질문

환상교향곡은 몇 악장이고 몇 분짜리인가요?

전 5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연주 시간은 약 50~55분입니다. 1악장 ‘몽상과 열정’, 2악장 ‘무도회’, 3악장 ‘들판의 정경’, 4악장 ‘단두대로의 행진’, 5악장 ‘마녀들의 밤의 꿈’ 순서로 이어집니다.

이데 픽스(idée fixe)가 무엇인가요?

‘강박관념’이라는 뜻의 프랑스어입니다. 베를리오즈가 환상교향곡에서 고안한 기법으로, 사랑하는 여인을 상징하는 하나의 멜로디가 다섯 악장 전체에 걸쳐 반복·변형됩니다. 바그너의 라이트모티프(Leitmotiv)보다 한 세대 앞선 개념으로 평가받습니다.

베를리오즈와 해리엇 스미스슨은 실제로 결혼했나요?

네, 1833년에 결혼했습니다. 환상교향곡 개정판 연주회(1832년)에서 스미스슨이 직접 프로그램 노트를 읽고 자신이 그 ‘사랑하는 여인’임을 깨달은 뒤 두 사람이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않아 1840년대에 별거에 들어갔고, 스미스슨은 1854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환상교향곡을 처음 듣는다면 어떤 악장부터 들어야 하나요?

가능하면 1악장부터 순서대로 듣는 것을 권합니다. 이 곡은 하나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표제음악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부족하다면 4악장 ‘단두대로의 행진’부터 들어보세요. 행진곡 끝에 칼날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오는 순간이 이 곡의 가장 극적인 장면입니다.

환상교향곡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나요?

1830년에 작곡된 5악장 구성의 표제음악으로, 한 예술가가 실연의 아픔으로 아편을 먹고 꾸는 기괴한 꿈을 다룹니다. 사랑하는 여인은 이데 픽스라는 선율로 표현되며, 꿈속에서 예술가는 그녀를 살해하고 단두대에서 처형된 뒤 마녀들의 파티에서 다시 그녀와 마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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