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베르트 현악 사중주 14번 d단조, D.810 ‘죽음과 소녀’ — 27세가 쓴 자기 부고

소녀가 사라진 자리의 d단조 사중주

슈베르트의 현악 사중주 14번에는 부제가 하나 붙어 있습니다. ‘죽음과 소녀.’ 그런데 정작 곡 안으로 들어가 보면, 소녀는 단 한 마디도 노래하지 않거든요.

슈베르트는 1817년에 쓴 자기 가곡에서 두 화자 — 소녀와 죽음 — 가운데 죽음의 응답만 떼어내 사중주 2악장의 주제로 가져왔지요. 부제는 분명 그녀를 부르는데, 음악 안에는 죽음의 자장가만 남고 그녀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부제가 약속한 인물이 곡 속에 없다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빌헬름 아우구스트 리더가 그린 프란츠 슈베르트 초상
1824년의 슈베르트는 이런 얼굴이었을 겁니다. 안경 너머의 눈빛이 27세보다 한참 늙어 보이거든요.
작곡가
프란츠 슈베르트
(Franz Schubert, 1797–1828)
곡명
현악 사중주 14번 d단조, D. 810 《죽음과 소녀》
(String Quartet No. 14 in D minor)
작곡 시기
1824년 3월, 빈 (슈베르트 27세)
악장
4악장
I. Allegro (d단조, 4/4)
II. Andante con moto (g단조, 2/2)
III. Scherzo: Allegro molto – Trio (d단조 / 트리오 D장조, 3/4)
IV. Presto (d단조, 6/8)
편성
바이올린 2, 비올라, 첼로
초연
비공개 1826년 1월, 빈 (하커 형제의 집, 슈베르트가 비올라로 참여)
공개 연주는 슈베르트 사후에 비로소 이뤄짐
출판
1831년, 빈 — 사후 출판
연주 시간
약 38~42분
자필악보
빈 시립도서관 (Wienbibliothek) 소장

1824년 3월, 같은 달 빈에서 한꺼번에 벌어진 네 가지 일

슈베르트가 D.810 자필악보 표지에 적은 단어는 ‘März 1824’ — 1824년 3월입니다. 음악사 책은 보통 “1824년 3월 작곡”이라는 한 줄로 이 곡을 넘겨버리거든요. 그런데 그 한 달 동안 슈베르트의 삶에서 동시에 굴러가던 일들을 한자리에 펼쳐놓고 보면, 같은 곡이 전혀 다르게 들리기 시작합니다.

첫 번째, 편지. 같은 달 31일, 슈베르트는 친구 레오폴트 쿠펠비저에게 편지를 부칩니다. 첫 문장이 이렇지요 —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비참한 인간이라고 느낀다.” 음악사에서 가장 절망적인 편지로 꼽히는 문서더군요. 그는 이어서 적습니다. “건강은 영영 회복되지 못할 것이고, 가장 빛나던 희망은 사라졌으며, 사랑과 우정의 행복조차 가장 큰 고통으로만 돌아온다.” 27세 청년이 쓴 문장이라기엔 너무 무겁습니다.

두 번째, 자필악보. 그 편지를 쓰던 같은 달, 빈의 어느 방에서 그는 d단조 사중주의 마지막 손질을 하고 있었거든요. 악보는 지금 빈 시립도서관에 보관돼 있고, 표지 한 줄에 ‘März 1824’가 적혀 있지요. 편지와 악보가 같은 손, 같은 방, 같은 달의 산물이라는 뜻입니다. 절망과 d단조가 같은 종이 위에 동시에 내려앉은 셈이지요.

세 번째, 병. 1823년 가을, 슈베르트는 빈 일반병원에 입원합니다. 매독 진행에 따른 입원이었고, 1824년 봄의 그는 회복기를 보내는 중이었지요. 하지만 본인은 자기 삶이 곧 끝나리라 믿고 있었습니다. 실제로는 4년 8개월을 더 살게 되지만, 1824년 3월의 그가 알 수 있는 미래는 아니었던 까닭입니다. 그의 시점에서 D.810은 유서에 가까운 곡이었던 거지요. 작곡가들의 매독은 슈베르트 한 사람의 비극이 아니었습니다 — 그 시대 음악가들에게 얼마나 흔한 그림자였는지는 따로 정리해 둔 글에서 더 다뤘거든요.

네 번째, 베토벤. 같은 봄, 같은 도시에서 53세의 베토벤은 9번 교향곡 초연(5월 7일)을 준비하고 있었더군요. ‘환희의 송가’가 무대로 올라가던 바로 그 봄입니다. 슈베르트는 이 초연에 가서 객석에 앉아 있었지요. 인류 음악사에서 가장 환한 합창이 무대에 오르던 도시의 같은 시기, 27세 청년은 네 악장이 모두 단조인 사중주를 책상 위에서 써 내려가고 있었던 겁니다. 같은 공기, 정반대의 정서. 빈은 그 봄에 빛과 어둠 두 가지 음악을 한꺼번에 품고 있었던 셈이네요.

19세기 빈 케른트너토어 극장 외관 판화
베토벤 9번이 초연된 빈 케른트너토어 극장. 슈베르트가 그 봄에 객석으로 들어선 문이 바로 여기였을 겁니다.

편지, 악보, 병, 그리고 베토벤. 이 네 가닥이 1824년 3월의 빈에서 한 사람을 통과해 동시에 지나갔던 거예요. D.810을 “슈베르트가 1824년에 쓴 d단조 사중주”라는 한 줄로만 외우면, 이 네 가닥이 한꺼번에 만들어낸 압력이 통째로 빠져버립니다. 27세, 회복기, 죽음을 확신한 청년이, 도시 전체가 환희를 합창하던 봄에 홀로 단조의 방으로 걸어 들어간 일. 그 방의 문을 여는 게 다음 이야기지요.

소녀는 어디로 사라졌나 — 가곡 D.531의 한쪽만 떼어 온 사중주

이 곡의 진짜 충격은 여기서부터 시작되거든요. 슈베르트는 사중주 2악장의 주제를 7년 전 자기가 쓴 가곡에서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1817년 가곡 《죽음과 소녀》 D.531. 마티아스 클라우디우스가 1775년에 쓴 시에 붙인 곡이지요.

시인 마티아스 클라우디우스 초상
시를 쓴 마티아스 클라우디우스. 슈베르트는 이 짧은 시 한 편을 두 번 작곡한 셈이거든요 — 한 번은 노래로, 한 번은 사중주로.

가곡의 구조는 단순한 대화입니다. 두 화자, 두 연. 먼저 소녀가 비명을 지르지요 —

“가버려라! 야만의 해골 사나이여!
나는 아직 어리다, 가라, 사랑이여!
나를 만지지 마라!”

그러고 나면 죽음이 응답합니다 —

“손을 다오, 어여쁘고 가냘픈 것아.
나는 친구다, 너를 벌하러 온 게 아니다.
용기를 가져라. 나는 사납지 않다.
내 품에서 너는 부드럽게 잠들 것이다.”

두 연의 무게가 똑같지 않다는 점부터 눈여겨볼 만합니다. 소녀는 짧게, 다급하게, 거의 헐떡이듯 세 줄을 토해내요. 죽음은 그보다 길게, 낮게, 달래듯 네 줄을 늘여 말하지요. 시 자체가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 있는 셈이거든요 — 저항은 짧고 회유는 길다. 슈베르트가 7년 뒤 어느 목소리를 가져갈지는, 어쩌면 이 무게 차이에서 이미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가곡 D.531의 악보를 들여다보면 구획이 또렷하더군요. 소녀의 비명은 1마디부터 21마디까지. 죽음의 응답은 22마디부터 끝까지. 그리고 죽음이 말을 마친 뒤 짧은 피아노 후주가 따라옵니다. g단조에서 G장조를 슬쩍 거쳐 다시 g단조로 가라앉는, 자장가 같은 끝맺음이지요.

슈베르트가 1824년 사중주 2악장 주제로 옮겨 온 자리가 바로 이 후주거든요. 가곡의 죽음 파트, 그중에서도 후주만. 화성 골격은 그대로 보존되고, 조성도 g단조로 유지됩니다. 1817년의 그 짧은 후주가 7년 뒤 사중주의 11분짜리 변주 시퀀스의 씨앗으로 다시 돋아난 셈이네요.

핵심은 이겁니다 — 슈베르트는 소녀의 비명 부분을 가져오지 않았어요. 곡의 부제는 《죽음과 소녀》인데, 음악적으로는 죽음의 목소리 하나뿐입니다. 네 악장 전부가 단조인 것도 이 한쪽 치우침과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반박할 소녀가 없으니까요. 죽음의 자장가가 처음부터 끝까지 우위를 쥐고, 사중주 전체가 그 응답의 변주처럼 흘러가는 까닭입니다.

한국어권 해설은 대개 “1817년 가곡 《죽음과 소녀》를 주제로 한 사중주”라는 한 줄에서 멈추더군요. 그 한 줄이 빠뜨리는 게 바로 이 인용의 한쪽 치우침입니다. 두 화자 중 한 명만 골랐다는 사실. 부제가 부르는 인물이 음악 안에는 없다는 사실. 이걸 알고 2악장을 듣는 것과 모르고 듣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경험이지요.

죽음과 소녀라는 그림 — 음악보다 300년 먼저 있던 모티프

잠깐 짚고 넘어갈 게 있어요. ‘죽음과 소녀’는 슈베르트가 발명한 이미지가 아니거든요. 이건 르네상스 시대부터 유럽 미술에 박혀 있던 오래된 모티프입니다.

한스 발둥의 회화 죽음과 소녀
한스 발둥이 16세기에 그린 《죽음과 소녀》. 해골이 젊은 여인의 뒤로 다가서는 이 구도가 클라우디우스의 시보다 250년쯤 앞섭니다.

16세기 독일 화가 한스 발둥은 젊은 여인 뒤로 해골 형상의 죽음이 다가서는 그림을 여러 번 그렸지요. 한창 물오른 살결과 썩어가는 뼈를 한 화면에 나란히 둔 구도. 중세부터 이어진 ‘죽음의 무도(danse macabre)’ 전통의 한 갈래였습니다. 죽음은 신분도 나이도 가리지 않는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도 등 뒤에 서 있다 — 그게 이 모티프가 수백 년 동안 반복된 까닭이지요.

클라우디우스의 1775년 시도 이 전통 위에 서 있었고, 슈베르트의 1817년 가곡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 1824년의 사중주는 모티프의 세 번째 번역인 셈이네요 — 그림에서 시로, 시에서 노래로, 노래에서 네 대의 현악기로. 다만 슈베르트의 번역에는 결정적인 변형이 하나 들어가 있었지요. 발둥의 그림에서는 소녀가 화면 한가운데서 저항하는데, 슈베르트의 사중주에서는 그 소녀가 아예 지워져 버립니다. 남는 건 등 뒤에 선 죽음의 목소리뿐. 300년 묵은 모티프에서 슈베르트가 한쪽 화자를 도려낸 자리, 그게 이 곡의 d단조를 끝까지 단조로 묶어두는 진짜 이유일 겁니다.

악장으로 듣는 죽음의 네 단계

1악장 Allegro — 문을 부수고 들이닥치는 음악

첫 마디 fff 유니즌. 네 악기가 같은 d단조 화음을 동시에 내리찍습니다. 도입부는 이게 전부예요. 망설임도, 점층도, 다이내믹의 빌드업도 없거든요.

베토벤 5번 교향곡의 그 “따따따단”을 아는 사람이라면, 슈베르트가 이 시작을 의식하지 않았을 리 없다고 느낄 겁니다. 그런데 베토벤의 네 음 모티프가 “운명이 문을 두드린다”라면, 슈베르트의 1악장 도입은 “현관문을 부수고 들이닥친다”에 가깝지요. 한 번에, 모든 악기로, 전부 밀고 들어옵니다. 노크 같은 건 없어요.

제2주제는 F장조로 잠깐 햇빛이 비치는 척합니다. 그러나 다섯 마디쯤 지나면 다시 단조의 인력에 끌려 내려가더군요. 발전부 내내 1주제의 유니즌 화음이 다른 자리, 다른 화성으로 끊임없이 되돌아옵니다. 곡 전체에서 1악장이 가장 직설적이고, 가장 거칠고, 가장 짧게 끝나지요. 대략 9분이면 무너집니다.

2악장 Andante con moto — 죽음의 자장가, 다섯 번의 변주

드디어 g단조 주제가 등장합니다. 1817년 가곡 D.531의 피아노 후주가 7년 뒤 사중주의 심장부에 박히는 순간이지요. 주제 자체는 코랄에 가까운 화성 진행, 부점 리듬, 가운데 음역의 호모포니. 처음 들으면 그저 슬픈 노래처럼 흘러갑니다. 그런데 슈베르트는 이 주제를 가만히 두지 않더군요.

변주 1. 제1바이올린이 주제를 노래로 받습니다. 가곡 같은 선율이지요. 죽음이 한결 부드러워지거든요.

변주 2. 첼로가 주제를 들고, 나머지 세 악기가 16분음표로 떱니다. 그 떨림이 점점 빨라지면서 첫 균열의 신호가 오지요.

변주 3. g단조에서 화음이 한꺼번에 내리꽂힙니다. 부점이 박자마다 거칠게 부딪히고, 죽음이 부드러운 가면을 벗는 자리예요. 이 변주가 워낙 갑작스러워서, 처음 듣는 사람은 대개 여기서 화들짝 놀라더군요.

변주 4. 갑자기 G장조. 위로일까요, 체념일까요, 아니면 임종 직전의 마취일까요. 슈베르트는 답을 주지 않습니다. 그저 몇 마디 동안 빛이 든 척하다가 다시 단조로 미끄러져 들어가지요.

변주 5. g단조 복귀. 코다에는 결론이 없거든요. 주제가 그대로 다시 흘러나오다가 마지막 화음에서 G장조로 바뀐 채 음악이 그냥 멈춥니다. 마침표가 찍힌다기보다 — 음악이 슬그머니 자리를 비웠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겠네요.

이 g단조 자장가의 끈질김은 한국 관객에게도 의외로 익숙합니다. 로만 폴란스키가 1994년에 만든 영화 《죽음과 소녀》 — 원작은 아리엘 도르프만의 1990년 동명 희곡 — 에서 D.810의 2악장은 군사독재 시절 가해자가 즐겨 듣던 음악으로 등장하거든요. 시고니 위버가 연기한 주인공은 그 음악이 흘러나올 때마다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의 기억 속으로 끌려 들어가지요.

음악 자체가 등장인물처럼 작동하는 드문 영화이고, 그 영화를 본 사람은 D.810 2악장을 예전처럼 듣기가 어려워집니다. 곡의 부제가 한 화자를 지웠던 그 빈자리에, 영화가 다른 화자를 새로 들여놓은 셈이지요.

3악장 Scherzo — Scherzo라는 단어가 거짓말이 되는 4분

‘Scherzo’는 이탈리아어로 농담입니다. 베토벤이 미뉴엣을 빠른 농담조로 갈아엎으며 사중주에 들여놓은 형식이고, 슈베르트도 그 전통 안에 있었지요. 그런데 D.810의 3악장은 농담이 아니더군요.

당김음이 박자를 자꾸 비껴 떨어집니다. 한 박을 비우고 다음 박을 강하게 치는 리듬이 반복되면서, 음악은 계속 발을 헛디뎌요. 트리오 섹션만 D장조로 잠깐 숨을 돌리지요. 트리오의 멜로디는 거의 슈베르트 가곡의 한 구절을 떼어다 붙인 듯한 노래이고, 이 짧은 호흡만이 곡 전체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비켜선 유일한 자리거든요. 그러나 트리오가 끝나면 다시 d단조 당김음이 돌아옵니다.

형식적으로는 농담의 자리에 비명을 깔아둔 악장. ‘Scherzo’라는 머리말과 실제 음악 사이의 그 거리가, 이 곡이 어떤 종류의 곡인지 한 번 더 일러줍니다.

4악장 Presto — 살기 위해 추는 게 아닌 타란텔라

6/8박자, 점음표 리듬, 매우 빠르게(Presto). 형식상 타란텔라입니다.

타란텔라는 이탈리아 남부의 민속 의식이거든요. 독거미에게 물리면 미친 듯이 춤을 춥니다. 땀을 흘려 독을 빼낸다는 믿음이 있었지요. 살기 위해 추는 춤이고, 음악적으로는 약을 먹는 행위와 같은 의미를 가졌던 까닭입니다.

슈베르트의 피날레가 의미심장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어요. 형식은 타란텔라인데, 의미가 정반대로 뒤집혀 있지요. 살기 위해 추는 게 아니라, 멈추면 끝나기 때문에 멈추지 못하는 춤. 약을 먹다가 약에 중독돼 버린 환자의 발걸음. 6/8박자의 점음표가 처음에는 신나게 들리다가, 끝날 무렵에는 그 신남이 무섭게 다가오더군요.

마지막 40여 마디는 거의 발이 땅에서 떨어진 채로 굴러갑니다. 코다에서 템포가 한 단계 더 올라가고(Prestissimo 지시), 이제 두 손으로도 멈출 수 없어요. 마지막 d단조 화음으로 곡이 갑자기 끝나지요. 결론은 없습니다. 그냥 멈춰요. 아니, 정확히는 — 춤추던 사람이 쓰러집니다.

여기까지 들었다면 이제 전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통과해 볼 차례지요. 아래는 벨체아 콰르텟의 실황 전곡입니다.

벨체아 콰르텟의 전곡 실황. 1악장 첫 화음이 문을 부수는 그 순간부터 들어보면 좋거든요.

“이 곡은 자네한테 안 맞아” — 슈판치히가 했다는 말

여기서부터는 진위를 딱 잘라 확인하기 어려운 일화입니다. 출처가 슈베르트의 친구 요제프 폰 슈파운이 1858년 회고록에 적은 내용이라, 사건으로부터 30년도 더 지난 뒤의 회상이라는 점은 감안하고 들어야 하지요.

이그나츠 슈판치히. 베토벤의 후기 사중주를 초연한 슈판치히 사중주단의 제1바이올린이고, 1820년대 빈에서 사중주 연주의 권위자였던 사람입니다. 슈베르트가 D.810을 사적으로 시연했을 때 그 자리에 있었고, 곡을 다 들은 뒤 슈판치히가 슈베르트에게 건넨 말이 “이 곡은 자네한테 맞지 않아”였다고 전해집니다.

해석이 갈리는 발언이거든요. 가능성은 둘입니다. 하나는 “너무 어려워서 웬만한 사중주단은 따라가기 버겁다”라는 기술적 평가. 다른 하나는 “자네는 너무 베토벤처럼 쓰려고 했어”라는 정체성 평가지요.

27세 슈베르트는 53세 베토벤이 후기 사중주를 막 써내려 가던 시점에, 죽어가는 몸으로 그 영역에 발을 들이고 있었습니다. 슈판치히가 정확히 어떤 뜻으로 말했든, D.810이 살롱에서 가볍게 즐기는 사중주가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했던 셈이네요. 1820년대 빈에서 사중주를 가장 잘 알던 사람이 단번에 알아본 사실이고, 어쩌면 그 한마디가 나온 진짜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70년 뒤, 말러가 이 곡에 손을 댄 사연

구스타프 말러가 평생 다른 작곡가의 곡을 편곡한 건 단 두 곡뿐인데, 그중 하나가 D.810이거든요. 1894년에 작업했고 1899년에 손을 봤습니다. 현악 사중주를 통째로 현악 오케스트라용으로 부풀린 편곡이지요.

이 편곡은 말러 생전에 출판되지 못했고, 1984년에야 빈 우니베르잘 출판사가 정식으로 펴냈더군요. 사후 70년 넘게 서랍 속에 묻혀 있던 셈입니다. 지금은 클라우디오 아바도, 레너드 번스타인, 사이먼 래틀 같은 지휘자들이 챔버 오케스트라 레퍼토리로 종종 무대에 올립니다.

편곡을 두고 평가는 갈립니다. 옹호하는 쪽은 “슈베르트 안에 숨어 있던 교향곡 스케일이 드러난다”라고 말해요. 반대하는 쪽은 “네 명이 네 명으로 갇혀 있는 폐쇄성이야말로 이 곡의 정체인데, 말러가 그 폐소공포를 풀어버렸다”라고 받아치지요.

듣고 비교해 보면 양쪽 다 일리가 있습니다. 말러 버전에서는 2악장 변주 3의 화음이 훨씬 무겁게 떨어지고, 4악장 타란텔라가 교향시 같은 규모로 부풀어 오르거든요. 그러나 네 명이 작은 방에서 서로의 호흡을 들으며 만들어내던 그 가시 같은 긴장은 거의 사라지고, 같은 음악이 다른 곡처럼 들립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 말러는 슈베르트를 더 크게 만들었지요. 더 무섭게 만들지는 못했고요.

결국 이 곡을 끝까지 따라가도 소녀는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습니다. 발둥의 그림에서 화면 한가운데서 저항하던 그 여인이, 클라우디우스의 시에서 세 줄을 헐떡이던 그 목소리가, 슈베르트의 사중주에서는 완전히 지워진 채로 40분이 흘러가는 거예요. 남는 건 등 뒤에 선 자의 자장가뿐. 27세의 청년이 자기 부고를 쓴다면 이런 모양이지 않았을까요. 비명을 지르는 쪽이 아니라, 부드럽게 잠들라고 달래는 쪽의 목소리로 말이지요.

추천 음반 — 세 가지 다른 죽음

D.810은 21세기에도 매년 새 녹음이 나오는 곡이거든요. 그중 시대별 미학이 가장 선명하게 갈리는 세 장만 골랐습니다. 객관적 순위라기보다, 같은 악보가 어떻게 다른 곡이 되는지 보여주는 한 청자의 기록이지요.

알반 베르크 사중주단 (1984, EMI). 1980년대의 ‘교향곡처럼 읽기’ 학파입니다. 4악장 템포를 거의 한계까지 밀어붙이는데, 어떤 평론가는 “말러 편곡을 네 명으로 압축한 것 같다”라고 깎아내렸지요. 고른 이유는 그 비판이 곧 매력이 되기 때문이고요. 안 맞을 사람: 슈베르트는 끝까지 노래여야 한다고 믿는 분.

알반 베르크 콰르텟 1984년 녹음. 위에서 말한 ‘교향곡처럼 읽기’가 정확히 이런 소리거든요.

콰튀오르 모자이크 (1997, Naïve). 거트현, 시대 활, 시대 악기. “슈베르트가 1824년에 실제로 들었을 소리”를 복원한 녹음이지요. 가볍고 빠르고 명료해서, 4악장 타란텔라의 정체가 가장 또렷하게 들립니다. 무겁지 않은 댄스 리듬이라 오히려 “아, 이게 춤이었구나”가 와닿거든요. 안 맞을 사람: 두툼한 비브라토와 깊은 보잉을 사랑하는 분 — 마른 빵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타카치 사중주단 (2006, Decca). 현재 시점의 균형추예요. 감정의 과잉도 폭력의 과잉도 자제하면서, 노래성과 텐션과 형식 감각을 알맞은 비율로 섞어 놓았지요. 고른 이유는 단순합니다 — 처음 듣는 분 손에 쥐어드리기 가장 좋거든요. 안 맞을 사람: “한 번 듣고 잊지 못할” 강렬한 첫인상을 원하는 분.

처음 듣는다면 타카치, 두 번째로 모자이크, 그다음 알반 베르크 순서를 권합니다. 같은 곡이 세 번 다른 표정을 짓는 걸 듣고 나면, 이 사중주가 왜 매년 새로 녹음되는지 알게 되실 거예요.

악보와 함께 듣기

이 곡의 인용 구조를 가장 빠르게 체감하는 방법이 하나 있어요. 가곡 D.531의 후주와 사중주 D.810 2악장 도입부를 나란히 놓고 보는 겁니다. 같은 g단조, 같은 화성 골격, 같은 작곡가, 7년의 시차. 후주의 마지막 화음들이 어떻게 네 대의 현악기로 다시 태어나는지 눈으로 따라가다 보면, 슈베르트가 자기 노래를 어떻게 재료로 썼는지 한눈에 들어오거든요.

자주 묻는 질문

가곡 《죽음과 소녀》 D.531과 사중주 D.810은 정확히 어떻게 연결되나요?

사중주 2악장 주제는 가곡의 피아노 후주(죽음이 응답을 마친 뒤 흐르는 부분)를 거의 그대로 가져온 거거든요. 다만 가곡에는 두 화자, 즉 소녀와 죽음이 등장하는데 슈베르트는 죽음 쪽 음악만 떼어 왔지요. 소녀의 비명 부분(가곡 앞쪽)은 사중주에 흔적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곡의 부제는 《죽음과 소녀》지만 음악적으로 소녀는 부재하는 셈이고, 한쪽 목소리만 남은 이 상태가 사중주를 끝까지 단조로 묶어 두는 한 원인이랍니다.

왜 네 악장이 전부 단조인가요? 들으면서 너무 어둡지 않나요?

슈베르트가 의도적으로 출구를 막아버린 곡이거든요. 2악장의 한 변주와 3악장 트리오에서 잠깐 장조 구역이 나오긴 하지만, 악장 단위의 조성은 네 악장 모두 단조입니다. 고전·낭만 시기 사중주 전체에서도 드문 사례지요. 베토벤의 어두운 후기 사중주들도 최소 한 악장은 장조로 잡혀 있는 걸 떠올리면 더 또렷해집니다. 슈베르트가 1824년 3월에 그만큼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는 뜻으로도 읽히고요.

클래식이 처음인데 어디서부터 들어야 하나요? 40분이 너무 깁니다.

2악장만 따로 들어보세요. 약 11분입니다. ‘죽음의 자장가’ 주제와 다섯 변주가 이 안에 다 들어 있고, 곡 전체의 핵심이 여기 압축돼 있거든요. 2악장이 귀에 익으면 1악장, 그다음 4악장, 마지막으로 3악장 순서로 들으시면 부담이 한결 덜합니다. 첫 녹음으로는 타카치 사중주단(2006, Decca)을 권해요.

폴란스키 영화 《죽음과 소녀》(1994)에 나오는 그 곡이 맞나요?

맞습니다. 로만 폴란스키가 1994년에 만든 동명 영화는 아리엘 도르프만의 1990년 희곡을 원작으로 하고, 영화 안에서 D.810의 2악장이 가해자가 즐겨 듣던 음악으로 등장하지요. 시고니 위버가 연기한 주인공은 그 음악이 흘러나올 때마다 트라우마가 되살아납니다. 클라이맥스에서도 2악장이 다시 흐르고요. 음악 자체가 등장인물처럼 작동하는 드문 영화 중 하나거든요.

말러 편곡 버전과 원곡 사중주 중 어느 쪽이 진짜인가요?

원곡인 현악 사중주가 진짜입니다. 말러 편곡(1894/1899, 1984년 출판)은 슈베르트의 의도와 무관하게 70년 뒤 만들어진 별도의 작품으로 듣는 편이 맞아요. 원곡의 폐쇄적 긴장이 사라지는 대신 교향곡 스케일을 얻는 거래에 가깝거든요. 그러니 두 버전을 다른 곡으로 놓고 비교 감상하는 방식을 권합니다.

같은 d단조의 방으로 이어지는 문들

클래식은 한 곡만 떼어 들을 때보다, 곁에 놓인 곡들과 함께 들을 때 훨씬 크게 울리거든요. D.810의 죽음·매독·같은 봄의 빈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글들이 있어요. 슈베르트의 다른 얼굴부터, 그가 그 봄에 객석에서 들었던 베토벤의 합창까지 — 같은 d단조의 방에서 문을 하나씩 열어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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