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힌 방: 에릭 사티의 기이하고 고독한 삶

가장 조용한 음악으로 100년을 살아남은 남자

1925년 7월, 파리 교외 아르쾨유의 좁은 골목. 에릭 사티가 죽었습니다. 간경변, 쉰아홉. 장례가 끝나고 친구 몇 명이 그의 방 앞에 섰습니다. 살아생전 단 한 사람도 발을 들인 적 없는 방. 사티가 27년간 굳게 잠가 두었던, 가장 가까운 벗에게도 끝내 열어주지 않았던 문이었습니다.

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은 그 자리에 멈춰 섰습니다. 방 안에 있던 것들이 — 아직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것만 먼저 말해 두지요. 그 안의 사물들은 에릭 사티라는 사람의 전부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아무도 몰랐던 것을, 죽고 나서야 사물들이 대신 말해 주었거든요. 그러니 먼저, 이 남자가 어떻게 거기까지 왔는지를 따라가야 합니다.

에릭 사티 (1920년대)
에릭 사티, 1920년대. 삶의 마지막을 향해 걸어가던 시기.
작곡가
에릭 사티
(Erik Satie, 1866–1925)
대표작
짐노페디 / 그노시엔
(Gymnopédies 1888, Gnossiennes 1890–97)
출신
프랑스 노르망디 옹플뢰르
음악 어법
해결하지 않는 화성, 느린 3박자, 여백과 침묵
남긴 것
가구 음악(앰비언트의 시조) · 반복의 극단 Vexations · 프랑스 6인조의 정신적 스승

음악원, 그리고 쫓겨난 천재

에릭 사티는 1866년 5월 17일 노르망디 옹플뢰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고, 아버지는 파리에서 음악 출판업을 했습니다. 피아노를 치는 소년은 자연스럽게 파리 음악원으로 향했지요. 1879년, 열세 살. 음악원이 이 소년에게 내린 판정은 간단했습니다. 재능은 있으나 게으름뱅이라는 것이었거든요.

이 한마디가 평생 사티를 따라다녔습니다. 교수들 눈에 그는 분명 문제아였습니다. 화성학 수업에 흥미가 없었고, 과제를 제대로 내지 않았으며, 시험에서 빛나는 성적을 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게을렀던 걸까요. 사티가 음악원 시절 피아노 앞에서 하던 일을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는 당시 파리 음악계를 지배하던 바그너식 과잉 — 거대한 오케스트라, 끝없이 팽창하는 화성, 영웅적 서사 — 을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있었더군요. 교수들이 가르치는 것과 정반대 방향으로 걸어갔으니, 게으름뱅이로 보일 수밖에요.

파리 음악원 (Conservatoire de Paris)
파리 국립 고등 음악원. 사티는 이곳에서 ‘재능 있지만 게으름뱅이’라는 낙인을 받았다.

결국 사티는 음악원을 떠났습니다. 자퇴인지 퇴학인지는 기록마다 엇갈립니다. 중요한 건 떠났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뒤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1888년, 스물두 살의 사티가 세 곡을 발표했거든요. 짐노페디(Gymnopédies). 느리고, 투명하고,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는 음악. 화성은 어딘가로 가는 듯하다가 제자리로 돌아오고, 선율은 목적지 없이 떠다닙니다. 19세기 파리에 이런 곡은 존재한 적이 없었습니다. 바그너가 음악으로 세계를 구원하겠다고 외치던 시대에, 사티는 피아노 앞에 앉아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는 선율을 썼습니다. 도착하지 않는 음악, 해결하지 않는 화성. 조용히, 그러나 완전히 다른 문법으로요.

짐노페디 악보 (Gymnopédies)
짐노페디(Gymnopédies) 악보 일부. 스물두 살의 사티가 발표한 이 곡은 해결하지 않는 화성으로 파리 음악계를 당혹시켰다.

이어서 그노시엔(Gnossiennes)이 나왔습니다. 1890년부터 쓰기 시작해 1897년까지 이어진 이 곡들은 한층 더 기이했습니다. 마디줄이 없었거든요. 박자표도 없었지요. 악보 위에는 연주 지시 대신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습니다. “빛 속에서처럼”, “혀끝으로”, “자기 자신을 멀리하며”. 파리 음악계는 이 곡들을 어디에 놓아야 할지 몰랐습니다. 비평가들은 무시했고, 대중은 아직 만날 기회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몽마르트르의 밤은 사티에게 다른 무대를 열어 주고 있었습니다.

몽마르트르 카바레의 피아니스트

음악원을 떠난 사티가 흘러든 곳은 몽마르트르였습니다. 19세기 말 파리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가장 자유로운 언덕. 화가, 시인, 무정부주의자, 배우, 사기꾼이 뒤섞여 살던 동네. 사티는 그 한복판에 있는 카바레 ‘검은 고양이(Le Chat Noir)’에서 피아노를 쳤습니다.

르 샤 노와르 (Le Chat Noir) 카바레 포스터
몽마르트르 카바레 ‘검은 고양이(Le Chat Noir)’ 포스터. 사티가 피아니스트로 일하며 보헤미안 예술가들과 어울리던 곳.

검은 고양이는 단순한 술집이 아니었습니다. 파리 보헤미안 예술의 심장이었지요. 그림자극이 공연되고, 시인이 시를 낭독하고, 화가들이 캔버스를 펼치는 사이에서 사티는 밤마다 피아노를 쳤습니다. 돈은 거의 없었습니다. 방은 좁고 추웠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의 사티에게는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음악이 어때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 음악원의 교수들도, 바그너를 숭배하는 평론가들도,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아도 되는 밤이었습니다.

몽마르트르 시절 사티는 클로드 드뷔시를 만났습니다. 1891년의 일입니다. 둘은 빠르게 가까워졌고 오래 친구로 남았지요. 하지만 음악에 대한 생각은 결국 갈라졌습니다. 드뷔시가 인상주의의 거대한 물결을 만들며 파리 음악계의 중심에 섰을 때, 사티는 여전히 작고 투명한 음악을 고집했거든요.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날 가장 널리 알려진 짐노페디의 관현악 편곡은 사티 본인이 아니라 드뷔시의 손에서 나왔습니다. 1897년, 드뷔시가 짐노페디 1번과 3번을 오케스트라로 편곡했고, 바로 그 버전이 이 곡을 세상에 알리는 데 큰 몫을 했습니다. 영향을 준 쪽은 무명으로 남았고, 그 음악을 세상에 퍼뜨려 준 것은 더 유명한 친구였습니다. 돈도 명성도 사티에게는 좀처럼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몽마르트르의 밤들이 없었다면, 사티는 어쩌면 음악원의 낙인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역사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먹고는 살아야 했습니다. 전위적인 피아노 소품은 한 푼도 벌어다 주지 못했으니, 사티는 카바레 가수들을 위한 노래를 썼습니다. 왈츠곡 ‘난 당신을 원해(Je te veux)’, 카페콩세르의 히트곡 ‘제국의 디바(La Diva de l’Empire)’ 같은 곡들이었지요. 짐노페디의 차가운 정적과는 정반대로, 달콤하고 흥얼거리기 좋은 선율이었습니다. 가장 실험적인 음악을 쓰던 손이 가장 대중적인 유행가를 써서 방세를 냈던 겁니다. 사티는 이 일을 부끄러워하지도, 자랑스러워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한 또 하나의 얼굴이었을 뿐이지요.

가난했지만 멈추지 않았습니다. 멈추지 않았지만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인정받지 못했지만 방향을 바꾸지 않았지요. 이것이 1890년대 사티의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 그의 머리 위층으로 한 여자가 이사를 왔습니다.

19세기 말 몽마르트르 거리
19세기 말 몽마르트르의 거리. 화가와 시인, 아나키스트가 공존하던 이 언덕은 사티의 음악적 자유를 지탱했다.

수잔 발라동, 다섯 달

1893년 몽마르트르. 사티가 살던 건물 바로 위층으로 한 여자가 이사 왔습니다. 수잔 발라동(Suzanne Valadon). 화가이자 모델이었습니다. 르누아르와 로트레크의 모델이었고, 자기 손으로 붓을 잡아 캔버스에 선을 긋는 여자였지요. 훗날 화가 모리스 위트릴로의 어머니로도 알려지지만, 이 시점의 발라동은 누구의 어머니이기 전에 몽마르트르에서 가장 강렬한 존재 중 하나였습니다.

사티가 사랑에 빠졌습니다.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이었지요. 만난 지 며칠 만에 청혼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사티는 그녀를 ‘비키(Biqui)’라는 애칭으로 불렀고, 그녀의 초상을 그리고 짧은 연서를 써 보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음악을 쓰는 남자의 가장 시끄러운 감정이 종이 위에 쏟아져 있었습니다.

관계는 다섯 달 남짓 이어졌습니다. 1893년 1월에 시작해 그해 여름에 끝났지요. 끊은 쪽은 발라동이었습니다. 이유는 명확히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발라동은 본래 한곳에 머무는 여자가 아니었거든요. 사티의 뜨거운 집착은 아마 그녀에게 공기가 아니라 벽이었을 겁니다. 이별 직후 사티는 자신에 대해 “얼음 같은 고독뿐”이라고 적었습니다. 이 문장이 과장인지 고백인지는 이후의 삶이 증명합니다. 그 뒤로 32년, 죽을 때까지 사티는 단 한 번도 연인을 두지 않았습니다. 다섯 달짜리 사랑 하나를 품고 남은 인생 전체를 혼자 걸어갔습니다.

이별이 사티를 망가뜨렸다고 말하면 너무 단순합니다. 이별이 사티를 완성했다고 말하면 너무 잔인하지요. 분명한 건 이 다섯 달 이후 사티의 행보가 더 기이해졌다는 사실입니다. 한 사람에게 향하던 모든 감정이 갈 곳을 잃고 엉뚱한 방향으로 폭발하기 시작한 것처럼요.

자기 혼자만의 교회

발라동과 헤어진 직후 사티는 장미십자회(Rose+Croix)에 가담했습니다. 스스로를 ‘사르 펠라당’이라 부르던 신비주의 예술가 조제팽 펠라당이 이끄는 집단이었지요. 사티는 이 단체의 공식 작곡가가 되어 신비주의 의식을 위한 음악을 썼고, 한동안 이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그런데 펠라당은 바그너 숭배자였습니다. 모든 예술이 바그너적 총체예술(Gesamtkunstwerk)을 향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거든요. 음악원에서 도망쳐 나온 사티가 카바레의 자유로운 밤을 거쳐, 다시 바그너의 그림자 앞에 선 셈이었습니다. 오래갈 리 없었지요. 사티는 펠라당과 격렬하게 결별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을 벌였습니다. 자기 혼자만의 교회를 세운 겁니다. 이름은 ‘예수 지도자 예술 대도시 교회(Église Métropolitaine d’Art de Jésus Conducteur)’. 교주도 사티, 신도도 사티. 유일한 구성원이 자기 자신인 종교 단체였습니다. 직접 교리를 쓰고, 직접 파문장을 발행했지요. 마음에 들지 않는 음악 비평가를 파문한 기록도 있습니다. 이걸 순수한 기행으로 볼 수도 있고, 치밀한 풍자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1인 교회의 교주가 방금 첫사랑에게 차인 남자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웃기면서도 쓸쓸해집니다.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지만 어디에도 맞지 않는 사람이 마침내 자기만의 장소를 만든 것이니까요.

에릭 사티 (젊은 시절)
젊은 시절의 에릭 사티. 실연 뒤 혼자만의 교회를 세우던 시기.

벨벳 신사, 그리고 서른아홉에 다시 학생

1895년 무렵, 사티에게 작은 유산이 들어왔습니다. 큰돈은 아니었지요. 그런데 그 돈으로 사티가 한 일이 그답습니다. 똑같은 회갈색 벨벳 슈트 일곱 벌을 한꺼번에 사들였습니다. 그리고 매일 번갈아 입었지요. 중절모에 안경, 우산을 든 단정한 차림. 사람들은 그를 “벨벳 신사”라고 불렀습니다. 몽마르트르의 가난한 보헤미안이 벨벳으로 무장한 신사가 된 겁니다. 겉모습을 단단하게 만든 사람이 실은 안쪽을 더 단단하게 닫아걸고 있었다는 것을, 그때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에릭 사티 중년기 (1900년경)
에릭 사티, 1900년경. ‘벨벳 신사’로 불리던 시절, 곧 서른아홉에 음악학교에 다시 들어간다.

그리고 1905년, 사티는 서른아홉 살이었습니다. 음악원을 떠난 지 20년 가까이 흐른 뒤였지요. 짐노페디도, 그노시엔도, 카바레의 밤들도 이미 먼 과거였습니다. 음악계에서 사티의 위치는 여전히 모호했습니다. 인정받지 못한 채, 그러나 포기하지도 않은 채 어중간한 지점에 서 있었거든요.

그런 사티가 스콜라 칸토룸(Schola Cantorum)에 입학했습니다. 음악 학교에, 그것도 서른아홉에요. 스무 살 안팎의 학생들 사이에 앉아 뱅상 댕디와 알베르 루셀에게 대위법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재능은 있으나 게으름뱅이”라던 20년 전의 낙인이 아직도 그를 물고 있었던 걸까요. 아니면 자기 음악에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던 걸까요. 어쩌면 그 둘은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사티는 3년 뒤 대위법 졸업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졸업장을 들고 지인들에게 자랑하러 다녔지요. 만나는 사람마다 자격증을 보여줬고, 악보 표지에 “스콜라 칸토룸 졸업”이라고 박아 넣기까지 했습니다. 마흔이 넘어 받은 졸업장을 온 동네에 자랑하고 다니는 모습은 분명 우습습니다. 그런데 그 자랑 뒤에 20년간 “재능은 있으나 게으름뱅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온 무게가 보이면, 웃을 수만은 없습니다. 이 졸업장은 세상을 향한 증명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 증명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스캔들의 한복판, 발레 《파라드》

조용한 피아노 소품을 쓰던 이 남자의 인생에서 가장 시끄러운 사건이 1917년에 터집니다. 발레 《파라드(Parade)》. 대본은 장 콕토, 무대와 의상은 파블로 피카소, 안무는 레오니드 마신, 제작은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 20세기 초 파리 전위예술의 별들이 한자리에 모인 셈이었지요. 그 한복판에 사티의 음악이 있었습니다.

무대 자체가 충격이었습니다. 피카소는 등장인물 ‘매니저’들에게 사람 키를 훌쩍 넘는 입체파 골판지 구조물을 뒤집어씌웠습니다. 배우가 걷는 게 아니라 빌딩이 비틀거리며 움직이는 듯했지요. 그 위로 흐르는 음악이 또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사티는 오케스트라 악보에 타자기와 사이렌, 권총, 회전 복권기 소리를 집어넣었습니다. 악기가 아닌 것들을 악기로 끌어들인 겁니다. 1917년 5월 샤틀레 극장의 초연은 야유와 고함으로 뒤덮였습니다. 거의 폭동에 가까웠지요. 한 가지는 짚어둘 만합니다. 프로그램 해설을 쓴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가 이 무대를 가리켜 ‘쉬르레알리슴(sur-réalisme, 초현실주의)’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활자에 박았습니다. 훗날 초현실주의라는 말이 바로 이 발레 한 편에서 태어난 셈입니다.

진짜 소동은 무대 밖에서 벌어졌습니다. 비평가 장 푸에이그가 《파라드》를 혹평하자, 화가 난 사티는 그에게 엽서 한 장을 보냈습니다. “선생, 그리고 친애하는 벗이여, 당신은 엉덩이요. 음악이라곤 모르는 엉덩이.” 문제는 엽서였다는 점입니다. 봉투에 넣지 않은 엽서라 우체국 직원 누구나 읽을 수 있었으니, 푸에이그는 공개 명예훼손으로 사티를 고소했습니다. 법정에서 콕토는 분을 못 이겨 지팡이를 휘둘렀다가 경찰에 끌려 나갔고, 사티에게는 징역 8일에 벌금과 손해배상이 선고됐습니다. 다만 실제로 복역하지는 않았습니다. 형은 집행유예로 미뤄졌다가 흐지부지됐고, 벌금과 배상금은 부유한 후원자 폴리냐크 후작부인이 대신 갚아 주었거든요. 조용한 음악을 쓰던 남자가 엽서 한 장으로 감옥 문턱까지 갔다가, 후작부인의 지갑 덕에 돌아온 사건이었습니다.

엉뚱한 제목들, 그리고 진심 하나

사티의 악보를 펼치면 종종 웃게 됩니다. 곡 제목부터가 이렇습니다. ‘말린 태아(Embryons desséchés)’, ‘개를 위한 진짜 물렁한 전주곡(Véritables préludes flasques pour un chien)’, ‘나무로 만든 뚱보의 스케치와 약 올리기’. 악보 안에 적힌 연주 지시도 마찬가지였지요. “이빨로 연주하시오”, “병아리처럼 가볍게”, “당신의 손이 보이지 않게”. 음악 용어가 와야 할 자리에 농담과 동화 같은 문장이 들어앉아 있었습니다. 어떤 지시는 연주자에게만 보일 뿐, 청중은 결코 들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들리지도 않을 농담을 악보에 숨겨 두는 사람. 사티는 그런 식으로 자기만의 장난을 쳤습니다.

그런데 이 끝없는 농담의 한가운데서, 사티는 평생 가장 진지한 작품을 하나 내놓습니다. 1918년의 《소크라테스(Socrate)》.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끌어온 텍스트에, 목소리와 작은 오케스트라를 위한 음악을 붙인 작품이지요. 농담도, 기행도, 과장도 없습니다. 스승의 죽음을 담담하게 읊는 이 음악은 사티의 모든 작품 가운데 가장 절제되고 가장 투명합니다. 평생 가면을 쓰고 살던 남자가 딱 한 번, 그 가면을 벗고 가장 조용한 목소리로 죽음을 이야기한 셈입니다. 기행의 목록만 보면 놓치기 쉬운 사실이지만, 사티의 깊은 곳에는 늘 이 침묵이 있었습니다.

원치 않는 스승

1910년대 후반, 파리 음악계에 새로운 세대가 나타났습니다. 프랑시스 풀랑크, 다리우스 미요, 아르튀르 오네게르를 포함한 젊은 작곡가들. 훗날 ‘프랑스 6인조(Les Six)’로 불릴 이들이 공개적으로 사티를 정신적 스승이라 선언했지요.

정작 사티는 불편해했습니다. “나는 선생이 아니다”라고 반복했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거든요. 6인조는 사티가 바그너와 인상주의 양쪽 모두에 반기를 든 인물이라 여겼고, 그의 미니멀하고 유머러스한 음악에서 새 길을 봤습니다. ‘배 모양의 세 소품(Trois Morceaux en forme de poire)’ 같은 제목만 봐도 분위기가 짐작되지요. 참고로 이 곡은 제목과 달리 일곱 곡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티다운 농담이었습니다. 사티의 음악이 가진 것은 거대한 체계가 아니라, 기존 체계를 조용히 무너뜨리는 힘이었습니다. 젊은 작곡가들은 정확히 그것을 원했고요.

사티가 스승 역할을 거부한 이유는 여럿이었을 겁니다. 원래 어딘가에 소속되는 것을 싫어했지요. 장미십자회도 떠났고, 자기가 만든 교회도 결국 접었습니다. 자기 음악이 ‘사조’가 되거나 ‘유파’로 굳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요.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건 자기 방식이 옳다고 선언하는 일인데, 사티는 평생 그런 선언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자기 방식으로 걸어갔을 뿐입니다. 따라오라 한 적도, 따라오지 말라 한 적도 없었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따라왔습니다.

말년에는 더 어린 작곡가들이 그의 곁에 모였습니다. 로제 데조르미에르, 앙리 소게 같은 청년들이 사티가 사는 동네 이름을 따 스스로를 ‘아르쾨유 악파(École d’Arcueil)’라 불렀지요. 누구도 방 안에 들이지 않고, 누구의 스승도 되려 하지 않던 남자 주위로 끝내 사람들이 모여든 셈입니다. 문을 닫아걸수록 사람들은 그 문 앞에 더 오래 머물렀습니다.

아르쾨유의 닫힌 방

이야기를 잠시 1898년으로 되돌려야 합니다. 사티는 파리 시내를 떠났습니다. 정확히는 파리 남쪽 교외 아르쾨유(Arcueil)로 거처를 옮겼지요. 몽마르트르의 소란과 기억을 등지고, 노동자들이 사는 조용한 동네의 싼 방 하나를 얻었습니다. 서른두 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방에서 27년을 살았습니다. 죽을 때까지요.

기이한 점이 있었습니다. 사티는 매일 아르쾨유에서 파리 시내까지 걸어서 오갔습니다. 편도로 몇 시간이 걸리는 거리를요.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새벽이든 한밤중이든 걸었지요. 파리에서의 일과를 마치면 다시 아르쾨유까지 걸어서 돌아왔습니다. 이 긴 도보 통근을 27년간 반복했습니다.

그보다 더 기이한 건 방이었습니다. 사티는 아무도 그 방에 들이지 않았거든요. 단 한 사람도요. 친구가 찾아오면 문 앞에서 대화했고, 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습니다. 드뷔시도, 풀랑크도, 미요도, 누구도 그 문 안쪽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왜 안 되느냐”고 물으면 사티는 화제를 돌리거나 특유의 유머로 넘겼습니다. 진지한 대답은 한 번도 하지 않았지요.

27년. 아르쾨유의 그 작은 방에서, 혼자서, 문을 닫고. 사티가 그 안에서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 살아생전에는 누구도 알 수 없었습니다. 이 닫힌 방이 이 글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입니다. 왜 아무도 들이지 않았는가. 방 안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그리고 그것이 에릭 사티라는 사람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가.

Vexations, 840번

사티가 남긴 곡 가운데 가장 기이한 작품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Vexations(짜증). 짧은 악절 하나를 840번 반복 연주하라는 곡입니다. 악보 위에는 사티가 직접 써 놓은 지시문이 있습니다. 이 모티프를 840번 연속으로 연주하려면 미리 침묵 속에서 깊은 집중을 준비하라는 당부였지요.

작곡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1893년 전후로 추정됩니다. 공교롭게도 발라동과 헤어진 무렵이라 이 곡을 실연의 상처와 잇는 해석도 있지요. 다만 사티 본인은 아무 설명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이 곡이 처음으로 완전히 연주된 건 사티가 죽고 38년이 지난 1963년이었습니다. 존 케이지(John Cage)가 뉴욕의 포켓 시어터에서 릴레이 연주를 조직했고, 열 명 남짓한 피아니스트가 교대로 쳐서 18시간 40분이 걸렸습니다. 관객 대부분은 중간에 자리를 떴고, 끝까지 남은 사람은 소수였습니다.

Vexations가 던지는 물음은 단순합니다. 음악은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서 끝나는가. 반복은 언제 의미가 되고 언제 고문이 되는가. 한 악절을 840번 되풀이하면 그것은 여전히 음악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이 되는가. 사티는 이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840이라는 숫자를 적어 놓고 침묵 속의 깊은 집중을 요구했을 뿐이지요. 시간에 대한, 인내에 대한, 음악의 경계에 대한 가장 극단적인 실험. 그것도 20세기 실험음악이 태어나기 한참 전에, 혼자서요.

가구 음악, 혹은 들으면 안 되는 음악

1917년 무렵, 사티는 또 하나의 기이한 개념을 내놓습니다. 가구 음악(Musique d’ameublement). 이름 그대로 가구처럼 존재하는 음악입니다. 방 안에 있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의자나 탁자 같은 음악. 사티는 이 생각을 진지하게 밀어붙였습니다.

실제 연주가 1920년에 이루어졌습니다. 파리의 한 화랑에서 연극 막간에 사티와 다리우스 미요가 가구 음악을 연주했지요. 사티의 의도는 분명했습니다. 관객이 이 음악을 무시하고, 서로 대화하고, 음료를 마시며 돌아다니기를 바랐거든요. 그런데 관객이 조용히 자리에 앉아 경청하기 시작했습니다. 사티는 당황했습니다. 관객 사이를 돌아다니며 외쳤지요. “제발 이야기하세요! 걸어 다니세요! 듣지 마세요!”

듣지 말라고 만든 음악을 사람들이 들으려 하는 이 역설. 사티는 아마 정확히 이 지점을 보고 있었을 겁니다. 음악이 왜 반드시 경청의 대상이어야 하는가. 공기처럼, 벽지처럼, 그냥 거기 있으면 안 되는가. 이 생각이 실현되기까지는 반세기가 더 걸렸습니다. 1978년, 브라이언 이노(Brian Eno)가 《Ambient 1: Music for Airports》를 발표하며 앰비언트 음악이라는 장르를 열었을 때, 이노가 가장 먼저 입에 올린 이름이 에릭 사티였습니다. 지금 카페에서, 호텔 로비에서, 당신의 수면 플레이리스트에서 조용히 흘러나오는 배경 음악의 시조가 바로 100년 전 “듣지 마세요”라고 외치던 이 남자였습니다.

사티의 마지막 무대도 그답게 소란스러웠습니다. 1924년의 발레 《를라슈(Relâche)》. 제목부터 ‘공연 취소’라는 뜻이었지요. 막간에는 르네 클레르가 찍은 짧은 영화 《막간(Entr’acte)》이 상영됐고, 그 필름 속에는 사티 본인도 등장해 대포를 쏩니다. 다다이즘의 한복판에서, 환갑을 코앞에 둔 작곡가가 마지막까지 장난을 멈추지 않은 셈입니다.

악보와 함께 듣기

짐노페디가 어떻게 “해결하지 않는 화성”을 만들어 내는지는 악보를 눈으로 따라가 보면 한결 또렷해집니다. 화음이 어딘가로 가려다 멈추고, 선율이 제자리를 맴도는 그 순간을 직접 확인해 보세요.

짐노페디 1·2·3번을 악보와 함께. 마디줄은 있지만 좀처럼 ‘끝나지 않는’ 화성의 흐름이 눈에 보인다.

원본 악보는 IMSLP에서 누구나 무료로 열람할 수 있습니다. 짐노페디(3 Gymnopédies) 악보 보기 (IMSLP)

1925년 7월, 비로소 열린 문

1925년 7월 1일, 에릭 사티가 죽었습니다. 간경변, 쉰아홉. 말년의 사티는 파리의 생조제프 병원에 입원해 있었습니다. 오랜 음주가 간을 망가뜨렸지요. 병문안 온 친구들에게도 농담을 멈추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지막까지 유머를 놓지 않은 건지, 진심을 보여주기 싫었던 건지. 어느 쪽이든, 그게 사티였습니다.

장례를 마친 친구들이 아르쾨유의 방으로 갔습니다. 27년간 닫혀 있던 문이 처음 열렸지요.

방 안에는 우산이 있었습니다. 포장도 뜯지 않은 새 우산이 수북이 쌓여 있었지요. 사티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우산 없이 걸어 다닌 사람입니다. 몇 시간씩 걸어서 파리를 오가면서도 우산을 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산을 사 모았고, 사서는 포장조차 뜯지 않고 방에 쌓아 두었습니다. 왜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사티도 말한 적이 없고요. 1895년에 사들인 회갈색 벨벳 슈트들도 한자리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편지가 있었습니다. 수년 치 편지가 뜯기지 않은 채 쌓여 있었지요. 누가 보냈는지, 무슨 내용인지 사티는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신문도 마찬가지로 읽지 않은 채 쌓여 있었습니다. 세상이 보내온 메시지를 사티는 받지 않았던 겁니다. 전하는 바로는 방 안에 피아노가 두 대 있었고, 한 대가 다른 한 대 위에 포개져 있었다고 합니다. 위쪽 피아노는 한 번도 치지 않은 채 편지와 소포를 얹어 두는 선반처럼 쓰였다고요.

그리고 진짜 보물은 잡동사니 사이에 묻혀 있었습니다.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악보들이 쏟아져 나온 겁니다.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곡들, 연주된 적 없는 음악, 들린 적 없는 소리. 사티는 그것들을 발표하지도, 버리지도 않고 그저 방 안에 쌓아 둔 채 살았습니다.

친구들은 그 방에 서서 비로소 이해했을 겁니다. 아니, 어쩌면 더 알 수 없게 됐을지도요. 27년간 이 방에서 혼자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 왜 우산을 사서 뜯지 않았는지. 왜 편지를 받아 놓고 열지 않았는지. 왜 다 쓴 악보를 세상에 내놓지 않았는지. 사티는 대답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유서도, 일기도, 해명도 없었습니다. 남긴 것은 방 안의 사물들뿐이었지요. 그리고 그 사물들은 한마디 설명 없이 에릭 사티라는 사람 전체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음악을 쓴 남자의 가장 조용한 방.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는 선율을 쓴 남자의, 아무것도 열리지 않은 편지들. 들으면 안 된다고 했던 음악을 만든 남자의, 열면 안 된다고 했던 방. 사티는 이미 말하고 있었습니다. 자기 음악으로, 자기 삶으로, 자기 방으로요. 다만 아무도 듣지 않았을 뿐입니다.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 1번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카페에서, 광고에서, 새벽 수면 플레이리스트에서요. 듣지 말라고 만든 음악이 100년 뒤 세상에서 가장 자주 배경으로 깔리는 곡 중 하나가 됐습니다. 사티가 이걸 알면 웃었을까요, 화를 냈을까요. 아마 둘 다였을 겁니다. 아니, 어쩌면 안경 너머로 세상을 비스듬히 바라보던 그 특유의 눈빛으로 아무 말 없이 돌아섰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밤, 한 곡만 들어 보시지요. 짐노페디 1번. 3분이면 충분합니다. 느리고, 투명하고,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는 이 선율이 왜 100년을 살아남았는지. 문을 열지 않았던 남자가 왜 이토록 많은 문을 열어 놓았는지. 그 3분 안에 답이 있습니다. 아래는 사티 해석으로 손꼽히는 피아니스트 파스칼 로제의 연주입니다.

짐노페디 1번, 파스칼 로제(Pascal Rogé) 연주. 프랑스 피아니즘의 정통으로 꼽히는 사티 해석.

자주 묻는 질문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는 어떤 음악인가요?

1888년에 발표한 세 곡짜리 피아노 소품 모음집으로, 느리고 투명한 3박자 리듬이 특징입니다.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지 불분명한 구조, 해결되지 않는 화성이 독특한 정적과 여백을 만들어냅니다. 1897년 드뷔시가 1·3번을 관현악으로 편곡하면서 널리 알려졌고, 지금은 카페와 영화, 수면 플레이리스트에서 가장 많이 흘러나오는 클래식 곡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사티가 말한 ‘가구 음악’이란 무엇인가요?

1917년 무렵 사티가 내놓은 개념으로, 가구처럼 공간 안에 그냥 존재하는 음악입니다. 경청의 대상이 아니라 배경으로만 기능하는 음악을 의도했습니다. 1920년 파리의 한 화랑에서 다리우스 미요와 함께 막간 연주로 선보였는데, 관객이 조용히 앉아 듣기 시작하자 사티가 당황해 ‘제발 이야기하세요, 듣지 마세요!’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이 개념은 약 60년 뒤 브라이언 이노의 앰비언트 음악으로 실현됩니다.

사티가 죽은 뒤 아르쾨유 방에서 무엇이 발견되었나요?

27년간 아무도 들이지 않았던 방에서는 포장도 뜯지 않은 우산들, 1895년에 사들인 회갈색 벨벳 슈트 일곱 벌, 수년 치 뜯지 않은 편지와 읽지 않은 신문 더미가 나왔습니다. 무엇보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여러 작품의 악보가 잡동사니 사이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생전에 한 번도 설명하지 않았던 이 사물들이 에릭 사티라는 인물 전체를 말없이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사티가 발레 《파라드》로 재판까지 받았다는 게 사실인가요?

사실입니다. 1917년 콕토·피카소와 함께 만든 발레 《파라드》가 혹평을 받자, 사티는 비평가 장 푸에이그에게 모욕적인 엽서를 보냈습니다. 봉투 없는 엽서라 누구나 읽을 수 있다는 이유로 공개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했고, 징역 8일에 벌금과 손해배상이 선고되었습니다. 다만 형은 집행되지 않았고, 벌금과 배상금은 후원자 폴리냐크 후작부인이 대신 갚아 주었습니다.

에릭 사티는 현대 음악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사티는 ‘가구 음악’으로 배경음악과 앰비언트의 길을 열었고, 한 악절을 840번 반복하는 Vexations로 미니멀리즘과 반복 음악을 반세기 앞서 예고했습니다. 프랑시스 풀랑크·다리우스 미요 등 ‘프랑스 6인조’는 그를 정신적 스승으로 삼았고, 존 케이지와 브라이언 이노는 그에게서 직접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습니다. 화려한 체계 대신 여백과 침묵으로 20세기 음악의 방향 하나를 미리 그어 둔 작곡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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