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슈트라우스 2세 — 요한 슈트라우스 부자 전쟁 — 아버지는 왜 아들의 데뷔를 막았나

바이올린을 금지하고, 데뷔 무대를 관청에 막아달라 청원한 슈트라우스 부자의 1844년

후대에 전해진 일화에 따르면 —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아버지 몰래 바이올린을 켜다가 들켜 매를 맞았고, 아버지는 “음악을 두들겨 패서 빼내겠다”며 아들의 데뷔를 끝까지 막았다고 합니다.

문서로 확인되는 것은 — 아버지가 아들을 음악가가 아닌 은행원으로 키우려 했다는 점입니다. 1844년 데뷔를 앞두고는 빈 시 당국에 아들의 연주를 허가하지 말아 달라는 청원까지 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 글에서는 문서로 확인되는 사실과, 매질 장면처럼 후대에 부풀려진 것으로 보이는 전승을 구분해 살펴봅니다.

1844년 10월 15일 저녁, 빈 외곽 히칭에 자리한 무도회장 도마이어 카지노 앞에는 마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섰습니다. 스물네 명 규모의 악단을 이끌고 당당히 무대에 오른 지휘자는 아직 열아홉도 채우지 못한 청년, 요한 슈트라우스였거든요. 그런데 얄궂게도 이 이름은 이미 빈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가이자 ‘왈츠의 아버지’로 군림하던 그의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와 완전히 똑같았습니다.

결국 아버지와 아들은 같은 이름으로 같은 도시에서 같은 일을 하게 된 셈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날 객석 곳곳에는 아버지가 직접 표를 주어 보낸 사람들이 섞여 있었고 이들은 아들의 첫 무대를 단단히 방해하려 했다고 합니다. 데뷔를 축하하기는커녕 훼방을 놓으려 했다는 이 일화는 클래식 음악사에서도 손꼽히게 유명한 부자 갈등으로 남았죠. 다만 후대로 넘어오며 극적인 세부가 많이 덧붙었으므로, 어디까지가 실제였는지는 꼼꼼히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아버지)의 1830년경 석판화 초상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 빈을 통째로 춤추게 만든 사람이, 정작 아들의 춤곡은 막고 싶어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문서로 남아 있습니다

사실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아들이 자신을 따라 음악을 직업으로 삼는 걸 전혀 원치 않았습니다. 아들을 은행에 취직시켜 안정적인 시민으로 키우려 했고, 집에서 피아노를 치는 것은 허락했지만 바이올린을 배우는 일만큼은 단호하게 막아섰죠. 당시 왈츠 악단의 지휘자는 직접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악단을 이끌었거든요. 다시 말해,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과 똑같은 직업 음악가가 되는 길을 원천 차단하려 했던 셈입니다.

이들 부자의 팽팽한 갈등 이면에는 꽤나 복잡하게 꼬인 집안 사정도 얽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1834년부터 스무 살의 연인 에밀리 트람푸슈와 은밀한 딴살림을 차렸는데, 빈에서는 그가 두 집안을 거느린다는 사실이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그는 본처 안나와의 사이에 여섯 자녀를, 트람푸슈와의 사이에 무려 여덟 자녀를 두었죠. 심지어 막내 에두아르트가 태어나고 고작 두어 달 뒤에 트람푸슈와의 첫 아이가 태어날 정도였으니까요. 남편의 기막힌 이중생활을 견디다 못한 안나는 결국 1842년 남편과 갈라섰고, 당시 여론은 안나에게 퍽 우호적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무정하게 집을 나간 뒤, 아들의 음악 공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나선 사람은 다름 아닌 어머니 안나였습니다. 안나는 아들을 슈트라우스 악단의 악장이던 프란츠 아몬에게 보내 몰래 바이올린을 배우게 했거든요. 아버지가 그토록 기를 쓰고 막으려 했던 음악가의 길을, 어머니가 앞장서서 활짝 열어 준 것입니다. 아들은 안나의 든든한 지원을 등에 업고 바이올린을 익히며 자신만의 악단을 꾸릴 거대한 준비를 시작하게 됩니다.

아들이 아버지 몰래 바이올린을 배웠다는 이야기는 비교적 분명한 정황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바이올린 학습을 맹렬히 반대했고, 어머니는 아들이 레슨을 받을 수 있도록 몰래 도왔으니 이 수업이 아버지 모르게 이루어졌을 가능성은 무척 큽니다. 하지만 뒤에서 다룰 이른바 매질 장면은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 몰래 바이올린을 배웠다는 이야기와, 그러다 아버지에게 덜미를 잡혀 호되게 맞았다는 자극적인 일화는 근거의 확실성이 결코 같지 않거든요.

1844년 7월, 아들은 마침내 빈 시 당국에 연주 허가를 신청하기에 이릅니다. 제출한 서류에는 “음악 지휘자로 생계를 꾸리고자 한다”고 당당히 적어 넣었죠. 발등에 불이 떨어진 아버지는 당국에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며 어떻게든 허가를 막아보려 애썼습니다. 하지만 빈 시 당국은 9월 초 이 신청을 그대로 승인해버립니다. 아들을 주저앉히고 싶었던 아버지의 첫 번째 방해 시도는 결국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버렸습니다.

1844년 10월 15일 도마이어 카지노 요한 슈트라우스 데뷔 공연 안내문
데뷔 무대의 실제 공연 안내문.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데뷔를 막으려 했던 아버지의 왈츠가 프로그램 마지막 곡으로 실려 있습니다.

연주 허가가 떡하니 나버리자, 다급해진 아버지는 이번엔 공연장들을 직접 윽박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무대에 세우는 무도회장에는 절대 자기 악단을 보내지 않겠다고 알린 것입니다. 당시 슈트라우스 악단은 빈의 무도회장들이 결코 놓칠 수 없는 최고의 흥행 수표였기에, 공연장 업주들로서는 청년의 데뷔 무대를 받아들이기가 무척 부담스러웠을 겁니다. 결국 아들은 화려한 도심의 주요 공연장들을 놔두고, 변두리 히칭에 있던 도마이어 카지노로 밀려나 데뷔전을 치르게 됐습니다.

대망의 그날 밤 역시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사업 관리인이던 카를 히르슈가 공연을 방해할 사람들에게 표를 나눠줬다는 기록이 남아 있거든요. 그러나 무대에 오른 청년은 자신이 쓴 왈츠들을 훌륭하게 연주해 청중의 호응을 단숨에 끌어냈고, 훗날 그의 첫 출판작이 된 〈진게디히테〉는 무려 열아홉 번이나 앙코르를 받았습니다. 방해 공작 속에서 위태롭게 시작한 데뷔 무대가 믿기지 않을 만큼 통쾌한 성공으로 끝을 맺은 것입니다.

사실 그날의 프로그램은 갓 데뷔하는 신인의 무대치고는 제법 야심 찬 구성이었습니다. 마이어베어와 주페, 오베르 등 당대 인기 작곡가들의 작품 사이에 자신이 직접 쓴 왈츠 두 곡과 폴카, 카드리유까지 자작곡 네 곡을 당돌하게 찔러 넣었거든요. 그리고 대미를 장식한 마지막 곡은 다름 아닌 아버지의 왈츠 〈로렐라이 라인의 노래〉였습니다. 자신의 앞길을 막으려 한 아버지의 작품으로 첫 데뷔 공연의 막을 내린 이 선곡은 선배 음악가에 대한 예우로도, 혹은 아버지를 향한 거침없는 도전장으로도 읽힐 수 있겠죠.

이 역사적인 공연에 대한 반응은 곧바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나흘 뒤 빈의 신문 《데어 반더러》에 유머 작가 프란츠 비스트가 이런 한 줄을 남겼거든요. “잘 자게, 란너! 좋은 저녁이네, 아버지 슈트라우스! 좋은 아침일세, 아들 슈트라우스!” 여기서 요제프 란너는 아버지 슈트라우스와 함께 빈 왈츠를 이끌었던 앞세대의 음악가입니다. 비스트는 잠과 아침에 빗댄 세 인사로 란너의 시대가 저물고, 아버지에 이어 아들이 눈부시게 떠오른다는 인상을 절묘하게 표현해 냈습니다. 아버지가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던 때에 이런 평이 나왔다는 사실은, 아들의 데뷔 무대가 그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겼음을 고스란히 보여 줍니다.

매질 장면은 어디서 왔나

가장 널리 퍼진 이야기는 다름 아닌 아버지가 아들을 매질했다는 일화입니다. 몰래 바이올린을 켜던 아들을 발견해 호되게 때리며 “이 녀석에게서 음악을 두들겨 빼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는 거죠. 여러 전기에 단골로 등장하는 극적인 장면입니다만, 정작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남긴 1차 기록으로 확인된 사실이라 단호하게 못 박기는 어렵거든요.

이 이야기는 세대를 거치며 꽤 극적으로 다듬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아버지가 음악 활동을 결사반대하자 어머니가 몰래 레슨을 받게 했다는 기본 뼈대에 “폭력을 무릅쓰고도 모자가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는 애절한 서사가 덧입혀진 셈이죠. 그러면서 매질 장면이 이야기의 절정으로 슬쩍 자리 잡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입을 타고 전해지는 동안 인상적인 장면이 유독 강조되거나 세부 내용이 덧붙는 일은 그리 드물지 않으니까요.

반대로 그저 전설처럼 들리지만 막상 여러 기록이 탄탄하게 뒷받침하는 대목도 있습니다. 데뷔 무대에서 열아홉 차례나 앙코르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뻔한 과장처럼 들리죠. 하지만 놀랍게도 여러 자료가 이 횟수를 고스란히 전하고, 당대 신문 역시 공연의 대성공을 앞다투어 보도했습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라고 해서 몽땅 허풍인 것만은 아니거든요.

전문가들이 갈리는 지점

연구자들의 견해는 실제로 매질이 있었는지보다는 아버지가 그토록 집요하게 아들을 방해한 동기를 두고 크게 엇갈립니다. 한쪽에서는 아버지가 자기 왕국을 넘볼 후계자를 미리 밟아두려는 질투심에 사로잡혀 아들을 가로막았다고 봅니다. 반면 다른 쪽에서는 냉혹한 사업가로서의 계산도 작용했다고 설명하죠. 똑같은 이름을 내건 두 악단이 시장에서 맞붙으면 아버지의 흥행 사업이 고스란히 타격을 받을 테니까요. 아들을 막아선 데에는 자기 사업을 지켜내려는 의도도 다분히 섞여 있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얄궂게도 부모의 이혼 문제까지 얽혀 있습니다. 아버지가 집을 훌쩍 떠나 딴살림을 차린 뒤, 어머니 안나는 보란 듯이 아들의 음악 활동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했거든요. 여기에는 남편을 향한 복잡한 감정도 작용했을 수 있습니다. 안나가 아들을 기어코 아버지와 같은 무대에 세운 것은, 갈라선 남편에게 정면으로 맞서려는 뼈있는 행동이었다고 보는 해석도 꽤 솔깃합니다. 다만 이를 명쾌하게 뒷받침할 물증이 턱없이 부족해 안나의 진짜 속마음을 한 가지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결국 당시 남겨진 자료만 가지고 아버지의 결정을 단 하나의 동기로 깔끔하게 설명하기란 무리입니다. 끓어오르는 질투, 사업을 지켜내려는 치밀한 계산, 그리고 지독하게 꼬여버린 가정사가 한데 뒤엉켜 작용했을 가능성을 넉넉히 열어두는 편이 훨씬 타당하겠죠.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놓지 못하는 이유

이 싸움이 이토록 오래 회자되는 데에는, 부자가 완전히 같은 이름으로 같은 무대를 두고 치열하게 경쟁했다는 극적인 사정이 크게 한몫합니다. 아버지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음악가가 된 아들은 결국 아버지보다 훨씬 폭넓은 명성을 거머쥐었거든요. 아버지의 대표작이 오늘날 빈 신년음악회의 대미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라데츠키 행진곡〉이라면, 아들의 대표작은 오스트리아의 제2의 국가로까지 불리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입니다. 두 사람의 갈등은 단순한 집안 불화에 그치지 않고, 빈의 대중음악을 이끈 거대한 두 세대의 맞대결로 고스란히 남게 되었습니다.

빈 왈츠 작곡가들을 화환처럼 배치한 테오 자셰의 캐리커처
‘빈 왈츠’를 그린 자셰의 캐리커처. 왈츠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당시 빈에서 무도회 문화가 얼마나 성행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19세기 빈에서 왈츠는 오늘날의 유행가나 다름없었습니다. 무도회장과 각종 사교 행사를 휩쓰는 당대 최고의 대중음악이었죠. 슈트라우스 부자는 각자의 악단을 이끌고 똑같은 청중, 똑같은 공연 기회를 놓고 물러설 수 없는 자존심 싸움을 벌였습니다. 어느 악단이 더 많은 무대를 꿰차고 열광적인 호응을 얻느냐가 곧 빈 음악계의 권력 주도권과 직결되었으니까요. 그러니 두 사람의 갈등은 사적인 집안일을 넘어, 대중이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는 공개적인 경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팽팽했던 두 악단의 경쟁은 아버지의 죽음 뒤에야 비로소 끝이 났습니다. 아버지는 1849년 9월 25일, 마흔다섯이라는 이른 나이에 성홍열로 덜컥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공교롭게도 트람푸슈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에게서 옮은 병이었다고 전해지죠. 장례 행렬에는 무려 십만 명 안팎의 인파가 뒤따랐다고 하는데, 이는 당시 빈 인구의 8분의 1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였습니다. 아버지가 눈을 감은 뒤 아들은 곧바로 아버지의 악단을 자신의 악단과 합쳐버렸습니다. 살아생전 두 사람이 화해한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날을 세우고 맞섰던 두 악단은 역설적이게도 이때 마침내 하나가 되었습니다.

막으려던 이름이 아들의 왕관이 되다

아버지가 그토록 물려주지 않으려 기를 썼던 ‘슈트라우스’라는 이름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들의 눈부신 성공 덕분에 훨씬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데뷔한 지 20여 년이 지난 1867년, 아들의 명작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가 세상에 처음 울려 퍼졌거든요. 오스트리아의 제2의 국가로 칭송받을 만큼 폭발적인 사랑을 받은 이 왈츠를 계기로, 아들은 기어코 ‘왈츠 왕’이라는 명성을 거머쥐었습니다. ‘왈츠의 아버지’로 불렸던 거대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들은 당당히 자기 이름으로 ‘왈츠 왕’의 옥좌에 앉은 것입니다.

아들은 화려한 무도회장을 넘어 아예 극장으로까지 활동 영역을 성큼 넓혔습니다. 1874년에는 오페레타 〈박쥐〉를 발표하며, 춤곡뿐만 아니라 덩치 큰 무대 작품에서도 작곡가로서의 역량을 확실히 인정받았죠. 아버지가 그토록 평범한 은행원으로 주저앉히고 싶어 했던 청년은, 마침내 빈의 무도회와 극장을 동시에 대표하는 위대한 작곡가가 되어버렸습니다.

사실 아버지 역시 요제프 란너와 엎치락뒤치락 경쟁하며 ‘왈츠의 아버지’로 불리는 자리에 올랐거든요. 젊은 시절 두 사람은 같은 악단에서 나란히 연주하던 동료였지만, 훗날에는 각자의 악단을 이끌며 빈의 무도회 음악 패권을 두고 치열하게 맞붙었습니다. 그리고 사후에는 얄궂게도 빈의 되블링 묘지에 나란히 묻혔죠. 란너와 아버지, 그리고 다시 아버지와 아들로 꼬리를 물고 이어진 이 숨 막히는 경쟁 구도를 보면, 슈트라우스 부자의 다툼은 단순한 한 집안의 일화에 그치지 않습니다. 당시 빈 음악계의 치열하고도 거대한 세대교체와 정면으로 맞닿아 있었던 셈입니다.

이제 이 음악이 다르게 들립니다

이 기막힌 뒷이야기를 알고 나면 두 사람의 대표곡도 전과는 사뭇 다르게 들리죠. 먼저 아버지의 〈라데츠키 행진곡〉을 들어볼까요. 이 곡은 오늘도 어김없이 빈 신년음악회의 마지막을 장식하며, 객석에서는 흥겨운 연주에 맞춰 여지없이 박수가 울려 퍼집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아들의 화려한 등장을 끝끝내 막으려 했던 그 집요한 사정을 떠올려 보면, 행진곡 특유의 당당한 기세마저도 팽팽했던 부자의 갈등과 묘하게 겹쳐 들리거든요.

아버지의 〈라데츠키 행진곡〉. 힘찬 행진곡의 기세는 아들의 등장을 끝내 막으려 했던 아버지의 태도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 글 맨 위에서 먼저 틀어둔 곡은 아들의 역작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입니다. 아버지가 관청까지 동원해 어떻게든 활동을 막아보려 했던 그 청년은, 20여 년 뒤 오스트리아 사람이라면 누구나 흥얼거릴 만한 불멸의 선율을 써냈습니다. 이 왈츠는 훗날 영화의 한 장면에도 아주 깊이 스며들었죠. 거장 스탠리 큐브릭은 회전하는 우주 정거장 장면에 이 곡을 결합해 광활한 우주의 움직임을 마치 우아한 왈츠처럼 펼쳐 보였거든요. 게다가 아들은 자신의 데뷔 무대 마지막 곡으로 아버지의 왈츠 〈로렐라이 라인의 노래〉를 연주해 나름의 예를 갖추기도 했습니다. 이 장면까지 함께 떠올려 본다면, 두 사람의 끈질긴 관계는 단순한 승패가 엇갈린 승부가 아니라 치열한 경쟁과 묘한 존중이 복잡하게 뒤얽힌 한 편의 가족극으로 다가옵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아들)의 1855년 석판화 초상
데뷔 11년 뒤의 아들. 아버지가 진출을 막으려 했던 빈 음악계에서 이미 명성을 얻은 시기의 얼굴입니다.

같은 결이 흐르는 세 곡

슈트라우스 부자의 음악에서 한껏 맛본 춤의 리듬과 화려한 관현악을 다른 작품에서도 느껴 보고 싶다면 세 곡을 나란히 함께 들어볼 만합니다. 첫째는 차이콥스키호두까기인형입니다. 이 발레에 등장하는 ‘꽃의 왈츠’에서는 빈 왈츠를 고스란히 떠올리게 하는 우아한 3박자 리듬이 무용수들의 유려한 움직임과 근사하게 어우러지거든요.

둘째는 같은 작곡가의 백조의 호수입니다. 이 작품에 흐르는 왈츠에서는 무도회 음악 특유의 3박자 리듬이 일사불란한 군무와 딱 맞아떨어지며 꽤나 극적인 장면을 만들어냅니다. 셋째는 프란츠 리스트헝가리 광시곡 2번입니다. 비록 왈츠나 발레 음악은 아니지만, 슈트라우스 부자가 활동하던 19세기의 까다로운 청중을 단숨에 매료시킨 화려한 기교와 선명한 리듬을 오직 피아노 한 대로 화끈하게 펼쳐 보이는 곡이거든요.

이 세 곡은 장르도, 처음 올랐던 무대도 서로 완전히 다르지만, 특유의 춤 리듬과 화려한 음향으로 청중의 넋을 쏙 빼놓는다는 묘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차이콥스키의 두 발레에서는 무도회와 군무를 거침없이 이끄는 왈츠를 엿볼 수 있고, 리스트의 피아노곡에서는 당시 살롱과 연주회장을 뜨겁게 달구었던 압도적인 기교와 극적인 속도 변화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죠. 오늘날에는 두 발레의 주요 장면만을 알짜배기로 담아낸 발췌곡과 리스트의 피아노곡 모두 번듯한 콘서트홀에서 단골로 연주되곤 합니다. 슈트라우스 부자의 왈츠와 함께 나란히 들어보면, 19세기 청중이 그토록 춤의 리듬과 화려한 연주에 흠뻑 열광했던 모습을 서로 다른 장르를 통해 아주 흥미롭게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아버지가 정말 아들의 데뷔를 막으려 했나요?

문서로 확인되는 사실입니다.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1844년 빈 시 당국에 아들의 연주를 허가하지 말아 달라고 청원했습니다. 아들을 무대에 세우는 무도회장에는 자기 악단을 보내지 않겠다고 압박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청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아들은 그해 10월 15일 도마이어 카지노에서 데뷔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때렸다는 이야기는 사실인가요?

“음악을 두들겨 빼내겠다”며 아들을 때렸다는 장면은 여러 전기에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하는 목격자의 1차 기록이 없어 사실로 단정하기는 어렵고, 전승에 가깝습니다. 분명한 것은 아버지가 아들이 바이올린을 배우지 못하게 했고, 어머니 안나가 몰래 아들을 슈트라우스 악단의 악장 프란츠 아몬에게 보내 레슨을 받게 했다는 점입니다.

왜 데뷔 무대가 도심이 아니라 변두리였나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무대를 내주는 무도회장에는 자기 악단을 보내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쳤기 때문으로 봅니다. 아버지의 악단을 포기하기 어려웠던 빈 도심의 주요 무도회장들은 아들을 섭외하기가 부담스러웠고, 결국 데뷔 무대는 빈 외곽 히칭의 도마이어 카지노에서 열렸습니다.

두 사람은 끝내 화해했나요?

두 사람이 생전에 극적으로 화해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1849년 성홍열로 마흔다섯에 세상을 떠났고, 이후 아들이 아버지의 악단을 자기 악단에 합치면서 갈라져 있던 두 악단이 하나가 됐습니다.

참고 자료

이어서 듣기 — 무도회장에서 극장으로

왈츠가 좁은 무도회장을 넘어 다른 장르와 새로운 감상 맥락으로 대체 어떻게 이어졌는지 궁금하시다면, 아래 다섯 편을 차분히 살펴보세요. 왈츠 리듬을 은근히 품은 현악곡과 같은 시대의 실내악·협주곡을 들어볼 수 있고, 음악가와 악단의 흥미로운 사연이나 차분한 분위기를 중심으로 정성껏 엮어낸 선곡도 함께 만나보실 수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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