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차투리안 〈칼의 춤〉, 하룻밤에 쓴 곡이 작곡가를 삼켰다

1948년, 미국 팝차트와 소련의 낙인 사이

작곡가
아람 하차투리안
(Aram Khachaturian, 1903–1978)
곡명
〈칼의 춤〉 (발레 《가야네》 중)
(Sabre Dance, from Gayaneh)
작곡
1942년
위치
발레 《가야네》 4막, 결혼 축하 장면의 춤
편성
피콜로, 플루트, 오보에, 잉글리시 호른, 클라리넷, 베이스 클라리넷, 알토 색소폰, 바순, 호른, 트럼펫, 트롬본, 튜바, 팀파니, 작은북, 탬버린, 실로폰, 심벌즈, 첼레스타, 하프, 현5부
초연(발레 전곡)
1942년 12월 9일, 페름(당시 몰로토프)
키로프 발레단 / 니나 아니시모바 안무
연주 시간
약 2분 30초

이 곡은 — 하차투리안이 발레 《가야네》 끝자락에 급히 끼워 넣은 2분 30초짜리 춤곡입니다. 작곡가는 이 곡의 유명세에 자신의 다른 음악이 모두 가려졌다며 못마땅해했습니다.

두 대목을 골라 듣는다면 — 실로폰이 같은 리듬을 거듭 두드리는 도입부와 첼로·색소폰이 선율을 주고받는 중간의 느린 대목에 귀 기울여 보세요.

먼저 들어볼 음반 — 작곡가 본인이 빈 필하모닉을 지휘한 1962년 데카 녹음입니다.

아람 하차투리안은 1963년, 자신의 대표곡을 두고 “내 음악 가족의 말썽꾸러기”라고 불렀습니다. 심지어 이 곡이 이토록 유명해질 줄 알았다면 애초에 아예 쓰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털어놓기도 했거든요.

피겨스케이팅부터 서커스, 그리고 만화 속 추격 장면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닳고 닳도록 쓰인 이 2분 30초짜리 춤곡은, 사실 하차투리안이 요청을 받고 하룻밤 사이에 뚝딱 완성해 낸 작품이거든요. 훗날 그는 소련 당국이 끔찍이 아끼는 거장으로 대우받게 되지만, 그 화려한 이면에는 체제의 씁쓸한 비판 대상이 되어야 했던 굴곡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람 하차투리안, 1971년
1971년의 하차투리안. 당시에는 소련이 아끼는 거장이었지만, 23년 전에는 소련 당국이 그를 ‘형식주의자’로 몰았다.

제본공의 아들이 자란 소리의 도시

1903년, 오늘날 조지아의 수도인 트빌리시에서 아람 하차투리안이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예기아 하차투리안은 아르메니아에서 건너와 제본공으로 일했죠. 밤낮으로 책을 꿰매고 묶어 근근이 생계를 잇던 집안이었으니, 어린 아들에게 값비싼 음악 교사를 붙여 줄 형편 따위는 애초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식 교육을 받기 전의 하차투리안은 트빌리시의 거리를 교실 삼아 여러 민족의 음악을 들으며 오직 귀로만 음악을 익혀야 했습니다.

당시 트빌리시에는 아르메니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 조지아인이 왁자지껄하게 어울려 살았고, 골목마다 여러 언어로 부르는 노래가 끊임없이 흘러나왔거든요. 훗날 하차투리안은 자신이 “민속음악이 넘치는 공기 속에서 자랐다”고 회고했습니다. 악보라는 것을 배우기도 전부터 여러 민족의 펄떡이는 리듬과 선율을 온몸으로 접한 경험은 그의 음악적 감각에 깊은 영향을 주었죠. 결국 〈칼의 춤〉에서 터져 나오는 그 강렬한 리듬과 다채로운 음색 역시 이 시기의 다채로운 음악적 배경과 단단히 맞닿아 있는 셈입니다.

비록 조지아에서 태어나 러시아어로 교육을 받고 모스크바를 무대로 활동했지만, 하차투리안은 평생토록 아르메니아인이라는 굳건한 정체성을 놓지 않았습니다. 스스로를 가리켜 ‘유럽에 사는 아르메니아인’이라고 칭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그의 작품 속에는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레 스며든 캅카스(코카서스)의 이국적인 선율과 리듬이 러시아 교향악의 묵직한 작법과 절묘하게 어우러집니다. 하차투리안은 이렇게 전혀 다른 두 세계의 음악 전통을 결합해 세상에 없던 자신만의 짙은 색채를 완성해 냈습니다.

놀랍게도 하차투리안은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정식 음악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1921년 모스크바로 향한 뒤 대학에서 엉뚱하게도 생물학을 공부하는 한편, 그네신 음악학교에서 첼로를 켜며 뒤늦게 음악가의 길에 발을 들였죠. 이후 1929년 모스크바 음악원에 당당히 입학해 작곡가 니콜라이 미야스콥스키의 문하에서 작곡을 배웠고, 마침내 1934년에 졸업장을 거머쥐게 됩니다.

남들보다 한참 늦게 출발선을 떠났지만, 하차투리안은 무서운 속도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1936년에 완성한 피아노 협주곡이 유럽과 미국의 피아니스트들에게 연주되면서, 그의 이름은 서서히 소련 밖에도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거든요. 여세를 몰아 1940년에는 바이올린 협주곡을 발표해 덜컥 스탈린상까지 받아냅니다. 그러다 1942년, 전쟁의 불길을 피해 러시아의 페름이라는 낯선 도시에 머물며 본격적으로 발레 음악을 쓰기 시작했죠.

키로프 발레단은 전쟁을 피해 우랄산맥 기슭으로 피란했다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화려한 예술의 도시 레닌그라드마저 겹겹이 포위될 벼랑 끝에 내몰렸습니다. 결국 그곳에 자리 잡고 있던 키로프 발레단은 서둘러 짐을 꾸려 동쪽으로 피란길에 올랐고, 우랄산맥 서쪽 기슭의 페름에 간신히 짐을 풀었죠. 당시 이 도시는 소련의 유력 정치인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성을 그대로 따서 ‘몰로토프’라 불리고 있었습니다. 비록 폭격의 굉음에서는 멀리 떨어진 후방이었지만, 발레단은 그 척박한 곳에서도 묵묵히 공연을 이어 가며 기어이 새 작품들을 무대 위로 올렸습니다.

졸지에 피란민 신세가 된 단원들은 혹독하게 낯선 도시에서 겨울을 버텨야 했고, 턱없이 부족한 물자에 허덕여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소련 당국은 후방의 관객들에게 문화생활을 제공해 바닥에 떨어진 사기를 북돋우는 일을 꽤나 중요하게 여겼거든요. 덕분에 발레단은 살벌한 전쟁 통에도 춤추는 것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하차투리안의 《가야네》 역시 바로 이런 팍팍한 환경 속에서 화려한 군무와 한껏 낙관적인 결말을 무기로 삼아 무대의 막을 올리게 됩니다.

사실 이 발레는 하차투리안이 1939년에 썼던 전작 《행복》을 슬쩍 고쳐서 만든 작품으로, 대본은 콘스탄틴 데르자빈이 맡았습니다. 아르메니아의 집단농장에서 땀 흘려 일하는 여주인공 가야네가 배신한 남편을 막아서려다 그만 칼에 찔리지만 기적처럼 살아남고, 이후 듬직한 국경 수비대원과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는 내용이죠. 당시 소련 당국이 열렬히 장려하던 입맛에 딱 맞춘 이 이야기는, 집단농장과 애국심을 한껏 강조한 뒤 남녀의 사랑과 결혼이라는 완벽하게 낙관적인 결말로 낭만적인 마침표를 찍습니다.

이런 줄거리는 다분히 당시의 팍팍한 문화 정책과 관련이 있습니다. 1930~40년대 소련 예술은 이른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원칙 아래, 대중이 이해하기 쉽고 체제를 긍정하며 어떻게든 낙관적인 결말을 보여 주도록 끊임없이 요구받았거든요. 집단농장에서 배신자를 단숨에 물리친 뒤 사랑과 결혼으로 끝을 맺는 《가야네》의 대본은 당국의 이 깐깐한 입맛에 그야말로 찰떡같이 들어맞았습니다. 하지만 하차투리안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 발레를 두 번이나 다시 손봤습니다. 1952년과 1957년에 걸친 개작을 거치면서 노골적인 정치적 요소는 슬며시 줄어들고,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훌쩍 커지게 되죠.

20세기 초 페름 극장 건물 외관
전쟁을 피해 온 키로프 발레단이 《가야네》를 초연한 페름의 극장. 20세기 초에 촬영된 사진이다.

마침내 《가야네》는 1942년 12월 9일 페름에서 첫선을 보였고, 안무는 니나 아니시모바가 맡았습니다. 포화 속에서 탄생한 이 발레는 얼마 지나지 않아 덜컥 스탈린상까지 거머쥐었죠. 하지만 오늘날 한 시간이 훌쩍 넘는 이 방대한 전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진득하게 챙겨 듣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얄궂게도 작품 한구석에 끼어 있던 고작 2분 30초 길이의 춤곡 하나가 덩치 큰 발레 전곡보다 훨씬 거대한 명성을 누리게 되었으니까요.

《가야네》는 소련 안에서는 꾸준히 무대에 올랐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전곡이 고스란히 연주되는 일이 가뭄에 콩 나듯 드물었습니다. 뜬금없이 소련의 집단농장과 애국주의를 앞세운 대본이 해외 관객에게는 영 낯설게 다가왔고, 대규모 발레를 온전히 무대에 올리는 일 자체도 만만치 않았거든요. 그 대신 세계 곳곳의 관객들은 《가야네》를 이른바 ‘모음곡’ 형태로 접하게 되었고, 유독 튀는 칼의 춤 한 곡만을 이 작품의 대표 음악으로 강렬하게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추가 요청을 받고 하룻밤에 쓴 “쿠르드의 춤”

뒤에 전해지는 흥미로운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발레가 막바지 작업에 접어들어 거의 완성됐을 무렵, 극장 측이 다짜고짜 마지막 막에 화려하게 몰아치는 춤을 하나 더 넣어 달라고 떼를 쓴 겁니다. 당장 초연이 코앞으로 닥친 시점이었죠. 하차투리안은 당연히 불같이 짜증을 냈지만, 결국 투덜거리면서도 하룻밤 사이에 곡을 뚝딱 써냈다고 합니다.

애초에 발레의 마지막 막은 떠들썩하게 결혼을 축하하는 잔치로 꾸며집니다. 하차투리안이 쫓기듯 급히 완성한 이 칼의 춤은 여러 춤이 줄줄이 이어지는 가운데 혜성처럼 등장해 극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죠. 무용수들이 번쩍이는 칼을 휘두르며 빠르게 돌고, 2분 30초 동안 쉴 틈 없이 거세게 몰아치는 음악은 결혼 잔치의 흥을 순식간에 최고조로 끌어올립니다.

엉뚱하게도 이 곡에 처음 붙은 제목은 ‘칼의 춤’이 아니라 ‘쿠르드의 춤’이었습니다. 이후 무용수들이 살벌하게 칼을 들고 팽이처럼 도는 안무의 특징을 그대로 반영하면서 마침내 ‘칼의 춤’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졌죠. 우리가 오늘날 흔히 부르는 그 익숙한 제목은, 사실 음악 자체보다는 펄떡이는 무대 위 동작에서 툭 튀어나온 셈입니다.

비록 하룻밤 만에 후딱 완성했더라도, 곡의 뼈대가 되는 재료들까지 그날 밤 처음 번뜩이며 떠올린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이 압도적인 2분 30초 안에는 하차투리안이 어린 시절 트빌리시에서 자라며 귓가에 맴돌았던 여러 지역의 음악이 끈적하게 응축돼 있거든요. 오죽하면 음악학자들은 곡의 한가운데 대목에서 아르메니아 시라크 지방의 민속 춤가락까지 들을 수 있다고 설명할 정도입니다. 그저 머릿속에 오랫동안 쟁여 두었던 음악적 재료들을 짧은 시간 안에 단단한 한 곡으로 엮어 냈을 뿐이죠.

강렬한 ‘칼의 춤’은 단숨에 캅카스 지역에서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여러 전통 춤을 떠올리게 합니다. 실제로 이 지역의 춤 가운데에는 무용수가 진짜 칼을 손에 쥐고 빠르게 발을 구르거나, 몸을 격렬하게 휘돌리며 맹렬한 전사의 기상을 표현하는 춤도 존재하죠. 하차투리안은 바로 이 칼을 든 무용수의 숨 가쁜 회전과 힘찬 발놀림에 찰떡같이 어울리도록, 음악을 시종일관 거칠고 역동적으로 몰아붙입니다.

2분 30초 안에서 벌어지는 일

곡이 시작되자마자 실로폰 연주자가 무대 위에서 나무 음판을 채로 쉴 새 없이 두들기며 정신없이 빠른 리듬을 엮어 냅니다. 실로폰은 이처럼 나무 음판을 경쾌하게 두드려 소리를 내는 건반 타악기죠. 귀를 때리는 딱딱하고 메마른 음색의 리듬이 집요하게 반복되는 동안, 금관악기가 그 위에 서늘하고 날카로운 가락을 거침없이 얹습니다. 별달리 예열을 위한 서주도 없이, 처음부터 냅다 빠른 속도로 끝까지 밀어붙이는 파격적인 구성입니다.

웅장한 오케스트라에서 실로폰이 이처럼 대놓고 전면에 나서는 곡은 극히 드뭅니다.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에서 달그락거리는 해골의 춤을 묘사하듯, 원래 실로폰은 기괴하거나 독특한 장면을 표현할 때, 혹은 곡에 짧고 선명한 음색을 덧칠할 때 감초처럼 쓰이거든요. 하지만 하차투리안은 늘 구석에서 조연에 머물던 이 타악기를 과감하게 끄집어내어 곡의 첫인상을 뇌리에 강렬하게 새겨 버렸습니다.

곡 중간에 이르면, 쉴 새 없이 몰아치던 음악이 별안간 브레이크를 밟듯 속도를 늦춥니다. 이어 첼로와 알토 색소폰이 마치 노래를 부르듯 느릿한 선율을 번갈아 주고받죠. 사실 클래식 오케스트라에서 색소폰 소리를 듣는 일 자체가 흔치 않다 보니, 이 대목은 유독 낯설고 독특하게 다가옵니다. 묘하게 비음이 섞인 듯한 알토 색소폰의 음색을 듣고 있노라면, 아르메니아 전통 목관악기인 두둑이나 주르나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정도거든요. 하차투리안이 온갖 문화의 음악이 뒤섞인 트빌리시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이 묘한 음색을 그의 짙은 음악적 배경과 가만히 연결해 볼 수도 있습니다.

돌벽 앞에서 두둑을 연주하는 아르메니아 연주자
아르메니아 전통 목관악기 두둑. 칼의 춤의 가운데 대목에서 들리는 색소폰의 비음이 섞인 음색에서 이 악기를 떠올리는 이도 있다.

느린 대목이 스르르 지나가고 나면, 앞서 휘몰아치던 거센 리듬이 다시금 제자리를 찾습니다. 그리고 곡의 맨 마지막 몇 마디에 이르러서는 첼레스타가 반짝이는 음색을 살포시 얹죠. 첼레스타는 작은 건반을 누르면 내부의 금속판을 때려 영락없는 종소리를 내는 악기입니다. 2분 30초라는 짧은 시간 동안 빠르고 느린 대목을 숨 가쁘게 오가던 곡이, 뜻밖에도 이토록 여린 음색과 함께 끝을 맺는 셈입니다. 하차투리안은 곡이 끝나는 찰나의 순간까지 서로 다른 음색을 세심하게 저울질하며 극적인 대비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렇듯 빠른 부분 사이에 느긋한 대목을 샌드위치처럼 끼워 넣은 구조를 음악 용어로는 ‘세 도막 형식’이라고 부릅니다. 처음에 들었던 거센 리듬이 가운데에서 잠시 숨을 고르다 다시 폭발하듯 되돌아오기 때문에, 그 짤막한 곡 안에서도 서로 다른 두 부분의 뚜렷한 대비가 선명하게 살아나는 겁니다.

실로폰뿐만 아니라 작은북과 탬버린까지 가세해 쉴 새 없이 리듬을 밀어붙이거든요. 이 거친 음악에 맞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빠른 동작을 촘촘하게 이어 가야 하는 안무이다 보니, 무용수들은 불과 2분 30초라는 짧은 시간 안에도 상당한 체력과 기량을 모조리 쏟아내야만 합니다. 객석에서 듣는 음악은 마냥 경쾌하기 짝이 없지만, 정작 무대 위에서는 엄청난 에너지를 요구하는 강도 높은 춤사위가 벌어지고 있는 셈이죠.

미샤 라흘렙스키가 체임버 오케스트라 크렘린을 지휘한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홀 실황. 작은 편성에서도 실로폰 소리가 얼마나 선명하게 도드라지는지 잘 들린다.

🎧 가운데 대목에서는 — 몰아치던 리듬이 잠시 잦아들고 첼로와 색소폰이 느린 선율을 주고받습니다. ▶ 래틀과 베를린 필의 연주에서는 두 악기의 음색 대비를 들을 수 있습니다.

1948년 — 한 사람의 두 얼굴

1948년, 하차투리안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미국과 소련에서 전혀 딴판인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미국에서는 이 곡이 대대적으로 유행을 타면서 대중에게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거든요.

이 기묘한 유행은 1947년 말에 불씨가 당겨졌습니다. 피아니스트 오스카 리번트가 라디오 프로그램 《크래프트 뮤직 홀》에서 이 곡을 연주한 뒤, 미국 전역에서 걷잡을 수 없이 관심이 커져 버린 겁니다. 이듬해에는 그야말로 온갖 형태의 편곡이 쏟아져 나왔죠. 악보 판매 순위만 봐도 칼의 춤은 미국 11위, 캐나다 9위, 영국 14위라는 굵직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리번트의 피아노 버전을 시작으로 우디 허먼의 폭스트롯 편곡, 프레디 마틴의 ‘세이버 댄스 부기’, 심지어 앤드루스 시스터스가 가사를 붙여 부른 버전까지 줄줄이 차트에 오를 정도였으니까요. 급기야 《뉴스위크》는 그해를 아예 “하차투리안의 해”라고 부르기에 이르렀습니다.

얄궂게도 이 유행은 냉전의 긴장이 서서히 높아지던 시기와 정확히 겹쳤습니다. 1948년 미국과 소련은 베를린을 둘러싸고 정면으로 대립하기 시작했거든요. 두 나라를 쩍 가르는 정치적 경계가 그 어느 때보다 뚜렷해지는 동안에도, 정작 미국인들은 소련 작곡가가 만든 춤곡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러나 같은 해 소련에서 하차투리안은 정반대의 대우를 받았습니다. 1948년 2월 10일, 공산당은 안드레이 즈다노프가 주도한 결정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결정문은 하차투리안을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와 함께 ‘형식주의자’로 지목했습니다. 인민이 이해하기 어려운 부르주아 음악을 쓴다는 비판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형식주의’란, 인민을 위한 음악보다 작곡가의 기교를 앞세워 이해하기 어려운 음악을 쓴다는 비난이었습니다. 결국 그해 4월 열린 작곡가 대회에서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 하차투리안은 당의 비판을 받아들이고 공개적으로 잘못을 인정하는 글을 읽어야 했습니다. 1948년 한 해 동안 아람 하차투리안은 바다 건너 미국에서는 여러 편곡이 팝 차트에 오를 만큼 큰 인기를 얻었지만, 소련에서는 형식주의자로 규탄받는 엇갈린 처지가 되었습니다.

미국 대중은 이 곡 특유의 화려하고 이국적인 색채에 흠뻑 빠져들었습니다. 반면 소련 당국은 음악이 인민의 삶에서 멀어졌다는 이유로 하차투리안을 비롯한 작곡가들을 차갑게 규탄했죠. 똑같은 작곡가의 똑같은 음악을 두고, 바다 건너 미국에서는 대중의 뜨거운 환호가 쏟아진 반면, 정작 고국인 소련에서는 당이 들이민 이념적 잣대에 맞춰 서슬 퍼런 비판이 쏟아지는 기막힌 아이러니가 벌어진 셈입니다.

예레반 코미타스 판테온에 있는 하차투리안의 묘
예레반 코미타스 판테온의 하차투리안 묘. 조지아에서 태어나 모스크바에서 죽었지만, 아르메니아 땅에 묻혔다.

즈다노프는 그해 8월에 세상을 떠났지만, 지목된 작곡가들을 향한 공식 비판이 하루아침에 걷히지는 않았습니다. 소련 공산당은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인 1958년에야 새로운 결정문을 내놓으며 이들을 공식적으로 복권했습니다. 하차투리안은 무거운 비판을 받은 뒤에도 묵묵히 작곡 활동을 이어갔죠. 1954년 발레 《스파르타쿠스》를 위해 쓴 아다지오는 훗날 영국 드라마 《오네딘 라인》의 주제음악으로 쓰이며 다시 한번 대중의 귀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는 지휘자와 교사로도 오랫동안 활동을 이어 가다, 1978년 모스크바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말년의 하차투리안은 소련을 대표하는 굵직한 문화 인사로 활동했습니다. 세계 곳곳을 누비며 자신의 곡을 직접 지휘했는데, 어느 공연장을 가든 청중들은 으레 칼의 춤이 나오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곤 했죠. 1948년만 해도 ‘형식주의자’라며 매섭게 규탄받았던 그가, 20년 뒤에는 오히려 소련 당국이 해외에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간판 작곡가가 된 것입니다. 그토록 미워했던 2분 30초짜리 짧은 곡 역시, 전 세계 청중의 머릿속에 하차투리안이라는 이름 석 자를 가장 뚜렷하게 새겨 넣은 대표작으로 굳건히 남았습니다.

작곡가가 달가워하지 않은 히트곡

앞서 본 대중의 열광적인 반응과는 딴판으로, 정작 하차투리안 본인은 칼의 춤의 솟구치는 인기를 영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1963년 인터뷰에서는 대놓고 이 곡을 “내 음악 가족의 말썽꾸러기이자 버릇없는 아이”라고 부르기도 했죠. 너무 요란한 칼의 춤에 몽땅 가려지는 바람에, 자신이 공들여 쓴 다른 작품들이 응당 받아야 할 주목을 뺏기고 만다는 것이 그의 가장 큰 불만이었습니다.

그가 남긴 또 다른 비유를 보면 속을 끓였던 흔적이 한층 선명하게 묻어납니다. 하차투리안에게 칼의 춤이란 그저 셔츠에 달린 수많은 단추 중 하나에 불과했고, 그 셔츠에는 번듯한 다른 단추도 얼마든지 많았거든요. 바이올린 협주곡이나 《스파르타쿠스》, 《가면무도회》 모음곡 같은 굵직한 뼈대의 작품들을 제쳐두고, 고작 2분 30초짜리 칼의 춤 하나가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독식하는 얄궂은 현실을 날카롭게 꼬집은 셈입니다.

억울할 만도 한 것이, 《가면무도회》 모음곡의 왈츠 역시 칼의 춤의 짙은 그늘에 가려 국외에서는 덜 알려진 훌륭한 작품 중 하나입니다. 이 곡은 러시아 안에서는 두루 사랑받는 명곡이지만, 유독 서방 세계로만 넘어가면 칼의 춤만큼의 널찍한 대중적 인지도를 얻지 못했죠. 하차투리안이 평생에 걸쳐 그토록 다채로운 작품을 쏟아냈음에도, 국제적인 대중문화의 쏠린 시선은 오로지 빠르고 강렬한 칼의 춤 하나에만 고정되고 말았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발레 《가야네》 안에 칼의 춤 말고도 은근히 대중의 귀에 익숙한 음악이 또 숨어 있다는 점입니다. 영화감독 스탠리 큐브릭은 느린 악곡인 ‘아다지오’를 명작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에 고스란히 가져다 썼거든요. 끝없는 목성으로 홀로 향하는 우주선의 적막한 장면에 묵직하게 깔리는 곡이 다름 아닌 《가야네》의 한 대목입니다. 결국 한 지붕 아래 같은 발레에서 태어난 두 곡인데, 빠르고 격렬한 칼의 춤은 그 자체로 펄떡이는 독립된 춤곡으로, 느리고 고요한 아다지오는 영화의 시각적인 장면을 딛고서 나란히 세계의 청중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하차투리안의 이름을 세계에 널리 알린 것은 다름 아닌 이 말썽꾸러기 같은 곡이었습니다. 발레 《가야네》 전곡은 까맣게 모르는 사람조차 칼의 춤의 선율만큼은 단번에 알아볼 정도로 퍼져 나갔으니까요. 작곡가 본인은 끝내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그의 사후에도 이 곡이 끈질기게 연주되면서 새로운 청중들은 어김없이 칼의 춤을 통해 하차투리안의 이름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칼의 춤의 두 번째 인생

1948년에 몰아친 거대한 히트는 그야말로 서막에 불과했습니다. 이후 내로라하는 연주자들과 영화감독, 심지어 스포츠계까지 가세해 이 곡을 저마다의 입맛에 맞춰 요리조리 활용하기 시작했고, 칼의 춤이 뛰노는 무대는 점잖은 콘서트홀 밖으로 끝없이 넓어졌죠.

가령 1968년, 영국의 록 밴드 러브 스컬프처는 칼의 춤을 숨 넘어갈 듯 빠른 전기기타 연주로 솜씨 좋게 편곡해 발표했고, 이 음반은 단숨에 영국 차트 5위까지 치고 올라갔습니다. 이들은 원곡이 뿜어내던 거침없는 속도감을 고스란히 팽팽한 전기기타 줄 위로 옮겨 와서, 정갈한 클래식 소품을 순식간에 환각적인 사이키델릭 록으로 탈바꿈시키는 묘기를 부렸습니다.

러브 스컬프처가 1968년에 낸 전기기타 버전. 데이브 에드먼즈의 기타가 실로폰 자리를 대신한다.

영화계 역시 이 곡의 숨 막히는 속도감을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빌리 와일더 감독은 냉전을 신랄하게 풍자한 코미디 《하나, 둘, 셋》(1961)의 그 정신없는 도입부에다 대놓고 칼의 춤을 깔아버렸죠. 코엔 형제의 《허드서커 대리인》(1994)에서는 아이가 난생처음 훌라후프를 맹렬하게 돌리는 장면에 바로 이 곡이 울려 퍼집니다. 두 영화 모두 스크린 위를 미친 듯이 질주하는 화면에 칼의 춤 특유의 속도와 펄떡이는 리듬을 기가 막히게 엮어 낸 셈입니다.

땀내 나는 스포츠계라고 이 곡이 뿜어내는 속도감과 긴박한 분위기를 놓칠 리 없었죠. 미국 아이스하키 팀 버펄로 세이버스는 팀 이름이 대놓고 ‘칼(sabre)’이라는 점에 착안해, 아예 곡 제목을 끌어와 든든한 응원 음악처럼 틀어 댑니다.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개막식 무대에서도 어김없이 칼의 춤이 울려 퍼졌고, 피겨스케이팅 선수 스콧 해밀턴, 미셸 콴, 예브게니 플루셴코 역시 이 곡에 맞춰 빙판 위를 날렵하게 누볐습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빠른 동작을 돋보이게 하는 리듬 덕분에, 서커스의 아슬아슬한 접시돌리기 곡예나 소련 애니메이션의 아찔한 추격 장면에도 이보다 찰떡일 수 없었거든요. 하차투리안이 생전에 칼의 춤의 치솟는 인기를 그저 옷에 달린 단추 하나에 빗대며 툴툴거렸던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어느새 칼의 춤은 대중문화 전반에서 빠르고 분주한 상황을 알리는 전용 알람 음악처럼 굳건히 자리 잡았습니다. 화면 전개가 급격히 빨라지거나 누군가 혼비백산하여 움직이는 장면에 이 곡을 슬쩍 얹기만 하면, 굳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짧은 시간 안에 숨 막히는 속도와 긴박감을 거뜬히 자아낼 수 있거든요. 이쯤 되면 곡의 진짜 제목은 까맣게 모르더라도, 대중들에게는 그저 ‘그 정신없는 클래식’이라는 강렬한 인상 하나만큼은 단단히 박혀버린 셈입니다.

곡이 이토록 널리 쓰이게 된 데에는 그 얄미울 정도로 짧은 길이도 한몫을 단단히 했습니다. 딱 2분 30초 안팎이다 보니 방송에서 곡 전체를 통째로 틀기에도 만만하고, 광고나 예능, 스포츠 중계 등에서는 엑기스만 쏙 뽑아 필요한 장면에 덧입히기에도 그만이거든요. 덩치 큰 교향곡이라면 여러 악장을 헤집으며 쓸만한 대목을 애써 도려내야겠지만, 칼의 춤은 처음부터 끝까지 숨 가쁜 흐름을 팽팽하게 유지한 채 그 자체로 군더더기 없이 완결됩니다. 결국 발레의 한 장면을 위해 꽉꽉 압축해 놓은 구성이, 눈코 뜰 새 없이 돌아가는 방송 시대의 짧은 호흡과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진 겁니다.

정작 곡의 주인인 작곡가는 이 압도적인 인기를 그토록 껄끄러워했지만, 결국 칼의 춤은 그의 이름 석 자를 세계 곳곳에 쩌렁쩌렁하게 알린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습니다. 등 떠밀려 하룻밤 만에 후딱 써 내려간 2분 30초짜리 춤곡이, 그가 공들인 묵직한 협주곡이나 교향곡보다 훨씬 짧고 리듬마저 선명했던 탓에 대중문화의 온갖 장면에 물찬 제비처럼 스며들었으니까요. 작곡가 본인이 가장 뒷전에 두었던 곡이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을 가장 널리 휩쓸어 버렸으니, 이보다 더 얄궂은 운명도 없을 겁니다.

💡 사실은요 — 칼의 춤은 발레 《가야네》가 거의 완성됐을 때 극장의 요청을 받아 급히 덧붙인 춤입니다. 원래 제목도 ‘칼의 춤’이 아니라 ‘쿠르드의 춤’이었으며, 지금의 이름은 무용수들이 칼을 들고 추는 안무에서 나왔습니다.

악보와 함께 듣기

총보가 화면에 함께 흐르는 영상. 실로폰이 언제 연주를 멈추고 색소폰이 어디서 들어오는지 눈으로 따라갈 수 있다.

하차투리안의 작품은 아직 짱짱하게 저작권 보호 기간을 지나고 있어서, IMSLP 같은 무료 악보 도서관을 샅샅이 뒤져봐도 번듯한 총보를 내려받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닙니다. 당장 책상 위에 총보를 쫙 펼쳐 놓고 볼 수 없는 노릇이라면, 아쉬운 대로 위 영상을 슬쩍 활용해 보는 것도 꽤 괜찮은 방법이죠. 고작 2분 30초짜리 짧은 곡 안에서 그 많은 악기들이 대체 어떻게 쉴 새 없이 연주를 치고받는지, 두 눈과 귀로 똑똑히 확인해 볼 수 있거든요.

어떤 연주로 시작할까

달랑 칼의 춤 하나만 쏙 뽑아 담은 소품집도 시중에 널렸지만, 사실 이 곡은 제집인 발레 《가야네》와 한 호흡으로 묶어 들을 때 비로소 잃어버렸던 앞뒤 맥락이 쫀쫀하게 살아납니다. 여기서는 딱 세 장의 음반을 골라봤습니다. 불만에 차 있던 작곡가 본인이 기어이 직접 지휘봉을 든 음반부터, 웅장한 발레 전곡을 꽉 채워 담은 음반, 그리고 그 거센 리듬을 전기기타로 사정없이 긁어 댄 록 버전까지 말이죠.

👑 첫 감상 추천

아람 하차투리안 · 빈 필하모닉

데카(Decca) · 1962년 녹음

작곡가가 직접 지휘해 어느 대목을 강조했는지 또렷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다만 빈 필의 매끈한 소리가 이 야성적인 곡에는 오히려 점잖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레퍼런스

로리스 체크나보리안 · 내셔널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RCA · 1977년 발매

칼의 춤만이 아니라 발레 《가야네》 전곡을 담아, 2분 30초짜리 이 곡이 작품 전체에서 어느 대목에 놓이는지 앞뒤의 음악과 함께 들을 수 있습니다. 칼의 춤 한 곡만 빨리 듣고 싶은 분에게는 길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와일드카드

러브 스컬프처 (Love Sculpture)

팔로폰(Parlophone) · 1968년

영국 록 밴드가 원곡을 전기기타 중심의 록 음악으로 과감하게 바꾼 버전입니다. 원곡의 빠른 리듬이 록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선명하게 들려줍니다. 다만 오케스트라 원곡의 색채를 기대하면 당황스러울 수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하차투리안 〈칼의 춤〉은 어떤 곡인가요?

아람 하차투리안이 1942년 발레 《가야네》의 4막 결혼 축하 장면을 위해 쓴 약 2분 30초짜리 춤곡입니다. 발레가 거의 완성된 뒤 극장의 요청을 받아 급히 덧붙였으며, 원래 제목은 ‘쿠르드의 춤’이었습니다. 실로폰이 이끄는 빠른 리듬과 가운데 대목에서 흐르는 느린 색소폰 선율이 특징입니다.

하차투리안은 왜 이 곡을 싫어했나요?

〈칼의 춤〉의 유명세에 가려 자신의 다른 작품들이 충분한 관심을 받지 못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1963년 인터뷰에서 그는 칼의 춤을 “음악 가족의 말썽꾸러기”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유명해질 줄 알았다면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으며, 자신의 셔츠에 달린 단추 하나일 뿐인데 세상은 그 단추만 기억한다고도 말했습니다. 바이올린 협주곡이나 《스파르타쿠스》 같은 작품보다 칼의 춤만 널리 알려진 상황을 아쉬워한 것입니다.

가운데 대목에서 들리는 낯선 악기는 무엇인가요?

느린 가운데 대목에서는 첼로와 알토 색소폰이 선율을 주고받습니다. 색소폰은 클래식 오케스트라에서 흔히 쓰이지 않기 때문에 이 대목의 음색이 유난히 낯설게 들립니다. 콧소리가 섞인 듯한 색소폰의 음색은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연주되는 전통 목관악기 두둑이나 주르나를 떠올리게 합니다.

칼의 춤이 1948년 미국 팝 차트에 올랐다는 게 사실인가요?

사실입니다. 1948년 미국에서 칼의 춤은 악보 판매 순위 11위에 올랐고, 오스카 리번트의 피아노 버전과 우디 허먼·프레디 마틴의 편곡 음원도 잇따라 차트에 진입했습니다. 《뉴스위크》는 그해를 “하차투리안의 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소련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소련 당국은 즈다노프 결정을 통해 대중과 동떨어진 음악을 가리킨다는 명목으로 ‘형식주의’를 비판했고, 하차투리안도 그 대상이 되었습니다.

칼의 춤을 처음 들을 때 어떤 음반이 좋나요?

처음 듣는다면 작곡가 본인이 빈 필하모닉을 지휘한 1962년 데카 녹음이 무난한 출발점입니다. 칼의 춤이 발레의 어느 장면에 나오며 앞뒤 음악과 어떻게 이어지는지 듣고 싶다면, 로리스 체크나보리안이 지휘한 《가야네》 전곡 녹음(RCA)을 권합니다. 러브 스컬프처가 원곡을 록 음악으로 편곡한 1968년 버전도 색다른 재미를 줍니다.

참고 자료

이어서 듣기 — 리듬과 색채로 객석을 흔든 곡들

결국 칼의 춤의 진짜 매력은 숨 쉴 틈 없이 거세게 몰아치는 리듬과 귀를 사로잡는 화려한 음색에 있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오케스트라가 작정하고 쏟아 내는 묵직하고 강렬한 에너지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면, 아래에 덧붙인 다섯 곡도 꽤 흥미로운 선택지가 될 겁니다. 앞선 두 곡은 태생부터 발레를 위해 빚어진 음악이고, 뒤에 이어지는 세 곡은 심장을 뛰게 하는 리듬과 관현악의 오색찬란한 음색이 그야말로 일품인 작품들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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