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4년 10월 14일. 파리의 한 아파트, 가을 오후였습니다. 한 여자가 자신의 가슴에 권총을 겨눴습니다. 짧은 정적.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총성이 방 안에 울렸습니다. 부부의 결혼 5주년을 닷새 앞둔 날이었지요.
그녀의 이름은 로잘리 텍시에. 사람들은 ‘릴리’라고 불렀습니다. 서른두 살, 드레스메이커 출신. 이 여성이 왜 자기 가슴에 총구를 들이댔는지, 파리의 호사가들은 머지않아 알게 됩니다.
총알은 척추 가까이 박혔습니다. 의사들이 달려왔지만 끝내 적출에 실패했습니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더 큰 화를 부를 자리였거든요. 릴리는 죽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 납덩이를 평생 몸속에 안고 살아야 했네요.
남편은 이미 떠난 뒤였습니다. 식탁 위에 이별 편지 한 장. 그것이 남편이 남긴 전부였습니다. 그해 여름, 남편은 다른 여자의 손을 잡고 영국 해협을 건너 저지섬으로 떠났거든요. 5년의 무명 시절을 함께 버틴 남편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뒤, 릴리에게 남은 건 낡은 아파트와 밀린 청구서뿐이었습니다.
그 남편의 이름이 클로드 드뷔시입니다. ‘달빛’, ‘목신의 오후 전주곡’, ‘바다’. 서양 음악사에서 가장 몽환적인 선율을 만든 사람이지요. 인상주의 음악이라는 새로운 길을 연 혁명가. 누군가에게는 20세기 음악의 문을 연 선구자였고, 누군가에게는 가장 이기적인 남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파리 사람들조차 잘 입에 올리지 않는 한 가지 사실이 더 있습니다. 릴리는, 드뷔시 때문에 가슴에 총을 쏜 첫 번째 여자가 아니었거든요.
파리 음악계의 이단아

1862년, 파리 근교 생제르맹앙레의 작은 도자기 가게에서 클로드 드뷔시가 태어났습니다. 예술과는 거리가 먼 가정이었지요. 그래도 재능은 일찍 드러나, 열 살에 파리 국립 음악원에 입학합니다.
당시 파리 음악원은 독일 바그너의 문법이 지배하던 곳이었더군요. 소년 드뷔시는 거기에 보란 듯이 반기를 들었습니다. “왜 이 낡은 규칙을 지켜야 합니까? 내 귀에는 다른 소리가 들립니다.” 교수들의 화성학 시험지 위에 일부러 금지된 화음을 그려 넣고는, 어디가 틀렸느냐고 되물었다고 하지요.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가믈란 음악을 처음 들은 뒤, 서양 음악의 규칙만이 정답은 아니라는 그의 확신은 더 단단해졌습니다.
1884년에는 칸타타 《방탕한 아들》로 로마 대상까지 거머쥐었습니다. 프랑스 작곡가가 받을 수 있는 최고 권위의 상이었지요. 부상으로 로마 빌라 메디치에서 2년간 유학할 기회도 얻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로마에 도착한 드뷔시는 그곳을 견디지 못했어요. 답답한 규율, 따분한 선배 음악가들, 마음에 들지 않는 이탈리아의 햇볕. 그는 일정을 다 채우지 못하고 중도에 파리로 돌아와 버립니다. 최고의 상이 보장한 안락한 길을, 제 발로 걷어찬 것이지요.
문제는, 그 확신과 고집을 파리 주류 음악계가 전혀 반기지 않았다는 데 있었습니다. 로마 대상 수상자라는 간판이 무색하게, 드뷔시는 몽마르트르의 낡은 피아노 앞에서 개인 레슨으로 겨우 생계를 이었거든요. 서른 중반이 넘도록 무명이었네요. 빈 주머니와 머릿속 악상만 남은 시절. 그 시절, 그의 곁에는 늘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한 여자’가 누구였는지는, 시기마다 달랐습니다.
첫 번째 권총: 가비 뒤퐁
릴리 이전에 가브리엘 뒤퐁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가비’라고 불렀지요. 1889년 무렵부터, 가비는 무명 작곡가 드뷔시와 가난한 살림을 함께 꾸렸습니다. 집세가 밀려 쫓겨나기 일쑤였고, 드뷔시가 작곡에만 매달리는 동안 생활을 떠받친 건 가비였습니다. 거의 10년을, 그녀는 그렇게 곁을 지켰네요.
그사이 드뷔시는 한눈을 팔았습니다. 1894년에는 성악가 테레즈 로제와 약혼까지 했다가 파혼하는 소동을 벌였지요. 가비를 옆에 둔 채로 말입니다. 그리고 1897년, 가비는 드뷔시의 외투 주머니에서 또 다른 여자가 보낸 편지를 발견합니다.
가비는 권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어요. 다행히 목숨은 건졌습니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지요. 7년 뒤 릴리가 똑같은 자리에 서게 되리라는 걸, 이때의 가비는 알 리 없었습니다. 드뷔시 곁의 여자가 권총을 자신에게 겨눈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그저 ‘첫 번째’였던 것이지요.
당시 드뷔시는 가난했고, 가비의 헌신에 기대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늘 다른 곳을 향했지요. 누군가는 이걸 두고 예술가의 어쩔 수 없는 기질이라 변호하고, 누군가는 그냥 무책임이라 잘라 말합니다. 어느 쪽이든, 그의 곁에 선 여자가 치른 대가가 권총이었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네요.
가비가 총상에서 회복할 무렵, 드뷔시는 또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가비의 친구이기도 했던 로잘리 텍시에, 바로 릴리였지요. 한 여자의 비극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음 여자의 비극이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릴리, 가난한 시절을 함께한 여자

본명 로잘리 텍시에. 파리 사람들은 ‘릴리’라고 불렀습니다. 재봉일로 생계를 꾸리던 평범한 여성이었지요. 화려한 살롱의 여인도, 음악을 논하는 지식인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바늘과 실로 하루를 버티는 사람이었네요.
1890년대 후반, 릴리는 무명 작곡가 드뷔시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가비가 떠난 자리였지요. 밀린 집세 때문에 야반도주를 반복하고, 내일 아침 빵 한 조각을 걱정하는 처지였는데도, 1899년 두 사람은 부부가 됩니다. 결혼식 날 드뷔시의 주머니 사정이 어찌나 빠듯했던지, 그날 오전에 피아노 레슨을 한 차례 더 해서 피로연 비용을 댔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였네요.
릴리가 남편의 음악을 깊이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녀에게 드뷔시의 화성은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 같았을 겁니다. 하지만 텅 빈 식탁 앞에서도 원망 한마디 없이, 밤새 작곡하는 남편의 곁을 묵묵히 지켰지요. 음악을 몰라도 사람은 알아본 것입니다. 적어도 릴리는, 드뷔시가 무엇 하나 가진 게 없던 시절에 그를 택한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결혼 5년 차인 1902년. 오페라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초연이 파리를 뒤집어 놓았습니다. 찬반 양론이 들끓었지만, 어쨌든 드뷔시는 하루아침에 화제의 인물이 됐네요. 그런데 성공이 데려온 건 행복이 아니라 균열이었습니다. 남편이 새로 올라선 상류층 살롱의 세계에, 바늘귀만 들여다보며 살아온 릴리가 설 자리는 없었거든요. 그리고 바로 그 살롱에서, 드뷔시는 또 다른 여자를 만납니다.

엠마 바르다크의 등장

엠마 바르다크. 파리 금융계 거물 지그몽 바르다크의 아내였습니다. 막대한 부를 누렸고, 전문가 수준의 성악 실력까지 갖춘 여성이었지요. 파리 상류층 살롱의 한가운데 있던 인물입니다. 릴리가 가진 모든 것의 정반대편에 서 있던 사람이라고 해도 좋겠네요.
두 사람을 이어준 사람은 다름 아닌 엠마의 아들이었습니다. 1903년 무렵, 엠마의 아들 라울 바르다크가 드뷔시에게 작곡을 배우고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드뷔시는 자기 제자의 어머니와 사랑에 빠진 것이지요. 작곡을 배우러 스승의 집을 드나들던 청년이, 자기도 모르게 스승과 제 어머니의 연애를 이어준 셈입니다.
엠마는 오케스트라 총보를 읽을 줄 알았고, 드뷔시의 화성이 지닌 혁명성을 본능적으로 알아챘습니다. 살롱의 피아노 앞에서 그녀의 목소리와 드뷔시의 화성이 어우러졌지요. 지적인 교감과 경제적 여유. 평생 가난과 무관심에 시달려온 드뷔시에게, 엠마는 비어 있던 자리를 한꺼번에 채워주는 존재였습니다. 흥미롭게도 엠마는 한때 작곡가 가브리엘 포레의 연인이기도 했습니다. 포레가 그 유명한 가곡집 《좋은 노래》를 헌정한 상대가 바로 엠마였거든요. 살롱의 뮤즈는, 그렇게 거장에서 거장으로 옮겨 다녔습니다.
1904년 여름, 드뷔시는 식탁 위에 이별 편지 한 장만 남기고 엠마와 함께 저지섬으로 떠납니다. 가난의 시절을 함께 버텨준 릴리의 5년을, 종이 한 장으로 끊어버린 것이지요. 가비에게 그랬듯, 이번에도 작별의 방식은 편지였습니다.
1904년 여름, 저지섬
편지 한 장. 그것이 드뷔시가 릴리에게 남긴 전부였습니다. 그의 곁에는 엠마 바르다크가 있었지요. 엠마도 남편에게 이혼을 통보한 뒤였습니다. 프랑스 본토의 시선에서 벗어난 영국 해협의 저지섬은, 두 사람에게 더없이 좋은 도피처였네요.
오페라의 대성공으로 추앙받던 거장이 조강지처를 버리고 유부녀와 야반도주를 감행했습니다. 파리 사교계에 이보다 더 자극적인 이야깃거리는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정작 저지섬의 여름은 평화로웠지요. 절벽 너머 에메랄드빛 바다를 바라보며, 드뷔시는 작곡에만 몰두했습니다. 훗날 서양 음악사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바다(La Mer)》의 핵심 악상이, 바로 이 도피의 한복판에서 태어났거든요.
드뷔시는 이 시기에 엠마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다가 자신에게 주는 위안을 거듭 이야기했습니다. 파도의 끝없는 반복, 빛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물빛. 고정된 형태 없이 늘 움직이는 그 풍경이, 형식의 틀을 깨려던 그의 음악과 꼭 닮아 있었거든요. 저지섬과 그 인근 영국 해안에서 받은 인상이, 이듬해 완성될 《바다》의 밑그림이 되었습니다.
저지섬에는 새로운 사랑과 예술의 영감이 있었습니다. 같은 시각, 파리의 어두운 아파트에는 버림받은 릴리의 절망이 있었지요. 그 여름이 끝나고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할 무렵, 파리에서 사건이 터집니다.
총알
1904년 10월 14일.
파리. 드뷔시와 함께 살던 아파트.
릴리 드뷔시가 가방에서 권총을 꺼냈습니다.
자신의 가슴에 총구를 겨눴습니다.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총성이 울렸습니다. 릴리가 쓰러졌네요. 하얀 블라우스 위로 피가 번졌습니다. 곧 사람들이 달려왔고, 경찰이 출동했습니다.
총알은 척추 바로 옆에 박혔습니다.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의사들이 총알의 위치를 확인했지만, 적출을 포기해야 했지요. 척추 가까이 깊이 파고들어 있어서, 억지로 빼내다가는 더 큰 화를 부를 수 있었거든요. 당대 최고의 파리 의사들도 끝내 손을 놓았습니다.
릴리는 죽지 않았습니다. 살아남았지요. 모든 것을 끝내려 방아쇠를 당겼지만, 삶은 끝나주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고, 몸속의 납덩이는 빠지지 않았네요. 의식을 회복한 릴리가 마주한 현실은 죽음보다 무거웠습니다.
남편이 떠난 지 석 달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파리 곳곳의 살롱과 카페에서는 드뷔시와 엠마의 불륜 소문이 이미 파다했지요. 릴리가 그 소문을 들었을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녀는 평생 그날에 대해 입을 다물었거든요.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릴리 사건’에는 더 극적인 판본이 있거든요. 그녀가 콩코르드 광장 한복판에서, 대낮에, 행인들이 보는 앞에서 가슴에 총을 쐈다는 이야기 말이지요. 한국은 물론 외국 글에도 이 장면이 단골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정작 사건 당시의 가장 자극적인 신문들조차 콩코르드 광장을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디치, 니컬스, 오를레지, 시므니 같은 드뷔시 연구자들은 릴리가 번화가가 아니라 자기 집에서 방아쇠를 당겼다고 봅니다.
진실은 조용한 아파트였는데, 세월이 그걸 도시 한복판의 스펙터클로 옮겨 놓은 셈입니다. 천재의 아내가 흘린 피마저, 사람들은 더 그럴듯한 무대를 골라 끼워 넣고 싶었던 거지요. 장소가 어디였든, 결과는 같았습니다. 사건은 곧장 파리 신문 지면을 뒤덮었거든요. 프랑스 최고의 작곡가. 그를 무명 시절 뒷바라지한 아내가, 남편의 배신을 견디지 못하고 가슴에 총을 쏘았다. 음악원 복도에서도, 출판사 사무실에서도, 평론가들의 모임에서도 드뷔시라는 이름은 천재가 아니라 경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벨 에포크의 개방적인 파리에서조차, 이 사건은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조강지처를 편지 한 장으로 버리고, 유부녀와 도주한 끝에 아내가 가슴에 총을 쐈으니까요. 예술이라는 이름을 갖다 붙일 변명은 어디에도 없었지요.
드뷔시 본인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저지섬에서 돌아와 파리에 칩거하던 그는, 사건 당일에 소식을 들었을 겁니다. 놀랍게도 이 순간 드뷔시가 구체적으로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기록에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죄책감이었는지, 커리어 걱정이었는지. 사경을 헤매는 릴리를 병문안했는지조차 불분명하네요. 분명한 건, 그가 끝내 릴리에게 돌아가지 않았다는 사실뿐입니다.
의사들이 적출을 포기한 납덩이는 릴리의 몸속에 그대로 남았습니다. 한 달이 지나도, 일 년이 지나도, 이십 년이 지나도 그 자리에 있었지요. 숨을 내쉴 때마다, 기침을 할 때마다, 잠든 밤 심장 박동과 함께 진동하는 금속 조각. 빼내지 못한 총알은 릴리의 몸속에서 천천히 부식되어 갔습니다.
1904년 10월 14일 오후에 발사된 그 한 발은, 릴리의 몸만 관통한 게 아니었습니다. 드뷔시의 인생 전체를 관통했지요. 그날 이후, 드뷔시가 알던 파리는 끝났습니다.
드뷔시를 버린 파리

총성이 울린 직후, 파리의 살롱 문들이 하나둘 닫히기 시작했지요.
가장 먼저 등을 돌린 사람은 드뷔시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가브리엘 포레였지요. 조용한 절교였습니다. 음악적 동지 폴 뒤카도 떠났네요. 파리 예술계는 좁은 세계입니다. 아내를 자살 직전까지 몰아넣은 사람에게 붙은 낙인은, 한번 새겨지자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십수 년에 걸쳐 쌓아 올린 평판이 단숨에 무너졌지요. 드뷔시는 하루 만에 파리의 공공의 적이 되었습니다.
경제적 타격도 뒤따랐습니다. 릴리에게 줄 위자료에 엠마와의 생활비까지, 나가야 할 돈은 늘어나는데 사회적 고립 탓에 들어올 돈은 줄었거든요. 작곡가로서 가장 풍요로워야 할 시기에, 그는 가장 궁색했습니다.
그런데 드뷔시는 무릎 꿇지 않았습니다. 사과도 없이 엠마 곁에 머물렀고, 세상 전체를 적으로 돌린 채 정면 돌파를 택했네요. 고립 속에서 오직 악보 위에서만 숨을 쉬며 작곡에 매달렸습니다. 파리의 청중은 여전히 극장에서 그의 음악에 열광했지만, 무대 아래 인간 드뷔시를 향한 경멸만은 거두지 않았지요. 그 모순된 시선 한가운데에서, 그는 자기 생애 가장 큰 작품을 완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완성된 바다
- 작곡가
- 클로드 드뷔시
(Claude Debussy, 1862~1918) - 곡명
- 바다 — 관현악을 위한 세 개의 교향적 스케치, L 109
(La Mer, trois esquisses symphoniques) - 작곡 기간
- 1903 ~ 1905
- 악장
- 3악장
I. De l’aube à midi sur la mer
II. Jeux de vagues
III. Dialogue du vent et de la mer
I. 바다 위 새벽부터 정오까지
II. 파도의 유희
III. 바람과 바다의 대화 - 편성
- 피콜로·플루트·오보에·잉글리시호른·클라리넷·바순, 호른·트럼펫·코넷·트롬본·튜바, 팀파니·큰북·심벌즈·탐탐·글로켄슈필, 현 5부 · 하프 2대
- 초연
- 1905년 10월 15일, 파리 라무뢰 관현악단 정기연주회
카미유 슈비야르 지휘 - 연주 시간
- 약 24분
소란의 한복판에서 드뷔시는 곡을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1905년 가을, 그의 생애 가장 거대한 작품 《바다(La Mer)》가 완성됩니다. 새벽의 고요함부터 폭풍의 분노까지, 바다의 모든 표정을 담은 세 폭의 교향적 스케치였지요.
그런데 한 가지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이 곡을 마무리하던 무렵 드뷔시는 정작 바다 근처에 있지 않았거든요. 릴리를 버린 대가로 파리 음악계에서 배척당하며, 내륙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입으로 이렇게 적었지요. “나는 바다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뱃사람이 될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정작 그 바다를, 그는 기억과 호쿠사이의 판화 속에서 길어 올렸습니다.
《바다》는 흔히 떠올리는 교향곡과는 생김새부터 다릅니다. 주제를 제시하고 발전시키고 회수하는 독일식 작법 대신, 드뷔시는 빛과 물의 질감 자체를 음표로 옮겼지요. 그래서 부제도 ‘교향곡’이 아니라 ‘세 개의 교향적 스케치’입니다. 그림을 그리듯 바다의 한순간 한순간을 포착한 음악이라는 뜻이지요. 초판 악보 표지에 일본 화가 호쿠사이의 판화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를 직접 골라 넣은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당시 파리를 휩쓴 일본 미술 열풍(자포니슴) 한가운데서, 그는 서양도 독일도 아닌 곳에서 자기 바다의 얼굴을 찾고 있었거든요.

걸작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환영받은 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였지요. 1905년 10월 15일, 카미유 슈비야르가 지휘한 라무뢰 관현악단의 초연은 사실상 실패였습니다. 고전 음악에 능했던 슈비야르는 드뷔시의 새로운 어법을 제대로 짚어내지 못했고, 연주는 어수선했네요. 적대적인 비평가들은 기다렸다는 듯 조롱을 퍼부었습니다. “방구석에서 그림엽서나 보고 베낀 바다”라는 비아냥까지 나왔지요.
《바다》가 진짜 박수를 받은 건 그로부터 한참 뒤였습니다. 1908년 1월, 드뷔시가 직접 지휘봉을 잡은 두 번째 파리 연주에서 비로소 청중이 이 곡의 진가를 알아봤거든요. 한 여자의 희생 위에서 태어나, 한 번 외면당하고도 끝내 살아남은 작품. 오늘날 《바다》는 20세기 관현악의 정점으로 꼽힙니다. 곡 자체를 더 깊이 듣고 싶으시다면, 《바다(La Mer)》를 따로 다룬 글에서 세 악장을 차근차근 풀어두었으니 함께 보시길 권합니다.
악보와 함께 듣기
원본 총보는 이미 저작권이 풀려, IMSLP에서 누구나 무료로 열람할 수 있거든요. 《바다(La Mer)》 악보 보기 (IMSLP)
슈슈

1905년 10월 30일, 드뷔시와 엠마 사이에서 딸이 태어났습니다. 클로드-엠마. 사람들은 ‘슈슈(Chouchou)’라고 불렀지요. 《바다》가 초연된 지 보름 만의 일이었습니다.
드뷔시는 이 아이에게 모든 것을 쏟았습니다. 음악계의 멸시도, 재정난도, 점점 악화되는 건강도 딸 앞에서는 힘을 잃었네요. 1908년, 그는 여섯 곡으로 된 피아노 모음곡 《어린이의 세계(Children’s Corner)》를 슈슈에게 바칩니다. 악보 표지에는 이렇게 적었지요. “나의 사랑하는 작은 슈슈에게. 아빠가 앞으로 들려줄 음악에 대해, 미리 건네는 부드러운 사과를 담아.”
제목이 죄다 영어인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슈슈에게는 영국인 가정교사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박사님, 파르나소스 산으로(Doctor Gradus ad Parnassum)’ 같은 짓궂은 제목이 붙었지요. 매일 똑같은 손가락 연습곡을 시키는 선생을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슬쩍 놀린 곡입니다. 마지막 곡 ‘골리워그의 케이크워크’는 슈슈가 가지고 놀던 흑인 인형에서 따왔는데, 한가운데에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그 비장한 선율을 슬쩍 끼워 넣고는 깔깔 비웃듯 흩어버립니다. 평생 바그너의 그늘과 싸운 드뷔시다운 장난이지요. 맑고 투명한 선율 속에, 어린아이의 눈높이와 어른의 위트가 동시에 담겨 있는 음악입니다.
조강지처를 버린 그 손이, 이토록 순수한 음악을 써냈습니다. 세상에게 슈슈는 불륜의 아이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드뷔시에게 슈슈는 세상 모든 비난을 막아주는 유일한 안식처였지요.
끝나지 않은 이야기
각자의 이혼 절차가 마무리된 뒤, 1908년 1월 15일 드뷔시와 엠마는 정식 부부가 됩니다. 《바다》를 비롯한 걸작들의 성공으로 그의 명성은 유럽 전역으로 퍼졌지요. 하지만 1910년대에 접어들며 드뷔시의 몸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대장암이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유럽을 집어삼키는 와중에, 그의 건강도 함께 꺼져갔네요.
1918년 3월 25일, 독일군의 포격이 파리에 울리던 밤, 드뷔시가 숨을 거뒀습니다. 향년 55세. 전시 통제 속에 장례식은 초라했고, 거리를 따라온 조문객도 몇 되지 않았지요.
그가 죽고 이듬해인 1919년 여름, 딸 슈슈가 디프테리아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습니다. 겨우 열세 살이었네요. 아버지를 그토록 닮았던 아이가, 아버지를 따라간 지 1년 만이었습니다. 남편과 딸을 연이어 잃은 엠마는, 남은 평생을 드뷔시의 유산을 지키는 데 바쳤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아내 릴리 텍시에. 드뷔시가 병으로 죽은 뒤에도 그녀는 14년을 더 살다가, 1932년 파리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습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가슴에 박힌 총알은 끝내 1밀리미터도 빠지지 않았지요.
드뷔시가 5년을 함께한 아내에게 남긴 것은 단 두 가지였습니다. 식탁 위의 이별 편지 한 장. 그리고 릴리가 무덤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가슴에 안고 간 총알 하나.
한 발의 총성이 남긴 것
가비 뒤퐁이 1897년에, 릴리 텍시에가 1904년에. 7년 간격을 두고, 드뷔시를 사랑한 두 여자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우리는 보통 위대한 음악 뒤에 위대한 영혼이 있으리라 기대하지요. 그런데 《바다》의 그 찬란한 파도 아래에는, 두 발의 총성과 평생 빠지지 않은 납덩이가 가라앉아 있습니다.
그렇다고 《바다》가 덜 위대해지는 건 아닙니다. 다만 이 음악을 들을 때, 우리가 듣는 것이 오직 천재의 영감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될 뿐이지요. 새벽 바다의 첼로 저음 어딘가에는, 파리의 한 아파트에서 홀로 늙어간 재봉사의 숨소리도 섞여 있을 겁니다. 예술과 인간을 분리해서 봐야 하는가, 아니면 함께 묶어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드뷔시는 그 오래된 질문을, 가장 아름다운 음악과 가장 잔혹한 사실을 나란히 놓아 우리에게 떠넘기고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