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곡가
- 오토리노 레스피기
(Ottorino Respighi, 1879–1936) - 곡명
- 로마의 소나무
(Pini di Roma) - 작곡
- 1924
- 초연
- 1924년 12월 14일, 로마
- 편성
- 플루트 3(피콜로), 오보에 3(잉글리시 혼), 클라리넷 2(베이스 클라리넷), 바순 2, 콘트라바순, 호른 4, 트럼펫 3, 뷰글혼, 트롬본 3, 튜바, 팀파니, 타악기 다수, 하프, 첼레스타, 피아노, 오르간, 축음기(나이팅게일), 현5부
- 악장 구성
- 4악장
I. I pini di Villa Borghese
II. Pini presso una catacomba
III. I pini del Gianicolo
IV. I pini della Via Appia
1악장. 보르게세 별장의 소나무
2악장. 카타콤 부근의 소나무
3악장. 자니콜로 언덕의 소나무
4악장. 아피아 가도의 소나무 - 연주 시간
- 약 22분
1924년 12월 14일, 로마의 테아트로 아우구스테오. 초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묘 위에 세워진 이 극장에서, 관객들은 무대 위의 오케스트라가 아닌 전혀 다른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습니다.
축음기였습니다.
악보에 ‘축음기를 재생하시오’라고 적어 넣은 작곡가. 오토리노 레스피기. 이 이탈리아 사람은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요?
볼로냐에서 온 비올라 주자
레스피기는 1879년 볼로냐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주세페는 우체부이자 피아니스트라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였죠. 어린 레스피기는 음악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여덟 살이 다 되어서야 겨우 악기를 잡았으니까요.
그런데 바이올린 선생이 문제였습니다. 악절을 틀리게 연주했다고 손을 자로 때린 겁니다. 레스피기는 그 자리에서 레슨을 관뒀습니다. 다행히 더 인내심 있는 선생을 만나 다시 시작했지만요.
피아노는 아예 독학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어느 날 퇴근해서 집에 돌아왔더니, 아들이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의 《교향적 연습곡》을 자신 있게 치고 있었습니다. 몰래 배운 겁니다. 하지만 스케일(음계 연습)은 제대로 못 쳤습니다. 그래서 레스피기는 평생 자기 작품에 음계 패시지를 잘 쓰지 않았습니다. 약점을 피해간 거죠.
더 놀라운 건 하프를 며칠 만에 독학으로 마스터했다는 사실입니다. 11개 국어 원서를 읽었고, 베를린에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을 만났을 때는 그의 과학 이론들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어서 아인슈타인 본인이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음악가라기보다는 르네상스인에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만난 스승
1900년, 스물한 살의 레스피기는 러시아 제국 극장의 수석 비올리스트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갑니다. 거기서 그는 평생의 스승을 만났습니다.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Nikolai Rimsky-Korsakov).
《세헤라자데》의 작곡가, 러시아 관현악법의 대가. 레스피기는 다섯 달 동안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오케스트레이션을 배웠습니다. 나중에 레스피기가 보여주는 화려하고 색채적인 관현악법의 뿌리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1901년 볼로냐 음악원 졸업 시험에서, 음악원장 주세페 마르투치(Giuseppe Martucci) 교수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레스피기는 학생이 아니다. 레스피기는 이미 거장이다.”
졸업 작품은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지도 아래 완성한 곡이었습니다.

로마로, 그리고 소나무 사이로
1913년, 레스피기는 로마의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교수로 부임합니다. 볼로냐의 조용한 집을 떠나 번잡한 대도시로 온 그는 처음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불면증에 시달렸고, 향수병을 앓았죠.
하지만 로마에는 그의 상상력을 사로잡는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분수와 소나무.
“이 도시의 경이로운 분수들과, 지평선 어디에서나 우산처럼 펼쳐진 소나무들. 이 두 가지가 무엇보다 내 상상력에 말을 걸었습니다.”
분수에서 영감을 받은 《로마의 분수》(1916)가 그에게 국제적 명성을 안겨줬습니다. 그리고 8년 뒤, 소나무 차례가 왔습니다.
네 그루의 소나무, 네 개의 시간
《로마의 소나무》(Pini di Roma, P.141)는 네 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진 교향시입니다. 각 악장은 로마의 서로 다른 장소에 서 있는 소나무를 그립니다. 하지만 단순한 풍경화가 아닙니다. 시간 여행입니다.
제1악장: 빌라 보르게세의 소나무 — 아이들이 보르게세 공원의 소나무 아래에서 뛰어놉니다. 술래잡기를 하고, 장난감 병정 놀이를 하고, 제비처럼 재잘거립니다.
레스피기의 아내 엘사가 전하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1920년 어느 날, 레스피기가 엘사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어릴 때 보르게세 공원에서 놀면서 부르던 노래, 불러줄 수 있어?” 엘사가 어린 시절의 동요를 흥얼거리자, 레스피기는 그 멜로디를 받아 적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1악장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아내의 유년 시절이 곡 속에 들어간 겁니다.

🎵 첫 번째 추천: hr-Sinfonieorchester · 유라이 발추하(Juraj Valčuha) — 위의 플레이어에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제2악장: 카타콤 근처의 소나무 — 아이들이 갑자기 사라집니다. 지하 묘지 입구를 드리우는 소나무의 그림자만 남았습니다. 장엄한 진혼곡이 울려 퍼집니다. 초기 기독교 시대의 성가 — 키리에(Kyrie)와 상투스(Sanctus) — 가 지하에서 솟아오르듯 들립니다.
무대 뒤에 배치된 트럼펫이 성가를 연주합니다. 오르간은 16피트와 32피트 페달로 지하 세계의 울림을 만들어냅니다. 관객은 로마 지하 카타콤의 어둠 속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죠.
제3악장: 자니콜로 언덕의 소나무 — 보름달이 자니콜로 언덕의 소나무를 비추는 밤. 클라리넷 독주로 시작되는데, 레스피기는 이 대목에 “come in sogno” — “꿈결처럼” — 이라고 지시합니다. 야상곡입니다.
그리고 이 악장의 끝에, 그 유명한 순간이 옵니다.
축음기.
레스피기는 악보에 구체적으로 적어 놓았습니다. 그라모폰 레코드 회사의 디스크 No. R.6105, 《나이팅게일의 노래》(Il canto dell’Usignolo)를 브런즈윅 파나트로프 축음기로 재생하라고. 이 음반은 1910년 독일에서 카를 라이히와 프란츠 함페가 녹음한 것으로, 살아 있는 새의 노래를 상업적으로 녹음한 최초의 레코드입니다.
오케스트라 한가운데서 축음기가 돌아갑니다. 나이팅게일이 노래합니다. 1924년의 관객에게 이것은 충격이었습니다. 클래식 음악 역사상, 녹음된 소리를 라이브 연주에 삽입한 최초의 시도였으니까요.
지금으로 치면 오케스트라 연주 중에 갑자기 스피커에서 자연 다큐멘터리 음향이 나오는 셈입니다.

제4악장: 아피아 가도의 소나무 — 새벽이 밝아옵니다. 안개 속 아피아 가도의 소나무 사이로, 로마 군단이 행군해 옵니다. 레스피기는 땅이 발걸음에 흔들려야 한다고 주문했습니다. 오르간의 8피트, 16피트, 32피트 페달이 동시에 시♭ 음을 울립니다. 6개의 부치나(buccina) — 고대 로마의 원형 군용 나팔 — 가 울려 퍼집니다. 현대 오케스트라에서는 보통 플뤼겔호른이 대신하죠.
트럼펫이 울부짖고, 집정관의 군대가 카피톨리노 언덕을 향해 개선합니다.
레스피기는 초연 전날 리허설이 끝난 뒤, 아내 엘사에게 말했습니다.
“‘아피아 가도의 소나무’ 크레셴도를 들을 때마다 뱃속에서 ‘뭔가’가 느껴져. 내가 상상한 대로 실현된 건 이번이 처음이야.”

🎵 KBS교향악단의 2024년 실황. 지휘자 피에타리 잉키넨(Pietari Inkinen)이 이끄는 연주로, 4악장 아피아 가도의 크레셴도가 끝나자 객석 문까지 열어젖힌 채 기립박수가 쏟아집니다. 레스피기가 “뱃속에서 뭔가가 느껴진다”고 했던 그 순간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영상입니다.
초연, 그리고 토스카니니
1924년 12월 14일의 초연. 지휘는 베르나르디노 몰리나리(Bernardino Molinari), 아우구스테오 관현악단이 연주했습니다. 엘사의 회고에 따르면, 마지막 악장의 끝 부분은 “관객의 열광적인 박수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2주 뒤인 12월 28일에 매진 공연으로 앙코르 연주회가 열렸습니다.
미국 초연은 1926년 1월 14일. 장소는 뉴욕. 지휘자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 이날은 토스카니니가 뉴욕 필하모닉 상임지휘자로서 첫 번째 콘서트를 연 날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데뷔 무대에서 이 곡을 택한 겁니다.
토스카니니와 《로마의 소나무》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1945년, 뉴욕 필하모닉과의 마지막 공연에서도 이 곡을 연주했습니다. 시작과 끝을 같은 곡으로 장식한 셈이죠.
한편 레스피기 본인은 토스카니니의 미국 초연 바로 다음 날,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직접 지휘하며 같은 곡을 연주했습니다. 당시 레스피기는 미국 순회공연 중이었거든요.
🎵 뉴 월드 심포니(New World Symphony)의 2018년 연주. 지휘자 스테판 드네브(Stéphane Denève)가 젊은 음악가들과 함께 4개 악장 전곡을 들려줍니다. 3악장에서 실제 나이팅게일 녹음이 삽입되는 순간과, 4악장의 군단 행진이 압도적으로 다가오는 마지막 크레셴도를 감상해 보세요.
우산 소나무 아래 숨겨진 설계도
《로마의 소나무》에는 숨겨진 구조가 있습니다.
네 악장은 로마 외곽을 반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도는 여행입니다. 빌라 보르게세에서 시작해서 자니콜로 언덕을 지나 아피아 가도로 나가는 경로죠.
시간도 순환합니다. 낮에서 밤으로, 다시 새벽으로. 현재에서 초기 기독교 시대로, 다시 로마 공화정 시대로. 아이들의 놀이에서 시작해 군인들의 행군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3악장의 무대인 자니콜로 언덕. 이 언덕은 야누스(Janus) 신에게 헌정된 곳입니다. 야누스는 시작과 끝의 신이며, 앞과 뒤를 동시에 바라보는 두 개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보는 언덕 위에서, 나이팅게일이 노래합니다.
레스피기는 여기까지 계산한 걸까요? 아마 그랬을 겁니다.
디즈니의 고래부터 록 밴드까지
《로마의 소나무》는 레스피기의 작품 중 가장 많이 녹음된 곡입니다. 2018년 기준으로 100종 이상의 음반이 존재합니다. 프리츠 라이너(Fritz Reiner)와 시카고 심포니의 1959년 스테레오 녹음은 오디오 마니아들의 성경과도 같은 존재죠.
하지만 이 곡의 영향력은 클래식 음악계를 넘어섰습니다. 디즈니의 《판타지아 2000》에서는 혹등고래들이 하늘을 나는 장면에 이 곡이 사용되었습니다. 록 밴드 예스(Yes)는 1983년 앨범 《90125》의 수록곡 ‘City of Love’ 도입부에 이 곡의 오프닝을 사용했습니다.
축음기로 나이팅게일 소리를 튼 작곡가의 실험 정신이, 한 세기 뒤에도 장르를 가리지 않고 살아 있는 겁니다.
🎵 기립박수가 터지는 《로마의 소나무》 실황. 4악장 아피아 가도의 행진이 클라이맥스에 도달하는 순간, 관객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섭니다. 이 곡이 왜 콘서트홀에서 가장 ‘체감 볼륨’이 큰 곡으로 꼽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영상입니다.
아직도 노래하는 나이팅게일
레스피기는 1936년 4월, 세균성 심내막염으로 56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페라 《루크레치아》를 작곡하던 도중이었습니다. 아내 엘사는 남편보다 거의 60년을 더 살면서, 1996년까지 레스피기의 음악을 세상에 알리는 데 헌신했습니다.
《로마의 소나무》를 들을 때, 4악장 끝의 압도적인 크레셴도에만 귀를 기울이지 마세요. 3악장 끝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100년 전 녹음된 나이팅게일 한 마리가 아직도 노래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달빛 아래, 소나무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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