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 독살설 — 살리에리는 정말 모차르트를 죽였습니까

모차르트의 마지막 편지 한 통과, 1823년 병상의 헛소리

사건
모차르트 독살설
(Mozart poisoning myth)
죽은 사람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의심받은 사람
안토니오 살리에리
(Antonio Salieri, 1750~1825)
빈 궁정 음악감독 1788~1824
사망
1791년 12월 5일 0시 55분, 빈 자택
향년 35세
기록된 사인
급성 좁쌀열(hitziges Frieselfieber)
병명이 아니라 증상 묶음
소문의 시작
1791년 12월, 베를린의 음악 주간지 보도
이른바 자백
1823년 11월, 빈
살리에리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 직후
전설의 확산
푸시킨 희곡(1830) → 림스키코르사코프 오페라(1898) → 셰퍼 연극(1979) → 영화 《아마데우스》(1984)
남아 있는 물증
모차르트의 마지막 편지(1791.10.14)
살리에리·모차르트·코르네티 공동 칸타타 K.477a(1785)

확인된 사실 — 모차르트는 1791년 12월 5일 새벽에 죽었고 그 일곱 주 전에는 살리에리를 자기 마차에 태워 오페라 극장에 데려갔습니다.

떠도는 이야기 — 궁정 음악감독 살리에리가 질투를 못 이겨 모차르트에게 독을 먹였다고들 합니다.

이 글에서는 — 확정해도 되는 사실부터 후대가 덧칠한 전설까지, 다섯 등급으로 갈라 봅니다.

1823년 11월 빈, 일흔세 살의 한 남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병원에 실려 갑니다. 의식이 흐릿한 그가 누군가를 죽였다고 중얼거렸다는 이야기가 병실 문틈을 타고 흘러나왔죠. 그가 지목한 희생자는 다름 아닌 32년 전에 세상을 떠난 모차르트였습니다.

병실 밖에서 잉태된 소문은 200년이라는 시간을 끈질기게 살아남았습니다. 하지만 질투에 눈이 멀어 천재를 독살한 살리에리는 재판 기록이나 부검 보고서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이 아닙니다. 이 극적인 이미지를 세상에 퍼뜨린 출처는 러시아 시인이 쓴 짧은 희곡 한 편이거든요. 정작 당사자인 노인은 정신이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말을 강하게 부인했고 곁에서 그를 돌보던 이들도 그런 자백을 들은 적이 없다고 증언했습니다.

이 글은 그에게 유죄나 무죄를 선고하려는 판결문이 아닙니다. 희미해진 과거의 기록을 사실과 소문으로 차분히 분류하는 작업에 가깝습니다. 의심할 여지 없는 팩트, 꽤 그럴싸한 추정, 학계에서 여전히 논쟁 중인 사안, 지어낸 이야기임에도 사라지지 않는 허구, 그리고 사실과 혼동하기 쉬운 해석을 꼼꼼히 분리해 보겠습니다. 여기서 지킬 단 하나의 원칙은 분명합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소문을 문서로 남은 사실보다 앞세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붉은 코트에 흰 가발을 쓴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초상화
모차르트가 죽고 28년 뒤인 1819년에 그려진 초상. 실물을 본 적 없는 화가가 가족의 기억에 기대어 완성했다.

1791년 12월 5일 0시 55분, 빈

모차르트는 1791년 12월 5일 0시 55분 빈의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서른다섯이라는 이른 나이였죠. 교구 사망 기록에 남은 사인은 ‘급성 좁쌀열’이지만 이는 현대 의학의 정확한 병명이라기보다 온몸에 좁쌀 같은 발진이 돋고 고열에 시달리는 증상을 뭉뚱그려 부른 관용어에 가깝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의사가 진단서에 그저 ‘고열과 발진’이라고 적어둔 셈입니다.

병상에 누워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된 시점 역시 11월 20일로 비교적 뚜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이때부터 몸이 심하게 붓고 극심한 통증과 구토가 시작되었으며 생의 마지막 2주 동안 그 부기는 손발에서 전신으로 퍼져나갔습니다. 훗날 아버지의 임종을 지켰던 일곱 살 맏아들 카를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아버지의 몸이 심하게 부어올라 아주 작은 움직임조차 버거워했고 지독한 냄새마저 났다고 적었습니다.

당시 의사들이 선택한 치료법은 환자의 피를 뽑아내는 사혈 요법이었습니다. 12월 4일 밤에도 기어이 피를 뽑아냈죠. 이미 기력이 완전히 바닥난 환자에게 이 처치가 호전의 기회를 주었을 가능성은 낮습니다. 병상 곁에서 처남과 동료 가수들이 미완성인 레퀴엠을 함께 불렀다는 회고나 주치의 클로세트가 극장에서 연극 관람을 마치고 오느라 늦었다는 처제 소피 베버의 증언도 전해지기는 합니다. 다만 이런 장면들은 모두 그날 밤으로부터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기록된 기억들입니다.

여기까지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왈가왈부할 일이 거의 없는 팩트의 영역입니다. 날짜와 시각, 나이, 사망 기록부의 사인, 병상에 누운 날짜는 활자로 단단히 남아 있죠. 끈질긴 독살설은 바로 그다음, 기록의 불빛이 미치지 못하는 어두운 빈자리에서 소리 없이 피어오릅니다.

원수를 자기 마차에 태우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차르트가 남긴 생애 마지막 편지는 1791년 10월 14일 아내 콘스탄체에게 보낸 것입니다. 세상을 떠나기 고작 일곱 주 전의 일이죠. 이 편지에서 모차르트는 전날 밤에 있었던 일을 퍽 자랑스럽게 늘어놓았습니다. 자신의 마차에 두 사람을 태워 극장으로 에스코트했는데 한 명은 소프라노 카테리나 카발리에리였고 다른 한 명은 다름 아닌 안토니오 살리에리였다는 내용이거든요.

“그는 서곡부터 마지막 합창까지 온 신경을 쏟아 듣고 보았소. ‘브라보!’ ‘벨로!’가 터져 나오지 않는 대목이 하나도 없었다오.”

— 모차르트가 콘스탄체에게, 1791년 10월 14일

그날 무대에 오른 작품은 초연을 올린 지 고작 2주밖에 되지 않은 신작 《마술피리》였습니다. 빈 음악계의 막강한 실권자를 기꺼이 자기 마차에 태우고 나란히 앉아 극장으로 향한 사람은 모차르트 본인이었죠. 이 대목이 유독 흥미로운 이유는 이것이 세월에 깎여나간 훗날의 회고담이 아니라 사건 당일 모차르트의 손끝에서 직접 탄생한 생생한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의 진짜 관계를 들여다보는 데 있어 투명하고 강력한 1차 사료입니다.

물론 종이 한 장에 적힌 글귀로 모든 의혹의 불씨를 끌 수는 없습니다. 나란히 앉아 오페라를 즐긴 사람이 두 달 뒤에 상대를 해쳤을 가능성을 논리적으로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 편지는 독살설을 지탱하는 가장 밑바탕, 즉 서로 얼굴조차 마주하기 싫어하던 두 앙숙이라는 납작한 이미지와 정면으로 부딪힙니다. 게다가 이 두 사람 사이를 증명하는 묵직한 물증은 편지 말고도 하나가 더 남아 있습니다.

두 이름이 나란히 새겨진 악보

1785년 여름, 빈 무대를 누비던 영국계 이탈리아 소프라노 낸시 스토레이스가 돌연 목소리를 잃어버립니다. 석 달이라는 적잖은 공백을 깨고 그녀가 9월 19일 무대로 돌아오자, 이를 축하하기 위한 짤막한 칸타타 한 편이 세상에 나왔죠. 곡의 제목은 《오펠리아의 회복을 축하하며》였고, 노랫말은 궁정 시인 로렌초 다 폰테의 솜씨였습니다.

고작 4분 길이의 이 곡은 세 도막으로 나뉘어 있고, 각 도막을 책임진 작곡가도 제각각이었습니다. 첫 대목은 살리에리, 두 번째는 모차르트, 그리고 마지막은 정체가 불분명한 코르네티라는 인물이 채웠습니다. 두 사람이 철천지원수였다면 도무지 성립하기 힘든 오묘한 조합이죠. 이 악보는 그해 빈의 출판사 아르타리아에서 인쇄되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그 후 230년 동안이나 실물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먼지를 털고 악보가 다시 역사의 무대 위로 올라온 것은 2015년 11월의 일입니다. 독일의 음악학자 티모 요우코 헤르만이 프라하 체코 음악박물관에서 살리에리의 제자 관련 문건을 뒤적이다가 작곡가 이름이 약자로만 툭 적힌 인쇄 악보 한 장이 바로 그 전설의 칸타타라는 사실을 알아챘거든요. 이듬해 3월 3일 빈에서는 소프라노와 포르테피아노의 소리로 이 곡이 다시 울려 퍼졌습니다. 뉴요커의 평론가 알렉스 로스는 이 발굴을 두고 음악 자체보다 사연이 훨씬 흥미롭다는 냉정한 평가를 남겼습니다. 서늘한 평론이지만 이 곡을 이해하는 데는 이보다 정확할 수 없습니다. 곡의 진짜 가치는 유려한 선율이 아니라 두 사람이 같은 축하 자리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는 역사적 사실 자체에 있기 때문입니다.

악보를 든 18세기 소프라노 낸시 스토레이스의 초상화
소프라노 낸시 스토레이스. 그녀의 목소리 회복을 축하하기 위해 모차르트와 살리에리가 한 곡을 나눠 썼다.

두 사람을 단순한 앙숙으로만 묶어두기에 어색한 흔적은 곳곳에 더 남아 있습니다. 살리에리는 1788년 궁정 음악감독이라는 권좌에 오르자마자 첫 취임 무대에 자신의 신작 대신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을 다시 올렸습니다. 1790년 레오폴트 2세의 대관식 길에 오를 때도 짐 속에 모차르트의 미사곡 세 편을 알뜰히 챙겨 갔죠. 모차르트의 교향곡 40번과 클라리넷 5중주 역시 다름 아닌 살리에리가 지휘봉을 잡은 연주회에서 청중에게 처음 소개되었습니다.

2016년 빈에서 230년 만에 다시 연주된 K.477a. 소프라노 케이트 래퍼티, 포르테피아노 비니시우스 카타.

모차르트의 날 선 의심

그렇다고 살리에리를 이 비극의 무대에서 완전히 내려보내는 것도 사실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가 늘 따뜻한 봄바람 같았다는 증거 또한 없거든요. 오히려 모차르트 본인이 꾹꾹 눌러쓴 편지들에는 살리에리를 향한 짙은 경계와 의심의 눈초리가 꽤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엇갈림의 시작은 1781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뷔르템베르크의 엘리자베트 공주에게 음악을 가르칠 스승을 고를 때, 궁정은 모차르트를 곁눈질하고 살리에리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이듬해 피아노 교사 자리마저 살리에리에게 돌아갔죠. 모차르트는 이 연이은 낙방을 그저 운이 나쁜 실패로 넘기지 않았습니다. 그해 12월 아버지에게 띄운 편지에는 “황제의 눈에 드는 사람은 살리에리뿐입니다”라는 씁쓸한 원망이 적혀 있습니다. 1783년 5월의 편지에서는 다 폰테와 살리에리를 도마 위에 올리며 “그 이탈리아 양반들 아시잖습니까. 얼굴 앞에서는 참 친절하지요”라며 날카롭게 비꼬았고, 같은 해 7월 편지에는 아예 대놓고 “살리에리의 농간”이라는 직설적인 표현까지 등장합니다.

1786년에는 두 사람이 물러설 곳 없이 정면으로 맞붙는 일도 있었습니다. 요제프 2세가 쇤브룬 궁전의 오랑주리에서 작곡 대결이라는 진풍경을 벌였거든요. 홀의 한쪽 끝에서는 모차르트의 단막극이, 반대편 끝에서는 살리에리의 단막극이 꼬리를 물고 무대에 올랐습니다. 불행히도 그날 사람들의 박수갈채는 살리에리 쪽으로 묵직하게 기울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이 복잡한 관계는 이렇게 짚어두는 편이 정확합니다. 두 사람은 화려한 궁정의 자리를 두고 치열하게 경쟁했고, 모차르트는 그 경쟁의 판에서 이탈리아 출신의 선배 살리에리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움직인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궁정의 일자리를 두고 다투는 것과 누군가를 독으로 해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층위의 문제입니다. 끈질긴 독살설은 현실의 질투와 경쟁심을 살인이라는 거대한 동기로 잔뜩 부풀려 붙인 서사에 가깝습니다.

독이 아니라 병이라는 단서들

모차르트의 마지막을 곁에서 지켜본 의사들 가운데 독을 입에 올린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환자가 앓았던 증상 역시 독살설과는 영 맞아떨어지지 않습니다. 온몸이 퉁퉁 붓고 펄펄 열이 끓으며 발진이 돋아나는 경과는 당시 유럽에 알려져 있던 독극물 중독의 징후와 겹치지 않거든요. 그렇기에 오늘날의 연구자들은 대체로 모차르트가 암살자의 독이 아니라 야속한 병마에 스러졌다는 쪽으로 고개를 끄덕입니다.

은밀한 독살보다 흔한 병사에 무게를 실어주는 동시대의 기록은 또 있습니다. 빈에서 공중보건을 책임지던 의사 에두아르트 굴데너 폰 로베스는 1824년, 살리에리를 향한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흉흉해지자 작가 주세페 카르파니에게 펜을 들어 편지를 보냅니다. 모차르트가 눈을 감던 그해 가을 빈에는 류머티즘성 염증열이 매섭게 돌았고, 꽤 많은 사람들이 모차르트와 비슷한 증상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났다는 내용이었죠. 모차르트의 주치의들과 얼굴을 맞대고 직접 이야기를 나누었던 인물의 증언이니 제법 묵직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다만 이 편지 한 장을 흔들림 없는 확정 증거로 여길 수만은 없습니다. 굴데너는 같은 편지에서 살리에리를 향해 쏟아지는 비난을 “끔찍한 중상”이라고 날카롭게 못 박았거든요. 애초에 살리에리를 옹호하겠다는 목적이 뚜렷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증언이라는 뜻입니다. 낡은 사료를 들춰볼 때는 종이 위의 문장만이 아니라 펜을 쥔 사람의 처지도 나란히 짚어보아야 하니까요.

하지만 “독이 아니다”라는 결론 역시 단단한 추정의 영역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부검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신을 직접 열어 살펴본 기록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니, 독이 아니라는 판단도 결국 남겨진 증상과 주변 정황을 퍼즐처럼 짜 맞춘 추론에 불과합니다. 가리키는 방향은 꽤나 뚜렷하지만, 의혹의 마침표를 찍어줄 결정적인 의학 기록은 영영 남지 않게 된 셈입니다.

그래서 정확히 무슨 병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모차르트가 병마에 쓰러졌다는 사실 자체는 학계에서도 대체로 받아들여집니다. 진짜 문제는 그 병의 정체가 무엇이었느냐에 있죠. 지난 200년 동안 학자들이 빼어든 진단명만 열다섯 가지가 훌쩍 넘습니다. 결핵부터 기생충병까지, 도무지 교집합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온갖 병명들이 한 환자의 진료 기록지에 오르내린 셈입니다.

현재 가장 힘을 얻는 설: 목 감염 뒤 콩팥 손상

2009년, 세 명의 연구자가 당시의 낡은 사망 기록을 다시 펼쳤습니다. 이들은 모차르트가 눈을 감던 무렵 빈의 사망자 명부를 모조리 긁어모은 뒤, 1790년과 1792년 같은 시기의 기록을 대조군 삼아 꼼꼼히 역학 조사를 벌였습니다. 그 결과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기 전후 몇 주 사이, 빈의 젊은 남성들 사이에서 부종으로 인한 사망이 유독 잦아졌다는 사실이 수면 위로 드러났죠. 연구진이 내놓은 설명은 이렇습니다. 목에 연쇄상구균이 감염되었고, 이에 맞서 싸우려던 몸의 면역 반응이 오히려 콩팥을 망가뜨렸다는 것입니다. 이 감염병이 퍼져나간 진원지로는 당시의 군 병원이 지목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후보들

1994년 한 신경학 학술지에는 경막하혈종 가설이 등장했습니다. 머리를 다치는 바람에 뇌를 감싼 얇은 막 아래에 피가 고였다는 뜻입니다. 모차르트의 것으로 전해지는 두개골에 왼쪽 관자뼈가 부러진 흔적이 뚜렷하고, 1789년에서 1790년 사이 그가 여러 차례 넘어졌다는 기록이 그 근거가 되었습니다. 2000년에는 두 명의 의사와 한 명의 음악학자가 류머티즘열을 원인으로 꼽았고, 2001년에는 덜 익힌 돼지고기를 먹어 감염되는 기생충 질환인 선모충증 가설까지 튀어나왔습니다. 모차르트가 평소 즐겨 찾던 해열제 성분 중 안티모니가 섞여 있었다는 사실을 수상하게 여기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역사학자 윌리엄 스태퍼드는 이 기묘한 상황을 가리켜 거꾸로 선 피라미드 같다고 비유했습니다. 정작 뼈대가 되어야 할 1차 사료는 모조리 긁어모아도 열 쪽을 채우지 못하는데, 그 부실한 토대 위에 후대 사람들이 쌓아 올린 문헌은 산더미처럼 거대하다는 일침이거든요. 심지어 훗날의 연구자들이 원래 기록에는 있지도 않은 증상을 슬쩍 끼워 넣어 자신의 가설을 방어해 왔다는 뼈아픈 지적도 존재합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꽤 단출합니다. 그가 병으로 생을 마감했을 가능성은 아주 높지만, 그 병의 진짜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누가 나에게 독을 먹였다”는 모차르트 본인의 말

흥미롭게도 독살설에 가장 질긴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은 살리에리의 입술이 아닙니다. 다름 아닌 모차르트 본인이 그런 말을 남겼다는 기록이죠. 이 서늘한 이야기의 출처는 아내 콘스탄체이며, 이 귓속말을 처음 종이 위에 활자로 박아 넣은 사람은 1798년의 전기 작가 프란츠 크사버 니메체크입니다.

기록된 상황은 이렇습니다. 프라하에서 돌아온 뒤 남편이 유독 우울해하자, 콘스탄체는 기분 전환이라도 시킬 겸 그를 빈의 프라터 공원으로 이끕니다. 오붓하게 앉아 있던 자리에서 모차르트가 불쑥 죽음이라는 단어를 꺼내더니, 자신이 지금 자기 장례식에 쓸 레퀴엠을 짓고 있다고 털어놓습니다. 바로 그다음 흘러나온 문장이 장장 200년 동안 흔들림 없이 독살설을 지탱하는 기둥이 됩니다.

“확실히 느껴져. 오래 못 갈 것 같아. 누가 나에게 독을 먹인 게 분명해. 이 생각을 떨쳐 낼 수가 없어.”

— 니메체크가 콘스탄체에게서 전해 들어 1798년에 기록한 말

훗날의 전기 작가들은 이 이야기에 한술 더 떠 구체적인 독약의 이름표까지 붙였습니다. 17세기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진 비소 계열 맹독, 아쿠아 토파나입니다. 색깔도 맛도 거의 없어 몇 번에 걸쳐 사람을 아주 서서히 약하게 만드는 독약으로 악명이 높았죠.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특징 탓에 모차르트가 겪은 마지막 병세와는 아귀가 영 맞지 않습니다. 몇 달을 두고 사람의 몸을 무너뜨리는 독이라면 사망 직전 2주 동안 급격하게 나빠진 증상을 설명하기 힘들 거든요. 독이 퍼지는 속도와 실제 환자의 병세가 완전히 엇박자를 내는 셈입니다.

그런데 니메체크가 남긴 같은 책에는 간과하기 쉬운 뒷이야기가 고스란히 실려 있습니다. 몸이 잠시 회복세를 보이자 모차르트가 “내가 독을 먹었다는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다니, 이제 레퀴엠을 돌려주시오”라고 말했다는 대목이거든요. 앞의 문장만 뚝 떼어놓고 보면 피를 토하는 유언이 되지만, 이 뒷문장까지 마저 읽고 나면 그저 아픈 사람의 막연한 불안감으로 탈바꿈합니다. 언제나 인용구란 텍스트를 어디에서 끊어 읽느냐에 따라 그 뉘앙스가 완전히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여기에 역사학자들의 차가운 사료 비판이 한 겹 더 얹어집니다. 콘스탄체와 그녀의 동생 소피가 내놓은 증언은 모두 사건의 흙먼지가 한참 가라앉은 뒤에야 세상에 나왔고, 이 두 사람에게는 기억을 조금 더 극적으로 말하게 만들 만한 현실적인 사정이 있었거든요. 당시 콘스탄체는 남편이 남긴 빚더미와 어린 두 아이를 품에 안은 채 황제에게 생계 연금을 간청해야 했고, 남편의 추모 공연으로 겨우 생계를 꾸려갔습니다. 음악학자 클리프 아이젠과 루스 핼리웰은 바로 이 절박한 처지가 그녀들의 증언을 한층 애절하고 극적인 방향으로 밀어붙였을 가능성을 짚어냅니다. 물론 이 말이 그녀가 거짓말을 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누군가의 사적인 기억이 훗날의 이야기로 단단히 굳어질 때는, 그 기억을 입 밖으로 꺼내야만 했던 화자의 처지까지 나란히 저울에 올려두고 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헛소리가 자백으로 둔갑하기까지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 숱한 의혹에도 불구하고 이 서늘한 문장을 받쳐줄 증거는 지금까지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이 이야기는 어디서부터 흘러나와 마치 당사자의 자백인 양 단단하게 굳어버린 걸까요.

흉흉한 소문은 장례가 채 끝나기도 전에 피어올랐습니다. 서른다섯이라는 이른 나이에 들이닥친 갑작스러운 죽음, 끝내 완성하지 못한 진혼곡까지, 사람들의 의심을 잔뜩 부풀릴 재료는 이미 차고 넘쳤거든요. 실제로 그해 12월 베를린에서 발행되던 한 음악 주간지는 모차르트가 독살되었다는 말이 돌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하지만 거리에 소문이 돌았다는 것과 그 소문이 진실이라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입니다. 당국은 굳이 수사에 나서지 않았고 확인할 만한 증거도 나오지 않자, 이야기는 흙먼지처럼 한동안 조용히 가라앉았습니다.

잊힌 소문이 다시 맹렬하게 타오른 것은 1823년의 일입니다. 그해 11월, 일흔셋의 살리에리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이후 1년 반 동안 그는 치매 증상을 보이며 투병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정신이 흐려진 병상에서 그가 모차르트를 죽였다며 자책했다는 이야기가 빈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정작 당사자인 살리에리는 의식이 맑아질 때마다 그 끔찍한 소문을 강하게 부인했습니다. 그해 병문안을 다녀간 제자 이그나츠 모셸레스가 남긴 기록을 보면, 살리에리는 병상에서 자신이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이야기는 터무니없으며 자신의 명예를 걸고 진실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그의 곁을 지키던 간병인들 역시 노인에게서 그런 자백을 들은 적이 없다고 확인해 주었죠.

금목걸이와 훈장을 단 노년의 안토니오 살리에리 초상화
궁정 음악감독 시절의 살리에리. 36년 동안 빈 궁정 음악계의 핵심 직책을 맡았던 사람이다.

살리에리는 1825년 5월 7일, 일흔넷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해 6월 22일에 열린 그의 추도식에서 울려 퍼진 곡은 c단조 레퀴엠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이 곡은 그가 1804년에 자신의 장례를 미리 염두에 두고 써 둔 작품이었고, 추도식 당일이 바로 초연이었습니다. 남의 진혼곡을 가로채려 했다는 스크린 속의 탐욕스러운 이미지와 달리, 그는 이미 20년 전에 자신을 위한 진혼곡을 묵묵히 써두었던 셈입니다.

그가 시기심에 휩싸인 무능한 범재였다는 인상 역시 후대의 영화가 빚어낸 허구에 가깝습니다. 아래는 파리에서 초연된 그의 오페라 《다나이데스》의 서곡입니다. 1784년에 탄생한 그의 음악이 과연 어떤 소리를 품고 있는지, 단 몇 초만이라도 직접 들어 보시죠.

크리스토프 루세가 이끄는 레 탈랑 리리크의 2011년 베네치아 실황. 영화가 그린 ‘지루한 궁정 음악’과는 거리가 멀다.

증거 없는 이야기를 불멸로 만든 예술가들

뼈대가 될 증거 하나 없는 이야기가 무려 200년의 세월을 끄떡없이 버텨낸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푸시킨에서 밀로시 포르만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넘나드는 네 명의 창작자가 이 매혹적인 소재를 차례로 덧칠했거든요.

서막을 연 것은 1830년이었습니다. 러시아의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라는 짤막한 희곡을 썼죠. 이 무대 위에서 살리에리는 아예 대놓고 모차르트의 술잔에 독을 탑니다. 하지만 푸시킨의 진짜 관심사는 자극적인 살인 사건이 아니라 질투라는 어두운 감정 그 자체였습니다. 낡은 사료를 고증하려던 것이 아니라, 타인의 재능 앞에서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인간의 내면을 그리려 했던 창작물이었습니다.

숄을 두르고 팔짱을 낀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1827년 초상화
1827년의 푸시킨. 세 해 뒤 그가 쓴 희곡 한 편이 살리에리의 이름에 200년 동안 따라붙을 이미지를 만들었다.

1898년에는 러시아 작곡가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이 희곡을 거의 고스란히 오페라 무대로 옮겨놓았습니다. 시간이 흘러 1979년, 극작가 피터 셰퍼는 연극 《아마데우스》를 통해 이 낡은 구도를 한층 세련되게 다시 짰습니다. 흥미롭게도 셰퍼 본인은 자신의 작품을 두고 실제 인물을 재료로 삼은 환상곡이라 불렀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충실히 베껴 쓴 기록이 아니라, 그 사실이라는 무대 위에 자유롭게 지어 올린 이야기임을 분명히 밝힌 셈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1984년, 밀로시 포르만 감독의 영화 《아마데우스》가 등장합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포함해 무려 여덟 개 부문을 휩쓸었죠. 살리에리를 연기한 F. 머리 에이브러햄은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거머쥐었습니다. 흥행 수입은 9천만 달러를 거뜬히 넘겼고, 2019년 미국 의회도서관은 이 작품을 보존 가치가 있는 영화로 지정하기에 이릅니다. 재능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는 평범한 인간의 서사는 그렇게 전 세계 관객의 뇌리에 깊숙이 박혔습니다. 클래식 음악은 종종 스크린 속에서 이렇게 새로운 생명력을 얻어 대중의 마음에 가닿곤 합니다. 감독이 어떤 장면에 어떤 곡을 치밀하게 골라 넣었는지를 살펴보면, 옛 음악이 현대의 영상 매체 안에서 어떻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이 극적인 영화가 놀랍도록 쉽게 역사적 사실처럼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그 출발점이 실제 기록과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1823년 늙고 병든 살리에리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병원에 실려 갔다는 것은 분명 문헌에 남은 사실입니다. 다만 그가 고해성사하듯 신부를 앞에 앉혀 놓고 과거를 털어놓는 첫 장면부터는 온전히 셰퍼가 지어낸 허구입니다. 진짜 실화에서 슬며시 출발해 조용히 상상의 선을 넘어버리는 방식이기에, 관객 입장에서는 대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작가의 펜끝에서 나온 창작인지 알아채기 무척 어렵습니다.

이름 없는 빈민 묘지에 버려졌다는 흔한 오해

영화의 마지막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구덩이 속으로 시신이 툭 던져지는 쓸쓸한 장면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 역시 실제 장례식의 꼼꼼한 재현이라기보다는 후대로 내려오며 사람들의 입을 타고 덧칠된 극적인 이미지에 가깝습니다.

모차르트가 이름표 하나 없는 묘에 묻힌 것 자체는 사실입니다. 다만 그 무덤이 연고 없는 사람들의 시신을 한꺼번에 쓸어 담는 비참한 빈민 구덩이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신분이 귀족이 아닌 평범한 시민들에게 배정되던 당시 빈의 아주 흔하고 일반적인 묘지였을 뿐이고, 묘비를 따로 세우지 않는 것 역시 당시 시의 엄격한 규정에 따른 조치였습니다. 10년이 지나면 시가 무덤을 다시 파서 다른 이에게 내어준다는 조건도 붙어 있었는데, 이런 재사용 대상에서 열외가 되는 것은 오직 소수 귀족의 무덤뿐이었거든요.

이런 차가운 풍경 뒤에는 당시 황제 요제프 2세가 내린 장례 규제법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전염병 예방이라는 위생 문제와 국가적인 검소를 이유로 화려한 장례식과 개인 묘비 세우기를 강하게 억제했기 때문에, 빈의 시민 대부분은 덤덤하게 그 표준 절차를 따랐습니다. 당대의 스타였던 모차르트 역시 예외는 아니었죠. 장례 절차는 든든한 후원자였던 반 스비텐 남작이 살뜰히 챙겼고, 12월 7일 성 마르크스 묘지에서 매장이 차분히 이루어졌습니다. 1856년 전기 작가 오토 얀이 남긴 기록을 보면 이 자리에 살리에리와 쥐스마이어, 반 스비텐을 비롯한 몇몇 지인들이 함께했다고 합니다. 훗날 독살설의 주범으로 손가락질받게 될 살리에리가, 적어도 이 전승의 기록 안에서는 고인을 떠나보내는 마지막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셈입니다.

💡 사실은요 — 장례식 날 폭풍우가 몰아쳤다는 이야기는 1856년 빈의 한 신문에 실린 회고에서 나왔습니다. 반면 장례 전날인 1791년 12월 6일 빈 천문대의 관측 기록에는 기온 2.8~3.8도에 약한 동풍, 그리고 옅은 안개가 적혀 있습니다. 우리가 떠올리는 궂은 날씨는 당시 기록보다 후대의 이야기 속 장면에 더 가깝습니다.

세월이 흘러 아내 콘스탄체가 무덤을 다시 찾았을 때는 안타깝게도 이미 아무런 표식이 남아 있지 않아 남편이 잠든 정확한 위치를 짚어낼 길이 없었습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무덤’이라는 역사적 사실 하나가 영화 속 처연한 빗속 장면과 절묘하게 겹쳐지면서, 모차르트는 세상에 비참하게 버려진 불운한 천재라는 짙은 이미지로 굳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강렬하고 서늘한 장면 하나가 딱딱한 사실을 멀리 밀어내 버리는 일은 클래식 음악사 곳곳에서 심심찮게 벌어집니다. 헨델의 유명한 《수상음악》 역시 단단히 화가 난 왕의 마음을 달래려 부랴부랴 곡을 썼다는 이야기가 후대로 갈수록 눈덩이처럼 부풀려졌다는 점에서 퍽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거든요.

자기 장례식을 위해 쓴 진혼곡이라는 낭만적인 착각

이 대목은 새빨간 거짓말이라기보다 매혹적인 해석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역사적 사실보다 훨씬 더 견고하게 사람들의 머릿속에 굳어지곤 하죠. “모차르트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스스로를 위한 진혼곡을 썼다” — 바로 이 문장이 완벽한 예입니다.

낡은 사료에서 확인되는 실제 사정은 스크린 속 장면보다 훨씬 덜 낭만적입니다. 이 곡을 처음 의뢰한 인물은 프란츠 폰 발제크 백작이었습니다. 스무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내 안나의 1주기 미사를 위해 진혼곡이 필요했고, 날짜는 1792년 2월 14일로 꼼꼼하게 정해져 있었죠. 백작은 자신의 이름을 꽁꽁 숨긴 채 사람을 보내 은밀히 곡을 주문했습니다. 남이 쓴 곡을 자기 작품인 양 뽐내며 발표하는 기묘한 취미를 가졌고, 이전에도 비슷한 일을 벌인 전력이 있는 사람이었거든요.

정작 모차르트가 자신의 손으로 온전히 마침표를 찍은 부분은 맨 앞의 입당송 단 하나뿐입니다. 키리에와 세쿠엔치아, 오페르토리움은 뼈대가 되는 성악 성부와 저음만 듬성듬성 적힌 초안 상태였고, 그 유명한 라크리모사는 여덟 마디에서 뚝 끊겨 있습니다. 나머지 빈칸은 온전히 다른 사람들의 몫이었죠. 처음에는 작곡가 요제프 아이블러가 펜을 넘겨받았다가 이내 손을 뗐고, 결국 제자 프란츠 크사버 쥐스마이어가 곡을 마무리한 뒤 스승의 필체까지 정교하게 흉내 내어 악보를 옮겨 적었습니다. 사본 한구석에 남겨둔 연도는 퍽 어설프게도 ‘1792’였습니다.

모차르트가 직접 손으로 쓴 레퀴엠 K.626 자필 악보 첫 장
모차르트가 손수 쓴 레퀴엠 첫 장. 익명의 주문으로 시작된 이 곡은 그의 손에서 끝나지 못했다.

사실 이 완성본이 누구보다 절실했던 쪽은 아내 콘스탄체였습니다. 어떻게든 곡을 넘겨야 약속된 잔금을 받아낼 수 있었으니까요. 백작이 슬쩍 자신의 이름으로 이 곡을 발표하려던 계획은, 콘스탄체가 남편을 위한 자선 공연 무대에 레퀴엠을 올리면서 속절없이 어그러집니다. 그 뒤로 지금까지 세상에 나온 보완판만 열아홉 종을 훌쩍 넘기고, 그중 열한 종은 2005년 이후에 만들어졌습니다. 레퀴엠이라는 걸작의 이력 자체가 대체 누가 어디까지 곡을 썼고 어디서부터가 타인의 붓끝에서 나왔는지를 장장 200년 동안 집요하게 따져 묻는 기나긴 추적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 라크리모사를 들어 보면 현이 두 마디씩 흔들리며 올라가는 도입부가 먼저 들립니다. 모차르트의 필체는 여기서 딱 여덟 마디 만에 멈춥니다. 그다음부터 들리는 소리가 누구 것인지 생각하면서 들어 보세요.

콜레기움 무지쿰 베를린의 연주. 쥐스마이어가 아니라 오스트르지가(Michael Ostrzyga)가 새로 보완한 판본이라, 여덟 마디 뒤부터는 또 다른 사람의 손이다.

그러니 “병마에 시달리던 작곡가가 진혼곡을 쓰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정황 자체는 사실이지만, “그가 이 곡을 자신의 장송곡이 될 줄 알고 썼다”는 문장은 완전히 다른 층위의 이야기입니다. 눈앞에 펼쳐진 정황이 곧 내면의 의도를 증명하지는 않거든요. 영화는 이 빈틈에 아주 노련하게 허구를 한 겹 더 얹어냅니다. 살리에리가 음산한 죽음의 사자로 변장해 레퀴엠을 주문하고, 죽어가는 모차르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악보를 다급하게 받아 적는 명장면 — 현실의 빈에는 단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던 완벽한 창작입니다.

물론 감상과 해석의 문을 아예 닫아걸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라크리모사가 멈춰 선 그 서늘한 여덟 마디에서 짙은 죽음의 예감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상이고, 음악이 주는 가장 큰 즐거움이기도 하죠. 다만 ‘내가 이 선율에서 무엇을 느꼈다’와 ‘작곡가가 애초에 그렇게 의도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음악 앞에서 마음껏 흔들리고 느끼는 것은 온전히 듣는 이의 자유입니다. 다만 그 사적인 감상을 굳건한 역사적 팩트로 옮겨 적으려는 순간에만 잠깐 펜을 멈추면 충분합니다.

모차르트의 아들에게 음악을 가르친 사내

매캐한 독살설의 연기를 걷어내고 나면 비로소 안토니오 살리에리라는 한 인간의 맨얼굴이 남습니다. 그는 일생 서른일곱 편의 오페라를 무대에 올렸고, 장장 36년 동안 빈 궁정 음악의 정점에서 지휘봉을 쥐었던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 화려한 권좌보다 역사에 더 짙게 남은 것은 그가 열어둔 작은 교실이었습니다. 베토벤, 슈베르트, 리스트, 훔멜이라는 거장들이 모두 그의 피아노 앞에서 음악을 배웠습니다. 어린 시절 고아가 된 자신을 거두어준 스승 가스만의 은혜를 갚겠다며, 그는 주머니 사정이 넉넉한 제자들에게만 수업료를 받았습니다.

놀랍게도 그 수많은 제자 명단에는 프란츠 크사버 볼프강 모차르트의 이름도 또렷이 적혀 있습니다. 아버지가 눈을 감기 넉 달쯤 전에 태어난 모차르트의 막내아들이죠. 아내 콘스탄체는 남편을 독살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꼬리를 무는 사내에게 기꺼이 자기 아들의 음악 교육을 맡겼습니다. 200년 뒤 스크린 앞의 관객보다 당사자인 미망인이 그 떠도는 소문을 훨씬 가볍고 하찮게 여겼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의 길었던 생애를 짚어보면 음흉한 악당이라는 이미지와는 영 거리가 멉니다. 1808년 3월 27일 하이든의 76세 생일을 기념해 열린 《천지창조》 무대를 직접 지휘했는데, 사료를 보면 그날 객석에 앉아 있던 늙은 하이든이 벅찬 감동을 이기지 못하고 휴식 시간에 자리를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젊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1번과 2번이 세상에 처음 울려 퍼질 때 묵묵히 지휘대에 서 있던 사람 역시 살리에리였죠. 20세기 말에 접어들며 깊은 먼지 속에 가라앉아 있던 그의 음악을 다시 무대와 음반으로 건져 올리는 작업도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2003년 메조소프라노 체칠리아 바르톨리가 살리에리의 아리아 열세 곡을 정성스레 모아 음반을 냈는데, 그중 대부분은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세상에 녹음된 적이 없는 곡들이었습니다. 이탈리아의 고향 레냐고에는 그의 이름을 당당히 딴 극장과 오페라 축제까지 열렸습니다.

이제 다시 1823년의 차가운 병실로 돌아가 봅니다. 그 좁은 방에서 일흔을 넘긴 노인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 이유는 평생을 숨겨온 끔찍한 죄악 때문이 아니라, 무려 30년 넘게 등 뒤에 찰거머리처럼 따라붙은 독한 소문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살리에리는 생의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그 서늘한 소문을 강하게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20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그의 이름은 대개 한 줄의 납작한 문장으로 요약되고 맙니다. 모차르트를 죽인 남자. 남겨진 낡은 기록을 샅샅이 뒤져보아도 그 묵직한 문장을 받쳐줄 팩트는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습니다. 영화가 화려하게 빚어낸 천재의 얄팍한 이미지보다 모차르트 본인이 남긴 1,100통의 낡은 편지 속에서 묻어나는 모습이 실제 인물에 훨씬 더 가깝습니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한 게 사실인가요?

아닙니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주장을 받쳐 주는 증거는 지금까지 하나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모차르트를 진료한 의사 중 누구도 독을 언급하지 않았고, 증상도 당대에 알려진 독극물 중독과 맞지 않습니다. 수사도, 재판도, 부검도 없었습니다. 독살설은 사실이 아니라 후대의 희곡과 영화가 키운 이야기입니다.

그럼 살리에리가 자백했다는 이야기는 뭔가요?

1823년 11월, 일흔셋의 살리에리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실패하고 병원에 실려 간 뒤 정신이 흐려진 상태에서 했다는 말입니다. 정신이 맑을 때 그는 곧바로 부인했고, 병문안을 갔던 제자 모셸레스가 그 부인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를 돌보던 간병인들도 그런 고백을 들은 적이 없다고 확인해 주었습니다.

모차르트는 정확히 무슨 병으로 죽었나요?

확정된 병명은 없습니다. 부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교구 기록에 적힌 ‘급성 좁쌀열’은 병명이 아니라 여러 증상을 한꺼번에 가리킨 표현입니다. 2009년 역학 연구가 제시한 연쇄상구균 감염에 따른 급성 신장염 가설이 근래 널리 인용되지만, 류머티즘열·선모충증·경막하혈종 등 열다섯 가지가 넘는 진단이 여전히 경쟁하고 있습니다. 병으로 죽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정도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결론입니다.

그럼 두 사람은 사이가 좋았나요?

단순히 좋았다거나 나빴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모차르트는 1780년대 편지에서 살리에리가 자기 앞길을 막는다고 여러 번 불평했고, 궁정의 자리를 두고 실제로 경쟁했습니다. 동시에 두 사람은 1785년에 칸타타 한 편을 나눠 썼고, 살리에리는 궁정 음악감독이 되자 자기 신작 대신 《피가로의 결혼》을 다시 올렸으며, 모차르트는 죽기 일곱 주쯤 전에 살리에리를 자기 마차에 태워 《마술피리》에 데려갔습니다. 경쟁하는 동업자 관계로 보는 편이 사료에 가깝습니다.

영화 《아마데우스》는 얼마나 사실인가요?

1823년 살리에리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병원에 실려 갔다는 일은 기록으로 확인됩니다. 다만 신부 앞에서 고백을 시작하는 장면부터는 각색입니다. 원작자 피터 셰퍼 본인이 실존 인물을 재료로 삼은 환상곡이라고 밝혔습니다. 살리에리가 독을 쓰거나 죽음의 사자로 변장해 레퀴엠을 주문하는 설정, 빗속에 시신이 던져지는 장면은 사료와 어긋납니다. 영화의 뿌리는 1830년 푸시킨의 희곡입니다.

참고 자료

이어서 듣기 — 소문을 걷어낸 자리에 남는 음악

짙은 안개 같은 소문을 걷어내고 나면 그 자리에 남는 것은 결국 묵묵한 악보뿐입니다. 아래 소개하는 다섯 편의 음악은 스크린 속 박제된 모차르트가 아니라, 오롯이 작품으로 살아 숨 쉬는 모차르트를 마주하는 가장 정직한 길입니다. 각각의 글은 저마다 다른 문을 열고 그의 빛나는 음악 안으로 조용히 걸어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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