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3년 가을, 빈의 한 병원. 스물여섯 살 청년이 의사 앞에 앉아 있습니다.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지기 시작했고, 온몸엔 붉은 반점이 번지고 있었습니다. 의사는 길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병이었습니다.
이 청년의 이름은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 「마왕」과 「송어」를 쓴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19세기 유럽에서 이 ‘은밀한 병’은 오늘날의 감기만큼 흔했습니다. 다만 항생제가 없던 시절이라, 진단 자체가 사회적 낙인이자 사실상 사형 선고에 가까운 병이었습니다. 성인 남성 감염률이 15~20%에 달했다는 추정도 있습니다. 매독(syphilis)은 신분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귀족이든 예술가든, 밤의 사교에 발을 들이는 순간 누구나 그 대가를 치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음악가들에게 유독 많았을까요? 답은 그들의 생활 방식에 있습니다. 19세기 유럽에서 예술가의 밤 문화는 선택이 아니라 일종의 사교 인프라였습니다. 공연이 끝나면 살롱으로, 살롱에서 카페로, 카페에서 또 다른 곳으로. 파리와 빈, 라이프치히의 뒷골목은 음악가들의 사교장이자 영감의 샘이었고, 동시에 감염의 온상이기도 했습니다. 음악사학자 데보라 헤이든(Deborah Hayden)은 저서 『매독(Pox)』에서 천재들의 삶을 한 명씩 파고들며 이 사실을 보여줍니다. 매독은 19세기 예술계를 조용히, 그러나 광범위하게 잠식하고 있었습니다.

예방법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양의 창자로 만든 원시적인 보호구가 있었습니다. 다만 값이 어마어마해서 귀족이나 겨우 손에 쥘 수 있는 사치품이었습니다. 대다수 남성은 맨몸으로 운명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일단 걸리면, 치료법은 딱 하나였습니다. 수은. 수은 연고를 온몸에 처바르고, 수은 증기를 들이마시고, 심하면 수은을 삼키기까지 했습니다. 더 끔찍한 건 그다음에 벌어지는 일이었습니다. 이가 빠지고, 침이 하루 1리터 넘게 흘러내리고, 잇몸이 안쪽부터 썩어들어 갔습니다. 기막힌 건, 당시 의사들이 이 침 흘리는 증상을 ‘독이 빠져나가는 신호’로 여겨 환자를 더 몰아붙였다는 점입니다. 병을 고치려다 치료에 먼저 죽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 유럽엔 이런 속담이 돌았습니다.
“하룻밤을 비너스와 보내고, 평생을 수은과 산다.”
한 가지 더 짚고 갈 게 있습니다. 매독은 작곡가의 음악만 앗아간 게 아니라, 그들의 전기(傳記)까지 검열했습니다. 친구와 가족, 후대의 전기 작가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이 병명을 흐릿하게 지웠습니다. ‘신경쇠약’, ‘뇌열’, ‘원인 불명의 마비’ 같은 점잖은 단어들이 진단명의 자리를 대신 채웠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는 위인전의 행간에는, 차마 적지 못한 진실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글은 그 ‘은밀한 병’에 붙잡힌 천재 작곡가 네 명과, 한 명의 유력한 용의자를 따라가는 이야기입니다. 미리 말해두자면, 이 글을 다 읽고 나면 이들의 음악이 완전히 다르게 들릴 것입니다.
- 주제
- 매독과 음악 — 19세기 천재들을 안에서부터 무너뜨린 ‘은밀한 병’
- 다루는 작곡가
- 프란츠 슈베르트 · 로베르트 슈만 · 가에타노 도니제티 · 베드르지흐 스메타나
(+ 용의선상의 루트비히 판 베토벤) - 핵심 작품
- 「겨울 나그네」 D.911
「유령 변주곡」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현악 4중주 1번 「나의 생애에서」 · 「나의 조국」 - 병명
- 매독(syphilis)
1905년 단일 세균 Treponema pallidum 감염으로 규명 - 당대 치료
- 수은(연고 · 증기 · 복용)
“하룻밤을 비너스와, 평생을 수은과” - 무대
- 19세기 유럽 — 빈 · 라이프치히 · 파리 · 프라하
- 읽는 시간
- 약 12분
- 19세기 유럽에서 매독은 신분을 가리지 않는 흔한 병이었고, 밤 문화 한복판에 살던 음악가들은 특히 자주 걸렸습니다.
- 슈베르트·슈만·도니제티·스메타나는 모두 이 병의 마지막 단계인 신경매독으로 무너졌고, 그 과정이 「겨울 나그네」 「유령 변주곡」 같은 걸작에 고스란히 새겨졌습니다.
- 하지만 이 음악들은 병 ‘덕분에’가 아니라 병에도 ‘불구하고’ 태어났다는 게 핵심입니다 — 천재병이라는 낭만적 신화는 병실 문 앞에서 끝납니다.
매독은 어떤 병이었습니까 — 30년에 걸친 잠행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이 병이 왜 그토록 잔인했는지 잠깐 짚어야겠습니다. 매독의 진짜 무서움은 ‘단번에 죽이지 않는다’는 데 있었습니다. 천천히, 잊을 만하면 한 번씩, 30년에 걸쳐 사람을 따라다녔습니다.
매독은 세 단계로 몸을 점령합니다. 처음 감염되면 한두 달 안에 작은 궤양이 생겼다가, 신기하게도 저절로 사라집니다. 1기입니다. 환자는 안도합니다 — “별것 아니었구나.” 몇 달 뒤 온몸에 붉은 발진이 번지고 머리카락이 빠지는 2기가 찾아오지만, 이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잦아듭니다. 그리고 길게는 수십 년에 이르는 잠복기. 환자는 자기가 다 나았다고 믿으며 평범하게 살아갑니다.
덫은 맨 마지막에 숨어 있었습니다. 감염되고 10년에서 30년쯤 지난 어느 날, 잠들어 있던 매독균이 뇌와 척수로 슬그머니 기어올라 갑니다. 이것이 신경매독, 곧 3기입니다. 인격이 무너지고, 환각이 보이고, 기억과 운동 능력이 차례로 사라집니다. 슈만의 환청도, 도니제티의 기억 상실도, 스메타나의 정신 붕괴도 모두 이 3기의 얼굴이었습니다. 20대에 비너스와 보낸 하룻밤의 청구서가 40대·50대가 되어서야 이자까지 붙어 날아온 것입니다.
당시 의사들은 이 셋이 같은 병의 다른 챕터라는 걸 까맣게 몰랐습니다. 그래서 슈베르트의 발진과 슈만의 환청을 완전히 별개의 사건으로 기록했습니다. 매독의 정체가 단일 세균(Treponema pallidum) 감염으로 밝혀진 건 1905년. 이 작곡가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도 한참 뒤의 일이었습니다.
슈베르트 — 가발 아래 감춘 천재의 비밀
프란츠 슈베르트는 빈의 밤 문화에 익숙한 청년이었습니다. ‘슈베르티아데(Schubertiade)’라 불린 모임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음악을 연주하고, 술을 마시고, 그리고… 빈의 뒷골목을 탐험하곤 했습니다. 그의 친구들은 훗날 회고록에서 이 시절을 무척 조심스럽게 묘사했는데, 200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행간이 다 읽힐 만큼 말을 아꼈습니다.

1823년, 슈베르트에게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증상은 교과서처럼 전형적이었습니다 — 발진, 탈모, 깨질 듯한 두통. 슈베르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가장 비참한 인간이라고 느낀다.” 그리고 가발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안경과 곱슬머리가 트레이드마크였던 청년이 어느 날부터 가발을 쓰고 다닌다는 건, 당시 사람들에게 무슨 뜻이었을까요. 19세기 빈에서 갑자기 가발을 눌러쓴 젊은 남자를 보면, 굳이 캐묻지 않아도 다들 알았습니다. 탈모가 2기 매독의 흔한 표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수은 치료를 받으며 증상이 잠시 가라앉기도 했지만, 병은 그의 몸속에서 조용히 전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병에 걸린 뒤, 슈베르트의 음악은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건너갔습니다.
1824년, 진단 이듬해에 슈베르트는 현악 4중주 14번 「죽음과 소녀(Der Tod und das Mädchen)」 D.810을 씁니다. 슈베르트가 예전에 쓴 가곡, 죽음이 소녀를 데려가는 그 노래를 통째로 2악장 주제로 끌어다 쓴 작품입니다. 같은 해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털어놓았습니다 — “매일 밤 잠자리에 들 때마다, 다시는 깨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스물일곱 청년의 문장입니다. 죽음은 더 이상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그의 침대 발치에 걸터앉은 손님이 되어 있었습니다.
1827년, 슈베르트는 연가곡집 「겨울 나그네(Winterreise)」 D.911을 완성합니다. 빌헬름 뮐러(Wilhelm Müller)의 시에 곡을 붙인 이 작품은, 사랑에 버림받은 한 나그네가 얼어붙은 겨울 길을 끝없이 걷는 이야기입니다. 스물네 곡에 걸쳐 절망과 고독, 환각과 체념이 차례로 지나갑니다. 이 연가곡을 친구들 앞에서 처음 들려줬을 때, 방 안은 정적에 잠겼다고 합니다. 슈베르트의 친구 요제프 폰 슈파운(Joseph von Spaun)은 그 밤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는 ‘이 노래들이 내가 쓴 것 중 가장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우리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겨울 나그네」의 마지막 곡 「거리의 악사(Der Leiermann)」는 얼어붙은 거리에서 아무도 듣지 않는 음악을 돌리는 노인의 이야기입니다. 손풍금을 아무리 돌려도 누구 하나 멈춰 서지 않는데, 나그네는 그 노인에게 다가가 묻습니다 — “노인이여, 함께 가지 않겠소?” 이 곡을 완성한 이듬해, 슈베르트는 서른한 살의 나이로 눈을 감았습니다. 사망 진단서에는 ‘장티푸스’라고 적혔지만, 수은 치료로 만신창이가 된 면역 체계가 진짜 원인이었으리라는 게 현대 의학의 해석입니다.
한 가지 더. 슈베르트의 사생활을 둘러싼 또 다른 뜨거운 논쟁이 있습니다. 음악학자 마이너드 솔로몬(Maynard Solomon)은 1989년 논문에서 슈베르트의 가까운 남성 친구 관계를 근거로 동성애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학계에서는 지금도 갑론을박이 이어집니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한 가지는, 감염 경로가 무엇이었든 「겨울 나그네」가 인류가 남긴 가장 아름다운 고독의 기록이라는 사실입니다. 슈베르트의 또 다른 비밀이 궁금하시다면, 미완성으로 남은 「교향곡 8번」 이야기도 함께 읽어보세요.
슈만 — 일기장에 적힌 밤의 기록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은 꽤나 솔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솔직했냐면, 젊은 날의 ‘밤 생활’을 일기장에 직접 적어둘 정도였습니다. 라이프치히 대학 시절, 그의 일기에는 유흥가 방문 기록이 빼곡했습니다. 심지어 자기 행적에 약어와 암호까지 동원했는데, 후대 연구자들이 그 암호를 해독하고 나서 적잖이 당혹스러워했다는 후문이 있습니다. 해독은 했지만 차마 다 발표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슈만의 증상은 1830년대 초반부터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손가락 문제였습니다 —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게 만든 그 유명한 ‘손가락 마비’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매독이 거론됩니다. 물론 무리한 손가락 훈련 기구 탓이라는 설도 있습니다만, 시기가 묘하게 겹칩니다. 어쨌든 피아노를 포기한 슈만은 작곡과 음악비평에 전념했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덕분에 오늘 우리가 아는 위대한 작곡가 슈만이 탄생한 셈입니다. 「피아노 협주곡 a단조」도, 「시인의 사랑」도, 피아니스트 슈만이 죽은 자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뒤의 이야기는 한층 처절합니다. 1840년대 후반부터 슈만은 환청에 시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천사의 목소리가 들린다고도 했고, 악마의 목소리가 들린다고도 했습니다. A음 하나가 머릿속에서 끝없이 울린다고 호소했고, 때로는 그 음이 화음으로 부풀어 아름다운 선율이 되었다가, 다시 귀를 찢는 금속 소리로 변한다고 했습니다. 이 환청 선율을 받아 적은 「유령 변주곡(Geistervariationen)」이 슈만의 마지막 작곡이 되었습니다. 천사가 불러준 선율로 쓴 곡이라니 아름답게 들리지만, 그 천사의 정체는 뇌를 갉아먹던 매독균이었을 공산이 큽니다.
1854년 2월 27일, 슈만은 갑자기 집을 뛰쳐나갔습니다. 슬리퍼 차림으로 라인강까지 내달려, 다리 위에서 결혼반지를 빼 강물에 던진 뒤 자신도 몸을 던졌습니다. 지나가던 어부들에게 구조됐지만, 이후 본(Bonn) 근교 엔데니히(Endenich)의 요양원에 수용되고 맙니다.
여기서 가장 가슴 아픈 대목이 나옵니다. 아내 클라라 슈만(Clara Schumann)은 2년이 넘는 요양 기간 내내 남편을 면회하지 못했습니다. 정확히는, 갈 수가 없었습니다. 담당의가 한사코 만류했습니다. 슈만의 상태가 너무 참혹해서 클라라가 보면 충격을 받으리라는 이유였습니다. 한때 유럽 최고의 음악적 두뇌였던 그 남자가,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지도 못하고 바닥에 흘리는 상태였다고 전해집니다.
클라라가 마침내 남편을 마주한 것은 1856년 7월 27일, 슈만이 숨을 거두기 이틀 전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행동은 클라라가 건넨 포도주에 입술을 적시는 것뿐이었습니다.
그 2년의 공백을 메운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스무 살 청년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였습니다. 스승이 요양원에 갇혀 있는 동안, 브람스는 클라라와 일곱 아이들 곁을 지키며 집안을 떠받쳤습니다. 스승이 무너진 자리에서 제자가 그 가족을 끌어안았습니다. 훗날 음악사에서 가장 오래 회자되는 우정과 사랑의 이야기가, 바로 이 매독 병동의 그늘에서 싹텄던 셈입니다.
현대 의학은 슈만의 말년 증상 — 환청, 환각, 인격 변화, 신체 마비, 언어 상실 — 을 신경매독 3기와 합치되는 것으로 분석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다만 슈만의 부검에서는 뇌 아래 종양도 발견돼 수막종 가능성이 제기됐고, 양극성 장애 등 다른 원인을 지지하는 연구자도 있어 사인으로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매독균이 뇌와 척수까지 침투한 상태, 그게 바로 신경매독이었습니다. 유럽에서 가장 섬세했던 음악적 두뇌가 안에서부터 무너져 내렸습니다. 슈만의 또 다른 걸작이 궁금하시다면 「만프레드 서곡」도 추천합니다.
도니제티 — “나는 도니제티가 아니다”
가에타노 도니제티(Gaetano Donizetti)라는 이름이 낯선 분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이 숫자를 들으면 생각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바로 오페라 70편입니다. 평생 오페라를 70편이나 써낸 사람입니다. 「람메르무어의 루치아(Lucia di Lammermoor)」와 「사랑의 묘약(L’elisir d’amore)」이 그의 대표작입니다. 로시니(Rossini)가 서른일곱에 돌연 은퇴한 뒤, 이탈리아 오페라계의 왕좌를 물려받은 사람이 바로 도니제티였습니다.

작곡 속도가 그야말로 경이로웠습니다. 「사랑의 묘약」은 단 2주 만에 완성했고, 한 해에 오페라 서너 편을 동시에 굴리는 건 일상이었습니다. 동료들 사이에선 “도니제티는 아침에 오페라 한 편을 쓰고, 점심을 먹고, 오후에 또 한 편을 쓴다”는 농담이 돌 정도였습니다. 라이벌 벨리니(Bellini)는 이 속도에 질투 섞인 비아냥을 쏟아내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소름 끼치는 우연을 하나 짚어야겠습니다. 도니제티의 대표작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의 절정은 그 유명한 ‘광란의 장면(Mad Scene)’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루치아가 결혼식 날 밤 정신을 놓고, 텅 빈 눈으로 보이지도 않는 환영을 향해 노래하는 장면입니다. 도니제티는 이 장면을 1835년에 썼습니다. 도니제티는 자기 손으로 정신이 무너지는 인간을 무대 위에 먼저 그려두었고, 10여 년 뒤 자신도 똑같은 운명에 빨려 들어갔습니다.
그런 도니제티가 40대 중반에 가파르게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1845년, 파리에서 활동하던 그가 거리를 걷다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이후 그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조금씩 잊어갔습니다. 사람들이 이름을 불러도 반응이 없었고, 가끔은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고 전해집니다.
“나는 도니제티가 아니다.”
이 말의 무게를 한번 가늠해 보세요. 오페라 70편을 써낸 사람이, 제 이름을 부정하고 있었습니다. 신경매독이 뇌를 허물면서 기억과 정체성이 함께 녹아내렸기 때문입니다.
가장 참혹한 건 그다음이었습니다. 1846년, 도니제티는 파리 근교 이브리(Ivry)의 정신병원에 강제로 수용됩니다. 의사들은 그를 ‘위험하고 회복 불가능한 환자’로 분류했습니다. 1년 넘게 갇혀 지내던 그를 가까스로 빼낸 사람은 조카 안드레아였습니다. 안드레아는 삼촌을 고향 베르가모(Bergamo)로 데려갔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1848년 4월, 도니제티는 친구 집에서 사실상 식물인간 상태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쉰 살이었습니다. 마지막 몇 해 동안 그는 말도, 음악도, 자기 자신도 모두 잃었습니다.
유럽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오페라를 써내던 펜이,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멈춰 섰어요.
스메타나 — 귀를 잃고 작곡한 조국
베드르지흐 스메타나(Bedřich Smetana)는 체코 음악의 아버지로 불립니다. 그의 교향시 모음곡 「나의 조국(Má vlast)」은 체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작품이고, 그중 「블타바(Vltava)」의 선율은 한 번 들으면 좀처럼 잊히지 않습니다. 해마다 프라하의 봄 음악 축제는 스메타나의 기일인 5월 12일에 「나의 조국」 전곡 연주로 막을 엽니다. 체코인에게 이 음악은 국가(國歌) 그 이상의 무게를 지닙니다.

1874년, 스메타나에게 재앙이 닥쳤습니다. 갑자기 귀가 들리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한쪽 귀에서 날카로운 고음이 끊임없이 울렸고, 몇 달 만에 양쪽 귀가 모두 기능을 잃었습니다. 쉰 살이었습니다. 프라하 임시극장의 수석 지휘자이자 체코 음악계의 중심이던 인물이, 하루아침에 소리의 세계에서 추방당했습니다.
스메타나는 이 경험을 현악 4중주 1번 「나의 생애에서(Z mého života)」 4악장에 그대로 박아 넣었습니다. 밝고 활기찬 체코 민속춤 선율이 흐르다가, 갑자기 제1바이올린의 고음 E음이 비명처럼 끼어들며 모든 것을 집어삼킵니다. 음악이 뚝 멈추고, 그 E음만 홀로 남습니다. 스메타나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 “이것이 내 귀에서 끊임없이 울리는 그 소리다.” 이명(耳鳴)을 음표로 옮긴, 음악사에서 가장 소름 끼치는 자전적 고백입니다.
매독이 청신경을 야금야금 파괴했습니다. 하지만 스메타나는 귀를 잃고서도 「나의 조국」을 끝까지 완성해 나갔습니다. 여섯 곡 중 마지막 네 곡이 청력을 잃은 뒤의 작품입니다. 머릿속에서만 울리는 음악을 악보에 옮겨 적는 작업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꾸 그를 베토벤에 빗댔지만, 스메타나는 그 비교를 질색했다고 합니다. “나는 베토벤이 아니다, 나는 스메타나다”라는 취지의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1883년부터 정신 증상이 본격적으로 터져 나왔습니다. 기억이 무너지고, 말이 어눌해지고, 공격적인 행동이 잦아졌습니다. 결국 프라하의 카테르진키(Kateřinky)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1884년 5월 12일 예순 살의 나이로 눈을 감았습니다. 사후 부검에서 뇌의 심각한 손상이 확인됐고, 현대 의학자들은 이를 신경매독의 전형적 소견으로 읽습니다.
체코가 가장 사랑하는 음악을 쓴 사람이, 정작 자기 음악을 무대에서 단 한 번도 제 귀로 확인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어요.
베토벤 — 그도 용의선상에?
여기서 잠깐. 한 사람의 이름을 더 꺼내야겠습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단, 이쪽엔 큼지막한 물음표가 붙습니다.
베토벤의 청력 상실 원인은 200년이 넘도록 논쟁 중입니다. 후보가 줄을 서 있습니다 — 이독성 약물, 자가면역 질환, 납 중독, 이경화증, 그리고 매독.
매독설의 근거는 이렇습니다. 젊은 시절 베토벤도 빈의 밤 문화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다는 기록이 있고, 주치의 안드레아스 바브루흐(Andreas Wawruch) 박사가 그에게 수은 연고를 처방한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진행성 청력 상실, 만성 복통, 간 질환 같은 일부 증상이 매독과 겹치기도 합니다.
그런데 반박도 만만치 않습니다. 2005년 아르곤 국립연구소(Argonne National Laboratory)의 모발 분석에서는 정상치의 수십 배에 달하는 납 농도가 검출됐고, 2023년 발표된 국제 공동 게놈 연구(Begg 외)에서는 간 질환의 유전적 소인과 B형 간염 감염이 확인됐습니다. 당시 와인에 감미료로 타 넣던 납 아세테이트(sugar of lead)가 청력 상실의 유력한 범인으로 지목됐습니다. 베토벤이 와인을 꽤나 사랑했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결정적으로, 전형적인 매독 3기 신경 증상 — 인격 붕괴, 환각, 기억 상실 — 이 베토벤에게는 뚜렷하지 않았습니다. 앞의 네 사람이 말년에 보여준 처참한 정신적 붕괴와 달리, 베토벤은 생애 마지막까지 「합창 교향곡」과 후기 현악 4중주라는 인류 최고의 음악을 써냈습니다. 뇌만큼은 끝까지 명징했습니다.
그래서 베토벤은 ‘확정’이 아니라 ‘용의선상’에 올라 있습니다. “엥, 베토벤도?” 하고 놀라셨다면 — 정확히 음악사학자들이 200년째 되풀이하고 있는 그 반응과 똑같습니다.
병이 천재를 만들었을까요?
마지막으로 도발적인 질문 하나를 던져야겠습니다. 혹시 매독이 오히려 이들의 창작력을 끌어올린 건 아닐까요?
실제로 이런 낭만적인 이론이 있었습니다. 신경매독이 뇌의 전두엽을 자극하면서 일시적으로 창의력이 폭발한다는 가설이었습니다. 19세기 말에는 아예 “천재병(genius disease)”이라는 별명까지 붙었습니다. 작곡가만이 아닙니다. 철학자 니체(Friedrich Nietzsche)도, 소설가 모파상(Guy de Maupassant)도, 화가 고흐(Vincent van Gogh)에게도 매독 의혹이 제기된 적이 있고, 심지어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까지 그 명단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이쯤 되면 “안 걸린 천재가 대체 누구냐”는 질문이 더 빠를 지경입니다.
하지만 현대 의학은 이 ‘낭만적 가설’을 단호히 거부합니다. 뇌 조직이 망가지면서 일시적으로 억제가 풀리는 현상, 이른바 탈억제(disinhibition)는 있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건 창의력이 높아진 게 아니라 통제력을 잃은 것에 가깝다는 뜻입니다. 술에 취하면 대담해지는 게 ‘용기의 증가’가 아닌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슈만의 마지막 작품들이 초기작보다 뛰어나다는 보장도 없고, 도니제티의 경이적인 작곡 속도는 매독에 걸리기 한참 전부터 그의 트레이드마크였습니다.
진짜 잔인한 대목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천재들의 위대한 작품은 병 ‘덕분에’ 나온 것이 아니라, 병에도 ‘불구하고’ 나온 것입니다. 슈베르트는 죽어가면서 「겨울 나그네」를 썼고, 스메타나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침묵 속에서 「나의 조국」을 완성했습니다.
그건 병이 준 선물이 아니었습니다. 천재의 의지였어요.
그리고 하나만 더. 니체는 정신병원에서 11년을 보냈고, 모파상은 자살을 시도한 끝에 정신병원에서 숨졌으며, 도니제티는 끝내 자기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천재병’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은, 언제나 병실 문 앞에서 멈춰 섰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매독에 걸린 작곡가가 이 네 명뿐인가요?
아닙니다. 이 글에서 다루지 않은 작곡가 중에도 매독 확진 또는 강한 의심을 받는 이가 여럿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후고 볼프(Hugo Wolf), 프레데리크 딜리어스(Frederick Delius), 스콧 조플린(Scott Joplin)이 신경매독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세기에는 그만큼 흔한 질병이었습니다.
매독은 지금도 위험한 병인가요?
페니실린이 보급된 1940년대 이후로 매독은 초기에 발견하면 완치가 가능한 질환이 됐습니다. 다만 방치하면 여전히 신경매독으로 진행할 수 있어 결코 가벼운 병은 아닙니다. 19세기 작곡가들에게는 페니실린이라는 선택지 자체가 없었다는 점이 비극의 핵심입니다.
베토벤의 청력 상실 원인은 결국 뭔가요?
현재 가장 유력한 가설은 납 중독과 간 질환의 복합 원인입니다. 베토벤의 모발에서 검출된 납 농도는 정상치의 수십 배에 달했고, 2023년 게놈 분석에서는 간 질환의 유전적 소인까지 확인됐습니다. 매독설이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았지만, 지금으로서는 소수 의견에 머물러 있습니다.
왜 19세기에는 매독에 수은을 썼나요?
당시 의학은 매독을 ‘몸속의 독’으로 보고, 수은이 그 독을 침과 땀으로 밀어낸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환자가 침을 많이 흘릴수록 치료가 잘 되는 신호로 여겼습니다. 실제로는 수은 자체가 강력한 중금속 독이라 잇몸 괴사, 치아 탈락, 신경 손상 같은 부작용을 일으켰습니다. 페니실린이 나오기 전까지 약 400년간 쓰인 ‘치료법 아닌 치료법’이었습니다.
슈만의 환청은 그의 음악에 어떤 흔적을 남겼나요?
슈만은 말년에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울리는 A음 환청에 시달렸고, 그 선율을 받아 적은 「유령 변주곡(Geistervariationen)」이 마지막 작곡이 됐습니다. 본인은 천사가 불러준 선율이라 믿었지만, 현대 의학은 이를 신경매독으로 뇌가 침범당하며 생긴 환청으로 해석합니다. 아름다운 선율과 무너지는 정신이 한 악보 위에 겹쳐 있습니다.
참고 자료
- Wikipedia — Franz Schubert (생애와 건강 논쟁)
- Wikipedia — Robert Schumann (말년과 엔데니히 요양원)
- Wikipedia — Gaetano Donizetti (질병과 말년)
- Wikipedia — Bedřich Smetana (청력 상실과 사인)
- Wikipedia — Neurosyphilis (신경매독의 의학적 정의)
이어서 듣기 — 천재의 그늘을 따라 걷는 길
위대한 음악의 뒤편에는, 교과서가 차마 적지 못한 인간의 이야기가 숨어 있곤 합니다. 광기와 비밀, 거래와 배신 — 그 그늘을 함께 따라 걸으면, 익숙한 선율이 전혀 다른 깊이로 들리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