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3년 가을, 빈의 한 병원. 스물다섯 살의 청년이 의사 앞에 앉아 있습니다.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고, 온몸에 붉은 반점이 번지고 있었죠. 의사는 한마디로 진단을 내렸습니다. 그 병이었더군요.
이 청년의 이름은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 「마왕」과 「송어」를 쓴 바로 그 작곡가였습니다.
19세기 유럽에서 이 ‘은밀한 병’은 오늘날의 코로나만큼이나 흔했더군요. 성인 남성의 감염률이 15~20%에 달했다는 추정이 있을 정도니까요. 매독(syphilis)은 신분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귀족이든 예술가든, 밤의 사교에 발을 들이면 누구나 그 대가를 치를 수 있었죠.
그런데 왜 하필 예술가들에게 유독 많았을까요? 19세기 유럽에서 예술가들의 밤 문화는 선택이 아니라 일종의 사교 인프라였습니다. 공연이 끝나면 살롱으로, 살롱에서 카페로, 카페에서 또 다른 장소로. 파리, 빈, 라이프치히의 뒷골목은 음악가들의 사교장이자 영감의 원천이었고, 동시에 감염의 온상이기도 했습니다. 음악사학자 데보라 헤이든(Deborah Hayden)은 저서 『매독(Pox)』에서 이 시대를 아예 “매독의 황금기”라고 불렀을 정도죠.

예방법이요? 양의 창자로 만든 원시적인 보호구가 있긴 했더군요. 가격이 어마어마해서 귀족이나 겨우 쓸 수 있는 사치품이었지만요. 대다수 남성은 맨몸으로 운명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걸리면요? 치료법은 딱 하나, 수은이었더군요. 수은 연고를 온몸에 바르고, 수은 증기를 들이마시고, 심하면 수은을 삼키기까지 했습니다. 끔찍한 건 부작용이었네요. 이가 빠지고, 침이 하루에 1리터 넘게 흘러내리고, 잇몸이 썩어들어 갔죠. 더 기막힌 건, 당시 의사들이 이 침 흘리는 증상을 ‘독이 빠져나가는 신호’로 여겨 환자를 더 몰아붙였다는 겁니다. 병을 고치려다 치료에 먼저 죽는 일도 비일비재했죠. 그래서 당시 유럽에는 이런 속담이 돌았더군요.
“하룻밤을 비너스와 보내고, 평생을 수은과 산다.”
한 가지 더. 매독은 작곡가의 음악만 앗아간 게 아니라, 그들의 전기(傳記)까지 검열했습니다. 친구와 가족, 후대의 전기 작가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이 병을 흐릿하게 지웠거든요. ‘신경쇠약’, ‘뇌열’, ‘원인 불명의 마비’ 같은 점잖은 단어들이 진단명의 자리를 대신했죠.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읽는 위인전의 행간에는, 차마 적지 못한 진실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글은 그 ‘은밀한 병’에 걸린 천재 작곡가 네 명과, 한 명의 유력한 용의자를 다루는 이야기랍니다. 미리 경고하죠 — 이 글을 다 읽고 나면, 이들의 음악이 완전히 다르게 들리기 시작할 겁니다.
매독, 어떤 병이었나 — 30년에 걸친 잠행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매독이 왜 그토록 잔인했는지 잠깐 짚고 가야겠습니다. 이 병의 진짜 무서움은 ‘단번에 죽이지 않는다’는 데 있었거든요.
매독은 세 단계로 천천히 몸을 점령합니다. 처음 감염되면 한두 달 안에 작은 궤양이 생겼다가, 신기하게도 저절로 사라집니다. 1기죠. 환자는 안도합니다 — “별것 아니었구나.” 몇 달 뒤 온몸에 붉은 발진이 번지고 머리카락이 빠지는 2기가 찾아오지만, 이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잦아듭니다. 그리고 길게는 수십 년에 이르는 잠복기. 환자는 자기가 다 나았다고 믿으며 평범하게 살아가죠.
덫은 마지막에 있었습니다. 감염되고 10년에서 30년쯤 지난 어느 날, 잠들어 있던 매독균이 뇌와 척수로 기어올라 갑니다. 이것이 신경매독, 곧 3기입니다. 인격이 무너지고, 환각이 보이고, 기억과 운동 능력이 차례로 사라지죠. 슈만의 환청도, 도니제티의 기억 상실도, 스메타나의 정신 붕괴도 모두 이 3기의 얼굴이었습니다. 20대에 비너스와 보낸 하룻밤의 청구서가, 40대·50대가 되어서야 이자까지 붙어 날아온 거죠.
당시 의사들은 이 셋이 같은 병의 다른 챕터라는 걸 몰랐습니다. 그래서 슈베르트의 발진과 슈만의 환청을 별개의 사건으로 적었죠. 매독의 정체가 단일 세균(Treponema pallidum) 감염으로 밝혀진 건 1905년, 이 작곡가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도 한참 뒤의 일이었습니다.
슈베르트 — 가발 아래 감춘 천재의 비밀
프란츠 슈베르트는 빈의 밤 문화에 익숙한 청년이었더군요. ‘슈베르티아데(Schubertiade)’라 불리는 모임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며 음악을 연주하고, 술을 마시고, 그리고… 빈의 뒷골목을 탐험하곤 했죠. 그의 친구들은 훗날 회고록에서 이 시절을 매우 조심스럽게 묘사했는데, 200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행간이 읽힐 만큼 조심스러웠습니다.

1823년, 슈베르트에게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증상은 전형적이었습니다 — 발진, 탈모, 극심한 두통. 슈베르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적었죠.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가장 비참한 사람이라고 느낀다.” 그리고 가발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안경과 곱슬머리가 트레이드마크였던 청년이 어느 날부터 가발을 쓰고 다닌다는 건, 당시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였을까요. 19세기 빈에서 갑자기 가발을 쓴 젊은 남자를 보면,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다들 알았습니다.
수은 치료를 받으며 일시적으로 증상이 가라앉기도 했지만, 병은 그의 몸속에서 조용히 전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병을 얻은 뒤, 슈베르트의 음악이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 겁니다.
1824년, 진단을 받은 이듬해에 슈베르트는 현악 4중주 14번 「죽음과 소녀(Der Tod und das Mädchen)」 D.810을 씁니다. 제목 그대로 죽음이 소녀를 데려가는 자신의 옛 가곡을 2악장 주제로 끌어다 쓴 작품이죠. 같은 해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슈베르트는 이렇게 털어놓았습니다 — “매일 밤 잠자리에 들 때마다, 다시는 깨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스물일곱 살 청년의 문장이었습니다. 죽음은 더 이상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그의 침대 발치에 앉아 있는 손님이 되어 있었던 겁니다.
1827년, 슈베르트는 연가곡집 「겨울 나그네(Winterreise)」 D.911을 완성합니다. 빌헬름 뮐러(Wilhelm Müller)의 시에 곡을 붙인 이 작품은, 사랑에 실패한 한 나그네가 얼어붙은 겨울 길을 걷는 이야기입니다. 스물네 곡에 걸쳐 절망과 고독, 환각과 체념을 노래하죠. 이 연가곡을 친구들에게 처음 들려줬을 때, 방 안은 정적에 잠겼다고 합니다. 슈베르트의 친구 요제프 폰 슈파운(Joseph von Spaun)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는 ‘이 노래들이 내가 쓴 것 중 가장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우리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겨울 나그네」의 마지막 곡 「거리의 악사(Der Leiermann)」는 얼어붙은 거리에서 아무도 듣지 않는 음악을 돌리는 노인의 이야기입니다. 손풍금을 돌리지만 누구도 멈춰 서지 않는 노인에게 나그네는 묻죠 — “노인이여, 함께 가지 않겠소?” 이 곡을 완성한 이듬해, 슈베르트는 서른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망 진단서에는 ‘장티푸스’라고 적혔지만, 수은 치료로 망가진 면역 체계가 진짜 원인이었을 거라는 게 현대 의학의 해석이죠.
한 가지 더. 슈베르트의 사생활을 둘러싼 또 하나의 뜨거운 논쟁이 있습니다. 음악학자 마이너드 솔로몬(Maynard Solomon)은 1989년 논문에서 슈베르트의 친밀한 남성 친구 관계를 근거로 동성애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학계에서는 아직도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죠. 확실한 건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감염 경로가 무엇이든 「겨울 나그네」는 인류가 가진 가장 아름다운 고독의 기록이라는 사실입니다. 슈베르트의 또 다른 비밀이 궁금하시다면, 미완성으로 남은 「교향곡 8번」 이야기도 함께 읽어보세요.
슈만 — 일기장에 적힌 밤의 기록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은 꽤 솔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솔직했냐면, 젊은 시절의 ‘밤 생활’을 일기장에 직접 기록해 둘 정도였거든요. 라이프치히 대학 시절, 그의 일기에는 유흥가 방문 기록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슈만은 심지어 자신의 행적에 약어와 암호를 사용했는데, 후대 연구자들이 그 암호를 해독하고 나서 꽤 당혹스러워했다는 후문이 있죠. 해독은 했지만 차마 다 발표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슈만의 증상은 1830년대 초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손가락의 문제였습니다 — 피아니스트로서의 경력을 포기하게 만든 그 유명한 ‘손가락 마비’의 원인 중 하나로 매독이 거론되거든요. 물론 무리한 손가락 훈련 기구 사용설도 있지만, 시기가 묘하게 겹칩니다. 어쨌든 피아노를 포기한 슈만은 작곡과 음악비평에 전념했고,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그 덕분에 위대한 작곡가 슈만을 갖게 되었습니다. 「피아노 협주곡 a단조」도, 「시인의 사랑」도, 피아니스트 슈만이 죽은 자리에서 태어난 셈이죠.
그 뒤의 이야기는 더 처절합니다. 1840년대 후반부터 슈만은 환청에 시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천사의 목소리가 들린다고도 했고, 악마의 목소리가 들린다고도 했습니다. A음 하나가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울린다고 호소했고, 때로는 그 음이 화음으로 변해 아름다운 선율이 되었다가, 다시 귀를 찢는 금속 소리로 바뀐다고 했죠. 이 환청 선율을 받아 적은 「유령 변주곡(Geistervariationen)」이 슈만의 마지막 작곡이 되었습니다. 천사가 불러준 선율로 쓴 곡이라니 아름다운 이야기 같지만 — 그 천사의 정체는 뇌를 잠식하는 매독균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1854년 2월 27일, 슈만은 갑자기 집을 뛰쳐나갔습니다. 슬리퍼 차림으로 라인강까지 달려가, 다리 위에서 결혼반지를 빼 강물에 던진 뒤 자신도 뛰어내렸죠. 지나가던 어부들에게 구조되었지만, 이후 본(Bonn) 근교의 엔데니히(Endenich) 요양원에 수용되었습니다.
여기서 가장 가슴 아픈 대목이 나옵니다. 아내 클라라 슈만(Clara Schumann)은 2년이 넘는 요양 기간 동안 남편을 면회하지 못했습니다. 정확히는, 갈 수가 없었습니다. 담당의가 강력히 만류했거든요. 슈만의 상태가 너무 참혹해서 클라라가 보면 충격을 받으리란 이유였습니다. 한때 유럽 최고의 음악적 두뇌였던 그 남자가,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지 못하고 바닥에 흘리는 상태였다고 합니다.
클라라가 마침내 남편을 만난 것은 1856년 7월 27일, 슈만이 숨을 거두기 이틀 전이었습니다. 슈만은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 행동은 클라라가 건넨 포도주에 입술을 적시는 것이었죠.
그 2년의 공백을 메운 사람이 한 명 있었습니다. 스무 살의 청년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였죠. 슈만이 요양원에 갇혀 있는 동안, 브람스는 클라라와 일곱 아이들 곁을 지키며 집안을 도왔습니다. 스승이 무너진 자리에서 제자가 그 가족을 떠받친 겁니다. 훗날 음악사에서 가장 오래 회자되는 우정과 사랑의 이야기가, 바로 이 매독 병동의 그늘에서 시작됐지요.
현대 의학은 슈만의 말년 증상 — 환청, 환각, 인격 변화, 신체 마비, 언어 상실 — 을 신경매독 3기의 전형적인 양상으로 봅니다. 매독균이 뇌와 척수까지 침투한 상태, 그것이 바로 신경매독이었죠. 유럽에서 가장 섬세했던 음악적 두뇌가, 안에서부터 무너져 내린 겁니다. 슈만의 또 다른 걸작이 궁금하시다면 「만프레드 서곡」도 추천합니다.
도니제티 — “나는 도니제티가 아니다”
가에타노 도니제티(Gaetano Donizetti)를 모르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이 숫자를 들으면 생각이 바뀌실 거예요 — 오페라 70편. 평생 오페라 70편을 작곡한 사람입니다. 「람메르무어의 루치아(Lucia di Lammermoor)」와 「사랑의 묘약(L’elisir d’amore)」이 그의 대표작이죠. 로시니(Rossini)가 서른일곱에 은퇴한 뒤, 이탈리아 오페라계의 왕좌를 물려받은 사람이 바로 도니제티였습니다.

작곡 속도가 경이로웠습니다. 「사랑의 묘약」은 2주 만에 완성했고, 한 해에 오페라 서너 편을 동시에 쓰는 건 일상이었죠. 동료들 사이에서 “도니제티는 아침에 오페라 한 편을 쓰고, 점심을 먹고, 오후에 또 한 편을 쓴다”는 농담이 돌 정도였습니다. 라이벌 벨리니(Bellini)는 이 속도에 질투 섞인 비아냥을 쏟기도 했죠.
여기서 소름 끼치는 우연을 하나 짚고 가야겠습니다. 도니제티의 대표작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의 절정은 그 유명한 ‘광란의 장면(Mad Scene)’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루치아가 결혼식 날 밤 정신을 놓고, 텅 빈 눈으로 없는 환영을 향해 노래하는 장면이죠. 도니제티는 1835년에 이 장면을 썼습니다. 자기 정신이 무너지는 모습을 무대 위에 먼저 그려 두고, 10여 년 뒤 그 자신이 똑같은 운명을 맞은 거죠.
그런 도니제티가 40대 중반에 급격하게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1845년, 파리에서 활동하던 중 거리를 걷다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이후 그는 점점 자기가 누구인지를 잊어갔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이름을 불러도 반응이 없었고, 간혹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고 전해집니다.
“나는 도니제티가 아니다.”
이 말의 무게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70편의 오페라를 쓴 사람이, 자기 이름을 부정하고 있었습니다. 신경매독이 뇌를 파괴하면서 기억과 정체성이 함께 녹아내린 겁니다.
가장 참혹한 건 그 뒤였습니다. 1846년, 도니제티는 파리 근교 이브리(Ivry)의 정신병원에 강제로 수용됩니다. 의사들은 그를 ‘위험하고 회복 불가능한 환자’로 분류했죠. 1년 넘게 갇혀 지내던 그를 가까스로 빼낸 사람은 조카 안드레아였습니다. 안드레아는 삼촌을 고향 베르가모(Bergamo)로 돌려보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1848년 4월, 도니제티는 친구 집에서 사실상 식물인간 상태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쉰 살이었죠. 마지막 몇 년 동안 그는 말도, 음악도, 자기 자신도 잃었습니다.
유럽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오페라를 써내던 펜이,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멈춘 겁니다.
스메타나 — 귀를 잃고 작곡한 조국
베드르지흐 스메타나(Bedřich Smetana)는 체코 음악의 아버지입니다. 그의 교향시 모음곡 「나의 조국(Má vlast)」은 체코 국민이라면 누구나 아는 작품이고, 그중 「블타바(Vltava)」의 선율은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죠. 매년 프라하의 봄 음악 축제는 스메타나의 기일인 5월 12일에 「나의 조국」 전곡 연주로 개막합니다. 체코인에게 이 음악은 국가(國歌) 이상의 의미를 지니죠.

1874년, 스메타나에게 재앙이 닥쳤습니다. 갑자기 귀가 들리지 않기 시작한 겁니다. 처음에는 한쪽 귀에서 고음이 끊임없이 울렸고, 몇 달 만에 양쪽 귀 모두 기능을 잃었습니다. 쉰 살이었습니다. 프라하 국립극장의 수석 지휘자이자 체코 음악계의 중심인물이, 하루아침에 소리의 세계에서 추방당한 거죠.
스메타나는 이 경험을 현악 4중주 1번 「나의 생애에서(Z mého života)」의 4악장에 그대로 담았습니다. 밝고 활기찬 체코 민속춤 선율이 흐르다가, 갑자기 제1바이올린의 고음 E음이 날카롭게 끼어들며 모든 것을 집어삼킵니다. 음악이 멈추고, 그 E음만 남죠. 스메타나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 “이것이 내 귀에서 끊임없이 울리는 그 소리.” 이명(耳鳴)을 음악으로 재현한, 음악사에서 가장 소름 끼치는 자전적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매독이 청신경을 파괴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스메타나는 귀를 잃은 뒤에도 「나의 조국」을 완성해 나갔습니다. 여섯 곡 중 마지막 네 곡이 청력 상실 이후의 작품입니다. 머릿속에서만 울리는 음악을 악보에 옮기는 작업이었죠. 사람들은 그를 베토벤과 비교했지만, 스메타나는 그 비교를 극도로 싫어했다고 합니다. “나는 베토벤이 아니다, 나는 스메타나다”라는 취지의 말을 남기기도 했죠.
1883년부터 정신 증상이 본격화되었습니다. 기억이 무너지고, 말이 어눌해지고, 공격적인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죠. 결국 프라하의 카테르진키(Kateřinky)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1884년 5월 12일, 예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후 부검에서 뇌의 심각한 손상이 확인되었고, 현대 의학자들은 이를 신경매독의 전형적 소견으로 봅니다.
체코가 가장 사랑하는 음악을 쓴 사람이, 정작 자기 음악을 무대에서 단 한 번도 귀로 확인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베토벤 — 그도 용의선상에?
여기서 잠깐. 한 명의 이름을 더 꺼내야 합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단, 여기에는 큰 물음표가 붙습니다.
베토벤의 청력 상실 원인은 200년이 넘도록 논쟁 중입니다. 후보가 줄을 서 있거든요 — 이독성 약물, 자가면역 질환, 납 중독, 이경화증, 그리고 매독.
매독설의 근거는 이렇습니다. 젊은 시절의 베토벤도 빈의 밤 문화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다는 기록이 있고, 그의 주치의 안드레아스 바브루흐(Andreas Wawruch) 박사가 수은 연고를 처방한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진행성 청력 상실, 만성 복통, 간 질환 같은 일부 증상이 매독과 겹치기도 하죠.
반박도 만만찮습니다. 2005년 아르곤 국립연구소(Argonne National Laboratory)의 모발 분석에서는 정상치의 수십 배에 달하는 납 농도가 검출되었고, 2023년 발표된 국제 공동 게놈 연구(Begg et al.)에서는 간 질환의 유전적 소인과 B형 간염 감염이 확인되었습니다. 당시 와인에 감미료로 넣던 납 아세테이트(sugar of lead)가 청력 상실의 유력한 원인으로 지목됐죠. 베토벤이 와인을 상당히 좋아했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니까요.
결정적으로, 전형적인 매독 3기 신경 증상 — 인격 붕괴, 환각, 기억 상실 — 이 베토벤에게는 뚜렷하지 않았습니다. 앞의 네 명이 말년에 보여준 처참한 정신적 붕괴와 달리, 베토벤은 생애 마지막까지 「합창 교향곡」과 후기 현악 4중주라는 인류 최고의 음악을 써냈으니까요. 뇌만큼은 끝까지 명징했습니다.
그래서 베토벤은 ‘확정’이 아니라 ‘용의선상’에 올라 있습니다. “엥, 베토벤도?” 하고 놀라셨다면 — 정확히 음악사학자들이 200년째 반복하고 있는 반응과 같습니다.
병이 천재를 만든 걸까?
마지막으로 도발적인 질문 하나를 던져야겠습니다. 매독이 오히려 이들의 창작력을 끌어올린 건 아닐까요?
실제로 이런 낭만적인 이론이 있었습니다. 신경매독이 뇌의 전두엽을 자극하면서 일시적으로 창의력이 폭발한다는 가설이죠. 19세기 말에는 아예 “천재병(genius disease)”이라는 별명까지 붙었습니다. 작곡가만이 아닙니다. 철학자 니체(Friedrich Nietzsche)도, 소설가 모파상(Guy de Maupassant)도, 화가 고흐(Vincent van Gogh)에게도 매독 의혹이 제기된 적이 있으니까요. 심지어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에게도 매독 의혹이 제기된 적이 있습니다. 이쯤 되면 “안 걸린 천재가 누구야?”라는 질문이 더 빠를 지경이죠.
하지만 현대 의학은 이 ‘낭만적 가설’을 단호히 거부합니다. 뇌 조직이 파괴되면서 일시적으로 억제가 풀리는 현상, 이른바 탈억제(disinhibition)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창의력이 높아진 게 아니라 통제력을 잃은 것에 가깝다는 얘기죠. 술에 취하면 대담해지는 게 ‘용기의 증가’가 아닌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슈만의 마지막 작품들이 초기작보다 뛰어나다는 보장도 없고, 도니제티의 경이적인 작곡 속도는 매독에 걸리기 한참 전부터 그의 트레이드마크였으니까요.
진짜 잔인한 건 이겁니다. 이 천재들의 위대한 작품은 병 ‘덕분에’ 나온 게 아니라, 병에도 ‘불구하고’ 나온 겁니다. 슈베르트는 죽어가면서 「겨울 나그네」를 썼고, 스메타나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침묵 속에서 「나의 조국」을 완성했습니다.
그건 병의 선물이 아니었습니다. 천재의 의지였죠.
그리고 한 가지만 더. 니체는 정신병원에서 11년을 보냈고, 모파상은 자살을 시도한 뒤 정신병원에서 숨졌으며, 도니제티는 자기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천재병’이라는 근사한 이름은, 병실 문 앞에서 끝났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매독에 걸린 작곡가가 이 네 명뿐인가요?
아닙니다. 이 글에서 다루지 않은 작곡가 중에도 매독 확진 또는 강력한 의심 대상이 여럿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후고 볼프(Hugo Wolf), 프레데리크 딜리어스(Frederick Delius), 스콧 조플린(Scott Joplin)이 신경매독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죠. 19세기에는 그만큼 흔한 질병이었습니다.
매독은 지금도 위험한 병인가요?
페니실린이 개발된 1940년대 이후로 매독은 초기에 발견하면 완치가 가능한 질환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방치하면 여전히 신경매독으로 진행할 수 있어 결코 가벼운 병은 아닙니다. 19세기 작곡가들에게는 페니실린이라는 선택지 자체가 없었다는 점이 비극의 핵심이죠.
베토벤의 청력 상실 원인은 결국 뭔가요?
현재 가장 유력한 가설은 납 중독과 간 질환의 복합 원인입니다. 베토벤의 모발에서 검출된 납 농도는 정상 수치의 수십 배에 달했고, 2023년 게놈 분석에서는 간 질환의 유전적 소인까지 확인됐습니다. 매독설이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았지만, 지금으로서는 소수 의견에 머물러 있습니다.
왜 19세기에는 매독에 수은을 썼나요?
당시 의학은 매독을 ‘몸속의 독’으로 보고, 수은이 그 독을 침과 땀으로 밀어낸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환자가 침을 많이 흘릴수록 치료가 잘 되는 신호로 여겼죠. 실제로는 수은 자체가 강력한 중금속 독이라 잇몸 괴사, 치아 탈락, 신경 손상 같은 부작용을 일으켰습니다. 페니실린이 나오기 전까지 약 400년간 쓰인 ‘치료법 아닌 치료법’이었습니다.
슈만의 환청은 그의 음악에 어떤 흔적을 남겼나요?
슈만은 말년에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울리는 A음 환청에 시달렸고, 그 환청의 선율을 받아 적은 「유령 변주곡(Geistervariationen)」이 그의 마지막 작곡이 되었습니다. 본인은 천사가 불러준 선율이라 믿었지만, 현대 의학은 이를 신경매독으로 뇌가 침범당하며 생긴 환청으로 해석합니다. 아름다운 선율과 무너지는 정신이 한 악보 위에 겹쳐 있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