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곡가
- 프레데리크 쇼팽
(Frédéric Chopin, 1810~1849) - 작품명
- 야상곡 E♭장조 Op.9 No.2
- 작곡 연도
- 1830~1831년
- 출판
- 1832년 라이프치히 (파리·런던 1833년)
- 악장 구성
- 단악장 — Andante espressivo (E♭장조, 12/8박자)
- 편성
- 피아노 독주
- 헌정
- 마리 플레옐 (Marie Pleyel, 결혼 전 이름 마리 모크)
이 선율을 한 번도 못 들어본 사람은 드뭅니다. 처음 듣는다 해도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싶은 곡입니다. 광고에, 영화에, 전화 대기음에 흔히 나옵니다. 타이완 타이베이 지하철에서는 열차가 플랫폼에 들어올 때 이 선율이 도착 안내음으로 울립니다. 쇼팽이 살아 돌아온다면 황당해할 만합니다. 스물한 살 망명자가 파리의 방에서 조용히 다듬은 피아노곡 하나가, 200년 뒤 지하철 도착음이 됐으니까요.
그런데 들을수록 의문이 생깁니다. 4분짜리 단악장 소품입니다. 화려하지도 길지도 않습니다. 선율은 단순하고 반주는 거의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번 들으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습니다. 게다가 같은 선율인데 들을 때마다 조금씩 다른 곡처럼 느껴집니다. 이게 쇼팽이 의도한 결과입니다. 악보에 적힌 음표보다 연주자의 손을 더 믿은, 단 34마디의 자유. 그 비밀을 따라가 봅니다.
스물한 살, 망명의 길 위에서
쇼팽이 바르샤바를 떠난 건 1830년 11월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폴란드가 러시아 지배에 맞서 봉기를 일으키기 직전이었습니다. 11월 봉기. 쇼팽은 막 국경을 빠져나간 뒤였고, 봉기는 이듬해 러시아군에게 진압됩니다. 빈을 거쳐 1831년 9월 파리에 도착했을 때, 그는 스물한 살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길이 일방통행이었다는 겁니다. 쇼팽은 끝내 조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1849년 파리에서 생을 마칩니다. 열여덟 해를 망명 상태로.

야상곡 Op.9 세 곡은 바로 이 시기, 1830~31년에 걸쳐 쓰고 다듬은 곡들입니다. 바르샤바를 떠나 파리에 자리 잡기까지의 불안한 몇 해가 고스란히 배어 있습니다. 1832년 라이프치히에서 처음 출판됐고, 파리와 런던에서는 이듬해에 나왔습니다. 그중 두 번째 곡, E♭장조가 바로 이 곡입니다.
파리에서 처음 몇 달은 쉽지 않았습니다. 이름도 없는 폴란드 청년 피아니스트. 살롱에 끼어들어야 했고, 귀족과 부르주아의 비위를 맞춰야 했습니다. 그나마 큰 도움이 된 건 피아노 제조업자 카밀 플레옐(Camille Pleyel)과의 인연이었습니다. 플레옐 가문의 피아노는 파리 음악계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쇼팽은 이 집 피아노를 평생 아꼈고, 플레옐은 그의 후원자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카밀 플레옐에게는 아내가 있었습니다. 마리 플레옐(Marie Pleyel), 결혼 전 이름은 마리 모크(Marie Moke). 바로 쇼팽이 파리에 도착하던 무렵 카밀과 결혼한 사람입니다. 당시 스무 살 남짓이었고, 이미 유럽에서 손꼽히는 피아니스트였습니다. 리스트도 멘델스존도 마리의 연주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마리 모크의 결혼 전 이야기는 따로 기억해둘 만합니다. 마리는 작곡가 엑토르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와 약혼한 사이였습니다. 베를리오즈가 로마 유학을 떠난 동안, 마리의 어머니는 딸을 부유한 카밀 플레옐과 맺어줍니다. 파혼 소식을 들은 베를리오즈는 분노에 휩싸여 마리와 그 어머니, 새 약혼자를 죽이고 자신도 죽겠다는 계획까지 세웠다고 전해집니다. 변장까지 준비해 파리로 향하다 도중에 단념했다는 일화입니다. 흔히 이 사건을 그의 환상 교향곡(Symphonie fantastique)과 묶어 이야기하지만, 그 곡에서 반복되는 핵심 선율인 ‘고정 악상(idée fixe)’은 마리가 아니라 영국 배우 해리엇 스미슨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마리 모크가 남긴 건 교향곡이 아니라, 미수에 그친 복수극 쪽이었던 셈입니다.
쇼팽이 파리에서 마리 플레옐을 만났을 때, 그는 이 모든 사연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쇼팽은 야상곡집 Op.9 전체를 마리 플레옐에게 헌정했습니다. 플레옐 가문에 대한 예의였는지, 마리의 피아노 실력에 대한 존경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감정이 섞였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 쇼팽 본인은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야상곡’을 발명한 건 필드, 완성한 건 쇼팽
야상곡(nocturne, 녹턴)이라는 장르를 처음 개척한 건 아일랜드 작곡가 존 필드(John Field, 1782~1837)입니다. 피아노 독주곡에 밤의 분위기를 담는다는 발상을, 필드가 가장 먼저 시도했습니다.

쇼팽은 필드의 영향을 명백히 받았고, 그것을 부인하지도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시대를 살았고, 실제로 1832년 무렵 만난 적도 있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필드가 쇼팽의 연주를 듣고 “병실에서나 통할 재능(a sick-room talent)”이라고 했다 합니다. 칭찬인지 비아냥인지 알 수 없는 말이지만, 쇼팽이 병약하다는 건 필드도 알아챘던 모양입니다. 그럼에도 쇼팽은 평생 필드를 존경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야상곡’ 하면 필드가 아닌 쇼팽을 떠올리는 게 현실입니다. 왜 그렇게 됐을까요. 쇼팽이 필드의 형식을 가져다 완전히 다른 무언가로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필드의 야상곡이 밤의 평온을 그렸다면, 쇼팽의 야상곡은 밤의 불안까지 담았습니다. 고요하지만 불안하고, 단순하지만 복잡하고, 반복되지만 매번 다른 것. Op.9 No.2가 그 차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필드는 장르를 만들었고, 쇼팽은 그 장르를 뒤집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짚어보면 이렇습니다. 필드의 야상곡이 선율과 반주의 단정한 짜임에 머물렀다면, 쇼팽은 화성을 더 멀리 밀어붙였습니다. 예상 밖의 화음으로 살짝 어긋났다가 돌아오고, 반음계로 미끄러지며 묘한 긴장을 만듭니다. 왼손 반주도 단순한 분산화음이 아니라 넓게 펼쳐져 페달로 울리는 하나의 음향이 됩니다. 무엇보다 박자를 늘였다 줄였다 하는 자유, 곧 루바토를 곡의 본질로 끌어올린 이가 쇼팽이었습니다. 같은 그릇에 전혀 다른 깊이를 담았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쇼팽은 필드의 야상곡에 벨칸토 오페라의 창법을 이식했습니다. 이탈리아 벨칸토 오페라를 유난히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빈첸초 벨리니(Vincenzo Bellini)의 아리아를 듣고 그 노래하는 선율을 피아노로 옮기려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실제로 쇼팽 야상곡의 오른손 선율은 성악가가 노래하듯 이어져야 합니다. 숨을 쉬어야 하고, 호흡의 자연스러운 리듬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루바토의 본질입니다.
34마디, 같은 선율이 매번 다른 이유
이 곡의 구조는 아주 단순합니다. 주선율 A가 변형되며 돌아오고 그 사이에 다른 가락이 끼어드는 형태로, 코다까지 합쳐봐야 34마디. 이걸 4~5분에 걸쳐 연주합니다.

주선율은 처음에 아주 수수하게 시작됩니다. E♭음에서 올라가는 가락, 조용하게(piano), 레가토(legato)로. 12/8박자의 왈츠 같은 반주 위에 선율이 얹힙니다. 첫 등장은 말하자면 “안녕하세요”에 가깝습니다. 아직 꾸밈음도 거의 없고, 선율은 그냥 선율입니다.
주선율이 두 번째로 돌아왔을 때부터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같은 가락인데 꾸밈음이 붙기 시작합니다. 한 음이 두 음으로, 두 음이 네 음으로 펼쳐집니다. 꾸밈음을 절제할지, 과감하게 펼칠지에 따라 연주자의 해석이 크게 갈립니다.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과 발렌티나 리시차의 연주를 나란히 들으면 정말 같은 곡인지 의심이 갈 정도입니다.
중간 대목에서는 분위기가 바뀝니다. 선율이 좀 더 노래하듯, 루바토(rubato)로 자유롭게 늘어납니다. 쇼팽의 루바토에는 묘한 특성이 있습니다. 왼손 반주는 규칙적으로 박자를 지키는데, 오른손 선율이 그 위에서 자유롭게 늘어나고 압축되는 겁니다. 빠르고 느림을 피아니스트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라, 왼손이 유지하는 리듬의 틀 안에서 오른손이 숨을 쉬는 구조입니다. 이걸 “탄성이 있는 리듬”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늘어났다 돌아오는 그 탄성이 쇼팽 연주의 핵심입니다.
주선율이 세 번째, 네 번째 돌아올 때마다 꾸밈음은 더 촘촘해집니다. 그리고 마지막 코다 직전 한 마디에 쇼팽은 ‘senza tempo(박자 없이)’라고 적었습니다. 피아니스트에게 박자를 버리라는 지시입니다. 실제로 이 부분은 연주자에 따라 길이가 크게 달라지더군요. 어떤 연주자는 2초에 지나가고, 어떤 연주자는 10초 가까이 늘입니다. 악보에 음표는 있지만 박자는 없습니다. 쇼팽이 허락한 자유 구간입니다.
곡의 끝, 코다 직전에는 쇼팽 특유의 장식적 가락(피오리투라)이 쏟아집니다. 오른손이 한 박 안에 11개, 22개씩 불규칙한 음을 흩뿌리는데, 왼손의 평범한 박자 위에서 그 음들이 안개처럼 번집니다. 마치 성악가가 한 호흡으로 길게 굴리는 카덴차를 피아노로 옮겨놓은 듯합니다. 이 대목은 쇼팽이 벨칸토를 피아노에 옮겼다는 사실을 가장 또렷하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E♭장조의 으뜸화음 위에서 아주 여리게 잦아듭니다.
그래서 이 곡은 연주자의 지문이 가장 직접적으로 찍히는, 몇 안 되는 레퍼토리입니다. 같은 34마디인데 듣는 사람마다 다른 곡처럼 느끼는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처음 듣는다면, 이것만 알고 들으세요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딱 세 가지만 챙기면 됩니다.

첫째, 왼손 반주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오른손 선율에 정신을 빼앗기기 쉬운데, 왼손이 유지하는 규칙적인 왈츠 리듬이 이 곡의 축입니다. 왼손이 흔들리지 않아야 오른손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이 균형이 쇼팽 야상곡의 비결입니다.
둘째, 꾸밈음이 늘어나는 과정을 따라가 보면 처음 선율과 나중 선율의 차이가 또렷하게 들립니다. 마치 밑그림 위에 색을 입히듯, 단순했던 가락이 점점 화려해집니다. 같은 멜로디인데도 그렇습니다.
셋째, 마지막 코다 직전의 정지 부분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대목에서 시간이 잠깐 멈춥니다. 연주자마다 이 ‘멈춤’의 길이와 방식이 다릅니다. 피아니스트의 해석을 가장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순간입니다.
연주 시간은 4~5분. 짧습니다. 그런데 끝나고 나면 훨씬 더 긴 무언가를 들은 듯한 여운이 남더군요. 그게 이 곡의 이상한 마력입니다.
악보보다 손을 믿은, 쇼팽의 살롱
쇼팽은 무대에서 거의 연주하지 않았습니다. 큰 공개 연주회를 꺼렸고, 살롱이나 소규모 모임에서 연주하는 걸 훨씬 좋아했습니다. 큰 홀은 그에게 맞지 않았습니다. 섬세하고 작은 소리를 추구했고, 그의 연주는 무대 끝자리에서는 들리지 않는다는 말까지 전해집니다.

그가 아낀 플레옐 피아노도 이 취향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플레옐의 건반은 터치가 가볍고 음색이 투명해서, 큰 소리로 밀어붙이기보다 섬세하게 어루만지는 연주에 어울렸습니다. 쇼팽은 “컨디션이 좋을 땐 플레옐로 친다”는 말을 남길 만큼 이 악기를 신뢰했습니다. 야상곡의 그 여리고 조용한 음들은, 바로 이런 악기와 살롱이라는 공간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소리입니다.
살롱 연주에서 쇼팽은 즉흥적으로 꾸밈음을 바꿨다고 전해집니다. 악보에 적힌 것과 실제 연주가 달랐다는 증언도 여럿 있습니다. 같은 곡인데 매번 조금씩 다르게 연주한 겁니다. 지금 우리가 여러 연주자 사이에서 큰 차이를 발견하는 건, 사실 쇼팽 본인이 그 다양성을 허락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쇼팽은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이 곡의 꾸밈음을 여러 갈래로 바꿔 적어주곤 했습니다. 제자였던 카를 미쿨리(Karl Mikuli)나 카미유 뒤부아가 쓰던 악보에는 인쇄본에 없는 별도의 장식 가락이 손글씨로 남아 있습니다. 같은 야상곡인데 학생마다 조금씩 다른 ‘쇼팽 버전’을 받아 든 셈입니다. 오늘날 연주자들이 참고하는 변주들 가운데 일부가 바로 여기서 나왔습니다.
제자들의 증언을 보면, 쇼팽은 학생들에게 “같은 방식으로 두 번 연주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합니다. 정해진 대로 재현하는 연주가 아니라, 매번 그 순간에 새롭게 만들어내는 연주를 요구했다는 뜻입니다. Op.9 No.2가 녹음마다 이렇게 다르게 들리는 건 우연이 아닙니다. 악보는 출발점이지 도착점이 아니었던 겁니다.
폴리니·루빈스타인·피리스: 누가 옳은가
이 세 연주자를 나란히 놓으면 흥미로운 대조가 생깁니다.
마우리치오 폴리니(Maurizio Pollini)의 야상곡은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과장된 감정 없이 음표 하나하나가 정확하고 깨끗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걸 “차갑다”고 느끼고, 어떤 사람은 “가장 쇼팽답다”고 느낍니다. 쇼팽 본인이 감상적 과잉을 싫어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폴리니 편을 드는 주장에도 근거가 있습니다.
아르투르 루빈스타인(Arthur Rubinstein)의 야상곡은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특별한 효과를 노리지 않는데 듣고 나면 무언가가 남습니다. 오랫동안 기준 녹음으로 꼽혀온 이유가 있습니다. 반면 마리아 주앙 피리스(Maria João Pires)는 더 내성적입니다. 큰 소리보다 작은 소리에 집중하고, 선율보다 선율 사이의 공간을 드러냅니다. 처음 들으면 “너무 조용한 거 아닌가” 싶다가, 계속 듣다 보면 그 조용함이 곡의 핵심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셋 중 누가 옳을까요? 셋 다 옳습니다. 쇼팽이 악보에 담은 것 이상을 각자의 방식으로 실현하고 있는 겁니다. 아래는 발렌티나 리시차의 연주입니다. 꾸밈음을 가장 과감하게 펼치는 쪽이니, 위 세 사람과 비교하며 들어보세요.
4분짜리 소품이 지금도 현역인 이유
이 곡이 특이한 건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광고에서, 영화에서, 드라마에서, 게임 OST에서 계속 쓰입니다. 선율이 너무 유명해서 다른 맥락에 쓰일 때마다 효과가 있습니다. ‘아, 이 선율’ 하는 즉각적인 인식 때문입니다.
타이베이 지하철(Taipei Metro)에서는 쑹산-신뎬선(松山新店線, 녹색선) 열차가 플랫폼에 들어올 때 이 선율이 도착 음악으로 울립니다. 클래식 소품이 대중교통 인프라의 일부가 된 흔치 않은 사례입니다. 듣는 승객 대부분은 그 선율의 정체를 모른 채 매일 스쳐 지나갑니다.
피아노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거치는 곡이기도 합니다. 입문 레퍼토리이면서, 동시에 정상급 연주자들이 무대에서 계속 연주하는 곡. 쉽게 배울 수 있지만 잘 연주하기는 어렵다는 이 모순이, 이 곡을 레퍼토리에서 끊임없이 살아 있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한국 청중에게도 쇼팽은 각별합니다. 2015년 조성진이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쇼팽 열풍이 한 차례 크게 불었고, 야상곡은 그 입구 같은 곡이었습니다. 이 글 맨 위의 연주도 조성진이 직접 친 Op.9 No.2입니다. 화려한 협주곡으로 쇼팽을 처음 만난 사람도, 결국 이 4분짜리 야상곡 앞에서 한 번은 멈추게 됩니다.
이 곡이 없었다면 — 쇼팽이 피아노에 남긴 것
쇼팽 야상곡 Op.9 No.2는 단순히 유명한 소품 하나가 아닙니다. 이 곡이 후세 피아니스트와 작곡가들에게 준 영향은 꽤 광범위합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피아노 소품 작곡가들, 그러니까 포레(Gabriel Fauré), 드뷔시(Claude Debussy), 라벨(Maurice Ravel)은 모두 쇼팽의 야상곡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피아노 소품에서 시도한 것들, 선율의 섬세함, 반주의 질감, 페달을 활용한 소리의 레이어링은 쇼팽 없이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의미 있는 건, 쇼팽이 피아노라는 악기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다시 정의했다는 점입니다. 그전까지 피아노는 주로 여러 성부를 동시에 울리거나 기교를 과시하는 악기였습니다. 쇼팽은 피아노가 사람의 목소리처럼, 어쩌면 목소리보다 더 섬세하게 감정을 노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습니다. Op.9 No.2가 그 증거입니다.
피아노를 배우는 사람이 이 곡을 처음 치면서 겪는 난관도 사실 여기에 있습니다. 음표 자체는 어렵지 않거든요. 그런데 ‘소리를 만드는 것’이 어렵습니다. 선율을 노래하듯 이어가면서, 왼손 반주는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꾸밈음은 자연스럽게 풀어내야 합니다. 이 셋을 동시에 해내는 게 보기보다 훨씬 까다롭습니다. 그래서 입문 레퍼토리이면서 동시에 평생 갈고닦는 레퍼토리가 되는 겁니다.
쇼팽은 폴란드 땅을 다시 밟지 못했습니다. 1849년 파리에서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심장은 누나의 손에 바르샤바로 옮겨져 성십자가 성당 기둥 안에 안치됐습니다. 몸은 파리에, 심장은 폴란드에. 생전에 이루지 못한 귀향이 그 방식으로 이루어진 겁니다. 스물한 살에 쓴 그 시절의 선율이, 지금도 세계 어딘가의 지하철역에서 울립니다.
추천 녹음
이 곡을 녹음한 피아니스트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성격이 뚜렷이 다른 세 가지를 고릅니다.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RCA, 1965) — 오랫동안 기준 녹음으로 꼽혀온 연주입니다. 과하지 않고 자연스럽습니다. 감정을 밀어붙이지 않는데 어느 순간 청자가 이미 감정에 실려 있습니다. 처음 한 장을 고른다면 무난한 선택입니다.
마리아 주앙 피리스 (DG, 1996) — 루빈스타인보다 더 내성적입니다. 조용한데 밀도가 있습니다. 꾸밈음을 화려하게 치는 대신 선율의 골격을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이 곡이 왜 짧은데도 이렇게 다채로운지 알고 싶다면 이 녹음을 추천합니다.
발렌티나 리시차 (Decca, 2012) — 앞선 둘과 달리 꾸밈음을 가장 과감하게 펼칩니다. 유독 화려합니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틀린 접근은 아닙니다. 쇼팽 본인이 살롱에서 즉흥적으로 꾸밈음을 늘렸다는 기록이 있으니까요.
악보와 함께 듣기
악보를 보며 들으면 꾸밈음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주선율과 마지막 주선율이 악보 위에서 얼마나 다른지 보면, 이 곡이 왜 “같은 선율의 변주”인지 단번에 와닿습니다.
악보 원본은 무료 악보 아카이브인 IMSLP에서 열람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