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 독살설 — 살리에리는 정말 모차르트를 죽였습니까

모차르트의 마지막 편지 한 통과, 1823년 병상의 헛소리

사건
모차르트 독살설
(Mozart poisoning myth)
죽은 사람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의심받은 사람
안토니오 살리에리
(Antonio Salieri, 1750~1825)
빈 궁정 음악감독 1788~1824
사망
1791년 12월 5일 0시 55분, 빈 자택
향년 35세
기록된 사인
급성 좁쌀열(hitziges Frieselfieber)
병명이 아니라 증상 묶음
소문의 시작
1791년 12월, 베를린의 음악 주간지 보도
이른바 자백
1823년 11월, 빈
살리에리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 직후
전설의 확산
푸시킨 희곡(1830) → 림스키코르사코프 오페라(1898) → 셰퍼 연극(1979) → 영화 《아마데우스》(1984)
남아 있는 물증
모차르트의 마지막 편지(1791.10.14)
살리에리·모차르트·코르네티 공동 칸타타 K.477a(1785)

확인된 사실 — 모차르트는 1791년 12월 5일 새벽에 죽었고 그 일곱 주 전에는 살리에리를 자기 마차에 태워 오페라 극장에 데려갔습니다.

떠도는 이야기 — 궁정 음악감독 살리에리가 질투를 못 이겨 모차르트에게 독을 먹였다고들 합니다.

이 글에서는 — 확정해도 되는 사실부터 후대가 덧칠한 전설까지, 다섯 등급으로 갈라 봅니다.

1823년 11월, 빈에서 일흔세 살의 한 남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실패해 병원에 실려 갑니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그가 사람을 죽였다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병실 밖으로 새어 나갔고, 그 상대는 32년 전에 세상을 뜬 모차르트였습니다.

그 병실 밖 소문은 200년을 살아남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질투에 미쳐 천재를 죽인 살리에리’는 재판 기록이나 부검 보고서에서 나온 인물이 아닙니다. 그 모습을 널리 굳힌 출처는 러시아 시인이 쓴 짧은 희곡 한 편입니다. 정작 그 노인은 정신이 맑아지자 곧바로 말을 뒤집었고, 그를 돌보던 사람들도 그런 고백을 들은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 글은 유죄냐 무죄냐를 선고하는 판결문이 아닙니다. 남은 기록을 다섯 칸에 나눠 담는 작업입니다. 못을 박아도 되는 사실, 거의 확실한 추정, 학자들이 아직 싸우는 문제, 사실이 아닌데도 사라지지 않는 이야기, 마지막으로 사실과 헷갈리기 쉬운 해석을 구분해 보겠습니다. 여기서 지킬 원칙은 하나입니다. 소문을 사실보다 한 칸 위에 올려 두지 않는 것입니다.

붉은 코트에 흰 가발을 쓴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초상화
모차르트가 죽고 28년 뒤인 1819년에 그려진 초상. 실물을 본 적 없는 화가가 가족의 기억에 기대어 완성했다.

1791년 12월 5일 0시 55분, 빈

확정 모차르트는 1791년 12월 5일 0시 55분에 빈의 집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나이는 서른다섯 살이었습니다. 교구 사망 기록에는 사인이 ‘급성 좁쌀열’로 적혔지만, 이것은 오늘날의 병명이라기보다 온몸에 좁쌀만 한 발진이 돋고 열이 오르는 상태를 뭉뚱그려 부른 말에 가깝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진단서에 ‘고열과 발진’이라고만 적혀 있는 셈입니다.

모차르트가 병상에 누운 채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된 시점도 비교적 분명합니다. 11월 20일입니다. 이때부터 몸이 붓고 통증이 심해졌으며 구토도 시작됐고, 마지막 2주 동안 부기는 손발에서 온몸으로 번졌습니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킨 일곱 살짜리 맏아들 카를은 훗날, 죽기 며칠 전 아버지의 온몸이 부어올라 아주 작은 움직임조차 하지 못했고 악취까지 났다고 적었습니다.

당시 의사들이 택한 처치는 환자의 피를 뽑아내는 사혈이었습니다. 12월 4일 밤에도 피를 뺐습니다. 이미 기력이 바닥난 사람에게 그 처치가 도움이 됐을 가능성은 낮습니다. 침대 옆에서 처남과 동료 가수들이 미완성 레퀴엠을 함께 불러 봤다는 회고, 주치의 클로세트가 극장에서 연극이 끝나기를 기다리느라 늦게 왔다는 처제 소피 베버의 기억도 전해집니다. 다만 이런 장면은 모두 사건이 한참 지난 뒤에 적힌 기록입니다.

여기까지가 다툼이 거의 없는 영역입니다. 날짜와 시각, 나이, 기록된 사인, 병상에 누운 시점은 남아 있습니다. 독살설은 바로 그다음, 기록이 비어 있는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죽이려는 사람을 자기 마차에 태우지는 않습니다

확정 모차르트가 남긴 마지막 편지는 1791년 10월 14일, 아내 콘스탄체에게 부친 편지입니다. 죽기 일곱 주쯤 전이었죠. 이 편지에서 모차르트는 전날 밤 일을 자랑하듯 적었습니다. 자기 마차에 두 사람을 태워 극장에 데려갔는데, 한 명은 소프라노 카테리나 카발리에리였고 다른 한 명은 안토니오 살리에리였습니다.

“그는 서곡부터 마지막 합창까지 온 신경을 쏟아 듣고 보았소. ‘브라보!’ ‘벨로!’가 터져 나오지 않는 대목이 하나도 없었다오.”

— 모차르트가 콘스탄체에게, 1791년 10월 14일

그날 무대에 오른 작품은 《마술피리》였습니다. 초연한 지 2주쯤 지난 신작이었죠. 빈 음악계의 실권자를 자기 마차에 태워 극장까지 데려가고 옆자리에 앉힌 사람은 모차르트였습니다. 이 대목이 중요한 이유는, 이 편지가 후대의 회고가 아니라 사건 당일에 모차르트가 직접 쓴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두 사람의 실제 관계를 판단할 때는 매우 강한 1차 자료입니다.

물론 이 편지 한 통으로 모든 의문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사이좋게 오페라를 본 사람이 두 달 뒤에 상대를 해쳤을 가능성을 논리적으로 완전히 지울 수는 없으니까요. 다만 이 편지는 독살설이 기대는 기본 그림, 곧 서로 얼굴도 보기 싫어하던 두 남자라는 이미지와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는 편지 말고도 물증이 하나 더 있습니다.

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박힌 악보

확정 1785년 여름, 빈에서 활동하던 영국계 이탈리아 소프라노 낸시 스토레이스가 갑자기 목소리를 잃습니다. 석 달 동안 무대에 서지 못했던 그녀가 9월 19일에 복귀하자, 이를 축하하는 짧은 칸타타 한 편이 만들어졌습니다. 제목은 《오펠리아의 회복을 축하하며》였고, 대본은 궁정 시인 로렌초 다 폰테가 썼습니다.

이 4분짜리 곡은 세 부분으로 나뉘며, 각 부분을 맡은 작곡가도 달랐습니다. 첫 대목은 살리에리, 두 번째는 모차르트, 세 번째는 정체가 불분명한 코르네티라는 인물이 썼습니다. 두 사람이 원수 사이였다면 성립하기 어려운 조합입니다. 악보는 그해 빈의 출판사 아르타리아에서 인쇄됐지만, 이후 230년 동안 실물이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악보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때는 2015년 11월입니다. 독일의 음악학자 티모 요우코 헤르만은 프라하 체코 음악박물관에서 살리에리의 제자 관련 자료를 살피다가, 작곡가 이름이 약자로만 적힌 인쇄 악보 한 장이 이 칸타타라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이듬해 3월 3일 빈에서는 소프라노와 포르테피아노 편성으로 이 곡이 다시 연주됐습니다. 뉴요커의 평론가 알렉스 로스는 이 발굴을 두고 음악 자체보다 사연이 훨씬 흥미롭다고 썼습니다. 냉정한 평이지만, 이 곡을 이해하는 데에는 맞는 말입니다. 이 곡의 가치는 선율 자체보다 두 사람이 같은 축하 자리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에 있으니까요.

악보를 든 18세기 소프라노 낸시 스토레이스의 초상화
소프라노 낸시 스토레이스. 그녀의 목소리 회복을 축하하기 위해 모차르트와 살리에리가 한 곡을 나눠 썼다.

두 사람이 적대 관계로만 묶이지 않았다는 흔적은 더 있습니다. 살리에리는 1788년 궁정 음악감독 자리에 오르자 취임 무대로 자기 신작 대신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을 다시 올렸습니다. 1790년 레오폴트 2세 대관식에 갈 때는 모차르트의 미사곡 세 편을 챙겨 갔습니다. 교향곡 40번과 클라리넷 5중주도 살리에리가 이끈 연주회 자리에서 청중에게 소개됐습니다.

2016년 빈에서 230년 만에 다시 연주된 K.477a. 소프라노 케이트 래퍼티, 포르테피아노 비니시우스 카타.

그런데 모차르트는 살리에리를 의심했습니다

확정 그렇다고 살리에리를 완전히 이야기 밖으로 밀어내도 사실과 멀어집니다. 두 사람 사이가 늘 훈훈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오히려 모차르트 본인의 편지에는 살리에리를 경계하고 의심한 흔적이 꽤 또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갈등의 출발점은 1781년입니다. 뷔르템베르크의 엘리자베트 공주에게 음악을 가르칠 교사를 뽑을 때, 궁정은 모차르트가 아니라 살리에리를 선택했습니다. 이듬해 피아노 교사 자리에서도 모차르트는 밀렸습니다. 모차르트는 이 경쟁을 단순한 실패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해 12월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는 “황제의 눈에 드는 사람은 살리에리뿐입니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1783년 5월 편지에서는 다 폰테와 살리에리를 함께 거론하며 “그 이탈리아 양반들 아시잖습니까. 얼굴 앞에서는 참 친절하지요”라고 비꼬았습니다. 같은 해 7월 편지에는 아예 “살리에리의 농간”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1786년에는 두 사람이 정면으로 맞붙기도 했습니다. 요제프 2세는 쇤브룬 궁전의 오랑주리에서 작곡 대결 형식의 공연을 열었습니다. 한쪽 끝에서는 모차르트의 단막극이, 반대쪽 끝에서는 살리에리의 단막극이 연달아 올라갔습니다. 그날의 평가는 살리에리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정리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두 사람은 궁정의 자리를 두고 실제로 경쟁했고, 모차르트는 그 경쟁에서 이탈리아 출신 선배 살리에리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움직인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궁정 일자리를 두고 다투는 것과 누군가를 독으로 죽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독살설은 실제 경쟁 관계를 살인 동기로 부풀려 붙인 이야기였습니다.

독이 아니라 병이었습니다

강한 추정 모차르트의 마지막을 지켜본 의사 가운데 독을 언급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전해지는 증상도 독살설과 잘 맞지 않습니다. 온몸이 붓고 열이 오르며 발진이 돋는 경과는 당대에 알려져 있던 독극물 중독의 전형적인 모습과 겹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연구자들은 대체로 모차르트가 독이 아니라 병으로 죽었다고 봅니다.

독살설보다 병사설에 무게를 싣는 동시대 기록도 있습니다. 빈에서 공중보건을 담당하던 의사 에두아르트 굴데너 폰 로베스는 1824년, 살리에리를 겨눈 소문이 시끄러워지자 작가 주세페 카르파니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해 가을 빈에는 류머티즘성 염증열이 널리 돌았고, 적지 않은 사람이 모차르트와 비슷한 증상을 보이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내용입니다. 모차르트의 주치의들과 직접 이야기를 나눈 사람의 증언이라 무게가 있습니다.

다만 이 편지도 그대로 확정 증거로만 읽을 수는 없습니다. 굴데너는 같은 글에서 살리에리를 향한 비난을 “끔찍한 중상”이라고 못 박았습니다. 살리에리를 변호하려는 동기가 뚜렷한 사람의 증언이라는 뜻입니다. 사료를 읽을 때는 내용만이 아니라 쓴 사람의 처지도 같이 봐야 합니다.

이 항목을 ‘확정’이 아니라 ‘강한 추정’에 둔 이유는 더 단순합니다. 부검이 없었습니다. 시신을 열어 확인한 기록이 없으니, “독이 아니다”라는 판단도 증상과 정황을 모아 세운 추론에 가깝습니다. 방향은 뚜렷하지만, 마지막에 판정을 확정해 줄 의학적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슨 병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논쟁 모차르트가 병으로 죽었다는 점은 대체로 받아들여집니다. 문제는 그 병이 정확히 무엇이었느냐입니다. 지난 200년 동안 제시된 진단명만 열다섯 가지가 넘고, 결핵부터 기생충병까지 서로 관련 없어 보이는 병명이 같은 목록에 올라 있습니다.

지금 가장 힘을 받는 설: 목 감염 뒤 콩팥 손상

2009년, 세 명의 연구자가 당시 사망 기록을 다시 검토했습니다. 연구진은 모차르트가 죽은 무렵 빈의 사망 기록을 모으고, 1790년과 1792년의 같은 시기 기록을 대조군으로 삼아 역학적으로 비교했습니다. 그 결과 모차르트가 죽기 전후 몇 주 동안 젊은 남성층에서 부종으로 인한 사망이 눈에 띄게 늘어난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연구진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목에 연쇄상구균이 감염된 뒤, 그 감염에 맞서던 몸의 면역 반응이 콩팥을 손상시켰다는 것입니다. 감염병의 진원지로는 군 병원이 지목됐습니다.

나머지 후보들

1994년 신경학 학술지에는 경막하혈종 가설이 실렸습니다. 경막하혈종은 머리를 다쳐 뇌를 감싼 막 아래에 피가 고이는 상태입니다. 근거는 모차르트의 것으로 전해지는 두개골에 왼쪽 관자뼈 골절 흔적이 있고, 1789~1790년에 여러 번 넘어진 기록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2000년에는 의사 두 명과 음악학자 한 명이 류머티즘열 가능성을 제기했고, 2001년에는 덜 익힌 돼지고기에서 옮는 기생충병인 선모충증 가설이 나왔습니다. 모차르트가 즐겨 먹던 해열제에 안티모니가 들어 있었다는 점을 문제 삼는 견해도 있습니다.

역사학자 윌리엄 스태퍼드는 이 상황을 거꾸로 선 피라미드에 빗댔습니다. 토대가 되는 1차 자료는 다 합쳐도 열 쪽이 안 되는데, 그 위에 쌓인 후대 문헌은 산더미처럼 많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후대 연구자들이 원사료에 없는 증상을 덧붙여 자기 가설을 뒷받침해 왔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 가능한 결론은 제한적입니다. 병으로 죽었을 가능성은 아주 높지만, 어떤 병이었는지는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누가 나에게 독을 먹였다”는 모차르트 본인의 말

논쟁 독살설을 가장 끈질기게 붙잡아 두는 대목은 살리에리의 말이 아닙니다. 모차르트 본인이 그런 말을 했다는 기록입니다. 출처는 콘스탄체이고, 이 이야기를 처음 활자로 옮긴 사람은 1798년의 전기 작가 프란츠 크사버 니메체크입니다.

장면은 이렇습니다. 프라하에서 돌아온 뒤 남편의 기분이 가라앉자, 콘스탄체는 바람이라도 쐬게 하려고 그를 빈의 공원 프라터로 데려갑니다. 둘만 앉아 있는데 모차르트가 죽음 이야기를 꺼내더니, 자신은 지금 자기 장례를 위한 레퀴엠을 쓰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진 문장이 200년 동안 독살설을 떠받치게 됩니다.

“확실히 느껴져. 오래 못 갈 것 같아. 누가 나에게 독을 먹인 게 분명해. 이 생각을 떨쳐 낼 수가 없어.”

— 니메체크가 콘스탄체에게서 전해 들어 1798년에 기록한 말

후대의 전기들은 여기에 독약 이름까지 붙였습니다. 아쿠아 토파나입니다. 17세기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진 비소 계열 독으로, 색도 맛도 거의 없이 몇 차례에 걸쳐 사람을 서서히 약하게 만드는 독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특징 때문에 모차르트의 마지막 병세와는 잘 맞지 않습니다. 몇 달에 걸쳐 몸을 무너뜨리는 독이라면, 마지막 2주 사이에 급격히 악화된 증상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독의 작용 속도와 실제 증상이 서로 어긋나는 셈입니다.

같은 니메체크의 기록에는 뒷이야기도 함께 실려 있습니다. 몸이 잠깐 나아지자 모차르트가 “내가 독을 먹었다는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다니, 이제 레퀴엠을 돌려주시오”라고 했다는 대목입니다. 앞 문장만 떼어 읽으면 유언이 되고, 뒤까지 읽으면 아픈 사람의 불안이 됩니다. 인용은 언제나 어디에서 끊어 읽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여기에 사료 비판이 하나 더 붙습니다. 콘스탄체와 그 동생 소피의 증언은 전부 사건이 한참 지난 뒤에 나왔고, 두 사람에게는 기억을 더 극적으로 말하게 만들 수 있는 현실적인 사정도 있었습니다. 콘스탄체는 남편이 남긴 빚과 어린 두 아이를 안은 채 황제에게 연금을 청원했고, 추모 공연으로 생계를 꾸렸습니다. 음악학자 클리프 아이젠과 루스 핼리웰은 그런 처지가 증언을 더 애절하고 극적인 쪽으로 밀었을 가능성을 지적합니다. 이것이 곧 거짓말을 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한 사람의 기억이 훗날의 이야기로 굳어질 때, 그 기억을 말해야 했던 처지까지 함께 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헛소리가 자백이 되기까지

후대 전승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 이 문장을 받쳐 주는 증거는 지금까지 하나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어디에서 시작되어 자백처럼 굳어졌을까요.

소문 자체는 장례가 끝나기도 전에 있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죽음, 서른다섯이라는 나이, 끝맺지 못한 진혼곡까지, 의심을 부풀릴 재료는 이미 충분했습니다. 실제로 그해 12월 베를린에서 나오던 음악 주간지는 모차르트가 독살됐다는 말이 돈다고 전했습니다. 하지만 소문이 돌았다는 사실과 그 소문이 사실이라는 말은 완전히 다릅니다. 당국은 수사에 나서지 않았고, 확인할 증거도 나오지 않자 이야기는 한동안 가라앉았습니다.

소문이 다시 힘을 얻은 때는 1823년입니다. 그해 11월, 일흔셋의 살리에리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실패해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이후 1년 반 동안 그는 치매 증상을 보였습니다. 정신이 흐려진 상태에서 자신이 모차르트를 죽였다고 자책했다는 말이 빈 전역에 빠르게 퍼졌습니다.

정작 살리에리는 정신이 맑을 때마다 그 말을 부인했습니다. 그해 병문안을 갔던 제자 이그나츠 모셸레스의 기록에 따르면, 살리에리는 병상에서 자신이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터무니없는 소문에는 한 조각의 진실도 없으며, 명예를 걸고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를 돌보던 간병인들도 그런 고백을 들은 적이 없다고 확인해 주었습니다.

금목걸이와 훈장을 단 노년의 안토니오 살리에리 초상화
궁정 음악감독 시절의 살리에리. 36년 동안 빈 궁정 음악계의 핵심 직책을 맡았던 사람이다.

살리에리는 1825년 5월 7일에 일흔넷으로 죽었습니다. 그해 6월 22일에 열린 추도식에서 연주된 곡은 c단조 레퀴엠이었습니다. 그가 1804년에 자기 장례를 염두에 두고 써 둔 곡이었고, 그날이 초연이었습니다. 남의 진혼곡을 훔치려 했다는 영화적 이미지와 달리, 그는 이미 20년 전에 자기 진혼곡을 직접 써 두었습니다.

그가 무능한 범재였다는 인상도 영화가 만든 것에 가깝습니다. 아래는 파리에서 초연한 오페라 《다나이데스》의 서곡입니다. 1784년에 나온 음악이 어떤 소리를 내는지, 몇 초만 들어 보세요.

크리스토프 루세가 이끄는 레 탈랑 리리크의 2011년 베네치아 실황. 영화가 그린 ‘지루한 궁정 음악’과는 거리가 멀다.

이야기를 불멸로 만든 쪽은 예술가들입니다

후대 전승 증거가 없는 이야기가 200년을 버틴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푸시킨에서 포르만까지, 네 창작자가 이 소재를 차례로 다시 썼습니다.

첫 번째가 1830년입니다.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라는 짧은 희곡을 씁니다. 여기서 살리에리는 무대 위에서 대놓고 상대의 잔에 독을 탑니다. 푸시킨의 관심사는 살인 사건이 아니라 질투라는 감정 자체였습니다. 사료를 옮긴 글이 아니라, 남의 재능 앞에서 무너지는 사람을 그리려고 쓴 이야기였습니다.

숄을 두르고 팔짱을 낀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1827년 초상화
1827년의 푸시킨. 세 해 뒤 그가 쓴 희곡 한 편이 살리에리의 이름에 200년 동안 따라붙을 이미지를 만들었다.

1898년에는 러시아 작곡가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이 희곡을 거의 그대로 오페라로 옮겼습니다. 1979년에는 극작가 피터 셰퍼가 연극 《아마데우스》로 구도를 다시 짰습니다. 셰퍼는 자기 작품을 실제 인물을 재료로 삼은 환상곡이라고 불렀습니다. 사실을 옮긴 게 아니라 사실 위에 지은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1984년, 밀로시 포르만 감독의 영화 《아마데우스》. 아카데미 여덟 개 부문을 가져갔고 작품상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살리에리를 연기한 F. 머리 에이브러햄은 남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흥행 수입은 9천만 달러를 넘겼고, 2019년에는 미국 의회도서관이 보존 가치가 있는 영화로 지정했습니다. 재능 앞에서 무너지는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는 그렇게 전 세계 관객의 머릿속에 박혔습니다. 클래식은 영화 속에서 새 의미를 얻어 대중에게 도착할 때가 많습니다. 감독들이 어떤 장면에 어떤 곡을 골라 넣었는지는 클래식 음악이 영화 장면 안에서 새 역할을 얻는 방식을 보여 줍니다.

영화가 쉽게 사실처럼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출발점이 실제 기록에 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1823년에 늙은 살리에리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병원에 실려 갔다는 사실은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다만 그가 신부를 앞에 앉혀 놓고 고백을 시작하는 장면부터는 셰퍼가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실화에서 출발해 조용히 선을 넘어가는 방식이라, 관객은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알아채기 어렵습니다.

빈민 무덤에 버려졌다는 오해

후대 전승 영화의 마지막에는 비 내리는 구덩이에 시신이 던져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 장면도 실제 장례의 재현이라기보다 후대 전승이 덧칠한 이미지에 가깝습니다.

모차르트가 표식 없는 묘에 묻힌 건 사실입니다. 다만 그 묘는 갈 곳 없는 사람들의 시신을 한꺼번에 버리는 빈민 구덩이가 아니었습니다. 귀족이 아닌 시민에게 배정되던 당시의 일반적인 묘였고, 묘비를 세우지 않는 것도 규정에 따른 일이었습니다. 10년이 지나면 시가 다시 파서 쓸 수 있다는 조건도 붙어 있었는데, 이런 재사용 대상에서 빠지는 건 귀족의 묘뿐이었습니다.

그 배경에는 황제 요제프 2세의 장례 규제가 있었습니다. 위생과 검소를 이유로 화려한 장례와 개인 묘비를 억제했기 때문에, 빈 시민 대부분은 그 표준 절차에 따라 묻혔습니다. 모차르트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장례 절차는 후원자 반 스비텐 남작이 챙겼고, 매장은 12월 7일 성 마르크스 묘지에서 이뤄졌습니다. 1856년에 전기 작가 오토 얀은 그 자리에 살리에리와 쥐스마이어, 반 스비텐을 비롯한 몇 사람이 있었다고 적었습니다. 적어도 이 전승 안에서는, 훗날 독살설의 가해자로 지목된 살리에리가 오히려 장례 자리에 있었던 셈입니다.

💡 사실은요 — 장례식 날 폭풍우가 몰아쳤다는 이야기는 1856년 빈의 한 신문에 실린 회고에서 나왔습니다. 반면 장례 전날인 1791년 12월 6일 빈 천문대의 관측 기록에는 기온 2.8~3.8도에 약한 동풍, 그리고 옅은 안개가 적혀 있습니다. 우리가 떠올리는 궂은 날씨는 당시 기록보다 후대의 이야기 속 장면에 더 가깝습니다.

그 뒤 콘스탄체가 무덤을 찾으려 했을 때는 이미 표식이 없어 정확한 위치를 짚지 못했습니다. ‘사라진 무덤’이라는 사실 하나가 영화의 빗속 장면과 겹치면서, 모차르트는 비참하게 버려진 천재라는 이미지로 굳어졌습니다. 이렇게 강렬한 장면 하나가 사실을 밀어내는 일은 클래식 곳곳에서 벌어집니다. 헨델의 물 위 음악도 화가 난 왕을 달래려고 급히 작곡했다는 이야기가 후대에 커졌다는 점에서 구조가 비슷합니다.

레퀴엠을 자기 장송곡으로 듣는 일

작품 해석 주의 이 대목은 거짓이라기보다 해석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더 쉽게 사실처럼 굳어집니다. “모차르트가 자기 죽음을 예감하고 자신을 위한 진혼곡을 썼다” — 바로 이 문장이 그렇습니다.

사료로 확인되는 사정은 훨씬 덜 낭만적입니다. 곡을 의뢰한 사람은 프란츠 폰 발제크 백작이었습니다. 스무 살에 세상을 뜬 아내 안나의 1주기 미사를 위해 곡이 필요했고, 날짜는 1792년 2월 14일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백작은 이름을 감춘 채 사람을 보내 주문했습니다. 남의 곡을 자기 작품으로 발표하는 취미가 있었고, 전에도 그런 일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모차르트가 자기 손으로 완전히 끝낸 부분은 맨 앞의 입당송 하나뿐입니다. 키리에와 세쿠엔치아, 오페르토리움은 성악 성부와 저음 골격만 적힌 초안 상태였고, 그 유명한 라크리모사는 여덟 마디에서 끊깁니다.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이 이어 썼습니다. 먼저 작곡가 요제프 아이블러가 작업을 맡았다가 물러났고, 제자 프란츠 크사버 쥐스마이어가 마무리한 뒤 모차르트의 필체를 흉내 내 옮겨 적었습니다. 사본에 적힌 연도는 어설프게도 ‘1792’였습니다.

모차르트가 직접 손으로 쓴 레퀴엠 K.626 자필 악보 첫 장
모차르트가 손수 쓴 레퀴엠 첫 장. 익명의 주문으로 시작된 이 곡은 그의 손에서 끝나지 못했다.

완성본이 필요했던 쪽은 콘스탄체였습니다. 곡을 넘겨야 잔금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요. 백작이 자기 이름으로 이 곡을 발표하려던 계획은, 콘스탄체가 남편을 위한 자선 공연에 곡을 올리면서 어그러집니다. 그 뒤로 지금까지 나온 보완판만 열아홉 종이 넘고, 그중 열한 종은 2005년 이후에 만들어졌습니다. 레퀴엠이라는 곡의 이력 자체가 누가 어디까지 썼고 어디부터가 남의 손인지를 200년 동안 따져 온 기록이기도 합니다.

🎧 라크리모사를 들어 보면 현이 두 마디씩 흔들리며 올라가는 도입부가 먼저 들립니다. 모차르트의 필체는 여기서 딱 여덟 마디 만에 멈춥니다. 그다음부터 들리는 소리가 누구 것인지 생각하면서 들어 보세요.

콜레기움 무지쿰 베를린의 연주. 쥐스마이어가 아니라 오스트르지가(Michael Ostrzyga)가 새로 보완한 판본이라, 여덟 마디 뒤부터는 또 다른 사람의 손이다.

그러니 “병든 사람이 진혼곡을 쓰다 죽었다”는 정황은 사실이지만, “그가 이걸 자기 장송곡인 줄 알고 썼다”는 문장은 다른 층위의 말입니다. 정황은 의도가 아닙니다. 영화는 여기에 허구를 한 겹 더 얹었습니다. 살리에리가 죽음의 사자로 변장해 레퀴엠을 주문하고, 죽어 가는 모차르트에게서 악보를 받아 적는 장면 — 실제로는 없었던 일입니다.

해석을 하지 말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라크리모사의 그 여덟 마디에서 죽음의 예감을 느끼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감상이고, 음악을 듣는 큰 즐거움이기도 합니다. 다만 ‘내가 이렇게 느꼈다’와 ‘작곡가가 그렇게 의도했다’는 층위가 다릅니다. 느끼는 건 마음껏 해도 됩니다. 다만 그 감상을 사실로 옮겨 적을 때만 한 번 멈추면 돼요.

모차르트의 아들을 가르친 남자

독살설을 지우고 나면 살리에리라는 사람이 남습니다. 그는 서른일곱 편의 오페라를 무대에 올렸고, 36년 동안 빈 궁정의 음악을 총괄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오래 남은 것은 그의 교실이었습니다. 베토벤, 슈베르트, 리스트, 훔멜이 모두 그에게 배웠습니다. 어릴 때 고아가 된 자신을 거둬 준 스승 가스만의 은혜를 갚겠다며, 그는 형편이 넉넉한 제자에게만 수업료를 받았습니다.

그 제자 명단에는 프란츠 크사버 볼프강 모차르트도 있습니다. 아버지가 죽기 넉 달쯤 전에 태어난 모차르트의 막내아들입니다. 콘스탄체는 남편을 죽였다는 소문이 도는 사람에게 아들의 음악 교육을 맡겼습니다. 200년 뒤의 관객보다 당대의 미망인이 그 소문을 훨씬 가볍게 봤다는 뜻이에요.

그의 나머지 이력도 악당이라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멉니다. 1808년 3월 18일에는 하이든의 《천지창조》 공연을 지휘했고, 그날 객석에 있던 하이든이 쓰러진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1번과 2번이 처음 울릴 때 지휘대에 서 있던 사람도 살리에리였습니다. 20세기 말부터는 잊혔던 그의 음악을 다시 무대와 음반으로 불러내는 작업도 이어졌습니다. 2003년 메조소프라노 체칠리아 바르톨리가 살리에리의 아리아 열세 곡을 모아 음반으로 냈는데, 그중 대부분은 그때까지 한 번도 녹음된 적 없는 곡이었습니다. 이탈리아의 고향 레냐고에는 그의 이름을 딴 극장과 오페라 축제도 생겼습니다.

다시 1823년의 병실로 돌아가 봅니다. 그 방에서 노인이 무너진 이유는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30년 넘게 따라붙은 소문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살리에리는 죽을 때까지 그 소문을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20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이름은 대개 한 문장으로 요약됩니다. 모차르트를 죽인 남자. 남은 기록을 다 뒤져도 그 문장을 받쳐 줄 증거는 한 줄도 없습니다. 영화가 만든 모차르트의 이미지보다 본인이 남긴 1,100통의 편지에서 드러나는 모차르트의 모습이 실제 인물에 훨씬 가깝습니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한 게 사실인가요?

아닙니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주장을 받쳐 주는 증거는 지금까지 하나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모차르트를 진료한 의사 중 누구도 독을 언급하지 않았고, 증상도 당대에 알려진 독극물 중독과 맞지 않습니다. 수사도, 재판도, 부검도 없었습니다. 독살설은 사실이 아니라 후대의 희곡과 영화가 키운 이야기입니다.

그럼 살리에리가 자백했다는 이야기는 뭔가요?

1823년 11월, 일흔셋의 살리에리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실패하고 병원에 실려 간 뒤 정신이 흐려진 상태에서 했다는 말입니다. 정신이 맑을 때 그는 곧바로 부인했고, 병문안을 갔던 제자 모셸레스가 그 부인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를 돌보던 간병인들도 그런 고백을 들은 적이 없다고 확인해 주었습니다.

모차르트는 정확히 무슨 병으로 죽었나요?

확정된 병명은 없습니다. 부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교구 기록에 적힌 ‘급성 좁쌀열’은 병명이 아니라 여러 증상을 한꺼번에 가리킨 표현입니다. 2009년 역학 연구가 제시한 연쇄상구균 감염에 따른 급성 신장염 가설이 근래 널리 인용되지만, 류머티즘열·선모충증·경막하혈종 등 열다섯 가지가 넘는 진단이 여전히 경쟁하고 있습니다. 병으로 죽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정도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결론입니다.

그럼 두 사람은 사이가 좋았나요?

단순히 좋았다거나 나빴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모차르트는 1780년대 편지에서 살리에리가 자기 앞길을 막는다고 여러 번 불평했고, 궁정의 자리를 두고 실제로 경쟁했습니다. 동시에 두 사람은 1785년에 칸타타 한 편을 나눠 썼고, 살리에리는 궁정 음악감독이 되자 자기 신작 대신 《피가로의 결혼》을 다시 올렸으며, 모차르트는 죽기 일곱 주쯤 전에 살리에리를 자기 마차에 태워 《마술피리》에 데려갔습니다. 경쟁하는 동업자 관계로 보는 편이 사료에 가깝습니다.

영화 《아마데우스》는 얼마나 사실인가요?

1823년 살리에리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병원에 실려 갔다는 일은 기록으로 확인됩니다. 다만 신부 앞에서 고백을 시작하는 장면부터는 각색입니다. 원작자 피터 셰퍼 본인이 실존 인물을 재료로 삼은 환상곡이라고 밝혔습니다. 살리에리가 독을 쓰거나 죽음의 사자로 변장해 레퀴엠을 주문하는 설정, 빗속에 시신이 던져지는 장면은 사료와 어긋납니다. 영화의 뿌리는 1830년 푸시킨의 희곡입니다.

참고 자료

이어서 듣기 — 소문을 걷어낸 자리에 남는 음악

소문을 걷어내고 나면 결국 악보가 남습니다. 아래 다섯 편은 영화 속 모차르트가 아니라 작품으로 남은 모차르트를 만나는 길입니다. 각 글은 서로 다른 입구에서 그 음악으로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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