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 지휘자가 지휘봉을 들고 무대 앞 단상에 서고 바이올린은 대개 무대 왼쪽에 모여 앉습니다.
그때는 — 오늘날처럼 단상 위에서 작은 지휘봉을 쥐고 지휘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박자를 맞추는 사람은 긴 지팡이로 바닥을 쿵쿵 내리쳤고, 그 방식 때문에 실제로 목숨을 잃은 음악가도 있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 1687년 파리부터 1997년 빈까지, 남아 있는 기록을 따라 무대 위 사람들의 자리와 역할이 어떻게 지금 모습으로 굳어 갔는지 살펴봅니다.
1687년 1월 파리에서는 루이 14세가 큰 병에서 회복한 것을 감사하는 예배가 열렸고, 그 자리에서 대규모 합창곡 ‘테 데움'(신께 감사드리는 라틴어 성가)이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이 곡을 쓰고 연주를 직접 이끈 사람은 장 바티스트 륄리였습니다. 그는 루이 14세의 궁정 음악을 30년 넘게 움직인, 당시 프랑스 음악계의 실력자였습니다.
그때는 오늘날처럼 손에 쥐는 작은 지휘봉이 없었습니다. 대신 사람 키만 한 묵직한 지팡이로 바닥을 쿵, 쿵 내리치며 박자를 맞췄습니다. 그날 륄리는 지팡이를 세게 내리치다가 자기 발등을 찍고 말았습니다. 상처는 곪았고, 궁정 의사들은 처음에는 발가락을, 다음에는 다리를 잘라내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륄리는 다리를 잃으면 춤도 지휘도 할 수 없다고 판단해 절단을 거부했습니다. 결국 상처는 조직이 썩어 들어가는 괴저로 번졌고 그는 그해 3월 22일에 숨을 거뒀습니다.[1] 확인된 사실 박자를 맞추는 방식 자체가 한 음악가의 죽음으로 이어진, 음악사에서도 드물게 강렬한 사고였습니다.
사람 키만 한 지팡이가 우리가 아는 가느다란 지휘봉으로 바뀌기까지는 100년이 넘게 걸립니다. 지휘자가 무대 앞에 서는 관행도, 바이올린이 왼쪽에 모여 앉는 배치도 생각보다 최근에 자리 잡았습니다. 무대 위 그 익숙한 배치가 어디서 왔는지, 하나씩 짚어 보겠습니다.

지휘자가 없어도 오케스트라는 잘만 돌아갔다
18세기 중반, 그러니까 하이든과 젊은 모차르트의 시대만 해도 무대 앞 단상에 홀로 선 지휘자는 없었습니다. 음악을 이끈 사람은 보통 두 명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건반 앞에 앉아 하프시코드(피아노보다 먼저 널리 쓰인 건반악기)를 치던 연주자였습니다. 이 연주자는 화성의 뼈대를 깔고 곡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신호를 줬습니다. 이렇게 낮은 성부와 화성을 이어 가며 음악의 흐름을 받치는 방식을 통주저음이라고 불렀습니다. 작곡가 본인이 이 자리에 앉는 일도 많았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제1바이올린 수석, 우리말로 악장이라 부르는 연주자였습니다. 악장은 활을 크게 움직이거나 몸짓을 보내 템포와 각 파트가 들어올 시점을 알려 줬습니다. 관객 모두가 활 동작을 볼 수 있도록 조금 높은 자리에 앉는 관행도 있었습니다. 해석 연구자들은 1750년 무렵부터 악장의 영향력이 건반 주자를 조금씩 넘어섰다고 보기도 합니다. 지휘봉을 든 단독 지휘자가 등장하기 전, 오케스트라의 실제 리더십은 건반과 바이올린이라는 두 축에서 나왔던 셈입니다.

지휘자 없는 악단은 옛날이야기만은 아닙니다. 1972년 뉴욕에서 창단된 오르페우스 챔버 오케스트라는 지금도 지휘자 없이 단원들이 서로 눈을 맞춰 가며 연주하고 리더 자리도 곡마다 돌아가며 맡습니다. 이들이 베토벤 교향곡 5번을 연주하는 장면을 보면, 지휘봉 없이 서른 명 넘는 사람이 한 호흡으로 움직이는 방식이 무엇인지 바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을 알고 나면 18세기의 무대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지휘자 없이 연주하는 악단을 꾸린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이런 실험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바닥을 치던 지팡이가 지휘봉이 되기까지
지금처럼 한 사람이 지휘봉을 들고 무대 앞에 서는 방식은 19세기 초에 조금씩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 변화의 출발점으로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 루이 슈포어입니다. 1820년 런던에서 자신의 교향곡을 연습할 때, 슈포어는 바이올린을 내려놓고 지휘봉을 꺼내 들었다고 전해집니다. 공연을 주관하던 이사회는 처음엔 이 낯선 방식을 못마땅해했지만, 단원들은 신호를 보기 편하다며 반겼다고 합니다.
설(說) 다만 슈포어가 ‘세계 최초로’ 지휘봉을 썼다는 말은 그대로 믿기 어렵습니다. 그보다 앞선 사례를 언급하는 기록도 있고, 정작 슈포어 본인의 회고가 수십 년 뒤에 쓰였기 때문에 과장이 섞였다고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최초’라기보다 ‘지휘봉을 널리 퍼뜨린 사람 중 하나’로 보는 편이 안전합니다.
지휘봉을 든 지휘자라는 이미지를 더 널리 굳힌 인물로는 펠릭스 멘델스존이 자주 거론됩니다. 확인된 사실 그는 1835년, 스물여섯 살에 독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부임했습니다.[2] 이후 지휘봉을 들고 오케스트라를 마주 본 채 단상에 서는 방식을 정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고, 184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악단의 명성을 높이는 데 힘을 보탰습니다. 오늘날 익숙한 지휘자의 모습은 이 시기 라이프치히 무대에서 한층 또렷해졌습니다.

지휘자가 관객에게 등을 돌리고 오케스트라를 마주 보는 자세도 처음부터 당연한 관례는 아니었습니다. 19세기 중반까지도 객석을 향해 앉아 지휘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프랑스 지휘자 쥘 리비에르는 1873년 런던에서 오케스트라 맨 앞줄에 앉아 객석을 바라본 채 지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지휘자가 단원들을 정면으로 보고, 관객은 지휘자의 뒷모습을 봅니다. 이 구도 역시 생각보다 늦게 굳어진 관례입니다.
1808년 12월 22일, 난방도 없이 네 시간
지휘와 배치가 아직 어수선하던 시절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밤이 있습니다. 1808년 12월 22일 저녁, 빈의 안 데어 빈 극장에서 서른여덟 살 베토벤은 자신의 수입을 마련하려고 대규모 연주회를 직접 열었습니다. 확인된 사실 이날 무대에 오른 곡 목록은 지금 보아도 놀랍습니다. 교향곡 6번 ‘전원’, 피아노 협주곡 4번, 교향곡 5번, 합창 환상곡이 모두 이날 처음 공개됐고, 여기에 미사곡의 일부와 아리아까지 더해졌습니다.[3]
그중에는 오늘날 가장 널리 알려진 그 유명한 ‘운명’ 교향곡, 그러니까 교향곡 5번의 첫 연주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리허설이 턱없이 부족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작곡가 겸 평론가 요한 프리드리히 라이하르트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우리는 혹독한 추위 속에서 6시 30분부터 10시 30분까지 앉아 있었다.” 관객은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홀에서 네 시간을 버텨야 했습니다. 두꺼운 외투를 껴입고도 발끝이 얼어붙을 듯한 객석을 떠올려 보세요.
설(說) 합창 환상곡을 연주하던 도중에는 오케스트라가 서로 다른 대목을 연주하는 바람에 음악이 멈췄고, 결국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베토벤이 한 부분을 반복하는 사이 단원들이 다음 대목으로 넘어갔다는 설명입니다. 누가 “멈춰, 다시!”를 외쳤는지는 기록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이런 일화가 남아 있을 만큼 그 초연은 리허설 부족과 무대 혼선으로 불안정하게 기억되었습니다.
티켓값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 시절 빈의 음악회 표 한 장이 얼마였는지, 노동자 주급과 견주면 어느 정도였는지를 함께 생각하면, 이런 연주회는 누구에게나 열린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사교 무대에 가까웠고, 그 관객들조차 추위와 소란을 네 시간 견딜 각오를 해야 했습니다.
바이올린은 왜 다 무대 왼쪽으로 모였나
요즘 오케스트라 공연장에 가서 무대를 보면, 바이올린 연주자들은 대개 지휘자의 왼쪽에 빽빽하게 모여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배치는 100년 남짓 된 습관입니다. 19세기까지는 제1바이올린이 지휘자 왼쪽에, 제2바이올린이 오른쪽에 앉는 방식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두 무리가 무대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는 셈입니다. 이렇게 바이올린을 좌우로 갈라 앉히는 배치를 전문 용어로 대칭 배치라고 부릅니다.
해석 이 배치는 단순한 관행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모차르트나 말러 같은 작곡가들은 제1바이올린과 제2바이올린이 선율을 서로 주고받는 대목을 자주 썼습니다. 두 무리가 마주 보고 앉으면 그 선율이 무대 왼쪽과 오른쪽을 오가며 대화처럼 들립니다. 요즘처럼 바이올린이 한쪽에 모여 있으면 이런 공간감은 약해집니다.
이 흐름을 크게 바꾼 지휘자 가운데 한 사람이 레오폴트 스토코프스키입니다. 해석 그는 1920년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이끌면서 더 두껍고 매끄러운 현악 소리를 만들기 위해 무대 배치를 여러 차례 바꿨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1·제2바이올린을 모두 지휘자 왼쪽에 나란히 모으는 방식이 널리 알려졌고, 미국 오케스트라들도 이 배치를 받아들이면서 오늘날 익숙한 무대 배치의 한 기준이 됐습니다. 이 변화는 흔히 ‘스토코프스키 이동’이라고 불립니다. 이후에는 이런 배치를 전제로 곡을 쓰는 작곡가들도 생겼습니다.

그렇다고 옛 배치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지휘자 오토 클렘페러는 20세기 중반까지도 바이올린을 좌우로 갈라 앉혔고, 최근에는 역사적 연주 관습을 중시하는 지휘자들이 이 대칭 배치를 다시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차르트 작품처럼 왼쪽과 오른쪽에서 선율이 오가듯 들리는 대목을 더 또렷하게 살리려는 선택입니다.
스무 명이 백 명이 되기까지
무대에 오르는 연주자 수도 시대를 따라 늘었습니다. 바로크 시대의 오케스트라는 대체로 열 명에서 서른 명 안팎이었지만, 18세기 중반 독일 만하임의 궁정 악단은 훨씬 큰 규모와 정교한 합주력으로 유럽을 놀라게 했습니다. 확인된 사실 영국 음악가 찰스 버니는 1772년 이 악단을 보고 “장군들로 이뤄진 군대”라고 적었습니다. 단원 한 명 한 명이 독주자급 실력을 갖추었고, 뛰어난 연주자들이 전체로는 한 몸처럼 움직였다는 뜻이었습니다. 만하임 악단은 요한 슈타미츠가 1745년 악장으로 부임한 뒤 기강과 표현력에서 당대 최고 수준으로 올라섰고, 1770년대에는 규모도 크게 늘어 바이올린만 스무 명이 넘었습니다.
낭만 시대로 오면 규모는 더 커져 60명, 80명, 100명을 넘어섭니다. 그보다 앞선 시대에도 무대 위 사람의 수와 자리 자체가 음악의 재료가 된 순간은 있었습니다. 하이든이 단원들을 무대에서 한 명씩 퇴장시키며 ‘집에 보내 달라’는 뜻을 전한 그 ‘고별’ 교향곡이 대표적입니다. 이 글 위쪽에 띄워 둔 영상에서도 마지막 악장에 연주자들이 촛불을 끄고 하나씩 자리를 뜨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확인된 사실 오케스트라 규모를 한계 가까이 밀어붙인 대표적인 작곡가는 말러입니다. 그의 교향곡 8번은 작곡가의 지시를 온전히 따르면 연주자만 100명이 훌쩍 넘고, 여기에 대규모 합창단 두 개와 소년 합창까지 더해집니다. ‘천 명의 교향곡’이라는 별명도 이 거대한 편성에서 나왔습니다. 이쯤 되면 좌석 배치는 단순한 정리가 아니라, 무대가 어디까지 사람과 소리를 받아낼 수 있는지의 문제가 됩니다.
무대 위 마지막으로 바뀐 것들 — 음정, 그리고 사람
자리 배치가 지금의 형태로 굳어진 것처럼, 음의 높이를 맞추는 조율 기준도 뒤늦게 표준화되었습니다. 지금은 오케스트라가 연주 전에 오보에 소리에 맞춰 ‘라’ 음을 잡습니다. 이때 기준이 되는 ‘라’는 초당 440번 진동하는 소리, 이른바 A=440헤르츠입니다. 확인된 사실 A=440헤르츠를 국제 기준으로 권고한 회의는 1939년 5월 런던에서 열렸고, 정식 표준으로 확정된 때는 1955년입니다.[4] 그 전에는 도시마다, 시대마다 ‘라’의 높이가 제각각이었습니다. 바로크 시대에는 지금보다 반음쯤 낮은 A=415헤르츠 언저리가 흔했기 때문에, 옛 방식으로 연주하는 악단은 지금도 이 조율 기준을 씁니다.
무대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의 범위도 크게 달라졌습니다. 오랫동안 오케스트라는 남성 중심의 공간이었습니다. 확인된 사실 세계 최고 악단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빈 필하모닉은 1997년 2월 27일에야 여성의 정식 단원 자격을 인정했습니다. 하피스트 안나 렐케스는 그 전까지 20년 넘게 이 악단에서 연주했지만, 악단은 렐케스를 정식 단원으로 대우하지 않았고 프로그램에 이름조차 싣지 않았습니다.[4]
그 남성 중심 구조를 흔든 중요한 제도가 ‘블라인드 오디션’입니다. 심사위원과 연주자 사이에 가림막을 쳐서 누가 연주하는지 보지 못하게 하는 방식입니다. 해석 미국 주요 오케스트라들이 1970~80년대에 이 방식을 도입하면서 여성 단원 비율이 눈에 띄게 올랐습니다. 한 경제학 연구는 1970년에 5퍼센트도 안 되던 미국 5대 오케스트라의 여성 비율이 이후 약 25퍼센트까지 오른 데에 가림막이 큰 역할을 했다고 분석했습니다.[5] 연주자의 이름과 얼굴을 가리고 소리만 듣게 하자, 심사 과정에서 성별을 짐작할 단서가 줄었고 합격자 구성도 달라졌습니다.
그때 vs 지금 — 무대 위 300년의 변화
| 그때 | 지금 | |
|---|---|---|
| 지휘 | 지휘자 없음. 건반 주자 + 바이올린 악장이 나눠 리드. 1687년 파리, 륄리는 박자 지팡이에 발을 찍혀 사망 | 지휘봉 든 지휘자 한 명이 단상 위에서 전체를 통솔 (1830년대 멘델스존이 표준화) |
| 바이올린 자리 | 19세기까지 좌우로 갈라 앉힘 (제1은 왼쪽, 제2는 오른쪽) | 1920년대 스토코프스키 이후 전부 왼쪽에 모음 (일부 지휘자는 옛 배치 부활) |
| 연주 시간 | 1808년 빈 베토벤 연주회는 난방 없이 약 4시간 | 중간 휴식 1회 포함 대개 2시간 안팎 |
| 박수·소란 | 악장 중간에도 박수·재연주 요청, 식사와 잡담 병행 | 악장 사이엔 침묵, 곡이 끝난 뒤에만 박수 |
| 조율 기준 | 도시·시대마다 제각각 (바로크는 A≈415Hz) | A=440Hz로 통일 (1939년 권고, 1955년 표준화) |
| 단원 구성 | 사실상 남성만. 빈 필은 1997년까지 여성 정단원 없음 | 가림막 블라인드 오디션 뒤 여성 비율 크게 상승 |
이어서 듣기 — 무대 위 그 장면을 소리로 확인하기
오늘 본 무대의 규칙들은 실제 곡 속에도 흔적을 남겼습니다. 아래 다섯 편은 이 글에서 살펴본 장면을 소리로 확인해 보기 좋은 글들입니다. 들어 볼 이유도 각각 조금씩 다릅니다.
- 악장 사이 박수 금지? 200년 전 객석은 정반대였습니다는 이 글의 표에서 다룬 박수 관습을 모차르트의 편지와 19세기 객석 문화까지 넓혀 설명합니다.
- 낭만 시대 오케스트라가 악기 수를 늘리고 음향의 규모를 키운 변화는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에서 특히 선명하게 들립니다.
- 거대 편성이 무대의 물리적 한계를 어디까지 밀어붙였는지는 말러 교향곡 2번 ‘부활’을 들으면 바로 체감할 수 있습니다.
- 바이올린을 좌우로 나누어 앉히던 시대의 대칭 배치는 모차르트 교향곡 41번 ‘주피터’에서 대화하듯 오가는 선율을 찾아 들을 때 더 잘 느껴집니다.
- 오케스트라 음악이 처음이라면 교향곡이란 무엇인가에서 여러 악장이 하나의 큰 흐름을 이루는 기본 구조부터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옛날엔 정말 지휘자가 없었나요?
18세기 중반까지는 지금 같은 단독 지휘자가 없었습니다. 대신 하프시코드에서 반주 저음을 치는 건반 주자와, 활로 신호를 주는 제1바이올린 수석(악장)이 함께 오케스트라를 이끌었습니다. 지휘봉을 든 한 사람이 무대 앞에 서는 방식은 19세기 초부터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1835년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 부임한 멘델스존 같은 지휘자들이 그 흐름을 더 분명하게 만들었습니다.
지휘자가 지휘용 지팡이에 찔려 죽었다는 게 실화인가요?
실화입니다. 작곡가 장 바티스트 륄리는 1687년, 루이 14세의 회복을 기념하는 ‘테 데움’을 이끌던 중 박자를 맞추려고 긴 지팡이로 바닥을 치다가 자신의 발등을 찍었습니다. 상처가 괴저로 번졌고, 다리를 자르라는 의사의 권고를 거부한 끝에 그해 3월 22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에는 이렇게 지팡이로 바닥을 쳐 박자를 맞추는 것이 흔한 지휘 방식이었습니다.
바이올린이 무대 왼쪽에 모여 있는 건 원래부터인가요?
아닙니다. 19세기까지는 제1바이올린을 지휘자 왼쪽에, 제2바이올린을 오른쪽에 두는 좌우 대칭 배치가 일반적이었습니다. 지금처럼 바이올린을 모두 왼쪽에 모으는 배치는 지휘자 레오폴트 스토코프스키가 1920년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에서 퍼뜨린 방식으로, 100년 남짓 이어진 관행입니다. 옛 방식의 음향 균형을 살리려는 지휘자들은 지금도 좌우 대칭 배치를 씁니다.
요즘 오케스트라 연주회는 왜 2시간쯤 하나요?
옛 연주회는 훨씬 길었습니다. 1808년 12월 22일 빈에서 열린 베토벤 자선 연주회는 난방 없는 홀에서 약 네 시간 동안 이어졌고, 교향곡 5번과 6번을 비롯한 여러 곡이 한 공연에서 초연됐습니다. 오늘날 오케스트라 연주회는 보통 중간 휴식 한 번을 포함해 2시간 안팎으로 구성됩니다.
참고 자료
- [1] Jean-Baptiste Lully, Wikipedia / Classic FM, “Jean-Baptiste Lully: the Baroque composer who died of gangrene after stabbing his foot with a conducting staff”. ↩
- [2] Gewandhausorchester Leipzig 공식 연혁 (멘델스존 1835년 부임) / Library of Congress, “Felix Mendelssohn and the Leipzig Gewandhaus”. ↩
- [3] Beethoven concert of 22 December 1808, Wikipedia (요한 프리드리히 라이하르트 증언 재인용 포함). ↩
- [4] A440 (pitch standard), Wikipedia / NPR, “Vienna Philharmonic Accepts Women Musicians” (1997). ↩
- [5] Claudia Goldin & Cecilia Rouse, “Orchestrating Impartiality: The Impact of ‘Blind’ Auditions on Female Musicians”, NBER Working Paper 59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