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트, 클래식 최초의 아이돌 — ‘리스토마니아’는 어디까지가 진짜였나

리스트가 버린 꽁초에 다이아몬드를 박던 팬들 — 그 광풍의 실제 크기

인물
프란츠 리스트
(Franz Liszt, 1811~1886)
현상
리스토마니아
(Lisztomania)
이름을 붙인 사람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
1844년 4월 신문 칼럼
절정기
1841 ~ 1847년
시작된 곳
1841년 12월, 베를린
대표곡
헝가리 광시곡 2번, S.244/2
순회 은퇴
1847년 9월 (당시 35세)

떠도는 이야기 — 비틀즈 팬들이 공항에서 기절하기 120년 전, 리스트 앞에서 유럽 여자들이 실신했다는 ‘리스토마니아’가 있었습니다.

사실은 — 그 광풍의 이름은 콘서트홀이 아니라 신문 칼럼에서 태어났습니다. 붙인 사람도 리스트가 아니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입니다.

이 글에서는 — 어디까지가 실제로 벌어진 일이고 어디부터 하이네와 언론이 부풀린 이야기인지, 한 줄씩 갈라봅니다.

한 여자가 길바닥에 쪼그려 앉아, 남이 피우다 버린 담배꽁초를 줍습니다. 방금 프란츠 리스트의 입에 물려 있던 꽁초입니다. 여자는 그걸 집에 가져가 목걸이 로켓에 넣고, 둘레에 다이아몬드로 ‘F.L.’ 두 글자를 박아 넣습니다. 손수건도 아니고 장갑도 아닌, 피우다 버린 시가 한 토막을요.

1840년대 유럽에서 실제로 있었다고 전해지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이 광풍을 ‘리스토마니아(Lisztomania)’라고 불렀습니다. 비틀즈 팬들이 공항에서 실신하기 120년 전, 서른 살의 헝가리 피아니스트 한 사람이 대륙 전체를 흔든 겁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우리가 아는 만큼 다 진짜는 아닙니다. 리스트가 마시고 남긴 커피 찌꺼기를 병에 담아 가고, 리스트가 치다 끊어진 피아노 줄로 팔찌를 만들었다는 그 광풍은 — 콘서트홀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이었을까요, 아니면 누군가 종이 위에서 키워낸 신화였을까요. 답은 둘 다입니다. 어디까지가 어느 쪽인지, 지금부터 하나씩 떼어 보겠습니다.

1843년 다게레오타입으로 찍은 프란츠 리스트
1843년의 리스트. 리스토마니아가 한창이던 바로 그 무렵, 서른 초반의 얼굴이다.

여기까지는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확인된 사실 ‘리스토마니아’라는 말은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가 1844년 4월 25일 신문 칼럼에서 처음 썼습니다. 그해 파리 콘서트 시즌을 논평하면서 나온 표현입니다.[1]

중요한 건 하이네가 이 단어를 지어낸 시점입니다. 광풍은 이미 몇 해 전부터 달아오르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장면이 1841년 12월, 리스트가 베를린에 도착했을 때입니다. 도착한 날 밤 학생 서른 명이 리스트의 숙소 앞에 모여 노래를 불렀습니다. 12월 27일에는 베를린의 유서 깊은 공연장 징아카데미에서 첫 연주회가 열렸습니다. 객석엔 멘델스존, 마이어베어, 스폰티니 같은 당대 최고 작곡가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프로이센 왕가 사람들도 모두 객석에 앉았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과 국립극장 예술감독이 신인 피아니스트의 데뷔 무대를 보러 온 셈입니다.

그날 밤 하나로 끝난 일이 아닙니다. 리스트는 그해 겨울 베를린에 열 주 넘게 머물며 스물한 번을 연주했습니다. 도시 하나가 한 사람의 피아노에 석 달 가까이 매달린 겁니다. 신문은 매회 그의 프로그램과 앙코르를 중계하듯 실었고, 상점에는 리스트의 얼굴을 새긴 장신구가 깔렸습니다. 유명 성악가가 한철 인기를 끄는 일과는 규모가 달랐습니다.

베를린을 떠나는 날 풍경은 평론가 루트비히 렐슈타프가 직접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리스트는 흰 말들이 끄는 마차를 타고 시내 개선문인 브란덴부르크 문까지 갔고, 왕궁으로 이어지는 운터 덴 린덴 큰길엔 배웅 나온 인파가 늘어섰습니다. 렐슈타프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왕처럼이 아니라, 왕으로서 떠났다.” 피아니스트 한 사람이 떠나는 길에, 도시가 왕을 배웅하듯 쏟아져 나온 겁니다. 이 문장을 남긴 렐슈타프는 뒤에 베토벤의 한 곡에 ‘월광’이라는 별명을 붙인 바로 그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름을 잘 짓는 사람 눈에도 이 장면은 예사롭지 않았던 것입니다.

팬들이 뭘 가져갔는지도 여러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리스트가 벗어둔 장갑과 손수건을 두고 몸싸움을 벌였고, 그의 초상화를 브로치와 카메오에 넣어 달고 다녔습니다. 머리카락 한 올을 얻으려 들었고, 연주 중 피아노 줄이 끊어지면 그걸 주워 팔찌를 만들었습니다. 리스트가 마시고 남긴 커피 찌꺼기를 유리병에 담아 간 여자도 있었습니다. 앞에서 본 시가 꽁초 로켓도 이런 기록 속 한 장면입니다. 성인의 유품을 나눠 갖던 중세의 관습이, 살아 있는 피아니스트를 상대로 되살아난 모양새였습니다.

객석 풍경 자체가 평범한 인기와는 결이 달랐습니다. 관객이 무대로 밀려 올라가는가 하면, 자리에서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사람도 있었다고 전합니다. 유명한 가수나 배우를 좋아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래서 당대 사람들은 이 현상을 ‘좋아한다’보다 ‘앓는다’에 가까운 말로 설명하려 했습니다. 뒤에 나올 병리학 이야기는 여기서 출발합니다.

독주회라는 형식부터가 그의 발명품입니다

확인된 사실 광풍이 유독 리스트에게만 몰린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피아노 독주회’라는 형식을 사실상 그가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당연합니다. 무대에 피아노 한 대, 연주자 한 명, 두 시간을 혼자 채웁니다. 리스트 이전엔 이게 당연하지 않았습니다. 연주회란 여러 연주자가 나눠 하는 잡탕 무대였습니다. 성악가가 아리아 한 곡, 바이올리니스트가 소품 하나, 그 사이에 피아니스트가 끼는 식. 손님을 부르려면 유명한 이름을 여럿 붙여야 했습니다. 혼자서 무대를 통째로 짊어지겠다는 발상 자체가 오만하게 들리던 시절이었습니다.

1840년 런던 공연부터 이런 단독 무대에 ‘리사이틀(recital)’이라는 이름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음악적 독백’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단어를 실제로 제안한 사람은 리스트 본인이 아니라 그의 흥행 담당자였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물론 이름만 바뀐 게 아닙니다. 리스트는 전체 프로그램을 악보 없이 외워서 쳤고, 피아노를 무대에 비스듬히 놓아 객석에서 옆얼굴이 보이게 했습니다. 뚜껑은 활짝 열어 소리가 객석 쪽으로 퍼지게 했습니다. 지금 리사이틀 무대에서 피아노가 놓인 각도, 그게 리스트가 정한 겁니다.

악보를 외워서 친다는 것도 당시엔 파격이었습니다. 그때 연주자들은 대개 악보를 펴 놓고 쳤고, 외워서 치는 건 되레 건방지다는 소리를 듣던 시절입니다. 리스트는 그 관습을 뒤집어, 악보 없이 두 시간을 채우는 모습 자체를 볼거리로 만들었습니다. 손과 표정에 시선이 온전히 쏠리게 한 겁니다.

그러니까 관객은 ‘연주를 들으러’ 온 게 아니라 ‘리스트를 보러’ 왔습니다. 무대 위엔 오케스트라도, 다른 독주자도 없었습니다. 두 시간 내내 시선이 한 사람에게 쏠렸습니다. 스타가 태어날 조건을 리스트가 직접 설계한 겁니다. 연주자가 곡을 전하는 역할에 머물던 시대에서, 곡이 연주자를 돋보이게 하는 시대로 축이 넘어간 순간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아이돌 콘서트의 무대 구성과 놀랄 만큼 닮은 얼개가, 이미 여기서 완성돼 있었습니다.

피아노 치는 리스트와 몰려든 관객을 그린 19세기 풍자화
1845년경 풍자화. 리스트 주변으로 꽃이 쏟아지는 이 그림이, 당시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봤는지 말해준다.

1837년, 살롱에서 벌어진 진짜 결투

확인된 사실 광풍이 터지기 전, 리스트의 명성은 실제 대결에서 만들어졌습니다. 1837년 3월 31일, 파리의 크리스티나 벨조이오소 공녀(Princess Belgiojoso) 살롱에서 열린 피아노 결투입니다.

배경엔 라이벌이 있었습니다. 지기스몬트 탈베르크. 당시 파리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꼽히던 인물입니다. 탈베르크는 한 손으로 선율을 치면서 동시에 반주까지 얹어, 마치 피아노 두 대가 우는 것 같은 소리를 내는 기술로 파리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리스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파리 여론이 탈베르크 쪽으로 기울자, 리스트는 신문에 탈베르크를 깎아내리는 글까지 실었습니다. 두 사람의 신경전이 도시의 화젯거리가 된 상황이었습니다.

공녀는 두 사람을 같은 자선 음악회에 나란히 세웠습니다. 각자 대표곡을 들고 나왔습니다. 탈베르크가 먼저 로시니 오페라 《모세》 주제로 쓴 자신의 환상곡을 쳤고, 리스트는 자신의 오페라 환상곡으로 받아쳤습니다. 귀족들이 빼곡히 들어찬 살롱에서, 두 남자가 건반으로 주먹을 주고받은 겁니다.

승패를 묻자 공녀가 내놓은 답이 지금까지 전해집니다. “탈베르크는 세계 제일의 피아니스트다. 하지만 리스트는 유일한 존재다.” 외교적인 말 같지만 사실은 리스트의 손을 들어준 판결이었습니다. 제일이라는 자리는 언젠가 뺏길 수 있습니다. 유일하다는 건 애초에 비교 대상이 없다는 뜻이니까요. 이때 리스트는 만 스물다섯이었습니다.

그의 연주는 소문이 아니라 물리적 사건이었습니다. 얼마나 세게 쳤는지 연주 중 피아노 줄이 끊어지기 일쑤였고, 그래서 무대에 피아노를 여러 대 세워두고 한 대가 망가지면 다음 대로 옮겨 앉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과장 같지만 그 시절 피아노는 오늘날의 피아노보다 줄과 골격이 약했습니다. 관객이 주워 팔찌로 만들었다는 그 끊어진 줄이, 바로 이 격렬한 연주의 부산물이었습니다.

이야기가 눈덩이처럼 커진 순간

설(說)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리스토마니아를 오늘날 우리가 아는 ‘집단 실신 소동’으로 완성한 사람은 관객이 아니라, 그걸 지켜보고 글로 쓴 하인리히 하이네였습니다.

하이네는 독일 최고의 시인이자 당대에 손꼽히던 칼럼니스트였습니다. 파리에 살며 독일 신문에 파리 소식을 전하는 글을 오래 썼습니다. 문장이 날카롭고 냉소가 몸에 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리스트 열풍을 다루면서 그저 ‘인기가 대단하더라’라고 적을 리 없었습니다.

하이네는 의학의 언어를 끌어왔습니다. 이건 미학이 아니라 병리학의 영역이라고 못 박았습니다. 전염병처럼 유럽에 퍼진 광기라고 본 것입니다. ‘마니아(mania)’라는 말부터가 1840년대엔 실제 정신질환을 가리키는 단어였습니다. 오늘날 ‘팬심’ 정도로 가볍게 쓰는 말과는 무게가 달랐던 겁니다. 하이네의 단어 선택은 은유라기보다 진단서에 가까웠습니다.

당대에는 이 진단을 꽤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들도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리스토마니아를 전염성 질환으로 보고 대중을 어떻게 ‘면역’시킬지 대책을 논한 비평가도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뇌전증의 일종인가, 집단 히스테리인가, 아니면 콘서트홀 공기에 떠다니는 세균 탓인가 — 이런 논의까지 오갔다는 겁니다. 다만 이 처방 논쟁이 얼마나 진지했고 얼마나 하이네식 농담이었는지는, 지금도 딱 잘라 말하기 어렵습니다. 냉소가의 글은 원래 어디까지가 진담인지 가늠하기가 힘듭니다. 게다가 하이네의 글은 워낙 잘 읽혔던 터라, 그가 슬쩍 얹은 과장까지 사실처럼 함께 퍼져 나갔습니다.

리스토마니아라는 말을 만든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
하인리히 하이네. ‘리스토마니아’라는 단어는 그의 신문 칼럼에서 태어났다.

전문가들도 여기서 갈립니다

해석 그래서 학자들 사이엔 오래된 질문이 있습니다. 리스토마니아가 정말 그만한 규모의 사회 현상이었는지, 아니면 하이네라는 재능 있는 냉소가가 종이 위에서 키워낸 신화에 가까웠는지를 놓고 의견이 갈립니다.

음악학자 데이나 굴리는 저서 《비르투오소 리스트》에서 이 지점을 정면으로 파고듭니다.[2] 굴리는 하이네의 ‘Lisztomania’가 20세기의 ‘Beatlemania’와 같은 뜻으로 쓰인 게 아니라고 봅니다. 하이네는 순수한 팬 문화 보고서를 쓴 게 아니라, 리스트를 둘러싼 저널리즘과 소동 자체를 냉소적으로 해부하고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굴리는 당대 신문과 잡지, 편지, 회고록, 심지어 콘서트 영수증까지 뒤져서 이 열광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재구성합니다.

여기서 무게추가 한쪽으로 살짝 기웁니다. 열광 자체는 실재했습니다. 겹치는 목격담이 여럿이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리스토마니아’ 하면 떠올리는 그 완결된 그림 — 여자들이 줄줄이 기절하고 의사가 처방을 고민하는 소동 — 은 상당 부분 하이네의 문장이 만들어낸 것에 가깝다는 시각이 현재로선 우세합니다. 실제로 벌어진 사건과, 그 사건을 글로 옮긴 서술을, 우리는 자꾸 하나로 뭉쳐서 기억합니다. 리스토마니아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흩어져 있던 목격담들이 하나의 ‘병’이라는 이야기 틀로 정리돼 버렸습니다.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놓지 못한 이유

그럼 왜 이 이야기는 180년이 지나도 안 죽는 걸까요. 하나는 타이밍입니다. 리스토마니아는 유럽에 철도가 깔리고 신문이 대중화되던 바로 그 시기에 터졌습니다. 리스트는 기차를 타고 도시에서 도시로 옮겨 다녔고, 그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소문이 신문을 타고 먼저 도착해 있었습니다. 앞 도시의 열광을 전하는 기사가 다음 도시의 기대를 부풀렸고, 그 기대가 실제 열광을 다시 키웠습니다. 현대적 의미의 ‘투어’와 ‘언론 플레이’가 처음으로 맞물린 사례입니다. 리스트가 한 도시를 떠나면, 신문은 곧장 다음 도시의 공연 소식을 팔았고, 그 기다림 자체가 상품이 됐습니다. 열광을 사고파는 시장이 이때 처음 열렸습니다.

한 가지 짚고 갈 대목이 있습니다. 당대 기록도, 후대의 서술도 유독 ‘여성 팬’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기절하고, 꽃을 던지고, 머리카락을 탐내는 쪽은 늘 여자로 그려졌습니다. 굴리 같은 학자들은 이 부분을 그대로 믿기보다, 왜 그렇게 기록됐는지를 묻습니다. 19세기 남성 필자들에게 ‘이성을 잃은 여성 무리’는 열광을 극적으로 그리기에 편리한 그림이었거든요. 실제 객석엔 남성 팬도 많았지만 글로 남은 건 대개 실신하는 여성의 모습이었습니다. 리스토마니아의 ‘히스테리’ 이미지에는, 실제 관객의 행동만큼이나 그 시대가 여성을 바라보던 시선이 섞여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무대 위 한 사람에게 수천 명이 열광하고, 굿즈를 사 모으고, 사생활을 캐고, 그를 병처럼 앓는 것. 지금 아이돌 팬덤과 판박이입니다. 그래서 후대는 리스트를 ‘최초의 팝스타’라는 상자에 기꺼이 집어넣었습니다. 그가 그 상자에 실제로 얼마나 들어맞았는지와는 별개로, 우리에게 그 상자가 필요했던 겁니다. 사람들은 팬덤에도 오래된 뿌리가 있다고 믿고 싶었고, 그래서 리스트를 그 자리에 앉혔습니다.

낭만주의라는 시대 분위기도 한몫했습니다. 예술가를 신적인 천재로, 관객을 그 앞에서 이성을 잃는 존재로 그리는 서사가 그 시절엔 매력적이었습니다. 리스토마니아는 그 서사를 실물로 증명해 주는 완벽한 사례였습니다. 그러니 하이네가 이름을 붙이자마자, 다들 이 이야기를 자기 방식대로 다시 썼습니다. 사실과 신화가 한 덩어리로 굳어 오늘까지 굴러온 겁니다.

정작 그는 서른다섯에 무대를 떠났습니다

확인된 사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덜 알려진 대목은 결말입니다. 리스트는 광풍의 절정에서, 스스로 무대를 내려왔습니다.

1847년 9월, 그는 지금의 우크라이나 지역인 옐리자벳흐라드에서 마지막 유료 연주회를 열었습니다. 이때 나이가 서른다섯. 아직 손끝에서 힘이 빠지기 한참 전이었고, 부르는 곳도 넘쳤습니다. 돈도, 인기도, 다 정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순회 연주를 접었습니다. 대개 스타는 인기가 식은 뒤에야 무대를 떠납니다. 리스트는 반대로, 아무도 떠나라고 하지 않을 때 스스로 내려왔습니다.

배경엔 카롤리네 자인비트겐슈타인이라는 여인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떠돌이 스타 생활을 접고 한곳에 머물며 작곡하고 가르치라고 리스트를 설득한 인물입니다. 리스트는 독일 바이마르에 자리를 잡고 작곡가이자 스승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무대에서 사람을 홀리던 손이, 이번엔 후배를 키우고 악보를 채우는 쪽으로 옮겨간 겁니다. 이 시절 바이마르로 젊은 음악가들이 몰려들었고, 리스트는 수업료를 받지 않고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훗날엔 로마 근교 수도원에 들어가 하급 성직까지 받았고, 사람들은 그를 ‘아베 리스트’라 불렀습니다.

돌아보면 이게 신의 한 수였습니다. 무너지는 모습을 아무도 못 봤으니까요. 늙어서 실수하는 리스트, 손이 굳은 리스트, 한물간 리스트 — 그런 그림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리스토마니아가 180년째 반짝이는 건, 어쩌면 그가 가장 빛날 때 커튼을 닫아 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광풍에 이름을 붙인 사람은 하이네였지만 — 그 무대를 세운 것도, 언제 접을지 정한 것도 리스트 본인이었습니다.

다시 처음의 담배꽁초로 돌아가 봅니다. 다이아몬드로 ‘F.L.’을 박은 그 로켓은, 어쩌면 리스트라는 현상의 성격을 가장 정확히 보여주는 물건입니다. 길에 버려진 값싼 쓰레기 한 토막에, 사람들이 제 돈으로 보석을 박아 넣은 것. 리스토마니아의 절반은 리스트가 만들었고, 나머지 절반은 그를 그렇게 만들고 싶었던 사람들이 만들었습니다.

이걸 알고 들으면 이 곡이 다르게 들립니다

리스트가 왜 무대에서 그렇게 위험한 존재로 보였는지 궁금하다면, 대표곡인 〈헝가리 광시곡 2번〉을 들어보세요. 이 곡은 리스트가 ‘관객을 압도한다’는 목표를 악보에 그대로 새겨 넣은 표본입니다. 곡 자체가 ‘나를 봐’라고 소리치는 구조입니다. 크게 두 덩어리로 나뉩니다. 느리고 무거운 앞부분, 그리고 갑자기 뛰기 시작하는 뒷부분입니다.

라산 — 뜸을 들이는 앞부분

앞부분은 헝가리 집시 음악의 느린 대목에서 따온 ‘라산’입니다. 무겁고 어둡게, 일부러 뜸을 들입니다. 화음을 툭 던지고 한참 쉬고, 다시 던지고 쉽니다. 객석의 긴장을 끌어올리는 시간입니다. 여기서 리스트는 빠르게 몰아치지 않습니다. 폭풍 전에 하늘부터 어둡게 깔아 두는 겁니다.

🎧 여기서 들으세요 — 곡을 틀면 처음 2분 남짓이 이 느린 ‘라산’입니다. 화음 하나를 치고 일부러 멈추는 그 침묵의 길이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뒤에 올 질주를 위해 리스트가 깔아 두는 밑밥입니다.

프리스카 — 여기서부터 사건이 됩니다

후반부는 빠른 대목인 ‘프리스카’입니다. 여기서부터가 진짜입니다. 연주자의 손이 건반 위를 미끄러지고, 옥타브를 연달아 짚으며 위로 치고 올라갑니다. 속도가 계속 붙습니다. 객석에서 보면 사람이 악기와 싸우는 것처럼 보입니다. 리스트는 이 곡을 ‘듣는 음악’이 아니라 ‘보는 사건’으로 만들었습니다. 두 시간짜리 리사이틀의 마지막에 이런 곡이 놓이면, 객석이 어떤 상태가 됐을지 짐작이 갑니다. 소리를 듣는 자리가 아니라 한 사람이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광경을 목격하는 자리. 리스트가 노린 것은 정확히 그 압도감이었습니다.

카덴차 — 마음껏 폭발시키라는 빈자리

리스트는 이 곡 안에 ‘카덴차’ 자리를 비워뒀습니다. 카덴차란 반주 없이 독주자 혼자 기교를 뽐내라고 열어 둔 구간입니다. 연주자더러 그 자리에서 마음껏 기교를 폭발시키라는 초대장인 셈입니다. 그래서 피아니스트마다 이 대목을 다르게 채웁니다. 같은 곡을 여러 연주로 비교해 듣는 재미가 여기서 나옵니다. 이 곡을 더 파고들고 싶다면 리스트 헝가리 광시곡 2번 해설에서 이어서 볼 수 있습니다.

아래는 20세기 최고의 리스트 연주자로 꼽히는 조르주 치프라의 실황입니다. 헝가리 출신으로, 손가락 빠르기만큼은 역사상 손에 꼽히던 피아니스트입니다. 치프라의 손가락이 건반 위에서 뭘 하는지 보고 나면, 리스트의 무대를 본 관객이 왜 그렇게까지 반응했는지 조금은 실감이 날 겁니다. 그때 사람들에겐 이것이 태어나서 처음 보는 종류의 육체적 사건이었으니까요.

치프라의 손이 후반부에서 하는 일을 보면, 리스토마니아가 왜 ‘병’으로 불렸는지 알 것 같다.

‘리스토마니아’라는 말은 누가 만들었나요?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가 1844년 4월 25일 신문 칼럼에서 처음 썼습니다. 그해 파리 콘서트 시즌을 논평하면서 나온 표현입니다. 리스트 본인이 만든 말이 아니라, 그를 지켜본 문인이 붙인 이름입니다.

팬들이 커피 찌꺼기나 담배꽁초를 모았다는 게 사실인가요?

여러 당대 기록에 남아 있는 이야기입니다. 커피 찌꺼기를 유리병에 담고, 끊어진 피아노 줄로 팔찌를 만들고, 시가 꽁초를 다이아몬드로 장식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다만 개별 일화가 얼마나 과장 없이 그대로였는지는 확정하기 어렵고, 상당 부분은 당시 언론과 하이네의 글이 퍼뜨린 이야기입니다.

리스트가 피아노 독주회를 처음 만들었다는 게 맞나요?

오늘날 형태의 솔로 리사이틀을 사실상 확립한 사람이 리스트입니다. 1840년 런던 공연부터 ‘recital’이라는 이름이 쓰이기 시작했고(단어를 제안한 사람은 흥행 담당자였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리스트는 전체 프로그램을 외워서 혼자 연주했으며, 피아노를 비스듬히 놓아 객석에서 옆모습이 보이게 했습니다. 지금 리사이틀 무대의 기본 형식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리스토마니아가 비틀즈 팬덤과 정말 같은 건가요?

비슷한 면이 많아 흔히 ‘비틀마니아의 원조’로 불립니다. 다만 음악학자 데이나 굴리는 하이네의 ‘Lisztomania’가 20세기의 ‘Beatlemania’와 같은 뜻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1840년대의 ‘마니아’는 진짜 병리를 가리키는 단어였고, 하이네는 팬 문화를 보고하기보다 그 소동 자체를 냉소적으로 해부하고 있었다는 해석입니다.

리스트는 왜 인기 절정에 순회 연주를 그만뒀나요?

1847년 9월 마지막 유료 연주회를 끝으로, 서른다섯의 나이에 순회 연주에서 물러났습니다. 실력도 인기도 정점이던 시기였습니다. 카롤리네 자인비트겐슈타인의 권유로 독일 바이마르에 정착해 작곡과 후배 양성에 전념했고, 훗날엔 하급 성직까지 받아 ‘아베 리스트’로 불렸습니다. 가장 빛날 때 무대를 떠난 덕분에, 늙고 쇠한 모습이 기록으로 남지 않았습니다.

참고 자료

이어서 듣기 — 광풍의 진원지로

리스토마니아가 흥미로웠다면 아래 다섯 편이 취향에 맞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리스트가 무대에서 실제로 무엇을 폭발시켰는지부터, 그와 같은 낭만주의 세대가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로 어디까지 갔는지까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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