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곡가
- 에드워드 엘가
(Edward Elgar, 1857–1934) - 곡명
- 주제에 의한 변주곡 〈에니그마〉, Op.36
(Variations on an Original Theme ‘Enigma’) - 작곡 시기
- 1898–1899년
- 악장
- 주제 + 14개 변주
Theme — Andante
I. C.A.E. — L’istesso tempo
II. H.D.S-P. — Allegro
III. R.B.T. — Allegretto
IV. W.M.B. — Allegro di molto
V. R.P.A. — Moderato
VI. Ysobel — Andantino
VII. Troyte — Presto
VIII. W.N. — Allegretto
IX. Nimrod — Adagio
X. Dorabella — Intermezzo
XI. G.R.S. — Allegro di molto
XII. B.G.N. — Andante
XIII. *** — Romanza
XIV. E.D.U. — Finale - 편성
- Fl.2, Ob.2, Cl.2, Bsn.2 / Hn.4, Tp.3, Tb.3, Tu.1 / Timp, Bass Drum, Cymbals, Triangle / Organ / Strings
- 초연
- 1899년 6월 19일, 런던 St James’s Hall
지휘: Hans Richter - 연주 시간
- 약 30분
- 헌정
- “To my friends pictured within”
이 곡은 — 친구 14명의 성격과 버릇을 14개 변주에 그대로 박아 넣은 음악 캐리커처입니다. 주제 선율 속에는 끝내 밝히지 않은 ‘숨은 선율’이 하나 묻혀 있습니다.
딱 하나만 듣는다면 — 9번 변주 ‘Nimrod'(Adagio). 출판인 아우구스트 예거와 나눈 우정을 담은 악장이며, 오늘날 영국에서는 추모 음악의 표준으로 통합니다.
첫 음반 — 작곡가 엘가 본인 지휘 · LSO · 1926년 HMV 녹음(작곡가 직속 템포의 기준점).
1934년, 에드워드 엘가는 끝내 입을 열지 않은 채 죽었습니다. 1899년에 쓴 곡 한가운데 자기만 아는 농담을 하나 묻어두고, 35년 동안 정답을 단 한 번도 말하지 않은 채였습니다. 답을 캐물은 친구 도라 페니에게 그가 남긴 말은 이 한 줄뿐입니다 — “자네라면 알아맞힐 줄 알았는데.”
그 농담을 풀었다며 100년 동안 음악학자 여섯 명이 각자 책을 한 권씩 썼습니다. 후보 명단에는 〈Auld Lang Syne〉도 있었고, 모차르트 〈레퀴엠〉도 끼었고, 끝내는 원주율 π까지 기어들어왔습니다. 도대체 이 곡 안에 무엇이 숨어 있기에 한 세기가 지나도 풀리지 않는 것일까요.

1898년 10월 21일, 우스터의 한 시간
1898년 10월, 흔히 21일 저녁으로 알려진 그날의 엘가는 만 41세였고 여전히 무명이었습니다. 그날도 우스터에서 바이올린 레슨을 하루 종일 했고, 지친 몸으로 집 피아노 앞에 앉아 멍하니 손가락만 굴리고 있었습니다. 거실에 있던 아내 앨리스가 그때 한마디를 던집니다. “에드워드, 그거 좋은 곡인데.”
엘가는 멈칫하더니 되묻습니다. “이걸 어떻게 발전시키지?” 그러고는 친구들을 한 명씩 머릿속에 떠올리기 시작합니다. 손가락을 푸는 친구, 문을 쾅 닫고 나가는 친구, 비올라를 끝내 못 치는 학생, 그리고 친구가 기르던 불도그 한 마리가 차례로 떠올랐습니다. 그날 밤, 14개 변주의 골격이 통째로 잡혀버렸습니다.
아내의 한마디로 시작된 그 한 시간이 영국 음악사를 바꿔놓은 셈입니다. 18년을 무명으로 보낸 시골 바이올린 교사가 이듬해 6월 런던에서 이 곡을 초연했고, 1902년에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뒤셀도르프에서 그를 “최초의 진보적 영국 작곡가”라고 공개적으로 치켜세우게 되니까요. 거의 200년 만에 영국 작곡가가 유럽 대륙의 인증 도장을 받은 사건, 그 씨앗이 바로 우스터의 그 한 시간이었습니다.

친구 14명을 음악으로 도촬한 작곡가
한국어 해설 99%가 멈춰 서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14명의 친구를 음악으로 그린 초상화입니다.” 점잖긴 하지만, 솔직히 거짓말에 가깝습니다. 엘가가 한 짓은 초상화가 아니라 캐리커처였고, 캐리커처라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 정확히 옮기면 친구들의 짜증 나는 버릇을 음악으로 박제한 도촬이었습니다.
각 변주에 붙은 이니셜은 죄다 실존 인물입니다. 거의 모든 변주가 그 사람의 신체적 버릇이나 실수, 짜증 나는 습관을 음악으로 옮긴 단톡방 캐리커처에 가깝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니, 사례 다섯 개를 직접 까볼게요.
변주 II — 손가락 푸는 친구
이니셜 H.D.S-P.는 피아니스트 휴 스튜어트-파월입니다. 이 친구는 실내악 연주 직전마다 늘 똑같은 반음계 스케일로 손가락을 풀었던 모양입니다. 변주 II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워밍업 그대로입니다. 친구 한 명을 그리는 가장 짓궂은 방법은, 그가 곡을 시작하기도 전에 끝나버리는 1분짜리 의례를 변주 한 곡으로 통째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변주 IV — 30초짜리 문 쾅
이니셜 W.M.B.는 윌리엄 미스 베이커, 시골 신사였습니다. 손님 방에서 나갈 때 늘 문을 쾅 닫고 가는 버릇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변주 IV는 14개 변주 중 가장 짧은 약 30초짜리인데, 마지막 화음의 강한 sf가 정확히 그 문 닫히는 소리입니다. 친구의 매너 부족을 30초 만에 음악으로 박제해버린 것입니다.
변주 VI — 학생이 끝내 못 친 그 패시지
Ysobel은 엘가의 비올라 학생 이저벨 핏튼입니다. 변주 VI에는 비올라가 줄을 건너뛰는 까다로운 패시지가 들어 있는데, 이게 바로 핏튼이 끝까지 못 쳤던 실제 연습 과제입니다. 스승이 학생을 다독여준 게 아니라, 학생이 못 친 바로 그 대목을 기념비로 깎아 영국 도서관에 헌납해버린 셈입니다. 위로의 탈을 쓴 영원한 박제입니다.
변주 X — 50년 동안 본인은 몰랐던 말더듬기
Dorabella는 도라 페니, 훗날의 도라 파웰입니다. 말을 살짝 더듬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변주 X 도입부의 헐떡이는 듯한 목관 악구는 그녀의 그 말투를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도라 본인은 그 사실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1937년 회고록 『Edward Elgar: Memories of a Variation』을 쓰기 직전에야 누군가에게 듣고 알았다고 본인이 직접 적었습니다. 자기 말투가 변주곡으로 박제된 줄도 모른 채 50년 가까이 그 곡을 즐겁게 듣고 다닌 사람이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변주 XI —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불도그
이니셜 G.R.S.는 글로스터 대성당의 오르가니스트 조지 로버트슨 싱클레어인데, 정작 이 변주의 진짜 주인공은 그가 아닙니다. 진짜 주인공은 그의 불도그 ‘Dan’입니다. 어느 날 Dan이 와이 강에 첨벙 빠졌다가 둑을 따라 한참 헤엄친 뒤 짖으며 기어 올라온 일이 있었습니다. 변주 XI의 첫 마디가 그 첨벙이고, 마지막 마디가 둑에 올라와 짖는 바로 그 순간입니다. 정작 싱클레어 본인은 자기 변주에서 얼굴조차 제대로 못 내밉니다.
훗날 Sir 작위까지 받은 작곡가가, 친구에게 바친 변주곡의 한 자리를 그 친구의 개에게 양보해버린 사건입니다. 클래식 교과서는 좀처럼 이 얘기를 적지 않습니다.
Nimrod의 진짜 그 밤 — Jaeger가 거실에서 친 베토벤
변주 IX ‘Nimrod’에 대한 한국어 표준 설명은 늘 이렇게 끝나버립니다. “친구 예거에게 바친 감동적인 추모곡.” 딱 이 한 줄 때문에 이 곡의 진짜 무게가 절반 이하로 잘려 나갔습니다. Nimrod는 추모곡이 아닙니다. 자살을 입에 담은 작곡가를 친구가 거실에서 베토벤으로 살려낸, 바로 그날 밤의 헌사를 음악으로 옮긴 곡입니다.
1898년 어느 밤, 슬럼프에 빠진 엘가가 친구 아우구스트 예거에게 속을 털어놓습니다. “브람스의 4번 같은 곡은 도저히 못 쓰겠어. 차라리 다 그만두는 게 낫겠어.” 예거는 한참을 잠자코 듣다가 말없이 일어나 피아노 앞에 앉습니다. 그러고는 베토벤 〈비창〉 소나타 2악장 Adagio cantabile의 첫 음형을 천천히 짚어 나갑니다. “베토벤도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지만 그래도 계속 썼어. 자네도 써.” 바이올리니스트 W.H. 리드가 1936년 회고록 『Elgar As I Knew Him』에 직접 옮겨 적어 놓은 일화입니다.
Nimrod 첫 4마디를 베토벤 〈비창〉 2악장 첫 음형 옆에 나란히 놓아보면 바로 압니다. 두 윤곽이 거의 포개지거든요. 베토벤이 친구의 손가락을 빌려 엘가의 거실에 한 번 더 걸어 들어왔고, 엘가가 그 음형을 평생 잊지 못해 친구의 변주에 고스란히 새겨 넣은 것입니다.
이름에 숨은 3중 농담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Jaeger는 독일어로 ‘사냥꾼(Hunter)’이라는 뜻입니다. Nimrod는 창세기 10장 9절에 나오는 “주 앞의 강한 사냥꾼(mighty hunter before the Lord)”입니다. 그러니까 이 곡은 사냥꾼이 사냥감(슬럼프)을 잡아 준 사람에게 바치는 곡이라는 뜻이 됩니다. 독일어와 성경 구절과 사적인 일화를 단어 하나에 묶어 곡 제목으로 박아버린 것입니다.
예거는 1909년 결핵으로 49세에 세상을 떠납니다. 엘가는 1912년 〈The Music Makers〉 Op.69에서 Nimrod 주제를 다시 한번 인용해 친구를 추모했습니다. 1898년 거실에서 친구가 쳐준 그 베토벤이, 1934년 엘가가 죽고 1997년 다이애나 왕세자비 장례식 BBC 중계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한 거실의 사담이 한 세기 만에 영국의 비공식 제2국가가 된 것입니다.
별표 ***의 주인공 — 아내 옆에 숨겨둔 첫사랑
변주 XIII에는 이니셜이 없습니다. 오직 별표 세 개로만 표기돼 있습니다. 한국어 해설은 보통 이렇게 매듭짓습니다. “Lady Mary Lygon이 호주로 가는 배를 탄 시기라 멘델스존 〈고요한 바다와 순항〉을 인용했다.” 깔끔하고, 영국 정원처럼 점잖은 마무리입니다. 그런데 1976년 이후로 영미권 학계가 이 깔끔함을 슬슬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의심의 이름은 헬렌 위버입니다. 1884년 엘가의 약혼녀였고, 그를 차고 뉴질랜드로 떠난 첫사랑이며, 변주가 작곡된 1899년 시점까지도 엘가가 끝내 잊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코라 위버의 2005년 책 『Elgar’s Other Lover』와 케네디의 2004년 개정판이 이 가설을 단단히 굳혔고, 영미권 표준 해설은 이제 “공식적으로는 메리 리건이지만 진짜 모델은 헬렌 위버일 가능성이 더 크다” 쪽으로 옮겨가는 중입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무슨 뜻일까요. 엘가가 인생의 모든 친구를 한자리에 모은 헌정곡 한가운데, 아내 앨리스의 변주(C.A.E.)와 자기 자신의 변주(E.D.U.) 사이에 별표 세 개로 첫사랑의 이름을 몰래 새겨 넣었다는 뜻이 됩니다. 게다가 곡 전체를 묶은 헌정사는 ‘To my friends pictured within’, 곧 “내 친구들에게”였습니다. 아내가 곡 첫머리에 자기 변주가 있다며 기뻐하는 동안, 곡 한가운데 별표 세 개에는 아내가 모르는 이름이 묻혀 있었던 것입니다.
100년째 안 풀린 농담 — Auld Lang Syne부터 원주율 π까지
곡 제목 ‘Enigma’는 작곡가 본인이 직접 붙였습니다. 이 안에 수수께끼가 들어 있다고 작곡가가 손수 광고한 격입니다. 1929년 BBC 라디오 ‘Elgar on his own works’에서 엘가는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힌트를 한 번 흘립니다. “주된 인물(principal Theme)은 무대 위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never appears).”
이 한 문장 때문에 100년 학계가 두 진영으로 쩍 갈라졌습니다. 한쪽은 ‘never appears’를 글자 그대로 받습니다. 변주 위에 다른 곡의 멜로디가 단 한 마디도 등장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화성적으로는 딱 들어맞아야 한다는 뜻이고, 그 멜로디를 찾아내면 그게 정답이라는 진영입니다. 다른 한쪽은 비유로 받습니다. ‘주된 인물’은 멜로디가 아니라 침묵·우정·신·자기 자신 같은 추상이라, 애초에 무대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실재하는 멜로디가 있다고 믿는 진영의 100년 후보 전쟁, 그 6선을 봅니다. 모두 단행본 아니면 학술지에 실린 진지한 제안이고, 각자 자기 책 한 권을 통째로 “내 답이 정답”이라는 결론으로 채운 사람들입니다.
- 〈Auld Lang Syne〉 (Roger Fiske, 1969) — 가장 오래된 정설 후보. 영미권에서 한동안 지지를 끌어모았습니다.
- 〈God Save the Queen〉 (Joseph Cooper, 1991) — 영국 작곡가의 영국식 농담이라는 입론.
- 〈Rule Britannia〉 (Theodore van Houten, 1976) — 위와 비슷한 노선의 또 다른 답.
- 바흐 〈내 주는 강한 성이요(Ein feste Burg)〉 (Hans Westgeest, 2007) — 가톨릭 신자 엘가가 루터 코랄을 숨긴 게 모순의 농담이라는 입론.
- 모차르트 〈레퀴엠〉 ‘Recordare’ (Robert Padgett, 2009) — 죽은 친구를 떠올리게 하는 곡이라는 가설.
- 원주율 π = 3.14159 (Charles Santa, 2014) — 멜로디가 아니라 숫자라는 메타 가설. 농담 같지만 진지하게 논문이 쓰였습니다.
여기서 잠깐 삐딱하게 의심해볼 시점입니다. 100년 동안 진지한 학자 여섯 명이 매번 “내 답이 정답”이라며 책을 썼는데, 그 답이 〈Auld Lang Syne〉부터 원주율 π까지 사방으로 흩어진다는 건 이상한 일입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답 같은 건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슬슬 고개를 듭니다. 엘가가 평생에 걸쳐 벌인 trolling(놀리기) 가설이라고 부를 만합니다.
이 가설을 뒷받침하는 정황 증거가 하나 더 있습니다. 엘가는 변주 X의 도라 페니에게 1897년에 87자짜리 squiggle 편지 〈Dorabella Cipher〉를 보냈는데, 이 편지는 미국 NSA 출신 암호분석가들까지 달려들었는데도 ACA(American Cryptogram Association) 미해결 목록에 오른 채 2024년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거든요. 그러니까 엘가의 인생에는 도라 앞으로 보낸 미해독 암호 편지와, 도라가 들어 있는 미해독 변주곡이 둘 다 존재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 평생 두 번이나 농담을 던지고 끝내 답을 안 내준 사람이라면, 1934년 죽기 전에 정답을 친절히 공개할 성격은 애초에 아니었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도라 페니가 직접 답을 물었을 때 엘가가 던졌다는 그 한 줄을 다시 읽어봅니다. “자네라면 알아맞힐 줄 알았는데.” 이건 답을 알려주려는 사람의 어조가 결코 아닙니다. 답이 없거나, 있어도 친구라면 알아챌 만큼 사적인 무언가라는 뜻에 더 가깝습니다.
정신병원 밴드마스터에서 기사 작위까지 — 18년 무명
Enigma 초연 시점인 1899년 6월 19일, 엘가는 만 42세 생일이 막 지난 작곡가였습니다. 그 나이가 되도록 어디서 무엇을 하며 먹고 살았는지는 한국어 자료가 한 번도 정면으로 다루지 않은 대목입니다.
1879년부터 1884년까지 5년간, 엘가는 우스터 시 외곽 Powick County Lunatic Asylum 부속 관악대의 밴드마스터였습니다. 영국식 완곡어법을 걷어내고 우리말로 풀면, 정신병원 악단 지휘자입니다. 연봉은 32파운드. 맡은 일은 환자와 직원들이 토요일 무도회에서 출 폴카와 콰드릴을 직접 작곡하고 지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그 5년간 환자 무도회용으로 써낸 자필 악보가 5권 분량으로 ‘Powick Asylum Music’이라는 이름을 달고 영국 도서관에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Sir Edward Elgar의 첫 정규 작곡 일자리는 정신병원 환자 무도회 폴카 작곡가였다는 얘기입니다.
엘가의 처지는 그야말로 외부인 그 자체였습니다. 영국 국교회가 표준이던 19세기 후반 영국에서 그는 가톨릭 신자였고, 왕립음악원이나 라이프치히 같은 정규 학력 대신 우스터 음악점 운영자의 아들이라는 이력만 있었으며, 정규 음악원 졸업장도 손에 쥐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종교·계급·교육, 세 축 모두에서 변두리에 서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18년 무명의 세월을 옆에서 함께 버텨낸 사람이 바로 변주 I ‘C.A.E.’의 모델, 캐롤라인 앨리스 로버츠입니다. 1889년 결혼할 때 엘가는 32세, 앨리스는 40세였습니다. 9살 연상인 데다 영국 육군 장성의 딸이 가톨릭 음악점 아들과 결혼한다는 것은 가문 입장에서 3중 스캔들이었습니다. 가족과 사실상 의절한 채로 18년 무명 작곡가를 먹여 살린 결과물이, 1899년 Enigma의 슈트라우스 인증으로 돌아왔습니다.

1920년 앨리스가 먼저 떠난 뒤, 엘가는 14년을 더 살았지만 대규모 신작은 거의 내놓지 못했습니다. 자기 음악도 아내와 함께 끝나버렸다고 주변에 토로하곤 했다고 전해집니다. 변주 I이 이 결혼의 여는 곡이었다면, 1934년 그의 죽음은 같은 결혼의 닫는 마디였다고 해도 크게 무리는 아닙니다.
하나 덧붙이면, 1899년 9월 우스터 Three Choirs Festival을 앞두고 피날레(E.D.U.)에 96마디와 오르간 파트가 추가됩니다. 원래 결말이 짧고 어딘가 어색했던 데다, 예거가 고치라고 강하게 밀어붙였기 때문입니다. 엘가는 자필 스코어(BL Add MS 47900)에 직접 이렇게 적어 두었습니다. “A.J.J.[August Johannes Jaeger]에게 큰 빚을 졌다.” 거실에서 베토벤 〈비창〉을 쳐준 친구는, 같은 곡의 마지막 96마디를 끌어낸 산파이기도 했습니다.
처음 듣는다면 — Nimrod 4분부터
30분짜리를 한 번에 다 못 듣겠다 싶으면 Nimrod 4분만 들으셔도 충분합니다. 변주 하나하나가 독립적이라 골라 들어도 곡의 90%는 통과합니다. 다만 한 번쯤 전체를 제대로 들어보고 싶다면, 권하는 순서가 따로 있어요.
1단계는 Nimrod 단독으로 약 4분. 2단계는 변주 I ‘C.A.E.'(아내) → Nimrod → 변주 XIV ‘E.D.U.'(자기 자신) 순서로 약 12분. 3단계는 주제와 14개 변주 전체로 약 30분입니다. 두 번째로 들을 때부터는 친구 14명의 단톡방 캐리커처라고 생각하고, 각 변주에서 “이 사람에게는 어떤 버릇이 있었을까”를 추리하며 들으면 곡의 절반 정도가 새로 열립니다.
변주 XIV ‘E.D.U.’ 안에는 변주 I의 ‘C.A.E.’ 주제와 변주 IX의 Nimrod 주제가 다시 한번 인용됩니다. 자기 자신의 변주 안에 아내와 친구를 동시에 새겨 넣은 것입니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이 두 사람 덕분이다”라는 뜻을 음악으로 바친 헌사입니다. 곡 전체를 한 번 다 들은 다음 마지막 5분에서 이 두 인용을 직접 잡아내는 것이, Enigma 감상의 가장 단정한 출구입니다.
추천 연주 — Nimrod 1분 30초의 격차
Nimrod 한 곡의 템포는 영국 평론지에서 주기적으로 싸움이 붙는 사안입니다. Boult 약 3:25, Solti 약 3:50, Barenboim 약 4:35, Colin Davis 약 5:00. 같은 한 곡 안에서 1분 30초 넘는 격차가 벌어집니다. 이게 단순한 취향 차이가 아니라 “추모식이냐, 작곡가의 우정 일화냐”라는 곡 정체성을 건 싸움이라는 게 핵심입니다. 아래 세 장만 짚어 둡니다.
- Boult / LSO 1970, EMI — Nimrod 약 3:25. 엘가 본인이 1926년 HMV에 자기 곡을 약 3:30으로 녹음했으니, 작곡가 직속 템포에 가장 가까운 한 장입니다. 다만 다이애나 장례식 이후 굳어진 ‘추모곡 신화’의 무게를 기대하고 틀면 담백해서 심심할 수 있습니다.
- Colin Davis / LSO Live — Nimrod 약 5:00. 1분 30초를 더 끕니다. 작곡가 의도와 멀다고 비판받아온 만큼, 정통을 따지는 분께는 안 맞습니다. 대신 “이 1분 30초는 듣는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순간 가장 깊게 잠기는 연주이기도 합니다.
- Barenboim / Staatskapelle Berlin — 독일 오케스트라가 본 엘가는 무엇이 다른지 궁금한 분께 권합니다. 영국적 자제미를 기대하면 다소 묵직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친구 14명을 외부인이 처음 마주하는 듯한 초연감이 묘하게 신선합니다.
악보와 함께 듣기
아래 여섯 장면을 악보와 나란히 따라가 보면 곡의 절반쯤이 새로 열립니다. 원본 악보는 IMSLP에서 누구나 무료로 열어볼 수 있습니다. 엘가 수수께끼 변주곡 악보 보기 (IMSLP)
- 변주 IV(W.M.B.) 마지막 2마디 — 문 쾅 닫는 sf 화음
- 변주 IX(Nimrod) 첫 4마디 + 베토벤 〈비창〉 2악장 첫 음형 비교
- 변주 X(Dorabella) 도입부 목관의 헐떡임
- 변주 XI(G.R.S.) 첫 6마디 + 마지막 짖음
- 변주 XIII(***) 멘델스존 〈고요한 바다와 순항〉 인용 클라리넷부
- 주제 1~6마디 + 피날레(E.D.U.) 안의 C.A.E.와 Nimrod 합성부 — 자기 헌사 시각화
자주 묻는 질문
수수께끼의 답은 결국 뭔가요? 누가 풀긴 풀었나요?
30분짜리 곡인데 꼭 끝까지 들어야 하나요?
Nimrod가 그렇게 유명한데, 왜 베토벤 〈비창〉이랑 비교되나요?
엘가가 진짜로 정신병원에서 일했나요?
변주 13의 별표 ***는 누구인가요? 정말 첫사랑이 맞나요?
추천 음반을 딱 한 장만 고른다면요?
Nimrod는 어쩌다 영국 국장 음악이 됐나요?
참고 자료
- Wikipedia — Enigma Variations (Elgar)
- IMSLP — Variations on an Original Theme, Op.36 (악보·편성)
- Encyclopædia Britannica — Enigma Variations
- The Elgar Society — 작곡가·작품 전기 자료
음악의 숲으로 이어지는 오솔길
클래식은 곡 하나를 따로 떼어 들을 때보다, 곡과 곡 사이에 숨은 인연을 알게 될 때 훨씬 크게 울리거든요. Enigma의 거실에서 시작된 실타래를 따라가면, 친구가 쳐준 베토벤 한 곡과 엘가가 끝내 못 넘겠다던 독일 교향곡, 그리고 같은 시대 변두리에서 출발한 또 다른 외부인들이 줄줄이 딸려 나옵니다. 아래 다섯 곡을 같이 들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