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 ①
- 펠릭스 멘델스존
(Felix Mendelssohn, 1809–1847) - 인물 ②
- 리하르트 바그너
(Richard Wagner, 1813–1883) - 발단
- 1836년, 무명의 바그너가 자작 《교향곡 C장조》(WWV 29) 악보를 멘델스존에게 보냄 — 멘델스존은 끝내 분실
- 문제의 문서
- 「음악에서의 유대성」(Das Judenthum in der Musik)
1850년 필명 발표 · 1869년 실명 재출간 - 핵심 쟁점
- “유대인 작곡가는 영혼 없는 기교만 부린다”는 바그너의 반유대주의 비평
- 음악적 증거물
-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Op.64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 - 남긴 그림자
- 나치의 멘델스존 말살(1936 라이프치히 동상 철거) → 2008년 동상 복원
- 1836년, 무명의 바그너는 존경하던 멘델스존에게 자작 교향곡 악보를 보냈지만 멘델스존은 그걸 잃어버렸고, 그 굴욕은 14년을 곪아 「음악에서의 유대성」이라는 반유대주의 저격문으로 터집니다.
- 바그너가 칼을 빼든 건 멘델스존이 죽은 지 3년 뒤였죠. 반박할 수 없는 상대를 겨냥한 일방적 매장이었던 셈입니다.
- 그 글의 그림자는 나치의 멘델스존 말살까지 거의 100년을 드리웠고, 2008년 라이프치히 동상이 다시 서면서 비로소 한 매듭이 풀렸습니다.
1836년, 스물셋의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는 떨리는 손으로 악보 한 부를 포장했습니다. 바그너의 자서전 《나의 생애》(Mein Leben)에 따르면, 수신인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촉망받는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 바그너가 야심차게 완성한 《교향곡 C장조》(Symphony in C major, WWV 29)였습니다. 젊은 작곡가에게 이 악보 발송은 곡 평가를 부탁하는 일이 아니라, 거의 고백에 가까웠습니다. “당신의 음악을 존경합니다. 제 곡도 한번 봐주십시오.”
그런데 멘델스존은 이 악보를 잃어버렸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 관심이 없었을 뿐입니다. 악보는 어딘가에 처박혀 먼지를 뒤집어쓰다가 영영 사라졌습니다. 바그너는 이 일을 평생 잊지 못했습니다. 마음에 박힌 가시 하나가 30년 넘게 빠지지 않았습니다.
14년 뒤, 바그너는 유럽 전역에 배포될 에세이 한 편을 씁니다. 제목은 「음악에서의 유대성」(Das Judenthum in der Musik). 멘델스존을 정조준한 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멘델스존은 이미 세상을 떠난 지 3년째였습니다. 반박할 수 없는 사람을 겨냥해 펜을 빼든 셈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흔히 듣는 설명 — “바그너는 질투에 눈먼 옹졸한 천재였다” — 은 절반만 맞습니다. 이건 단순한 질투극이 아닙니다. 클래식 음악 역사상 가장 복잡하고 가장 추악하며 가장 영향력이 컸던 두 천재의 충돌이자, 한 편의 글에 담긴 증오가 100년 뒤의 비극으로까지 메아리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 가시가 어디서 시작됐는지부터 따라가 보겠습니다.

라이프치히의 황태자, 멘델스존
1835년, 멘델스존은 스물여섯의 나이에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Gewandhaus Orchestra) 음악감독에 취임합니다. 유럽 최고 권위의 악단을 이십대 청년이 이끈다는 건, 지금으로 치면 스무 살짜리가 빅테크 CEO 자리에 앉은 것과 비슷한 충격이었죠.
그런데 멘델스존의 이력을 들여다보면 이게 파격도 아니었습니다. 열두 살에 대문호 괴테(Goethe) 앞에서 피아노를 쳐 노인의 찬사를 받았고, 열여섯에 《현악 8중주》(String Octet, Op. 20)를 써냈습니다. 이 곡의 마지막 악장 스케르초는 지금까지도 실내악 역사상 가장 경이로운 10대의 산물로 꼽힙니다. 모차르트조차 열여섯에 이런 걸 쓰지는 못했으니까요.
결정타는 스무 살에 터집니다. 1829년, 멘델스존은 거의 잊히다시피 했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S. Bach)의 《마태 수난곡》(Matthäus-Passion, BWV 244)을 작곡가 사후 거의 100년 만에 무대에 다시 올렸습니다. 이 한 번의 부활 공연이 서양 음악사의 물줄기를 틀어놓았습니다. 오늘날 바흐가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는 스무 살 청년 멘델스존의 고집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죽은 거장을 되살려 낸 청년, 좀처럼 보기 드문 데뷔였습니다.
게반트하우스에서 그는 베토벤, 바흐, 슈베르트의 작품을 체계적으로 프로그램에 올린 최초의 지휘자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정기 연주회 시즌제’도 사실상 멘델스존이 다듬어 놓은 틀입니다. 1843년에는 라이프치히 음악원(Leipzig Conservatory)을 세웁니다. 독일 최초의 음악 전문 교육기관이었고,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이 교수로 참여했을 만큼 출범부터 격이 달랐습니다.
바흐 부활은 한 번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1839년, 멘델스존은 슈만이 빈에서 발굴해 온 슈베르트의 《교향곡 C장조 ‘그레이트’》(D 944) 악보를 받아 들고, 작곡가가 죽은 뒤 오랫동안 연주되지 못했던 이 대곡을 게반트하우스 무대에서 처음으로 울려 퍼지게 했습니다. 잊힌 거장을 되살리는 일은 그에게 일종의 천직이었습니다. 남이 버린 보물을 알아보는 눈, 그것이 멘델스존이라는 음악가의 또 다른 얼굴이었습니다.
작곡가로서도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Violin Concerto in E minor, Op. 64), 《이탈리아 교향곡》(Symphony No. 4 “Italian”, Op. 90), 《한여름 밤의 꿈 서곡》(A Midsummer Night’s Dream Overture, Op. 21) 같은 걸작을 연달아 쏟아냈습니다. 특히 《한여름 밤의 꿈 서곡》은 열일곱 살에 쓴 곡인데, 그 나이에 오케스트라를 이 정도로 부리는 솜씨는 다시 모차르트를 떠올리게 합니다. 요컨대 유럽 음악계에서 멘델스존은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바로 이 시기, 라이프치히의 한 청년이 그 정상을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리하르트 바그너. 마침 같은 라이프치히 태생이었던 그에게 멘델스존은 같은 도시가 낳은 영웅이자, 자신이 기어이 도달하고 싶은 봉우리였죠. 우러러보는 마음과 따라잡고 싶은 마음은 종이 한 장 차이였고, 그 종이는 곧 찢어지게 됩니다.
무시당한 청년, 그리고 곪아가는 원한
바그너는 멘델스존에게 여러 차례 다가갔습니다. 앞서 말한 교향곡 악보 발송도 그중 하나였고, 직접 얼굴을 마주한 자리도 있었습니다. 바그너의 자서전 《나의 생애》에 따르면, 멘델스존은 그를 정중하지만 철저한 무관심으로 대했다고 합니다.
멘델스존은 그에게 시종 친절했을 뿐, 정작 그의 음악에 대해서는 끝내 한마디도 보태지 않았다 — 바그너는 훗날 그 만남을 대략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친절이 가장 잔인할 때가 있습니다. 무시당하는 것보다 정중하게 무시당하는 게 더 아픈 법이거든요.
1843년, 바그너가 드레스덴 궁정극장(Semperoper)의 카펠마이스터로 임명되면서 상황은 한결 복잡해집니다. 드레스덴과 라이프치히는 기차로 한 시간 거리. 마침 바그너는 《리엔치》(Rienzi)와 《방황하는 네덜란드인》(Der fliegende Holländer)으로 막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참이었습니다. 라이프치히 음악계의 중심에 선 멘델스존이 자기 작품에 손을 내밀어 주기를 내심 바랐지만, 멘델스존은 끝내 그를 위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코앞에 있는 최고의 후원자가 그에게만은 등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이 냉담함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바그너는 아직 대표작을 내놓기 전이었고, 음악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인물이었습니다. 반면 멘델스존은 유럽의 모든 궁정과 오케스트라가 모셔 가려는 스타였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통의 편지와 악보가 쏟아지는 사람이 무명의 청년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을 여유가 없었던 것도, 냉정하게 보면 이해 못 할 일은 아닙니다. 게다가 멘델스존의 취향은 보수적인 편이라, 바그너의 거칠고 야심만 큰 초기작은 그의 미학과 애초에 맞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상처받은 자존심은 그렇게 합리적으로 굴러가지 않습니다. 바그너에게 멘델스존의 무관심은 곧 자기 재능을 알아보지 못한 모욕이었고, 오래 곱씹을수록 단단한 원한으로 굳어졌습니다. 특히 멘델스존이 부유한 유대인 은행가 집안 출신이라는 사실은 바그너의 열등감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바그너 자신은 변변한 유산 하나 물려받지 못한 집안에서 자라 평생 빚에 쫓기며 살았으니까요. ‘재능은 내가 위인데, 저 사람은 가문과 인맥의 힘으로 꼭대기에 앉아 있을 뿐’ — 바그너는 아마 스스로에게 그렇게 되뇌었는지도 모릅니다.

흥미로운 건, 바그너가 멘델스존의 음악 자체는 분명히 높이 평가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멘델스존을 일류 풍경화가에 빗대 추어올리면서도, 그 말 속에 ‘깊이는 없는 그림쟁이’라는 가시를 슬쩍 박아 넣곤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멘델스존의 《핑갈의 동굴 서곡》(The Hebrides Overture, Op. 26)만큼은 자기가 아는 곡 중 손꼽히게 아름다운 곡으로 꼽으며 솔직하게 인정한 적도 있습니다. 존경과 질투, 열등감과 자존심이 한 사람 안에서 뒤엉켜 있었습니다. 이런 감정은 대개 좋은 결말로 흐르지 않습니다.
38세, 멘델스존의 갑작스러운 죽음
1847년 11월 4일, 멘델스존은 서른여덟의 나이로 눈을 감았습니다. 사인은 뇌졸중. 같은 해 5월에 먼저 세상을 떠난 누나 파니 멘델스존(Fanny Mendelssohn)의 죽음이 결정타였다는 게 정설입니다. 누나의 부고를 듣고 그 자리에서 쓰러진 뒤로 건강이 가파르게 무너졌습니다.
파니는 단순한 가족이 아니었습니다. 멘델스존의 음악적 동반자이자 가장 신뢰하던 비평가였고, 그녀 자신도 빼어난 작곡가였습니다. 다만 ‘여자가 무슨 작곡이냐’는 시대의 벽에 막혀, 오랫동안 자기 이름을 내건 출판을 단념해야 했던 비운의 천재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펠릭스의 초기 가곡집에는 파니가 쓴 곡이 그의 이름으로 몇 편 섞여 실리기도 했습니다. 그 둘은 그렇게 음악으로 묶여 있었으니, 누나를 잃은 충격이 동생의 건강까지 무너뜨린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멘델스존이 떠나자 유럽 전역이 애도에 잠겼습니다. 라이프치히에서는 수많은 인파가 장례 행렬을 따랐고, 런던에서는 빅토리아 여왕이 깊은 슬픔을 표했습니다. 한 음악가의 죽음 앞에서 유럽이 이토록 한마음으로 고개를 숙인 풍경은 좀처럼 보기 드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그너의 반응은 결이 달랐습니다. 겉으로는 애도의 뜻을 비쳤지만, 속으로는 전혀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독일 음악계를 가로막고 선 거대한 장벽 하나가 방금 무너져 내렸습니다.
사후 3년, 역사상 최악의 에세이
1850년, 바그너는 마침내 「음악에서의 유대성」을 발표합니다. 공교롭게도 이 무렵 그는 1849년 드레스덴 5월 봉기에 가담했다가 체포령을 피해 스위스 취리히로 달아난 망명객 신세였습니다. 카펠마이스터 자리도, 독일에서 쌓은 입지도 한순간에 날아간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처지에서 그는 처음에는 ‘K. 프라이게당크’(K. Freigedank, ‘자유로운 사상’이라는 뜻의 필명)라는 가명을 뒤집어쓴 채 《신음악신문》(Neue Zeitschrift für Musik)에 글을 기고했습니다. 자기 이름을 내걸 배짱은 아직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내용만큼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바그너의 핵심 주장은 이랬습니다. 바그너는 유대인 작곡가들이 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도 음악의 ‘진정한 감정’을 표현하지 못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의 음악은 겉만 매끈할 뿐 영혼이 비어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그리고 그 대표 사례로 멘델스존과 자코모 마이어베어(Giacomo Meyerbeer)를 콕 집어 지목합니다.
마이어베어를 물어뜯은 건 특히 배은망덕의 극치였습니다. 바그너가 파리에서 굶주리며 무명 시절을 견딜 때, 돈을 빌려주고 인맥을 이어준 사람이 바로 마이어베어였습니다. 파리 시절 바그너가 작곡가로 첫발을 뗄 수 있었던 데에는 마이어베어가 대 준 돈과 추천장의 힘이 컸습니다. 바그너의 출세작 《리엔치》는 1842년 드레스덴에서 성공했고, 이듬해 그를 카펠마이스터 자리까지 밀어 올렸습니다. 그런 은인의 등에 바그너가 칼을 꽂았습니다.
멘델스존을 향한 칼날은 한층 교묘했습니다. 바그너는 멘델스존의 기교와 형식미는 짐짓 인정하는 척하면서, 그것이 진정한 독창성이 아니라 ‘모방의 완벽함’에 지나지 않는다고 깎아내렸습니다. 요지는 이랬습니다 — 멘델스존은 새로운 말을 전혀 들려주지 못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미 죽어서 단 한 줄도 반박할 수 없는 사람을 상대로 한, 지극히 비겁한 일방통행이었습니다.
1869년, 바그너는 이 글을 자기 실명으로, 이번에는 긴 서문까지 붙여 한결 노골적으로 다시 찍어냅니다. 그 무렵 바그너는 이미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와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Die Meistersinger von Nürnberg)로 유럽 최고의 작곡가 반열에 올라 있었습니다. 더 이상 가면 뒤에 숨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기 이름을 걸고 죽은 자를 한 번 더 짓밟겠다는 의지에 가까웠습니다.
💡 사실은요 — 흔히 “바그너가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의 악역 벡메서로 멘델스존을 조롱했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음악학계에서 더 널리 받아들여지는 설명은 다릅니다. 벡메서의 직접적 모델은 멘델스존이 아니라 바그너를 혹평했던 비평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Eduard Hanslick)입니다 — 바그너는 작품 구상 단계에서 이 인물에게 ‘파이트 한슬리히(Veit Hanslich)’라는, 누가 봐도 한슬리크를 겨냥한 이름을 붙여 두기도 했습니다. 배리 밀링턴(Barry Millington) 같은 학자는 벡메서에 반유대주의적 특징이 짜여 있다고 보지만, ‘유대인 캐리커처로 의도했다’고까지 단정하지는 않습니다. 즉 바그너의 반유대주의를 보여주는 가장 명백한 증거는 벡메서가 아니라, 실명까지 박아 두 번 펴낸 「음악에서의 유대성」 그 자체입니다.
음악으로 진검승부: 누가 더 혁신적이었나
이제 가장 흥미로운 질문 앞에 설 차례입니다. 바그너의 주장처럼, 멘델스존의 음악은 정말 ‘깊이가 부족한’ 것이었을까요?
멘델스존은 모차르트와 바흐의 전통 위에 서서 고전적 형식을 극도로 세련되게 벼린 작곡가였습니다. 소나타 형식, 협주곡 구조, 표제 서곡 — 기존 틀 안에서 끌어낼 수 있는 최고치의 아름다움을 뽑아낸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틀만 지킨 모범생이었던 건 아닙니다.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를 보면, 1악장에서 오케스트라의 긴 서주를 통째로 걷어내고, 곡이 시작되기 무섭게 독주 바이올린이 곧장 주제를 노래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악장과 악장 사이도 쉬지 않고 아타카(attacca)로 이어 붙여, 박수가 끼어들 틈을 없앴습니다. 이건 분명한 혁신이었고, 훗날 브람스도 이 방식을 눈여겨봤습니다. 게다가 멘델스존은 오페라에 딸리지 않고 그 자체로 독립해 연주되는 ‘연주회용 서곡’이라는 형식을 하나의 장르로 끌어올린 선구자로 꼽힙니다. 《핑갈의 동굴》과 《한여름 밤의 꿈 서곡》이 없었다면, 훗날 차이콥스키의 《1812년 서곡》 같은 곡들이 설 자리도 마땅치 않았을지 모릅니다. 틀을 지키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서 조용히 새 길을 냈습니다.
바그너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틀을 다듬은 게 아니라 판을 통째로 엎은 사람이었습니다. ‘끝없는 선율’(unendliche Melodie)이라는 개념을 들고 와 전통적인 아리아와 레치타티보의 경계를 허물었고, 라이트모티프(Leitmotif) 기법으로 음악에 서사의 두께를 입혔습니다. 등장인물마다, 감정마다, 칼 한 자루에까지 고유한 음악적 동기를 붙여 오케스트라가 가수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떠들게 만들었습니다. 이건 더 이상 오페라가 아니라 음악극(Musikdrama)이었습니다.
그리고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그 첫 화음. 이른바 ‘트리스탄 화음’(Tristan chord)은 수백 년간 서양 음악을 떠받쳐 온 조성 체계에 금을 그었습니다. 이 화음은 곧장 안정적으로 풀리지 않고 또 다른 불안한 화음으로 미끄러지면서, 음악 전체가 끝없이 해결을 갈망하도록 몰아붙입니다.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의 무조음악, 나아가 20세기 현대 음악 전체가 바로 이 균열에서 흘러나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바그너는 오페라를 넘어 ‘총체예술’(Gesamtkunstwerk)이라는 개념을 세우고, 바이로이트(Bayreuth)에 자기 작품만 올리는 전용 극장까지 지어 올린 인물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혁신의 스케일에서는 바그너가 앞섰습니다. 음악사의 방향을 비틀어 놓은 건 누가 봐도 바그너 쪽입니다. 하지만 이쯤에서 항복 선언을 할 일은 아닙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 리하르트 바그너 | 펠릭스 멘델스존 | |
|---|---|---|
| 음악사의 역할 | 틀을 부수다 — 조성의 해체 | 유산을 지키다 — 고전의 세련 |
| 대표 혁신 | 라이트모티프 · 끝없는 선율 · 트리스탄 화음 | 무서주 협주곡 · 아타카 악장 연결 · 바흐 부활 |
| 음악의 인상 | 깊은 숲의 어둠, 끝없는 갈망 | 지중해의 햇살, 투명한 기쁨 |
| 남긴 그림자 | 바이로이트 · 나치의 사운드트랙 | 연주 금지 · 동상 철거, 그리고 복원 |
여기서 진짜 중요한 질문이 남습니다. 혁신이 곧 위대함과 같은 말일까요?
멘델스존의 《이탈리아 교향곡》 1악장을 한 번 틀어 보세요. 그 투명하고 환한 기쁨은 바그너의 어떤 작품에서도 끝내 찾을 수 없습니다. 바그너가 음악으로 세상을 뒤흔들었다면, 멘델스존은 음악으로 세상을 밝혔습니다. 한쪽이 깊은 숲의 어둠이라면, 다른 한쪽은 지중해의 햇살이었습니다. 둘 다 대체 불가능한 천재였고, 한쪽이 다른 쪽보다 ‘열등하다’는 주장은 애초에 성립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바그너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알았기에 더 집요하게 물어뜯었는지도 모릅니다.
히틀러의 선택, 멘델스존의 말살
바그너의 에세이는 그가 죽은 뒤에도 길고 검은 그림자를 끌고 다녔습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바그너를 광적으로 숭배했고,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해마다 빠짐없이 참석했습니다. 바그너의 며느리 비니프레트 바그너(Winifred Wagner)와 히틀러는 막역한 사이였고, 바이로이트는 어느새 나치 이데올로기의 문화적 성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바그너의 음악은 사실상 나치 독일의 공식 사운드트랙이었습니다.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장에는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서곡이 울려 퍼졌고, 나치의 선전 영화에도 그의 음악이 약방의 감초처럼 깔렸습니다.

그리고 멘델스존은, 그 반대편에서 체계적으로 지워졌습니다.
나치는 멘델스존의 음악을 독일의 연주 무대에서 조직적으로 몰아냈습니다.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앞을 지키던 멘델스존 동상은 1936년에 끌어내려졌습니다. 당시 라이프치히 시장이던 칼 프리드리히 괴르델러(Carl Friedrich Goerdeler)는 철거에 강하게 맞섰지만, 그가 출장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 동상은 기어이 뜯겨 나갔습니다. 이 사건이 그가 이듬해 시장직을 내려놓는 데 한몫했습니다. 그 괴르델러는 훗날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가 1945년 처형된 인물입니다. 동상 하나를 지키려던 저항은 훗날 괴르델러의 반나치 행보와도 이어졌습니다.
심지어 《한여름 밤의 꿈》 중 〈결혼 행진곡〉 — 지금도 전 세계 수백만 커플의 식장에서 울려 퍼지는 바로 그 곡 — 마저 금지 목록에 올랐습니다. 나치는 이걸 대체할 ‘순수 독일제’ 결혼 행진곡을 공모했지만, 멘델스존만큼 좋은 곡을 끝내 아무도 써내지 못했습니다. 결국 독일 신부들은 어딘가 허전한 대체곡에 맞춰 입장해야 했습니다. 천재를 정치로 지운다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이 풍경이 또렷하게 보여줍니다.
바그너가 반유대주의 에세이를 끼적일 때 이런 결말까지 내다봤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의 글 한 편은 씨앗이 되어 거의 100년 뒤 열매를 맺었습니다. 역사가 그 인과를 또렷하게 증언합니다.
동상의 귀환, 끝나지 않은 이야기
2008년, 라이프치히에 멘델스존 동상이 다시 세워졌습니다. 끌어내려진 지 72년 만의 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새 자리는 원래 자리가 아니라 성 토마스 교회(Thomaskirche) 앞입니다. 멘델스존이 되살려 낸 그 바흐가 27년간 칸토르로 일했던 바로 그 교회입니다. 이 조합은 결코 우연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죽은 거장을 부활시킨 청년과, 나치가 지웠다가 다시 세워진 거장이 나란히 서 있습니다.

반대편 이스라엘에서는 지금도 바그너의 음악 연주가 사실상 금기로 남아 있습니다. 법으로 금지한 건 아니지만, 2001년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이 이스라엘 페스티벌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 전주곡을 앙코르로 꺼냈을 때 객석은 그야말로 둘로 쪼개졌습니다. 어떤 청중은 울먹이며 자리를 떴고, 어떤 청중은 일어나 박수를 보냈습니다. 바그너라는 이름이 여전히 얼마나 뜨거운 감자인지를 보여 준 장면이었습니다. 바렌보임은 이후로도 “음악 자체에 죄가 있는 건 아닙니다”라며 바그너 연주를 이어 갔지만, 홀로코스트 생존자와 그 후손들에게 그 음악은 여전히 고통의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한편 음악학계에서는 멘델스존 재평가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기교는 뛰어나지만 깊이가 부족하다”는 평가가 주류였는데, 학자들은 이 통념의 뿌리가 다름 아닌 바그너의 그 에세이였음을 하나하나 밝혀내고 있습니다. 멘델스존은 바그너가 우긴 것처럼 ‘감정 없는 기능공’이 아니라, 자기만의 방식으로 음악의 가능성을 넓힌 혁신가였습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이렇게 정리됩니다. 바그너는 음악사를 바꿨고, 멘델스존은 음악사를 지켰습니다. 한 사람은 기존의 틀을 부수며 새 길을 냈고, 다른 한 사람은 잊혀 가던 위대한 유산을 발굴해 아름답게 갈고닦았습니다. 그리고 바그너가 멘델스존을 매장하려고 쓴 그 에세이는, 아이러니하게도 바그너 자신의 인간적 바닥을 가장 적나라하게 비추는 거울로 남았습니다.
천재성이 인격을 보증하지는 않는다는 것 — 이 두 사람만큼 선명하게 보여 주는 사례도 드뭅니다. 바그너의 음악은 여전히 위대하고, 멘델스존의 음악 역시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다만 그 사이에 놓인 역사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같은 음악을 들어도 전혀 다른 경험으로 갈립니다.
어떤 연주로 들어볼까: 멘델스존의 반박 증거
바그너가 ‘영혼이 없다’고 깎아내린 그 음악을 직접 귀로 판단해 볼 차례입니다.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는 그 혐의를 반박하기에 가장 좋은 증거물입니다. 성격이 또렷하게 갈리는 세 장을 골라 봤습니다.
👑 첫 감상 추천
힐러리 한 · 오슬로 필하모닉 / 휴 울프
은빛으로 깨끗하게 선을 긋는 연주. 군더더기 없이 곡의 설계가 또렷이 들려, 이 곡을 처음 만나는 분께 가장 안전한 출발점입니다.
레퍼런스
야샤 하이페츠 · 보스턴 심포니 / 샤를 뮌슈
속도와 긴장의 교과서. 빠르고 날카로워 호불호가 갈리지만, ‘기교가 곧 표현’이라는 걸 증명하는 역사적 기준점입니다.
와일드카드
정경화 · 몽트리올 심포니 / 샤를 뒤투아
노래하듯 밀어붙이는 정경화의 활. 분석적인 연주보다 감정의 결을 먼저 듣고 싶은 분께 권합니다. 차이콥스키 협주곡과 한 음반에 묶여 있어 가성비도 좋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바그너는 왜 하필 멘델스존 사후에 공격했나요?
살아 있을 때 공격했다면 멘델스존의 대단한 명성과 인맥 앞에서 역풍을 맞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멘델스존이 1847년에 세상을 떠나고, 바그너 자신의 위상이 올라간 1850년이 되어서야 반박당할 위험 없이 칼을 빼들었습니다. ‘반박할 수 없는 상대를 겨냥한 일방적 공격’이라는 비판이 따라붙는 이유입니다.
멘델스존은 정말 바그너의 악보를 무시한 건가요?
확실한 기록은 없습니다. 바그너의 자서전 《나의 생애》에는 악보가 분실되었다고 적혀 있지만, 이 자서전 자체가 바그너의 주관적 시선으로 쓰인 것이라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멘델스존이 바그너의 초기작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정황은 여러모로 사실에 가까워 보입니다.
바그너의 음악을 들어도 괜찮을까요?
결국 개인의 판단에 달린 문제입니다. 바그너의 반유대주의와 나치가 그의 음악을 이용한 역사는 부정할 수 없지만, 그의 음악 작품 자체가 반유대적 내용을 담고 있는 건 아닙니다. 예술과 예술가를 분리할 수 있느냐는 물음은 음악뿐 아니라 모든 예술에서 끝나지 않는 논쟁입니다. 다만 그 음악을 즐기면서 역사적 맥락까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분명 다른 경험입니다.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의 악역 벡메서가 멘델스존을 풍자한 인물이라던데요?
널리 퍼진 오해입니다. 벡메서의 직접적 모델은 멘델스존이 아니라, 바그너를 혹평했던 비평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입니다. 바그너는 구상 단계에서 이 인물에게 ‘파이트 한슬리히(Veit Hanslich)’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배리 밀링턴 같은 학자는 벡메서에 반유대주의적 색채가 배어 있다고 보지만, 그것을 멘델스존 풍자로 단정하는 건 무리입니다. 바그너의 반유대주의를 보여주는 가장 명백한 문서는 벡메서가 아니라 「음악에서의 유대성」 그 자체입니다.
멘델스존은 바그너 때문에 완전히 잊혔던 건가요?
바그너의 비판과 이후 나치의 연주 금지로 멘델스존의 명성이 한때 큰 타격을 입은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1844)나 《이탈리아 교향곡》(1833) 같은 걸작은 오늘날 전 세계 무대에서 꾸준히 사랑받으며 그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잊혔다기보다, 한동안 부당하게 과소평가됐다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중이라고 보는 게 정확합니다.
바그너가 멘델스존을 존경하던 시절의 흔적도 음악에 남아 있나요?
네, 바그너의 초기작인 《교향곡 C장조》(WWV 29, 1832)는 양식 면에서 멘델스존과 베토벤의 영향을 뚜렷하게 드러냅니다. 멘델스존에게 보냈다 분실된 그 악보가 바로 이 곡이었습니다. 스무 살 안팎의 바그너는 멘델스존을 우러러보는 선배로 여기며 그의 음악을 깊이 들여다보던 시기였습니다.
참고 자료
- Wikipedia — Das Judenthum in der Musik (음악에서의 유대성)
- Wikipedia — Felix Mendelssohn
- Wikipedia — Richard Wagner
- Wikipedia — Beckmesser (한슬리크 모델·반유대주의 해석 논쟁)
- Wikipedia — Violin Concerto in E minor (Mendelssohn)
이어서 듣기 — 천재의 그늘을 따라 걷는 길
클래식은 한 곡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게 될 때 훨씬 깊게 울립니다. 바그너와 멘델스존처럼, 재능과 인격이 어긋났던 또 다른 천재들의 이야기를 함께 들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