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도는 이야기 — 파산 직전까지 몰린 바그너를 열여덟 살 왕이 첫눈에 알아보고 구해 줬다는 후원의 전설이 전해집니다.
사실은 — 왕은 바그너의 빚을 대신 갚아 줬지만, 2년도 되지 않아 바그너를 뮌헨에서 쫓아낸 사람도 바로 그 왕이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 어디까지가 실제로 있었던 일이고 어디부터 후대가 덧붙인 이야기인지 차례로 짚어 봅니다.
1864년 봄, 리하르트 바그너는 빚쟁이를 피해 다니고 있었습니다.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완성해 놓고도 무대에 올리지 못했고, 빈의 채권자들은 바그너를 채무자 감옥에 넣으려 했습니다. 쉰 살의 그는 유럽에서 가장 야심 찬 음악을 구상하면서도, 정작 여관비를 걱정하며 도시를 옮겨 다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쫓기던 바그너에게 어느 날 왕의 비서가 찾아옵니다. 바이에른(지금의 독일 남부)의 새 국왕이 바그너를 뮌헨으로 부른다는 전갈을 들고 온 것입니다. 그 국왕은 열여덟 살, 즉위한 지 두 달도 안 된 소년이었습니다. 여기까지는 흔히 알려진 ‘후원의 동화’와 겹칩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이 이야기는 왕이 바그너를 구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왕이 바그너를 쫓아내는 데까지 이어집니다. 우리가 아는 동화는 절반만 사실입니다.

빚쟁이를 피해 떠돌던 바그너, 왕의 부름을 받다
확인된 사실 1864년 3월 10일, 바이에른 국왕 막시밀리안 2세가 죽고 맏아들이 왕위에 오릅니다. 루트비히 2세, 그때 열여덟 살이었습니다. 왕이 된 지 한 달 남짓 만에 루트비히는 내각 비서 프란츠 폰 피스터마이스터를 시켜 바그너를 찾아내게 합니다. 두 사람이 처음 마주 앉은 것은 1864년 5월 4일, 뮌헨 왕궁 레지덴츠에서였습니다. 이 첫 만남은 한 시간 사십오 분이나 이어졌다고 기록됩니다.
왕의 비서가 바그너를 찾아내는 일부터가 작은 추적담 같았습니다. 빚에 몰린 바그너는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여러 도시를 옮겨 다니던 참이었고, 피스터마이스터는 그 행방을 좇아 어렵게 그를 찾아냈습니다. 왕의 사람이 명함을 내밀며 “국왕께서 뵙기를 청하신다”고 했을 때, 바그너는 또 다른 빚 독촉이 온 줄 알고 처음에는 경계했다고 전해집니다. 빚쟁이처럼 숨어 다니던 사람이 왕의 후원을 받는 예술가가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며칠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왕이 건넨 것은 격려의 말이 아니라 당장 바그너를 구해 낼 돈이었습니다. 루트비히는 바그너의 밀린 빚을 궁정 금고에서 대신 갚아 주고, 살 집과 생활비까지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해 궁정 금고에서 바그너에게 흘러 들어간 액수는 자료마다 숫자가 갈려 하나로 못 박기 어렵습니다. 다만 빚 청산에 더해 거처와 생활비까지 왕의 금고에서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이것이 한때의 선심이 아니었다는 건 분명합니다.
바그너에게 이 만남은 삶의 방향이 한순간에 바뀐 사건이었습니다. 빚과 체포 위험에 몰렸던 사람이 갑자기 왕의 총애를 받는 예술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그너는 한 편지에서 이 어린 왕을 두고 “너무 아름답고 지혜로워서, 이 속된 세상에서 신들의 덧없는 꿈처럼 사라져 버릴까 두렵다”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지금 읽으면 과장되게 들리지만, 그 말에는 막다른 곳까지 몰렸던 사람이 느낀 감사와 기대가 함께 들어 있었습니다.

바그너를 향한 짝사랑, 열다섯 살 밤에 시작되다
왕은 왜 얼굴도 모르는 작곡가의 빚을 대신 갚아 줬을까요. 즉흥적인 변덕은 아니었습니다. 그 마음은 이미 3년 전 한 공연장에서 시작됐습니다.
확인된 사실 1861년 2월 2일, 아직 왕세자이던 열다섯 살 루트비히는 뮌헨 궁정극장에서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봅니다. 백조가 끄는 배를 타고 나타나 이름을 밝히지 않는 기사의 이야기였습니다. 소년은 그날 밤 이후로 바그너에게 완전히 사로잡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로엔그린〉의 백조입니다. 루트비히가 어린 시절을 보낸 호엔슈방가우 성은 벽마다 백조 기사 전설이 그려져 있던 곳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성 벽에서 보던 장면이 무대 위에서 음악과 함께 살아 움직였으니, 열다섯 살 소년에게 그 충격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때부터 루트비히에게 바그너는 취향의 대상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꿈꾸던 세계를 실제로 들려주는 사람에 가까웠습니다. 왕이 되면 이 사람을 반드시 곁에 두겠다는 다짐은 3년 뒤, 왕이 된 루트비히의 첫 지시 가운데 하나로 이어졌습니다.
왕이 돈을 대고 무대에 올린 초연들
확인된 사실 왕의 후원은 곧 뮌헨 궁정극장의 초연으로 이어졌습니다. 1865년 6월 10일, 뮌헨 궁정극장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처음으로 막을 올렸고, 지휘는 한스 폰 뷜로가 맡았습니다. 이 오페라는 이미 몇 해 전에 완성돼 있었지만 “연주가 불가능한 곡”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난도가 높아 극장들이 선뜻 올리지 못하던 작품이었습니다. 루트비히 2세가 비용과 극장을 뒷받침했기에 초연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초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1868년 6월 21일에는 희극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가 뮌헨에서 초연됐습니다. 이어 1869년 9월 22일에는 《니벨룽의 반지》 네 편 가운데 첫 편인 〈라인의 황금〉이, 이듬해 1870년 6월 26일에는 그 두 번째 편 〈발퀴레〉가 같은 도시에서 무대에 올랐습니다. 다만 뒤의 두 작품은 바그너가 원한 방식의 초연이 아니었습니다. 바그너는 《반지》 연작을 낱개로 먼저 공개하는 일을 반대했지만, 왕은 자신이 후원한 작품을 자신의 궁정극장에서 먼저 보겠다며 밀어붙였습니다. 후원자와 예술가의 관계가 늘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훗날 바그너가 자기만의 극장을 짓겠다며 바이로이트에 축제극장을 세울 때도 왕이 자금을 댔습니다. 왕은 극장 건설비로 10만 탈러를 빌려줬고, 바그너 가족이 살 저택 반프리트 마련에도 돈을 보탰습니다. 그 지원 끝에 1876년 8월, 바이로이트 축제가 처음 열렸습니다. 20년 넘게 붙들고 있던 《니벨룽의 반지》 네 편이 이 자리에서 마침내 통째로 무대에 올랐습니다. 왕도 바이로이트를 찾았습니다. 다만 빌헬름 1세 황제를 비롯한 귀빈이 몰린 개막 사이클은 피했고, 8월 6일부터 9일까지 관객 없는 총연습을 조용히 지켜봤습니다. 그러고는 축제가 끝나 갈 무렵 다시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돌아와 마지막 세 번째 사이클을 관람했습니다. 사람 많은 자리를 피하려는 그의 성향은 이 무렵 이미 뚜렷해지고 있었습니다.
후원은 바그너의 말년까지 이어졌습니다. 바그너의 마지막 작품 〈파르지팔〉은 1882년 7월 26일 바이로이트에서 초연됐습니다. 바그너는 이 작품이 바이로이트 밖으로 나가는 걸 원치 않았고, 저자가 죽은 뒤 30년까지 보호하던 당시 독일 저작권법이 그 뜻을 받쳐 줬습니다. 그래서 〈파르지팔〉은 1913년 말까지 사실상 바이로이트 전용이었습니다. 그 이듬해인 1883년 2월 13일, 바그너는 베네치아에서 숨을 거둡니다. 처음 만난 1864년부터 바그너가 세상을 떠난 해까지, 왕과 작곡가는 19년 가까이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서른두 살 터울의 두 남자는 한 사람은 왕좌에서, 다른 한 사람은 악보 앞에서 서로의 삶에 오래 남은 편지 상대가 되었습니다. 지금 매년 여름 전 세계 오페라 팬이 몰려드는 바이로이트 축제의 뿌리에도 이 왕의 후원과 끈질긴 서신 교류가 있었습니다.
동화가 부서진 자리, 지휘자의 아내
후원의 동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부서집니다.
뮌헨에서 바그너의 작품을 지휘하던 한스 폰 뷜로에게는 코지마라는 아내가 있었습니다. 코지마는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던 프란츠 리스트의 딸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바그너와 코지마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납니다. 바그너가 자기 작품을 지휘하던 남자의 아내와 관계를 맺었고, 그 관계가 아이의 탄생으로 드러난 셈입니다. 보수적인 뮌헨 사교계가 이 스캔들을 반길 리 없었습니다.
불만은 한 갈래가 아니었습니다. 정부 각료들은 왕이 예술가 한 명에게 나랏돈을 쏟아붓는 일을 못마땅해했고, 언론은 바그너가 어린 왕을 정치적으로 조종한다고 몰아세웠으며, 시민들은 바그너의 사생활에 등을 돌렸습니다. 압박이 커지자 왕도 더는 버티기 어려웠습니다. 결국 1865년 12월, 루트비히는 자기가 그토록 곁에 두고 싶어 했던 사람에게 뮌헨을 떠나 달라고 청합니다. 형식은 부탁이었지만 실질은 축출이었습니다. 바그너가 왕의 부름을 받고 도착한 지 1년 7개월 만이었습니다.
해석 왕은 바그너를 버린 걸까요. 그렇게 보기는 어렵습니다. 바그너가 뮌헨을 떠난 뒤에도 왕은 계속 돈을 보냈고, 초연을 밀어붙였으며, 훗날 바이로이트 계획에도 결정적인 자금을 보탰습니다. 루트비히가 끊어 낸 것은 바그너에 대한 애정이 아니라, 뮌헨이라는 도시 안에서 더는 감당할 수 없게 된 정치적 부담이었습니다. 한때 루트비히는 왕위를 내려놓고 바그너를 따라가겠다는 말까지 했다고 전해지지만, 오히려 바그너가 그를 말렸습니다.

백조의 성과 ‘미치광이 왕’이라는 딱지
설(說) 바그너를 뮌헨에서 떠나보낸 뒤에도, 루트비히가 사랑한 무대와 중세 기사 전설은 다른 방식으로 이어졌다고 이야기됩니다. 그는 이제 작곡가를 곁에 붙잡아 두기보다, 자신이 꿈꾸던 기사와 전설의 이미지를 실제 건축물로 옮기려 했습니다. 1869년 9월 5일, 그는 산꼭대기에 새 성의 주춧돌을 놓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 관광객이 몰리는 노이슈반슈타인 성입니다. 이름부터가 ‘새 백조 바위’라는 뜻이고, 성 안 벽화에는 바그너의 〈로엔그린〉과 〈탄호이저〉 이야기가 곳곳에 들어갔습니다.
왕은 이 성 말고도 여러 궁을 짓는 데 막대한 돈을 썼습니다. 건축에 쏟은 집착, 불어나는 빚, 정치에서 점점 멀어지는 태도가 겹치자 루트비히를 위험한 군주로 보는 시선도 커졌습니다. 훗날 그에게 붙은 ‘미치광이 왕’이라는 딱지는 이런 정치적 판단과 정신질환 낙인이 뒤섞인 말이었습니다. 현실 정치보다 백조와 기사의 환상 세계에 마음을 둔 군주라는 이미지도 이때 굳어졌고, 노이슈반슈타인이 훗날 디즈니 성의 모델이 됐다는 이야기까지 더해지면서 사람들은 루트비히를 한층 더 동화 속 인물처럼 기억하게 됐습니다.

정말 나랏돈을 바그너에게 탕진했을까
해석 ‘미치광이 왕이 국고를 바그너와 성에 탕진했다’는 문장은 짧고 강렬하지만, 연구자들은 이 문제를 훨씬 조심스럽게 다룹니다. 성 건축비의 상당 부분은 왕에게 배정된 왕실 경비와 개인 채무로 충당됐고, 국가 재정을 곧바로 빼내 쓴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바그너 후원도 당시 기준으로는 큰돈이었지만, 루트비히가 성 건축에 쏟아부은 비용과 비교하면 규모가 작은 편이었습니다.
1886년, 루트비히는 정신이상이라는 판정을 받고 왕위에서 밀려납니다. 며칠 뒤 슈타른베르크 호숫가에서 숨진 채 발견됐을 때 그는 마흔 살이었습니다. 사인이 자살인지 사고인지 타살인지는 지금도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1] 다만 루트비히를 끌어내린 정신이상 판정 자체에 정치적 계산이 섞여 있었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습니다. 왕의 씀씀이가 왕실 재정을 압박한 것은 사실이지만, ‘미친 왕이 나라를 거덜 냈다’는 요약은 실제보다 훨씬 과장된 말에 가깝습니다. 19세기에는 예술가를 장기간 후원한 귀족과 부호가 적지 않았고, 폰 메크 부인도 차이콥스키와 직접 만나지 않은 채 편지만 주고받으며 13년 동안 그를 후원했습니다.
사람들은 왜 이 이야기를 놓지 못할까
바그너와 루트비히의 이야기가 이토록 오래 회자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장면들이 강렬합니다. 빚에 쫓기던 천재, 그를 알아본 어린 왕, 백조의 성, 호수에서 맞은 의문의 죽음이 한 줄로 이어지니까요. 소설가가 지어냈다면 너무 작위적이라는 말을 들었을 법한 배치입니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영화가 이 이야기에 다시 불을 붙였습니다. 이탈리아 감독 루키노 비스콘티가 1972년에 만든 영화 〈루트비히〉는 이 왕을 비극적 몽상가로 그렸고, 많은 사람이 루트비히를 예술에 사로잡힌 왕으로 기억하게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지금도 해마다 수백만 명의 관광객이 노이슈반슈타인을 찾습니다. 성을 둘러싼 관광 산업은 루트비히의 삶을 낭만적인 이야기로 계속 되살리고요. 천재와 광기, 예술을 위한 파멸처럼 낭만주의가 좋아할 만한 요소가 이 한 사람 안에 다 들어 있으니,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쉽게 놓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에요.
하지만 한 겹만 걷어 내면 이야기는 더 흥미로워집니다. 왕은 그날 처음 만나 즉흥적으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이미 3년 동안 바그너의 음악과 사상에 빠져 있었고, 구원처럼 보였던 후원은 1년 7개월 만에 축출로 뒤집혔으며, ‘미치광이’라는 딱지에는 정치적 이해관계가 끼어 있었습니다. 루트비히가 바그너에게 대신 갚아 준 것은 빚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바그너가 걸작을 완성할 시간을 사 준 후원자이기도 했습니다.
이 사연을 알고 나면 트리스탄이 다르게 들립니다
이 사연을 떠올리며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전주곡을 들어 보세요. 루트비히 2세가 후원하지 않았다면 무대에 오르기 어려웠을 음악입니다. 첫 화음부터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한 채 계속 미끄러지고, 이 ‘해결되지 않는 긴장’은 훗날 음악이 나아갈 길을 통째로 바꿔 놓습니다. 채무자 감옥을 코앞에 뒀던 바그너가 썼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아득하고 관능적인 음악입니다. 이어지는 ‘사랑의 죽음’에서 그 긴장이 마침내 풀릴 때, 왜 열여덟 살 왕이 바그너에게 그토록 마음을 빼앗겼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아집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점이던 〈로엔그린〉의 전주곡은 이 글 상단의 재생기로 함께 들어 보셔도 좋습니다. 열다섯 살 소년의 마음을 통째로 가져간 바로 그 소리입니다.
같은 사연이 흐르는 세 곡
루트비히 2세의 후원, 바그너가 꿈꾼 무대, 그리고 현실이 되지 못한 왕의 동경을 더 따라가고 싶다면 아래 세 곡을 함께 들어 보세요.
- 바그너 〈로엔그린〉 — 열다섯 살 루트비히를 바그너의 세계로 끌어들인 백조 기사 이야기. 이 글 상단 재생기에서 전주곡부터 들어 보세요.
-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 루트비히 2세의 후원이 바이로이트 축제극장과 전곡 상연으로 이어진, 네 편짜리 대서사시.
- 바그너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 오랜 망명 생활 뒤 루트비히 2세의 지원 아래 뮌헨 궁정극장에서 초연된, 바그너의 대표적인 희극 오페라.
자주 묻는 질문
루트비히 2세는 정말 열여덟 살에 바그너를 후원했나요?
왕은 왜 바그너를 뮌헨에서 쫓아냈나요?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바그너와 관련이 있나요?
왕이 바그너에게 쓴 돈 때문에 바이에른이 파산했나요?
참고 자료
- [1] 루트비히 2세의 죽음과 사인 논쟁. Wikipedia — Ludwig II of Bavaria (Death) ↩
- 바그너의 생애와 루트비히 2세와의 후원 관계를 확인할 때 참고한 기본 약력. Wikipedia — Richard Wagner
- 《Tristan und Isolde》는 1865년 6월 10일 한스 폰 뷜로 지휘로 초연되었습니다. Wikipedia — Tristan und Isolde
- 루트비히 2세의 공식 약력과 생애 연표는 바이에른 궁전 관리청 자료를 기준으로 대조했습니다. Bavarian Palace Administration — King Ludwig II Biography
이어서 듣기 — 후원과 짝사랑이 만든 음악들
바그너와 루트비히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면, 아래 다섯 편도 취향에 맞을 확률이 높습니다. 후원자와 예술가, 이룰 수 없던 사랑, 그리고 소문이 사실을 덮은 순간을 각각 다른 각도에서 다룹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