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곡가
- 요하네스 브람스
(Johannes Brahms, 1833–1897) - 곡명
-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이중 협주곡 a단조, 작품번호 102
(Konzert für Violine und Violoncello a-Moll op. 102) - 작곡
- 1887년 (스위스 툰 호숫가)
- 초연
- 1887년 10월 18일, 쾰른 귀르체니히
브람스 지휘 · 요제프 요아힘(바이올린) · 로베르트 하우스만(첼로) - 편성
- 독주 바이올린, 독주 첼로
플루트 2, 오보에 2, 클라리넷 2, 바순 2
호른 4, 트럼펫 2, 팀파니, 현5부 - 악장
- 3악장
I. Allegro (a단조)
II. Andante (D장조)
III. Vivace non troppo (a단조 → A장조) - 연주 시간
- 약 33분
친구에게 보낸 편지가 거절당하자, 브람스는 악보로 쳐들어갔다
화해하고 싶을 때 보통은 편지를 씁니다. 브람스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편지가 30년 우정을 더 깊은 골로 밀어넣었거든요. 그래서 그는 전혀 다른 방법을 택합니다. 바이올린과 첼로가 동시에 주역이 되는 협주곡을 써버린 겁니다. 함께 무대에 서지 않으면 곡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구조로요.
바이올린 파트는 멀어진 벗 요제프 요아힘에게 맡겼습니다. 요아힘이 이 곡을 연주한다는 것은, 곧 브람스의 화해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뜻이었죠. 거절하려면 무대 자체를 거절해야 했습니다. 말하자면 이 곡은 음표로 쓴 화해 청구서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대체 무엇 때문에, 어쩌다 등을 돌렸던 걸까요?

관현악을 끝낸 줄 알았던 남자가 다시 펜을 든 이유
1887년 여름, 스위스 툰 호숫가입니다. 쉰넷의 브람스는 2년 전 교향곡 4번을 끝으로 큰 관현악곡에서 손을 뗀 듯 보였습니다. 실제로 그는 큰 형식 앞에서 점점 말을 아끼고 있었죠. 그런데 그 여름, 책상 위에 다시 오케스트라 총보가 펼쳐집니다.
그를 다시 끌어낸 건 새로운 악상이 아니었습니다. 한 사람과의 끊어진 인연이었어요. 스무 살 무렵부터 30년 넘게 가장 가까운 음악적 동료였던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 두 사람 사이에는 몇 해째 차가운 침묵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중 협주곡은 그 침묵을 깨려는 음악적 손짓이었습니다. 바이올린과 첼로를 대등한 두 주인공으로 세우는, 당시로서는 거의 전례가 없던 편성이었거든요. 브람스가 이 파격을 택한 진짜 이유는 화성학이 아니라 우정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곡을 제대로 들으려면, 먼저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나 어떻게 멀어졌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스물둘의 거장이 무명 청년을 알아본 날
1853년, 함부르크 출신의 무명 청년 브람스가 하노버를 찾아갑니다. 당시 스물두 살의 요아힘은 이미 유럽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죠. 그런 그가 풋내기 브람스의 초기 작품을 듣고는, 단번에 그 재능을 알아봤습니다.
요아힘의 소개로 브람스는 뒤셀도르프의 슈만 부부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로베르트 슈만이 〈새로운 길(Neue Bahnen)〉이라는 글에서 이 무명 청년을 “장차 시대를 짊어질 인물”로 공개 추천하면서, 브람스의 음악 인생이 활짝 열렸죠. 다시 말해, 브람스를 세상에 끄집어낸 첫 손이 바로 요아힘의 손이었던 겁니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가장 믿을 만한 귀가 되어 줍니다. 브람스는 새 곡을 쓸 때마다 요아힘에게 악보를 보내 의견을 구했고, 요아힘은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1878)을 비롯한 여러 작품의 초연을 도맡았죠.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의 독주 파트가 그토록 바이올린의 생리에 꼭 맞는 것도, 요아힘의 깐깐한 조언이 줄줄이 반영된 결과거든요.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는 수백 통에 이릅니다. 작곡 기법부터 시시콜콜한 일상까지, 안 다룬 주제가 없었어요. 요아힘은 현악기 주법의 세부를 일러 주었고, 브람스는 요아힘의 작곡에 가차 없는 비평을 돌려주었습니다. 연주자와 작곡가의 협업을 넘어, 서로의 음악적 판단을 통째로 신뢰하던 사이였던 거죠.
당시 요아힘이 어떤 위치였는지도 짚어 둘 만합니다. 그는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을 거의 묻혀 있던 곡에서 레퍼토리의 정점으로 끌어올린 장본인이었고, 자신의 이름을 딴 요아힘 사중주단을 이끌며 베를린 음악대학을 좌지우지한 인물이었어요. 19세기 후반 독일어권 음악계에서 그의 한마디는 곧 권위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일찌감치 브람스의 편이 되어 주었으니, 브람스에게 요아힘은 친구이자 든든한 후견인이기도 했던 셈이죠.

편지 한 통이 우정을 두 동강 냈다
금이 가기 시작한 건 요아힘의 결혼 생활 때문이었습니다. 1880년 무렵, 요아힘은 아내 아말리에가 출판업자 프리츠 지몬트와 부정한 관계라고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아말리에 요아힘은 당대 손꼽히던 콘트랄토 가수였고, 브람스와도 오래 음악적으로 교류해 온 사이였죠. 브람스가 보기에 그 의심은 근거가 빈약했습니다.
그래서 브람스는 1880년, 아말리에에게 편지를 한 통 보냅니다. 당신의 인품을 늘 존경해 왔으며 그런 의심을 믿지 않는다는 내용이었어요. 친구를 위로하려는 사적인 편지였지, 법정에 낼 생각으로 쓴 글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일이 꼬이기 시작합니다.

1883년, 요아힘은 결국 이혼 소송을 제기합니다. 그러자 아말리에는 자신의 결백을 입증할 인품 증거로 브람스의 그 편지를 법정에 제출했죠. 친구의 남편이 자신을 의심하는 마당에, 그 친구가 쓴 편지가 상대 진영의 증거로 등장한 겁니다. 요아힘 입장에서는 가장 믿었던 벗이 법정에서 등을 돌린 꼴이었으니, 그 배신감이 어땠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요아힘이 특히 견디기 힘들었던 건 편지의 내용이었습니다. 브람스는 그 편지에서 요아힘의 의심을 “격정적이고 의심 많은 기질”의 산물로 에둘러 표현했거든요. 아내의 부정을 입증하려던 요아힘에게는, 정작 자신이 질투에 눈먼 사람으로 그려진 문장이 법정에 떡하니 놓인 꼴이었습니다. 곡을 향한 비평이라면 얼마든지 받아들이던 사이였지만, 인격에 대한 이 한 줄만큼은 달랐던 모양입니다.
1884년, 두 사람은 결국 갈라섭니다. 21년을 이어 온 결혼이 그렇게 막을 내린 거죠. 그런데 정작 요아힘은 아내의 부정을 끝내 입증하지 못했습니다. 브람스의 그 편지가 결정적으로 발목을 잡았거든요. 어쩌면 부부의 파국보다 더 깊이 패인 상처는 30년 우정 쪽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두 남자는 연주회장에서 마주쳐도 형식적인 목례만 주고받았고, 그 많던 편지도 뚝 끊겼습니다. 음악으로 가장 가까웠던 벗을 잃은 채 여러 해가 흘러갔어요.
왜 하필 ‘이중’ 협주곡이었나 — 거절할 수 없게 만든 설계
1887년, 브람스는 클라라 슈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속내를 털어놓습니다. 요아힘과 화해하기 위한 곡을 구상 중인데, 이런 곡을 정말 써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요. 그럴 만도 했습니다. 베토벤의 삼중 협주곡 이후로, 둘 이상의 독주 악기를 내세운 관현악 협주곡은 사실상 맥이 끊긴 형식이었거든요.
참고할 선례라곤 그 베토벤 삼중 협주곡 정도였는데, 이 곡은 평판이 그리 좋은 편도 아니었습니다. 세 독주자를 한꺼번에 다루느라 어딘가 헐거워졌다는 평이 따라다녔으니까요. 브람스로서는 “전례도 거의 없고, 있는 전례마저 미덥지 않은” 형식에 제 발로 뛰어든 셈입니다. 더구나 그는 완벽주의로 악명 높아, 마음에 차지 않는 원고는 가차 없이 불태우던 사람이었죠. 그런 그가 위험을 무릅쓴 이유는 단 하나, 이 형식이 아니고서는 ‘두 사람의 화해’를 음악으로 담아낼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흔히 이 곡을 ‘우정의 협주곡’이라는 따뜻한 말로 부릅니다. 그런데 한 꺼풀 벗겨 보면, 이건 꽤 영리한 압박이기도 했습니다. 브람스는 굳이 바이올린 독주 협주곡을 또 쓰지 않았어요. 그건 이미 1878년에 요아힘을 위해 써둔 터였으니까요. 대신 첼로를 대등한 파트너로 끌어들여, 이 곡을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나누는 대화’로 설계했습니다.
핵심은 이 구조 자체가 화해를 강제한다는 데 있습니다. 바이올린 파트의 주인은 누가 봐도 요아힘이었습니다. 그가 거절하면 곡은 무대에 오를 수 없고, 받아들이면 화해는 기정사실이 되죠. 브람스는 “싫으면 말고”가 아니라, “이 무대에 같이 서 줘”라고 음표로 못박은 셈입니다. 화해를 청하는 가장 브람스다운 방식이라 해야 할까요.
첼로 파트의 초연은 로베르트 하우스만이 맡았습니다. 하우스만은 요아힘 현악 사중주단의 첼리스트로, 브람스·요아힘 양쪽 모두와 가까웠던 인물이었죠. 한쪽으로도, 다른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중재자가 무대 한복판에 함께 선 겁니다. 브람스의 첼로 소나타 2번 역시 이 무렵 하우스만을 위해 쓰인 곡이니, 두 사람의 음악적 호흡도 마침 무르익어 있었고요.

작곡 도중 브람스는 요아힘에게 악보 일부를 미리 보내 의견을 물었습니다. 단순한 기술 자문이 아니었어요. 예전처럼 다시 음악으로 대화하자는 신호였던 거죠. 요아힘이 그 손짓에 응하면서, 두 사람의 왕래는 자연스럽게 되살아납니다. 곡이 완성되기도 전에, 작곡 과정 그 자체가 이미 화해의 절반을 해치운 셈이었습니다.
화해의 결정적 장면은 무대 위가 아니라 그 전에 찾아왔습니다. 1887년 9월, 쾰른 공개 초연에 앞서 바덴바덴에서 요아힘과 하우스만, 그리고 피아노 앞의 브람스가 이 곡을 비공개로 먼저 맞춰 봤거든요. 그 자리에는 클라라 슈만도 함께였습니다. 6년 넘게 데면데면하던 두 사람이 한 악보를 펼쳐 놓고 다시 호흡을 맞추는 풍경을, 클라라는 흐뭇하게 지켜보았다고 전해집니다. 곡이 정식으로 울려 퍼지기 전에, 음악은 이미 제 할 일을 끝낸 뒤였던 거죠.
악장 속으로 — 두 목소리가 끝내 한 노래가 되기까지
1악장 Allegro — 누가 먼저 말을 꺼낼 것인가
관현악이 a단조의 단호한 도입부를 던집니다. 그런데 관현악이 채 자리를 잡기도 전에 음악이 뚝 멈추고, 첼로가 길고 묵직한 독주로 치고 들어오죠. 이 첼로 독주는 기교 자랑이 아닙니다. 관현악이 흘린 주제의 파편들을 더듬어 가며 제 목소리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에요. 오페라에서 한 인물이 무대에 처음 나와 자기를 소개하는 장면을 떠올리면 딱 맞습니다.
첼로의 말이 끝나면 이번엔 바이올린이 끼어듭니다. 첼로가 더듬던 주제를 받아 제 방식으로 다시 빚어내죠. 두 악기가 각자 충분히 자기를 드러낸 뒤에야, 비로소 관현악과 합세해 본격적인 소나타 형식이 시작됩니다. 독주자가 관현악의 긴 제시부를 다 듣고 나서야 등장하는 전통적인 협주곡과 견주면, 출발선부터 파격입니다.
이 악장에서 가장 눈여겨볼 대목은 두 독주자의 관계입니다. 바이올린과 첼로는 서로 반주해 주지 않아요. 한쪽이 노래하면 다른 쪽은 대위법으로 응수하거나, 3도·6도로 나란히 붙어 함께 움직입니다. 한 사람이 말할 때 다른 사람이 잠자코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동시에 대화에 끼어드는 형국이죠. 브람스가 이 곡에 담고 싶었던 ‘대등한 두 사람’이라는 그림이, 바로 여기서 가장 또렷하게 드러납니다.
2악장 Andante — 두 사람이 같은 선율을 부르는 순간
D장조로 옮겨 가면서 공기가 통째로 바뀝니다. 호른이 먼저 조용히 주제를 꺼내고, 목관이 그 뒤를 받죠. 브람스 특유의 따뜻하면서도 안으로 가라앉는 선율입니다. 화성을 일부러 복잡하게 꼬지 않아서, 선율 그 자체의 아름다움에 온전히 귀가 쏠려요.
두 독주 악기는 이 주제를 받아 서로를 감싸듯 노래합니다. 첼로가 먼저 선율을 시작하면 바이올린이 한 옥타브 위에서 이어받고, 이윽고 두 악기가 같은 선율을 옥타브 간격으로 동시에 부르는 순간이 찾아오죠. 갈등과 화해를 지나온 두 사람의 마음이 음악에 비친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절로 드는 대목입니다.
8분 남짓의 짧은 악장입니다. 하지만 이 곡에서 가장 깊은 감정의 골은 바로 여기 고여 있어요. 화려한 기교보다 내밀한 감정의 교환에 무게를 싣는, 브람스 만년의 태도가 고스란히 응축돼 있거든요. 중간부에서 두 독주 악기가 관현악을 다 물리고 오직 둘만의 듀엣으로 노래하는 구간은, 꼭 한 번 귀를 기울여 보시길 권합니다.
3악장 Vivace non troppo — 헝가리풍 춤으로 건넨 인사
헝가리 집시 음악의 색채가 짙은 론도 피날레입니다. 요아힘은 지금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접경에 있는 키체에서 태어났고, 〈헝가리 양식의 협주곡〉을 직접 쓰기도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악장의 들썩이는 춤 리듬은 요아힘을 향한 브람스의 다정한 오마주로 읽힙니다. 〈헝가리 무곡집〉을 쓴 브람스에게도 익숙한 어법이었으니, 두 사람이 공유한 공통 언어로 마지막 인사를 건넨 셈이고요.
a단조로 출발하지만, 론도 주제는 돌아올 때마다 표정을 슬쩍슬쩍 바꿉니다. 두 독주자가 빠른 패시지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에너지를 쌓아 올리는 구간이 여러 번 나오는데요, 여기서는 두 사람의 호흡이 그야말로 생명입니다. 한 박자만 어긋나도 긴장이 풀려버리거든요.
마지막 코다에서 a단조가 A장조로 환하게 바뀌며 곡이 닫힙니다. 어두운 단조에서 밝은 장조로 건너가는 이 종결은 브람스가 즐겨 쓰던 방식이지만, 이 곡에서만큼은 그 의미가 각별하지요. 긴장된 출발에서 환한 결말로 향하는 이 여정이, 갈등에서 화해로 걸어간 두 사람의 이야기를 음악으로 요약하는 듯하니까요.
알고 듣든 모르고 듣든, 마지막 장조의 빛은 분명 따뜻합니다. 다만 그 뒤에 깔린 사연을 알고 나면, 같은 마디가 사뭇 다르게 들리거든요. 단순히 곡이 밝게 끝났다가 아니라, 두 사람이 끝내 화해했구나 하는 안도로요. 음악이 줄거리를 또박또박 설명해 주지 않아도, 듣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이야기가 완성되는 순간입니다.
초연, 그리고 엇갈린 평가
1887년 10월 18일, 쾰른의 귀르체니히 홀에서 초연이 열렸습니다. 브람스가 직접 지휘봉을 잡았고, 요아힘이 바이올린을, 하우스만이 첼로를 맡았죠. 그해 말까지 바덴바덴과 바젤 등지에서 추가 연주가 이어졌습니다.
비평가들의 반응은 갈렸습니다. 클라라 슈만조차 이 곡에서 협주곡다운 화려함이나 생기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며 아쉬움을 적었거든요. 지휘자 한스 폰 뷜로도 처음엔 미적지근했습니다. 두 독주 악기가 화려한 기교를 뽐내기보다 실내악처럼 촘촘히 얽히는 구성이, 당시 청중이 기대하던 ‘협주곡’의 그림과 어긋났기 때문이죠. 브람스 자신도 이 점을 의식했는지, 클라라에게 “이건 좀 재미 삼아 해본 장난”이라며 짐짓 몸을 낮추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노렸던 목표, 화해는 완벽하게 달성됩니다. 초연을 계기로 요아힘과 브람스의 사이는 회복되었고, 두 사람은 1897년 브람스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다시 절친한 벗으로 지냈죠. 요아힘은 브람스가 떠난 뒤에도 이 곡을 여러 차례 무대에 올리며 옛 친구를 기렸습니다. 음악이 사람 사이의 골을 메울 수 있다면, 이 곡이야말로 그 증거가 아닐까요.
곡의 본격적인 재평가는 20세기에 들어서야 이뤄졌습니다. 오이스트라흐와 로스트로포비치 같은 거장들이 이 곡을 녹음하면서 협주곡 레퍼토리의 중심으로 들어왔고, 오늘날에는 브람스의 관현악 작품 가운데서도 가장 사적이고 독특한 걸작으로 꼽히죠.
왜 이중 협주곡은 그토록 드문가
베토벤의 삼중 협주곡(1804) 이후, 둘 이상의 독주자를 내세운 관현악 협주곡은 주류 레퍼토리에서 거의 자취를 감췄습니다. 바로크의 합주 협주곡(콘체르토 그로소)에서는 여러 독주자가 흔했지만, 고전·낭만으로 넘어오면서 무대의 주인공은 단 한 명의 독주자로 좁혀졌거든요.
이유는 현실적이면서 동시에 음악적입니다. 정상급 독주자 두 명을 한 무대에 세우고 리허설 일정까지 맞추는 일부터가 만만치 않죠. 게다가 두 독주 악기와 관현악이라는 세 축의 균형을 맞추는 건 작곡 기술의 난제예요. 한쪽 독주자가 도드라지면 다른 쪽이 묻히고, 둘 다 돋보이게 하려다 보면 관현악이 단순 반주로 주저앉기 십상이니까요.
브람스는 이 난제를 실내악의 감수성으로 풀어냅니다. 관현악을 들러리가 아니라 대화의 한 축으로 끌어들이고, 두 독주 악기는 바이올린 소나타나 첼로 소나타의 듀오처럼 바싹 붙여 엮었죠. 관현악에서 손을 뗀 듯 보이던 브람스가, 실내악의 친밀함을 오케스트라 규모로 확장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마지막 관현악곡을 완성한 겁니다.
흥미롭게도 이 곡은 한 후배의 펜을 다시 움직이게 합니다. 영국 작곡가 프레더릭 딜리어스는 1914년 브람스의 이 이중 협주곡 연주를 듣고 영감을 받아, 이듬해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자신의 이중 협주곡(1915)을 써냈거든요. 그럼에도 이 형식에서 브람스의 작품만큼 레퍼토리에 단단히 뿌리내린 곡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습니다. 200년 가까이, 이 자리는 여전히 브람스의 것입니다.
만년 브람스의 손길, 이 곡이 놓인 자리
이중 협주곡은 브람스의 작품 목록에서 묘한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관현악곡으로는 마지막이지만, 음악적으로는 그가 마지막으로 향한 실내악의 세계로 들어서는 문턱이거든요. 이 곡 이후 브람스는 큰 형식을 거의 내려놓고, 클라리넷 5중주나 후기 피아노 소품처럼 점점 더 사적이고 응축된 음악으로 침잠해 갑니다.
그래서 이 곡에는 두 가지 표정이 겹쳐 있습니다. 협주곡다운 외향성과 실내악다운 내밀함이지요. 두 독주 악기가 화려한 기교를 뽐내기보다 서로의 말을 받아 주는 데 더 마음을 쓰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어떤 평론가는 이 곡을 “오케스트라를 거느린 실내악”이라 부르기도 했는데요, 곡의 성격을 꽤 정확히 짚은 표현입니다. 화해라는 사적인 사건에서 출발한 곡이, 형식까지도 사적인 쪽으로 기울어 갔던 거죠.
그렇다고 규모가 작다는 뜻은 아닙니다. 두 대의 독주 악기가 풀 오케스트라와 맞서야 하니, 연주자에게 요구되는 체력과 집중력은 웬만한 단독 협주곡 이상이거든요. 특히 첼로는 바이올린에 음량으로 묻히지 않으려 시종 깊고 단단한 소리를 끌어내야 합니다. 하우스만 같은 대가를 초연자로 점찍은 데에는, 이런 까다로움을 감당할 사람이 필요했던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습니다.
추천 연주와 녹음
이 곡의 녹음 역사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은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와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입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바이올리니스트와 첼리스트가 만난 연주로, 두 거장의 풍성한 음색과 자연스러운 호흡은 “이중 협주곡이 왜 두 사람의 대화인가”를 온몸으로 납득시키죠. 특히 2악장에서 두 악기가 같은 선율을 동시에 부르는 순간의 음향적 일체감은, 다른 연주에서 쉽게 만나기 어렵습니다.
전혀 다른 결을 원한다면, 아이작 스턴과 요요마가 1986년에 함께한 라이브를 권합니다. 예순여섯의 노장 스턴과 서른한 살의 요요마가 무대 위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호흡을 맞추는 장면은, 이 곡이 왜 ‘대화의 음악’인지를 눈으로도 보여 주거든요. 세대를 가로지른 두 사람의 주고받음이, 곡의 주제와 묘하게 포개집니다.
상단 영상으로 띄워 둔 율리아 피셔와 다니엘 뮐러쇼트의 NDR 엘브필하모니 라이브도 함께 보시길 권합니다. 현대적이고 명료한 해석에, 무대 위 두 독주자의 교감을 영상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거든요. 서로를 바라보며 프레이징을 맞추는 장면은, 이 곡이 ‘대화의 음악’이라는 말을 시각적으로 증명해 줍니다.
음반으로 좀 더 파고들고 싶다면, 오이스트라흐·로스트로포비치가 조지 셸이 지휘하는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 남긴 스튜디오 녹음이 오랜 세월 기준점으로 꼽혀 왔습니다. 또 다른 결로는 이차크 펄만과 로스트로포비치가 베르나르트 하이팅크와 함께한 연주가 있는데, 펄만 특유의 화사하고 따뜻한 음색이 1악장 카덴차에서 특히 빛을 발하죠. 같은 곡이라도 누가 활을 쥐느냐에 따라 ‘대화의 온도’가 이렇게 달라지는구나 싶어, 여러 연주를 견줘 듣는 재미가 쏠쏠한 곡입니다.
악보와 함께 듣기
이 곡은 두 독주 악기와 관현악의 선이 촘촘히 얽혀 있어서, 악보를 펼쳐 놓고 들으면 누가 언제 주도권을 쥐는지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특히 1악장 도입부, 첼로와 바이올린이 차례로 카덴차를 주고받는 대목을 총보로 따라가 보세요. 두 목소리가 어떻게 한 노래로 합쳐지는지 또렷이 보입니다. 원본 악보는 IMSLP에서 누구나 무료로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브람스 이중 협주곡 a단조 Op.102 악보 보기 (IMSLP)
자주 묻는 질문
브람스 이중 협주곡은 왜 ‘이중’ 협주곡이라고 부르나요?
바이올린과 첼로, 두 대의 독주 악기가 동시에 주역으로 나서기 때문입니다. 브람스는 1887년,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과 첼리스트 로베르트 하우스만을 염두에 두고 이 곡을 썼습니다. 한 명의 독주자가 무대를 이끄는 보통의 협주곡과 달리, 두 독주자가 대등하게 대화하는 구조라 ‘이중(Double)’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이 곡이 요아힘과의 화해를 위해 쓰였다는 게 사실인가요?
네. 30년 넘은 벗이었던 요아힘과 사이가 틀어진 뒤, 브람스는 화해의 손길로 이 곡을 구상했습니다. 바이올린 파트를 요아힘이 맡는다는 것 자체가 화해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뜻이었죠. 작곡 도중 브람스가 요아힘에게 악보를 보내 의견을 구하면서 두 사람의 왕래가 되살아났고, 1887년 초연을 계기로 우정은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대체 왜 사이가 틀어졌나요?
요아힘의 이혼 소송이 발단이었습니다. 요아힘이 아내 아말리에의 부정을 의심하자, 브람스는 아말리에의 결백을 믿고 그녀를 두둔하는 편지를 1880년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1883년 이혼 소송에서 아말리에가 이 편지를 인품 증거로 제출했고, 요아힘은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 배신당했다고 느꼈죠. 1884년 두 사람이 끝내 갈라설 무렵, 브람스와의 왕래도 완전히 끊긴 상태였습니다.
연주 시간과 악장 구성은 어떻게 되나요?
전체 약 33분, 3악장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1악장 Allegro(a단조)는 두 독주자가 카덴차로 차례차례 등장하는 파격적인 도입이 인상적이고, 2악장 Andante(D장조)는 곡에서 가장 서정적인 핵심입니다. 3악장 Vivace non troppo는 헝가리풍 론도로, a단조에서 A장조로 환하게 마무리됩니다. 이 곡은 브람스가 남긴 마지막 관현악 작품이기도 합니다.
처음 듣는다면 어떤 녹음으로 시작하면 좋을까요?
두 악기의 ‘대화’를 느끼기엔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와 로스트로포비치의 녹음이 정석입니다. 영상으로 무대 위 교감을 보고 싶다면 율리아 피셔·다니엘 뮐러쇼트의 NDR 라이브나 아이작 스턴·요요마의 1986년 라이브를 추천합니다. 셋 다 본문에 함께 실어 두었으니, 2악장에서 두 악기가 같은 선율을 동시에 노래하는 순간을 비교하며 들어 보세요.
함께 읽으면 좋은 글
이중 협주곡의 뿌리와 곁가지를 따라가 보고 싶다면, 브람스 만년의 다른 관현악곡과 같은 시대의 협주곡들을 나란히 들어 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