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확실한 사실: 지금 우리가 아는 ‘엘리제를 위하여’라는 제목은 베토벤이 죽고 40년 뒤인 1867년에 처음 활자로 공개됐습니다. 음악학자 루트비히 놀은 당시 남아 있던 자필 악보를 직접 보고 옮겨 적었고, 그 악보는 이후 사라졌습니다.
가장 흔한 오해: “엘리제는 사실 테레제였고, 이름을 잘못 읽어 제목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가설일 뿐 확정된 사실이 아닙니다. 오독설의 근거는 결정적 증거가 아니라 여러 정황과 추정에 머뭅니다.
가장 의외의 사실: 유력 후보는 모두 세 명인데, 정작 ‘엘리제’라는 애칭으로 실제로 불렸다는 기록이 남은 사람은 테레제가 아니라 소프라노 엘리자베트 뢰켈입니다. 그마저도 베토벤이 그를 위해 곡을 썼다는 문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피아노를 갓 배우기 시작한 아이의 서툰 손끝부터 휴대폰 벨소리, 심지어 쓰레기차 후진 안내음까지. ‘엘리제를 위하여’는 그야말로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는 친숙한 곡입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베토벤이 직접 그린 원본 악보는 세상에 없습니다. 감쪽같이 사라졌거든요. 오늘날 우리가 연주하고 듣는 악보는 음악학자 루트비히 놀이 원본을 베껴 적어 1867년에 출판한 기록에 기대고 있습니다.
루트비히 놀이 세상에 내놓은 악보에는 분명 ‘엘리제를 위하여’라는 번듯한 제목이 적혀 있었습니다. 문제는 정작 그 엘리제가 누구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죠. 곡이 쓰인 지 20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학자들은 세 명의 유력한 후보를 도마 위에 올려두고 옥신각신합니다. 이제부터 각 후보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기록과 후대에 슬그머니 덧붙여진 이야기를 차분하게 발라내 보겠습니다.

여기까지는 대체로 이견이 없습니다
먼저 학계에서 대체로 이견이 없는 사실부터 짚어보겠습니다. 이 곡은 베토벤(1770~1827)이 마흔 무렵에 쓴 가단조 바가텔로, 연주 시간은 3분 남짓입니다. 바가텔은 ‘자잘한 소품’이라는 뜻으로, 짧고 가벼운 피아노 곡을 가리키죠. 작품 목록 번호는 WoO 59이며, 흔히 ‘바가텔 25번’이라고도 부릅니다. 여기서 WoO란 ‘작품번호가 없는 곡’을 뜻하는 독일어 약자입니다. 베토벤이 생전에 정식 작품번호를 붙이지 않은 곡을 훗날 학자들이 별도 목록으로 묶어 표기한 것이죠. 이 곡 역시 작곡가 생전에는 출판되지 않다가, 사후에 발견된 기록을 통해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하나 등장합니다. 우리가 아는 ‘엘리제’라는 이름은 단 한 사람이 남긴 기록에서 나왔거든요. 베토벤이 직접 쓴 자필 악보는 분실됐고, 이 악보를 마지막으로 확인했다고 알려진 인물은 음악학자 루트비히 놀입니다. 그는 베토벤이 세상을 떠나고 40년이 지난 1867년, 슈투트가르트 코타 출판사에서 펴낸 자신의 책 《베토벤의 새 편지들》에 이 곡을 처음 활자로 옮겨 실었습니다.[1]

놀이 베껴 적었다는 헌정문의 원문은 이렇습니다. “Für Elise am 27 April zur Erinnerung von L. v. Bthvn”. 우리말로 꽤 자연스럽게 옮기면 “엘리제를 위하여, 4월 27일, 추억을 담아, L. v. 베토벤” 정도가 됩니다.[2] 심지어 이 메모에 적힌 날짜가 1810년이라는 정보조차 오직 놀의 기록에서만 나옵니다. 곡의 운명을 결정지은 제목과 헌정 날짜 같은 굵직한 단서들이 모조리 놀이라는 한 사람의 확인과 펜 끝에 매달려 있는 셈입니다. 정작 대조해 볼 원본은 허공으로 증발해버렸으니 그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제대로 옮겼는지 확인할 길은 영영 막혀버렸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놀의 기록 자체를 의심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피아니스트이자 음악학자인 루카 키안토레는 2010년 저서에서, 놀 자신이 직접 보았다고 밝힌 자필 원본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수 있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그에 따르면, 놀이 베토벤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곡을 직접 다듬어 완성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키안토레는 지금 전해지는 형태가 베토벤 특유의 피아노 어법과 사뭇 다르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죠.[8] 다만 원본이 사라진 상태라 이 견해 역시 증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곡의 성립 과정을 밝힐 핵심 정보가 오직 놀 한 사람의 증언에 의존한다는 점이 바로 이런 논쟁을 낳았습니다.
확인된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베토벤은 이 곡을 한 번 쓴 뒤 그대로 두지 않고, 1822년 무렵 다시 손보려 한 흔적을 남겼거든요. 음악학자 배리 쿠퍼는 관련 자료를 연구해, 이 시기에 베토벤이 반주 방식과 빠르기 등을 어떻게 수정하려 했는지 제시했습니다.[7] 오늘날 우리가 흔히 듣는 곡은 놀의 기록을 통해 전해진 1810년 형태를 바탕으로 합니다. 그러나 이 수정 흔적은 베토벤이 1822년에 이르러 곡을 1810년 형태와 다르게 고치려 했음을 보여 줍니다. 이 대목까지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거의 없습니다.
악보는 테레제가 남긴 자료에서 발견되어 전해졌습니다
이 곡의 악보는 테레제 말파티가 남긴 자료에서 발견된 뒤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다수 학자는 이러한 전승 경로를 받아들이지만, 세부 경위를 모두 확정할 결정적인 증거는 아직 부족합니다.
테레제 폰 드로스디크, 그러니까 결혼 전 테레제 말파티라는 이름을 썼던 이는 베토벤이 한때 마음에 두었던 여성입니다. 1851년 테레제가 세상을 떠난 뒤 그가 보관하던 이 곡의 악보는 음악가 루돌프 샤흐너에게 전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샤흐너의 어머니이자 뮌헨에 살던 바베테 브레들이 악보를 이어받아 간직하다가, 1865년에 이르러서야 음악학자 루트비히 놀이 이를 베끼도록 허락했죠.[3]

이렇게 이어져 온 전승 경로는 이 곡과 말파티 집안의 관련성을 뒷받침해 주는 제법 유력한 정황입니다.
다만 “악보가 테레제의 유품에서 나왔다”는 사실만으로 “이 곡은 테레제를 위해 쓴 것이다”라는 결론으로 곧장 건너뛸 수는 없습니다. 앞의 것이 악보의 출처를 밝히는 사실이라면, 뒤의 것은 헌정 대상이 누구인지 짐작하는 주장이거든요. 테레제가 진짜 헌정 대상이었다고 확정하려면 원본 악보에 적힌 헌정 문구를 직접 확인해야 마땅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원본은 이미 사라지고 없습니다. 결국 테레제와의 관련성은 유력한 정황으로 남을 뿐, 확정된 사실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1809년에서 1810년 사이, 서른아홉 살 안팎이던 베토벤은 열여덟 살 무렵의 테레제 말파티에게 마음을 두었습니다. 두 사람은 베토벤의 친구 이그나츠 폰 글라이헨슈타인을 통해 알게 되었고, 베토벤이 내심 결혼까지 생각했다는 정황 역시 편지에 남아 있죠. 그러나 두 사람의 인연은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테레제는 훗날 빌헬름 폰 드로스디크 남작과 부부의 연을 맺었습니다.
엘리제가 누구인지를 놓고 학자들의 견해가 갈립니다
이제 엘리제의 정체를 둘러싼 세 가지 주장을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심판을 봐줄 원본 악보가 남아 있지 않은 탓에, 어느 후보가 실제 엘리제인지 속 시원히 확정할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후보 1. 테레제 말파티: 이름을 잘못 읽었다는 설. 가장 오래되고 널리 알려진 주장으로, 음악학자 막스 웅거가 1923년에 제기했습니다. 웅거는 필사자 루트비히 놀이 베토벤 특유의 악필 때문에 곡 제목을 “Für Therese(테레제를 위하여)”가 아닌 “Für Elise(엘리제를 위하여)”로 잘못 읽어 옮겼다고 보았죠.[4] 원본 악보가 테레제의 유품에서 발견되었다는 정황도 이 주장에 힘을 보태면서, 오독설은 아주 오랫동안 가장 유력한 가설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다만 이 주장에도 뼈아픈 약점은 있습니다. 놀은 편지와 악보를 오랫동안 다루어 온 음악학자였으니, 그가 이름 전체를 엉뚱하게 옮겼다고 섣불리 단정하기는 꽤 어렵거든요. 오독설의 근거 역시 결정적인 증거라기보다는 여러 정황과 추정에 머무는 수준입니다. 물론 원본으로 확인할 수 없다는 근본적인 한계는 다른 후보설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문제이기는 합니다.
후보 2. 엘리자베트 뢰켈: 실제로 ‘엘리제’라고 불린 사람. 독일 음악학자 클라우스 마르틴 코피츠가 2010년에 제기한 주장입니다.[5] 소프라노 가수 엘리자베트 뢰켈(1793~1883)은 훗날 작곡가 요한 네포무크 훔멜과 결혼한 인물입니다. 코피츠는 뢰켈이 주변 사람들에게 실제로 ‘엘리제’라는 애칭으로 불렸다는 사실을 핵심 근거로 제시했죠. 성악가 안나 밀더하웁트만이 1830년에 보낸 편지에서도 뢰켈을 ‘엘리제’라고 불렀거든요. 또한 뢰켈은 1808년부터 베토벤과 알고 지냈으며, 악보에 적힌 날짜는 뢰켈이 빈을 떠나던 무렵과 절묘하게 겹칩니다.

이 주장은 제목의 ‘엘리제’를 누군가의 오독으로 돌리지 않고도 실존 인물과 바로 연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오독설이 제목이 잘못 옮겨졌다고 보는 반면, 뢰켈 설은 기록된 제목의 철자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셈이죠. 그러나 베토벤이 뢰켈을 위해 이 곡을 썼다고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문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후보 3. 엘리제 바렌스펠트: 열세 살의 신동. 음악학자 리타 슈테블린이 2014년에 제기한 주장입니다.[6] 엘리제 바렌스펠트는 당시 열세 살이었던 신동 가수였습니다. 바렌스펠트는 메트로놈을 개량해 보급한 멜첼의 집에서 지냈는데, 마침 그 집 건너편에 살던 테레제 말파티에게 피아노를 배웠을 가능성이 제기되었습니다. 슈테블린은 이 관계를 근거로 삼아, 베토벤이 테레제에게 호의를 보이려고 바렌스펠트에게 곡을 헌정했을 수 있다고 보았죠. 다만 슈테블린 자신도 이 가설에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이 남아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세 후보가 내세우는 무기는 제각각입니다. 테레제 설은 악보가 잠들어 있던 장소를, 뢰켈 설은 실제로 불렸던 애칭을, 바렌스펠트 설은 테레제에게 피아노를 배웠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근거로 들이밀고 있죠. 하지만 어느 쪽도 나머지 둘을 깨끗하게 물러나게 할 결정타를 날리지 못해, 엘리제의 진짜 정체는 여전히 안개 속에 있습니다. 베토벤이 남긴 ‘불멸의 연인’ 편지에는 수신인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아 200년이 넘도록 여러 후보가 오르내렸습니다. 편지의 주인을 가려낼 결정적인 원본이나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점에서, 두 수수께끼는 묘하게도 닮은꼴입니다.
사실로 확인되지 않았지만 사라지지 않는 이야기
이제부터는 뚜렷한 뼈대가 없는데도 사람들의 입길을 오르내리며 마치 역사적 사실처럼 굳어버린 이야기들을 짚어보겠습니다. 제법 흥미로운 일화들이 섞여 있지만, 이 이야기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곤란하거든요.
가장 널리 퍼진 것은 말파티 집안의 저녁 모임에 얽힌 일화입니다. 1810년 봄, 베토벤이 그 자리에서 손님들에게 이 곡을 연주한 뒤 테레제에게 청혼하려 했지만, 펀치를 잔뜩 마시고 취하는 바람에 연주도 청혼도 하지 못했다는 내용이죠. 이 일화의 근거로는 글라이헨슈타인이 고향 부모에게 보낸 편지가 제시됩니다. 편지에는 베토벤의 음주를 언급한 대목이 분명 있지만, “그래서 청혼하지 못했고 대신 이 곡을 테레제에게 남겼다”는 인과관계까지 기록되어 있지는 않거든요. 술 때문에 청혼에 실패하고 곡을 남겼다는 결말은 후대에 덧붙은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또 하나 제법 널리 퍼진 이야기는 “엘리제는 베토벤이 평생을 그리워한 단 하나의 잃어버린 뮤즈”라는 설명입니다. 워낙 낭만적인 구도라 시선을 잡아끌기에는 제격이지만, 애당초 엘리제가 누구였는지조차 밝혀지지 않은 마당에 그 미지의 인물을 생애 유일의 뮤즈라고 단정 지을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종종 이 곡을 소개하는 글에서는 “엘리제는 사실 테레제였다”는 해설이 이미 확정된 사실인 양 버젓이 등장하곤 합니다. 하지만 테레제는 그저 여러 후보 중 한 사람일 뿐이며, 수많은 가설 중 하나가 입에서 입을 타는 동안 정설처럼 단단하게 굳어버린 것에 불과해 보입니다.
한국에서 이 곡은 제법 엉뚱한 장소에서도 자주 귓가를 맴돕니다. 피아노 학원에서 배우는 연주곡을 넘어, 아이스크림 트럭을 알리는 음악이나 쓰레기차의 후진 안내음, 그리고 휴대폰 벨소리로도 부지런히 쓰이거든요. 이렇듯 많은 사람이 멜로디를 외우다시피 할 만큼 유명세를 타는 곡이지만, 정작 제목에 이름을 올린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습니다.
아래는 피아니스트 빌헬름 켐프의 연주입니다. 이 짧은 곡에 이토록 긴 수수께끼가 꼬리표처럼 붙어 있다는 사실을 찬찬히 짚고 나면, 익숙하던 첫 세 음이 사뭇 다르게 다가올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단정하지 마세요: 해석과 사실의 경계
마지막으로, 해석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가단조 선율은 이룰 수 없는 사랑 앞에서 베토벤이 흘린 눈물이다”라거나, “되풀이되는 주제 선율에는 떠나간 엘리제를 향한 그리움이 담겼다” 같은 설명이 종종 등장하곤 하죠. 물론 곡을 들으며 그렇게 느낄 수는 있습니다. 가단조의 애틋한 선율에서 슬픔이나 그리움을 떠올리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상이니까요.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음악을 감상하며 자유롭게 떠올릴 수 있는 해석일 뿐, 문서로 확인된 작곡가의 의도는 아닙니다. 애당초 곡을 받을 사람조차 확정되지 않은 마당에, 이 곡을 절절한 실연의 고백이라고 단정 짓기는 곤란합니다. 이 곡은 바가텔, 다시 말해 짧은 소품으로 분류되며 연주 시간도 3분 안팎에 불과하지만, 그렇다고 장르와 길이만 잣대 삼아 작품에 담긴 감정의 크기까지 함부로 재단할 수는 없습니다. 음악을 들으며 그려본 한 편의 이야기를 베토벤이 직접 밝힌 본뜻인 양 둔갑시켜서는 안 되는 법이죠.
결국 감상과 사실을 가르는 기준은 근거의 유무에 있습니다. 이 곡에서 짙은 슬픔을 느끼는 것은 온전히 개인의 감상이니 굳이 옳고 그름을 따져 물을 이유가 없죠. 하지만 이를 두고 특정 인물을 향한 실연의 생생한 기록이라고 주장하려면, 반드시 이를 뒷받침할 자료가 뒤따라야 합니다. 선율 위에서 자유롭게 감상의 날개를 펴는 것은 좋지만,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낭만적인 이야기들을 덜컥 사실처럼 품어버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엘리제를 위하여’의 엘리제는 결국 누구인가요?
“사실은 테레제였는데 이름을 잘못 읽은 것”이라는 말은 맞나요?
왜 이렇게까지 답이 안 나오나요?
베토벤은 이 곡을 언제 쓴 건가요?
참고 자료
- [1] Wikipedia: “Für Elise” (WoO 59를 루트비히 놀이 1867년에 처음 출판한 경위와 자필 악보 분실) ↩
- [2] Beethoven Music Research Center: WoO 059 Bagatelle in A minor “Für Elise” (루트비히 놀(Ludwig Nohl)이 필사해 전한 제목의 원문) ↩
- [3] Wikipedia: “Für Elise” (테레제의 유품이 아들 루돌프 샤흐너를 거쳐 브레들에게 전해진 경위와 1865년 필사 허락) ↩
- [4] Classic FM: “What is the meaning of Beethoven’s ‘Für Elise’?” (웅거의 오독설) ↩
- [5] Wikipedia: “Elisabeth Röckel” (코피츠의 2010년 뢰켈 설과 ‘엘리제’ 애칭 근거) ↩
- [6] Wikipedia: “Elise Barensfeld” (슈테블린의 2014년 바렌스펠트 설) ↩
- [7] Wikipedia: “Für Elise” (배리 쿠퍼의 1822년 개정판 연구) ↩
- [8] Wikipedia: “Luca Chiantore” (루트비히 놀이 직접 보았다고 주장한 자필 원본의 존재를 의심한 키안토레의 반론) ↩
이어서 읽기: 이 수수께끼가 재밌었다면
아래 다섯 편에서는 베토벤의 생애와 가족사, 절대음감을 둘러싼 통설, 작곡가가 세상을 떠난 뒤 출판된 작품과 동시대 빈의 음악을 만날 수 있습니다.
- 베토벤은 본에서 빈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고, 청력을 잃어 가면서도 주요 작품을 남겼습니다.
- 베토벤은 조카 카를의 양육권을 두고 카를의 어머니 요한나와 여러 해 법정에서 다퉜습니다. 이 소송은 그의 가족사를 이해하는 핵심 사건입니다.
- 절대음감은 음악적 능력의 한 요소일 뿐이며, 뛰어난 음악가에게 반드시 필요한 능력은 아닙니다.
- 쇼팽이 자신이 죽은 뒤에는 출판하지 말라고 당부한 환상즉흥곡은 훗날 그의 대표작으로 남았습니다. 작품이 세상에 나온 과정에는 쇼팽의 친구 율리안 폰타나가 깊이 관여했습니다.
- 슈베르트는 베토벤과 같은 시대에 빈에서 활동했으며, 연가곡 《겨울나그네》를 남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