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피기 – 로마의 소나무

네 그루 소나무로 건너는 로마 2천 년

작곡가
오토리노 레스피기
(Ottorino Respighi, 1879–1936)
곡명
로마의 소나무
(Pini di Roma, P.141)
작곡 기간
1924
악장
4악장(끊지 않고 이어서 연주)
I. I pini di Villa Borghese (Allegretto vivace)
II. Pini presso una catacomba (Lento)
III. I pini del Gianicolo (Lento)
IV. I pini della Via Appia (Tempo di marcia)

1악장. 보르게세 별장의 소나무
2악장. 카타콤 부근의 소나무
3악장. 자니콜로 언덕의 소나무
4악장. 아피아 가도의 소나무
편성
플루트 3(피콜로 겸함), 오보에 3(잉글리시 혼 겸함), 클라리넷 2, 베이스 클라리넷, 바순 2, 콘트라바순, 호른 4, 트럼펫 3, 부치나 6(현대는 플뤼겔호른 등으로 대체), 트롬본 3, 튜바, 팀파니, 타악기 다수, 하프, 첼레스타, 피아노, 오르간, 축음기(나이팅게일 음반), 현 5부
초연
1924년 12월 14일, 로마 테아트로 아우구스테오
베르나르디노 몰리나리 지휘 / 아우구스테오 관현악단
연주 시간
약 22분

이 곡은 — 로마 네 곳의 소나무를 빌려 2천 년의 시간을 통과하는 22분짜리 관현악 교향시입니다.

딱 하나만 듣는다면 — 4악장 아피아 가도. 멀리서 다가오는 로마 군단의 발소리가 한 줄의 크레셴도로 무대를 삼켜버립니다.

첫 음반 — 프리츠 라이너 · 시카고 심포니 · RCA 리빙 스테레오(1959).

1924년 12월 14일, 로마의 테아트로 아우구스테오. 무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묘 위에 세워진 극장이었죠. 4악장이 아찔한 절정으로 치닫던 바로 그 순간, 객석의 고개가 약속이라도 한 듯 무대가 아닌 엉뚱한 방향으로 휙 돌아갔습니다. 진짜 소리가 그쪽에서 들려왔거든요.

다름 아닌 축음기였습니다. 작곡가 오토리노 레스피기가 아예 악보에 음반 번호까지 떡하니 적어 넣고는 ‘이 디스크를 돌리시오’라고 지시를 내려둔 겁니다. 펄펄 살아 숨 쉬는 오케스트라 한복판에서, 100년 전 통조림처럼 고스란히 담긴 새소리가 튀어나온 셈이죠. 이 곡은 그저 ‘장엄한 로마 풍경화’ 정도로만 기억되곤 합니다만, 정작 그날 초연장을 발칵 뒤집어 놓은 주인공은 풍경이 아니라 이 낯선 기계 한 대였습니다.

33세의 오토리노 레스피기, 1912년
서른세 살의 레스피기(1912). 축음기를 악보에 적어 넣기 12년 전이다.

자로 손을 맞고 레슨을 관둔 소년

레스피기는 1879년 볼로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주세페는 우체부이면서 동시에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었죠. 그런데 정작 아들 녀석은 음악에 통 관심이 없었습니다. 여덟 살이 다 되어서야 마지못해 악기를 처음 잡았을 정도니까요.

첫 바이올린 선생부터 단단히 사고를 쳤습니다. 악절을 틀리게 켰다고 다짜고짜 자로 손등을 때린 겁니다. 어린 레스피기는 그 길로 미련 없이 활을 내려놓고 레슨을 관둬버렸습니다. 다행히 더 참을성 있는 선생을 만나 다시 시작하기는 했지만, 이 대단한 고집은 훗날 그의 작곡 방식에서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이 드러납니다.

심지어 피아노는 아무한테도 배우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주세페가 퇴근해 문을 열어보니, 아들이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의 《교향적 연습곡》을 제법 그럴듯하게 치고 있더란 겁니다. 순전히 어깨너머로 몰래 익힌 거죠. 다만 스케일, 그러니까 단순한 음계 연습만은 끝끝내 손에 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레스피기는 평생 자기 작품에 음계 패시지를 거의 쓰지 않았습니다. 본인이 못 하는 건 아예 무대 위에서 치워버린 겁니다.

이런 일화도 전해집니다. 하프를 며칠 만에 독학으로 마스터해 버렸고, 원서를 무려 11개 국어로 읽어 내려갔죠. 훗날 베를린에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을 만났을 때는, 오히려 상대의 물리 이론을 족집게처럼 정확히 짚어내는 바람에 아인슈타인 쪽이 화들짝 놀랐다는 기록마저 남아 있습니다. 이쯤 되면 작곡가라기보다 그냥 도서관을 통째로 삼켜버린 사람에 가까웠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보낸 다섯 달

1900년, 스물한 살의 레스피기는 러시아 제국 극장의 수석 비올리스트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합니다. 당장은 오케스트라 뒷줄에서 밥벌이를 하러 떠난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평생을 좌우할 거대한 스승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Nikolai Rimsky-Korsakov)였죠.

《세헤라자데》를 썼던 바로 그 인물, 당대 러시아 관현악법의 절대적인 최고수였습니다. 레스피기는 딱 다섯 달 동안 그에게 오케스트레이션을 배웠습니다. 반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죠. 하지만 훗날 《로마의 소나무》에서 터져 나오는 그 찬란한 색채와 음향의 뿌리가 전부 이 다섯 달에 단단히 박혀 있습니다. 스승은 소리의 색을 다루는 법을 가르쳤고, 제자는 훗날 그 색채를 로마의 하늘에 아낌없이 칠해버린 겁니다.

1901년 볼로냐 음악원 졸업 시험장. 당시 음악원장이었던 주세페 마르투치(Giuseppe Martucci) 교수가 구구절절한 심사평 대신 이렇게 단호한 한마디를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레스피기는 학생이 아니다. 이미 거장이다.”

오토리노 레스피기, 1927년
1927년의 레스피기. 이 무렵 그는 이미 국제 무대의 이름값을 갖고 있었다.

옛 음악을 파던 사람이 옛 도시를 그리다

레스피기를 그저 화려한 음향을 빚어내는 작곡가로만 기억하신다면 딱 절반만 아시는 겁니다. 그는 동시에 먼지 쌓인 낡은 악보를 끈질기게 뒤적이는 고지식한 학자이기도 했거든요. 이 두 얼굴을 겹쳐 보지 않으면, 《로마의 소나무》가 대체 왜 하필 그런 식으로 짜였는지 도무지 보이지 않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증거가 《류트를 위한 고대 아리아와 춤곡》(Antiche danze ed arie per liuto)입니다. 1917년, 1923년, 1931년에 걸쳐 세 개의 모음곡으로 세상에 내놓았죠. 16~17세기 류트 악보 속에 쿨쿨 잠들어 있던 옛 춤곡을 기어이 깨워내 현대 오케스트라가 연주할 수 있게 탈바꿈시킨 작업입니다. 몬테베르디(Monteverdi)의 오페라 《오르페오》를 비롯한 이탈리아 초기 바로크 음악 역시 그의 손을 거쳐 무대에 다시 올랐습니다. 깐깐한 학술적 복원이라기보다는, 당대 청중의 귓가에 다시 생생하게 울리도록 능청스럽게 편집하고 재구성한 쪽에 가까웠습니다.

그의 이런 독특한 취향은 《로마의 소나무》 안에서도 여과 없이 툭 튀어나옵니다. 2악장 카타콤에서 초기 기독교 성가가 아스라히 솟아오르고, 4악장에서 고대 로마의 군용 나팔이 기세 좋게 되살아나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평생 옛 선율을 캐고 다니던 사람이 옛 도시를 그렸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거든요. 게다가 그는 1932년, 무조음악 같은 급진적인 현대주의에 맞서 선율과 전통을 옹호하는 이탈리아 작곡가 성명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기까지 합니다. 가장 파격적인 실험 장치(축음기)를 무대 위에 올려놓으면서도 정작 마음은 굳건히 옛것을 향해 있던 사람. 참으로 묘하게도, 보수적인 얼굴을 한 혁신가였던 셈입니다.

불면의 도시가 준 두 가지

1913년, 레스피기는 로마의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교수로 부임하게 됩니다. 평화롭고 조용한 볼로냐를 떠나 정신없이 번잡한 대도시로 짐을 옮긴 그는 처음엔 도무지 적응을 하지 못했습니다. 밤이 되면 뜬눈으로 밤을 새웠고, 낮이 되면 지독한 향수병을 앓았죠. 거대한 낯선 도시가 그를 통째로 쥐고 흔들어 놓은 겁니다.

그런데 이 낯설고 매정한 도시에 그의 시선을 단번에 붙잡은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바로 분수, 그리고 소나무였죠. 그가 직접 남긴 회고는 이렇습니다.

“이 도시의 놀라운 분수들, 그리고 지평선 어디에서나 우산처럼 펼쳐진 소나무들. 이 두 가지가 무엇보다 내 상상력에 말을 걸었다.”

먼저 분수가 나설 차례였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로마의 분수》(1916)는 단숨에 그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 주었죠. 그리고 8년 뒤, 마침내 소나무의 차례가 찾아옵니다. 로마 3부작의 두 번째 조각이자, 레스피기라는 이름을 세상 가장 멀리까지 실어 나른 바로 그 곡이었습니다.

네 그루의 소나무, 네 개의 시간

《로마의 소나무》는 네 개의 악장을 쉼 없이 단숨에 이어서 연주하는 교향시입니다. 악장마다 로마의 각기 다른 장소에 우뚝 선 소나무를 그려내죠. 그런데 가만 들어보면 이건 단순한 풍경화가 아닙니다. 네 그루의 소나무는 사실 네 개의 각기 다른 시간대로 훌쩍 넘어가는 비밀스러운 문이거든요. 아이들이 뛰노는 눈부신 오후에서 축축한 지하 묘지의 어둠으로, 달빛 어린 밤을 지나 2천 년 전 로마 군단의 장엄한 새벽으로. 소나무를 핑계 삼아 아주 능청스럽게 시공간을 통째로 건너뛰어 버리는 겁니다.

1악장 — 아내의 유년이 들어간 놀이터

첫 악장은 햇살이 쏟아지는 대낮의 보르게세 공원입니다. 아이들이 소나무 아래에서 와글와글 술래잡기를 하고, 왁자지껄 병정놀이를 하며 제비처럼 재잘거립니다. 관악기가 짧은 동기를 톡톡 얄밉게 던져대면, 목관과 금관이 앞다투어 서로의 말을 싹둑싹둑 잘라먹죠. 느긋한 서주 따위는 과감히 생략한 채, 청중의 멱살을 잡고 곧장 그 소란 한복판으로 밀어 넣어버리는 구성입니다.

여기엔 꽤나 로맨틱한 개인적 사연이 하나 숨어 있습니다. 1920년 어느 날, 레스피기가 아내 엘사에게 슬쩍 물었습니다. “당신이 어릴 때 보르게세 공원에서 놀며 부르던 노래, 혹시 불러 줄 수 있어?” 엘사가 기억을 더듬어 어린 시절의 동요를 흥얼거리자, 남편은 그 멜로디를 고스란히 악보에 받아 적었습니다. 그렇게 아내의 소중한 유년 시절이 1악장의 핵심 주제로 쏙 들어갔습니다. 로마의 공원에서 왁자지껄 뛰노는 수많은 아이들 틈바구니 속에, 어린 엘사가 몰래 섞여 있는 거지요.

🎧 여기서 들으세요 — 시작하자마자 목관이 재잘거리며 치고 들어옵니다. 이 떠들썩함을 귀에 새겨 두세요. 다음 악장에서 이 소리가 통째로 꺼지는 낙차가 이 곡의 첫 번째 함정입니다.

빌라 보르게세 정원의 우산 소나무, 로마
빌라 보르게세 정원의 우산 소나무. 1악장 아이들이 뛰노는 바로 그 무대다.

2악장 — 아이들이 사라지고 남은 그림자

1악장의 소란이 뚝 끊깁니다. 아이들이 사라지고 지하 묘지 입구를 덮은 소나무 그림자만 남습니다. 음량이 거의 0에 가깝게 내려갑니다. 그리고 땅 밑에서 무언가가 올라옵니다. 초기 기독교 시대 성가인 키리에(Kyrie)와 상투스(Sanctus)입니다.

레스피기는 여기서 자신만의 관현악 기법을 처음 제대로 꺼내 듭니다. 성가를 연주하는 트럼펫을 무대 뒤에 숨겨 놓은 겁니다. 그래서 소리가 옆이 아니라 저 아래 땅속 어딘가에서 새어 나오는 듯 들립니다. 오르간은 16피트와 32피트 페달로 귀에 거의 안 잡히는 초저음을 깝니다. 듣는다기보다 몸을 짓누르는 진동입니다. 관객은 어느새 로마 지하 카타콤 어둠 속에 서 있게 됩니다.

🎧 여기서 들으세요 — 1악장이 끝나면 음량을 절대 올리지 마세요. 이 악장은 거의 안 들리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무대 뒤 트럼펫이 멀찍이서 올라오는 순간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위치를 가늠해 보세요.

3악장 — 달빛, 그리고 악보에 못 박힌 새 한 마리

보름달이 자니콜로 언덕 소나무를 비추는 밤입니다. 클라리넷 독주가 다른 악기 없이 홀로 시작됩니다. 레스피기는 이 대목 악보에 “come in sogno”, 곧 “꿈결처럼”이라고 적었습니다. 첼레스타와 피아노, 하프가 위쪽에서 반짝이는 점들을 흩뿌립니다. 지하 어둠을 그린 사람이 같은 오케스트라로 달빛을 칠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 악장 끝에서 이 곡을 음악사에 들이민 그 순간이 옵니다. 축음기입니다. 레스피기는 그저 “새소리를 넣으시오” 정도로 두지 않았습니다. 악보에 못을 박듯 구체적으로 적었습니다. 그라모폰 레코드 회사 디스크 No. R.6105, 《나이팅게일의 노래》(Il canto dell’Usignolo)를 브런즈윅 파나트로프 축음기로 재생하라고요. 이 음반은 1910년 독일에서 카를 라이히와 프란츠 함페가 녹음한 것으로 살아 있는 새의 노래를 담은 상업 음반 중에서도 손꼽히게 이른 녹음이었습니다.

오케스트라 한가운데서 축음기가 돌아갑니다. 나이팅게일이 웁니다. 1924년 객석에는 이게 충격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연주회장의 모든 소리는 무대 위 사람 손끝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레스피기는 이미 녹음이 끝난 소리, 완성품 하나를 그대로 음악 속에 끼워 넣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오케스트라가 한창 연주하는데 갑자기 스피커에서 다큐멘터리 음향이 흘러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 여기서 들으세요 — 클라리넷의 꿈결 같은 독주가 잦아들 무렵 진짜 새소리가 끼어듭니다. 이건 악기가 흉내 낸 소리가 아니라 100년 전에 녹음된 실제 나이팅게일입니다. 그 한 마리가 클래식 역사를 바꿨다고 생각하며 들으면 전해지는 소름이 다릅니다.

자니콜로 언덕에서 본 로마 전경
자니콜로 언덕에서 내려다본 로마. 3악장의 달빛과 나이팅게일이 여기서 운다. (리처드 윌슨, 18세기)

4악장 — 안개 속에서 다가오는 군단

새벽이 밝습니다. 안개 낀 아피아 가도, 그 소나무 사이로 로마 군단이 행군해 옵니다. 레스피기는 땅이 발걸음에 흔들려야 한다고 주문했습니다. 그래서 오르간 8피트, 16피트, 32피트 페달이 동시에 낮은 시♭ 음을 깔아 무대 바닥을 진동시킵니다. 6대의 부치나—고대 로마의 원형 군용 나팔—가 사방에서 울립니다. 현대 오케스트라에서는 보통 플뤼겔호른 같은 금관 악기가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이 악장은 그야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집요하게 커지기만 하는 한 줄기 크레셴도입니다. 저 멀리 까만 점 하나로 시작된 발소리가 점점 거대하게 몸집을 불려 나가다가 마지막엔 금관과 오르간이 카피톨리노 언덕을 향해 온 무대를 통째로 삼켜버리죠. 레스피기 본인조차 초연 전날 리허설을 마치고는 아내에게 이렇게 털어놓았습니다.

“‘아피아 가도의 소나무’ 크레셴도를 들을 때마다 뱃속에서 무언가가 묵직하게 느껴져. 내가 머릿속으로 상상한 그대로 실현된 건 이번이 처음이야.”

🎧 여기서 들으세요 — 4악장에 들어서면 단순하게 소리가 커지는 것을 넘어 그 다가오는 거리감을 실감해 보세요. 발소리가 아득한 지평선에서부터 코앞까지 뚜벅뚜벅 걸어옵니다. 여건이 된다면 볼륨을 살짝 올리고 좋은 스피커나 헤드폰으로 감상해 보시길 권합니다. 뱃속에서 무언가 느껴진다던 작곡가의 말이 대체 무슨 뜻인지 단번에 알아채실 겁니다.

아피아 가도의 유적
아피아 가도의 옛 돌길. 4악장에서 군단이 이 길을 밟고 로마로 들어온다. (사진: AlMare)
피에타리 잉키넨 지휘 · KBS교향악단(2024). 4악장이 끝나자 객석 문까지 열어젖힌 채 기립박수가 쏟아진다.

바로 위에 있는 영상이 그 아찔한 낙차와 폭발력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에 제격입니다. 지휘자 피에타리 잉키넨(Pietari Inkinen)이 이끄는 KBS교향악단의 2024년 실황이죠. 4악장의 거대한 크레셴도가 끝나는 순간 객석 문까지 활짝 열어젖힌 채 관객들이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납니다. 레스피기가 말했던 “뱃속에서 느껴지는 무언가”가 현실에서 도대체 어떻게 작동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장면이거든요.

축음기를 악보에 못 박은 남자

3악장에 등장하는 나이팅게일을 그저 ‘재미있는 특수효과’쯤으로 치부하고 넘어가면 이 곡의 진짜 핵심을 놓치고 맙니다. 녹음된 소리 자체를 떡하니 작품의 재료로 가져다 쓴다는 발상은 당시로선 그 어디에도 없던 파격이었으니까요.

꽤 흥미로운 비교 지점이 하나 있습니다. 녹음된 소리를 아예 음악의 재료로 삼아버리는 ‘뮤지크 콩크레트’는 1948년 파리에서 피에르 셰페르에 의해 처음 등장하죠. 레스피기의 축음기는 무려 그보다 24년이나 앞선 시도였습니다. 게다가 레스피기는 친절하게도 음반 번호까지 악보에 단단히 박아 두었습니다. 세상 어느 도시의 어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든 간에 같은 음반만 구하면 완벽하게 똑같은 나이팅게일이 울도록 쐐기를 박은 겁니다. 연주자의 해석에 맡기지 않고 특정한 ‘바로 그 소리’를 콕 집어 강제한 셈이거든요.

먼지 덮인 옛 음악을 살려내던 고지식한 학자가 정작 클래식 역사상 가장 먼저 ‘기계로 녹음된 자연음’을 무대 위에 당당히 올렸다는 사실. 이 지독한 모순이야말로 오토리노 레스피기라는 인물을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초상입니다. 그는 쉼 없이 뒤를 돌아보면서도 발걸음은 언제나 앞으로 걷고 있었던 겁니다.

초연, 그리고 토스카니니의 선택

1924년 12월 14일 대망의 초연. 지휘봉은 베르나르디노 몰리나리(Bernardino Molinari)가 잡았고 연주는 아우구스테오 관현악단이 맡았습니다. 아내 엘사의 회고를 빌리자면 마지막 악장의 끝자락은 “관객들이 쏟아내는 열광적인 박수갈채에 묻혀 아예 들리지조차 않았다”고 하죠. 2주 뒤인 12월 28일 일찌감치 표가 동난 앙코르 연주회가 다시 한번 열렸습니다. 소나무는 그렇게 무대에 오른 첫날부터 로마의 혼을 쏙 빼놓은 겁니다.

바다 건너 미국 초연은 1926년 1월 14일 뉴욕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지휘자는 당대의 거장 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였습니다. 그런데 참 묘하게도 이날은 그가 뉴욕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 자격으로 첫 콘서트를 여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상임 데뷔 무대라는 그토록 중요한 자리에서 토스카니니는 잉크도 채 마르지 않은 이 신선한 이탈리아 곡을 과감히 집어 들었습니다. 자기 조국의 동시대 작곡가를 뉴욕 한복판의 데뷔작으로 떡하니 세운 겁니다.

이들의 질긴 인연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세월이 흘러 1945년 토스카니니는 뉴욕 필하모닉과 작별하는 마지막 공연에서도 어김없이 이 곡을 연주했습니다. 자신의 빛나는 시작과 아쉬운 끝을 모두 같은 곡으로 단정하게 여민 셈이죠. 한편 레스피기 본인은 토스카니니가 미국 초연을 올린 바로 다음 날 순회공연 중이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지휘 단상에 직접 올라 똑같은 곡을 연주했습니다. 뉴욕에서는 토스카니니가 먼저 불씨를 당기고 하루 뒤 필라델피아에서는 작곡가 본인이 같은 곡을 직접 지휘하며 불을 지폈던 겁니다.

오케스트라라는 거대한 음향 장치

《로마의 소나무》가 콘서트홀을 통째로 뒤흔들어 놓는 이유는 그저 선율이 아름다워서가 아닙니다. 진짜 무기는 음색과 공간, 그리고 음량의 지독한 대비에 있거든요.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소리의 색채를 배운 레스피기는 오케스트라 전체를 아예 하나의 거대한 입체 음향 장치처럼 정교하게 설계했습니다.

2악장에서 성가를 부는 트럼펫은 무대 뒤쪽으로 쏙 숨어버립니다. 덕분에 소리가 까마득히 멀리서, 흡사 땅속 어딘가에서 새어 나오는 것처럼 들리죠. 오르간은 32피트 페달을 밟아 사람 귀에는 거의 잡히지도 않는 아득한 초저음까지 밀고 내려갑니다. 반대로 3악장 자니콜로 언덕의 달빛은 첼레스타와 피아노, 하프가 아주 높은 음역에서 반짝이는 점을 찍듯 칠해버립니다. 똑같은 악단이 축축한 지하의 어둠과 시린 밤하늘을 동시에 그려내는 겁니다.

여기에 그 낯선 축음기까지 얹어지고, 4악장에 이르면 6대의 부치나가 아예 객석을 에워싸듯 사방에서 쾅쾅 울려 댑니다. 무대 위 악기, 무대 뒤에 숨은 악기, 심지어 기계식 축음기까지, 소리가 터져 나오는 위치 자체가 이미 치밀한 설계 요소인 셈입니다. 흔해 빠진 멜로디가 아니라 그 모든 소리를 공간에 영리하게 배치하는 관현악법이야말로 이 곡의 진짜 주인공입니다.

우산 소나무 아래 숨은 설계도

《로마의 소나무》 밑바닥에는 눈에 잘 안 띄는 기막힌 구조가 하나 더 깔려 있습니다. 네 악장은 사실 로마 외곽을 둥글게 한 바퀴 도는 여행길이거든요. 빌라 보르게세에서 출발해 자니콜로 언덕을 훌쩍 지나, 마침내 아피아 가도로 웅장하게 빠져나가는 경로입니다.

얄밉게도 공간만 도는 게 아닙니다. 시간마저 함께 돕니다. 눈부신 낮에서 시린 밤으로, 그리고 다시 여명의 새벽으로. 평범한 현재에서 초기 기독교 시대로 거슬러 갔다가, 다시 고대 로마 공화정의 군단으로 내달리죠. 아이들의 천진한 놀이에서 시작된 음악이 무장한 군인들의 행군으로 끝을 맺습니다. 소나무 네 그루가 하루라는 시간과 2천 년이라는 거대한 역사를 동시에 뚫고 지나가는 겁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3악장의 무대인 자니콜로 언덕은 로마 신화에서 앞뒤로 얼굴이 두 개 달린 신, 야누스(Janus)와 연결되는 곳입니다. 시작과 끝을 동시에 다스리는 바로 그 신이죠. 과거와 미래를 나란히 굽어보는 언덕 위에서 나이팅게일이 울고, 그 새소리는 100년 전에 녹음된 박제된 과거이면서 동시에 클래식 음악이 난생처음 맞닥뜨린 파격적인 미래였습니다. 레스피기가 과연 여기까지 치밀하게 계산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만 늘 옛것과 새것을 한 손에 쥐고 주무르던 사람이었으니, 그저 뻔한 우연으로 넘기기에도 영 찜찜하긴 합니다.

디즈니 고래부터 록 밴드까지

《로마의 소나무》는 레스피기가 남긴 작품 중 가장 압도적으로 많이 녹음된 곡입니다. 2018년 기준으로 시중에 나온 음반만 100종이 훌쩍 넘을 정도니까요. 그중에서도 프리츠 라이너(Fritz Reiner)와 시카고 심포니가 남긴 1959년 스테레오 녹음은 깐깐한 오디오 애호가들 사이에서 아주 오래된 레퍼런스, 즉 확고한 기준점 대접을 받습니다.

그 무시무시한 영향력은 콘서트홀 문턱 밖으로도 가볍게 넘어갔습니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판타지아 2000》에서는 거대한 혹등고래 무리가 하늘을 뚫고 날아오르는 장면에 바로 이 곡이 쓰였죠. 심지어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예스(Yes)는 1983년에 발매한 앨범 《90125》에서 레스피기의 웅장한 관현악 음향을 대놓고 빌려 오기도 했습니다. 축음기로 당돌하게 나이팅게일을 틀어 젖힌 작곡가의 그 실험 정신은, 한 세기가 지난 뒤에도 장르를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서 펄펄 살아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 곡을 처음 듣는다면

22분짜리 대곡이라 지레 막막하게 느껴지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딱 세 가지만 단단히 붙잡고 들으시면 끝까지 꼼짝없이 빨려 들어가게 되거든요.

① 음량의 낙차를 느껴 보세요. 1악장이 그토록 떠들썩하게 끝나자마자, 2악장은 어처구니없을 만큼 거의 안 들리게 조용해져 버립니다. 이 아찔하고 급격한 대비가 철저히 의도된 장치거든요. 볼륨을 적당히 중간쯤에 맞춰 두고 그 미세한 작은 소리에 바짝 귀를 기울여야만, 4악장에서 터져 나오는 진짜 폭발력이 온몸으로 다가옵니다.

② 3악장 끝의 나이팅게일을 놓치지 마세요. 클라리넷의 꿈결 같은 독주가 스르르 잦아들 무렵, 진짜 새소리가 당돌하게 끼어듭니다. 100년 전에 녹음된 그 작은 한 마리가 콧대 높은 클래식 역사를 통째로 바꿨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들으시면, 다가오는 감각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거든요.

③ 4악장은 한 줄의 크레셴도입니다. 저 멀리서 다가오는 군단의 발소리가 무섭게 가까워지다가, 마지막엔 오르간과 금관이 무대를 그야말로 통째로 집어삼켜 버립니다. 가능하시다면 좋은 스피커나 헤드폰으로, 볼륨을 살짝 올려서 들어 보시길 권합니다.

아직도 노래하는 나이팅게일

레스피기는 1936년 4월, 세균성 심내막염으로 쉰여섯이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페라 《루크레치아》를 한창 쓰던 도중이었죠. 아내 엘사는 남편보다 거의 60년을 더 살면서 1996년까지 그의 음악을 세상에 알리는 데 끈질기게 매달렸습니다. 1악장에 자기 유년의 동요를 남긴 여자가, 남은 평생 동안 바로 그 곡을 지켜낸 셈입니다.

《로마의 소나무》를 들으실 때, 4악장 끝부분의 엄청난 폭발에만 넋을 잃고 계시지 마시길 바랍니다. 3악장 끝에도 살며시 귀를 열어 두세요. 100년 전에 녹음된 나이팅게일 한 마리가 지금도 여전히 꿋꿋하게 노래하고 있거든요. 로마의 시린 달빛 아래, 우산처럼 넓게 펼쳐진 소나무들 사이에서 말이죠.

악보와 함께 듣기

악보를 따라가며 들을 수 있는 영상. 무대 뒤 트럼펫과 부치나가 총보 어디에 적혀 있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원본 악보는 IMSLP에서 누구나 무료로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로마의 소나무 악보 보기 (IMSLP)

어떤 연주로 시작할까

100종이 훌쩍 넘는 음반의 홍수 앞에서 길을 잃지 않으시도록 깔끔하게 세 갈래만 추렸습니다. 처음이시라면 위에서 언급한 라이너 음반으로 든든하게 시작하시고, 로마 현지의 찐득한 색채가 궁금하시다면 파파노, 3부작을 한 번에 싹 훑고 싶으시다면 뒤투아로 가뿐하게 넘어가시면 됩니다.

👑 첫 감상 추천

프리츠 라이너 · 시카고 심포니

RCA 리빙 스테레오 · 1959

4악장 행진의 음량을 또렷하게 잡아낸 오래된 기준점. 60년이 넘었지만 박력만큼은 여전히 첫손에 꼽힙니다. 최신 음질을 원하는 사람에겐 다소 옛 녹음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레퍼런스

안토니오 파파노 ·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

EMI / Warner

레스피기가 교수로 몸담았던 바로 그 악단의 연주입니다. 로마 현지 오케스트라의 따뜻한 색채와 선명한 최신 녹음을 함께 듣고 싶을 때 고르면 됩니다. 라이너 특유의 날 선 박력을 기대하면 조금 부드럽게 들릴 수 있습니다.

와일드카드

샤를 뒤투아 · 몬트리올 심포니

Decca

색채와 균형이 빼어난 연주로, 《로마의 분수》·《로마의 축제》까지 3부작을 한 장에 담아 입문용으로 자주 추천됩니다. 소나무 한 곡만 진하게 파고들고 싶은 사람에겐 다소 얌전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로마의 소나무》에서 나이팅게일 소리는 어떻게 내나요?

레스피기는 악보에 그라모폰 레코드 No. R.6105를 브런즈윅 파나트로프 축음기로 재생하라고 지정했습니다. 3악장 끝에 삽입되며 클래식 음악에서 녹음된 소리를 라이브 연주에 끼워 넣은 매우 이른 사례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대개 디지털 녹음 파일을 스피커로 재생합니다.

레스피기의 ‘로마 3부작’은 어떤 곡들인가요?

《로마의 분수》(Fontane di Roma, 1916), 《로마의 소나무》(Pini di Roma, 1924), 《로마의 축제》(Feste Romane, 1928)를 묶어 ‘로마 3부작’이라 부릅니다. 세 곡 모두 로마의 장소에서 영감을 받은 교향시이며 콘서트에서 함께 연주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로마의 소나무》 입문자에게 추천하는 녹음은?

프리츠 라이너와 시카고 심포니의 1959년 RCA 녹음이 꾸준히 첫손에 꼽히는 레퍼런스입니다. 더 최신 녹음을 원하면 안토니오 파파노와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 또는 샤를 뒤투아와 몬트리올 심포니의 ‘로마 3부작’ 음반도 좋은 선택입니다.

레스피기 《로마의 소나무》는 어떤 곡인가요?

오토리노 레스피기가 1924년에 작곡한 4악장 구성의 교향시입니다. 각 악장은 보르게세 별장, 카타콤, 자니콜로 언덕, 아피아 가도에 선 소나무를 그리며 하루의 시간과 로마 2천 년의 역사를 함께 통과합니다. 연주 시간은 약 22분이고 네 악장을 끊지 않고 이어서 연주합니다.

《로마의 소나무》는 왜 편성이 이렇게 큰가요?

레스피기가 오케스트라를 하나의 거대한 음향 장치처럼 다뤘기 때문입니다. 무대 뒤 트럼펫, 오르간의 32피트 페달, 첼레스타·피아노·하프, 4악장의 부치나(고대 로마 군용 나팔, 현대에는 보통 플뤼겔호른 같은 금관으로 대체) 6대까지 동원합니다. 3악장 끝에는 나이팅게일 소리를 담은 축음기도 넣습니다. 약 22분 동안 지하 카타콤의 어둠부터 군단의 개선까지 그리려면 이만한 편성이 필요했습니다.

참고 자료

이어서 듣기 — 오케스트라를 악기로 쓰는 사람들

만약 《로마의 소나무》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에 이어지는 다섯 곡도 취향에 딱 맞을 확률이 꽤 높습니다. 꼽은 이유는 하나씩 다 다릅니다. 레스피기의 스승, 같은 ‘음향의 마법사’ 계열, 그리고 오케스트라라는 팔레트로 거대한 그림을 그려낸 곡들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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