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벨 – 어미 거위 모음곡

피아노 네 손에서 관현악, 발레까지 — 세 번 다시 태어난 동화

여섯 살 여자아이와 일곱 살 남자아이를 위해 태어난 곡입니다. 동화 속 장면을 음표로 그려낸 피아노 소품집인데, 라벨은 아이들이 직접 칠 수 있도록 아주 쉽게 만들었거든요. 그런데 정작 이 곡을 처음 무대에 올린 건 그 아이들이 아니었습니다.

초연 무대에는 열한 살과 열네 살 소녀가 섰고, 라벨이 그토록 아꼈던 두 아이 미미와 장(Mimi와 Jean)은 끝내 연주하지 못했습니다. 훗날 라벨은 이 일을 두고두고 아쉬워했죠. 무엇보다 이 곡은 그 두 아이를 위한 선물이었으니까요.

작곡가
모리스 라벨
(Maurice Ravel, 1875~1937)
작품명
어미 거위 모음곡 (Ma mère l’Oye, Suite)
조성
다장조 외 (악장마다 상이)
작곡 연도
1908~1910년 (피아노 이중주 원곡), 1911년 (관현악 편곡)
악장 구성
5악장
I. Pavane de la Belle au bois dormant, Lent
II. Petit Poucet, Très modéré
III. Laideronnette, impératrice des pagodes, Mouvement de marche
IV. Les entretiens de la Belle et de la Bête, Mouvement de valse très modéré
V. Le jardin féerique, Lent et grave

1악장 잠자는 숲속의 미녀 파반느, 느리게
2악장 엄지동자, 매우 보통 빠르기로
3악장 라이데로네트, 탑의 여황제, 행진 빠르기로
4악장 미녀와 야수의 대화, 아주 보통 왈츠 빠르기로
5악장 요정 정원, 느리고 장중하게
편성
플루트, 오보에, 클라리넷, 파곳, 호른, 현악, 하프, 첼레스타, 글로켄슈필, 목금
초연
1911년, 파리 (관현악 편곡 버전); 피아노 이중주 버전: 1910년 4월 20일, 파리

고데브스키 남매와 라벨의 두 번째 가족

라벨에게는 가족이 둘 있었습니다. 하나는 피로 맺어진 가족이었고, 다른 하나는 고데브스키(Godebski) 집안이었죠.

모리스 라벨, 1925년 초상 사진
모리스 라벨(1875–1937). 어미 거위 모음곡을 작곡한 프랑스 작곡가.

조각가이자 예술 후원가였던 시파 고데브스키(Cyprian Godebski)와 아내 이다(Ida)는 파리 예술계의 명망 높은 중심인물이었습니다. 그들의 살롱에는 드뷔시, 스트라빈스키, 포레 같은 당대 거장이 드나들었는데, 라벨은 그중에서도 가장 자주, 가장 오래 머문 단골이었죠. 이미 부부에게 ‘소나티나(Sonatine)’를 헌정했을 정도였으니, 라벨의 창작 세계와 얼마나 깊이 얽힌 사이였는지 짐작이 갑니다.

1908년 아버지 조제프 라벨이 세상을 떠난 뒤, 라벨이 정서적으로 기댄 곳이 바로 고데브스키 부부의 시골집 ‘라 그랑제트(La Grangette)’였습니다. 파리 남동쪽 센강 변 발뱅(Valvins)에 자리한 이 집에서 여러 여름을 나며, 그는 부부의 아이들 미미와 장이 커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봤어요. 훗날 명곡으로 남은 어미 거위 모음곡을 쓰기 시작한 것도 바로 아버지를 잃은 그해의 일이었습니다.

라벨이 이 곡을 어떤 심정으로 썼는지 직접 남긴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각 악장이 아이들이 좋아할 동화 장면으로 채워졌고, 일부러 아이들이 직접 칠 수 있는 난이도로 만들어졌다는 점이죠. 사랑하는 아이들이 이 선율을 치며 즐거워하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이 이 곡의 가장 순수한 출발점이었습니다.

1910년 4월 20일, ‘독립 음악 협회(Société musicale indépendante)’ 창립 연주회에서 마침내 초연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정작 무대에 오른 연주자는 미미와 장이 아닌, 열한 살 잔느 를루(Jeanne Leleu)와 열네 살 쥬느비에브 뒤로니(Geneviève Durony)였죠. 어째서 라벨은 진짜 주인공들을 무대에 세우지 않았을까요? 초연이라는 공식 무대의 무게를 어린아이에게 지우고 싶지 않았던 걸까요, 아니면 연주회의 전반적인 수준을 고려한 현실적인 판단이었을까요.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라벨 자신이 이 결정을 오래 아쉬워했다는 기록은 분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동화를 고른 라벨의 안목 — 해피엔딩이 아닌 이야기들

어미 거위 모음곡에는 ‘어린이를 위한 다섯 소품(cinq pièces enfantines)’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들어보면 이 음악이 결코 아이들만을 위한 노래가 아니라는 걸 금방 알게 되죠. 라벨이 고른 다섯 편의 동화를 들여다보면 그 이유가 드러납니다.

샤를 페로의 어미 거위 이야기 삽화
샤를 페로의 《어미 거위 이야기》(1697) 표지 삽화. 라벨은 이 동화집에서 영감을 받았다.

첫 번째는 샤를 페로의 ‘잠자는 숲속의 미녀’. 마법에 걸려 깊은 잠에 빠지는 공주 이야기죠. 두 번째는 역시 페로의 ‘엄지동자(Le Petit Poucet)’인데, 숲에서 길을 잃는 아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겐 ‘헨젤과 그레텔’처럼 느껴지는 이야기입니다. 세 번째 곡의 주인공 ‘라이데로네트(Laideronnette)’는 돌노아 부인의 동화 ‘초록 뱀’에 나오는, 마법에 걸려 추한 외모를 갖게 된 공주고요. 네 번째는 보몽 부인 버전의 ‘미녀와 야수’. 그리고 마지막 ‘요정의 정원’은 이 모든 이야기가 끝난 뒤 찾아오는 마법 같은 고요 그 자체입니다.

얼핏 보면 모두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이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아요. 잠든 공주, 길 잃은 아이, 저주받은 여인, 짐승의 모습에 갇힌 왕자. 라벨이 주목한 장면은 하나같이 무언가 결여되거나 뒤틀린 상태에서 출발합니다.

라벨은 이 다섯 장면을 음표로 옮기면서 그저 어린이의 시선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2악장 ‘엄지동자’ 악보 첫머리에 라벨이 직접 적어 넣은 페로의 구절이 그 사실을 잘 보여주죠. 그는 길을 쉽게 찾으리라 믿었다고, 지나온 길목마다 빵 부스러기를 뿌려두었으니까. 그런데 단 한 조각도 찾을 수 없었으니, 새들이 와서 모두 먹어버린 탓이었다 — 라벨이 옮겨 적은 문장은 대략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단순히 아이가 숲에서 길을 잃은 이야기인데, 왜 이 구절에서는 그보다 더 큰 상실감이 느껴질까요? 라벨이 노린 지점이 바로 여기였을 겁니다. 동화의 표면 아래 숨은 진실, 어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제대로 읽히는 감정의 결 말이죠.

피아노 이중주에서 관현악으로 — 두 번의 탄생

1910년에 나온 이 곡은 1년 뒤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라벨이 1911년에 다섯 악장 모두를 오케스트라용으로 편곡했거든요. 피아노 네 손을 위한 아기자기한 소품이 거대한 관현악으로 탈바꿈했지요.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삽화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삽화 (Jennie Harbour 작). 모음곡의 첫 악장 주제이기도 하다.

그 결과물은 피아노 버전과는 전혀 다른 음악이었습니다. 라벨의 관현악 편곡 솜씨는 이미 당대 최고라는 평을 받고 있었죠. 그의 섬세한 음색 설계는 ‘스페인 광시곡(Rapsodie espagnole)’이나 ‘다프니스와 클로에(Daphnis et Chloé)’ 같은 작품에서 충분히 증명된 터였고, 바로 그 솜씨가 어미 거위 모음곡에서 동화의 장면마다 정교하게 발휘됐습니다.

먼저 ‘잠자는 숲속의 미녀 파반느’에서는 플루트 솔로가 나른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엄지동자’에 이르면 길 잃은 아이의 불안한 마음을 오보에의 가느다란 울음으로 그려내고요. 3악장 ‘라이데로네트, 파고드의 여왕’은 또 얼마나 이국적인가요. 5음계 선율에 글로켄슈필, 목금, 첼레스타가 더해져 신비로운 탑의 세계를 빚어냅니다. 4악장 ‘미녀와 야수의 대화’에서는 콘트라바순이 야수의 낮고 거친 목소리를 연기하죠. 그러다 악장 후반, 그 소리가 사라지고 클라리넷의 부드러운 선율이 그 자리를 채우는 순간이 바로 저주가 풀리는 대목입니다. 마지막 ‘요정의 정원’은 현악기 전체가 서서히 빛을 쌓아 올리는 눈부신 클라이맥스고요.

라벨은 이 편곡을 단순히 악기만 바꾸는 작업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각 악장의 감정과 심상을 오케스트라라는 새로운 언어로 다시 빚어낸 것이죠. 피아노 버전과 오케스트라 버전을 나란히 들어보면, 같은 선율인데도 음색의 마법 덕에 전혀 다른 곡처럼 느껴집니다.

라벨의 상상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1912년에는 이 다섯 악장을 전막 발레로 확장했거든요. 기존 다섯 악장 사이에 네 개의 간주곡을 더하고, 서곡(Prélude)과 ‘물레 춤과 장면(Danse du rouet et scène)’을 새로 붙인 구성이었죠. 그렇게 완성된 발레는 1912년 1월 28일, 파리 테아트르 데자르(Théâtre des Arts)에서 막을 올렸습니다.

피아노 이중주에서 관현악 모음곡으로, 다시 발레로. 라벨은 이토록 사랑스러운 동화의 세계를 결코 한 가지 모습으로만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악장별 감상 가이드 — 다섯 편의 동화 속으로

이 곡은 마치 한 권의 동화책을 펼쳐 보이는 작품입니다. 다섯 악장이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속삭이거든요. 작곡가는 어떤 상상력으로 이토록 다채로운 소리를 빚어냈을까요. 이제 각 악장이 그려내는 동화 속 장면으로 들어가 봅니다. 아래는 상단 영상으로 율리안 쿠어티가 지휘하는 프랑크푸르트 방송 교향악단의 실황과 함께 따라가면 더 좋습니다.

아킬 우브레가 그린 모리스 라벨 초상
아킬 우브레(Achille Ouvré)가 그린 라벨 초상. 섬세한 관현악법의 대가다운 면모가 엿보인다.

1악장 — 잠자는 숲속의 미녀 파반느: 멈춰 있는 시간의 음악

이 악장은 움직임이 없는 음악입니다.

파반느(pavane)는 르네상스 시대에 유행한 느린 궁정 무곡이죠. 라벨이 고른 건 바로 이 형식, 거의 멈춰 있는 듯한 음악입니다. 잠든 미녀는 움직이지 않아요. 그 주변의 시간마저 멈춰버린 듯한 정적. 라벨은 그 고요를 2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악장에 담아냈습니다.

플루트가 주선율을 부드럽게 내려놓습니다. 서두르는 법이 없어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굳이 설명하려 들지도 않죠. 마치 잠든 사람 곁을 조용히 지키는 듯한 느낌입니다.

이 짧은 악장이 맨 앞에 놓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여기서부터 시간의 속도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 음악을 제대로 따라가려면 평소보다 훨씬 천천히 숨을 쉬어야 하거든요. 바쁜 일상의 속도 그대로 들으면 이 악장은 ‘그냥 짧은 서두’로 스쳐 지나갑니다. 하지만 이 악장의 속도에 귀를 맞추고 나면, 뒤따르는 악장들이 한층 선명하게 들려와요.

2악장 — 엄지동자: 새가 먹어버린 길

아이가 길을 찾으려 애쓰고 있습니다. 오보에가 작은 선율을 거듭 반복하죠. 한 걸음 나아갔다 돌아오고, 다른 방향으로 가봐도 다시 제자리예요.

선율은 끝내 목적지에 닿지 못합니다. 길 자체가 사라져 버렸으니까요. 라벨이 인용한 페로의 구절, “새들이 와서 빵 부스러기를 모두 먹어버렸다”를 떠올리면 그 반복의 의미가 새롭게 들려옵니다.

엄지동자는 그저 헤매는 게 아니에요. 없는 길을 기어이 찾으려는 겁니다. 있어야 할 것이 사라진 그 자리를 맴돌며 확인하는 아이죠.

악장 끝에서 음악은 어디에도 닿지 못한 채 흩어지고 맙니다. 씁쓸하지만 절망하지는 않는 모습. 그게 바로 아이만이 가진 힘이에요. 어른의 이야기였다면 음악은 훨씬 어두웠을 겁니다.

라벨 연구가들 사이에서는 이 악장을 두고 해석이 갈립니다. 반복되는 선율에서 아이의 고집과 포기 않는 탐색을 읽어낸 쪽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아이의 불안을 표현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죠. 놀랍게도 두 해석이 동시에 타당합니다. 이 짧은 악장이 그토록 오래 마음에 남는 이유예요.

3악장 — 라이데로네트: 저주받은 공주의 화려한 왕국

갑자기 분위기가 확 바뀝니다. 행진 리듬으로 시작하며 이국적이고 독특한 음악이 등장하죠. 여기서 라벨이 쓴 건 바로 5음계(pentatonic scale), 서양 음악에서 ‘동양적’인 느낌을 주는 음계 구조입니다. 라이데로네트가 다스리는 세계는 ‘파고드(pagodes)’의 왕국, 즉 소탑들로 가득한 이국의 궁전이에요. 글로켄슈필과 목금, 첼레스타는 탑 안에서 울려 퍼지는 기묘한 소리들이고요.

라이데로네트는 돌노아 부인의 동화 ‘초록 뱀’에 나오는 공주죠. 마법에 걸려 못생긴 모습이 됐지만, 이 악장에서 그녀는 무척 당당합니다. 비참하거나 슬픈 기색은 전혀 없어요. 오히려 그 탑 속 이국적인 세계가 화려하고 독특하게 들립니다. 저주받은 여인의 이야기를 이토록 씩씩하게 그려낼 수 있었던 건, 라벨이 그 세계 자체를 매력적인 공간으로 바라봤기 때문 아닐까요.

라벨이 일찍부터 동양 음악, 특히 가믈란(gamelan, 인도네시아 전통 타악기 합주)에 매료됐다는 사실이 이 악장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자바 가믈란 연주를 처음 들은 라벨은 그 음색에 강한 인상을 받았죠. 어미 거위 모음곡을 쓸 무렵엔 이미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그 기억이 이 악장에서 다시 생생하게 살아났습니다.

이 곡을 처음 들을 때 ‘어, 이거 왠지 동양풍 느낌인데?’ 하고 느끼셨다면, 아주 정확한 반응입니다. 라벨이 바로 그런 느낌을 의도했으니까요.

4악장 — 미녀와 야수의 대화: 저주가 풀리는 음악적 순간

이 악장은 모음곡 전체에서 가장 구체적인 ‘이야기 전개’를 담은 부분입니다.

시작부에서는 콘트라바순(contrabassoon, 대형 저음 관악기로 굉장히 두껍고 거친 소리를 냅니다)이 야수의 목소리를 표현하죠. 이윽고 클라리넷이 미녀의 선율로 화답합니다. 둘은 서로 다른 리듬과 음색으로 대화를 나누다가, 악장 후반에 이르러 야수의 저음이 사라지고 현악과 클라리넷의 부드러운 선율로 바뀌는 순간이 찾아와요.

저주가 풀린 겁니다. 야수가 왕자로 변하는 순간이죠.

음악이 그걸 직접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묘사할 따름이죠. 저음이 걷히고 현악이 따뜻하게 차오르는 그 순간,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조차 무언가 변했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됩니다. 설명 없이 음악 자체가 변신을 들려주는 것, 라벨이 의도한 게 바로 이것 아니었을까요.

이 악장이 미녀와 야수의 대화를 왈츠 리듬으로 구성했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어색한 두 존재가 리듬 안에서 조금씩 서로를 맞춰가다가, 마침내 하나가 되는 것처럼 말이죠.

5악장 — 요정 정원: 동화가 끝나고 남는 빛

마지막 악장은 마치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들립니다.

‘요정 정원(Le jardin féerique)’은 느리고 장중하게 시작해 점점 빛을 쌓아갑니다. 마침내 현악기 전체가 환하게 펼쳐지며 눈부신 장조의 클라이맥스에 도달하죠. 발레 버전에서는 바로 이 대목이,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왕자의 입맞춤으로 깨어나는 순간입니다.

이 악장이 모음곡 중에서 가장 자주 홀로 연주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요.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완결된 감동을 주거든요. 어떤 이야기의 마지막 장, 혹은 인생의 한 막이 내린 뒤에 찾아오는 그 고요하고 빛나는 순간 말입니다.

그래서 ‘요정 정원’은 단순한 마지막 악장이 아닙니다. 앞선 네 이야기가 모두 끝난 뒤, 세상이 제자리로 돌아온 듯하면서도 무언가 영원히 달라져 버린 그 느낌. 그것이야말로 동화가 동화인 이유이며, 이 음악이 어미 거위 모음곡인 진짜 까닭입니다.

무대에 서지 못한 두 아이, 그리고 어린 초연자

미미와 장이 무대에 서지 못한 자리를, 열한 살 잔느 를루가 대신 채웠습니다. 그런데 이 어린 소녀에게 라벨이 남긴 흔적이 하나 있어요. 초연이 끝난 뒤, 라벨은 잔느에게 직접 편지를 보냈습니다.

편지에서 라벨은 어린 연주자가 보여준 섬세함과 음악을 이해하는 마음에 깊은 고마움을 전했다고 전해집니다. 작곡가가 자기 작품의 첫 무대를 맡은 어린아이에게 손수 격려의 글을 건넸다는 사실 자체가, 이 곡을 둘러싼 라벨의 마음이 어떤 온도였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잔느 를루는 훗날 작곡가로 성장해, 1923년 로마대상(Prix de Rome)을 받기에 이릅니다. 어미 거위 모음곡 초연 무대가 한 음악가의 출발점이 된 셈이죠.

정작 곡을 바친 미미와 장은 끝내 그 무대에 오르지 못했지만, 두 아이가 라벨에게 남긴 것은 무대 위의 한순간보다 훨씬 컸습니다. 아버지를 잃은 작곡가가 기댄 여름의 풍경, 동화를 읽어주던 저녁,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 — 그 모든 시간이 이 다섯 악장 안에 녹아 있으니까요.

라벨이 평생 숨긴 감정

라벨은 평생 자기 감정을 직접 드러내지 않는 작곡가였습니다. ‘볼레로(Boléro)’는 반복의 구조 실험이었고, ‘라 발스(La Valse)’는 왈츠를 향한 냉소적인 패러디에 가깝죠. ‘피아노 협주곡 G장조’는 재즈와 클래식의 균형을 맞추려던 시도였고요. 그래서 라벨의 음악은 대체로 표면이 매끈하고 속을 쉽게 드러내지 않습니다.

피아노 앞의 모리스 라벨
피아노 앞의 라벨. 어미 거위는 원래 네 손을 위한 피아노 연탄곡으로 작곡되었다.

그런데 어미 거위 모음곡은 사뭇 다른 결을 보여줍니다.

이 곡에서 라벨은 자신이 아끼던 두 아이를 떠올리며 작곡에 임했습니다. 어떤 정치적 의도나 미학적 실험이 아닌, 그저 아이들이 이 음악을 치며 즐거워하기를 바라는 순수한 마음. 그리고 아마도, 아버지를 막 여읜 자신이 고데브스키 가족의 시골집에서 보낸 그 여름을 그리워하지는 않았을까요.

그래서 이 곡 안에는 라벨의 다른 작품에서 좀처럼 보이지 않는 특별한 무언가가 담겨 있어요. 서두르지 않는 느낌,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여유, 어딘가 따스한 체온이 느껴지는 음악입니다.

라벨은 1937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1932년 택시 사고 이후 그의 건강은 서서히 무너졌고, 말년에는 머릿속에 음악이 또렷이 들리는데도 그것을 악보에 옮기지 못하는 상태가 됐죠. 사인은 지금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원발성 진행성 실어증을 포함한 국소성 신경퇴행성 질환이었으리라는 추정이 유력하지만, 어느 하나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분명한 것은 마지막 몇 년 동안 그가 쓰고 싶어도 더는 쓸 수 없는 고통 속에 있었다는 사실이에요.

어미 거위 모음곡은 그런 라벨이 아직 모든 것이 가능했던 시절, 가장 가까운 이들을 위해 남긴 소중한 선물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듣는 감상은 모를 때와 사뭇 다를 수밖에 없겠죠.

처음 듣는다면 — 이것만 알고 들으세요

전곡 연주 시간은 약 15분에서 17분 남짓. 그리 길지 않습니다. 처음 들을 때 알아두면 감상이 한결 즐거워지는 정보 몇 가지를 정리합니다.

각 악장에는 구체적인 동화 장면이 담겨 있습니다. 1악장은 잠든 미녀 곁의 시간, 2악장은 숲에서 길 잃은 아이, 3악장은 이국의 탑, 4악장은 저주가 풀리는 순간, 마지막 5악장은 모든 동화가 끝난 뒤의 빛나는 정원. 이 이미지들을 떠올리며 들으면 각 악장이 훨씬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3악장에서 낯선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요. 라벨이 일부러 5음계(펜타토닉 스케일)를 써서 동양적인 분위기를 연출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낯섦을 즐기는 게 이 악장의 매력이죠. 목관악기와 타악기의 질감이 다른 악장과 확연히 다르다는 걸 금방 알아채실 겁니다.

4악장에서는 저음이 사라지는 순간에 집중하세요. 콘트라바순의 묵직한 저음이 걷히고 현악기가 따스하게 떠오르는 그 순간이, 야수가 왕자로 변하는 극적인 장면입니다. 악보가 없어도 귀로만 들어도 그 변화가 온전히 느껴져요.

마지막 5악장의 미덕은 서두르지 않는 느긋함입니다. 앞선 네 동화를 충분히 음미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클라이맥스가 찬란하게 열리거든요. 처음부터 이 악장으로 건너뛰면 그저 ‘예쁜 오케스트라 음악’ 정도로만 들릴 겁니다. 하지만 앞선 악장들의 서사를 모두 겪고 나서 이 클라이맥스를 마주하는 감동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죠.

추천 녹음 — 세 가지 접근

제임스 가피건 / 오슬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오슬로 필하모닉의 수석 지휘자 가피건이 이끈 현대적인 연주입니다. 각 악장의 색깔이 참으로 선명하고 투명하죠. 특히 3악장 ‘라이데로네트’에서 목관악기와 타악기의 질감이 아주 잘 살아납니다. 처음 이 곡을 접하는 청취자에게 권하기 더없이 좋은 선택이에요. 전체적으로 맑고 세련된 음향이 돋보입니다.

알렉산더 셸리 / 시몬 볼리바르 심포니 오케스트라

영국 지휘자 셸리와 베네수엘라의 시몬 볼리바르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만난 연주입니다. 넘치는 에너지와 함께 각 악장의 대비가 무척 선명하죠. 1악장의 나른함, 3악장의 생동감, 5악장의 클라이맥스가 모두 뚜렷하게 구분됩니다. 라벨의 관현악 편곡이 얼마나 다채로운지 확인하기에 딱 좋은 연주예요.

세이지 오자와 /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1974, DG)

오자와와 보스턴 심포니의 1974년 DG 녹음은 이 곡의 고전적인 명반으로 꼽힙니다. 특히 5악장 ‘요정의 정원’ 클라이맥스에서 음량을 서서히 쌓아 올리다 현악 파트가 활짝 만개하는 순간의 설계가 일품이죠. 라벨의 오케스트레이션이 어떻게 들려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모범 답안입니다. 바로 아래 ‘악보와 함께 듣기’에서 이 오자와 음반을 악보와 나란히 따라갈 수 있어요.

악보와 함께 듣기

라벨의 음색 설계를 더 선명하게 파악하고 싶다면 악보가 큰 도움이 됩니다. 아래 영상은 앞서 소개한 오자와/보스턴 심포니의 연주를 총보와 함께 보여줘요. 어느 악기가 어느 선율을 맡는지 눈으로 짚어가며 들으면, 음색의 마법이 비로소 또렷하게 잡힙니다.

총보 전체를 직접 들여다보고 싶다면, ‘어미 거위 모음곡’ 악보가 IMSLP에 무료로 공개되어 있습니다.

어미 거위 모음곡 악보 보기 (IMSLP)

자주 묻는 질문

라벨의 어미 거위 모음곡은 어떤 곡인가요?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1875~1937)이 1908년부터 1910년까지 쓴 5악장 구성의 피아노 이중주 모음곡입니다. 이후 1911년에 오케스트라용으로도 편곡됐죠. 각 악장은 샤를 페로, 보몽 부인, 돌노아 부인의 동화(잠자는 숲속의 미녀, 엄지동자, 라이데로네트, 미녀와 야수, 요정 정원)를 음악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원래는 친구 시파 고데브스키 부부의 자녀 미미(6세)와 장(7세)에게 헌정했어요. 지금은 라벨 특유의 정밀한 음색 설계 덕분에 오케스트라 버전이 가장 자주 연주됩니다.

어미 거위 모음곡은 몇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나요?

총 5개 악장입니다. 1악장 ‘잠자는 숲속의 미녀 파반느’, 2악장 ‘엄지동자’, 3악장 ‘라이데로네트(탑의 여황제)’, 4악장 ‘미녀와 야수의 대화’, 5악장 ‘요정 정원’이죠. 전체 연주 시간은 약 15분에서 17분 정도입니다. 참고로 1912년에 발레로 확장한 버전은 기존 5악장 사이에 간주곡이 추가되어 훨씬 더 긴 작품이에요.

어미 거위 모음곡 피아노 버전과 오케스트라 버전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피아노 이중주 버전(1910)은 두 사람이 피아노 한 대를 함께 치는, 보다 내밀하고 간결한 매력의 곡입니다. 반면 1911년의 오케스트라 편곡은 라벨이 단순히 악기만 바꾼 게 아니라, 각 동화 장면에 어울리는 음색과 질감을 처음부터 다시 설계한 작품이죠. 가령 4악장에서 야수의 목소리는 콘트라바순, 미녀는 클라리넷으로 표현했고, 3악장에서는 글로켄슈필과 목금으로 이국적인 탑의 세계를 그렸습니다. 그래서 두 버전을 나란히 들으면 같은 선율인데도 전혀 다른 음악처럼 느껴져요.

라벨은 왜 어미 거위 모음곡을 어린이에게 헌정했나요?

라벨의 오랜 친구였던 시파와 이다 고데브스키 부부의 자녀, 미미(당시 6세)와 장(당시 7세)을 위해 만든 곡입니다. 라벨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고데브스키 집안을 사실상 두 번째 가족처럼 여길 만큼 각별하게 생각했거든요. 부부에게 소나티나를 헌정한 데 이어, 이번엔 아이들이 직접 칠 수 있도록 피아노 이중주를 작곡한 것이죠. 다만 실제 초연 날에는 두 아이 대신 더 나이 든 피아니스트들이 연주했고, 라벨은 이를 오래 아쉬워했다고 전해집니다.

어미 거위 모음곡을 처음 듣는다면 어떤 순서로 들어야 하나요?

1악장부터 5악장까지 순서대로 듣는 걸 권합니다. 이 곡은 다섯 편의 동화를 차례로 펼쳐 보이는 구성이라, 순서를 지킬 때 마지막 5악장 ‘요정 정원’의 클라이맥스가 가장 큰 감동으로 다가오거든요. 1악장 ‘잠자는 숲속의 미녀 파반느’는 2분도 채 안 되는 짧은 곡이지만, 여기서부터 천천히 호흡을 맞추는 게 핵심입니다. 3악장 ‘라이데로네트’의 이국적인 5음계 색채와 4악장에서 저음이 사라지며 저주가 풀리는 순간을 특히 귀 기울여 들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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