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6년, 스물셋의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는 떨리는 손으로 악보 한 부를 포장했습니다. 바그너의 자서전 《나의 생애》(Mein Leben)에 따르면, 수신인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촉망받는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 바그너가 야심차게 완성한 《교향곡 C장조》(Symphony in C major, WWV 29)였죠. 젊은 작곡가에게 이 악보 발송은 일종의 고백이었습니다. “당신의 음악을 존경합니다. 제 곡도 한번 봐주십시오.”
그런데 멘델스존은 이 악보를 잃어버렸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 관심이 없었던 거죠. 악보는 어딘가에 처박혀 먼지를 뒤집어쓰다가 영영 사라졌습니다. 바그너는 이 사실을 평생 잊지 못했습니다.
14년 뒤, 바그너는 유럽 전역에 배포될 에세이 한 편을 씁니다. 제목은 「음악에서의 유대성」(Das Judenthum in der Musik). 멘델스존을 정조준한 저격이었습니다. 이때 멘델스존은 이미 세상을 떠난 지 3년째. 반박할 수 없는 사람을 공격한 겁니다.
이것은 단순한 질투가 아닙니다. 클래식 음악 역사상 가장 복잡하고, 가장 추악하며, 가장 영향력이 컸던 두 천재의 이야기이기도 하죠.
라이프치히의 황태자, 멘델스존
1835년, 멘델스존은 스물여섯의 나이에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Gewandhaus Orchestra) 음악감독에 취임합니다. 유럽 최고 권위의 오케스트라를 이십대 청년이 이끈다는 건 지금으로 치면 스무 살짜리가 빅테크 CEO가 된 것과 비슷한 충격이었죠.
멘델스존의 이력은 처음부터 남달랐죠. 열두 살에 괴테(Goethe) 앞에서 연주해 찬사를 받았고, 열여섯에 《현악 8중주》(String Octet, Op. 20)를 작곡했는데, 이 곡의 마지막 악장 스케르초는 오늘날까지도 실내악 역사상 가장 경이로운 10대의 산물로 꼽힙니다. 그리고 스무 살이 되던 1829년,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S. Bach)의 《마태 수난곡》(Matthäus-Passion, BWV 244)을 100년 만에 부활시켜 서양 음악사의 흐름을 바꿔놓았습니다. 바흐가 오늘날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 건 상당 부분 멘델스존 덕분이니까요.

게반트하우스에서 그는 베토벤, 바흐, 슈베르트의 작품을 체계적으로 프로그램에 올린 최초의 지휘자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정기 연주회 시즌제’도 사실상 멘델스존이 만든 것이죠. 1843년에는 라이프치히 음악원(Leipzig Conservatory)을 세웁니다. 독일 최초의 음악 전문 교육기관이었고,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이 교수로 참여했을 만큼 처음부터 수준이 남달랐습니다.
작곡가로서도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Violin Concerto in E minor, Op. 64), 《이탈리아 교향곡》(Symphony No. 4 “Italian”, Op. 90), 《한여름 밤의 꿈 서곡》(A Midsummer Night’s Dream Overture, Op. 21) 같은 걸작을 쏟아냈습니다. 특히 《한여름 밤의 꿈 서곡》은 열일곱 살에 쓴 곡인데, 이 나이에 오케스트레이션을 이 정도로 해내는 건 모차르트에 비견될 수준이었습니다. 유럽 음악계에서 멘델스존은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바로 이 시기, 라이프치히에서 한 청년이 멘델스존을 올려다보고 있었죠. 리하르트 바그너. 라이프치히 태생이었던 바그너에게 멘델스존은 같은 도시의 영웅이자, 자신이 도달하고 싶은 정상이었습니다.
무시당한 청년, 그리고 곪아가는 원한
바그너는 멘델스존에게 여러 차례 접근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교향곡 악보 발송도 그중 하나였고, 직접 만남의 자리도 있었죠. 바그너의 자서전 《나의 생애》에 따르면, 멘델스존은 그를 정중하지만 철저하게 무관심으로 대했다고 합니다.
“그는 나에게 친절했지만, 내 음악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바그너가 남긴 기록이죠.
1843년, 바그너가 드레스덴 궁정극장(Semperoper)의 카펠마이스터로 임명되었을 때 상황이 좀 더 복잡해집니다. 드레스덴과 라이프치히는 기차로 한 시간 거리. 바그너는 자신의 오페라 《리엔치》(Rienzi)와 《방황하는 네덜란드인》(Der fliegende Holländer)이 게반트하우스에서 연주되기를 바랐지만, 멘델스존은 이를 프로그램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이 냉담함에는 이유가 있었을까요? 당시 바그너는 아직 대표작을 내놓기 전이었고, 음악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인물이었습니다. 반면 멘델스존은 유럽의 모든 궁정과 오케스트라가 초청하는 스타였으니까요. 하루에도 수십 통의 편지와 악보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바그너에게 특별한 관심을 줄 여유가 없었던 것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게다가 멘델스존은 음악적 취향이 보수적인 편이었고, 바그너의 초기작은 그의 미학과 맞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바그너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죠. 그에게 멘델스존의 무관심은 자기 재능을 무시한 일처럼 느껴졌고, 오래 곱씹는 원한이 되었습니다. 특히 멘델스존이 유대인 은행가 집안 출신이라는 점은 바그너의 열등감에 기름을 부었죠. 바그너 자신은 가난한 극장 직원의 아들로, 경제적으로 늘 쪼들렸으니까요. 재능은 자신이 더 낫지만 가문과 인맥의 힘으로 꼭대기에 앉아 있을 뿐이라고, 바그너는 그렇게 받아들였을 겁니다.

흥미로운 건, 바그너가 멘델스존의 음악 자체는 높이 평가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멘델스존의 《핑갈의 동굴 서곡》(The Hebrides Overture, Op. 26)을 “내가 아는 가장 완벽한 풍경화”라고 극찬한 적도 있습니다. 존경과 질투, 열등감과 자존심이 뒤엉킨 감정이었던 거죠. 이런 감정은 대개 좋은 결말로 이어지지 않더군요.
38세, 멘델스존의 갑작스러운 죽음
1847년 11월 4일, 멘델스존은 서른여덟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인은 뇌졸중. 같은 해 5월에 세상을 떠난 누나 파니 멘델스존(Fanny Mendelssohn)의 죽음이 결정타였다는 게 정설이죠. 누나의 부고를 듣고 쓰러진 뒤로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으니까요. 파니는 단순한 가족이 아니라 멘델스존의 음악적 동반자이자 가장 신뢰하는 비평가였습니다. 그녀 자신도 뛰어난 작곡가였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출판을 제한받았던 비운의 인물이었죠.
유럽 전역이 애도했습니다. 라이프치히에서는 수만 명이 장례 행렬에 참석했고, 런던에서는 빅토리아 여왕이 슬픔을 표했죠. 클래식 음악사에서 모차르트 이후 이 정도 규모의 추모는 전례가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바그너의 반응은 사뭇 달랐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애도의 뜻을 표했지만, 속으로는 전혀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을 겁니다. 독일 음악계에서 멘델스존이라는 거대한 장벽이 사라진 거니까요.
사후 3년, 역사상 최악의 에세이
1850년, 바그너는 「음악에서의 유대성」을 발표합니다. 처음에는 ‘K. 프라이게당크'(K. Freigedank, ‘자유로운 사상’이라는 뜻의 필명)라는 가명으로 《신음악신문》(Neue Zeitschrift für Musik)에 기고했죠. 내용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바그너의 핵심 주장은 이랬습니다. 유대인 작곡가들은 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도 음악의 ‘진정한 감정’을 표현할 수 없다. 그들의 음악은 표면적으로 매끈하지만 영혼이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대표적 사례로 멘델스존과 자코모 마이어베어(Giacomo Meyerbeer)를 지목했습니다.
마이어베어를 공격한 건 특히 배은망덕의 극치였습니다. 바그너가 파리에서 굶주리며 무명 시절을 보낼 때, 돈을 빌려주고 인맥을 소개해준 사람이 바로 마이어베어였거든요. 바그너의 초기 오페라가 무대에 오를 수 있었던 건 마이어베어의 추천 덕분이었습니다. 은인의 등에 칼을 꽂은 겁니다.
이 에세이에서 멘델스존을 향한 바그너의 공격은 교묘했습니다. 멘델스존의 기교와 형식미는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진정한 독창성이 아니라 ‘모방의 완벽함’에 지나지 않는다고 깎아내렸죠. “멘델스존은 우리에게 아무런 새로운 말도 들려주지 못했습니다”라는 게 바그너의 결론이었습니다. 이미 죽어서 반박할 수 없는 사람을 상대로 한 일방적 저격이었습니다.
1869년, 바그너는 이 에세이를 자기 실명으로 재출간합니다. 이번에는 서문까지 붙여서 더 노골적으로. 당시 바그너는 이미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와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Die Meistersinger von Nürnberg)로 유럽 최고의 작곡가 반열에 올라 있었습니다. 더 이상 숨을 필요가 없었던 거죠. 오히려 자기 이름을 걸고 한 번 더 밟아놓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음악으로 진검승부: 누가 더 혁신적이었나
이제 가장 흥미로운 질문으로 가보겠습니다. 바그너의 주장처럼, 멘델스존의 음악은 정말 ‘깊이가 부족한’ 것이었을까요?
멘델스존은 모차르트와 바흐의 전통 위에 서서 고전적 형식을 극도로 세련되게 다듬은 작곡가였습니다. 소나타 형식, 협주곡 구조, 서곡의 프로그래밍 — 기존 틀 안에서 최고의 아름다움을 끌어낸 거죠.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는 200년이 지난 지금도 바이올린 협주곡의 교과서로 불립니다. 1악장에서 오케스트라 서주 없이 바이올린이 바로 주제를 시작하는 혁신, 악장 사이를 쉼 없이 연결하는 아타카(attacca) 구조 — 이건 분명히 새로운 시도였습니다. 브람스도 리스트도 이 방식을 참고했으니까요.
바그너는 아예 판을 뒤엎은 사람이었습니다. ‘끝없는 선율'(unendliche Melodie)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전통적인 아리아와 레치타티보의 경계를 허물었고, 라이트모티프(Leitmotif) 기법으로 음악에 서사적 깊이를 부여했습니다. 등장인물마다, 감정마다, 사물마다 고유한 음악적 동기를 부여해서 오케스트라가 가수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하게 만든 거죠. 이건 오페라가 아니라 음악극(Musikdrama)이었습니다.
그리고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첫 화음. 이른바 ‘트리스탄 화음'(Tristan chord)은 약 250년간 서양 음악을 지탱해온 조성 체계에 균열을 냈죠. 이 화음은 곧장 안정적으로 해결되지 않고, 또 다른 불안정한 화음으로 이어지며, 음악이 끝없이 해결을 갈망하게 만들었거든요.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의 무조음악, 나아가 현대 음악 전체가 이 균열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바그너는 오페라를 넘어 ‘총체예술'(Gesamtkunstwerk)이라는 개념까지 만들었고, 바이로이트(Bayreuth)에 자기 전용 극장을 짓는 전무후무한 일을 해냈으니까요.
솔직히 말하면, 혁신의 스케일에서는 바그너가 압도적이었죠. 음악사의 방향을 바꾼 건 분명 바그너 쪽입니다.
| 리하르트 바그너 | 펠릭스 멘델스존 | |
|---|---|---|
| 음악사의 역할 | 틀을 부수다 — 조성의 해체 | 유산을 지키다 — 고전의 세련 |
| 대표 혁신 | 라이트모티프 · 끝없는 선율 · 트리스탄 화음 | 무서주 협주곡 · 아타카 악장 연결 · 바흐 부활 |
| 음악의 인상 | 깊은 숲의 어둠, 끝없는 갈망 | 지중해의 햇살, 투명한 기쁨 |
| 남긴 그림자 | 바이로이트 · 나치의 사운드트랙 | 연주 금지 · 동상 철거, 그리고 복원 |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남지 않을까요? 혁신이 곧 위대함인 걸까요?
멘델스존의 《이탈리아 교향곡》 1악장을 들어보면, 그 투명하고 환한 기쁨은 바그너의 어떤 작품에서도 찾을 수 없는 종류의 것입니다. 바그너가 음악으로 세상을 뒤흔들었다면, 멘델스존은 음악으로 세상을 밝혔습니다. 바그너의 음악이 깊은 숲 속 어둠이라면, 멘델스존의 음악은 지중해의 햇살이었죠. 둘 다 대체 불가능한 천재였고, 한쪽이 다른 쪽보다 ‘열등하다’는 주장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바그너 자신도 그걸 알았을 겁니다. 알았기 때문에 더 공격한 건 아니었을까요.
히틀러의 선택, 멘델스존의 말살
바그너의 에세이는 그가 죽은 뒤에도 긴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바그너를 광적으로 숭배했고,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매년 참석했습니다. 바그너의 며느리 비니프레트 바그너(Winifred Wagner)와 히틀러는 절친한 사이였고, 바이로이트는 나치 이데올로기의 문화적 성지가 되었습니다. 바그너의 음악은 나치 독일의 공식 사운드트랙이었죠.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에서는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서곡이 울려 퍼졌고, 나치의 선전 영화에도 바그너의 음악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멘델스존은 체계적으로 지워졌습니다.
나치는 멘델스존의 모든 작품 연주를 금지했습니다.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앞에 서 있던 멘델스존 동상은 1936년에 철거되었죠. 당시 라이프치히 시장 칼 프리드리히 괴르델러(Carl Friedrich Goerdeler)는 철거에 강력히 반대했고, 결국 이 일로 시장직에서 사임하게 됩니다. 괴르델러는 훗날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가 1945년 처형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멘델스존 동상을 지키려 한 대가가 이렇게까지 컸던 겁니다.
《한여름 밤의 꿈》(A Midsummer Night’s Dream) 중 〈결혼 행진곡〉 — 지금도 전 세계 수백만 커플의 결혼식에서 울려 퍼지는 그 곡 — 마저 금지 대상이었죠. 나치는 이를 대체할 ‘순수 독일’ 결혼 행진곡을 공모했지만, 멘델스존만큼 좋은 곡을 아무도 쓰지 못했거든요. 결국 독일 신부들은 허름한 대체곡에 맞춰 입장해야 했습니다.
바그너가 반유대주의 에세이를 쓸 때, 이런 결과를 예상했을까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글이 씨앗이 되어 거의 100년 뒤에 어떤 열매를 맺었는지는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동상의 귀환, 끝나지 않은 이야기
2008년, 라이프치히에 멘델스존 동상이 다시 세워졌습니다. 철거된 지 72년 만의 복원이었죠. 원래 동상 자리가 아닌 성 토마스 교회(Thomaskirche) 앞, 멘델스존이 되살린 바흐가 27년간 일했던 바로 그 교회 앞에 세워진 건 의미심장합니다. 두 사람을 나란히 놓은 것이니까요.

한편 이스라엘에서는 지금도 바그너의 음악 연주가 사실상 금기입니다. 법적 금지는 아니지만, 2001년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이 이스라엘 페스티벌에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전주곡을 앵콜로 연주했을 때 엄청난 논란이 벌어졌죠. 청중 일부는 울면서 퇴장했고, 일부는 기립박수를 보냈습니다. 바그너의 음악이 여전히 얼마나 뜨거운 감자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바렌보임은 이후에도 바그너 연주를 이어갔고, “음악 자체에 죄가 있는 건 아닙니다”라고 주장했지만, 홀로코스트 생존자들과 그 후손들에게 바그너의 이름은 여전히 고통의 상징이었습니다.
음악학계에서는 멘델스존 재평가가 활발하게 진행 중입니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기교는 뛰어나지만 깊이가 부족하다”는 평가가 주류였는데, 이것이 바그너의 에세이에서 비롯된 편견이었음을 학자들이 규명하고 있는 거죠. 멘델스존은 바그너가 주장한 것처럼 ‘감정 없는 기능공’이 아니라, 자신만의 방식으로 음악의 가능성을 확장한 혁신가였습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죠. 바그너는 음악사를 바꿨고, 멘델스존은 음악사를 지켰습니다. 한 사람은 기존의 틀을 부수며 새 길을 냈고, 다른 한 사람은 잊혀진 위대한 유산을 발굴해 아름답게 다듬었습니다. 그리고 바그너가 멘델스존을 공격하려고 쓴 에세이는, 아이러니하게도 바그너 자신의 인간적 한계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문서로 남았습니다.
천재성이 인격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걸, 이 두 사람만큼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또 있을까요. 바그너의 음악은 여전히 위대하고, 멘델스존의 음악 역시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다만 그 사이에 놓인 역사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같은 음악을 들어도 전혀 다른 경험이 되겠죠.
자주 묻는 질문
바그너는 왜 멘델스존 사후에 공격했나요?
살아 있을 때 공격했다면 멘델스존의 압도적 명성과 인맥 앞에서 역풍을 맞았을 가능성이 높았겠죠. 멘델스존 사후, 바그너의 위상이 올라간 시점에서야 반박당할 위험 없이 공격할 수 있었던 겁니다. 반박할 수 없는 상대를 겨냥한 일방적 공격이라는 비판을 받는 이유입니다.
멘델스존은 정말 바그너의 악보를 무시한 건가요?
확실한 기록은 없습니다. 바그너의 자서전 《나의 생애》에 따르면 악보가 분실되었다고 하지만, 이 자서전 자체가 바그너의 주관적 시선으로 쓰인 것이라 100% 신뢰하기는 어렵죠. 다만 멘델스존이 바그너의 초기 작품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건 여러 정황상 사실로 보입니다.
바그너의 음악을 들어도 되나요?
이건 개인의 판단에 달린 문제겠죠. 바그너의 반유대주의와 나치와의 연결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그의 음악 자체가 반유대적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거든요. 예술과 예술가를 분리할 수 있느냐는 질문은 음악뿐 아니라 모든 예술 분야에서 계속되는 논쟁이죠. 다만 그의 음악을 즐기면서도 역사적 맥락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바그너의 반유대주의는 그의 작품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납니까?
바그너는 1850년에 발표한 수필 “음악에서의 유대성”를 통해 멘델스존을 노골적으로 비난했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1868)에 등장하는 우스꽝스러운 악역 ‘벡메서’를 통해 멘델스존의 음악 스타일을 풍자적으로 왜곡하여 표현했다는 해석이 지배적입니다.
멘델스존은 정말 바그너 때문에 완전히 잊혔습니까?
바그너의 비판과 이후 나치 정권의 연주 금지 조치로 멘델스존의 명성은 한때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교향곡 제4번 ‘이탈리아’ A장조(1833)나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1844) 같은 걸작들은 오늘날 전 세계 클래식 무대에서 꾸준히 사랑받으며 그의 음악적 가치를 증명합니다.
바그너가 멘델스존을 존경했던 시기의 음악도 있습니까?
네, 바그너의 초기 작품인 교향곡 C장조(1832)는 작곡 양식 면에서 멘델스존의 영향을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당시 스무 살 안팎이던 바그너는 멘델스존을 존경받는 선배 작곡가로 여기며 그의 음악을 깊이 연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