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곡은 — 포위된 도시에서 쓰기 시작해 피란지에서 끝낸, 쇼스타코비치의 가장 긴 교향곡입니다.
딱 하나만 듣는다면 — 1악장. 22마디짜리 행진이 열두 번 돌아오는 동안 소리가 어디까지 불어나는지 재 보세요.
첫 음반 — 레너드 번스타인 ·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 도이체 그라모폰.
1942년 8월 9일. 히틀러가 레닌그라드 함락을 자축하겠다며 아스토리아 호텔에 승전 만찬을 잡아 둔 날짜입니다. 초대장까지 찍어 뒀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그날 그 도시에서 실제로 열린 행사는 만찬이 아니라 연주회였습니다. 무대에 앉은 사람들 중 몇은 넉 달 전만 해도 악기를 들 힘조차 없던 이들이었습니다.

초대장은 이미 인쇄돼 있었습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습니다. 두 달 반 만에 독일 육군은 레닌그라드 남쪽까지, 핀란드군은 북쪽까지 올라왔습니다. 9월 8일 마지막 육로가 끊겼습니다.
독일군은 도시로 밀고 들어가는 대신 다른 방법을 골랐습니다. 포위해 놓고 굶기는 것. 인구 320만의 도시가 그대로 갇혔습니다.
1941년 11월부터 1942년 2월까지, 레닌그라드 시민이 하루에 받은 식량은 빵 125그램까지 떨어졌습니다. 손바닥에 올려놓으면 식빵 두 장이 될까 말까 한 양입니다. 그마저도 절반 넘게는 톱밥을 비롯해 먹을 것이 아닌 재료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바깥 기온은 영하 30도까지 떨어졌고 시내 교통은 멈춰 있었으니, 배급소까지 몇 킬로미터를 걷는 일 자체가 많은 시민에게 넘지 못할 벽이었습니다. 1942년 1월과 2월에는 사망자가 월 10만 명까지 치솟았습니다. 대부분 굶어서.
도시로 물건이 들어오는 길은 라도가 호수 하나뿐이었습니다. 여름에는 배로, 겨울에는 호수가 얼어붙으면 그 위에 낸 얼음 도로로. 사람들은 이 길을 ‘생명의 길’이라고 불렀습니다.
포위는 872일 동안 이어졌고 1944년 1월 27일에야 완전히 풀렸습니다. 이 기간에 숨진 민간인은 90만 명 안팎으로 추산됩니다. 전체 사망자 추계는 자료마다 폭이 크지만, 어느 쪽을 잡아도 전쟁 전 인구의 3분의 1에 가까운 규모입니다. 히틀러가 만찬을 잡아 둔 1942년 8월 9일은 그 872일의 딱 한가운데였습니다.

소방 헬멧을 쓴 서른다섯 살
전쟁이 터졌을 때 쇼스타코비치는 서른네 살이었고 레닌그라드 음악원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한 번 죽다 살아난 사람이었습니다.
1936년, 당 기관지 《프라우다》가 그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두고 “음악이 아니라 혼돈”이라는 사설을 실었습니다. 스탈린 시대에 기관지에 이름이 오른다는 건 다음 순서를 짐작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완성해 둔 교향곡 4번을 초연 직전에 스스로 거둬들였고 1937년 교향곡 5번으로 간신히 다시 용인받았습니다.
그래서 1941년의 전쟁은, 잔인하게 말하면 그에게 숨 쉴 구멍이기도 했습니다. 파시즘에 맞선다는 주제는 누구도 트집 잡을 수 없는 주제였으니까요. 그는 음악원 자원 소방대에 들어가 지붕 위에서 소이탄을 감시했고 소방 헬멧을 쓴 채 찍힌 사진 한 장이 나중에 그를 세계적인 얼굴로 만듭니다.
9월 2일, 독일군이 도시 포격을 시작한 바로 그날 그는 2악장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공습경보가 울리면 방공호로 뛰고, 돌아와 다시 쓰고. 그렇게 2주 만에 끝냈습니다. 몇 시간 뒤에는 레닌그라드 라디오에 나가 시민들에게 짧게 말했습니다. 요지는 하나였습니다. “나는 지금 곡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하던 일을 하시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그는 음악가 몇 명을 불러 여기까지 쓴 것을 피아노로 들려줬습니다. 1악장이 끝나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때 공습경보가 울렸는데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다들 한 번 더 듣고 싶어 했습니다. 쇼스타코비치는 양해를 구하고 가족을 방공호에 데려다준 뒤 돌아와 1악장을 다시 치고 이어서 다음 악장을 쳤습니다.
그 반응에 힘을 얻어 그는 그날 밤 3악장에 손을 댔고 9월 29일 도시 안에서 완성했습니다. 이틀 뒤인 10월 1일 가족과 함께 모스크바로 빠져나갔고 10월 22일 쿠이비셰프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마지막 악장은 거기서 썼습니다. 전곡을 끝낸 날짜는 1941년 12월 27일. 그가 떠나온 도시가 하루 125그램으로 겨울을 나던 바로 그때입니다.

‘침략 주제’라는 이름을 붙인 사람은 작곡가가 아닙니다
이 곡을 소개하는 글은 대개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치가 쳐들어오자 쇼스타코비치가 분노해서 썼고 1악장의 그 유명한 행진이 밀려오는 독일군이라고. 깔끔하고 외우기 쉬운 설명입니다. 그런데 남아 있는 기록을 하나씩 짚어 보면 이 설명은 여러 군데서 어긋납니다.
우선 헌정 대상. 이 교향곡이 처음부터 레닌그라드에 바쳐진 게 아닙니다. 처음에 붙인 이름은 레닌이었습니다. 포위된 도시에 헌정한다는 결정은 나중에 나왔습니다.
다음은 그 유명한 이름. ‘침략 주제(invasion theme)’라는 말을 쇼스타코비치는 한 번도 쓴 적이 없습니다. 기자와 평론가들이 붙인 말이고, 정작 그는 이렇게 선을 그었습니다. “나는 전투 장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비행기 소리, 전차 굴러가는 소리, 대포 소리 같은 것 말입니다. 이른바 전쟁 음악을 쓴 게 아닙니다. 나는 참혹한 사건이 놓인 정황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더 흥미로운 건 그가 1악장의 중심으로 지목한 대목입니다. 기자들이 늘 먼저 묻던 그 행진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행진이 무너진 뒤에 오는 음악을 가리키며 “장송 행진곡, 아니 차라리 진혼곡”이라고 불렀고 그다음 대목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머니의 눈물일 수도 있고, 슬픔이 너무 커서 흘릴 눈물조차 남지 않은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행진의 성격을 두고도 말이 갈립니다. 지휘자 예브게니 므라빈스키는 이 가락을 두고 퍼져 나가는 어리석음과 진부함의 초상이라고 했고, 평론가 아르투르 로리에는 “일부러 유치하게 만든 시시한 모티프”라며 “소련 길거리 아무나 휘파람으로 불 수 있는 곡조”라고 적었습니다. 무섭기는커녕 촌스럽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들어 보면 그 말이 이해가 갑니다.
💡 사실은요 — “1악장의 핵심은 그 행진”이라는 설명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런데 쇼스타코비치 본인은 정반대로 말했습니다. 1941년 10월 소련 매체 《소비에트 예술》에 실린 발언에서 그는 1악장의 “중심 자리”는 행진이 아니라 그 뒤에 오는 비극적인 음악, 곧 진혼곡이라고 못 박았습니다. 기자들이 늘 행진부터 캐묻자 나온 대답이었습니다.
1악장 — 22마디가 열두 번 돌아옵니다
시작은 현이 한목소리로 내놓는 넓은 주제입니다. 곧 목관이 같은 가락을 받아 갑니다. 위협적인 구석이 없습니다. 오히려 넓고 단단합니다.
그다음 플루트와 현이 속도를 늦추고, 거기서 문제의 행진이 슬그머니 들어옵니다. 길이는 22마디. 작은북이 같은 리듬을 계속 두드리는 위에서 이 22마디가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이, 열두 번 돌아옵니다. 가락은 한 음도 바뀌지 않습니다. 바뀌는 건 누가 연주하느냐와 몇 명이 연주하느냐뿐입니다.
같은 것을 반복하며 악기만 늘려 가는 이 방식은 라벨의 《볼레로》가 1928년에 이미 해 둔 것이고 쇼스타코비치도 그 비교가 나올 걸 알고 썼습니다. 다만 목적지가 다릅니다. 《볼레로》는 도취로 갑니다. 여기서는 열두 번째가 끝나는 순간 금관이 그 가락을 거꾸로 뒤집어 내지르고 그대로 절정으로 밀어붙입니다.
절정이 무너지고 나면 느린 대목이 두 부분으로 이어집니다. 클라리넷 독주가 문을 열어 주고 바순 독주가 들어옵니다. 이 자리가 바로 작곡가가 “진혼곡”이라고 부른 곳입니다. 그리고 맨 처음의 넓은 주제가 현으로 조용히 돌아옵니다. 같은 가락인데 아까와 같게 들리지 않습니다.
악장을 닫는 건 짧은 코다입니다. 약음기를 끼운 트럼펫 하나와 타악기가 행진의 조각을 만지작거리다 끝납니다. 이겼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직 안 끝났다는 말에 가깝습니다.
🎧 여기서 들으세요 — 작은북이 들어온 뒤로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열두 번을 세어 보세요. 음량이 아니라 악기 수가 늘어난다는 걸 알아채는 순간, 이 행진이 왜 무서운지 몸으로 이해됩니다. ▶ 1악장 처음부터 듣기
2악장 — 가장 짧고, 가장 웃기고, 가장 안 웃깁니다
네 악장 중 가장 짧습니다. 쇼스타코비치는 이 악장을 “매우 서정적인 스케르초”라고 불렀습니다. 스케르초는 원래 ‘농담’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이고, 교향곡에서는 가볍고 빠른 악장을 가리킵니다.
실제로 조용하고 장난스러운 가락이 현에서 시작합니다. 잠시 뒤 오보에 하나가 그 가락을 높은 자리에서 비틀어 놓습니다. 악기들이 저마다 자기 곡조를 들고 나와 한동안 어슬렁거립니다. 여기까지는 정말 농담입니다.
그러다 악장 한복판에서 목관이 거칠고 날카로운 주제를 들이밉니다. 금관이 받고, 현이 받고, 다시 목관이 받습니다. 그러고는 빠르고 위풍당당한 대목으로 넘어가는데 이것도 같은 것을 반복해 쌓는 방식입니다. 1악장의 그 행진과는 다른 가락인데, 움직이는 방식은 닮았습니다. 웃자고 시작한 이야기가 어느새 아까 그 방으로 돌아와 있는 셈입니다. 목관이 거칠어지는 그 순간이 경계선입니다.
남은 3분의 1은 처음의 그 장난스러운 분위기로 돌아갑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쇼스타코비치의 유머가 제일 얄궂게 들리는 대목이 여기입니다.
🎧 여기서 들으세요 — 시작하고 얼마 안 돼 오보에가 혼자 높이 올라가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 태평한 소리를 기억해 두면, 한복판에서 목관이 표정을 바꾸는 순간이 훨씬 세게 옵니다. ▶ 2악장부터 듣기
악보 252쪽이 비행기를 탔습니다
세계 초연은 1942년 3월 5일 쿠이비셰프에서 열렸습니다. 사무일 사모수드가 볼쇼이 극장 오케스트라를 지휘했고 연주는 소련 전역에 방송됐습니다. 3월 29일에는 모스크바 노동조합회관 원주홀에서도 올랐습니다.
그때부터 이 곡의 악보가 본격적으로 이동합니다. 악보는 마이크로필름에 옮겨 담겨 비행기로 테헤란까지 갔고 1942년 4월 카이로를 거쳐 서방으로 넘어갔습니다. 6월 22일 런던에서 헨리 우드가 런던 필하모닉과 유럽 초연을 방송으로 내보냈고 프롬스 무대에서 연주회 초연도 했습니다. 7월 19일에는 뉴욕에서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NBC 심포니를 지휘해 미국 전역에 라디오로 쏘았습니다.
그리고 1942년 7월 20일자 《타임》 표지에 소방 헬멧을 쓴 쇼스타코비치가 실렸습니다. 1942–43 시즌 한 해 동안 미국에서만 이 곡이 62번 연주됐습니다. 여든 살 가까운 지휘자와 굶주린 도시의 악보가 라디오 전파를 타고 만난 셈입니다.
그런데 모두가 감동한 건 아닙니다. 미국 초연을 라디오로 들은 라흐마니노프가 남긴 감상은 딱 한 줄이었습니다. “자, 이제 차나 마십시다.” 평론가 버질 톰슨은 《뉴욕 헤럴드 트리뷴》에 “머리 나쁜 사람,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 딴생각하는 사람을 위해 쓴 곡 같다”고 썼고, 이런 식으로 계속 쓰면 진지한 작곡가 취급을 못 받게 될 거라고 덧붙였습니다.
양쪽 다 맞는 말이었을 겁니다. 당시 서방에는 이런 이야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음악보다 이야기가 먼저 팔렸습니다. 톰슨이 짜증을 낸 지점도 거기였을 테고요.

진혼곡, 그리고 끝까지 탁한 C장조
앞의 두 악장이 밀려오는 무언가를 다뤘다면, 뒤의 두 악장은 그것이 지나간 자리를 다룹니다. 여기서부터가 쇼스타코비치가 진짜 하려던 말에 가깝습니다.
3악장 — 거의 멈춰 선 채로 버티는 12분
목관이 길게 끄는 음으로 시작하고 호른이 그 위에 점을 찍습니다. 단순한 주제 하나가 한 번 마무리됩니다. 그러면 바이올린이 선언하듯 다른 주제를 내놓습니다. 관악기들이 현의 주제를 되받고 현이 그걸 다시 가져가 조금 바꿉니다.
중간에 속도가 붙습니다. 바이올린이 처음 주제를 들고 돌아오고 낮은 현이 같은 음형을 계속 반복하는 위에서 음악이 다급해집니다. 크게 부풀었다가, 금방 꺼집니다. 그러면 목관이 맨 처음 그 주제를 다시 꺼내고 현이 받아 갑니다. 시작한 자리로 돌아온 겁니다.
이 악장에는 볼거리가 거의 없습니다. 대신 버티는 시간이 있습니다. 많은 지휘자가 이 악장을 포위 기간에 죽은 사람들을 위한 음악으로 다루는데, 그렇게 듣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건 이 12분을 건너뛰지 않는 것입니다. 이걸 통과하고 나면 마지막 악장의 상승이 갑자기 튀어나온 기적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쌓여서 온 결과로 들립니다.
🎧 여기서 들으세요 — 첫 1분이 중요합니다. 목관이 화음을 길게 늘여 놓기만 하고 아무 데도 안 갑니다. 그 정지 상태가 이 악장의 본론입니다. ▶ 3악장부터 듣기
4악장 — 이겼다고 말하지 않는 승리
3악장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이어집니다. 현이 조용한 가락을 깝니다. 높은 현이 음을 붙들고 있고 목관이 잠깐 들어옵니다. 그러다 낮은 현이 갑자기 행진 비슷한 빠른 가락을 시작하고 바이올린과 나머지 악기가 대답합니다.
거기서부터 곡은 C장조를 향해 갑니다. C장조는 피아노 흰건반만으로 칠 수 있는, 가장 밝고 단순한 조성입니다. 교향곡이 여기서 끝난다면 보통은 승리 선언입니다.
그런데 도착하는 과정이 곧지 않습니다. 여러 조성을 돌아서 갑니다. 그리고 막상 도착한 C장조가 개운하지 않습니다. 금관이 다 터지는 마지막 대목에서도 뭔가 껄끄러운 것이 남아 있습니다. 이 탁함은 실수가 아닙니다. 쇼스타코비치가 일부러 그렇게 뒀습니다. 그래서 이 피날레에서는 환호보다 결의가 먼저 들립니다. 살아남은 사람이 짓는 표정에 가깝습니다.
지휘자마다 이 껄끄러움을 다르게 처리합니다. 밀어붙여 승리로 만드는 사람이 있고, 끝까지 남겨 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같은 악보에서 갈리는 지점이라 비교해 듣는 재미가 큽니다.
🎧 여기서 들으세요 — 마지막 화음이 끝나고 소리가 사라진 뒤 3초를 그대로 두세요. 개운한지 아닌지, 그 3초가 답을 줍니다. ▶ 4악장부터 듣기
단원 40명 중 열다섯 명
여기까지가 악보의 이야기입니다. 이제 사람 이야기입니다.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은 진작에 도시를 빠져나갔습니다. 남은 관현악단은 레닌그라드 라디오 오케스트라 하나뿐이었습니다. 이 악단의 마지막 연주는 1941년 12월 14일, 마지막 방송은 1942년 1월 1일이었습니다. 그다음 리허설 일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리허설 없음. 스라비안 사망. 페트로프 병가. 보리셰프 사망. 악단 운영 불가.”
원래 40명이던 단원 중 도시에 살아 있는 사람은 열네 명 아니면 열다섯 명이었습니다. 나머지는 굶어 죽었거나 전선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쇼스타코비치의 7번은 100명이 있어야 소리가 나는 곡입니다.
지휘자 칼 엘리아스베르크가 이 계산을 떠안았습니다. 본인부터 영양실조로 치료를 받는 중이었습니다. 그는 소집에 응답하지 않은 연주자들의 집을 하나하나 찾아다녔습니다. 조직을 도운 한 사람이 남긴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 다들 어찌나 말랐던지. 어두운 집에서 그 사람들을 끄집어냈을 때 어떻게 살아나던지. 연주복이며 바이올린이며 첼로며 플루트를 들고 나오는 걸 보고 우리는 울었습니다.”
1942년 3월의 첫 리허설은 세 시간으로 잡혀 있었습니다. 15분 만에 중단됐습니다. 악기를 들 힘이 없었습니다. 리허설 도중 쓰러지는 사람이 계속 나왔고 특히 금관 주자들이 그랬습니다. 숨을 불어넣어야 소리가 나는 악기라 그렇습니다. 관리 담당이던 야샤 바부시킨의 보고서에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제1바이올린이 죽어 갑니다. 북 치는 사람은 출근길에 죽었습니다. 호른은 사경을 헤맵니다.”
단원들에게는 추가 배급이 나갔습니다. 시민 음악 애호가들이 자기 몫을 떼어 낸 것이었습니다. 뜨겁게 달군 벽돌로 연습실 온도를 올렸습니다. 그래도 연습 기간에 세 명이 죽었습니다.
엘리아스베르크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늦거나 빠지거나 못 하면 배급을 깎았습니다. 아내 장례식에 갔다가 늦은 단원도 배급을 잃었습니다. 곡이 어렵고 와닿지도 않는데 남은 힘을 여기 쓰기 싫다고 항의한 사람들에게는 추가 배급을 끊겠다고 했고 항의는 그걸로 끝났습니다.
악기 상태도 엉망인데 고칠 사람이 없었습니다. 한 오보에 주자는 수리를 부탁했다가 고양이를 가져오라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굶주린 수리공이 이미 여러 마리를 먹은 뒤였습니다. 이런 문장을 쓰는 게 과장 같겠지만, 기록에 남아 있는 그대로입니다.
지휘자용 총보 252쪽은 쿠이비셰프에서 보급기에 실려 도시로 들어왔습니다. 파트보는 단원들이 손으로 베껴 썼습니다. 연습은 주 6일, 푸시킨 극장에서 오전 10시부터 1시까지. 공습경보가 울리면 끊겼고 어떤 단원은 연습이 끝나면 방공 임무나 소방 임무를 하러 갔습니다. 6월에 필하르모니아 홀로 자리를 옮겼고 7월 말에는 하루 5~6시간으로 늘렸습니다.
이 악단이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통과해 본 것은 딱 한 번뿐이었습니다. 8월 6일 총연습. 사흘 뒤가 본공연이었습니다.
포탄 3천 발이 만든 정적
1942년 8월 9일, 필하르모니아 대극장. 히틀러가 만찬을 예약해 둔 그 날짜입니다.
연주회 전에 레오니트 고보로프 중장이 작전 하나를 명령했습니다. 암호명 ‘스크발’, 우리말로 돌풍입니다. 소련 정보부가 몇 주에 걸쳐 독일군 포대와 관측소 위치를 찾아 뒀고 그 좌표로 대구경 포탄 3천 발을 퍼부었습니다. 목적은 두 가지였습니다. 공연장에 포격이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 그리고 음악이 들릴 만큼 조용하게 만드는 것.
고보로프는 도시 곳곳에 확성기를 달게 했고 병사들에게도 라디오로 들으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엘리아스베르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도 이 교향곡에서 우리 악기를 연주한 겁니다.” 군이 이 공연을 위해 포격 작전까지 벌였다는 이야기는 전쟁이 끝나고 한참 지나서야 알려졌습니다.
객석에는 당 간부와 군인과 시민이 들어찼습니다. 못 들어간 사람들은 열린 창문과 확성기 주변에 모였습니다. 무대 위 단원들은 옷을 몇 겹씩 껴입고 있었습니다. 굶어서 몸이 떨리는 걸 감추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연주 직전, 무대 조명이 들어왔습니다. 리허설을 시작한 이래 처음 있는 일.
연주는 잘하지 못했습니다. 그건 기록으로도 분명합니다. 후반에 몇몇 단원이 지쳐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객석이 일어섰습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그냥, 끝까지 가라고. 연주가 끝나고 박수가 한 시간 동안 이어졌습니다.
확성기는 도시 전체와 독일군 진지 쪽으로 이 연주를 내보냈습니다. 한 독일 병사는 자기 부대가 “영웅들의 교향곡을 들었다”고 회고했습니다. 훗날 엘리아스베르크는 그때 도시 밖에 있던 독일군 몇 사람을 만났는데 그들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대체 누구를 폭격하고 있었던 겁니까.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제 몸을 돌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레닌그라드를 절대 못 뺏습니다.” 엘리아스베르크 본인의 정리는 짧았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영혼 없는 나치 전쟁 기계를 이겼다.”
엘리아스베르크는 자전거를 받았고, 잊혔습니다
연습 기간에 엘리아스베르크는 걸어서 극장까지 갈 힘이 없어 썰매에 실려 다녔습니다. 보다 못한 당 간부들이 그를 극장 근처 아파트로 옮겨 주고 자전거 한 대를 줬습니다. 그가 처음 지휘봉을 들었을 때의 모습을 누군가는 “날개가 곧 떨어질 것 같은 다친 새”라고 적었습니다.
초연 뒤 그는 도시의 영웅이 됐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날 피아노를 친 니나 브론니코바와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포위가 풀리고 필하모닉이 돌아오자 자리를 잃었습니다. 1978년에 죽을 때 그는 가난하고 거의 잊힌 객원 지휘자였습니다. 초연 50주년이 되어서야 그의 유해가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 묘지로 옮겨졌습니다.
살아남은 단원들은 이후 두 차례 다시 모였습니다. 1964년 1월 27일, 포위가 풀린 날짜에 맞춘 재회 공연에 쇼스타코비치가 왔습니다. 스물두 명이 1942년과 같은 홀의 같은 자리에 앉았습니다. 빈 의자에는 악기를 놓았습니다. 그사이 죽은 사람들의 자리였습니다. 1992년 공연에는 열네 명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 곡을 어떻게 읽을지를 두고 벌어진 논쟁은 아직 안 끝났습니다. 1979년 솔로몬 볼코프가 펴낸 회고록 《증언》에는 쇼스타코비치가 이 곡을 전쟁 전부터 구상했고 “인류의 다른 적들”을 염두에 뒀다는 말이 실려 있습니다. 레닌그라드에 헌정할 때 생각한 것은 독일군에 포위된 도시가 아니라 “스탈린이 파괴하고 히틀러가 마무리했을 뿐인” 도시였다는 말도 있습니다. 다만 이 책이 정말 쇼스타코비치의 말인지는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음악학자 로럴 페이가 1980년에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한 뒤로 지금까지 논쟁 중입니다. 바이올리니스트 로스티슬라프 두빈스키가 회고록에서 1악장이 이미 한 해 전에 완성돼 있었다고 적은 것도 같은 방향의 증언이지만 이쪽도 확정된 사실은 아닙니다.
그 불확실함 덕분에 이 곡은 시대마다 다른 의미로 다시 불렸습니다. 1945년 이후 서방에서 연주 횟수가 줄었다가, 냉전이 끝나고 다시 늘었고,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에는 양쪽에서 동시에 소환됐습니다. 어떤 지휘자는 프로그램에서 뺐고, 우크라이나 쪽에서는 침략에 맞서는 음악으로 다시 꺼냈습니다. 같은 악보를 같은 해에 정반대 의미로 꺼내 쓴 겁니다.
히틀러의 만찬은 끝내 열리지 않았습니다. 아스토리아 호텔은 지금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영업 중입니다. 그날 그 도시에 남은 것은 승전 만찬이 아니라 80분짜리 연주회 하나였습니다. 잘 친 연주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날 그 도시에서 음악은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굶은 사람 100명이 같은 악보를 보고 같은 박자에 숨을 쉬었다는 사실, 그게 곧 메시지였습니다.
악보와 함께 듣기
원본 악보는 무료 악보 도서관 IMSLP에 공개돼 있습니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 Op. 60 악보 보기 (IMSLP)
어떤 연주로 시작할까
세 장을 골랐습니다. 처음 듣기 좋은 것 하나, 이 곡의 고향에서 나온 것 하나, 그리고 이 곡이 세계로 퍼져 나간 그 순간의 소리 하나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참고 자료
- Wikipedia — Symphony No. 7 (Shostakovich): 작곡 경위·편성·악장 구조·수용사
- Wikipedia — Leningrad première of Shostakovich’s Symphony No. 7: 리허설 기록·스크발 작전·초연 당일
- Wikipedia — Siege of Leningrad: 봉쇄 872일·배급량·사망자 추계
- IMSLP — Symphony No. 7, Op. 60 (총보)
- Ed Vulliamy, “Orchestral manoeuvres” — The Observer (2001): 생존 단원 인터뷰
- LA Phil — Symphony No. 7 ‘Leningrad’, Op. 60 곡목 해설
이어서 듣기 — 같은 전쟁을 통과한 악보들
7번이 좋았다면 아래 다섯 편이 이어 듣기 좋습니다. 이유는 저마다 다릅니다. 같은 작곡가가 다른 압력 아래서 쓴 곡이 둘, 같은 전쟁에 다르게 답한 곡이 하나, 그리고 끝을 어떻게 맺느냐로 싸움이 붙은 곡이 하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