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벨 〈피아노 협주곡 G장조〉 — 작곡가가 끝내 한 번도 못 친 자기 협주곡

일본까지 잡혀 있던 세계 투어 일정표. 초연 무대에서 피아노 앞에 앉은 마르그리트 롱.

작곡가
모리스 라벨
(Maurice Ravel, 1875–1937)
곡명
피아노 협주곡 G장조, M. 83
(Piano Concerto in G major, M. 83)
작곡 기간
1929년 ~ 1931년
악장
3악장
I. Allegramente (G장조)
II. Adagio assai (E장조)
III. Presto (G장조)

1악장. 밝고 경쾌하게
2악장. 아주 느리게
3악장. 아주 빠르게
편성
플루트 2(1명은 피콜로 겸함), 오보에 2(1명은 잉글리시 호른 겸함), E♭ 클라리넷, 클라리넷, 바순 2, 호른 2, 트럼펫 1, 트롬본 1, 팀파니, 트라이앵글, 작은북, 심벌즈, 큰북, 탐탐, 우드블록, 채찍, 하프, 현5부, 독주 피아노
초연
1932년 1월 14일, 살 플레옐, 파리
마르그리트 롱 독주 / 라벨 지휘 / 라무뢰 오케스트라
연주 시간
약 22분

이 곡은 — 라벨이 자기 손으로 초연하려고 썼다가 끝내 남에게 넘긴 20분짜리 피아노 협주곡입니다.

딱 하나만 듣는다면 — 2악장 아다지오 아사이. 피아노 혼자 34마디를 반주도 없이 끌고 가는 도입부가 나옵니다.

첫 음반 — 처음 듣는다면 조성진이 안드리스 넬손스·보스턴 심포니와 녹음한 도이체 그라모폰 음반을 추천합니다.

1928년 4월, 미국 신문 지면에 꽤나 솔깃한 기사 하나가 실립니다. 라벨이 재즈 악단을 위해 신곡을 써주기로 했다는 소식이었죠. 기사에 곁들인 사진 속에서 라벨은 재즈 악단 지휘자 폴 화이트먼과 나란히 피아노 앞에 서서 그럴싸한 포즈까지 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곡은 끝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대신 그로부터 3년이 지나서야 이 협주곡이 툭 튀어나왔죠. 사람들은 이 곡의 마디마디에서 기어이 재즈의 흔적을 찾아내며 즐거워했지만, 정작 라벨 본인이 작곡의 모델로 당당히 꼽은 이름은 생뚱맞게도 모차르트와 생상스였습니다.

1925년 모리스 라벨의 초상 사진
1925년의 라벨. 협주곡에 손을 대기 4년 전이고, 미국 땅을 밟기 3년 전이다.

1928년의 봄, 이방인 라벨의 귀를 사로잡은 소리

1928년 1월, 쉰두 살의 라벨이 뉴욕 항구에 발을 내디딥니다. 이후 넉 달이라는 시간 동안 그는 미국과 캐나다의 도시 스무 곳 이상을 부지런히 돌며 연주와 지휘를 소화했죠. 그의 길지 않은 생애를 통틀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유일한 미국 순회공연이었습니다.

그해 3월 7일 뉴욕에서는 라벨의 쉰세 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파티가 열렸습니다. 메조소프라노 에바 고티에가 멍석을 깐 이 자리에, 라벨이 뉴욕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꼭 한 번 만나고 싶다고 점찍어둔 인물이 나타납니다. 바로 조지 거슈윈이었죠. 거슈윈은 피아노 앞에 털썩 앉아 〈랩소디 인 블루〉와 〈더 맨 아이 러브〉를 멋들어지게 즉흥으로 연주해 보였습니다.

생각해보면 〈랩소디 인 블루〉가 세상에 처음 울려 퍼진 무대 역시 4년 전 바로 이 도시, 뉴욕이었습니다. 1924년 2월 12일 에올리언 홀에서 폴 화이트먼이 이끄는 악단의 연주 위로 거슈윈 본인이 직접 피아노 건반을 두드렸거든요. 그러니까 라벨은 그해 봄, 세상을 흔든 그 명곡을 다름 아닌 작곡가 본인의 날것 그대로의 연주로 감상하는 호사를 누린 셈입니다.

1928년 모리스 라벨과 재즈 악단 지휘자 폴 화이트먼이 피아노 앞에서 악보를 보는 신문 사진
1928년 4월 29일자 《디트로이트 프리 프레스》에 실린 사진. 왼쪽이 라벨, 오른쪽이 폴 화이트먼이다.

앞서 말한 신문 사진의 캡션이 제법 흥미로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라벨이 화이트먼 악단의 비공개 연주를 듣고는 어찌나 흡족해했는지, 당장 그해 가을 순회공연에 올릴 신작을 하나 써주기로 약속했다는 설명이 당당히 적혀 있거든요. 당시 신문은 이를 대단한 특종인 양 대서특필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가을이 왔을 때 곡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화이트먼 악단은 라벨의 신작이라는 거창한 간판 없이 순회공연을 돌아야만 했죠. 세기의 협업이 될 뻔했던 그 약속은 바싹 마른 신문 지면 위에 활자로만 덩그러니 남고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라벨이 정말 아무런 소득도 없이 고향 가는 배에 올랐던 건 아닙니다. 미국에서 그가 챙긴 전리품은 화이트먼의 주머니에 찔러줄 악보 뭉치가 아니라, 넉 달 동안 스펀지처럼 빨아들여 귀에 담은 생생한 ‘소리’였거든요. 그 소리들이 과연 어디로 흘러갔는지는 그로부터 3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정체를 드러냅니다.

“왜 이류 라벨이 되려고 합니까” — 꼬리표 없는 명대사의 탄생

클래식계에는 아주 유명한 일화가 하나 전해집니다. 거슈윈이 라벨에게 정식으로 작곡을 배우고 싶다고 간청하자, 라벨이 이렇게 점잖게 타이르며 거절했다는 이야기죠. “당신은 이미 일류 거슈윈인데, 어째서 이류 라벨이 되려고 하십니까.”

웬만한 클래식 입문서라면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멋진 문장이지만, 사실 이 말이 어디서 처음 튀어나왔는지 정확한 출처를 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이 일화를 진지하게 소개하는 자료들조차 ‘진위는 끝내 확인할 수 없을 것’이라며 한발 물러서서 적어 둘 정도니까요. 전해지는 문구의 디테일도 입을 타는 사람마다 제각각입니다. “왜 이류 라벨이 되려 합니까”부터 “왜 이류 라벨이 되겠다는 겁니까”까지 미묘하게 톤이 다르고, 뒷부분 역시 “이미 일류 거슈윈이면서”라고 슬쩍 꼬리를 내리는 판본도 존재한다는 게 그 방증입니다.

요컨대 단단한 기록으로 남은 팩트라기보다는, 호사가들의 입에서 입으로 부지런히 굴러다닌 구전 가요에 가깝습니다. 그렇게 수없이 굴러다니며 거친 모서리가 둥글게 깎여 지금처럼 매끈한 명대사로 다듬어졌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출처 모를 문장이 무려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질기게 살아남은 이유는 하나입니다. 이 짧은 한마디가 라벨이 재즈라는 새로운 음악을 어떻게 대했는지 단박에 짚어주기 때문이죠. 그는 콧대 높은 유럽 거장의 얼굴로 재즈를 내려다본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기꺼이 배우려는 쪽에 서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 사실은요 — 이 협주곡을 가리켜 “라벨이 거슈윈에게 한 수 배운 재즈 협주곡”이라고 낭만적으로 포장하는 글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작 라벨 본인이 남긴 말들을 찬찬히 뜯어보면, 이 작품을 그저 재즈 협주곡이라는 좁은 울타리 안에 가둬 두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평론가 미셸 칼보코레시가 이 곡과 왼손을 위한 협주곡을 비교해 달라고 청했을 때 라벨은 이렇게 단호히 답했습니다. “협주곡의 음악은 어디까지나 가볍고 화려해야지, 심오함이나 극적인 효과를 노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서 작곡의 모델로 불쑥 꺼낸 이름이 모차르트와 생상스였고, 심지어 한때는 곡의 제목을 아예 ‘오락곡’을 뜻하는 〈디베르티스망〉으로 못 박을 생각까지 했습니다.[1]

쉰넷의 작곡가가 머릿속에 그린 야심 찬 세계 투어

미국에서 돌아온 라벨은 1929년 여름, 마침내 이 협주곡의 첫 음표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해 3월로 그의 나이 쉰넷이 되던 무렵이었죠.

작곡의 목적은 더없이 노골적이었습니다. 자신이 직접 독주자석에 앉아 이 따끈따끈한 신곡을 들고 전 세계를 순회하겠다는 거였죠. 유럽과 미국은 당연했고, 남미와 일본까지 그 빼곡한 일정표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습니다. 앞선 미국 투어의 달콤한 성공이 그의 가슴에 제대로 불을 지핀 셈입니다. 자기 곡을, 자기 손으로 연주하며 지구를 반 바퀴나 돌겠다는 거창한 밑그림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거대한 밑그림을 그린 사람의 육체였습니다. 라벨은 1927년 무렵부터 손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말이 어눌해지는 증상을 겪고 있었습니다. 결국 곡 작업은 2년을 훌쩍 넘겨 1931년 11월에야 겨우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쉰여섯 살이 되던 해였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몸에는 피로가 켜켜이 쌓였고 건강은 서서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야심 차게 준비했던 세계 투어 일정은 모두 취소됐습니다. 라벨은 오직 자신이 연주할 목적으로 써 내려간 이 협주곡을 대중 앞에서 단 한 번도 연주하지 못했습니다.

하나의 책상, 그 위에 놓인 두 개의 협주곡

이 곡과 씨름하던 1930년 봄부터 1931년 가을 사이, 라벨의 책상 위에는 또 다른 피아노 협주곡 악보가 한 자리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곡을 의뢰한 사람은 파울 비트겐슈타인이었죠. 1차 세계대전에서 오른팔을 잃은 오스트리아의 피아니스트로, 자신이 한 손으로 연주할 수 있는 곡을 여러 작곡가에게 의뢰하며 굳건히 무대로 돌아온 인물입니다. 훗날 이름을 날린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친형이기도 합니다.

피아노 앞에 앉아 한 팔로 건반을 짚고 있는 파울 비트겐슈타인의 흑백 사진
파울 비트겐슈타인. 오른팔을 잃은 뒤에도 무대를 놓지 않았고 라벨을 포함한 당대 작곡가들에게 자기 몫의 협주곡을 주문해 냈다.

두 곡이 완성된 시점과 초연 날짜를 나란히 겹쳐보면 라벨의 이 시기가 얼마나 숨 가쁘게 흘러갔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왼손을 위한 협주곡은 1930년 가을에 한발 앞서 완성되었고, 1932년 1월 5일 빈에서 비트겐슈타인의 독주와 로베르트 헤거의 지휘로 세상에 첫선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G장조 협주곡의 초연은 그로부터 불과 9일 뒤의 일이었습니다.

같은 작곡가가 같은 시기에 나란히 써 내려간 두 협주곡인데도 그 성격은 놀라울 만큼 정반대입니다. 왼손 협주곡이 시종일관 어둡고 무거운 공기로 청중을 짓누른다면, G장조 협주곡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늘 한 점 없이 밝은 쪽으로만 경쾌하게 발걸음을 옮깁니다. 흥미롭게도 라벨 본인은 이 두 곡을 두고 G장조 쪽이 “더 라벨답다”고 평했습니다.

허공을 가르는 채찍 소리, 막이 오르다

이 곡의 오케스트라 편성표를 들여다보면 여느 협주곡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물건이 하나 떡하니 버티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채찍’이죠. 나무 판 두 장을 경첩으로 맞붙여 놓고 손으로 힘껏 후려치면 “딱” 하고 날카롭게 터지는 소리를 내는 타악기로, 프랑스어로는 푸에(Fouet)라고 부릅니다.

1악장 — 서주는 생략합니다, 단 1초 만에 돌입하는 본론

고전적인 협주곡의 관례를 따르자면, 오케스트라가 몇 분 동안 그럴싸하게 분위기를 잡으며 판을 깔아주거나 독주자가 묵직한 화음을 쾅쾅 던지며 극적으로 등장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라벨은 이 두 가지 점잖은 방식을 모두 걷어차 버렸죠. 허공에서 채찍 소리가 한 번 시원하게 터지자마자, 피콜로가 곧바로 튀어나와 행진곡 풍의 첫 번째 주제를 재잘거리기 시작합니다. 그 와중에 피아노는 주인공 행세를 하는 대신 그 아래에 얌전히 엎드려 반주를 깔아주고 있죠.

독주 피아노가 자기 이름을 단 협주곡의 첫 페이지부터 반주자 노릇을 자처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앞서 라벨이 작곡의 모델로 거창하게 들먹였던 이름들을 여기서 다시 떠올려 보면 그제야 앞뒤가 딱 들어맞습니다. 협주곡은 어디까지나 가볍고 화려해야 한다고 단언했던 그의 얄미운 철학이 곡이 시작된 지 단 스무 초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셈입니다.

재즈라는 요소는 이 1악장에서 단순한 복사 붙여넣기식 ‘인용’이 아니라 훌륭한 ‘재료’로 쓰입니다. 클라리넷이 음정을 살짝 흘려보내듯 미끄러뜨리며 끈적한 블루스처럼 노래하는 대목이 있는가 하면, 화음의 세 번째 음을 슬쩍 반음 낮춰 묘하게 표정을 비틀어버리는 대목도 심심찮게 등장하거든요. 미국에서 그토록 알뜰하게 주워 담아 온 이국적인 소리들을 라벨은 특유의 정교한 프랑스 관현악 문법 안에 감쪽같이 녹여 냈습니다. 겉멋만 들어 재즈 흉내를 낸 음악이 아니라, 재즈라는 향신료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모차르트에 가까운 소리죠.

🎧 여기서 들으세요 — 딴청 피울 틈 없이, 곡이 시작되자마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채찍이 허공을 가르고 피콜로가 당당히 행진곡풍 멜로디를 들고 튀어나오기까지 단 5초도 채 걸리지 않거든요. ▶ 이 지점부터 듣기

루이 로르티 · 시몬 영 지휘 WDR 교향악단, 2026년 쾰른 필하모니 실황. 악장마다 챕터가 붙어 있어서 원하는 대목으로 바로 건너뛸 수 있는 영상이다.

피콜로가 부는 그 행진곡은 대체 어디서 흘러왔을까

1악장 첫머리를 장식하는 그 당돌한 주제를 두고, 음악회 프로그램 노트들은 약속이나 한 듯 ‘바스크’라는 단어를 만지작거립니다. 라벨이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에 걸친 바스크 지방의 시부르에서 태어났고, 그의 어머니 역시 바스크 혈통이었기 때문이죠.

여기에는 제법 그럴싸한 사연이 얽혀 있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1913년 무렵, 라벨은 〈자즈피악 바트〉라는 곡을 한창 스케치하는 중이었습니다. 바스크어로 “일곱이 하나”라는 뜻인데, 바스크 일곱 지방의 토속 선율을 한데 엮어 단악장짜리 협주곡으로 빚어낼 참이었죠. 하지만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는 바람에, 라벨은 쓰다 만 악보를 파리에 덩그러니 남겨둔 채 피난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결국 곡은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 미완성 스케치 중에서 이미 펜을 굴려 완성해 두었던 두 대목이, 훗날 꼬불꼬불 길을 돌아 이 G장조 협주곡으로 쏙 흘러들어 갔다고 전해집니다. 하나는 ‘시부르의 봄 아침’, 그리고 다른 하나는 ‘몰레옹 축제’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던 대목이죠.

다만 원고의 어느 마디가 새 악보의 어디로 이사 갔는지 한 줄씩 현미경처럼 대조해 낸 명확한 증거는 아직 없습니다. 대부분의 자료 역시 “일부 소재가 넘어갔다”며 슬쩍 얼버무리는 선에서 멈춰 서곤 하죠. 열여섯 해 전에 먼지를 덮어쓰고 접혔던 낡은 종이가 쉰네 살 작곡가의 책상 위에서 다시 부스럭거리며 펼쳐졌을 것이라는 추측, 딱 거기까지가 지금 우리가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사실의 전부입니다.

피아노 앞의 빈자리를 넘겨받은 구원투수

야심 찼던 라벨이 건강 문제로 직접 건반을 칠 수 없게 되자, 초연 독주자의 영광은 마르그리트 롱에게 돌아갔습니다. 파리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던 그는 당시 프랑스 음악을 연주하는 데 있어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독보적인 피아니스트였죠. 라벨은 결국 이 협주곡을 롱에게 헌정하며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랬습니다.

1900년경 젊은 시절 마르그리트 롱의 세피아 초상 사진
1900년경의 마르그리트 롱. 라벨의 협주곡을 받아 들기 30년쯤 전, 아직 교단에 서기 전 신진 연주자이던 시절이다. 파리음악원 예비반 교수로 임명된 것은 1906년, 정교수가 된 것은 1920년이다.

롱에게 악보를 넘긴 이 결정은 결과적으로 신의 한 수가 되어 이 협주곡에 날개를 달아주었습니다. 초연을 마친 라벨과 롱은 지체 없이 유럽 투어 길에 오릅니다. 앤트워프를 시작으로 브뤼셀, 빈, 부쿠레슈티, 프라하, 런던, 바르샤바, 베를린, 암스테르담, 부다페스트까지 무려 열여섯 개 도시의 무대를 부지런히 밟았죠. 롱이 건반 위를 날아다니면 라벨이 그 앞에서 지휘봉을 쥐는 완벽한 분업이었습니다.

이윽고 4월이 되자 대서양 건너편에서도 같은 선율이 울려 퍼집니다. 22일 보스턴에서는 헤수스 마리아 산로마의 독주와 세르게이 쿠세비츠키가 이끄는 보스턴 심포니가, 공교롭게도 같은 날 필라델피아에서는 실번 레빈의 독주와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가 지휘하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가 각각 북미 초연의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정작 작곡가 본인은 바다를 건너지 못했지만, 곡이 알아서 제 발로 대양을 건너가 청중을 만난 셈입니다.

가장 매끄러운 선율 뒤에 숨은 가장 지독한 산고

2악장 — 반주를 덜어낸 피아노의 고독한 34마디

이 협주곡에서 단 한 대목만 골라 들어야 한다면 주저 없이 여기를 꼽겠습니다. 떠들썩한 1악장이 잦아들고 느릿한 ‘아다지오 아사이’가 막을 올리면, 무대 위에는 오직 피아노 홀로 남겨집니다. 빵빵한 오케스트라는 한동안 입을 꾹 다문 채 구경만 하죠. 왼손이 왈츠의 스텝을 밟듯 느긋하게 세 박을 짚어내면, 그 위로 오른손이 아스라한 선율을 얹어 무려 34마디를 홀로 끌고 나아갑니다. 놀라운 건 그 긴 시간 동안 똑같은 마디가 단 한 번도 앵무새처럼 되풀이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라벨은 이 악장의 뼈대를 세우며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5중주〉, 그중에서도 느린 악장을 교본 삼아 들여다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훗날 음악학자 마이클 러스가 호기심에 이 두 곡의 길이를 나란히 맞대고 재보았죠. 모차르트의 선율이 20마디에 걸쳐 알뜰하게 펼쳐지는 데 비해, 라벨은 장장 34마디를 도돌이표 하나 없이 꿋꿋하게 밀어붙입니다. 자기가 삼은 모델보다 한술 더 떠서 까마득히 멀리 가버린 셈입니다.

악보를 털어내고 라벨이 내뱉은 탄식 섞인 투정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그 흐르는 프레이즈라니! 그걸 한 마디 한 마디 얼마나 붙들고 있었는지!” 우리 귀에는 이 34마디가 세상에서 가장 매끄럽고 저절로 흘러가는 물결처럼 들리지만, 실은 라벨이 가장 집요하게 악보를 물고 늘어지며 공을 들인 피 말리는 대목이기도 합니다.[2]

이 마의 34마디를 두고 한국어 해설지들 사이에서 단골로 돌아다니는 설명이 하나 있습니다. 오른손은 3/4박자로, 왼손은 6/8박자로 서로 기묘하게 엇갈려 적혀 있다는 이야기죠. 하지만 정작 총보를 훌쩍 넘겨보면 영 딴판입니다. 모든 성부의 머리맡에는 3/4박자라는 기호 하나만 얌전히 적혀 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쩡한 악보를 두고 이런 말이 자꾸 맴도는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왼손이 여섯 개의 음을 셋씩 둘로 묶어 짚고 넘어갈 때, 정작 그 위에 얹힌 오른손 선율은 세 박을 또박또박 지키거든요. 분명 총보의 뼈대는 세 박인데, 그 아래로 두 박짜리 묵직한 그림자가 일렁이는 기묘한 광경이 펼쳐집니다. 우리 귀는 엇갈리는 박자를 두 개로 듣고 깜빡 속아 넘어가는데, 정작 잉크로 찍힌 악보에는 단 하나의 박자뿐입니다. 마치 마찰력 없이 저절로 스르르 흘러가는 듯한 신비로운 인상이 바로 이 절묘한 엇박의 마술에서 튀어나옵니다.

그렇게 3분 남짓한 시간이 스치고 나면 어디선가 플루트가 슬며시 고개를 내밀고, 오보에와 클라리넷이 그 바통을 차례로 건네받으며 멜로디를 부릅니다. 그리고 이 숨 막히는 악장의 끝자락에 다다르면 재미있게도 판이 완전히 뒤집힙니다. 잉글리시 호른이 처음에 나왔던 쓸쓸한 주제를 다시 한번 길게 뽑아 올릴 때, 이번에는 피아노가 조연으로 내려앉아 그 밑에 16분음표를 카펫처럼 촘촘히 깔아 주거든요. 장장 34마디의 무거운 짐을 혈혈단신으로 짊어지고 왔던 피아노의 두 손이, 대미에서는 스윽 한 걸음 물러나 목관악기의 뒷바라지를 자처하는 셈입니다.

🎧 여기서 들으세요 — 8분 28초부터 느릿한 ‘아다지오 아사이’의 막이 오릅니다. 피아노가 홀로 발걸음을 떼어 대체 어디까지 오케스트라 없이 걸어가는지 가만히 세어 보세요. ▶ 이 지점부터 듣기

조성진 · 안드리스 넬손스 지휘 보스턴 심포니, 2악장만 따로 듣기. 도입의 34마디를 서두르지 않고 그대로 흘려보내는 연주다.

단 4분 만에 셔터를 내리는 피날레

3악장 — 당나귀 울음소리로 찍는 마침표

2악장의 짙은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3악장은 벼락같은 화음 네 개로 쾅 하고 문을 걷어차며 뛰어듭니다. 그러고는 쏜살같이 단 4분 만에 끝을 내버리죠. 전체 22분짜리 협주곡에서 피날레에 고작 4분을 할애했으니, 애초에 라벨의 머릿속에 느긋한 여운이나 그럴싸한 총정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셈입니다.

이 짧고 굵은 4분 안에는 그야말로 별의별 소리가 다 구겨져 있습니다. 클라리넷과 피콜로가 고음역에서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는가 하면, 트롬본은 짓궂게 음을 미끄러뜨리며 영락없는 당나귀 울음소리를 내거든요. 그 왁자지껄한 틈바구니로 번쩍이는 팡파르까지 거침없이 끼어듭니다. 1악장에서 얌전하게 밑재료로만 우려내던 재즈를, 이 대목에 이르러서는 굳이 숨기려 들지 않고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이쯤 되면 독주 피아노가 나서서 난장판을 수습할 법도 한데, 오히려 한술 더 떠서 그 소동 속으로 신나게 뛰어듭니다. 그러다 마치 전원을 뽑은 것처럼 툭, 하고 갑자기 끝나버리죠. 미련 가득한 여운 같은 것은 털끝만큼도 남기지 않습니다.

협주곡이란 모름지기 가볍고 화려해야 한다던 자신의 선언을, 라벨은 이 마지막 4분에서 문자 그대로 증명해 보였습니다. 같은 시기에 나란히 왼손을 위한 협주곡을 써 내려가던 손이 이렇게 천연덕스러운 결말을 맺었다는 사실도 새삼 흥미롭습니다. 한쪽 책상에서는 전쟁이 앗아간 팔을 부여잡고 무겁고 어두운 20분을 묵묵히 밀어붙였으면서, 다른 쪽 책상에서는 당나귀 울음소리와 함께 가뿐하게 문을 닫아버렸으니까요.

🎧 여기서 들으세요 — 17분 46초부터 숨 가쁜 프레스토가 몰아칩니다. 트롬본이 능청스럽게 미끄러지는 자리를 놓치지 마세요. ▶ 이 지점부터 듣기

1932년 1월 14일, 살 플레옐에 열린 막

그토록 고대하던 초연 무대에서 라벨의 손에 쥐어진 것은 피아노 건반이 아니라 지휘봉이었습니다. 피아노 앞의 빈자리는 마르그리트 롱이 채웠고, 그들 앞에는 라무뢰 오케스트라가 진을 치고 있었죠.

라무뢰 오케스트라의 자료실에는 그날의 공연 포스터가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거기에는 마르그리트 롱과 오케스트라의 이름이 또렷이 박혀 있고, 지휘석에는 오직 라벨 단 한 사람의 이름만 묵직하게 올라가 있습니다.

1932년 라벨 피아노 협주곡 G장조 초연 공연 포스터. 마르그리트 롱과 라무뢰 오케스트라 이름이 적혀 있다
초연 공연 포스터. 라무뢰 오케스트라가 보관해 온 자료이고, 마르그리트 롱과 라무뢰 오케스트라의 이름이 적혀 있다. 지휘는 라벨이 맡았다.

객석의 반응은 그 자리에서 즉각적으로 터져 나왔습니다. 평론가 에밀 뷔예르모즈는 일주일 뒤 잡지 《캉디드》에 이 초연을 가리켜 그 시즌 최고의 예술적 사건이라고 치켜세웠습니다. 곡의 구석구석에서 놀랄 만큼 젊은 기운이 펄떡인다는 찬사도 잊지 않았죠. 그날 초연을 객석에서 지켜본 작곡가 프로코피예프 역시 청중과 평단이 한마음으로 열광했다고 당시의 달아오른 공기를 기록해 두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쏟아진 찬사의 화살표는 어디까지나 ‘곡’ 자체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일례로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는 작품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면서도, 정작 그날 오케스트라의 반주는 선명함과 탄력을 잃어버렸다고 뼈 있는 지적을 남겼거든요. 하필 그날 오케스트라를 이끈 사람이 다름 아닌 작곡가 본인이었는데 말이죠.

초연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석 달 뒤, 4월 14일 파리에서 롱은 이 곡의 세계 최초 녹음을 역사에 남깁니다. 콜롬비아 레이블을 통해 78회전 음반 세 장으로 발매된 이 앨범 표지에는 라벨이 직접 지휘했다고 번듯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다만 실제 녹음실에서 지휘봉을 든 사람은 포르투갈 출신의 지휘자 페드루 지 프레이타스 브랑쿠였다는 꼬리표가 오래도록 따라붙었죠. 마르그리트 롱의 전기를 집필한 자닌 베유가 1969년에 이 주장을 처음 제기했고, 이후 1982년 장 베라르가 장미셸 넥투와 나눈 인터뷰를 1989년 장 투즐레가 다시 인용하면서 기정사실처럼 널리 퍼졌습니다. 하지만 이는 1차 사료를 통해 명확히 입증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며, 브랑쿠 본인조차 자신이 이 녹음을 지휘했다고 직접 입에 올린 적이 없습니다.

호사가들의 입을 타고 전해지는 뒷이야기는 대략 이렇습니다. 라벨이 78회전 음반 한 면의 물리적 한계인 4분 30초 안에 도저히 구겨 넣을 수 없는 느린 템포를 끝까지 고집하자, 참다못한 콜롬비아의 아트 디렉터가 그를 슬쩍 술자리로 빼돌렸다는 겁니다. 그리고 작곡가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브랑쿠와 오케스트라가 재빨리 템포를 당겨 녹음을 해치워버렸다는 이야기죠.

이 기막힌 술자리 이야기가 과연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여전히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지휘자의 이름표가 60년 가까이 엇갈린 채 돌아다녔다는 점만큼은 분명한 사실이고, 문제의 그 음반은 지금도 인터넷 아카이브와 복각반을 통해 생생하게 들어볼 수 있습니다. 이러나저러나 곡을 헌정받은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작곡가 앞에서 직접 건반을 두드린 귀한 소리가 통째로 박제되어 남아 있는 셈입니다.

그해 10월의 택시 사고

1932년 10월 8일 밤, 파리 시내에서 라벨이 타고 가던 택시가 충돌 사고를 냅니다. 그는 얼굴이 찢어지고 이가 부러졌으며, 뇌진탕과 함께 오른쪽 가슴에 피가 고이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사고 이후로 원인 모를 열이 끊임없이 오르내렸습니다.

사고 전부터 있던 증상들 위로 새로운 고통이 얹혔습니다. 적절한 단어를 떠올리지 못하는 증상에 더해 주의력과 기억력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를 갉아먹은 정확한 병명은 지금까지도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사후 부검이 이뤄지지 않았기에, 알츠하이머병이나 피크병, 원발진행실어증, 혹은 택시 사고의 치명적인 후유증일 것이라는 의학적 가설들만이 여전히 추측으로 엇갈리고 있습니다.

라벨은 사고 이후 5년을 더 생존했지만, 그 뒤로 새로 손댄 작품은 단 하나도 끝맺지 못했습니다. 그의 생애 마지막으로 남은 곡은 영화 음악으로 쓰기 위해 1932년부터 힘겹게 붙들고 있던 가곡집 〈돈키호테가 뒬시네에게〉였고, 그마저도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빌려 1933년에야 겨우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습니다. 결국 1937년 12월 중순 병원에 입원해 뇌수술까지 받았지만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고, 그해 12월 28일 조용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돌이켜보면 라벨은 미국 땅에서 펄떡이는 재즈 악단의 소리를 가득 담아 왔고, 일본까지 아우르는 빽빽한 투어 일정표를 짰으며, 자신의 두 손으로 직접 전 세계를 돌겠다는 벅찬 계획도 세웠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거창한 계획 중 어느 것 하나 온전히 이뤄진 것은 없었죠. 하지만 그 모든 무산을 대신해, 허공을 가르는 채찍 소리 한 번으로 시원하게 막을 여는 22분의 마법이 우리 곁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 22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의 공연장에서 쉼 없이 되풀이되며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적어도 폴 화이트먼의 주머니에 찔러주기로 했던 그 환상의 미발표곡보다는, 클래식 역사에 훨씬 더 남는 거래였던 셈입니다.

악보와 함께 눈으로 쫓아가며 듣기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의 독주에 총보가 한 페이지씩 따라 넘어간다. 1악장 첫 줄 타악기 칸에서 채찍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영상이다.

1932년 파리의 출판사 뒤랑이 처음 인쇄기를 돌려 찍어냈던 원본 악보는, 고맙게도 지금 무료 악보 도서관인 IMSLP에 활짝 공개돼 있습니다. 라벨 피아노 협주곡 G장조 악보 보기 (IMSLP)

어떤 연주로 첫 단추를 꿸까요

음반 세 장을 골랐습니다. 우리 시대의 감각을 입고 새롭게 나온 소리, 후대 연주자들에게 든든한 교과서가 되어준 기준 같은 소리, 그리고 이 곡을 세상에 처음 들이밀었던 사람들의 육성 같은 소리입니다.

👑 첫 감상 추천

조성진 · 안드리스 넬손스 지휘 보스턴 심포니

도이체 그라모폰 · 2025년 발매

라벨 탄생 150주년에 맞춰 나온 최신 녹음이라 소리가 가장 깨끗하고 왼손 협주곡이 같이 들어 있어 두 곡을 나란히 듣기 좋습니다. 옛 명연의 거친 맛을 기대한다면 너무 반듯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레퍼런스

마르타 아르헤리치 · 클라우디오 아바도 지휘 베를린 필하모닉

도이체 그라모폰 · 1967년 녹음

이 곡을 이야기할 때 기준점으로 불려 나오는 녹음이고 3악장의 속도감은 60년이 지나도 따라올 연주가 드뭅니다. 2악장을 느긋하게 듣고 싶은 사람에게는 성급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와일드카드

마르그리트 롱 · 페드루 지 프레이타스 브랑쿠 지휘

콜롬비아 · 1932년 녹음

이 곡을 헌정받은 사람이 초연 석 달 뒤에 라벨이 지켜보는 앞에서 남긴 세계 최초 녹음입니다. 78회전 음반이라 잡음이 깔리니, 음질이 걸리는 사람은 위의 두 장으로 가는 편이 낫습니다.

라벨은 정말 이 협주곡을 한 번도 직접 연주하지 않았습니까?

대중 앞에서는 치지 못했습니다. 원래 계획은 자기가 독주자로 앉아 유럽과 미국은 물론 남미와 일본까지 도는 것이었는데 피로와 건강 악화로 준비를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초연은 마르그리트 롱에게 넘기고 라벨은 지휘만 맡았습니다.

이 곡은 재즈 협주곡입니까?

재즈에서 가져온 요소가 분명히 있습니다. 1악장의 블루스풍 클라리넷, 3악장에서 트롬본이 음을 미끄러뜨리는 대목이 대표적입니다. 다만 라벨 본인은 평론가 미셸 칼보코레시에게 이 곡의 모델로 모차르트와 생상스를 들었습니다. 재즈는 목적이 아니라 재료 쪽에 가깝습니다.

거슈윈이 라벨에게 레슨을 청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입니까?

두 사람이 1928년 3월 7일 뉴욕에서 만난 것은 기록으로 확인됩니다. 하지만 “왜 이류 라벨이 되려 합니까” 대사는 널리 알려진 일화일 뿐 1차 기록으로 확인된 것은 아닙니다. 이 일화를 소개하는 자료들도 진위는 확인할 수 없다고 함께 적어 둡니다.

왼손 협주곡과는 무슨 관계입니까?

거의 같은 시기에 나란히 쓴 형제 같은 곡입니다. 왼손 협주곡은 1차 대전에서 오른팔을 잃은 파울 비트겐슈타인이 주문했고 초연은 1932년 1월 5일 빈에서 열렸습니다. G장조 협주곡의 초연은 그 9일 뒤입니다. 성격은 정반대라, 왼손 협주곡은 어둡고 무거운 쪽입니다.

1932년 마르그리트 롱 녹음의 지휘자는 누구입니까?

음반에는 라벨로 적혀 있습니다. 실제로는 포르투갈 지휘자 페드루 지 프레이타스 브랑쿠가 지휘봉을 들었다는 설이 널리 퍼져 있는데, 1969년 자닌 베유가 쓴 마르그리트 롱 전기에서 처음 나왔고 1982년 장 베라르의 인터뷰를 1989년 장 투즐레가 인용하며 자리를 잡았습니다. 다만 1차 사료로 입증된 적은 없고, 브랑쿠 본인도 이 녹음을 지휘했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라벨이 세션을 지켜보며 곡을 감수한 것은 분명합니다.

참고 자료

이어서 듣기 — 라벨의 또 다른 얼굴들

이 협주곡이 귀에 제법 잘 감겼다면, 아래에 이어지는 다섯 곡 역시 취향에 들어맞을 확률이 꽤 높습니다. 물론 그 플레이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이유는 곡마다 하나씩 다 다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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