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살 여자아이와 일곱 살 남자아이를 위해 태어난 곡. 동화 속 장면을 음표로 그려낸 피아노 소품집인데, 작곡가 라벨이 아이들이 직접 연주할 수 있도록 아주 쉽게 만들었거든요. 하지만 정작 이 곡을 처음 무대에 올린 건 그 아이들이 아니더군요.
초연 무대에는 열한 살과 열네 살 소녀가 섰고, 라벨이 그토록 사랑했던 두 아이 미미와 장(Mimi와 Jean)은 끝내 연주하지 못한 셈입니다. 훗날 라벨은 이 일을 얼마나 후회했을까요? 이 곡은 무엇보다 그 두 아이를 위한 선물이었던 까닭입니다.
- 작곡가
- 모리스 라벨
(Maurice Ravel, 1875~1937) - 작품명
- 어미 거위 모음곡 (Ma mère l’Oye , Suite)
- 조성
- 다장조 외 (악장마다 상이)
- 작곡 연도
- 1908~1910년 (피아노 이중주 원곡), 1911년 (관현악 편곡)
- 악장 구성
- 5악장
I. Pavane de la Belle au bois dormant, Lent
II. Petit Poucet, Très modéré
III. Laideronnette, impératrice des pagodes, Mouvement de marche
IV. Les entretiens de la Belle et de la Bête, Mouvement de valse très modéré
V. Le jardin féerique, Lent et grave
1악장 잠자는 숲속의 미녀 파반느, 느리게
2악장 엄지동자, 매우 보통 빠르기로
3악장 라이데로네트, 탑의 여황제, 행진 빠르기로
4악장 미녀와 야수의 대화, 아주 보통 왈츠 빠르기로
5악장 요정 정원, 느리고 장중하게 - 편성
- 플루트, 오보에, 클라리넷, 파곳, 호른, 현악, 하프, 첼레스타, 글로켄슈필, 목금
- 초연
- 1911년, 파리 (관현악 편곡 버전); 피아노 이중주 버전: 1910년 4월 20일, 파리
고데브스키 남매와 라벨의 두 번째 가족
라벨에게는 두 개의 가족. 하나는 피로 맺어진 가족이었고, 다른 하나는 바로 고데브스키(Godebski) 집안이었거든요.

조각가이자 예술 후원가였던 시파 고데브스키(Cyprian Godebski)와 아내 이다(Ida)는 파리 예술계의 명망 높은 중심인물이었더군요. 그들의 살롱에는 드뷔시, 스트라빈스키, 포레 같은 당대 거장들이 드나들었는데, 라벨은 그중에서도 가장 자주, 가장 오래 머무른 단골손님이었던 셈입니다. 이미 부부에게 ‘소나티나(Sonatine)’를 헌정했을 정도였으니, 라벨의 창작 세계와 얼마나 깊이 연결된 사이였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입니다.
1908년 아버지 조제프 라벨이 세상을 떠난 뒤, 라벨이 정서적으로 기댄 곳은 다름 아닌 고데브스키 부부의 시골집 ‘라 그랑제트(La Grangette)’였습니다. 파리 남동쪽 센강 변 발뱅(Valvins)에 자리한 이 집에서 수많은 여름을 나며, 그는 고데브스키 부부의 아이들인 미미와 장이 커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았죠. 훗날 명곡으로 남은 ‘어미 거위 모음곡’을 쓰기 시작한 것도 바로 아버지를 잃은 그 해의 일이었답니다.
라벨이 이 곡을 어떤 심정으로 작곡했는지 직접 남긴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이 곡의 각 악장이 아이들이 좋아할 동화 속 장면들로 채워졌고, 일부러 아이들이 직접 연주할 수 있는 난이도로 만들었다는 점이지요. 사랑하는 아이들이 이 선율을 연주하며 즐거워하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이 이 곡의 가장 순수한 출발점이었던 까닭입니다.
1910년 4월 20일, ‘독립 음악 협회(Société musicale indépendante)’ 창립 연주회에서 마침내 곡의 초연이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정작 무대에 오른 연주자는 미미와 장이 아닌, 열한 살의 잔느 를루(Jeanne Leleu)와 열네 살의 쥬느비에브 뒤로니(Geneviève Durony)였죠. 어째서 라벨은 진짜 주인공들을 무대에 세우지 않았을까요? 초연이라는 공식적인 무대의 무게를 어린 아이들에게 지우고 싶지 않았던 걸까요, 아니면 연주회의 전반적인 수준을 고려한 현실적인 판단이었을까요.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라벨 자신이 이 결정을 오랫동안 아쉬워했다는 기록이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결국 이 곡은 처음부터 끝까지 미미와 장, 두 아이를 위한 선물이었으니까요.
동화를 고른 라벨의 안목 — 해피엔딩이 아닌 이야기들
‘어미 거위 모음곡’에는 ‘어린이를 위한 다섯 소품(cinq pièces enfantines)’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더군요. 하지만 막상 들어보면 이 음악이 결코 아이들만을 위한 노래는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거든요. 라벨이 선택한 다섯 편의 동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까닭이 드러나는 셈입니다.

첫 번째는 샤를 페로의 ‘잠자는 숲속의 미녀’. 마법에 걸려 깊은 잠에 빠지는 공주 이야기지요. 두 번째는 페로의 또 다른 작품인 ‘엄지동자(Le Petit Poucet)’입니다. 우리에겐 숲에서 길을 잃는 아이라는 점에서 ‘헨젤과 그레텔’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이야기랍니다. 세 번째 곡의 주인공 ‘라이데로네트(Laideronnette)’는 돌노아 부인의 동화 ‘초록 뱀’에 등장하는데, 마법에 걸려 추한 외모를 갖게 된 공주거든요. 네 번째는 보몽 부인 버전의 ‘미녀와 야수’. 그리고 마지막 ‘요정의 정원’은 이 모든 이야기가 끝난 뒤 찾아오는 마법 같은 고요 그 자체입니다.
얼핏 보면 모두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이야기들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이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더군요. 잠든 공주, 길 잃은 아이, 저주받은 여인, 짐승의 모습에 갇힌 왕자. 라벨이 주목한 장면은 이렇듯 하나같이 무언가 결여되거나 뒤틀린 상태에서 출발하는 셈입니다.
라벨은 이 다섯 장면을 음표로 옮기면서 그저 어린이의 시선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2악장 ‘엄지동자’ 악보 첫머리에 라벨이 직접 적어 넣은 페로의 한 구절이 그 사실을 증명하지요.
“그는 길을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지나온 길목마다 빵 부스러기를 뿌려두었으니까. 그런데 빵 부스러기를 단 한 조각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새들이 와서 모두 먹어버렸던 것이다.”
단순히 아이가 숲에서 길을 잃은 이야기인데, 왜 이 구절에서는 그보다 더 큰 상실감이 느껴지는 걸까요? 라벨이 노린 것이 바로 이 지점일 겁니다. 동화의 표면 아래 숨겨진 진실, 어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제대로 읽히는 감정의 결.
피아노 이중주에서 관현악으로 — 두 번의 탄생
1910년에 태어난 이 곡은 1년 뒤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더군요. 라벨이 1911년, 다섯 악장 모두를 오케스트라용으로 편곡했거든요. 피아노 네 손을 위한 아기자기한 소품이 거대한 관현악으로 탈바꿈한 셈입니다.

그 결과물은 피아노 버전과는 전혀 다른 음악. 라벨의 관현악 편곡 기법은 이미 당대 최고라는 평을 받고 있었죠. 그의 섬세한 음색 설계 능력은 ‘스페인 광시곡(Rapsodie espagnole)’이나 ‘다프니스와 클로에(Daphnis et Chloé)’ 같은 작품에서 이미 증명된 사실이고, 바로 그 능력이 ‘어미 거위 모음곡’에서 동화의 장면마다 정교하게 발휘된 겁니다.
먼저 ‘잠자는 숲속의 미녀 파반느’에서는 플루트 솔로가 나른한 분위기를 자아내더군요. ‘엄지동자’에 이르러서는 길 잃은 아이의 불안한 마음을 오보에의 가느다란 울음으로 표현했고요. 3악장 ‘라이데로네트, 파고다의 여왕’은 또 얼마나 이국적이었을까요? 5음계 선율에 글로켄슈필, 목금, 첼레스타가 더해져 신비로운 탑의 세계를 그려낸 까닭입니다. 4악장 ‘미녀와 야수의 대화’에서는 콘트라바순이 야수의 낮고 거친 목소리를 연기합니다. 그러다 악장 후반, 그 소리가 사라지고 클라리넷의 부드러운 선율이 그 자리를 채우는데, 바로 저주가 풀리는 순간이거든요. 마지막 ‘요정의 정원’은 현악기 전체가 서서히 빛을 쌓아 올리는 눈부신 클라이맥스.
라벨은 이 편곡을 단순히 악기만 바꾸는 작업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각 악장의 감정과 심상을 오케스트라라는 새로운 언어로 재창조한 것이죠. 피아노 버전과 오케스트라 버전을 나란히 감상해 보면, 같은 선율임에도 음색의 마법 덕분에 전혀 다른 곡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같은 해, 라벨의 상상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으니, 1912년에는 이 5악장 모음곡을 전막 발레로 확장했거든요. 기존 다섯 악장 사이에 네 개의 간주곡을 더하고, 서곡(Prélude)과 ‘물레 춤과 장면(Danse du rouet et scène)’을 새롭게 추가한 구성이었습니다. 그렇게 완성된 발레는 1912년 1월 29일, 파리 테아트르 데자르(Théâtre des Arts)에서 초연의 막을 올렸답니다.
피아노 이중주에서 관현악 모음곡, 그리고 발레까지. 라벨은 이토록 사랑스러운 동화의 세계를 결코 한 가지 모습으로만 남겨두지 않았던 셈입니다.
악장별 감상 가이드 — 다섯 편의 동화 속으로
이 곡은 마치 한 권의 동화책을 펼쳐 보이는 듯한 작품. 다섯 개의 악장이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속삭여주거든요. 과연 작곡가는 어떤 상상력으로 이토록 다채로운 소리를 빚어냈을까요? 이제부터 각 악장이 그려내는 동화 속 장면으로 여러분을 안내할 겁니다. 악보 위 음표들이 살아 움직이며 생생한 풍경을 눈앞에 펼쳐 보이더군요. 이 안내서가 여러분의 감상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점이 바로 그 까닭입니다. 자, 이제 첫 번째 동화의 문을 열 시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음악에 흠뻑 빠져보시길. 어느새 여러분 자신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있을 테니까요.

1악장 — 잠자는 숲속의 미녀 파반느: 멈춰 있는 시간의 음악
이 악장은 움직임이 없는 음악.
파반느(pavane)는 르네상스 시대에 유행했던 느린 궁정 무곡이죠. 라벨이 선택한 건 바로 이 형식, 거의 멈춰 있는 듯한 음악인 셈입니다. 잠든 미녀는 움직이지 않거든요. 그 주변의 시간마저 멈춰버린 듯한 정적. 라벨은 그 고요한 상태를 2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악장에 담아냈더군요.
플루트가 주선율을 부드럽게 내려놓아요. 서두르는 법이 없죠.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굳이 설명하려 들지도 않아요. 마치 잠든 사람 곁을 조용히 지키는 듯한 느낌.
이 짧은 악장이 첫머리에 놓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여기서부터 시간의 속도가 달라지는 까닭입니다. 이 음악을 제대로 따라가려면 평소보다 훨씬 천천히 숨을 쉬어야만 하거든요. 바쁜 일상의 속도 그대로 들으면 이 악장은 ‘그냥 짧은 서두’로 스쳐 지나갈 겁니다. 하지만 이 악장의 속도에 귀를 맞추고 나면, 이후의 악장들이 한층 선명하게 들려오더군요.
2악장 — 엄지동자: 새가 먹어버린 길
아이가 길을 찾으려 애쓰고 있더군요. 오보에가 작은 선율을 반복하거든요. 한 걸음 나아갔다가 돌아오고, 다른 방향으로 가봐도 다시 제자리인 셈입니다.
선율은 결코 목적지에 닿지 못하는 법. 길 자체가 사라져 버린 까닭입니다. 라벨이 인용한 페로의 구절, “새들이 와서 빵 부스러기를 모두 먹어버렸다”를 생각하면 반복의 의미가 새롭게 들려오거든요.
엄지동자는 그저 헤매는 것이 아니더군요. 없는 길을 기어이 찾으려는 겁니다. 있어야 할 것이 사라진 그 자리를 맴돌며 확인하는 아이.
악장 끝에서 음악은 어디에도 닿지 못한 채 흩어지고 말더군요. 씁쓸하지만 절망하지는 않는 모습. 그것이 바로 아이만이 가진 힘인 셈입니다. 어른의 이야기였다면 음악은 한층 어두웠을 겁니다.
라벨 연구가들 사이에서는 이 악장을 두고 흥미로운 해석 차이를 보이거든요. 반복되는 선율에서 아이의 고집과 포기 않는 탐색을 읽어낸 건 아니었을까요? 반대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아이의 불안을 표현했다는 시각. 놀랍게도 두 해석은 동시에 타당하더군요. 이 짧은 악장이 그토록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까닭입니다.
3악장 — 라이데로네트: 저주받은 공주의 화려한 왕국
갑자기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거든요. 행진 리듬으로 시작하며 무언가 이국적이고 독특한 음악이 등장하더군요. 여기서 라벨이 사용한 것은 바로 5음계(pentatonic scale), 서양 음악에서 ‘동양적’인 느낌을 주는 음계 구조랍니다. 라이데로네트가 지배하는 세계는 ‘파고드(pagodes)’의 왕국, 즉 소탑들로 가득한 이국의 궁전인 셈입니다. 글로켄슈필과 목금, 첼레스타는 탑 안에서 울려 퍼지는 기묘한 소리들일 겁니다.
라이데로네트는 돌노아 부인의 동화 ‘초록 뱀’에 나오는 공주이지요. 마법에 걸려 못생긴 모습이 되었지만, 이 악장에서 그녀는 무척 당당하답니다. 비참하거나 슬픈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까닭입니다. 오히려 그 탑 속 이국적인 세계가 무척이나 화려하고 독특하게 들리더군요. 저주받은 여인의 이야기를 이토록 씩씩하게 그려낼 수 있었던 건, 라벨이 그 세계 자체를 매력적인 공간으로 바라보았기 때문 아닐까요?
라벨이 일찍부터 동양 음악, 특히 가믈란(gamelan, 인도네시아 전통 타악기 오케스트라)에 매료되었다는 사실이 이 악장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거든요.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자바 가믈란 연주를 처음 들은 라벨은 그 음색의 세계에 아주 강한 인상을 받았지요. 어미 거위 모음곡을 쓸 무렵엔 이미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그 기억이 이 악장에서 다시 생생하게 살아난 셈입니다.
이 곡을 처음 들을 때 ‘어, 이거 왠지 동양풍 느낌인데?’ 하고 느끼셨다면, 아주 정확한 반응일 겁니다. 라벨이 바로 그런 느낌을 의도한 것.
4악장 — 미녀와 야수의 대화: 저주가 풀리는 음악적 순간
이 악장은 모음곡 전체에서 가장 구체적인 ‘이야기 전개’를 담은 부분.
시작부에서는 콘트라바순(contrabassoon, 대형 저음 관악기로 굉장히 두껍고 거친 소리를 냅니다)이 야수의 목소리를 표현하거든요. 이윽고 클라리넷이 미녀의 선율로 화답하지요. 둘은 서로 다른 리듬과 음색으로 대화를 나누다가, 악장 후반부에 이르러 야수의 저음이 사라지고 현악과 클라리넷의 부드러운 선율로 바뀌는 순간이 찾아오는 겁니다.
저주가 풀린 겁니다. 바로 야수가 왕자로 변하는 셈입니다.
음악이 그걸 직접 말하지는 않거든요. 그저 묘사할 따름이죠. 저음이 걷히고 현악이 따뜻하게 차오르는 그 순간,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조차 무언가 변했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되더군요. 라벨이 의도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을까요? 설명 없이 음악 자체가 변신을 들려주는 것.
이 왈츠풍 악장이 미녀와 야수가 나누는 대화를 왈츠 리듬으로 구성했다는 점도 흥미로운 까닭입니다. 어색한 두 존재가 리듬 안에서 조금씩 서로를 맞춰가다가, 마침내 하나가 되는 것처럼 말이에요.
5악장 — 요정 정원: 동화가 끝나고 남는 빛
마지막 악장은 마치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들리더군요.
‘요정 정원(Le jardin féerique)’은 느리고 장중하게 시작해 점점 빛을 쌓아가거든요. 마침내 현악기 전체가 환하게 펼쳐지며 눈부신 장조의 클라이맥스에 도달하는 셈입니다. 발레 버전에서는 바로 이 대목이,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왕자의 입맞춤으로 깨어나는 순간.
이 악장이 모음곡 중에서 가장 자주 홀로 연주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완결된 감동을 선사하거든요. 어떤 이야기의 마지막 장, 혹은 인생의 한 막이 내린 뒤에 찾아오는 바로 그 고요하고 빛나는 순간.
2017년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Call Me by Your Name)’의 감독 루카 과다니노는 왜 이 악장을 선택했을까요? 그의 선택은 정말이지 탁월하더군요. 어떤 끝맺음 뒤에 남는, 슬픔인지 아름다움인지 모를 그 복잡미묘한 감정을 이 곡이 정확히 포착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요정 정원’은 그저 단순한 마지막 악장이 아닌 셈입니다. 앞선 네 개의 이야기가 모두 끝난 뒤, 세상이 제자리로 돌아온 듯하면서도 무언가 영원히 달라져 버린 바로 그 느낌. 그것이야말로 동화가 동화인 이유이며, 이 음악이 ‘어미 거위 모음곡’인 진정한 까닭입니다.
라벨이 평생 숨긴 감정
라벨은 평생 자신의 감정을 직접 드러내지 않는 작곡가였죠. ‘볼레로(Boléro)’는 반복의 구조 실험이었고, ‘라 발스(La Valse)’는 왈츠에 대한 냉소적인 패러디에 가까워요. ‘피아노 협주곡 G장조’는 재즈와 클래식의 균형을 맞추려던 시도였던 셈입니다. 그래서 라벨의 음악은 대체로 표면이 매끈하며 속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법이거든요.

그런데 어미 거위 모음곡은 사뭇 다른 결을 보여주더군요.
이 곡에서 라벨은 자신이 사랑하던 두 아이를 떠올리며 작곡에 임했답니다. 어떤 정치적 의도나 미학적 실험이 아닌, 그저 아이들이 이 음악을 연주하며 즐거워하기를 바라는 순수한 마음. 그리고 아마도, 아버지를 막 여읜 자신이 고데브스키 가족의 시골집에서 보냈던 그 여름을 그리워하지는 않았을까요?
그래서 이 곡 안에는 라벨의 다른 작품들에서 잘 보이지 않는 특별한 무언가가 담겨 있어요. 서두르지 않는 느낌,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여유, 어딘가 따스한 체온이 느껴지는 음악이 바로 그 까닭입니다.
라벨이 세상을 떠난 건 1937년의 일이었죠. 자동차 사고 후유증으로 인한 뇌질환(전두측두엽 치매로 추정)이 원인이었습니다. 마지막 몇 년을 그는 쓰고 싶어도 더는 쓸 수 없는 상태로 보내야만 했던 겁니다. 머릿속에서 음악이 생생히 들렸지만 손이 따라주지 않았다는 증언이 남아 있거든요.
어미 거위 모음곡은 그런 라벨이 아직 모든 것이 가능했던 시절, 가장 가까운 이들을 위해 남긴 소중한 선물. 그 사실을 알고 듣는 감상은 모를 때와는 꽤 다를 수밖에 없겠지요.
처음 듣는다면 — 이것만 알고 들으세요
전곡 연주 시간은 약 15분에서 17분 남짓. 그리 길지 않은 셈입니다. 처음 들을 때 알아두면 감상이 훨씬 즐거워지는 몇 가지 정보거든요.
각 악장에는 구체적인 동화 장면이 담겨 있더군요. 1악장은 잠든 미녀 곁의 시간, 2악장은 숲속에서 길 잃은 아이, 3악장은 이국의 탑, 4악장은 저주가 풀리는 순간, 그리고 마지막 5악장은 모든 동화가 끝난 뒤의 빛나는 정원. 이 이미지들을 떠올리며 들으면 각 악장이 훨씬 선명하게 다가올 겁니다.
3악장에서 낯선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요? 라벨이 의도적으로 5음계(펜타토닉 스케일)를 사용해 동양적인 분위기를 연출한 까닭입니다. 바로 그 낯섦을 즐기는 것이 이 악장의 매력이죠. 목관악기와 타악기의 질감이 다른 악장과 확연히 다르다는 걸 금방 알아채실 겁니다.
4악장에서는 저음이 사라지는 순간에 집중할 차례. 콘트라바순의 묵직한 저음이 걷히고 현악기가 따스하게 떠오르는 바로 그 순간이, 야수가 왕자로 변하는 극적인 장면이거든요. 악보가 없어도 귀로만 들어도 그 변화가 온전히 느껴지더군요.
마지막 5악장의 미덕은 바로 서두르지 않는 느긋함. 앞선 네 개의 동화를 충분히 음미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클라이맥스가 찬란하게 열리는 셈입니다. 만약 처음부터 이 악장으로 건너뛰면 그저 ‘예쁜 오케스트라 음악’ 정도로만 느껴질 테지요. 하지만 앞선 악장들의 서사를 모두 겪고 나서 이 클라이맥스를 마주하는 감동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랍니다.
추천 녹음 — 세 가지 접근
제임스 가피건 / 오슬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2020년대)
오슬로 필하모닉의 수석 지휘자 가피건이 이끈 현대적인 연주. 각 악장의 색깔이 참으로 선명하고 투명하더군요. 특히 3악장 ‘라이데로네트’에서는 목관악기와 타악기의 질감이 아주 잘 살아나거든요. 처음 이 곡을 접하는 청취자에게 권하기에 더없이 좋은 선택인 셈입니다. 전체적으로 맑고 세련된 음향이 특징.
https://www.youtube.com/watch?v=b4tMATIRHH0
알렉산더 셸리 / 시몬 볼리바르 심포니 오케스트라
영국 지휘자 셸리와 베네수엘라의 시몬 볼리바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만남입니다. 넘치는 에너지와 함께 각 악장의 대비가 무척 선명할 겁니다. 1악장의 나른함, 3악장의 생동감, 5악장의 클라이맥스가 모두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이 이 연주의 탁월함의 까닭이죠. 라벨의 관현악 편곡이 얼마나 다채로운지 확인하기에 딱 좋은 연주랄까요?
https://www.youtube.com/watch?v=Be02iNjiHZs
세이지 오자와 /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1974, DG)
오자와와 보스턴 심포니의 1974년 DG 녹음은 이 곡의 고전적인 명반으로 꼽히거든요. 특히 5악장 ‘요정의 정원’ 클라이맥스에서 음량을 서서히 쌓아 올리다 현악 파트가 활짝 만개하는 순간의 설계, 그 얼마나 감동적이었을까요? 라벨의 오케스트레이션이 어떻게 들려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모범 답안.
악보와 함께 듣기
라벨의 음색 설계를 더 선명하게 파악하고 싶다면 악보가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마침 ‘어미 거위 모음곡’ 악보는 IMSLP에 무료로 공개되어 있거든요. 악보를 눈으로 따라가며 감상할 때 비로소 완성되는 음향의 마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