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곡은 — 로마 네 곳의 소나무를 빌려 2천 년의 시간을 통과하는 22분짜리 관현악 교향시입니다.
딱 하나만 듣는다면 — 4악장 아피아 가도. 멀리서 다가오는 로마 군단의 발소리가 한 줄의 크레셴도로 무대를 삼켜버립니다.
첫 음반 — 프리츠 라이너 · 시카고 심포니 · RCA 리빙 스테레오(1959).
1924년 12월 14일, 로마의 테아트로 아우구스테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묘 위에 세운 극장이었습니다. 4악장이 절정으로 치닫던 순간, 객석의 고개가 무대가 아닌 엉뚱한 방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소리가 그쪽에서 났으니까요.
축음기였습니다. 오토리노 레스피기는 악보에 음반 번호까지 적어 넣고 ‘이 디스크를 돌리시오’라고 지시했습니다. 살아 있는 오케스트라 한복판에서 100년 전 통조림처럼 담긴 새소리가 흘러나온 겁니다. 우리는 이 곡을 ‘장엄한 로마 풍경화’로만 기억하지만, 정작 초연장을 뒤흔든 건 풍경이 아니라 이 기계 한 대였습니다.

자로 손을 맞고 레슨을 관둔 소년
레스피기는 1879년 볼로냐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주세페는 우체부이면서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아들은 음악에 통 관심이 없었습니다. 여덟 살이 다 되어서야 악기를 처음 잡았습니다.
첫 바이올린 선생부터 사고를 쳤습니다. 악절을 틀리게 켰다고 자로 손등을 때린 겁니다. 어린 레스피기는 그 자리에서 활을 내려놓고 레슨을 관뒀습니다. 다행히 더 참을성 있는 선생을 만나 다시 시작했지만, 이 아이의 고집은 나중에 그의 작곡 방식까지 설명해 줍니다.
피아노는 아무한테도 안 배웠습니다. 어느 날 주세페가 퇴근해 문을 열었더니, 아들이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의 《교향적 연습곡》을 제법 그럴듯하게 치고 있었습니다. 몰래 익힌 겁니다. 다만 스케일, 그러니까 단순한 음계 연습만은 끝내 손에 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레스피기는 평생 자기 작품에 음계 패시지를 거의 쓰지 않았습니다. 못 하는 걸 아예 무대에서 치워버린 겁니다.
이런 일화도 있습니다. 하프를 며칠 만에 독학으로 익혔고, 원서를 11개 국어로 읽었습니다. 훗날 베를린에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을 만났을 때는 상대의 물리 이론을 정확히 짚어 아인슈타인 쪽이 놀랐다는 기록도 남아 있답니다. 작곡가라기보다 도서관을 통째로 삼킨 사람에 가까웠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보낸 다섯 달
1900년, 스물한 살의 레스피기는 러시아 제국 극장의 수석 비올리스트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갑니다. 오케스트라 뒷줄에서 밥벌이를 하러 간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평생을 좌우할 스승을 만납니다.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Nikolai Rimsky-Korsakov).
《세헤라자데》를 쓴 그 사람, 당대 러시아 관현악법의 최고수였습니다. 레스피기는 딱 다섯 달 동안 그에게 오케스트레이션을 배웠습니다. 반년도 안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훗날 《로마의 소나무》에서 터지는 색채와 음향의 뿌리가 전부 이 다섯 달에 박혀 있습니다. 스승은 색을 다루는 법을 가르쳤고, 제자는 그걸 로마의 하늘에 칠하게 된답니다.
1901년 볼로냐 음악원 졸업 시험. 음악원장 주세페 마르투치(Giuseppe Martucci) 교수가 심사평 대신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레스피기는 학생이 아니다. 이미 거장이다.”

옛 음악을 파던 사람이 옛 도시를 그리다
레스피기를 화려한 음향의 작곡가로만 기억하면 절반만 아는 겁니다. 그는 동시에 낡은 악보를 뒤지는 학자였습니다. 이 두 얼굴을 모르면 《로마의 소나무》가 왜 그렇게 짜여 있는지도 안 보입니다.
대표적인 게 《류트를 위한 고대 아리아와 춤곡》(Antiche danze ed arie per liuto)입니다. 1917년, 1923년, 1931년에 걸쳐 세 개의 모음곡으로 냈습니다. 16~17세기 류트 악보에 잠들어 있던 옛 춤곡을 현대 오케스트라가 연주할 수 있게 되살린 작업입니다. 몬테베르디(Monteverdi)의 오페라 《오르페오》를 비롯한 이탈리아 초기 바로크 음악도 그의 손을 거쳐 무대에 다시 올랐습니다. 학술 복원이라기보다는, 당대 청중 앞에서 다시 울리도록 편집하고 재구성한 쪽에 가까웠습니다.
이 취향이 《로마의 소나무》 안에서 그대로 튀어나옵니다. 2악장 카타콤에서 초기 기독교 성가가 솟고, 4악장에서 고대 로마의 군용 나팔이 되살아나는 건 우연이 아닙니다. 옛 선율을 캐던 사람이 옛 도시를 그렸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거든요. 게다가 그는 1932년, 무조음악 같은 급진적 현대주의에 맞서 선율과 전통을 옹호하는 이탈리아 작곡가 성명에 이름을 올립니다. 가장 실험적인 장치(축음기)를 쓰면서도 마음은 옛것을 향해 있던 사람. 보수적인 얼굴을 한 혁신가였습니다.
불면의 도시가 준 두 가지
1913년, 레스피기는 로마의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교수로 부임합니다. 조용한 볼로냐를 떠나 번잡한 대도시로 옮긴 그는 처음엔 도무지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밤에는 잠을 못 이뤘고, 낮에는 고향을 앓았습니다. 낯선 도시가 그를 통째로 흔들어 놓은 겁니다.
그런데 이 낯선 도시에 그의 눈을 붙잡은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분수, 그리고 소나무. 그가 직접 남긴 말이 이렇습니다.
“이 도시의 놀라운 분수들, 그리고 지평선 어디에서나 우산처럼 펼쳐진 소나무들. 이 두 가지가 무엇보다 내 상상력에 말을 걸었다.”
먼저 분수 차례였습니다. 《로마의 분수》(1916)가 그에게 국제적 명성을 안겨 줬습니다. 그리고 8년 뒤, 소나무 차례가 옵니다. 로마 3부작의 두 번째 조각이자, 그의 이름을 가장 멀리까지 실어 나른 곡이었답니다.
네 그루의 소나무, 네 개의 시간
《로마의 소나무》는 네 개의 악장을 끊지 않고 이어서 연주하는 교향시입니다. 악장마다 로마의 다른 장소에 선 소나무를 그립니다. 그런데 이게 풍경화가 아닙니다. 네 그루의 소나무는 사실 네 개의 시간대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아이들의 오후에서 지하 묘지의 어둠으로, 달빛 어린 밤을 지나 2천 년 전 군단의 새벽으로. 소나무를 핑계 삼아 시간을 통째로 건너뛰는 겁니다.
1악장 — 아내의 유년이 들어간 놀이터
첫 악장은 대낮의 보르게세 공원입니다. 아이들이 소나무 아래에서 술래잡기를 하고, 병정놀이를 하고, 제비처럼 재잘거립니다. 관악기가 짧은 동기를 톡톡 던지고 목관과 금관이 서로 말을 자릅니다. 서주 없이 곧장 소란 속으로 밀어 넣는 구성입니다.
여기 개인적인 사연이 하나 숨어 있습니다. 1920년 어느 날, 레스피기가 아내 엘사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어릴 때 보르게세 공원에서 놀며 부르던 노래, 불러 줄 수 있어?” 엘사가 어린 시절의 동요를 흥얼거리자 남편은 그 멜로디를 받아 적었습니다. 그렇게 아내의 유년이 1악장의 주제로 들어갔습니다. 로마의 공원에서 뛰노는 아이들 속에, 어린 엘사가 섞여 있는 거지요.
🎧 여기서 들으세요 — 시작하자마자 목관이 재잘거리며 치고 들어옵니다. 이 떠들썩함을 귀에 새겨 두세요. 다음 악장에서 이 소리가 통째로 꺼지는 낙차가 이 곡의 첫 번째 함정입니다.

2악장 — 아이들이 사라지고 남은 그림자
1악장의 소란이 뚝 끊깁니다. 아이들이 사라지고, 지하 묘지 입구를 덮은 소나무의 그림자만 남습니다. 볼륨이 거의 0에 가깝게 내려갑니다. 그리고 땅 밑에서 무언가가 올라옵니다. 초기 기독교 시대의 성가, 키리에(Kyrie)와 상투스(Sanctus)입니다.
여기서 레스피기의 관현악법이 처음 발톱을 드러냅니다. 성가를 부는 트럼펫을 무대 뒤에 숨겨 놓은 겁니다. 그래서 소리가 옆이 아니라 저 아래, 땅속 어딘가에서 새어 나오는 것처럼 들립니다. 오르간은 16피트와 32피트 페달로 귀에 거의 안 잡히는 초저음을 깝니다. 듣는다기보다 몸으로 눌리는 진동입니다. 관객은 어느새 로마 지하 카타콤의 어둠 속에 서 있습니다.
🎧 여기서 들으세요 — 1악장이 끝나면 볼륨을 절대 올리지 마세요. 이 악장은 거의 안 들리게 설계돼 있습니다. 무대 뒤 트럼펫이 멀찍이서 올라오는 순간,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위치를 가늠해 보세요.
3악장 — 달빛, 그리고 악보에 못 박힌 새 한 마리
보름달이 자니콜로 언덕의 소나무를 비추는 밤입니다. 클라리넷 독주가 홀로 걸어 나옵니다. 레스피기는 이 대목 악보에 “come in sogno”, 곧 “꿈결처럼”이라고 적었습니다. 첼레스타와 피아노, 하프가 위쪽에서 반짝이는 점들을 흩뿌립니다. 지하의 어둠을 그린 사람이 같은 오케스트라로 달빛을 칠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 악장 끝에서, 이 곡을 음악사에 밀어 넣은 그 순간이 옵니다. 축음기입니다. 레스피기는 그냥 “새소리를 넣으시오” 정도로 두지 않았습니다. 악보에 못을 박듯 구체적으로 적었습니다. 그라모폰 레코드 회사의 디스크 No. R.6105, 《나이팅게일의 노래》(Il canto dell’Usignolo)를 브런즈윅 파나트로프 축음기로 재생하라고요. 이 음반은 1910년 독일에서 카를 라이히와 프란츠 함페가 녹음한 것으로, 살아 있는 새의 노래를 담은 가장 이른 상업 음반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오케스트라 한가운데서 축음기가 돌아갑니다. 나이팅게일이 웁니다. 1924년의 객석에는 이게 충격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연주회장의 모든 소리는 무대 위 사람의 손끝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레스피기는 이미 녹음이 끝난 소리, 완성품 하나를 그대로 음악 속에 끼워 넣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오케스트라가 한창 연주하는데 갑자기 스피커에서 다큐멘터리 음향이 흘러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 여기서 들으세요 — 클라리넷의 꿈결 같은 독주가 잦아들 무렵, 진짜 새소리가 끼어듭니다. 이건 악기가 흉내 낸 소리가 아니라 100년 전에 녹음된 실제 나이팅게일입니다. 그 한 마리가 클래식 역사를 바꿨다고 생각하며 들으면 소름이 다르게 옵니다.

4악장 — 안개 속에서 다가오는 군단
새벽이 밝습니다. 안개 낀 아피아 가도, 그 소나무 사이로 로마 군단이 행군해 옵니다. 레스피기는 땅이 발걸음에 흔들려야 한다고 주문했습니다. 그래서 오르간의 8피트, 16피트, 32피트 페달이 동시에 낮은 시♭ 음을 깔아 무대 바닥을 진동시킵니다. 6대의 부치나 — 고대 로마의 원형 군용 나팔 — 가 사방에서 울립니다. 현대 오케스트라에서는 보통 플뤼겔호른 같은 금관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이 악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커지기만 하는 한 줄의 크레셴도입니다. 멀리서 점 하나로 시작한 발소리가 점점 몸집을 불리다가, 마지막엔 금관과 오르간이 카피톨리노 언덕을 향해 온 무대를 삼킵니다. 레스피기는 초연 전날 리허설이 끝난 뒤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피아 가도의 소나무’ 크레셴도를 들을 때마다 뱃속에서 뭔가가 느껴져. 내가 상상한 대로 실현된 건 이번이 처음이야.”
🎧 여기서 들으세요 — 4악장에 들어가면 그저 소리가 커지는 게 아니라, 다가오는 거리감을 느껴 보세요. 발소리가 지평선에서 코앞까지 걸어옵니다. 가능하면 볼륨을 살짝 올리고, 좋은 스피커나 헤드폰으로 들으면 뱃속에서 느껴진다던 레스피기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됩니다.

바로 위 영상이 그 낙차와 폭발을 눈으로 확인하기에 좋습니다. 지휘자 피에타리 잉키넨(Pietari Inkinen)이 이끄는 KBS교향악단의 2024년 실황입니다. 4악장 크레셴도가 끝나는 순간 객석 문까지 활짝 열린 채 관객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납니다. 레스피기가 “뱃속에서 뭔가가 느껴진다”고 했던 그 대목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축음기를 악보에 못 박은 남자
3악장의 나이팅게일을 그냥 ‘재미있는 특수효과’ 정도로 넘기면 이 곡의 핵심을 놓칩니다. 녹음된 소리를 작품의 재료로 쓴다는 발상은, 당시 어디에도 없던 것이었습니다.
비교 지점이 있습니다. 녹음된 소리 자체를 음악의 재료로 삼는 ‘뮤지크 콩크레트’는 1948년 파리에서 피에르 셰페르가 들고나옵니다. 레스피기의 축음기는 그보다 24년 앞섰습니다. 게다가 레스피기는 음반 번호까지 악보에 적어 두었습니다. 어느 도시의 어느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든 같은 음반만 구하면 똑같은 나이팅게일이 울도록 못을 박은 겁니다. 연주자의 해석에 맡기지 않고, 특정한 ‘그 소리’를 콕 집어 지정한 거거든요.
옛 음악을 되살리던 학자가, 동시에 클래식에서 가장 먼저 ‘기계로 녹음된 자연음’을 무대에 올렸다는 사실. 이 모순이야말로 레스피기라는 사람의 정확한 초상입니다. 그는 뒤를 보면서 앞으로 걸었습니다.
초연, 그리고 토스카니니의 선택
1924년 12월 14일의 초연. 지휘는 베르나르디노 몰리나리(Bernardino Molinari), 연주는 아우구스테오 관현악단이 맡았습니다. 엘사의 회고에 따르면 마지막 악장의 끝은 “관객의 열광적인 박수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2주 뒤인 12월 28일, 매진된 앙코르 연주회가 다시 열렸습니다. 소나무는 첫날부터 로마를 사로잡았습니다.
미국 초연은 1926년 1월 14일 뉴욕에서였습니다. 지휘자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 그런데 이날은 그가 뉴욕 필하모닉 상임지휘자로서 첫 콘서트를 연 날이기도 합니다. 데뷔 무대라는 가장 중요한 자리에서, 토스카니니는 갓 나온 이 이탈리아 곡을 골랐습니다. 자기 나라 동시대 작곡가를 데뷔작으로 세운 겁니다.
인연은 여기서 안 끝납니다. 1945년, 토스카니니는 뉴욕 필하모닉과의 마지막 공연에서도 이 곡을 연주했습니다. 시작과 끝을 같은 곡으로 여민 셈입니다. 한편 레스피기 본인은 토스카니니의 미국 초연 바로 다음 날, 순회공연 중이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직접 지휘하며 같은 곡을 연주했습니다. 뉴욕에서 토스카니니가 불을 붙이고, 다음 날 필라델피아에서 작곡가가 바통을 받은 모양새였습니다.
오케스트라라는 거대한 음향 장치
《로마의 소나무》가 콘서트홀에서 유독 압도적인 이유는 선율이 아름다워서가 아닙니다. 음색과 공간, 음량 때문입니다.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색을 배운 레스피기는 오케스트라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입체 음향 장치처럼 설계했습니다.
2악장에서 성가를 부는 트럼펫은 무대 뒤에 숨습니다. 그래서 소리가 멀리서, 땅속에서 새어 나오는 것처럼 들립니다. 오르간은 32피트 페달로 사람 귀에 거의 안 잡히는 초저음까지 내려갑니다. 반대로 3악장 자니콜로의 달빛은 첼레스타와 피아노, 하프가 높은 음역에서 반짝이는 점으로 칠합니다. 같은 악단이 지하의 어둠과 밤하늘을 모두 그려냅니다.
여기에 축음기가 더해지고, 4악장에서는 6대의 부치나가 객석을 에워싸듯 사방에서 울립니다. 무대 위 악기, 무대 뒤 악기, 기계까지, 소리가 나는 위치 자체가 하나의 설계 요소입니다. 멜로디가 아니라 그 모든 소리를 배치하는 관현악법이 이 곡의 진짜 주인공입니다.
우산 소나무 아래 숨은 설계도
《로마의 소나무》에는 눈에 잘 안 띄는 구조가 하나 더 깔려 있습니다. 네 악장은 로마 외곽을 한 바퀴 도는 여행입니다. 빌라 보르게세에서 출발해 자니콜로 언덕을 지나 아피아 가도로 빠져나가는 경로입니다.
공간만 도는 게 아닙니다. 시간도 함께 돕니다. 낮에서 밤으로, 다시 새벽으로. 현재에서 초기 기독교 시대로, 다시 고대 로마 공화정의 군단으로. 아이들의 놀이에서 시작해 군인들의 행군으로 끝납니다. 소나무 네 그루가 하루와 2천 년을 동시에 통과합니다.
여기 하나 더. 3악장의 무대인 자니콜로 언덕은 로마 신화에서 야누스(Janus)와 연결되는 곳입니다. 야누스는 시작과 끝의 신이고, 앞뒤를 동시에 보는 두 개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과거와 미래를 함께 바라보는 언덕 위에서 나이팅게일이 울고, 그 새소리는 100년 전에 녹음된 과거이면서 동시에 클래식이 처음 본 미래였습니다. 레스피기가 여기까지 계산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만 옛것과 새것을 늘 한 손에 쥐던 사람이라, 우연으로만 보기도 어렵답니다.
디즈니 고래부터 록 밴드까지
《로마의 소나무》는 레스피기의 작품 중 가장 많이 녹음된 곡입니다. 2018년 기준으로 100종이 넘는 음반이 나와 있습니다. 그중 프리츠 라이너(Fritz Reiner)와 시카고 심포니의 1959년 스테레오 녹음은 오디오 애호가들 사이에서 오래된 기준점 대접을 받습니다.
영향력은 콘서트홀 밖으로도 넘어갔습니다. 디즈니의 《판타지아 2000》에서는 혹등고래들이 하늘을 나는 장면에 이 곡이 쓰였습니다. 록 밴드 예스(Yes)는 1983년 앨범 《90125》에서 레스피기의 관현악 음향을 빌려 왔습니다. 축음기로 나이팅게일을 튼 작곡가의 실험 정신이, 한 세기 뒤에도 장르를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서 살아 움직인답니다.
이 곡을 처음 듣는다면
22분짜리 대곡이라 막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 가지만 잡고 들으면 끝까지 빨려 들어갑니다.
① 음량의 낙차를 느껴 보세요. 1악장이 떠들썩하게 끝나자마자 2악장이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해집니다. 이 급격한 대비가 의도된 장치입니다. 볼륨을 중간쯤 맞춰 두고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4악장의 폭발이 제대로 다가옵니다.
② 3악장 끝의 나이팅게일을 놓치지 마세요. 클라리넷의 꿈결 같은 독주가 잦아들 무렵, 진짜 새소리가 끼어듭니다. 100년 전에 녹음된 그 한 마리가 클래식 역사를 바꿨다는 걸 떠올리며 들으면 감각이 달라집니다.
③ 4악장은 한 줄의 크레셴도입니다. 멀리서 다가오는 군단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다가, 마지막엔 오르간과 금관이 무대를 통째로 집어삼킵니다. 가능하면 좋은 스피커나 헤드폰으로, 볼륨을 살짝 올려 들어 보세요.
아직도 노래하는 나이팅게일
레스피기는 1936년 4월, 세균성 심내막염으로 쉰여섯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페라 《루크레치아》를 쓰던 도중이었습니다. 아내 엘사는 남편보다 거의 60년을 더 살면서 1996년까지 그의 음악을 세상에 알리는 데 매달렸습니다. 1악장에 자기 유년의 동요를 남긴 여자가, 남은 평생 그 곡을 지킨 셈입니다.
《로마의 소나무》를 들을 때, 4악장 끝의 폭발에만 귀를 두지 마세요. 3악장 끝에도 귀를 열어 두시길 바랍니다. 100년 전에 녹음된 나이팅게일 한 마리가 지금도 노래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달빛 아래, 우산처럼 펼쳐진 소나무 사이에서.
악보와 함께 듣기
원본 악보는 IMSLP에서 누구나 무료로 열람할 수 있습니다. 로마의 소나무 악보 보기 (IMSLP)
어떤 연주로 시작할까
100종이 넘는 음반 앞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세 갈래만 추렸습니다. 처음이라면 위 라이너 음반으로 시작하고, 로마 현지의 색이 궁금하면 파파노, 3부작을 한 번에 훑고 싶으면 뒤투아로 넘어가면 됩니다.
자주 묻는 질문
참고 자료
이어서 듣기 — 오케스트라를 악기로 쓰는 사람들
《로마의 소나무》가 좋았다면, 아래 다섯 곡은 취향이 맞을 확률이 높습니다. 이유는 하나씩 다릅니다. 레스피기의 스승, 같은 ‘음향의 마법사’ 계열, 그리고 오케스트라로 그림을 그린 곡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