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백건우 — 열 살의 그리그에서 70주년의 슈베르트까지

연주자
백건우 (피아니스트)
출생
1946년, 서울
수학
줄리아드 음악원(로지나 레빈) · 일로나 카보스 · 귀도 아고스티 · 빌헬름 켐프
레이블
낙소스 · BMG · 데카 · 도이치 그라모폰
주요 이력
1971 나움버그 국제 피아노 콩쿠르 1위
1993 디아파종 도르(프로코피예프 협주곡 전곡)
2000 호암상 예술상 ·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슈발리에

2026년 3월, 백건우는 슈베르트 소나타 네 곡을 다시 녹음해 내놓았습니다. 슈베르트 음반으로는 13년 만이었습니다. 여든에 가까운 나이에 이미 한 번 통과한 작곡가에게 돌아간 이유를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의 내가 도달한 지점에서 이 음악들을 다시 바라보고, 진실에 더 가까이 가고자 녹음했습니다.” 같은 해가 그의 데뷔 70주년이었습니다. 열 살 무렵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으로 처음 무대에 선 소년이 일흔 해를 건너와 여전히 녹음실에 앉아 있는 셈입니다.

예정 공연

공연 일정은 주최 측 사정으로 변경될 수 있습니다.

출처: (재)예술경영지원센터 공연예술통합전산망(www.kopis.or.kr)

줄리아드에서 나움버그까지

백건우의 이력에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스승의 목록입니다. 줄리아드에서 로지나 레빈에게 배웠고, 런던에서 일로나 카보스, 이탈리아에서 귀도 아고스티, 그리고 빌헬름 켐프에게도 배웠습니다. 레빈은 러시아 피아노 악파의 계보를 미국에 옮겨 심은 교사였고, 켐프는 독일 고전 레퍼토리의 살아 있는 표준이었습니다. 출신이 전혀 다른 네 사람에게 차례로 배운 이력이 나중의 레퍼토리 지도를 어느 정도 설명해 줍니다. 러시아 음악과 독일 고전, 프랑스 음악이 한 연주자 안에 나란히 들어앉은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1969년 부조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는 골드 메달을 받았습니다. 그해 대회의 1위는 다른 연주자에게 돌아갔고, 백건우의 골드 메달은 순위 입상과 별개로 기록된 항목이에요. 순위로 정점을 찍은 것은 1971년 나움버그 국제 피아노 콩쿠르 1위였습니다. 주최 재단은 지금도 그를 그해 피아노 부문 1위 수상자로 올려두고 있습니다.

사생활에서도 이 무렵이 분기점이었습니다. 1972년 뮌헨에서 배우 윤정희를 처음 만났고, 뒤에 파리에서 우연히 다시 마주치면서 교제가 시작됐습니다. 두 사람은 1976년 결혼해 반세기 가까이 함께했고, 윤정희는 2023년 1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러시아 음악을 통과하던 시기

백건우의 이름을 국제 음반 시장에 각인시킨 것은 러시아 레퍼토리였습니다. 그는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전곡을 안토니 비트가 지휘하는 폴란드 국립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낙소스에서 녹음했습니다. 협주곡 다섯 곡을 한 연주자가 통째로 담는 기획이었고, 이 음반으로 1993년 프랑스의 디아파종 도르와 누벨 아카데미 뒤 디스크 상을 받았습니다.

라흐마니노프 쪽에서는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작품 전곡을 블라디미르 페도세예프의 지휘로 BMG에서 녹음했습니다. 협주곡 네 곡에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까지 묶인 구성입니다. 스크랴빈 소나타를 포함한 독주곡 음반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소나타 1번·2번은 데카에서 나왔습니다. 스크랴빈 후기 소나타는 연주 기회 자체가 많지 않은 영역인데, 백건우는 이 구간을 피해 가지 않았습니다.

2000년에는 데카와 전속 계약을 맺습니다. 첫 발매 음반이 흥미롭습니다. 부조니가 피아노로 옮긴 바흐 오르간 작품집이었습니다. 러시아 협주곡으로 알려진 연주자가 전속 계약의 출발점으로 바흐 편곡집을 골랐다는 점은, 그가 자신을 어떤 연주자로 소개하고 싶어 했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같은 해 호암상 예술상을 받았고,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화예술공로훈장 슈발리에를 받았습니다.

프랑스 음악과 베토벤

데카 시기의 첫 결실은 포레였습니다. 2001년 7월 영국 스완지의 브랑윈 홀에서 녹음한 포레 피아노 작품집은 디아파종 도르를 받았습니다. 포레의 피아노 음악은 화려한 기교로 승부하는 영역이 아니라 화성이 조용히 미끄러지는 지점을 잡아내야 하는 음악이라, 러시아 협주곡을 주무기로 삼던 연주자에게 자연스러운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 비평지가 이 음반에 상을 준 사실이 그래서 더 의미가 있습니다.

그다음이 베토벤이었습니다. 2005년부터 2007년까지 데카에서 피아노 소나타 32곡 전곡을 녹음했습니다. 전곡 녹음은 연주자에게 일종의 신고서 같은 작업입니다. 특정 곡에서 잘 통하던 해법이 32곡을 관통해도 유효한지가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순 무렵에 이 작업을 통과했습니다.

이후의 목록은 오히려 넓어집니다. 2019년 쇼팽 야상곡 전곡, 2020년 슈만, 2024년에는 첫 모차르트 음반을 냈습니다. 첫 무대로부터 예순 해 넘게 지나서야 모차르트를 녹음했다는 점이 그의 접근 방식을 요약합니다. 이름값이 높은 레퍼토리부터 차례로 쓸어 담는 대신, 준비가 됐다고 판단한 순서대로 갔습니다.

앨범 듣는 순서

백건우의 음반은 40년 넘게 쌓여 있어 어디서 시작할지가 실제로 어렵습니다. 처음 듣는 분께는 쇼팽 야상곡 전곡을 권합니다. 곡이 익숙하고, 그의 후기 스타일이 가장 알아듣기 쉬운 형태로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야상곡은 템포를 조금만 밀거나 당겨도 인상이 완전히 달라지는 곡인데, 그는 선율을 노래시키려고 박을 흔드는 대신 왼손의 반주 음형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쪽을 택합니다. 야상곡 2번에서 그 차이가 바로 들립니다.

쇼팽 야상곡 2번 Op.9 No.2 — 백건우, 야상곡 전곡반 수록

두 번째로 갈 곳은 프로코피예프 협주곡 전곡입니다. 디아파종 도르를 받은 그 음반입니다. 쇼팽에서 들은 절제가 여기서는 다른 방향으로 쓰입니다. 프로코피예프 협주곡은 타건이 거칠어지기 쉬운 음악인데, 이 녹음은 음향을 키우는 대신 리듬의 각을 살려 추진력을 만듭니다. 3번 협주곡의 1악장 도입부를 다른 연주와 비교해 보시면 차이가 뚜렷해요. 협주곡 다섯 곡을 순서대로 다 들을 필요는 없습니다. 3번으로 들어가서 1번으로 돌아가는 쪽이 이 음반의 성격을 파악하기에 빠릅니다.

심화 단계는 스크랴빈 독주곡집입니다. 후기 소나타로 갈수록 조성이 흐려지면서 곡의 윤곽 자체가 잡히지 않는데, 여기서 연주자가 무엇을 붙들고 가느냐가 갈립니다. 백건우는 화성의 색을 과장하는 대신 성부의 진행을 또렷하게 남깁니다. 처음 들으면 담백하게 들리다가 두세 번째에 구조가 보이는 유형의 연주입니다. 스크랴빈을 처음 접하는 분이라면 소나타 4번부터 들어가 보세요. 후기작 가운데는 길이가 짧고 윤곽이 비교적 또렷한 편이라, 이 작곡가의 어법에 귀를 맞추기에 좋습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3번 ‘열정’ 1악장 — 백건우 실황

베토벤 전곡은 마지막에 두시는 편이 좋습니다. 32곡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것보다, 위의 세 갈래를 지난 뒤에 후기 소나타부터 거꾸로 들어가는 편이 그의 해석이 어디서 왔는지 훨씬 잘 보여요.

어떤 연주인가

백건우의 연주를 한마디로 요약하기 어려운 이유는 레퍼토리 폭이 넓어서가 아니라, 곡마다 접근이 달라 보이는데도 바탕에 같은 태도가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 태도는 소리를 앞세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쇼팽 야상곡에서 그는 선율을 크게 부풀리지 않습니다. 오른손이 노래하는 동안 왼손의 화성이 어떻게 바뀌는지가 같은 비중으로 들립니다. 야상곡 20번 유작에서 특히 그렇습니다. 이 곡은 감정을 과하게 실으면 금세 신파가 되는데, 그의 연주에서는 마지막 몇 마디가 조용히 닫힙니다.

쇼팽 야상곡 20번 유작 — 백건우, 야상곡 전곡반 수록

베토벤에서는 같은 태도가 다른 결과를 냅니다. ‘열정’ 1악장처럼 폭발을 기대하게 되는 대목에서 그는 음량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고 남겨 둡니다. 처음 들으면 밋밋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악장 전체를 통과하고 나면 어디서 무엇이 쌓였는지가 정리돼 있습니다. 절정을 한 번에 소진하지 않는 설계입니다.

포레와 프로코피예프가 한 연주자 안에서 공존하는 것도 이 지점에서 설명됩니다. 포레는 화성이 조용히 옮겨 가는 걸 들려줘야 하는 음악이고 프로코피예프는 리듬의 각으로 미는 음악인데, 둘 다 연주자가 자기 소리를 앞에 세우면 망가집니다. 그가 프랑스 비평지에서 두 번 상을 받은 레퍼토리가 하필 이 두 축이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닐 겁니다.

2026년의 슈베르트 신보는 이 태도가 어디까지 왔는지 보여주는 자리입니다. 13년 전에 이미 한 번 녹음한 작곡가에게 돌아가면서, 그는 새로운 해석을 찾았다고 하지 않고 진실에 더 가까이 가고자 했다고 말했습니다. 같은 곡을 다시 녹음하는 연주자들이 대개 무엇을 바꿨는지 말하는 것과는 방향이 다릅니다. 데뷔 70주년의 연주자가 여전히 도착점을 앞에 두고 말한다는 점이 그의 음반들을 관통하는 태도와 정확히 겹칩니다.

디스코그래피

쇼팽 야상곡 전곡 앨범 커버

쇼팽: 야상곡 전곡

도이치 그라모폰 · 2019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1·3·4번 앨범 커버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1·3·4번

낙소스 · 안토니 비트 지휘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2·5번 앨범 커버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2·5번

낙소스 · 안토니 비트 지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전곡과 파가니니 랩소디 앨범 커버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전곡 · 파가니니 랩소디

BMG · 블라디미르 페도세예프 지휘

스크랴빈 피아노 독주곡집 앨범 커버

스크랴빈: 피아노 소나타와 독주곡

데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소나타 1번 2번 앨범 커버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소나타 1번 · 2번

데카

포레 피아노 작품집 앨범 커버

포레: 피아노 작품집

데카 · 2001년 녹음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6-26번 앨범 커버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6~26번

데카 ·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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