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든의 머리는 어디에 있었나 — 골상학에 홀린 두 남자와 145년 만의 재회

무덤 파는 인부를 매수해 잘라 간 두개골. 지금 하이든의 관에는 머리뼈가 둘 들어 있습니다.

떠도는 이야기하이든이 죽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무덤을 파고 그 머리를 잘라 갔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사실은 —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매장한 지 며칠 만에 머리가 사라졌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데 145년이 걸렸습니다.

이 글에서는 — 누가 왜 훔쳤는지, 기록으로 확인되는 대목과 뒤에 붙은 각색을 차례로 가려봅니다.

어떤 이야기는 너무 기괴해서 오히려 지어낸 말처럼 들립니다. 하이든의 잘린 머리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당대 유럽에서 손꼽히던 작곡가가 세상을 떠난 뒤 누군가 무덤을 파헤쳐 머리를 잘라 갔고, 그 머리가 유해와 다시 합쳐지기까지 한 세기가 훌쩍 넘게 걸렸다는 이야기니까요. 심야 괴담 채널에 어울릴 법하지만, 이 이야기는 괴담이 아닙니다.

흔히 떠올리는 그림은 이렇습니다. 어두운 밤, 삽을 든 도굴꾼, 팔아넘기려는 유골, 그리고 돈. 하지만 실제로 하이든의 머리뼈를 빼돌린 사람들은 그런 상상 속 도굴꾼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한 사람은 교도소장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귀족 가문에서 오래 일한 전직 비서였습니다. 둘 다 당시 사회에서 이름 없이 숨어 살던 사람들이 아니었고, 이들이 노린 것도 돈이 아니라 지금은 완전히 폐기된 사이비 과학이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200년 넘게 살아남은 이유는 단순히 엽기적이어서가 아닙니다. 진짜 흥미로운 지점은 따로 있습니다. 두 사람은 하이든의 머리뼈에서 무엇을 찾으려 했을까요. 그리고 그 어이없는 믿음은 왜 하이든의 유해를 145년 동안 머리뼈와 나머지 유골이 따로 떨어진 상태로 남겨 두었을까요. 답은 두 사람이 진지하게 믿었던 사이비 과학에서 시작됩니다.

흰 가발을 쓴 노년의 요제프 하이든 초상화
이 온화한 얼굴의 작곡가가 세상을 떠난 뒤, 누군가 그의 머리뼈를 실제로 노렸습니다.

여기까지는 기록으로 확인됩니다

확인된 사실 요제프 하이든은 1809년 5월 31일 빈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일흔일곱 살이었습니다. 당시 빈은 나폴레옹 군대가 두 번째로 점령한 상태라 도시 전체가 어수선했고 장례는 조용히 치러졌습니다. 유해는 빈 외곽 훈츠투름 묘지에 묻혔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하이든의 죽음과 장례는 특별한 소동 없이 지나간 듯 보였습니다. 문제는 매장된 지 며칠 뒤에 벌어졌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1809년 6월 4일, 두 남자가 무덤 파는 인부 야코프 데무트를 돈으로 매수했습니다. 인부는 관을 열고 이미 부패가 시작된 머리를 잘라 두 사람에게 넘겼습니다. 우발적인 시신 훼손이라기보다 처음부터 계획된 절도에 가까웠습니다.

범인의 이름과 직업도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한 명은 요제프 카를 로젠바움으로, 하이든을 오랫동안 고용하고 후원했던 에스테르하지 가문에서 비서로 일하던 사람입니다. 다른 한 명은 요한 네포무크 페터로, 니더외스터라이히 지역 주립 감옥의 소장이었습니다. 길거리 도굴꾼이 무덤을 훼손한 사건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가 있던 두 사람이 계획에 가담한 일이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죽은 작곡가를 잘 알았거나, 적어도 존경한다고 말할 만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은 왜 하이든의 머리를 훔치려 했을까요. 답은 그 시절 유럽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골상학, 곧 두개골의 형태로 사람의 성격과 재능을 읽을 수 있다고 믿은 학설에 있습니다.

머리뼈로 천재를 읽는다는 믿음

확인된 사실 골상학은 머리뼈의 튀어나온 곳과 들어간 곳을 손으로 만져 성격과 재능을 읽을 수 있다고 믿은 이론이었습니다. 지금 들으면 손금이나 관상처럼 느껴지지만, 19세기 초에는 최신 과학처럼 대접받았습니다. 이 이론을 널리 퍼뜨린 인물은 빈에서 활동한 의사 프란츠 요제프 갈입니다.

골상학 창시자 프란츠 요제프 갈의 판화 초상
골상학을 널리 알린 의사 프란츠 요제프 갈. 그의 이론은 두 사람이 하이든의 무덤을 파헤칠 때 내세운 명분이 되었습니다.

갈의 주장은 이랬습니다. 뇌는 부위마다 담당하는 능력이 다르고, 어떤 능력이 발달한 사람은 그 부위가 커지면서 머리뼈까지 볼록하게 밀어 올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뼈의 요철만 읽으면 사랑, 욕심, 용기, 심지어 음악 재능까지 알아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갈과 그의 추종자들은 머리뼈를 여러 구역으로 나누고, 각 구역에 성격과 재능을 배정한 지도를 만들었습니다. 이 도표는 순식간에 유럽 전역으로 퍼졌습니다.

골상학 두개골 성격 영역 지도 시대 삽화
머리뼈 위에 그려 넣은 골상학의 성격 지도. 사랑, 욕심, 음악 재능까지 각각의 부위에 배정돼 있습니다.

로젠바움과 페터는 갈 이론의 열렬한 추종자였습니다. 이들에게 하이든의 두개골은 단순한 유골이 아니었습니다. ‘뛰어난 음악 재능을 지닌 사람의 머리뼈는 어떤 모양인가’를 확인할 수 있는, 더없이 귀한 표본이었습니다. 실제로 페터는 하이든의 두개골을 살펴본 뒤 음악을 담당한다는 부위, 이른바 ‘음악의 혹’이 완벽하게 발달해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물론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근거 없는 믿음입니다. 골상학은 이미 19세기에 과학으로서 설 자리를 잃었고, 머리뼈 모양으로 음악성을 읽어 낼 수 있다는 발상에도 근거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이 이론을 진지하게 믿었습니다. 바로 그 확신이 문제의 시작이었지요.

11년 뒤, 후작이 관을 열게 한 날

확인된 사실 하이든의 머리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드러난 때는 사건이 벌어진 지 11년이나 지난 1820년입니다.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당주 니콜라우스 2세 후작은 하이든 말년의 고용주이자 후원자였습니다. 그는 존경하던 작곡가의 유해를 가문의 본거지인 아이젠슈타트로 옮기려 했고, 그 과정에서 무덤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관 속 유해에는 머리가 없었습니다. 몸 위에는 가발만 얹혀 있었고, 머리뼈는 이미 통째로 사라진 뒤였습니다.

니콜라우스 2세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초상화
니콜라우스 2세 에스테르하지 후작. 존경하던 작곡가의 관을 열었다가 머리가 없는 유해와 마주했습니다.

후작은 격노했습니다. 범인을 찾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골상학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하이든의 머리뼈가 어디로 갔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이미 공공연한 비밀처럼 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의심은 곧장 로젠바움에게 향했습니다. 후작의 사람들이 들이닥쳤을 때, 로젠바움은 그 머리뼈를 뜻밖의 곳에 숨겨 두고 있었습니다.

설(說) 여기서부터는 로젠바움 본인이 남긴 일기에 많이 의존하는 이야기입니다. 실제 상황과 어디까지 맞아떨어지는지는 조심해서 봐야 합니다. 일기에 따르면 로젠바움은 두개골을 짚으로 채운 침대 매트리스 안에 숨겨 두었습니다. 수색대가 들이닥치자 그의 아내 테레제가 침대에 드러누워 몸이 좋지 않다며 매트리스를 뒤지지 못하게 막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장면은 극적이지만, 적어도 이 이야기가 당사자의 기록에서 나왔다는 점은 기억해 둘 만합니다.

다만 이후의 결과는 비교적 분명합니다. 로젠바움은 하이든의 실제 머리를 끝내 내놓지 않았습니다. 대신 다른 사람의 두개골을 하이든의 것이라며 후작 측에 건넸고, 후작은 그 두개골을 진짜로 믿고 유해와 함께 아이젠슈타트에 다시 묻었습니다. 두 도둑은 처벌도 거의 받지 않았습니다. 하이든의 진짜 머리는 여전히 로젠바움의 손안에 있었습니다.

손에서 손으로, 145년의 표류

이제 두개골은 유품이라기보다 연구 표본에 가까운 물건으로 취급되며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칩니다. 로젠바움이 1829년 세상을 떠난 뒤에는 공범 페터에게 넘어갔고, 다시 한 의사를 거쳐 병리학자 카를 폰 로키탄스키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로키탄스키는 빈 의과대학에서 부검을 근대 의학의 중요한 토대로 세운 인물로, 병리학의 대가로 이름을 남겼습니다.

이 병리학자의 손을 거쳐 1895년 하이든의 두개골은 마침내 빈 음악친우협회에 기증됩니다. 클래식 팬에게 빈 음악친우협회는 황금빛 무지크페라인 홀을 운영하는 기관으로도 익숙합니다. 이 홀에서는 매년 새해 첫날 전 세계로 생중계되는 빈 신년음악회가 열립니다. 하이든의 두개골은 한동안 클래식 음악의 상징적인 공연장 안 어느 방에 표본처럼 보관돼 있었던 셈입니다.

협회는 이 두개골을 유리 진열장에 넣어 방문객에게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세계적인 작곡가의 두개골은 나머지 유해와 50킬로미터 떨어진 도시에서, 진열품처럼 따로 놓여 있었던 셈이에요.

145년 만에, 머리가 집으로

확인된 사실 하이든의 두개골과 나머지 유해를 다시 한곳에 모으려는 시도는 여러 차례 무산됐습니다. 1932년에는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후손인 파울 후작이 흩어진 하이든의 유해를 한자리에 모으기 위해 아이젠슈타트의 베르크키르헤 성당에 대리석 무덤을 새로 지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혼란과 제2차 세계대전이 겹치면서 실제 합장 계획은 계속 뒤로 밀렸습니다.

하이든의 실제 두개골이 나머지 유해와 다시 합쳐진 때는 1954년입니다. 음악친우협회가 보관하던 두개골은 성대한 의식과 함께 아이젠슈타트로 옮겨졌고, 하이든은 죽은 지 145년 만에 비로소 한 무덤 안에 안치됐습니다. 1809년에 사라진 머리가 제자리로 돌아오기까지 나폴레옹은 몰락했고, 오스트리아 제국은 무너졌으며, 두 번의 세계대전도 끝나 있었습니다. 한 작곡가의 유해가 다시 한곳에 모이기까지 지나치게 긴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1820년에 후작이 진짜라고 믿고 묻었던 가짜 두개골이 무덤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1954년에 실제 두개골을 무덤에 넣을 때도, 그 가짜 두개골은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아이젠슈타트의 하이든 무덤 안에는 목 아래 유해와 두 개의 두개골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하이든은 결국 두 개의 머리와 함께 잠들게 된 셈입니다.

전문가들이 조심스러워하는 대목

해석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사건의 큰 윤곽에는 이견이 거의 없습니다. 하이든의 머리가 도난당했고, 동기는 골상학이었으며, 1820년에 사건이 드러났고, 1954년에 유해가 다시 한곳에 모였다는 흐름입니다. 의견이 갈리는 부분은 그 사이에 벌어진 세부 장면입니다.

설(說) 매트리스에 숨겼다는 이야기, 아내의 기지, 인부를 매수한 정황, 누가 직접 칼을 댔는가 같은 생생한 디테일은 상당 부분 로젠바움 본인의 일기에서 나옵니다. 일기는 1차 자료로서 중요하지만, 동시에 사건의 당사자가 자기 시점에서 남긴 기록입니다. 흥미로운 일화일수록 전해지는 과정에서 장면이 더 선명하게 다듬어질 수 있으므로, 이런 세부 묘사는 그대로 확정된 사실처럼 읽기 어렵습니다.

도난이 벌어진 날은 1809년 6월 4일로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다만 매트리스에 숨긴 정황 같은 생생한 장면은 로젠바움의 일기에 크게 의존하므로, 이 글의 세부 묘사는 “대체로 이렇게 전해진다”는 범위에서 읽는 편이 정확합니다. 인물, 동기, 결말의 큰 뼈대는 여러 기록이 서로 맞물리기 때문에 비교적 안정된 서술로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놓지 못하는 이유

이 일화가 오래 회자되는 이유는 단순히 엽기적이어서가 아닙니다. 이야기 안에 여러 겹의 아이러니가 포개져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도굴에 가담한 사람들의 동기가 단순한 악의만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하이든을 깎아내리려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천재성을 눈에 보이는 증거로 확인하고 싶어 했습니다. 존경이 지나쳐 무덤까지 판 셈입니다. 둘째, 그 존경이 기대고 있던 학문이 지금 보면 터무니없었다는 점입니다. 머리 모양으로 사람의 재능과 성격을 읽을 수 있다는 골상학의 전제부터 근거가 약했습니다. 그러니 하이든의 머리에서 ‘음악의 혹’을 찾겠다는 발상도 처음부터 허술한 믿음 위에 서 있었습니다.

셋째는 결말의 엉뚱함입니다. 잘못된 매장을 바로잡으려는 시도가 145년 동안 이어진 끝에 하이든의 두개골은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무덤 안에는 두개골 두 개가 함께 남았습니다. 가짜 두개골을 꺼내지 않은 탓에, 바로잡으려던 시도는 기묘함을 하나 더 보탰습니다. 완벽한 복원이 아니라 어정쩡한 타협으로 끝났다는 점에서, 이 결말은 더 인간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클래식 음악을 멀리 있는 우아한 예술로만 여기다 보면 놓치는 것이 있습니다. 하이든이 살던 시대에도 사람들은 미신에 흔들렸고, 타인의 유해와 유품을 소유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혔고, 유명인의 흔적을 가까이 두고 싶어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유명인의 유해와 유품을 둘러싼 욕망이 200년 넘게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위대한 음악을 남긴 사람도 죽은 뒤에는 이토록 복잡하고 기묘한 뒷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하이든만 당한 게 아닙니다

확인된 사실 로젠바움과 페터만 죽은 천재의 두개골에 집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9세기 유럽에는 유명 작곡가의 머리뼈에서 천재성의 흔적을 찾으려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골상학은 머리뼈의 모양으로 성격과 능력을 읽을 수 있다고 주장했고, “천재의 뇌는 보통 사람과 다르게 생겼을 것”이라는 기대는 무덤 속 유해까지 확인하려는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베토벤슈베르트의 무덤도 이장 과정에서 열렸고, 그때 두개골이 참석자들 앞에 드러났습니다. 1888년 슈베르트의 유해를 새 묘지로 옮길 때 그 자리에는 작곡가 안톤 브루크너도 있었습니다. 브루크너는 슈베르트의 머리뼈를 두 손으로 받아 들고 한동안 내려놓지 못했다고 합니다. 베토벤의 유해를 마주했을 때도 그는 비슷한 행동을 했습니다. 존경과 집착의 경계가 지금보다 훨씬 흐릿했던, 그 시대 특유의 장면입니다.

설(說) 모차르트의 경우는 더 복잡합니다. 모차르트는 공동묘지에 묻혔고, 무덤 위치도 정확히 남지 않았습니다. 훗날 유해를 수습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무덤 파는 인부가 두개골을 따로 빼돌렸다는 전승이 따라붙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 두개골은 1902년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에 들어가 한동안 전시까지 됐습니다. 다만 정말 모차르트의 것인지는 지금도 확실치 않습니다. DNA 검사까지 동원됐지만 결론은 분명하게 나지 않았습니다.

이 배경을 알고 나면 하이든 사건은 조금 달리 보입니다. 몇몇 개인의 돌발적인 범죄만이 아니라, 골상학이라는 잘못된 과학과 천재 숭배가 맞물려 만들어 낸 시대의 유행이었습니다. 하이든은 그 유행이 가장 유명하고 가장 오래 이어진 사례였을 뿐입니다.

이 이야기를 알고 들으면 달라지는 곡

사람들이 머리뼈까지 훔쳐 가며 확인하려 했던 ‘음악 재능’은 하이든의 음악에서 어떻게 들릴까요. 위쪽에 올려 둔 재생기로 〈고별〉 교향곡 전곡을 틀어 두고 읽어도 좋습니다. 다만 이 뒷이야기와 가장 잘 맞물리는 곡을 하나 꼽자면 〈놀람〉 교향곡입니다.

하이든의 교향곡 94번 ‘놀람’은 2악장이 아주 여리게, 얌전하게 시작합니다. 자장가처럼 조용히 흐르던 음악은 어느 순간 오케스트라 전체의 큰 화음으로 한 번 터지고, 이 대목에는 조는 청중을 깨우려는 장난이었다는 이야기가 따라붙었습니다. 골상학자들이 그토록 찾아 헤맨 ‘음악의 혹’이 정말 있었다면, 그 정체는 청중의 허를 정확히 찌르는 이런 유머 감각에 가까웠을 겁니다.

머리뼈를 아무리 만져도 이런 재능은 알아낼 수 없습니다. 하이든의 재능은 결국 소리로만 확인됩니다. 아래 2악장의 그 유명한 한 방을 들을 때는, 그의 머리를 훔쳐서라도 비밀을 알고 싶어 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함께 떠올려 보세요.

여린 자장가 뒤에 숨은 한 방. 골상학자들이 찾던 ‘음악의 혹’은 결국 이 장난기였습니다.

같은 궁정에서 태어난 작품들

로젠바움이 몸담았던 에스테르하지 궁정은 하이든이 30년 가까이 일하며 수많은 작품을 남긴 곳이기도 했습니다. 머리 도난 사건의 배경이 된 이 궁정을 떠올리며 하이든의 대표작을 함께 들어 보면, 이 기묘한 사건은 단순한 엽기담이 아니라 한 작곡가의 명성과 시대 분위기가 뒤엉킨 이야기로 보입니다.

먼저 교향곡 45번 ‘고별’입니다. 단원들이 한 명씩 촛불을 끄고 무대를 떠나고, 끝에는 바이올린 두 대만 남는 곡이죠. 오래 머물던 단원들이 휴가를 원한다는 뜻을 하이든이 음악으로 에둘러 전한 작품입니다. 한 사람씩 사라진 뒤 마지막에 일부만 남는 이 결말은, 공교롭게도 훗날 그의 유해가 겪게 될 기묘한 운명까지 떠올리게 합니다.

실내악 쪽에서는 하이든의 현악 사중주를 빼놓기 어렵습니다. 하이든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현악 사중주의 틀을 사실상 다듬어 세운 작곡가입니다. 네 대의 현악기가 서로 대화하듯 주고받는 짜임새를 들으면, 골상학자들이 하이든의 머리에서 찾으려 했던 ‘작곡의 재능’이 결국 악보와 소리 속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점도 또렷해집니다.

하이든의 머리 도난은 실제로 있었던 일인가요?

네, 실제 사건입니다. 1809년 하이든이 죽고 며칠 뒤 두개골이 도난당했고, 1820년 유해를 이장하려다 이 사실이 드러났으며, 1954년에야 두개골이 무덤으로 돌아왔습니다. 인물과 동기, 큰 결말은 여러 기록으로 확인됩니다. 다만 매트리스에 숨겼다는 등의 생생한 장면은 범인 로젠바움의 일기에 크게 의존한 내용이라, 세부는 “그렇게 전해진다”는 정도로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범인들은 왜 머리를 훔쳤나요?

골상학 때문입니다. 골상학은 머리뼈의 모양으로 재능과 성격을 읽을 수 있다고 믿던 당시의 유행 학문이었습니다. 두 범인은 하이든의 머리에서 ‘음악을 담당하는 부위’가 얼마나 발달했는지 확인하고 싶어 했습니다. 오늘날 골상학은 과학적 근거가 없는 사이비과학으로 분류됩니다.

지금 하이든 무덤에는 머리가 몇 개 있나요?

두 개입니다. 1820년에 후작이 진짜인 줄 알고 묻은 대체 두개골이 있었는데, 1954년에 진짜 머리를 무덤에 넣으면서 그 두개골을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이젠슈타트의 하이든 무덤에는 유해와 함께 두개골 두 개가 나란히 들어 있습니다.

머리는 왜 145년이나 걸려서 돌아왔나요?

범인이 진짜 머리를 내놓지 않고 가짜를 넘긴 탓에, 두개골은 이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결국 빈 음악친우협회에 표본처럼 보관됐습니다. 1932년 새 무덤을 마련해 유해를 한데 모으려 했지만, 이후 정치적 혼란과 제2차 세계대전 등으로 절차가 계속 미뤄졌습니다. 이장은 1954년에야 마무리됐습니다.

참고 자료

이어서 듣기 — 뒷이야기 말고, 음악으로

머리를 둘러싼 소동은 여기까지입니다. 이제 두개골 이야기를 잠시 내려놓고, 하이든이 남긴 음악을 차분히 들어 볼 차례입니다. 아래 다섯 편은 이 글에서 스친 곡과 시대를 각자 다른 각도로 풀어 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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