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 – 레퀴엠 d단조, K.626

잔금이 걸려 있던 8마디짜리 미완성 악보

작곡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곡명
레퀴엠 d단조, K.626
(Requiem in D minor, K.626)
작곡 기간
1791년 (미완성 — 쥐스마이어 완성본이 통용)
악장
쥐스마이어 완성본 기준 8개 부분
I. Introitus (Requiem aeternam)
II. Kyrie
III. Sequentia (Dies irae · Tuba mirum · Rex tremendae · Recordare · Confutatis · Lacrymosa)
IV. Offertorium (Domine Jesu · Hostias)
V. Sanctus
VI. Benedictus
VII. Agnus Dei
VIII. Communio (Lux aeterna · Cum sanctis tuis)
편성
소프라노·알토·테너·베이스 독창, 혼성 4부 합창, 바셋혼 2(F조), 바순 2, 트럼펫 2(D조), 트롬본 3(알토·테너·베이스), 팀파니(북 2대), 바이올린, 비올라, 통주저음(첼로·콘트라베이스·오르간)
초연
1793년 1월 2일, 빈 얀 홀(Jahn’s Hall)
고트프리트 판 스비텐 남작이 콘스탄체 모차르트를 위해 연 자선 공연
연주 시간
약 50~55분

이 곡은 — 모차르트가 죽으면서 미완성으로 남긴 장례 미사곡. 마지막 곡들은 제자 쥐스마이어가 채웠습니다.

딱 하나만 듣는다면 — 라크리모사. 합창이 한 음씩 올라가며 흐느끼다가, 딱 8마디에서 모차르트의 자필 악보가 끝납니다.

첫 감상 추천 — 카를 뵘 지휘, 빈 필하모닉 (도이체 그라모폰, 1971).

1791년 여름, 낯선 남자가 모차르트의 집에 와서 죽은 사람을 위한 미사곡을 주문했습니다. 자기 이름도, 누가 시켰는지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넉 달 뒤 모차르트는 죽었고, 곡은 미완성으로 남았습니다.

여기까지가 누구나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장면을 봤다고 말한 사람은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 한 명뿐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팔릴수록 돈을 버는 사람도 콘스탄체였어요.

도라 슈토크가 그린 모차르트 실버포인트 초상 드로잉(1789)
도라 슈토크가 1789년 4월 드레스덴에서 그린 모차르트. 레퀴엠을 쓰기 두 해 전, 서른셋의 얼굴이다.

회색 외투 이야기를 처음 꺼낸 사람

영화 《아마데우스》가 굳혀 놓은 그 장면 — 정체를 숨긴 심부름꾼이 문을 두드리고, 모차르트가 겁에 질려 자기 장례곡을 쓴다 — 의 출처를 거슬러 올라가면 한 사람에게서 멈춥니다. 콘스탄체 모차르트입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심부름꾼이 왔다는 이야기도, 남편이 “이건 내 장례식을 위한 곡”이라고 중얼거렸다는 이야기도, 전부 그가 남편이 죽은 뒤에 사람들에게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는 날짜가 안 맞는 데가 있습니다. 음악 잡지 편집자 프리드리히 로흘리츠가 받아 적은 판본을 보면, 심부름꾼은 레오폴트 2세 황제가 대관식을 하러 프라하로 떠나기 한참 전에 나타납니다. 그런데 황제가 실제로 빈을 떠난 건 1791년 7월 중순입니다. 앞뒤가 맞으려면 그 사람은 이보다 훨씬 일찍 왔어야 합니다. 그런 시점의 기록은 없습니다.

콘스탄체가 거짓말을 했다고 단정하려는 말은 아닙니다. 남편이 죽었을 때 그는 스물아홉이었고, 어린아이 둘과 남편이 남긴 빚을 떠안았습니다. 천재의 마지막 곡에 얽힌 이야기는 그가 가진 자산 중에 가장 값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이야기를 들을 때 기억할 게 하나 있습니다. 유일한 출처는 그 이야기가 팔려야 살 수 있었던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남의 곡을 자기 이름으로 발표하던 백작

진짜 주문자는 프란츠 폰 발제크 백작(1763–1827)이었습니다. 빈에서 남쪽으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글로그니츠 근처, 슈투파흐 성에 살던 귀족입니다. 1791년 당시 스물여덟. 그해 2월 14일에 아내 안나를 잃었습니다. 안나는 스무 살이었습니다. 백작은 그 뒤로 다시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주문한 건 아내의 1주기 추도 미사에 쓸 음악이었습니다. 날짜까지 정해져 있었습니다. 1792년 2월 14일. 물론 그날 이 곡이 울리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냥 아내를 잃은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백작의 취미였습니다. 그는 돈을 주고 남의 곡을 사들인 다음, 자기 저택에서 연주하며 자기가 쓴 곡인 척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작품에서 그랬거든요. 이름을 숨긴 중개인을 보낸 것도 신비주의가 아니라 실무였던 셈입니다. 작곡가가 주문자를 알면 곡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알려지니까요.

모차르트가 받은 건 사례금의 절반, 선금뿐이었습니다. 나머지 절반은 완성된 악보를 넘겨야 나오는 돈이었습니다. 뒤에 벌어지는 일은 전부 이 남은 절반 때문에 굴러갑니다.

그해 여름 모차르트가 실제로 하던 일

죽을 걸 알고 진혼곡만 붙잡고 있었다는 통념. 여기엔 1791년의 일정표가 빠져 있습니다.

그해 여름 모차르트는 오페라 《마술피리》를 쓰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레오폴트 2세의 프라하 대관식에 올릴 오페라 《티토 황제의 자비》 주문이 급하게 겹쳐 들어왔습니다. 8월에는 프라하로 갔고 9월 초 《티토》 초연은 반응이 미지근했습니다. 빈으로 돌아와 9월 30일 《마술피리》를 올렸는데 이건 대성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레퀴엠은 그의 유일한 관심사가 아니라, 세 개의 마감 중 가장 급하지 않은 하나였습니다.

몸은 그 속도를 못 따라갔습니다. 10월로 넘어가면서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고 11월에는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도 힘들어졌습니다. 레퀴엠 작업이 본격적으로 속도를 낸 건 바로 이때입니다. 걸을 수 없게 되고 나서야 이 곡에 시간이 생겼습니다.

온전히 끝낸 곡은 첫 곡 하나뿐입니다

모차르트는 12월 5일에 죽었습니다. 그날 악보가 어떤 상태였는지는 오늘날 아주 정확하게 알려져 있습니다. 자필 악보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오케스트라까지 전부 적어 넣은 곡은 첫 곡 하나입니다. 그 하나뿐입니다.

I. 인트로이투스 — 유일하게 완성된 곡

인트로이투스는 미사의 문을 여는 입당송입니다. d단조, 아다지오, 4/4박자. 바순과 바셋혼이 서로 흉내 내듯 주제를 주고받으며 시작합니다. 바셋혼은 클라리넷의 사촌쯤 되는 악기인데, 소리가 클라리넷보다 어둡고 목이 잠긴 듯합니다. 모차르트는 밝은 악기를 아예 부르지 않았습니다. 이 곡에는 플루트도, 오보에도, 호른도 없습니다.

일부 음악학자는 이 도입부가 헨델의 《캐롤라인 왕비를 위한 장례 안셈》(HWV 264)에서 왔다고 봅니다. 확정된 사실은 아니고 학자들 사이의 견해입니다. 다만 모차르트가 헨델을 파고들었던 건 분명합니다. 1789년에는 빈의 후원자이자 황실 도서관장이던 판 스비텐 남작의 주문을 받아, 헨델의 《메시아》를 통째로 손봐 새 편곡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초연 무대에서 소프라노가 21마디에 “Te decet hymnus Deus in Zion”을 부를 때 나오는 선율도 빌려온 가락입니다. 루터교 찬송가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의 가락이고, 바흐도 칸타타 BWV 10에서 같은 가락을 썼습니다.

모차르트 레퀴엠 K.626 자필 악보 페이지
모차르트의 자필 악보. 이 곡에서 그가 오케스트라까지 손수 다 채운 부분은 이렇게 첫 곡뿐이다.

II. 키리에 — 네 개의 음으로 그린 십자가

쉬는 틈 없이 곧장 이어집니다. d단조, 알레그로. 푸가입니다. 한 주제를 성부들이 시차를 두고 차례로 쫓아가며 쌓는 형식인데, 이 곡은 그런 주제가 두 개 동시에 달립니다. 그런데 이 주제의 네 음을 악보 위에서 선으로 이어 보면 십자가 모양이 나옵니다. 모차르트가 발명한 장난은 아닙니다. 바흐도, 헨델도, 하이든도 쓰던 오래된 상징입니다.

주제 자체도 빌려왔습니다. 헨델의 《메시아》 중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합창에서 왔고, 거기에 맞물려 달리는 두 번째 주제는 헨델의 《데팅겐 안셈》(HWV 265) 마지막 합창에서 왔습니다. 자기 인생 마지막 작품에서 남의 주제를 두 개나 가져다 쓴 겁니다. 표절이 아닙니다. 18세기 작곡가에게 선배의 주제를 가져다 자기 방식으로 다시 짜 보이는 건 존경을 표현하는 방법이었습니다.

🎧 여기서 들으세요 — 첫 곡이 끝나고 합창이 “Kyrie eleison”으로 튀어나오는 지점입니다. 베이스가 먼저 주제를 던지고 나머지 세 성부가 차례로 올라탑니다. 넷이 서로를 쫓다 엉키기 시작합니다.

모차르트가 비올라를 켜며 들었던 레퀴엠

1772년 1월, 잘츠부르크. 미하엘 하이든의 c단조 레퀴엠이 처음 세 번 연주되는 무대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비올라를 켠 건 열대여섯 살의 모차르트였고, 바이올린을 켠 건 아버지 레오폴트였습니다. 미하엘 하이든은 요제프 하이든의 동생입니다.

19년 뒤, 죽어 가면서 자기 레퀴엠을 쓸 때 그 곡이 손에 남아 있었습니다. 두 곡의 첫 곡은 서로 닮았다는 지적을 오래 받아 왔습니다. 그리고 봉헌송의 “Quam olim Abrahae” 푸가 주제는 닮은 정도를 넘어, 미하엘 하이든의 푸가 주제를 거의 그대로 가져온 것입니다.

여기까지 오면 이 곡의 성격이 조금 달라 보입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마지막 악상 같은 게 아닙니다. 열다섯에 악단 안쪽에서 직접 켜 봤던 소리, 서른셋에 뜯어고쳤던 헨델, 어릴 때부터 부르던 찬송가 — 평생 손에 익은 것들을 죽어 가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끌어모은 결과물입니다.

진노의 날조차 뼈대뿐이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대목들조차 사실은 미완성이었다는 점이 이 곡을 더 아프게 만듭니다. 키리에부터 봉헌송까지, 모차르트는 노래 성부와 맨 아래 저음선만 적어 놨습니다. 그 위에 올라갈 오케스트라는 대부분 비어 있었습니다.

디에스 이레 — 서주 없이 첫 박부터 들이닥칩니다

d단조, 알레그로 아사이, 4/4박자. 서주가 없습니다. 합창이 첫 박부터 들이닥칩니다. 현악기는 활을 잘게 떨어 바닥을 긁고, 금관과 팀파니는 같은 화음을 계속 내리칩니다. 가사는 “진노의 날, 그날에 온 세상이 재가 되리라”입니다. 1분 40초쯤이면 끝납니다. 끝나고 나면 방금 뭔가에 얻어맞은 기분이 남습니다.

라파엘 피숑이 이끄는 고악기 악단 피그말리온의 디에스 이레. 인원을 줄인 편성이라 현악기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합창에 묻히지 않고 그대로 들린다.

투바 미룸 — 나팔을 부는 건 나팔이 아니다

B♭장조, 안단테, 2/2박자. 가사는 “나팔 소리가 온 무덤에 퍼져 나가리라”인데, 모차르트가 그 자리에 세운 악기는 트럼펫이 아니라 테너 트롬본입니다. 라틴어 ‘tuba’를 독일어권에서 부르던 이름이 ‘Posaune’, 곧 트롬본이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이 대목은 심판의 나팔처럼 울리지 않습니다. 텅 빈 방에서 누가 혼자 부는 소리에 더 가깝습니다. 트롬본 독주가 반주 없이 화음을 하나씩 밟아 올라가면, 베이스 독창이 그 선율을 거울처럼 따라 붙습니다. 그다음 테너, 알토, 소프라노가 한 명씩 들어옵니다. 네 사람이 무대에 차례로 불려 나오는 구조입니다.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투바 미룸의 트롬본 독주만 따로 보여 준다. 1분짜리 영상인데, 트롬본 주자들이 이 자리를 왜 부담스러워하는지 표정에서 읽힌다.

130마디짜리 기도와, 그 앞의 불구덩이

레퀴엠에서 진노의 날부터 라크리모사까지를 묶어 부르는 구간을 세쿠엔티아라고 합니다. 그 한가운데에 이 곡에서 가장 긴 악장이 있습니다. 레코르다레입니다. F장조, 안단테, 3/4박자, 130마디. 이 곡을 통틀어 처음으로 박자가 셋으로 갈라지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독창자 네 명이 진노의 날 가사 일곱 연을 차례로 풀어 놓습니다. 앞뒤의 소란에 비하면 여기는 거의 실내악처럼 조용합니다.

바로 뒤의 콘푸타티스는 정반대로 갑니다. a단조에서 F장조로 넘어가는 4/4박자. 남성 합창이 거칠게 밀고 들어오면 여성 합창이 그 위에 가늘게 얹힙니다. 저주받은 자들과 구원을 비는 목소리를 한 악장 안에 번갈아 붙여 놓은 구조인데, 볼륨 차이가 워낙 커서 이어폰으로 들으면 음량을 만지게 됩니다.

여기까지 전부 노래 성부와 저음선만 남아 있던 대목입니다. 우리가 듣는 관현악은 모차르트가 죽고 나서 다른 사람들이 채웠습니다.

12월 4일 밤, 의사가 한 일

12월 4일 밤, 모차르트의 상태는 손쓸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그는 방혈 치료를 받았습니다. 당시 의사들이 열병을 다루던 표준 치료가 방혈이었습니다. 2001년에 의사 한 명과 음악학자 닐 재슬로가 남은 기록을 다시 검토해 류머티즘열 쪽으로 잠정 결론을 냈습니다. 다만 이미 약해진 몸에서 피를 더 뽑은 그날 밤의 처치가 마지막 방아쇠였을 가능성을 함께 지적했습니다. 교구 기록부에 적힌 사인은 “심한 좁쌀열”입니다. 독을 먹였다는 이야기는 현대 의학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같은 시기, 그는 침대에 누운 채로 제자에게 곡을 불러 줬습니다. 프란츠 크사버 쥐스마이어. 1766년 오스트리아 슈바넨슈타트에서 태어나 크렘스뮌스터 수도원에서 음악을 배웠고, 1788년에 빈으로 올라와 모차르트의 제자이자 친구가 된 사람입니다. 프라하까지 따라갔고, 《티토 황제의 자비》에서 대사를 읊듯 처리하는 부분을 스승 대신 썼습니다. 스물다섯 살이었습니다.

헤르만 카울바흐가 그린 〈모차르트의 마지막 날들〉(1873)
헤르만 카울바흐, 〈모차르트의 마지막 날들〉(1873). 사건이 있고 80년 뒤에 그려진 상상도다 — 화가도 그 방에 없었다.

8마디에서 멈춘 손

라크리모사 — 여기까지가 모차르트입니다

d단조, 라르게토, 12/8박자. 라르게토는 느리게 가라는 뜻입니다. 현악기가 두 마디 동안 한숨 쉬듯 오르내리고, 합창이 “눈물의 날”을 부르며 들어옵니다. 한 음씩 밟아 올라가는 그 선율이 여덟 번째 마디에 닿습니다. 그리고 악보가 끝납니다.

비유가 아니라 물리적으로 그렇습니다. 자필 악보는 여기서 멈춰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그 뒤로 듣는 모든 것 — 합창이 다시 내려앉고, “아멘”으로 닫히는 마무리까지 — 은 다른 사람의 손입니다. 그러니 이 곡에서 딱 한 군데만 골라 들어야 한다면 여기입니다. 8마디를 세면서 들어 보세요. 30초쯤 됩니다. 그 30초가 서른다섯 살 모차르트가 세상에 마지막으로 적어 넣은 음악입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베를린 필하모닉이 1999년 잘츠부르크 대성당에서 연주한 라크리모사. 카라얀 10주기 추모 무대라 성당의 잔향까지 그대로 담겼다.

빈민 합동묘라는 오해

모차르트는 12월 5일 새벽에 죽었습니다. 장례를 준비한 사람은 판 스비텐 남작이었고, 《그로브 음악사전》은 12월 7일 성 밖 성 마르크스 묘지에 묻혔다고 적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 유명한 그림이 등장합니다. 폭풍우 치는 날, 아무도 따라가지 않은 관, 이름 없는 구덩이에 다른 시신들과 함께 던져지는 천재.

💡 사실은요 — 모차르트가 빈민 합동묘에 묻혔다는 이야기는 근거가 없습니다. 기록에 나오는 ‘common grave’는 ‘귀족이 아닌 시민의 묘’를 뜻하는 행정 용어이지 여럿을 한데 묻는 구덩이가 아닙니다. 개인 묘였습니다. 다만 귀족의 묘와 달리 10년이 지나면 시가 파내 다른 사람을 묻을 권리가 있었고, 그래서 위치가 사라졌습니다. 폭풍우도 사실이 아닙니다 — 빈 천문대의 12월 6일 관측 기록은 기온 2.8~3.8℃에 “하루 종일 약한 동풍”입니다.

버려지듯 묻힌 게 아니라, 귀족이 아닌 빈 시민이면 누구나 그렇게 묻혔습니다. 모차르트 자신이 요란한 장례 절차를 미신이라며 싫어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무덤이 사라진 건 음모가 아니라 행정 규정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 빈의 슈테판 대성당 외관
빈 슈테판 대성당. 모차르트의 관이 성 밖 묘지로 떠나기 전 축복을 받은 곳이다. 사진은 첨탑 보수용 발판이 서 있던 시기에 찍혔다.

잔금을 받아 내야 했던 여자

남편이 죽은 다음 주, 콘스탄체는 황제에게 과부 연금을 신청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훨씬 급한 일을 처리해야 했습니다. 발제크 백작에게 완성된 악보를 넘기는 일입니다. 넘겨야 나머지 절반이 나옵니다. 백작에게는 남편이 다 쓴 것처럼 보여야 했으니, 누가 마무리했는지는 비밀이어야 했습니다.

처음 부탁을 받은 사람은 쥐스마이어가 아니라 요제프 아이블러였습니다. 모차르트의 동료였고 실력도 있었습니다. 그는 세쿠엔티아의 관현악을 채워 나가다가 라크리모사에서 펜을 놓고 손을 뗐습니다. 8마디 다음을 자기 음표로 잇는 일을 끝내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쥐스마이어에게 넘어왔습니다. 그는 아이블러가 못 한 것을 했습니다. 스승의 스케치와 메모 — 콘스탄체가 “종이 조각들”이라고 부른 것들 — 를 긁어모아 관현악을 채웠습니다. 라크리모사의 9마디째부터는 자기 손으로 이었고, 상투스와 베네딕투스, 아뉴스 데이는 아예 새로 썼습니다. 마지막 곡에서는 첫 곡의 음악을 그대로 되가져와 붙였습니다. 스물다섯 살이 스승의 유작에 대고 한 짓치고는 대담합니다.

요제프 랑게가 그린 콘스탄체 모차르트 초상화(1782)
요제프 랑게가 그린 콘스탄체 모차르트(1782). 결혼하던 해의 그림이다. 9년 뒤 그는 남편의 미완성 악보를 팔아야 하는 처지가 된다.

1792년이라고 적어 버린 서명

완성한 악보를 백작에게 넘기며 쥐스마이어는 마지막 손질을 했습니다. 모차르트의 필체를 흉내 내 서명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날짜를 “1792”라고 적었습니다.

모차르트는 1791년에 죽었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이 이듬해 날짜로 서명한 셈입니다. 위조를 하면서 위조 대상이 언제 죽었는지를 빼먹은 거죠. 그런데 백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이 악보가 모차르트의 진짜 자필인지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자기 이름으로 발표할 물건이었으니까요.

1793년 1월 2일, 계획이 무너진 밤

발제크 백작의 계획을 무너뜨린 건 콘스탄체였습니다. 1793년 1월 2일, 빈의 얀 홀에서 이 곡이 처음으로 청중 앞에 온전히 연주됐습니다. 판 스비텐 남작이 모차르트의 미망인을 돕겠다며 연 자선 공연이었습니다.

그날 밤으로 끝났습니다. 빈 사람들은 이 곡을 모차르트의 유작으로 들었고, 백작이 무슨 이름을 내걸든 되돌릴 수 없게 됐습니다. 돈이 필요해서 이야기를 팔았던 사람이, 같은 이유로 이 곡을 모차르트의 이름에 영영 묶어 놨습니다.

다시 첫 곡으로 — 룩스 에테르나

마지막 곡에서 소프라노 독창과 합창이 “영원한 빛을 비추소서”를 부릅니다. B♭장조로 열렸다가 d단조로 돌아가는 아다지오인데, 듣다 보면 어디서 들은 음악입니다. 첫 곡입니다. 곡의 처음과 끝이 같은 음악으로 닫힙니다.

이걸 결정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모차르트가 침대에서 그렇게 하라고 말했을 수도 있고, 쥐스마이어가 채울 재료가 없어서 앞의 것을 되가져왔을 수도 있습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얄궂습니다. 이 곡을 다 듣고 나면 완결감이 듭니다. 그 감정은 정확히 모차르트가 혼자 다 쓴 그 부분에서 나옵니다.

어디까지가 모차르트인가 — 끝나지 않는 논쟁

1960년대에 “아멘” 푸가 스케치 한 장이 발견됐습니다. 로버트 레빈과 리처드 마운더 같은 학자들은 모차르트가 세쿠엔티아를 이 푸가로 닫으려 했다고 봅니다. 각 큰 단락을 푸가로 마무리하는 설계가 곡 전체에 깔려 있으니 앞뒤가 맞는다는 겁니다. 쥐스마이어는 그걸 넣지 않았습니다. 몰랐는지 무시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1970년대부터 쥐스마이어 판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자기 완성본을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리처드 마운더(1988)는 쥐스마이어가 쓴 부분을 대부분 걷어냈고, H. C. 로빈스 랜던(1991~92)은 아이블러의 작업이 더 믿을 만하다고 보고 그쪽을 살렸습니다. 로버트 레빈(1993)은 쥐스마이어의 뼈대를 남기되 성부 진행을 손봤습니다. 그 뒤로도 계속 나옵니다. 2006년 이후에 나온 것만 열다섯 종이 넘습니다.

그런데 연주회장에서 실제로 울리는 건 대체로 쥐스마이어 판입니다. 학술적으로 가장 많이 두들겨 맞은 판본이 200년 넘게 무대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쥐스마이어는 그 방에 있었습니다. 죽어 가는 모차르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직접 들은 사람은 쥐스마이어 하나뿐입니다. 나머지는 전부 악보를 보고 추론한 결과입니다. 미완성인 채로 남은 곡이 완성본 스무 개보다 오래 살아남았습니다.

악보와 함께 듣기

쥐스마이어 판 전곡을 악보와 함께 따라가는 영상. 라크리모사 8마디가 지나가는 자리를 눈으로 확인하기에 가장 좋다.

원본 악보는 무료 악보 도서관 IMSLP에 공개돼 있습니다. 레퀴엠 d단조 K.626 악보 보기 (IMSLP)

어떤 연주로 시작할까

이 곡은 판본과 편성에 따라 완전히 다른 물건이 됩니다. 성당을 통째로 울리는 대편성과, 열댓 명이 방 안에서 하는 연주가 같은 악보에서 나옵니다. 세 장은 그 폭을 보여 주려고 골랐습니다.

👑 첫 감상 추천

카를 뵘 · 빈 필하모닉

도이체 그라모폰 · 1971

처음 듣는 사람이 길을 잃지 않는 연주입니다. 템포가 느긋해서 성부가 겹치는 자리가 다 들립니다. 다만 요즘 고악기 연주에 익숙한 귀에는 무겁고 굼뜨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레퍼런스

존 엘리엇 가디너 · 몬테베르디 합창단, 잉글리시 바로크 솔로이스츠

필립스 · 1987

18세기 악기로 돌아간 연주의 기준점입니다. 합창의 자음이 또렷해서 가사가 들립니다. 뵘의 두툼한 소리를 기대했다면 처음엔 야위게 들립니다.

와일드카드

르네 야콥스 · RIAS 실내합창단, 프라이부르크 바로크 오케스트라

아르모니아 문디 · 2017

이 곡을 이미 여러 번 들어서 지겨워진 사람에게 맞습니다. 강약과 속도를 과감하게 밀고 당겨서, 익숙한 대목마다 한 번씩 멈칫하게 만듭니다. 정통을 원한다면 피하는 게 좋습니다.

모차르트가 직접 쓴 부분은 어디까지인가요?

오케스트라까지 전부 끝낸 곡은 첫 곡인 인트로이투스 하나입니다. 키리에부터 봉헌송까지는 노래 성부와 저음선만 적힌 뼈대 상태였고, 그 위의 관현악은 아이블러와 쥐스마이어가 채웠습니다. 라크리모사는 8마디에서 끊깁니다. 상투스·베네딕투스·아뉴스 데이는 모차르트의 자필 악보에 아예 없습니다. 다만 병상에서 구두로 지시를 남겼거나 지금은 사라진 메모가 있었을 가능성은 학자들 사이에서 여전히 논쟁 중입니다.

모차르트는 정말 이 곡이 자기 장례식을 위한 곡이라고 믿었나요?

확인된 사실이라기보다 후대에 전해진 이야기로 보는 시각이 오늘날 일반적입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심부름꾼이 왔다는 이야기를 포함해, 이 모든 이야기의 출처는 아내 콘스탄체의 회고입니다. 남편이 죽은 뒤 빚과 두 아이를 떠안은 처지에서 나온 증언이라는 점, 그리고 전해진 판본의 날짜가 실제 기록과 어긋난다는 점 때문에 그대로 믿기는 어렵습니다. 독살설도 현대 의학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모차르트의 사인은 무엇인가요?

교구 기록부에는 “심한 좁쌀열”로 적혀 있습니다. 2001년에 의사와 음악학자 닐 재슬로가 남은 기록을 검토해 류머티즘열 쪽으로 잠정 결론을 냈지만 200년 전 기록만으로 확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사망 전날인 1791년 12월 4일 밤에 받은 방혈 치료가 상태를 결정적으로 악화시켰을 가능성도 함께 거론됩니다.

모차르트는 빈민 합동묘에 묻혔나요?

아닙니다. 널리 퍼진 오해입니다. 기록의 ‘common grave’는 귀족이 아닌 시민의 묘를 가리키는 행정 용어이고, 여럿을 한꺼번에 묻는 구덩이가 아니라 개인 묘였습니다. 당시 빈에서는 귀족이 아니면 누구나 그렇게 묻혔습니다. 다만 이런 묘는 10년이 지나면 시가 파내 재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가 남지 않았습니다. 장례 당일 폭풍우가 몰아쳤다는 이야기도 빈 천문대의 기상 기록과 맞지 않습니다.

초연은 언제였고, 연주 시간은 어느 정도인가요?

1793년 1월 2일, 빈의 얀 홀에서 처음 온전히 연주됐습니다. 판 스비텐 남작이 콘스탄체를 돕기 위해 연 자선 공연이었습니다. 연주 시간은 판본과 지휘자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50~55분입니다. 쥐스마이어 완성본 기준으로 전체는 여덟 개 부분으로 나뉘고, 그 안이 다시 여러 곡으로 갈립니다.

참고 자료

이어서 듣기 — 마지막에 쓴 곡, 마지막이 된 곡

이 곡이 남긴 감정은 두 갈래로 이어집니다. 하나는 죽음을 다룬 다른 진혼곡들, 다른 하나는 작곡가의 마지막과 얽혀 버린 작품들입니다. 다섯 편 모두 이유가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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