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스트 – 행성, Op.32

별점이 아니라 인간의 일곱 가지 기분

작곡가
구스타프 홀스트
(Gustav Holst, 1874~1934)
곡명
행성, Op. 32
(The Planets, Op. 32)
작곡 기간
1914 ~ 1917
악장
7곡
I. 화성, 전쟁을 가져오는 자
II. 금성, 평화를 가져오는 자
III. 수성, 날개 달린 전령
IV. 목성, 쾌활함을 가져오는 자
V. 토성, 노년을 가져오는 자
VI. 천왕성, 마법사
VII. 해왕성, 신비주의자
편성
플루트 4(피콜로·베이스플루트), 오보에 3(잉글리시 혼), 클라리넷 3(베이스 클라리넷), 바순 3(콘트라바순), 호른 6, 트럼펫 4, 트롬본 3, 테너 튜바, 튜바, 팀파니 2조, 타악기 다수, 튜뷸러 벨, 첼레스타, 하프 2, 오르간, 현 5부, 여성 합창(해왕성)
초연
1918년 9월 29일, 런던 퀸스 홀 (비공개)
에이드리언 볼트 지휘
연주 시간
약 50분

이 곡은 — 점성술에 빠진 영국 작곡가가 일곱 행성의 '성격'을 관현악으로 그린 7악장 모음곡이에요. 우주 다큐가 아니라 인간의 일곱 가지 기분입니다.

딱 하나만 듣는다면 — 〈화성〉의 5/4박자 기계 리듬. 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도 전에 완성된 전쟁의 음악이거든요.

첫 음반 — 샤를 뒤투아 · 몬트리올 교향악단 (Decca). 투명하고 균형 잡힌 소리라 입문에 딱 좋지요.

먼저 듣기 — 홀스트 《행성》 전곡. 화성의 포효부터 해왕성의 소멸까지, 틀어두고 읽으면 글이 훨씬 살아납니다.

1918년 9월 29일, 런던 퀸스 홀. 일요일 아침이었습니다. 단원들은 두 시간 전에야 처음 악보를 받았고, 합창단은 근처 학교에서 급하게 부른 여학생들이었지요. 객석엔 초대장 받은 250명이 전부. 20세기 관현악의 물줄기를 바꿀 초연치고는, 어처구니없을 만큼 초라한 무대였습니다.

게다가 지휘대에 오른 사람은 작곡가 본인이 아니었어요. 이 자리가 어떻게 마련됐는지, 그 사연이 이 곡의 성격을 반쯤 설명해 줍니다. 왜 홀스트는 자기 인생작의 초연을 남의 손에 맡겼을까요.

구스타프 홀스트 초상 사진, 1921년경 허버트 램버트 촬영
구스타프 홀스트, 1921년경. 이름은 독일식이지만 뼛속까지 영국 사람이었지요.

스페인 술자리에서 옮은 병

구스타프 홀스트. 이름만 들으면 영락없는 독일 사람 같지만 영국인입니다. 정확히는 스웨덴·라트비아·독일 혈통이 뒤섞인 영국인이지요. 집안의 '폰(von)' 칭호마저 할아버지가 학생을 더 끌어모으려고 슬쩍 갖다 붙인 가짜 귀족 딱지였습니다. 허세는 집안 내력이라고 해도 되겠네요.

1913년 봄, 홀스트는 친구 벨푸어 가디너, 작곡가 아널드 백스(Arnold Bax), 그리고 백스의 형이자 작가인 클리퍼드 백스(Clifford Bax)와 함께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어느 날 밤, 누군가 술자리에서 점성술 이야기를 꺼냈어요. 보통 사람이라면 안주 삼아 흘려보냈을 잡담이었을 겁니다.

홀스트는 달랐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썼거든요. “나는 음악을 떠올리게 하는 것만 공부해. 산스크리트어를 파고든 것도 그래서였고. 요즘은 각 행성의 성격이 내게 엄청난 걸 불러일으켜서, 점성술을 꽤 진지하게 공부하고 있어.”

클리퍼드 백스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홀스트는 놀라울 만큼 능숙한 별자리 해석가가 되었다.” 참고로 홀스트가 점성술 직전에 붙들고 있던 건 산스크리트어였습니다. 힌두 경전을 원문으로 읽고 싶어서요. 이 사람, 한번 꽂히면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던 겁니다. 점성술은 그저 산스크리트어 다음 순번이었던 셈이지요.

1926년, 홀스트는 클리퍼드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게 좋은 곡이든 나쁜 곡이든, 내 마음속에서 천천히 자랐어 — 마치 여자의 자궁 속 아기처럼.” 2년 넘게 머릿속에서 형체를 갖춰 간 아이. 스페인의 술자리 잡담 하나가 인생작의 씨앗이 될 줄, 그때 누가 알았을까요.

피아노를 못 친 손, 198쪽의 총보

여기서 짚어 둘 게 하나 있습니다. 홀스트는 원래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지만 되지 못한 사람이었어요. 오른팔 신경염 때문이었지요. 본인 표현을 빌리면 그의 팔은 “전기가 과충전된 젤리” 같았습니다. 건반 위에서 손가락이 제멋대로 놀았다는 뜻입니다.

피아노를 칠 수 없으니 트롬본을 불었습니다. 아버지가 천식에 좋을 거라며 권한 악기였는데, 이 트롬본이 결국 그를 왕립음악대학까지 데려다줬거든요. 여름엔 해변 리조트에서, 겨울엔 런던 극장 오케스트라에서 트롬본을 불며 겨우 생계를 이었습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산 건 딱 세 가지였어요. 숙식비, 오선지, 그리고 코벤트 가든 스탠딩석 티켓. 가난한 청년의 사치 목록치고는 참 그 사람답지요.

왕립음악대학에서 스탠퍼드(Charles Villiers Stanford)에게 작곡을 배울 무렵, 홀스트는 바그너에 완전히 빠져 있었습니다. 딸 이모젠 홀스트의 표현을 빌리면 “소화되지 않은 《트리스탄》의 조각들이 그의 거의 모든 페이지에 끼어들었다”고 하네요. 스탠퍼드의 반응은 한결같았습니다. “안 돼, 이 친구. 안 된다니까.”

정작 그의 음악 인생을 바꾼 건 교수가 아니라 동급생이었습니다. 1895년, 스물한 살 생일 직후에 만난 랠프 본 윌리엄스(Ralph Vaughan Williams). 두 사람은 “더블베이스의 최저음부터 소설 《무명의 주드》의 철학까지” 온갖 주제를 밤새 토론했고, 서로의 미완성 악보를 세상에서 가장 먼저 들려주는 사이가 됐지요. 54년 뒤 본 윌리엄스가 쓴 추도사는 이랬습니다. “홀스트는 자기 음악이 내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그 반대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학비를 아끼려 채식주의자에 금주가로 살던 가난한 트롬본 주자에게, 이 우정만은 유일한 사치였던 까닭입니다.

그런 홀스트가 《행성》이라는 거대한 관현악 모음곡의 총보 198쪽을 손수 써야 했습니다. 신경염에 시달리는 팔로는 애초에 불가능한 노동이었어요. 그래서 세인트폴 여학교의 두 동료 교사, 밸리 래스커(Vally Lasker)와 노라 데이(Nora Day)가 그의 '서기'를 자처합니다. 홀스트가 머리로 구상하면 두 사람이 받아 적었지요. 그마저도 주말과 방학에만 가능했으니, 2년이 넘게 걸린 게 당연했습니다.

홀스트 행성 초판 악보 표지, 1921년 200부 한정판
《행성》 초판 악보 표지(1921년). 200부 한정판 중 홀스트 본인 소장본이지요.

전쟁이 터지기도 전에 완성된 전쟁의 음악

《행성》에서 가장 먼저 완성된 악장은 첫 곡 〈화성, 전쟁을 가져오는 자〉입니다. 1914년 중반에 쓰였지요. 잠깐, 1914년 중반이라면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바로 직전입니다. 전쟁의 음악이 전쟁보다 먼저 나온 겁니다.

화성 — 기계가 걷는 소리

5/4박자의 집요한 오스티나토가 곡을 밑에서 떠받칩니다. 팀파니와 하프, 그리고 활등으로 현을 때리는 콜 레뇨 주법이 만드는 이 리듬은 선율이 아니라 발걸음에 가까워요. 군대가, 아니 기계가 행진하는 소리지요. 불협화음은 차곡차곡 쌓이다가 쿼드러플 포르테(ffff)의 비명으로 터집니다. 서정 같은 건 애초에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작곡가 콜린 매슈스(Colin Matthews)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홀스트에게 화성은 리듬과 충돌하는 조성의 실험이었을 것이다. 연주에서 드러난 폭력성은 작곡가 자신조차 놀랐을 만큼, 첫 청중을 전율하게 했다.” 전쟁을 그린 음악이야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의 《영웅의 생애》 같은 곡 말이지요. 그러나 이런 순수한 공포, 인간이 빠진 기계의 폭력은 없었어요.

베를리오즈가 단두대와 마녀의 밤을 관현악으로 그린 지 80여 년, 표제음악은 마침내 전쟁 그 자체의 기계적 공포에 도달한 셈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게 실제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쓰였다는 사실. 예언이었을까요, 아니면 1914년 유럽의 공기 자체가 이미 화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던 걸까요.

🎧 여기서 들으세요 — 첫 마디부터 저 5/4박자 발걸음에 몸을 맡겨 보세요. 선율을 찾지 말고, 리듬이 어떻게 조여 오는지를 들으면 됩니다. 마지막 ffff가 터지는 순간엔 소름이 알아서 판단해 줄 겁니다.

〈화성, 전쟁을 가져오는 자〉 — BBC Proms 실황. 5/4박자의 기계적 발걸음이 홀을 가득 채웁니다.

일곱 행성, 일곱 개의 기분

홀스트는 《행성》을 “일련의 분위기 그림”이라고 불렀습니다. 각 악장이 서로의 “배경”이 되고, 한 악장 안에는 대비가 거의 없다고요. 이 발상의 원형은 뜻밖의 곳에서 왔어요. 쇤베르크(Arnold Schoenberg)의 《관현악을 위한 다섯 개의 소품》입니다. 1912년과 1914년 런던 공연을 직접 듣고 악보까지 소장했던 홀스트에게, 이 전위적인 모음곡 형식이 결정적인 힌트를 준 거지요.

사실 홀스트는 교향곡 같은 대형 구조를 몹시 버거워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각 악장이 독립된 성격을 지닌 모음곡'이라는 틀은 완벽한 탈출구였던 까닭입니다. 굳이 주제를 논리적으로 전개할 필요 없이, 일곱 개의 초상을 그저 나란히 걸어 놓으면 됐으니까요.

재미있는 건 배열 순서입니다. 일곱 행성이 태양에서 가까운 순으로 놓이지 않아요. 홀스트의 초기 스케치에서는 수성이 '1번'이었습니다. 태양계 순서를 따르려 했던 거지요. 하지만 그는 곧 화성을 맨 앞으로 끌어옵니다. 전쟁의 포효로 문을 여는 편이 훨씬 극적이었으니까요.

작곡 순서는 더 뒤죽박죽입니다. 화성(1914년 중반)에서 시작해 금성·목성(1914년 하반기), 토성·천왕성(1915년 중반), 해왕성(1915년 하반기)을 지나 수성(1916년 초)으로 끝났어요. 가장 짧은 악장인 수성이 가장 늦게 완성됐다는 게 아이러니하지요. 관현악 편곡을 최종적으로 마무리한 건 1917년이었습니다.

점성술이 출발점이긴 했지만, 홀스트는 규칙을 아주 편하게 무시했습니다. 점성술에서 제일 중요한 태양과 달을 과감히 빼 버렸고, 각 행성에 점성술과 무관한 성격을 제멋대로 붙이기도 했거든요. 점성술사 알란 레오(Alan Leo)의 소책자 《별자리란 무엇인가?》에서 '날개 달린 전령'과 '신비주의자' 같은 부제만 슬쩍 빌려 온 뒤, 나머지는 전부 자기 식이었지요. 점성술 매니아치고는 어지간히 불성실한 제자였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규칙을 배신했기에 걸작이 나온 건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이걸 교향곡으로 들으면 곤란합니다. 《행성》은 교향곡이 아니에요. 일곱 악장은 하나의 주제를 주고받으며 발전하지 않습니다. 각자 독립된 초상으로 그저 걸려 있을 뿐이지요. 베토벤 이후 교향곡이 '주제의 논리적 전개'를 미덕으로 삼았던 걸 생각하면, 꽤 도발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초연 무렵엔 이 작품을 화려하지만 속은 빈 그림 모음쯤으로 깎아내리는 시선도 적지 않았고요. 그런데 바로 그 '전개 없음'이야말로 훗날 영화음악이 사랑하게 될 어법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끌고 가기보다 장면마다 색을 칠하는 음악. 홀스트는 그걸 1916년에 이미 하고 있었던 겁니다.

가려진 세 행성 — 금성, 수성, 천왕성

화성·목성·토성·해왕성의 그늘에 가려, 자주 건너뛰어지는 세 악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셋을 빼놓고서 《행성》을 다 들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요. 나란히 놓고 보면 오히려 이 곡의 진짜 폭이 보이거든요.

금성 — 화성이 지른 비명에 대한 대답

〈금성, 평화를 가져오는 자〉는 화성이 끝나자마자 곧장 이어집니다. 앞선 폭력에 대한 홀스트의 대답인 셈이지요. 독주 호른이 조용히 첫 음을 던지면 플루트와 오보에가 화답하고, 독주 바이올린과 첼레스타, 두 대의 하프가 투명한 음색을 깔아 놓습니다. 화성의 쇳소리와 완벽한 대척점이에요. 전쟁 바로 다음 칸에 평화를 놓은 그 배치 자체가, 말없이 던지는 한 문장인 겁니다.

🎧 여기서 들으세요 — 금성 도입부의 독주 호른이 들어오는 순간, 방금 화성에서 느낀 긴장이 어떻게 풀리는지 몸으로 확인해 보세요. 두 악장은 반드시 붙여 들어야 제맛입니다.

수성 —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곡

〈수성, 날개 달린 전령〉은 가장 짧고(약 4분) 가장 늦게(1916년) 쓰인 악장입니다. 홀스트가 마지막까지 가장 애를 먹은 곡이기도 하지요. 비밀은 복조성(複調性)에 있습니다. B♭장조와 E장조라는, 서로 가장 멀리 떨어진 두 조성을 동시에 울리게 한 겁니다. 게다가 6/8박자와 2/4박자가 끊임없이 어긋나며 스칩니다. 발에 날개가 달린 전령의 신, 그 변덕스럽고 재빠른 움직임을 소리로 옮긴 거예요. 듣다 보면 정말이지 어디에도 발이 닿지 않는 느낌이 듭니다.

🎧 여기서 들으세요 — 수성이 시작되면 박자를 세려고 애쓰지 마세요. 세는 순간 놓칩니다. 그냥 미끄러지는 감각에 몸을 맡기면 됩니다.

천왕성 — 자기 마법을 스스로 부수는 마법사

〈천왕성, 마법사〉는 폴 뒤카의 〈마법사의 제자〉와 자주 비교됩니다. 금관이 던지는 네 개의 음, 그 짧은 동기가 마법의 주문처럼 곡 전체를 지배하지요. 바순과 금관이 둔중하게 발을 구르면 음악은 거대한 춤이 되어 점점 광기로 치닫습니다. 그러다 절정에서, 오르간이 온 음역을 한 번에 쓸어내리는 글리산도 한 방으로 쌓아 올린 모든 걸 무너뜨려요. 자기가 부린 마법을 자기 손으로 부숴 버리는 겁니다.

그 뒤 음악은 마법이 풀리듯 갑자기 사그라들고, 멀리서 메아리만 남습니다. 익살과 위협이 한 몸에 든, 《행성》에서 가장 연극적인 악장이지요. 화성의 공포도 토성의 체념도 아닌 제3의 표정입니다.

🎧 여기서 들으세요 — 오르간 글리산도가 모든 걸 쓸어버리는 그 한순간을 기다리세요. 절정에서 갑자기 바닥이 꺼지는 듯한 그 낙차가 이 악장의 정체입니다.

목성 — 누구나 아는 그 멜로디의 비밀

〈목성, 쾌활함을 가져오는 자〉. 아마 《행성》에서 가장 유명한 악장일 겁니다. 알레그로 조코소로 시작하는 첫 부분은 폭발적인 에너지로 넘실거리지요. 그런데 중간의 안단테 마에스토소에서 홀스트는 갑자기 장엄하고 너른 선율을 꺼내 놓습니다. 고귀하고 너그러운, 목성 아래 태어난 사람들의 기질을 담았다는 바로 그 멜로디예요.

이 선율은 훗날 영국 찬가 〈I Vow to Thee, My Country〉로 편곡됩니다. 홀스트의 딸 이모젠은 이 때문에 원래 음악이 손상됐다며 두고두고 아쉬워했지요. 아버지는 애초에 그런 장엄한 의도로 쓴 게 아니었으니까요. 홀스트 본인이 남긴 1926년 녹음을 들어 보면 금방 확인됩니다. 이건 행진곡이 아니라 쾌활하고 풍요로운 기운의 춤입니다.

한 가지 더 짚고 싶은 게 있어요. 이 악장의 마지막은 마에스토소 선율이 돌아오지만, 기대했던 종지가 끝내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냥 온 오케스트라의 쿼드러플 포르테 한 방으로 뚝 끊기지요. 결론 없는 환희. 어쩐지 참 목성답습니다.

🎧 여기서 들으세요 — 중간부의 그 유명한 '고귀한' 선율이 처음 등장하는 지점을 기다렸다가, 곡 끝에서 그게 어떻게 미완으로 끊기는지를 비교해 들어 보세요. 홀스트의 장난기가 거기 숨어 있습니다.

〈목성, 쾌활함을 가져오는 자〉. 중간부 선율이 뒷날 영국 찬가로 편곡됐지만, 홀스트는 행진곡이 아니라 풍요의 춤으로 썼습니다.

토성 — 홀스트가 가장 사랑한 악장

많은 사람이 목성을 《행성》의 얼굴로 꼽습니다. 정작 홀스트 본인은 달랐어요. 그가 가장 아낀 악장은 토성이었거든요.

〈토성, 노년을 가져오는 자〉를 두고 콜린 매슈스는 “무서운 클라이맥스까지 솟아올랐다가, 마치 우주의 먼 끝으로 사라져 가듯 희미해지는 느린 행렬”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시작부터 기이하지요. 플루트와 바순, 하프가 시계 소리 같은 주제를 놓습니다. 째깍, 째깍. 시간이 흐르고 있다고 알려 주는 겁니다.

그 위로 트롬본이 장엄한 선율을 얹습니다. 홀스트의 주 악기가 트롬본이었다는 걸 다시 떠올려 보세요. 이 악장에서 그는 자기 악기에게 가장 깊은 말을 시킨 셈이지요. 음악은 천천히, 그러나 거대하게 부풀어 오르다가 트리플 포르테의 절정에서 튜뷸러 벨을 울립니다. 교회 종처럼, 장례식처럼. 그리고 모든 것이 조용히 사라집니다.

홀스트가 이 악장을 완성한 건 1915년, 세계대전 한복판이었습니다. 시간이 모든 걸 앗아간다는 이 메시지가 그때 그에게 얼마나 사무쳤을지, 자꾸 상상하게 됩니다. 젊음도, 건강한 팔도, 결국 시간이 가져갔으니까요.

🎧 여기서 들으세요 — 도입부의 '째깍째깍' 시계 소리 위로 트롬본이 처음 얹히는 순간에 집중하세요. 이 곡을 쓴 사람이 트롬본 주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들으면, 그 소리가 완전히 다르게 들립니다.

〈토성, 노년을 가져오는 자〉 — 덴마크 국립 교향악단 실황. 시계 소리 위로 트롬본이 얹히는, 홀스트가 가장 사랑한 악장.

해왕성 —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래하는 합창

《행성》의 마지막 악장은 〈해왕성, 신비주의자〉입니다. 여기서 홀스트는 음악사에서 전례 없는 시도를 하지요. 여성 합창단을 등장시키는데, 무대 위가 아닙니다. 객석에서 보이지 않는 별도의 방에 숨겨 놓고, 문은 반드시 닫아 두라고 지시했거든요.

소프라노 두 파트와 알토 한 파트로 짜인 합창단 둘이 가사 없이 노래합니다.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는 목소리. 부제 '신비(mystic)' 그대로예요. 그리고 이 합창은 오케스트라가 완전히 침묵한 뒤에도 계속됩니다. 점점 작아지다가, 그냥 사라져 버리지요. 끝이 아니라 소멸입니다.

홀스트가 “이 작품의 끝은 행복하지 않다”고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그가 목성으로 끝나는 해피엔딩을 그토록 싫어한 까닭이기도 하고요. 참, 1918년 초연 때 이 합창단은 홀스트가 직접 가르치던 몰리 칼리지와 세인트폴 여학교 학생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우주의 끝을 노래한 셈이지요.

🎧 여기서 들으세요 — 오케스트라가 멈춘 뒤에도 이어지는 여성 합창을 끝까지 놓치지 마세요. 소리가 '끝나는' 게 아니라 '사라지는' 그 경계가 이 곡의 전부입니다. 볼륨을 조금 올려 두면 그 소멸이 더 또렷하게 들립니다.

〈해왕성, 신비주의자〉. 보이지 않는 방의 여성 합창이 가사 없이 노래하다, 그냥 사라집니다.

💡 사실은요 — “《행성》에 왜 지구가 없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천문학 실수가 아니에요. 홀스트는 천문학이 아니라 점성술의 시선으로 이 곡을 짰거든요. 점성술에서 지구는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관측자가 서 있는 자리일 뿐입니다. 같은 이유로 태양과 달도 빠졌지요. (근거: Imogen Holst, The Music of Gustav Holst; Alan Leo, What is a Horoscope?)

250명 앞의 초연, 그리고 싫어한 명성

런던 퀸스 홀 내부 공연 실황, 에리히 잘로몬 촬영
런던 퀸스 홀 내부. 《행성》이 처음 울린 이 홀은 1941년 독일 공습으로 잿더미가 됐지요.

다시 1918년 9월 29일로 돌아가 봅시다. 이 초연이 성사된 건 순전히 벨푸어 가디너의 '송별 선물' 덕분이었습니다. 당시 홀스트는 YMCA를 통해 곧 살로니카로 음악 봉사를 떠날 참이었는데, 마음씨 좋은 친구 가디너가 송별 선물로 퀸스 홀과 오케스트라를 일요일 아침 내내 통째로 빌려 준 거예요. 홀스트는 그 길로 친구 에이드리언 볼트(Adrian Boult)의 사무실에 불쑥 쳐들어가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요. “《행성》을 하자. 네가 지휘해야 해.” 송별 선물이 콘서트홀이라니, 그것도 런던 최고의 홀을. 20세기 관현악사를 바꿀 초연이 이렇게 얼떨결에 시작된 겁니다.

오케스트라는 그 복잡한 악보를 두 시간 만에 초견으로 연주했습니다. 객석의 250명은 죄다 초대받은 관계자들뿐이었지요. 그래도 홀스트는 이것을 공식 초연으로 여겼습니다. 볼트에게 선물한 총보에 이렇게 적어 넣었으니까요. “이 악보는 에이드리언 볼트의 소유물이다. 그는 행성을 처음으로 세상에 빛나게 한 사람이며, 이로써 구스타프 홀스트의 감사를 얻었다.”

지휘자 에이드리언 볼트 초상, 1923년
에이드리언 볼트. “행성을 처음으로 세상에 빛나게 한 사람”이라고 홀스트가 총보에 적었지요.

그 뒤 이야기는 좀 웃깁니다. 1919년 2월 왕립 필하모닉 협회 콘서트에서 볼트는 일곱 악장 중 다섯 개만 연주했어요. 이유가 걸작이지요. “청중이 이런 완전히 새로운 언어를 들을 때, 30분이 한계”라는 판단이었습니다. 홀스트는 이걸 몹시 싫어했습니다. 이모젠의 회고에 따르면 아버지는 “《행성》의 불완전한 연주를 혐오했다”고 하네요. 특히 목성으로 끝맺는 걸 가장 못 견뎌 했습니다. 억지로 행복한 결말을 만드는 짓이었으니까요.

홀스트의 원래 설계대로라면 이 작품은 해왕성의 소멸로 끝나야 합니다. 행복이 아니라 우주의 고요 속으로 스러지면서요. 그런데 정작 《행성》이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하자, 홀스트는 기뻐하기는커녕 괴로워했습니다. 원체 수줍음 많은 사람이었거든요. 유명세를 반기지 않았고, 그저 조용히 혼자 작곡하고 가르치기를 원했지요. 이후 그의 음악은 점점 금욕적이고 사적인 방향으로 흘렀고, 짧았던 인기도 이내 식어 버렸습니다.

스타워즈의 먼 할아버지

《행성》의 영향력은 홀스트가 죽은 뒤에 오히려 더 커졌습니다. 특히 영화음악에서요.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가 〈스타워즈〉의 사운드를 빚을 때 화성의 추진력과 금관 어법이 그 바탕에 깔려 있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요. 굳이 한 곡을 콕 집지 않더라도, '우주를 배경으로 한 거대한 관현악'이라는 발상 자체가 이미 《행성》에 빚지고 있는 겁니다.

한스 짐머(Hans Zimmer)가 〈글래디에이터〉나 〈인셉션〉에서 쓴 묵직한 오스티나토 역시 같은 핏줄입니다. SF·블록버스터 영화가 들려주는 그 광활한 소리, 그 먼 조상이 바로 점성술에 빠진 영국 작곡가의 모음곡이었던 거죠. 아이러니한 건, 정작 홀스트 자신은 이런 '장대한 우주음악'이라는 이미지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에게 행성은 우주의 스펙터클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간의 일곱 가지 기분이었으니까요.

홀스트는 1934년 5월 25일, 궤양 수술 뒤 심부전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59세, 유해는 치체스터 대성당에 안치됐지요. 여담이지만 그의 남동생 에밀은 '어니스트 코사트'라는 이름으로 웨스트엔드와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배우가 됐습니다. 형은 우주를 음악으로 그렸고, 동생은 무대 위에서 연기했어요. 가짜 귀족 딱지 '폰 홀스트' 집안의 두 아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을 사로잡은 셈입니다.

그가 끝내 가장 사랑한 건 토성이었습니다. 시간이 모든 것을 앗아간다는 이야기. 어쩌면 그는 자신의 운명을 진작에 알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피아니스트가 되려다 신경염에 막히고, 트롬본을 불며 겨우 살아남고, 198쪽 총보를 남의 손을 빌려 완성하고, 세상이 보내 준 명성마저 도리어 짐스러워한 사람. 《행성》은 점성술에서 출발했지만 점성술의 음악이 아닙니다. 전쟁 전에 전쟁을 썼고, 쾌활함 속에 미해결의 종지를 숨겼고, 끝을 끝이 아니라 소멸로 만들었지요. 홀스트가 우주에서 캐낸 건 별의 운세가 아니라, 인간의 감정이었습니다. 해왕성의 합창이 사라진 뒤에도 귓가에 남는 것 — 그게 이 음악의 진짜 여운이 아닐까요.

악보와 함께 듣기

악보를 따라가며 듣는 영상. 5/4박자 오스티나토가 총보에서 어떻게 생겼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지요.

원본 악보는 IMSLP에서 누구나 무료로 열람할 수 있거든요. 《행성》 Op.32 악보 보기 (IMSLP)

어떤 연주로 시작할까

《행성》은 80번 넘게 녹음된, 영국 관현악에서 가장 자주 무대에 오르는 작품입니다. 그만큼 명연도 많지요. 처음이라면 아래 세 장에서 고르면 크게 어긋나지 않습니다.

👑 첫 감상 추천

샤를 뒤투아 · 몬트리올 교향악단

Decca

투명하고 균형 잡힌 소리라 일곱 악장의 색이 또렷하게 갈립니다. 처음 전곡을 통으로 듣기에 부담이 없어요.

레퍼런스

에이드리언 볼트 · 여러 녹음

EMI 등

초연을 지휘한 당사자답게 가장 권위 있는 기준점입니다. 다만 옛 녹음 특유의 소리 질감은 요즘 귀엔 다소 밋밋하게 들릴 수 있어요.

와일드카드

구스타프 홀스트 · 작곡가 자작 지휘

1926년 녹음

음질은 거칠지만 목성을 행진곡이 아니라 쾌활한 춤으로 들려줍니다. 작곡가의 원래 의도가 궁금하다면 딱 한 번은 들어볼 값어치가 있지요.

《행성》에 왜 지구가 없나요?

천문학이 아니라 점성술의 관점에서 짠 곡이거든요. 점성술에서 지구는 관측자가 서 있는 자리일 뿐, 해석의 대상이 아닙니다. 같은 이유로 태양과 달도 모음곡에서 빠졌지요.

명왕성 악장도 홀스트가 작곡했나요?

아닙니다. 《행성》은 1914~1917년에 쓰였고, 명왕성이 발견된 건 1930년이라 홀스트로선 알 도리가 없었어요. 발견 이후에도 그는 악장을 더할 생각이 없다고 분명히 밝혔지요. 훗날 영국 작곡가 콜린 매슈스가 2000년에 〈명왕성, 새로움을 가져오는 자〉를 써 덧붙였는데(할레 오케스트라 위촉), 어디까지나 후대의 보완입니다.

연주 시간은 얼마나 되고 몇 악장인가요?

화성부터 해왕성까지 7악장, 전곡을 이으면 대략 50분입니다. 지휘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요. 콘서트에선 일부만 골라 연주하기도 하지만, 홀스트 본인은 발췌를 싫어해 전곡을 순서대로 듣기를 원했습니다.

〈스타워즈〉 음악이 정말 《행성》에서 영향을 받았나요?

존 윌리엄스의 사운드, 특히 화성의 추진력과 금관 어법이 닮았다는 지적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어느 한 곡을 그대로 옮겼다기보다, 우주를 배경으로 한 거대한 관현악이라는 발상 자체가 《행성》에 빚지고 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지요.

처음 듣는다면 어느 악장부터 들으면 좋을까요?

가장 강렬한 화성과 가장 친근한 목성으로 시작하면 금세 빠져듭니다. 그다음 홀스트가 가장 사랑한 토성, 마지막으로 소리가 그대로 사라지는 해왕성을 들어 보세요. 다만 진짜 매력은 7악장을 순서대로 들을 때 드러난답니다.

참고 자료

이어서 듣기 — 오케스트라가 우주를 그리는 다른 방식들

클래식은 서로 얽힌 이야기를 알수록 더 크게 울리거든요. 《행성》이 관현악으로 '성격'과 '장면'을 그렸다면, 아래 곡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오케스트라를 화폭 삼은 작품들입니다. 색채와 리듬으로 세계를 그린 명작들을 이어서 들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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