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 b단조 미사 BWV 232 — 궁정 취업용 Kyrie가 최후의 대작이 되기까지

청탁서·짜깁기·109년 침묵

작곡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
곡명
B단조 미사, BWV 232
(Mass in B minor)
작곡 기간
1733년 (Kyrie+Gloria) ~ 1748–49년 (전곡 완성)
악장
4부 27곡

I. Missa (Kyrie + Gloria)
II. Symbolum Nicenum (Credo)
III. Sanctus
IV. Osanna · Benedictus · Agnus Dei · Dona nobis pacem
편성
5성 합창 · 5명 독창
플루트 2, 오보에 2 (오보에 다모레 포함), 바순 2
호른 1 (코르노 다 카치아), 트럼펫 3
팀파니
현5부, 통주저음
연주 시간
약 1시간 50분
전곡 초연
1859년 4월 12일, 라이프치히
카를 리델 지휘 리델-페어아인
헌정
1733년 부분 헌정 (Kyrie+Gloria만)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 3세

바흐가 작명한 게 아닙니다. ‘미사 in B단조’라는 제목은 작곡자가 죽고 95년이 지난 1845년, 취리히의 Nägeli와 본의 Simrock 두 출판사가 합작해 첫 곡 조성을 멋대로 따다 붙인 이름이거든요. 27곡 중 B단조는 단 5곡, 가장 많은 D장조가 12곡인데도 그렇게 굳어졌어요.

제목부터가 거짓말이죠. 그리고 이건 이 곡이 품은 거짓말 중 가장 작은 것일 뿐입니다. 청탁, 짜깁기, 죽기 직전의 봉인, 109년의 침묵 — 한 꺼풀씩 벗겨 보면 우리가 ‘클래식의 정점’이라 부르는 이 곡의 진짜 얼굴이 보일까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초상화
우리가 ‘음악의 아버지’라 부르는 바흐. 정작 1733년의 그는 시의회에 시달리던 한 명의 중년 칸토르였어요.

1733년 7월, 한 줄로 가려진 진짜 사연

한국어 해설지가 늘 한 줄로 처리하는 문장이 있습니다. “1733년, 바흐는 작센 선제후에게 미사를 헌정했다.” 이 깔끔한 한 줄이 거의 모든 걸 가려 버려요. 그 뒤에 뭐가 숨어 있는지부터 보지요.

헌정한 건 미사가 아니라 두 곡뿐

바흐가 1733년 7월 27일 드레스덴에 보낸 건 ‘미사’ 전체가 아니었습니다. Kyrie와 Gloria, 딱 두 곡. 나머지 25곡은 그때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어요.

그리고 이 두 곡을 ‘어떻게’ 보냈는지가 결정적입니다. 21개 파트보를 자비로 필사하고, 자비로 제본해서 부쳤거든요. 라이프치히 토마스교회 칸토르 월급으로는 결코 가벼운 지출이 아니었습니다. 그만큼 절박했다는 뜻이지요.

음악 헌사가 아닌 취업 청탁서

같이 보낸 청원서를 펴 보면 ‘예술적 봉헌’ 같은 단어는 한 줄도 없습니다. 본문은 차라리 단호해요. “Hofkomponist 직함을 내려주시기를 가장 비천한 마음으로 간청드립니다.”

음악 헌사가 아닙니다. 취업 청탁이죠. 더 정확히 말하면, 라이프치히 시당국과 한창 갈등 중이던 칸토르가 외부 직함을 따서 시의회를 압박할 카드를 만들고 싶었던 겁니다. 실제로 1730년 시의회에 보낸 ‘Entwurff’ 편지에서 바흐는 라이프치히 음악 환경이 처참하다고 대놓고 적었거든요. 외부 직함은 그 진흙탕 싸움의 협상 카드였던 셈입니다.

3년 4개월간 오지 않은 답장

당시 바흐 나이 마흔여덟. 이 정도 거장이면 즉답이 와야 정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현실은 달랐어요. 답장은 1736년 11월 19일에야 도착합니다. 무려 3년 4개월 뒤였지요.

그 3년 사이 바흐는 두 번이나 직접 드레스덴을 찾아갑니다. 다시 가서 “그 청원 어떻게 됐습니까” 물어야 하는 처지에 선 거예요. ‘음악의 아버지’라는 후대의 호칭이 무색해지는 모양새입니다.

받아낸 직함도 빛 좋은 개살구였습니다. ‘Compositeur bey Dero Hoff-Capelle’ — 궁정악장이 아니라 “궁정악단 산하 작곡가”. 월급도 없고, 드레스덴에 출근하지도 않아요. 그저 명함 위에 박힌 한 줄. 그걸 받겠다고 3년을 매달린 겁니다.

가톨릭 군주에게 보낸 루터교 신자의 미사

여기서 한 겹이 더 꼬입니다. 헌정 대상인 아우구스트 3세는 가톨릭이었어요. 폴란드 왕위를 잇기 위해 아버지 강건왕 시절(1697)부터 작센 통치 가문이 통째로 가톨릭으로 개종한 상태였거든요.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 3세 초상화
헌정을 받은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 3세. 가톨릭 군주였고, 바흐의 청원엔 3년 넘게 답이 없었지요.

그런데 작센 영토 자체는 여전히 루터교였습니다. 군주는 가톨릭, 신민은 루터교. 이 엇갈린 종교 풍경 속에서, 평생 루터교 신자였던 바흐가 가톨릭 미사 통상문(Ordinary)을 정확히 가톨릭 군주에게 골라 보낸 거예요.

“미사 통상문은 루터교에서도 일부 쓰인다”는 익숙한 변호가 있죠. 맞는 말입니다. 다만 이 정도 길이로, 이 정도 정성으로, 이 정도로 가톨릭 양식에 충실하게 쓴 사례는 루터교 전통에 없었어요. 청탁이 보낸 종교적 신호는 충분히 또렷했던 까닭입니다.

덧붙이면, 1733년 2월 1일 강건왕 아우구스트 2세가 사망합니다. 새 선제후가 즉위하면서 작센 전역에 5개월간 국상이 선포되고, 공공 음악이 멈췄어요. 라이프치히도 똑같이 침묵에 잠겼고요. 학자들은 바로 이 침묵의 5개월 동안 바흐가 Kyrie와 Gloria를 썼으리라 봅니다. 연주할 곡이 없으니 시간이 남아돌았으니까요.

드레스덴은 바흐를 원하지 않았다

왜 답장이 3년이나 늦었을까요. 답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드레스덴 궁정 입장에서 바흐는 그렇게 탐나는 카드가 아니었던 거예요. 그 자리엔 이미 더 큰 이름들이 앉아 있었거든요.

드레스덴의 진짜 스타, 하세

1733년 드레스덴 궁정 음악계의 1인자는 요한 아돌프 하세였습니다. 오페라계의 슈퍼스타. 베네치아와 나폴리에서 명성을 쌓고 드레스덴에 합류한 인물이었고, 선제후 부부가 대놓고 아끼던 작곡가였지요.

작곡가 요한 아돌프 하세 초상화
18세기엔 ‘Hasse’가 ‘Bach’보다 훨씬 큰 이름이었어요. 지금 우리가 거꾸로 기억할 뿐이고요.

그의 부인은 이탈리아 메조소프라노 파우스티나 보르도니, 당시 유럽 최고의 디바였습니다. 부부가 나란히 드레스덴 무대를 장악하던 시기였죠. 18세기 음악사에서 ‘Hasse’는 ‘Bach’를 한참 압도하는 이름이었어요. 그 무게추가 19세기에 통째로 뒤집혔을 뿐입니다.

2인자는 가톨릭 미사의 전문가 첼렌카

2인자는 보헤미아 출신 얀 디스마스 첼렌카였습니다. 가톨릭 종교음악 전문에, 1710년대부터 드레스덴 궁정 콘트라베이스 주자로 일해 온 내부 인사. 바흐처럼 갓 노크한 외부인이 아니었어요.

가톨릭 미사 작곡 경력만 따져도 첼렌카는 바흐와 비교 자체가 안 됐습니다. 미사 21곡, 레퀴엠 3곡, 시편 다수. 드레스덴 궁정 가톨릭 예배당에서 매주 자기 곡이 울리던 사람이었거든요.

1723년 작곡한 《Missa Sancti Spiritus》만 봐도 그래요. 그 무렵부터 첼렌카의 미사는 드레스덴 가톨릭 예배당의 단골 레퍼토리였고, 1733년이면 이미 십수 곡이 무대에 오른 뒤였습니다. 바흐가 두 곡짜리 ‘Missa’를 부쳤을 때, 드레스덴이 받은 인상은 “거장 신곡 도착”이 아니라 “또 미사 한 사람”에 가까웠던 거죠.

객원 신청자에 가까웠던 바흐

이 구도에서 바흐의 자리는 명확합니다. 외부 객원 신청자, 그것도 2~3순위. 라이프치히에서 일하는 루터교 신자가 가톨릭 군주의 궁정에 자기를 끼워달라고 청한 형국이었어요. 받아준 것 자체가 너그러운 처사였던 셈이지요.

‘음악의 아버지’라는 호칭은 19세기 독일 민족주의가 빚어낸 신화입니다. 1730년대의 실제 바흐는 라이프치히 시의회에 시달리고, 드레스덴 궁정에 무시당하고, 함부르크 자리에도 떨어진 한 명의 중년 칸토르였어요. 그 사실을 빼고는 1733년 헌정의 의미가 끝내 보이질 않습니다.

16년의 공백, 그리고 죽기 직전의 짜깁기

1733년에 두 곡을 보내고, 1736년에 명함만 받고, 그 뒤로 16년이 흘렀습니다. 바흐는 이 곡을 잊은 듯 살았어요. 칸타타 수백 곡을 새로 쓰고, 《푸가의 기법》을 다듬고,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출판하는 동안 이 미사는 책상 서랍에서 묵고 있었거든요.

그러다 1748년경, 죽기 1~2년 전에 갑자기 다시 꺼냅니다. 시력은 거의 잃었고 손은 떨리던 시기였어요. 그런 몸으로 27곡짜리 거대한 미사를 완성합니다. 어떻게 그 짧은 기간에 그 분량을 채웠을까요? 답은 의외로 허탈해요. 새로 쓰지 않았거든요. 옛날 곡들을 끌어다 짜깁기한 겁니다.

Crucifixus의 출처는 34년 전 칸타타

가장 유명한 곡 중 하나인 Crucifixus를 봅시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노래하는, 깊고 무거운 합창. 이 곡의 원본은 1714년 바이마르에서 쓴 칸타타 BWV 12 《Weinen, Klagen, Sorgen, Zagen》의 첫 합창입니다.

이 칸타타가 어떤 곡인지 잠깐 보면 의미가 또렷해져요. 1714년 4월 22일, 부활절 3주 후 ‘Jubilate’ 일요일 예배용으로 쓴 곡입니다. 그해 3월 바흐는 바이마르 궁정에서 콘체르트마이스터로 막 승진해 매달 칸타타를 한 곡씩 의무적으로 써내던 시기였어요. 그 의무 속에서 빚어진 스물아홉 살 청년기의 합창이지요.

반음씩 내려가는 그 4마디 바소 오스티나토가 거의 그대로입니다. 34년을 묵힌 베이스 라인을 미사 한복판에 그대로 박아 넣은 거예요. 가사만 ‘Weinen Klagen’에서 ‘Crucifixus’로 갈아 끼웠을 뿐, 음악의 골격은 같은 곡이지요.

이런 사례가 한두 곡이 아닙니다. Patrem omnipotentem은 BWV 171에서, Gratias agimus는 BWV 29에서, Qui tollis는 BWV 46에서 끌어왔어요. 학자들은 27곡 중 16~18곡이 기존 곡 재활용이라고 봅니다. 미사의 60% 이상이 옛 곡의 짜깁기라는 계산이 나오는 셈이고요.

마지막 곡과 8번 곡은 같은 음악

27곡 중 가장 마지막에 놓인 Dona nobis pacem.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로 끝맺는 장엄한 합창이지요. 그런데 이 곡, 8번째 곡 Gratias agimus tibi와 음악이 동일합니다. 가사만 다르게 붙였을 뿐 음표는 똑같아요.

학계의 공식 해석은 “회귀 구조의 천재성”입니다. 시작과 끝이 같은 음악으로 묶이며 미사 전체가 하나의 원환을 이룬다는 거죠. 그럴듯한 설명이에요.

덜 그럴듯한 해석도 가능합니다. 시간이 없었다, 새로 쓸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같은 곡을 두 번 썼다. 어느 쪽이 더 정직한지는 듣는 사람 몫이지만, 핵심은 이 두 해석이 동시에 옳을 수 있다는 점이에요. 천재의 회귀 구조이면서, 마감에 쫓긴 노대가의 처리법. 둘 다 진실일 수 있거든요.

Et incarnatus est, 떨리는 손글씨가 남긴 증거

그럼에도 완전히 새로 쓴 곡이 한 곡 있습니다. Credo 안에 박힌 ‘Et incarnatus est’ — “성령으로 잉태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죽기 1년 전쯤 작곡한 것으로 추정되는, 바흐 생애 마지막 합창 중 하나예요.

바흐 B단조 미사 Et incarnatus est 자필 악보
‘Et incarnatus est’ 자필 악보. 흔들리는 음자리표와 번진 잉크가 시력을 잃어 가던 손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어요.

1989년 일본 학자 고바야시 요시타케가 베를린 국립도서관 소장 자필 악보(Mus. ms. Bach P 180)를 정밀 분석했습니다. 결과는 잔혹했어요. 음표 간격이 들쭉날쭉하고, 잉크가 번지고, 음자리표가 흔들리고 있었거든요. 시력 상실의 직접 증거였지요.

고바야시는 단순히 “글씨가 떨린다”는 인상을 넘어섰습니다. 음표 머리의 크기 변동, 음자리표의 기울기, 페이지 아래로 갈수록 좁아지는 음표 간격까지 추적했어요. 시력이 꺼져 가는 사람의 손이 종이 위에서 어떻게 무너지는지가 고스란히 기록된 페이지였습니다. 글씨체가 아니라 시력의 시간선을 읽어 낸 분석이지요.

더 인상적인 대목이 있어요. 이 곡은 원래 따로 존재하던 곡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가사 ‘Et incarnatus est’는 본래 바로 앞 곡 ‘Et in unum Dominum’ 이중창 안에 들어 있었거든요. 바흐는 죽기 직전에 그 가사를 떼어내 별도 합창으로 새로 썼습니다. 27곡 구조 자체가 만년의 재구성이라는 뜻이고요.

참고로 이 P 180 자필 악보는 지금도 잉크가 종이를 갉아먹는 ‘iron gall ink corrosion’이 진행 중입니다.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의 결정적 근거가 됐어요. 곡도 사람도 종이도, 천천히 무너지면서 동시에 살아남는 중인 셈이지요.

자기 곡을 한 번도 듣지 못한 사람

1750년 7월 28일, 바흐는 라이프치히에서 눈을 감습니다. 미사를 완성한 지 1년쯤 지났을 때였어요. 그가 살아서 들은 이 곡은 단 한 곡, Sanctus뿐이었습니다.

살아서 들은 건 Sanctus 한 곡

Sanctus는 1724년 라이프치히 크리스마스 예배에서 단독으로 연주됐습니다. 그게 전부예요. Kyrie도, Gloria도, Credo도, 마지막 Dona nobis pacem도 바흐는 자기 귀로 들은 적이 없거든요. 끝까지 종이 위에서만 존재한 곡이었던 거죠.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 외관
바흐가 27년간 칸토르로 일한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 Sanctus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의 귀에 닿은 곳이지요.

그리고 이건 단순한 비극이 아닙니다. 이 미사는 처음부터 연주가 불가능한 길이로 설계됐어요. 약 1시간 50분에서 2시간. 동시대 가톨릭 미사 평균이 20분에서 40분 사이였으니, 3배에서 6배 깁니다. 어느 교회도 이 미사를 실제 전례에 쓸 수 없었어요.

비극과 게으름, 그 사이 어딘가

여기서 솔직하게 물어볼 만합니다. 바흐는 정말 이 곡을 듣고 싶었을까요. 듣고 싶었다면 애초에 연주 가능한 길이로 썼을 겁니다. 짧게 잘라 부분 연주라도 시도했겠지요.

그런데 안 했어요. 본인이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이걸 그저 비극으로만 읽으면 작곡가의 의도를 놓치게 돼요. 이 미사는 어쩌면 처음부터 ‘내 사후 평판용’으로 설계된 작품이었을지 모릅니다. 살아서 못 들은 게 아니라, 살아서 들을 생각이 애초에 없었던 거예요.

비극이라는 단어는 너무 쉬운 답입니다. 게으름이라는 단어는 너무 가혹하고요. 진실은 그 사이 어딘가에 있겠지요. 죽음을 앞둔 노대가가 자기 음악 전체를 정리하면서, 이 거대한 미사를 마지막 자리에 놓고 종이 위에 봉인한 것 — 그게 더 정확한 그림에 가깝습니다.

109년 침묵의 진짜 이유

바흐가 1750년에 죽고, 전곡 초연은 1859년에야 이뤄집니다. 109년의 공백. 이 침묵을 단순한 망각으로 읽으면 오해예요. 상당 부분은 의도된 침묵이었거든요.

아들이 라벨을 숨긴 1786년 연주

아버지 사후 36년 만인 1786년 4월 4일, 둘째 아들 C.P.E. 바흐가 함부르크 자선 콘서트에서 Credo 부분만 발췌해 연주합니다. 이게 사후 첫 공개 연주였어요. 그런데 프로그램에는 ‘바흐 미사’라는 라벨이 붙지 않았습니다. 그저 ‘신경(信經)’ 한 곡으로 소개됐을 뿐이지요.

왜 라벨을 숨겼을까요. 1786년 함부르크는 개신교 도시였거든요. 가톨릭 미사 통상문을 그대로 연주한다는 사실은 정치적으로 거북했던 겁니다. 아들 입장에선 아버지 곡이 묻히는 한이 있어도 ‘미사’라는 단어만큼은 피해야 했어요.

멘델스존조차 외면한 곡

1829년, 스무 살의 멘델스존이 베를린에서 마태수난곡을 부활시킵니다. 바흐 사후 79년 만의 첫 부활이자 음악사의 결정적 순간이었지요. 그 기세라면 다음 카드로 곧장 B단조 미사를 꺼냈을 법한데, 현실은 달랐어요.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멘델스존의 스승 첼터의 편지에 남아 있어요. 1827년 첼터가 괴테에게 보낸 한 줄. “이 곡은 너무 가톨릭적이라 독일 청중에 안 맞는다.” 베를린 징아카데미 도서관엔 18세기 후반부터 부분 사보가 있었지만, 학습용으로만 돌았고 공개 연주는 의도적으로 미뤄졌거든요.

마태수난곡은 살리고 B단조 미사는 묻은 까닭이 그겁니다. 마태수난곡은 루터교 정서에 정확히 들어맞는 독일어 텍스트였어요. 반면 B단조 미사는 가톨릭 라틴어 통상문이었고, 강한 민족·종교 색채를 띠던 19세기 독일 음악계엔 좀처럼 어울리지 않았지요. 첼터의 짧은 한 줄이 결국 30년의 침묵을 더 보태고 만 셈입니다.

출판가가 27년을 기다린 곡

한 가지 더 보태지요. 1818년, 취리히의 한스 게오르크 네겔리가 직접 이 미사를 출판하겠다며 구독자 모집 광고를 냅니다. 출판가 쪽엔 분명 의지가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그 광고와 1845년 첫 출판 사이에 다시 27년이 흘렀어요.

의지가 있어도 시장이 따라오질 않았던 겁니다. 가톨릭 라틴어로 된 2시간짜리 합창곡을 사 줄 19세기 초 독일어권 구독자가 과연 몇이나 됐을까요. 네겔리는 1836년 세상을 떠났고, 그가 시작한 일은 결국 본의 짐로크와 합작 형태로 1845년에야 책이 됩니다. 자필 악보가 활자가 되기까지 95년, 광고가 책이 되기까지 27년이 더 필요했어요.

첫 삽을 뜬 사람은 비단 상인

1859년 4월 12일, 마침내 라이프치히에서 전곡 초연이 열립니다. 지휘자는 카를 리델. 그런데 이 사람의 이력이 묘해요. 직업 음악가 출신이 아니거든요. 본업은 비단 무역상이었습니다. 낮엔 비단으로 돈을 벌고, 취미로 합창단을 이끌던 아마추어 지도자였지요.

유럽 직업 음악계가 109년간 손도 안 댄 곡을, 비단 상인 한 명이 자기 합창단을 끌고 처음 무대에 올린 겁니다. 그것도 일부 악장을 잘라낸 단축본으로요. 전곡 무삭제 초연은 그 뒤로도 한참을 더 기다려야 했고요.

‘클래식의 정점’ ‘바흐의 영적 유언’ 같은 호칭은 전부 이 1859년 이후, 19세기 후반에 형성됩니다. 그 전까지 이 곡은 그저 너무 길고, 너무 가톨릭적이고, 너무 어려운 짜깁기 미사였어요. 호칭의 무게는 곡 자체가 만든 게 아니라, 후대가 130년에 걸쳐 천천히 발라 준 옻칠인 까닭입니다.

그럼에도 165년을 살아남은 곡

여기까지 읽고 나면 이 곡을 들을 마음이 싹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청탁용에 짜깁기에, 정작 작곡가는 못 들은 곡. 무슨 영적 유언이냐고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막상 1859년 이후의 165년간, 이 누더기는 끈질기게 살아남았어요. 카라얀이 녹음했고, 헤레베헤가 녹음했고, 리프킨이 녹음했고, 일본의 스즈키도 녹음했습니다. 해마다 부활절 즈음이면 지구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이 2시간짜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하지요.

바흐가 일하던 바로 그 성 토마스 교회에서 울린 전곡. 토마너코어와 게반트하우스오케스터의 실연이지요.

이유는 의외로 단순합니다. 짜깁기여도 그 34년 묵힌 합창 한 곡이 진짜로 좋고, 청탁용 Kyrie여도 그 도입부 화음이 정말로 깊고, 마감에 쫓겨 처리한 Dona nobis pacem이어도 그 회귀의 무게가 실제로 가슴을 누르거든요. ‘천재의 영적 유언’이라는 신화를 다 벗겨 내도, 곡 자체에 남는 무게가 분명히 있는 겁니다.

오히려 신화 없이 듣는 쪽이 더 정직한 감상법이에요. 청탁이고 짜깁기여도 좋은 건 좋은 거고, 좋은 까닭은 작곡가가 천재여서가 아니라 그가 평생 쌓아 올린 34년치 합창 음악이 끝내 한 곳에 모여서니까요. 신화를 걷어 내면, 곡이 외려 더 잘 들립니다.

구체적인 권유 하나 보태자면, 부활절 직전 토요일 늦은 오후가 가장 잘 어울립니다. 도시 소음이 살짝 가라앉고 해는 길어지는 그 시간대. Kyrie 첫 화음을 켜 놓고 식탁 정리든 빨래든 천천히 해 보세요. 짜깁기든 청탁이든 미완이든, 다 잠깐 잊힙니다. 천재 신화도 같이 잊히고요. 종이 위에 봉인됐던 음악이 275년 만에 거실에 풀려나는 그 감각 — 그게 이 곡이 165년을 살아남은 이유입니다.

먼저 들어 볼 세 가지 연주

편파 리뷰입니다. 객관적 나열이 아니라, 실제로 무엇을 먼저 켤지 고르는 글이에요.

  • 필리프 헤레베헤 / 콜레기움 보칼레 헨트 — 역사주의 정통의 정점입니다. 18세기 연주 환경에 가까운 시대악기·소규모 편성으로 곡의 결을 가장 정직하게 보여줘요. 처음 한 장만 고른다면 여기서 시작하는 게 합리적이고요. 단, 화려한 스펙터클을 기대하는 분께는 다소 담백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 조슈아 리프킨 / 바흐 앙상블 (OVPP) — 합창단 없이 파트마다 한 명씩, 솔로 다섯에 오케스트라만으로 녹음해 학계를 발칵 뒤집은 실험이에요. 처음엔 황당, 두 번째엔 납득. 18세기 실제 연주 규모에 가장 가까운 가설입니다. 풍성한 합창의 울림을 원하는 분께는 안 맞고요.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베를린 필 (1974) — 거대 낭만주의의 끝판이지요. 완벽하게 다듬어졌고, 바로 그 완벽함 때문에 바흐가 듣고 싶었을 소리와는 거리가 멉니다. 정답이 아니라 안티테제로 들으면 진가가 보여요.
첫 한 장으로 권하는 헤레베헤의 실연. 담백함이 곧 정직함인 연주예요.

악보와 함께 듣기

네덜란드 바흐 소사이어티의 ‘All of Bach’ 프로젝트가 전곡 연주 영상을 무료로 공개해 두었어요. 상단 플레이어에서 그 영상을 바로 켤 수 있으니, 아래 IMSLP 악보를 띄워 두고 마디를 따라가며 들으시면 짜깁기의 솔기가 눈에 보이기 시작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이 곡이 2시간이나 되는데 끝까지 들어야 하나요?

처음부터 한 번에 통째로 듣는 건 권하지 않습니다. 4부 구조(Missa / Credo / Sanctus / Agnus Dei)로 나눠 한 부씩 끊어 듣는 편이 훨씬 나아요. 첫 진입은 Kyrie 1악장과 Sanctus 두 곡이면 충분합니다. 익숙해진 뒤 Credo로 넘어가고, 마지막에 전곡을 통으로 들으면 시작과 끝의 회귀 구조가 비로소 들리거든요.

‘미사 in B단조’인데 B단조 곡이 5개뿐이라는 게 무슨 소리인가요?

바흐가 붙인 제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흐는 이 곡 전체에 통일된 제목을 달지 않았어요. 1845년 취리히의 Nägeli와 본의 Simrock 두 출판사가 합작해 첫 곡인 Kyrie의 조성(B단조)을 따 ‘Hohe Messe in H-moll’이라 이름 붙였고, 그 작명이 굳어졌습니다. 실제로 27곡 중 B단조는 5곡뿐이고, 가장 많은 조성은 D장조로 12곡이지요.

바흐가 자기 곡을 그렇게 많이 재활용한 건 표절 아닌가요?

18세기 기준으로는 표절이 아닙니다. 당시엔 ‘패러디(parodia)’라는 용어로 정식 작곡 기법으로 인정됐어요. 자기 곡을 가져와 다른 가사·맥락에 맞게 재구성하는 방식이지요. 헨델도 텔레만도 자주 했습니다. 다만 ‘천재의 셀프 리메이크’라는 미화는 19세기 신화이고, 실제 동기엔 시간 부족·시력 상실 같은 현실적 요인이 컸다는 게 최근 학계의 시각이고요.

루터교 신자였던 바흐가 왜 가톨릭 미사를 작곡했나요?

헌정 대상이 가톨릭 군주였기 때문입니다.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 3세는 폴란드 왕위를 잇기 위해 가문 대대로 가톨릭으로 개종한 상태였어요. 바흐는 그 군주에게 직위를 청탁하면서, 가톨릭 양식의 미사 통상문(Kyrie+Gloria)을 1733년에 헌정했습니다. 종교적 신념의 표현이라기보다 정치·경력 차원의 선택이었던 거죠.

카라얀 녹음과 헤레베헤 녹음 중 어느 쪽으로 시작해야 하나요?

처음이라면 헤레베헤를 권합니다. 18세기 연주 환경에 가까운 시대악기·소규모 편성으로 곡의 결을 가장 정직하게 보여줘요. 카라얀 1974년 녹음은 거대 낭만주의 미학의 정점이지만 바흐의 의도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헤레베헤로 곡을 익힌 뒤 비교 감상으로 카라얀을 듣는 순서가 가장 합리적이에요.

바흐의 다른 방으로 이어지는 문

한 곡의 진짜 얼굴은 옆방의 곡들과 나란히 놓일 때 더 또렷해지거든요. B단조 미사의 청탁·짜깁기·침묵을 따라왔다면, 같은 손이 빚은 다른 음악과 같은 장르의 거대 합창들도 함께 들어 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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