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가니니 전설의 진실: 악마와의 계약인가, 아니면 천재의 고독인가?

저게 사람이면 악마랑 계약한 거다

인물
니콜로 파가니니 (Niccolò Paganini, 1782–1840)
주요 작품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24개의 카프리스 Op. 1, 바이올린 협주곡 1·2번
활동
이탈리아 제노바 출생, 1828년부터 유럽 전역 순회공연
별명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는 역사상 가장 많은 전설과 루머를 몰고 다닌 바이올리니스트입니다. 이 글은 그 지독한 악마와의 계약설이 도대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인간의 한계를 시험한 바이올린 기교의 진짜 정체는 무엇인지, 나아가 훗날 제기된 마르판 증후군 가설까지 차근차근 짚어보려 합니다. 클래식이 낯선 분도 가벼운 마음으로 읽고, 이미 애호가인 분이라면 한 꺼풀 더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게 준비했거든요.

니콜로 파가니니 초상화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가 그린 파가니니 초상화 (1819)

무대 위로 걸어 올라온 악마

1828년 3월 빈의 한 연주회장. 무대 위로 해골처럼 깡마른 남자가 걸어 나왔습니다. 펄럭이는 검은 외투와 밀랍처럼 창백한 피부, 그리고 기이할 정도로 길쭉한 손가락. 그가 천천히 활을 들어 올린 순간 객석 어딘가에서 누군가 나직하게 속삭였지요.

“저 사람,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대.”

니콜로 파가니니(Niccolò Paganini). 음악사에서 가장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이자 가장 끈질긴 악마 루머에 시달린 사내입니다. 그의 연주를 직접 들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았더군요. “인간이 저렇게 연주할 수는 없다.”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으니 그들은 차라리 가장 쉽고 간편한 결론을 택했습니다. 눈앞의 저 연주자는 인간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전설 속 악마보다 훨씬 더 극적입니다. 도박판에서 제 분신 같은 바이올린까지 날려버린 사내가 도대체 무슨 수로 유럽 전체를 굴복시켰는지 그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영혼을 샀다는 악마조차 오히려 시시하게 느껴질 정도거든요.

선박 잡화상의 아들, 바이올린을 쥐다

1782년 10월 27일 이탈리아 제노바. 파가니니는 선박 잡화상의 셋째 아들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아버지 안토니오는 장사가 시원찮은 날이면 만돌린을 켜서 푼돈을 벌어왔다고 해요. 요컨대 음악은 부업이었고 가난이 본업이었던 셈입니다.

다섯 살에 만돌린을, 일곱 살에 바이올린을 켰습니다. 동네 선생을 두엇 거쳤다지만 소년의 기량은 눈 깜짝할 새 스승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섰죠. 아버지는 서둘러 아들의 손을 이끌고 파르마로 향했습니다. 당시 이름을 날리던 명교사 알레산드로 롤라(Alessandro Rolla)를 찾아간 겁니다.

소년의 연주를 가만히 듣던 롤라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나는 이 아이를 가르칠 수 없습니다.” 그러고는 자신의 스승인 페르디난도 파에르(Ferdinando Paer)에게, 파에르는 다시 자기 스승인 가스파로 기레티(Gasparo Ghiretti)에게 소년을 슬쩍 떠넘겼습니다. 선생이 제자를 감당하지 못해 선생의 선생의 선생에게 차례로 넘겨야 했던 거예요. 훗날 덧붙여진 과장 섞인 일화라 쳐도 어린 파가니니가 대체 어느 정도의 괴물이었는지는 능히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열다섯 무렵 파가니니는 하루 열 시간 이상을 꼼짝없이 활과 씨름했습니다. 당대 존재하던 모든 연주 기법은 이미 바닥까지 긁어 마스터한 지 오래였지요. 이제 그는 세상에 아직 태어난 적 없는 기법들을 방구석에서 홀로 발명해 내기 시작했더군요.

천재의 추락 — 도박판에 넘겨진 바이올린

1797년부터 십 대 후반에 접어든 파가니니는 북이탈리아 일대를 돌며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습니다. 명성과 돈이 한꺼번에 밀려왔지요. 그리고 그는 아주 전형적이고도 예상 가능한 길로 빠져듭니다.

지독한 도박에 손을 댄 겁니다.

밤낮없는 방탕과 노름으로 건강을 갉아먹고는 갚기 힘든 거액의 빚까지 짊어졌습니다. 끝내는 분신처럼 켜던 바이올린마저 노름판 판돈으로 넘겨버렸다지요. 음악의 천재라고 해서 일상과 자기 관리까지 천재적인 건 아니었나 봅니다.

1801년 무렵부터 몇 년 동안 파가니니는 돌연 무대 위에서 통째로 자취를 감춥니다. 어떤 귀부인과 토스카나의 외딴 저택에 머물며 바깥세상과 완전히 연을 끊어버렸거든요. 잘나가던 연주회가 뚝 끊기자 득달같이 온갖 흉흉한 소문이 피어올랐습니다. “애인을 죽이고 감옥에 갇혔다”는 뒷말까지 나돌았지요.

하지만 그 기나긴 침묵의 시간에 실제로 벌어진 일은 전혀 달랐습니다. 파가니니는 하모닉스, 중음주법, 왼손 피치카토 같은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기이한 주법들을 그 조용한 저택에서 홀로 벼리고 있었더군요. 끝없는 추락처럼 보이던 그 시기가 사실은 세상을 뒤집을 연주자로 변신하기 위한 잠복기였습니다.

대포라 불린 바이올린, ‘일 카노네’

기나긴 은둔을 마치고 무대로 돌아온 파가니니는 이전과는 결코 비교할 수 없는 맹렬한 기량으로 객석을 쥐락펴락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평생을 함께할 전설적인 악기는, 사실 그가 바깥세상과 연을 끊기 전인 아주 이른 시기에 이미 그의 손에 들어왔지요.

일 카노네 과르네리 바이올린
일 카노네(Il Cannone) — 과르네리 델 제수, 1743년 제작. 제노바 도리아-투르시 궁전 소장

리브론(Livron)이라는 부유한 상인이 어린 파가니니에게 자신의 귀한 바이올린을 잠시 빌려준 적이 있습니다. 이탈리아 크레모나의 전설적인 명장 주세페 과르네리 델 제수(Giuseppe Guarneri del Gesù)가 1743년에 깎아 만든 명기였죠. 소년의 연주가 끝나자마자 리브론은 고개를 내저으며 악기 돌려받기를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이 바이올린은 마땅히 당신 손에 있어야 합니다.”

파가니니는 이 악기에 ‘일 카노네(Il Cannone)’, 즉 ‘대포’라는 묵직한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활을 그을 때마다 터져 나오는 거친 음량과 깊은 울림 때문이었거든요. 그는 평생 이 바이올린을 제 몸처럼 곁에 두었고, 세상을 떠나는 길에 고향 제노바 시에 이 명기를 온전히 넘겼습니다. 지금도 제노바의 도리아-투르시 궁전에 고이 모셔져 있는데, 매달 한 번씩 관리자가 조심스레 꺼내 직접 활을 긋는다고 합니다. 아무리 대단한 악기라도 사람이 켜주지 않으면 나무토막으로 굳어버리니까요.

제노바에 보존된 일 카노네의 실물 영상. 도리아-투르시 궁전에서 촬영된 이 기록에서 280여 년 된 악기의 보존 환경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남겨져 있습니다. 당대 최고의 악기 제작자 장 밥티스트 뷔욤(Jean-Baptiste Vuillaume)이 일 카노네를 나뭇결까지 똑같이 베껴 정밀 복제품을 하나 만들었는데, 눈썰미 좋고 귀 밝은 파가니니조차 단번에 둘을 가려내지 못하고 진땀을 뺐다지요. 한참 동안 활을 긋고 음색을 더듬은 뒤에야 겨우 진품을 짚어냈다고 합니다. 훗날 이 복제품은 파가니니가 거둔 유일한 제자, 카밀로 시보리(Camillo Sivori)의 손으로 넘어갔고요.

들라크루아가 그린 파가니니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가 그린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파가니니’ (1832)

한 줄의 현 위에서 부린 마법

도대체 파가니니의 무엇이 그토록 숱한 사람들의 넋을 쏙 빼놓았을까요. 그 마법의 실체는 의외로 투명하고 구체적입니다. 그는 바이올린이라는 나무 악기가 감당할 수 있는 물리적 한계치를 벼랑 끝까지 밀어붙였고, 동시대 어떤 음악가도 흉내조차 내지 못한 기교들을 무대 위에서 너무나 태연하게 해치워버렸거든요.

첫 번째 무기는 왼손 피치카토입니다. 보통 현을 손가락으로 뜯는 피치카토는 으레 오른손이 할 일이죠. 그런데 파가니니는 활로 유려한 선율을 켜면서, 동시에 남는 왼손 손가락을 바쁘게 놀려 다른 현을 튕겼습니다. 한 사람이 연주하는데 두 사람의 소리가 겹쳐 들리는 곡예였죠. 두 번째는 하모닉스입니다. 줄을 꾹 누르지 않고 깃털처럼 살짝 스치듯 짚어 새의 휘파람 같은 고음을 뽑아내는 기법인데, 파가니니는 아예 두 현에서 이 소리를 동시에 울리는 이중 하모닉스까지 가뿐하게 구사했다지요.

세 번째는 리코셰 보잉입니다. 활을 현 위로 통통 튕기듯 내던져서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우르르 음표들을 쏟아내는 기교입니다. 관객의 눈에는 활이 제멋대로 허공에서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을 겁니다. 네 번째는 스코르다투라, 즉 변칙 조율이고요. 연주를 시작하기 전 줄의 팽팽함을 일부러 비틀어 조여서, 평범한 손가락 뻗기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기이한 화음과 음역을 억지로 쥐어짜 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가장 극적인 장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연주가 절정에 달해 무대 위에서 줄이 ‘툭’ 끊어져 버려도, 파가니니는 연주를 멈추기는커녕 남은 줄들로 곡의 끝동까지 맹렬하게 달려갔습니다. 급기야 나중에는 일부러 G선 딱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 세 줄을 다 풀어버린 채, 가장 굵고 투박한 그 한 줄만으로 곡 전체를 요리조리 뜯고 켜는 기예를 선보였지요. 관객은 열광의 비명을 질렀지만, 동시에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저 짓이 과연 진짜 사람의 손으로 가능한 일인가 의심하면서요.

여기서 흔한 환상 하나는 살짝 깨고 넘어가야겠습니다. 무대 위에서 그토록 절묘하게 끊어지던 현이 늘 하늘이 돕는 우연만은 아니었거든요. 파가니니는 이런 아슬아슬한 사고가 무대를 얼마나 쫀득하게 만드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눈치 빠른 사내였습니다. 애초에 그는 처음부터 한 줄이나 두 줄만으로 켜게끔 뼈대를 짠 곡들을 따로 주머니에 챙겨 두었습니다. 오직 G선 하나로 넓은 음역을 누비는 《모세 환상곡》이 그 대표적인 카드였지요. 툭 끊어진 현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 않는 거장이라는 그림은, 사실 절반쯤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치밀하게 짜인 무대 연출이었습니다. 마법의 밑천이 반은 독보적인 손기술, 나머지 반은 능수능란한 쇼맨십이었다는 사실은 파가니니를 깎아내리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훨씬 영악하고 매력적인 사내로 보이게 만듭니다. 진짜 천재는 방구석에서 묘기를 부리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재능을 대중에게 어떻게 포장해 팔아야 하는지까지 훤히 꿰뚫고 있었던 거예요.

악마처럼 묘사된 파가니니 캐리커처
장 피에르 당탕(Jean-Pierre Dantan)이 만든 파가니니 캐리커처. 깡마른 몸과 길쭉한 손가락을 익살스럽게 과장한 19세기 풍자 조형으로, 당대가 그를 어떻게 ‘괴물’로 소비했는지 보여줍니다.

악마설의 퍼즐 조각 — 마르판 증후군이라는 의심

현란한 손재주만으로는 끝내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하나 남습니다. 바로 파가니니의 몸입니다. 그는 4옥타브를 훌쩍 넘나드는 넒은 음역을 손가락 하나로 가뿐히 커버했고, 한 줄 위에서 곡의 처음과 끝을 모조리 빚어냈으며, 양손 피치카토와 이중 트릴 같은 묘기를 아무렇지 않게 툭툭 던져댔습니다. 20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의 카프리스를 여유롭게 켜는 바이올리니스트는 그리 많지 않거든요.

그래서 현대 의학자들은 그 초인적인 기교의 비밀이 얄궂게도 질병에 있었을지 모른다는 가설을 조심스레 내놓습니다. 마르판 증후군(Marfan syndrome)이나 엘러스-단로스 증후군(Ehlers-Danlos syndrome)을 앓았을 수 있다는 거지요. 두 질환의 뚜렷한 특징은 비정상적으로 길쭉한 손가락과 고무줄처럼 휘어지는 유연한 관절입니다.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과 깡마른 몸집, 그리고 거미줄처럼 길게 뻗은 손가락이라는 당대의 외모 묘사와 묘하리만치 겹쳐 떨어지는 대목입니다.

그렇다고 병마가 뚝딱 천재를 만들어주었을 리는 만무합니다. 다만 하루 열 시간씩 방구석에 틀어박혀 활을 긁어대던 광적인 집념 위에, 범상치 않은 신체 조건이 날개를 달아주었을 뿐이지요. 그 지독한 조합이 토해낸 결과물은 19세기 사람들의 얄팍한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부류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복잡한 계산 대신 가장 편하고 자극적인 정답표를 집어 들었습니다. 악마와 거래를 텄다는 소문이었죠.

솔직히 말해 여기엔 파가니니의 책임도 작지 않습니다. 그는 굳이 헛소문이라며 열을 올리지 않았거든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만 옷을 두르고 늘 그늘진 얼굴을 한 데다 웬만해선 사생활조차 흘리지 않았으니, 이 음침한 신비주의는 오히려 티켓 파워를 끌어올리는 최고의 흥행 보증수표가 되었습니다. 당대의 화가들은 신이 나서 그를 춤추는 해골과 악마 틈바구니에 그려 넣었고, 한술 더 떠 그가 잠든 머리맡에서 악마가 슬쩍 바이올린을 쥐여주는 석판화까지 불티나게 팔려 나갔지요. 본인이 은근슬쩍 즐기고 부추겼던 이 검은 신화가 훗날 자기 무덤 앞까지 질척거리며 따라올 줄은, 아마 그 자신도 미처 몰랐을 겁니다.

라 캄파넬라 — 맑은 종소리를 품은 협주곡

파가니니가 그저 기괴한 무반주 카프리스로만 굳어지는 건 본인 입장에서 퍽 서운할 법한 일입니다. 그는 번듯한 바이올린 협주곡을 여섯 곡이나 남겼고, 그중 2번 협주곡의 마지막 악장에는 클래식 언저리에도 가본 적 없는 사람조차 금세 고개를 끄덕일 만한 유명한 멜로디가 숨어 있거든요.

바로 그 유명한 ‘라 캄파넬라(La Campanella)’, 우리말로 치면 ‘작은 종’입니다. 파가니니는 이 경쾌한 론도 악장에 오케스트라의 타악기인 진짜 종을 편성해서, 주요 멜로디가 한 바퀴 돌아올 때마다 잊지 않고 ‘딸랑’ 소리를 내게 만들었지요. 그러면 무대 앞의 독주 바이올린이 아찔하게 높은 음자리에서 그 맑은 종소리를 얄미울 만큼 똑같이 흉내 내며 맞받아칩니다. 제목 그대로 오케스트라 한가운데서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듯 종이 울리는 셈이죠.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2번 3악장 ‘라 캄파넬라’ — 에디 첸(Eddy Chen)·싱가포르 심포니. 주제가 돌아올 때마다 끼어드는 종소리와, 그것을 흉내 내는 독주 바이올린의 고음을 귀로 좇아 보세요.

이 매혹적인 선율에 가장 먼저 넋을 잃고 무릎을 꿇은 사내가 훗날의 피아노 제왕 프란츠 리스트였습니다. 그는 라 캄파넬라를 통째로 건반 위로 뜯어고쳐서, 피아노 독주만으로 쨍한 종소리가 터져 나오게 개조해 버렸지요. 재미있게도 오늘날 사람들에게 ‘라 캄파넬라’를 물어보면 십중팔구 바이올린 원곡보다 리스트의 화려한 피아노 버전을 먼저 떠올립니다. 원작자보다 판을 바꾼 편곡자가 스포트라이트를 훔쳐 가는, 음악사에서 심심찮게 벌어지는 유쾌한 역전극이지요.

24개의 카프리스 — 바이올린을 위한 구약성서

그렇다 해도 파가니니의 진짜 심장 박동은 역시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24개의 카프리스 Op. 1》에서 가장 뜨겁게 뜁니다. 십수 년의 세월을 갈아 넣어 깎고 다듬은 이 악보집은 훗날 바이올린 문헌의 ‘구약성서’라는 무시무시한 타이틀을 달게 되지요. 스물네 개의 조각들은 곡마다 바이올린의 뼈대를 꺾을 듯한 극한의 기교를 하나씩 집요하게 물고 늘어집니다. 쉴 새 없는 아르페지오, 손가락이 꼬이는 이중 트릴, 지판 끝에서 끝을 날아다니는 포지션 이동, 그리고 리코셰 보잉까지. 나무통과 네 줄의 현으로 감히 시도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불가능’이 이 얇은 악보집 안에 욱여넣어져 있습니다.

그 험난한 봉우리 중에서도 마지막을 장식하는 24번 카프리스. 숨차게 달려가는 이 짤막한 곡 하나가 클래식 음악의 거대한 지도 위에 찍어놓은 발자국은 우리의 예상치를 가뿐히 뛰어넘습니다.

오거스틴 하델리히(Augustin Hadelich)가 들려주는 카프리스 24번 라이브 (2024). 독일 태생 미국 바이올리니스트로, 오늘날 가장 신뢰받는 파가니니 해석자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힙니다.

파가니니는 이 피 마르는 곡집의 첫머리에 “예술가들에게(alli artisti)”라는 헌사를 꾹꾹 눌러 썼습니다. 돈 많은 귀족이나 권력자 한 명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예술가’를 향해 악보를 던져둔 셈입니다. 그런데 유독 24번 끄트머리에만 묘한 메모 하나를 슬쩍 덧붙여 두었더군요. “니콜로 파가니니, sepolto pur troppo(안타깝게도 묻혀버린).” 거창한 헌사 뒤에 숨겨놓은, 결국은 외로운 자기 자신에게 바치는 단 한 줄의 위로였을 겁니다. 무심코 흘려 적은 저 짧은 탄식이 훗날 그가 눈을 감은 뒤 얼마나 서늘한 예언으로 되돌아오는지, 그 기막힌 사연은 이 글의 맨 마지막 장에서 마저 풀어보려 합니다.

여덟 마디의 멜로디, 200년을 홀리다

24번 카프리스의 a단조 주제는 묘한 중독성을 지녔습니다. 단순명료하면서도 어딘가 묘하게 도전적인 이 여덟 마디가 장장 200년 동안 내로라하는 작곡가들의 손목을 차례로 낚아챘거든요.

리스트가 파가니니의 연주를 보고 이렇게 다짐했다는 일화는 꽤 유명합니다. “바이올린에 파가니니가 있다면, 피아노의 파가니니는 내가 되겠다.” 그는 《파가니니 대연습곡》을 써서 그 겁 없는 다짐을 건반 위에 고스란히 쏟아냈지요.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는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 35》로 같은 주제를 양손이 찢어질 듯한 극한까지 밀어붙였고요. 여기에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ff)는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Op. 43》에서 아예 그 선율을 거꾸로 뒤집어버립니다. 훗날 영화 음악으로 단골 출몰하는 18번째 변주의 그 애절한 멜로디가 바로 여기서 길어 올려진 겁니다. (그 곡의 얄궂은 사연이 궁금하다면 → 라흐마니노프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이야기) 심지어 20세기로 넘어와서도 비톨트 루토스와프스키(Witold Lutosławski)까지 이 징글징글한 주제를 붙들고 변주곡을 썼지요.

한 사내가 허공에 툭 던진 여덟 마디가 리스트와 브람스라흐마니노프를 차례로 꿰뚫고 지나갔다는 사실. 이쯤 되면 파가니니가 정말로 무언가와 은밀한 계약을 맺은 게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 대상이 시시한 악마가 아니라 질긴 시간이었다는 게 문제일 뿐이지요.

19세기 유럽을 집어삼킨 원조 록스타

1828년 파가니니는 난생처음 이탈리아 국경 밖으로 발을 내디뎠습니다. 마흔여섯이라는 늦깎이 나이에 치른 국제 무대 데뷔전이었죠. 그런데 돌아온 반응은 그야말로 지붕을 뚫을 기세였습니다.

첫 행선지인 빈 공연은 전례 없는 대성공을 거뒀습니다. 며칠 뒤 거리의 상점마다 “파가니니 스타일” 양복과 모자, 장갑, 구두가 산더미처럼 쏟아져 나왔지요. 요즘으로 치면 19세기판 아이돌 굿즈가 대유행을 탄 셈입니다. 맹목적인 팬들의 열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어요. 급기야 그가 길거리에 피우다 버린 시가 꽁초를 주워다 금은방에서 브로치로 만들어 목에 걸고 다니는 극성팬들까지 등장했으니까요.

1829년 베를린, 1831년 파리, 그리고 런던. 마차가 닿는 도시마다 똑같은 광란의 풍경이 도돌이표처럼 되풀이됐습니다. 교황 레오 12세(Pope Leo XII)는 서둘러 그에게 황금박차 훈장을 내렸고요. 파가니니는 의심의 여지 없는 19세기의 록스타였습니다. 손에 쥔 무기가 전동 기타 대신 낡은 바이올린이었다는 점만 빼면요.

힐러리 한(Hilary Hahn)이 연주하는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1번. 화려한 독주 카덴차와 오케스트라가 주고받는 대비가 돋보이는 파가니니의 대표 협주곡입니다. (다른 바이올린 협주곡 명곡이 궁금하다면 → 바이올린 협주곡 입문 가이드)

천재가 천재를 알아볼 때 — 베를리오즈와 파가니니

1833년 파리에서 파가니니는 무명의 젊은 작곡가 엑토르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를 만납니다. 파가니니는 단박에 그의 진가를 알아보고 “베토벤의 부활”이라 치켜세웠지요. 당시 음악계의 깐깐한 분위기를 생각하면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찬사였습니다. (베를리오즈의 대표작이 궁금하다면 → 《환상교향곡》 이야기)

파가니니는 망설임 없이 베를리오즈에게 비올라를 위한 협주곡을 하나 써달라고 의뢰했습니다. 완성되면 자신이 직접 무대에 올라 켜겠다는 속셈이었지요. 벅찬 가슴을 안고 베를리오즈는 《이탈리아의 해롤드(Harold en Italie)》를 완성해 그의 손에 쥐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악보를 찬찬히 훑어보던 파가니니는 매정하게도 연주를 거절해 버리지요.

퇴짜를 놓은 이유가 참 그답습니다. 독주자인 비올라 파트가 제 성에 찰 만큼 튀거나 화려하지 않다는 거였어요. 베를리오즈가 쓴 곡은 비올라가 오케스트라와 나란히 서서 풍성한 대화를 나누는 쪽에 가까웠지, 비올라 혼자 무대 한가운데서 모든 핀조명을 독차지하는 쇼피스는 아니었거든요. 무대에 오르는 순간 모든 관객의 숨소리까지 통째로 훔쳐 가는 것이 파가니니에게는 숨 쉬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권리였으니까요.

아이러니하게도 이 《이탈리아의 해롤드》는 오늘날 비올라 문헌을 대표하는 최고 걸작 가운데 하나로 남았습니다. 콧대 높은 파가니니가 시시하다며 내친 곡이 보란 듯이 음악사에 굵직하게 새겨진 거예요. 진짜 흥미로운 반전은 그다음입니다. 1838년, 다른 연주자의 활을 통해 뒤늦게 이 곡의 진가를 뼈저리게 확인한 파가니니는 기꺼이 베를리오즈에게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합니다. 그러고는 미안함과 찬사를 듬뿍 담아 거액의 돈을 선물로 보냈지요. 매일매일 가난에 목이 졸리던 베를리오즈에게 그 돈 봉투는 말 그대로 생명줄이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소문 속 악마와는 영 딴판인, 제법 사람 냄새 나는 파가니니를 마주하게 됩니다. 그는 사생아로 얻은 아들 아킬레(Achille)를 끔찍이 아껴 어딜 가든 제 품에 끼고 다녔고, 재능 있는 동료 음악가에게는 군말 없이 지갑을 열 줄 아는 넉넉함도 있었거든요. 무대 위를 호령하던 서늘하고 음울한 마법사와 무대 밖에서 아들 바보로 살았던 다정한 아버지. 어쩌면 그 아득한 간극이야말로 전설에 가려져 있던 파가니니라는 인간의 진짜 얼굴일지도 모릅니다.

안식처조차 빼앗긴 기묘한 장례식

말년의 파가니니는 참혹하게 무너져 내렸습니다. 오래도록 그를 괴롭힌 병마를 억누르겠다며 수은과 아편을 번갈아 들이켰고, 그 지독한 처방의 부작용으로 육신은 급격히 스러졌지요. 나중에는 후두마저 망가져 제대로 된 말 한마디 내뱉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고요. 설상가상으로 1836년 무렵에는 파리의 한 카지노 사업에 덜컥 이름을 빌려주었다가 일이 처참하게 틀어지며 막대한 빚더미를 고스란히 떠안았습니다. 평생을 애지중지하던 악기와 귀한 소장품들마저 헐값에 경매로 넘겨야 하는 처지가 되었지요.

1840년 5월 니스. 앓아누운 그에게 한 사제가 종부성사를 베풀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파가니니는 담담히 거절했지요. 자신이 당장 눈을 감을 때가 아니라고 굳게 믿었거든요.

그리고 불과 며칠 뒤인 1840년 5월 27일. 발길을 돌렸던 사제가 미처 다시 찾아오기도 전에 그는 심한 내출혈로 허망하게 숨을 거두고 맙니다.

진짜 기괴하고 씁쓸한 비극은 그가 눈을 감은 뒤부터 시작됩니다. 콧대 높은 가톨릭 교회가 파가니니의 시신을 정식으로 매장하는 일을 매몰차게 막아섰거든요. 명분은 두 가지였습니다. 임종 직전 종부성사를 거절했다는 괘씸죄, 그리고 살아생전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던 “악마와 결탁했다”는 바로 그 음침한 소문. 무대 위에서 그의 티켓값을 천정부지로 띄워주었던 그 매혹적인 루머가, 정작 죽고 나서는 몸 뉘일 무덤 한 평조차 무자비하게 빼앗아버린 셈이지요.

갈 곳 잃은 시신은 고향 제노바로 돌아왔지만 차가운 흙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이리저리 짐짝처럼 옮겨 다녀야 했습니다. 아들이 교황에게 거듭 매달려 간신히 이송 허가를 받아내긴 했어도, 정식 매장은 끝끝내 거부당했고요. 파가니니의 유해가 마침내 파르마의 고요한 땅속에 안착한 것은 1876년. 그가 쓸쓸히 숨을 거둔 지 무려 36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흐른 뒤였습니다.

이 잔혹한 유랑기는 거기서 마침표를 찍지도 않습니다. 1893년 체코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프란티셰크 온드리체크(František Ondříček)가 파가니니의 손자를 끈질기게 설득해 기어이 그 관뚜껑을 열어보았다고 전해지거든요. 반세기가 훌쩍 넘도록 이리저리 떠돌며 잠들어 있던 자의 모습이 과연 어떠했을지는, 차라리 각자의 상상 속에 조용히 묻어두는 편이 낫겠습니다.

잠들지 않는 대포, 일 카노네를 쥐는 자들

다행히 전설은 박물관의 차가운 유리 진열장 안에 초라하게 갇히지 않았습니다. 제노바에는 여전히 그의 분신인 일 카노네가 제 모습을 지키고 있고, 그 전설의 악기를 직접 두 손으로 켜보는 일은 오늘날의 바이올리니스트들이 거머쥘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러운 훈장 가운데 하나거든요.

1954년부터 제노바시는 파가니니의 이름을 내건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를 성대하게 열어 왔습니다. 그리고 이 치열한 대회의 우승자에게는 아주 각별한 부상이 하나 따라붙지요. 바로 그 콧대 높은 일 카노네를 직접 연주해 볼 수 있는 자격입니다. 280여 년의 세월을 뚫고 살아남은 악기를 턱 밑에 괴고 파가니니의 곡을 켜보는 짜릿한 경험은, 활을 잡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탐을 내고도 남을 테니까요.

우리에게도 무척 반가운 이름 하나가 이 자랑스러운 명단에 또렷이 새겨져 있습니다. 2015년 한국의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가 이 대회 정상에 당당히 올랐거든요. 이 글 맨 위에 놓인 영상이 바로 그가 연주하는 파가니니 협주곡 1번 실황입니다. 악마의 바이올린이라는 으스스한 별명이 무색할 만큼, 그 묵직한 악기는 이렇게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손에서 손을 거치며 펄펄 살아서 묵직한 소리를 뿜어내고 있습니다. (바이올린 협주곡의 또 다른 명곡이 궁금하다면 →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악마는 떠났어도, 음악은 남았다

결국 파가니니에게 그림자처럼 속삭이던 악마는 없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건 비정상적으로 굽어지는 유연한 관절, 하루 열 시간씩 현을 긁어대던 광적인 연습량, 도박판에서 분신 같은 바이올린을 날려버린 뒤에야 찾아온 뼈저린 절박함, 그리고 세상과 담을 쌓은 침묵의 시간 동안 홀로 독하게 벼려낸 전무후무한 기법들이 전부였지요.

그가 남겨두고 떠난 유산들을 차분히 헤아려 봅니다. 24개의 카프리스는 이제 의심할 여지 없는 바이올린 기법의 굳건한 성경이 되었습니다. 리스트와 브람스, 라흐마니노프,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작곡가가 그의 독창적인 선율을 빌려다 저마다의 눈부신 걸작을 빚어냈고요. 누군가를 향해 던지는 “21세기의 파가니니”라는 수식어는, 여전히 무대에 오르는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로 굳건히 살아남아 있습니다.

파가니니는 그토록 잔인한 24번 카프리스를 쓸쓸히 자기 자신에게 헌정하며 이렇게 끄적여 두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묻혀버린, 니콜로 파가니니에게.” 쓰디쓴 자조였는지 얄궂은 예언이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는 서늘한 한 줄이지요. 실제로 그의 시신은 36년이나 무덤조차 찾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아야 했으니, 어쩌면 무심코 적어둔 그 짤막한 메모가 섬뜩하게 맞아떨어진 셈입니다.

하지만 그의 땀이 밴 음악만은 끝내 흙 속에 파묻히지 않았습니다. 오늘 밤, 굳게 마음먹고 카프리스 24번을 한 번 들어보시겠어요? 기괴한 악마의 솜씨가 아니라, 나무통과 네 줄의 현을 쥔 인간의 집념이 과연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는지를 고스란히 증명해 내는, 아주 지독하고도 매혹적인 5분짜리 기록이니까요.

비슷한 드라마를 가진 작곡가들

파가니니처럼 믿기 힘든 사연과 끈질긴 전설을 거느린 작곡가들의 이야기입니다.

악보와 함께 듣기

카프리스 24번을 악보와 함께. a단조 주제가 제시된 뒤 열한 개의 변주와 피날레가 어떻게 한 음씩 표정을 바꿔 가는지, 음표를 눈으로 따라가며 들으면 한결 또렷하게 잡힙니다.

원본 악보는 IMSLP에서 누구나 무료로 열람할 수 있거든요. 파가니니 24개의 카프리스 Op. 1 악보 보기 (IMSLP)

자주 묻는 질문

파가니니는 정말 악마와 계약했나요?

아닙니다. 파가니니의 초인적 연주는 하루 열 시간이 넘는 연습, 마르판 증후군으로 추정되는 신체적 특성(비정상적으로 긴 손가락과 유연한 관절), 그리고 몇 년간 은둔하며 독자적으로 벼려낸 혁신적 주법이 함께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악마설은 그의 음울한 외모와 신비주의가 부추긴 소문이었어요.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일 카노네’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이탈리아 제노바의 도리아-투르시 궁전(Palazzo Doria-Tursi)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1743년 과르네리 델 제수가 만든 이 악기는 파가니니 사후 제노바 시에 기증되었고, 매달 관리자가 직접 연주합니다. 파가니니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 우승자에게도 이 악기로 연주할 기회가 주어지지요.

파가니니의 시신은 왜 36년간 매장되지 못했나요?

파가니니가 임종 직전 종부성사를 거부했고, 생전의 ‘악마와의 계약’ 소문이 겹치면서 가톨릭 교회가 정식 매장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840년 사망 후 여러 차례 탄원을 거쳐 1876년에야 파르마에 묻힐 수 있었습니다.

파가니니의 연주 기법은 무엇이 그렇게 혁신적이었나요?

왼손 피치카토, 이중 하모닉스, 리코셰 보잉, 변칙 조율(스코르다투라), 그리고 G선 하나만으로 곡 전체를 연주하는 묘기까지, 당대에는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기법을 무대 위에서 태연히 구사했습니다. 특히 24개의 카프리스는 바이올린의 물리적 한계를 넓혀 후대 연주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남겼습니다.

파가니니 카프리스 24번이 왜 그렇게 유명한가요?

24번 카프리스의 a단조 주제는 단순하면서도 중독적이어서, 200년 동안 수많은 작곡가의 손을 거쳤습니다. 리스트의 《파가니니 대연습곡》, 브람스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이 모두 이 한 주제에서 출발했지요. 한 곡이 낳은 가장 풍성한 후손이라 할 만합니다.

이 곡은 — 니콜로 파가니니의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24개의 카프리스 Op. 1로, 바이올린 문헌의 구약성서라 불리는 곡집입니다.

딱 하나만 듣는다면 — 카프리스 24번을 먼저 들어보세요. a단조 주제가 열한 개의 변주와 피날레로 표정을 한 음씩 바꿔 가는 5분짜리 기록입니다.

첫 음반 — 오거스틴 하델리히가 들려주는 카프리스 24번 라이브는 오늘날 가장 신뢰받는 파가니니 해석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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