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디 〈레퀴엠〉 — 교회 옷을 입은 오페라라는 조롱

만초니의 관 앞에서 시작된 90분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
(Giuseppe Verdi, 1813~1901)
곡명
레퀴엠(진혼 미사)
(Messa da Requiem)
작곡 기간
1873~1874년
(1869년에 쓴 ‘리베라 메’ 초안을 포함)
악장
7부
I. 레퀴엠과 키리에
II. 디에스 이라이(진노의 날) — 세부 10곡
III. 오페르토리오(봉헌)
IV. 상투스(거룩하시다)
V. 아뉴스 데이(하느님의 어린양)
VI. 룩스 에테르나(영원한 빛)
VII. 리베라 메(저를 구하소서)
편성
독창 4명(소프라노·메조소프라노·테너·베이스) + 혼성 합창
플루트 3(피콜로 겸), 오보에 2, 클라리넷 2, 바순 4, 호른 4, 트럼펫 8(4는 무대 밖), 트롬본 3, 오피클라이드, 팀파니, 큰북, 현 5부
초연
1874년 5월 22일, 밀라노 산 마르코 성당
베르디 지휘
연주 시간
약 90분

이 곡은 — 오페라 작곡가 베르디가 존경하던 소설가 알레산드로 만초니의 죽음을 계기로 쓴, 90분짜리 진혼 미사입니다.

딱 하나만 듣는다면 — 2부 ‘디에스 이라이’. 큰북이 바닥을 내려치고 합창이 비명처럼 터져 나오는, 이 곡에서 가장 강렬한 3분입니다.

먼저 들어볼 음반 —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지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EMI, 1964).

초연을 앞두고 악보를 미리 받아 본 독일의 지휘자 겸 평론가 한스 폰 뷜로는 이 곡을 한 문장으로 깎아내렸습니다. “교회 옷을 입은, 베르디의 최신 오페라.” 실제 연주를 한 음도 듣기 전이었습니다. 죽은 이를 위한 미사라기보다 성당으로 옮겨 온 오페라에 가깝다는 조롱이었죠.

그런데 이 조롱은 절반만 맞았습니다. 베르디의 레퀴엠은 실제로 오페라만큼 뜨겁지만, 그 뜨거움은 얄팍한 극장 효과가 아니었습니다. 뷜로 본인이 그 사실을 인정하기까지는, 그 말을 내뱉은 뒤로도 한참이 걸립니다.

흰 스카프와 실크햇 차림의 노년 베르디를 그린 조반니 볼디니의 초상화
평생 극장에서 살던 사람이 죽은 이를 위한 미사를 썼습니다. 조반니 볼디니가 그린 베르디.

로시니에게 못 바친 진혼곡

이 곡의 출발점은 베르디가 처음부터 혼자 쓰려던 작품이 아니라, 로시니를 추모하려던 공동 계획이었습니다. 1868년 11월, 〈세비야의 이발사〉로 유럽 오페라 무대의 사랑을 받은 작곡가 조아키노 로시니가 세상을 떠납니다. 베르디는 곧바로 동료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탈리아 작곡가 열세 명이 한 대목씩 나눠 맡아, 로시니 1주기에 진혼 미사를 함께 바치자는 제안이었습니다.

로시니는 당시 이탈리아에서 가장 널리 사랑받은 오페라 작곡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서른일곱 무렵 오페라 무대에서 물러난 뒤에도 미식, 짧은 소품, 사교 모임으로 이름을 남기며 이탈리아 음악계의 원로로 대접받았습니다. 베르디에게 로시니의 죽음은 한 작곡가의 죽음을 넘어, 이전 세대 이탈리아 오페라가 막을 내리는 사건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혼자 추모곡을 쓰기보다, 이탈리아 작곡가들이 함께 참여하는 공동 헌정을 구상했습니다.

베르디가 자기 몫으로 고른 대목은 진혼 미사의 마지막 부분인 ‘리베라 메(저를 구하소서)’였습니다. 죽은 이의 영혼이 마지막 심판 앞에서 구원을 청하는 대목입니다. 여러 부분 가운데 굳이 이 장면을 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심판의 공포와 구원의 간절함이 정면으로 부딪치는 마지막 장면이라, 오페라 작곡가였던 베르디의 극적 감각이 가장 잘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1869년 여름, 베르디는 이 곡을 완성해 놓고 출판업자 리코르디에게 편지를 씁니다. “내 곡은 완전히 끝나서 총보로 옮겨 놨네. 이제 관현악만 입히면 되는데, 몇 시간이면 될 일이야.”

하지만 이 공동 미사는 끝내 연주되지 못했습니다. 볼로냐의 산 페트로니오 성당에서 1869년 11월 연주할 예정이었지만, 지휘자 선정과 극장 운영 문제가 얽히면서 계획이 무산됩니다. 열세 대목으로 나뉜 악보는 그대로 보관되었고, 베르디가 심혈을 기울인 ‘리베라 메’도 함께 묻혔습니다. 이 악보 뭉치는 그로부터 100년쯤 지난 1970년, 음악학자 데이비드 로즌이 다시 찾아낼 때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실제 초연은 1988년에야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베르디는 그 ‘리베라 메’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몇 년 뒤 그는 이 대목을 다시 꺼내 대대적으로 고쳐 씁니다. 로시니에게 바치지 못한 진혼곡의 마지막 조각은, 훗날 다른 인물을 위한 미사의 중심부가 됩니다.

만초니의 관 앞에서

그 전혀 다른 사람은 알레산드로 만초니였습니다. 소설 《약혼자들》을 쓴 이탈리아의 국민 작가로, 당시 이탈리아 사람들에게는 문학의 아버지 같은 존재였습니다. 이 소설은 온 나라가 표준으로 삼은 이탈리아어의 기틀을 세운 책이었고, 여러 나라로 쪼개져 있던 이탈리아가 하나로 합쳐지던 시기에 ‘우리는 한 언어를 쓰는 한 민족’이라는 감각을 심어 준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베르디는 이 사람을 거의 신처럼 우러렀습니다. 열여섯 살에 《약혼자들》을 처음 읽고 평생의 책으로 삼았습니다. 1868년 마침내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뒤, 오페라로 온 유럽을 호령하던 쉰네 살의 베르디는 지인에게 이렇게 적었습니다. “사람을 숭배할 수 있다면, 나는 그 앞에 무릎을 꿇었을 겁니다.” 실제로 무릎을 꿇지는 않았어도, 그 마음이 어땠는지는 이 한 문장이 다 말해 줍니다.

1873년 5월 22일, 만초니가 여든여덟에 눈을 감습니다. 베르디는 장례식에 가지 않았습니다. 사람 많은 곳에서 슬픔을 내보이는 걸 못 견뎌서였습니다. 대신 베르디는 밀라노 시에 편지를 보내, 1주기에 맞춰 만초니의 진혼 미사를 직접 쓰고 직접 지휘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악보를 마련하는 비용도 자신이 떠안겠다고 했습니다.

이때 베르디는 쉰아홉 살이었습니다. 〈아이다〉를 끝낸 뒤 새 오페라 발표에서 한동안 물러나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런 사람을 다시 책상 앞으로 불러낸 것이 만초니의 죽음이었습니다. 이 레퀴엠은 베르디가 평생 쓴 몇 안 되는 종교 음악이자, 오페라 밖에서 자신의 극적인 힘을 대편성으로 쏟아부은 드문 대작이었습니다. 극장을 떠나 있던 노장이 오페라가 아닌 자리에서 자기 전부를 건 승부이기도 했습니다.

서랍 속에 있던 ‘리베라 메’도 이때 다시 살아납니다. 로시니를 위해 써 두었던 한 조각을 뼈대 삼아, 베르디는 아홉 달 만에 나머지 여섯 부를 새로 써냈습니다. 그래서 이 음악에는 두 사람의 죽음이 겹쳐 있습니다. 한 번은 로시니, 한 번은 만초니였습니다.

의자에 앉은 노년의 알레산드로 만초니를 그린 프란체스코 하예즈의 유화 초상
베르디가 무릎을 꿇고 싶다고까지 말했던 사람, 소설가 알레산드로 만초니. 프란체스코 하예즈 그림.

성당에 여자가 들어오려면

초연 장소는 밀라노의 산 마르코 성당으로 정해졌습니다. 넓고 울림이 좋은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 곡은 독창자 넷에 대규모 혼성 합창단, 큰북과 여덟 대의 트럼펫까지 동원하는 대편성이라 웬만한 성당에서는 수용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공간보다 더 까다로운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이 곡에는 여성 독창자와 여성 합창단이 꼭 필요했지만, 당시 가톨릭 성당에서는 여성이 제단 근처에서 노래하는 일을 금지하고 있었거든요.

붉은 벽돌 정면과 장미창이 있는 밀라노 산 마르코 성당 외관
1874년 5월 22일, 베르디가 직접 지휘봉을 들었던 밀라노 산 마르코 성당.

베르디는 밀라노 대주교에게 따로 허락을 받아야 했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대주교는 여성들을 한쪽에 세우고 격자로 가리라는 조건을 달았습니다. 그래서 주역 소프라노와 메조소프라노까지 포함해 무대에 선 여성 전원이 검은 옷에 베일을 쓰고, 시선이 쏠리지 않도록 커다란 격자 뒤에서 노래했다고 합니다. 죽은 자를 위한 미사를 성당에서 올리는 데에도 이만한 절충이 필요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주역 소프라노는 테레사 슈톨츠였습니다.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로 이름을 날린 가수로, 베르디가 가장 아끼던 목소리였습니다. 마지막 ‘리베라 메’에는 특히 까다로운 대목이 나옵니다. 여린 소리로 한 옥타브를 단숨에 뛰어올라 높은 시플랫(B♭)을 짚어야 하는 자리인데, 애초에 슈톨츠의 음색과 기량을 염두에 두고 쓴 부분입니다. 나머지 셋은 메조소프라노 마리아 발트만, 테너 주세페 카포니, 베이스 오르몬도 마이니가 맡았습니다.

1872년 아이다 무대의상을 입은 소프라노 테레사 슈톨츠의 사진 초상
‘리베라 메’의 높은 시플랫(B♭) 도약은 이 목소리를 염두에 두고 쓰였습니다. 1872년의 테레사 슈톨츠.

1874년 5월 22일, 만초니가 떠난 지 정확히 1년째 되는 날, 베르디가 직접 지휘봉을 들었습니다. 성당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찼고, 밖에는 들어오지 못한 인파가 몰렸습니다. 성당 안에서는 규정상 박수를 칠 수 없었지만, 연주가 끝난 뒤 이어진 긴 침묵만으로도 그날의 충격은 전해졌습니다. 사흘 뒤에는 같은 출연진이 라 스칼라 극장으로 자리를 옮겨 다시 연주했습니다. 이번에는 교회가 아니라 극장이었고, 박수와 앙코르가 쏟아져 일부 악장은 그 자리에서 다시 연주해야 했습니다. 성당에서 시작한 진혼곡은 사흘 만에 오페라 극장의 레퍼토리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이 미사가 무서운 이유

레퀴엠은 원래 죽은 이의 영혼이 평안히 쉬기를 비는 미사입니다. 그래서 많은 작곡가는 이 장르를 위로와 평온의 음악으로 다루었습니다.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슬픔 속에서도 기품을 지키고, 훗날 포레의 레퀴엠은 자장가처럼 부드럽습니다. 베르디는 정반대로 갔습니다. 그는 죽음을 위로가 아니라 공포로 그렸습니다.

그 차이는 베르디 자신의 태도에서 나옵니다. 베르디는 독실한 신자가 아니었고, 사후 세계에도 회의적인 편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죽음은 평온한 안식이라기보다 아무도 답을 모르는 어두운 질문에 가까웠습니다. 이 미사가 무서운 이유는,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이 죽음을 정직하게 바라본 음악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흔들림이 음악 속에서 어떻게 들리는지 하나씩 짚어 보겠습니다.

레퀴엠과 키리에 — 숨죽여 여는 죽음

시작은 의외로 조용합니다. 첼로가 거의 들릴 듯 말 듯 낮게 움직이고, 합창단이 소리를 죽여 “레퀴엠(안식을)”을 속삭입니다. 음악은 커지기보다 자꾸 안으로 잦아듭니다. 극장을 쥐락펴락하던 베르디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첫 몇 분은 조심스럽습니다.

곧이어 독창자 넷이 차례로 들어와 ‘키리에(주여, 자비를 베푸소서)’를 청합니다. 네 목소리가 포개지며 부드럽게 부풀어 오르는데, 여기까지는 오페라 아리아처럼 아름답습니다. 뷜로가 악보만 보고 “오페라”라고 비웃은 게 이런 대목이었을 겁니다. 실제로 이 도입부만 들으면 그 말이 아주 틀렸다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문제는 바로 다음이었습니다.

디에스 이라이 — 심판의 날, 큰북이 떨어진다

‘디에스 이라이’는 ‘진노의 날’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이 불타 재가 되고 죽은 자가 모두 심판대 앞에 서는 최후의 날을 노래한 라틴어 시입니다. 베르디는 여기서 음악을 무기로 바꿉니다. 관현악 전체가 반음계로 곤두박질치고, 그 위로 큰북이 규칙적으로 내리꽂힙니다.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그 ‘쿵’ 소리는, 관 뚜껑에 못을 박는 소리처럼 들립니다.

합창은 노래한다기보다 비명을 지릅니다. 이 3분은 클래식 음악을 통틀어 손꼽히는 공포 장면입니다. 영화 예고편이나 광고에서 “그 웅장하고 무서운 합창”이 흘러나온다면, 대개 이 대목입니다.

라 스칼라 극장 공식 영상으로 듣는 ‘디에스 이라이’. 큰북이 어디서 내리꽂히는지 귀 기울여 보세요.

🎧 여기서 들으세요 — 폭풍이 한 번 지나간 뒤, 무대 밖에 숨겨 둔 트럼펫들이 사방에서 울립니다. ‘투바 미룸(나팔 소리 울려 퍼지네)’ 대목입니다. 베르디는 트럼펫 여덟 대 중 넷을 객석 뒤나 옆에 따로 배치해, 최후의 심판을 알리는 나팔이 실제로 사방에서 들려오는 듯한 효과를 냈습니다.

잉게미스코 — 공포 한복판의 테너 아리아

‘디에스 이라이’는 하나의 큰 덩어리처럼 들리지만, 그 안에는 세부 대목이 열 개나 이어집니다. 큰북과 합창이 몰아치는 공포 사이사이에, 독창자들이 차례로 나서서 자기 몫의 두려움을 노래합니다. 메조소프라노는 심판의 책이 펼쳐지는 ‘리베르 스크립투스’에서 나지막이 운명을 예고합니다. 네 목소리가 모여 “이 비참한 내가 그때 무슨 말을 하리오”를 나눠 부르는 대목에서는, 소리가 거의 사라질 듯 여려집니다.

그중 테너의 ‘잉게미스코’는 이 곡에서 가장 사랑받는 5분짜리 대목입니다. “죄인처럼 신음하나이다”라는 뜻인데, 무섭기는커녕 애원하듯 아름답습니다. 심판의 공포 한복판에서 한 사람이 조용히 용서를 비는 이 아리아는, 오페라 무대에서 뚝 떼어 온 것 같습니다. 뷜로가 “오페라”라고 비웃을 만도 했습니다. 다만 그 오페라 같은 애원이, 라틴어 기도문을 어떤 설교보다 절실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이 대목만 따로 즐겨 부르는 테너도 많습니다.

공포와 애원이 번갈아 지나간 뒤, ‘디에스 이라이’는 ‘라크리모사(눈물의 날)’로 마무리됩니다. 메조소프라노가 이끄는 이 대목은, 앞선 심판의 굉음과 달리 흐느끼듯 가라앉습니다. 이 선율은 원래 베르디가 오페라 〈돈 카를로〉에서 잘라낸 이중창에서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버리기 아까웠던 오페라의 한 조각이 죽음의 미사 안에서 다른 얼굴로 되살아난 셈입니다. 두려움으로 시작한 2부가 눈물로 닫히면서, 40분에 이르는 이 긴 악장은 비로소 숨을 고릅니다.

봉헌부터 룩스 에테르나까지 — 잠깐의 숨 고르기

공포가 한바탕 지나가면 음악은 잠시 숨을 고릅니다. 독창자 넷이 앞으로 나서는 ‘오페르토리움(봉헌)’은 이 곡에서 가장 오페라에 가까운 대목입니다. 네 사람의 목소리가 서로 얽히고 받아치는 모습이, 무대 위 4중창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합니다. 이어지는 ‘상투스(거룩하시다)’에서는 합창단이 두 패로 갈라져 8성부로 서로를 뒤쫓습니다. 죽음의 공포 뒤에 오는, 짧고 눈부신 환희입니다.

‘아뉴스 데이(하느님의 어린양)’에서는 소프라노와 메조소프라노가 옥타브 간격으로 같은 선율을 나란히 부릅니다. 반주가 거의 없어서 두 목소리가 허공에 매달린 것처럼 위태롭게 들립니다. 두 사람이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붙어야 하는, 겉보기와 달리 아주 까다로운 대목입니다. 이어지는 ‘룩스 에테르나(영원한 빛)’에서는 메조소프라노·테너·베이스 세 독창자가 죽은 이에게 영원한 빛이 비치기를 청합니다.

여기까지 오면 음악은 확실히 부드러워집니다. 공포는 지나갔고 이제 다 끝난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베르디는 마지막 카드를 아껴 두었습니다. 진짜 승부는 맨 마지막 악장에 있습니다.

리베라 메 — 소프라노 홀로 심판 앞에

마지막 ‘리베라 메’는 소프라노 혼자 시작합니다. 반주도 없이, 거의 말하듯이 “저를 구하소서, 주여, 그 무서운 날에”를 읊조립니다. 그러다 갑자기, 앞에서 모든 것을 뒤흔들었던 ‘디에스 이라이’의 공포가 통째로 되돌아옵니다. 큰북이 다시 떨어지고, 합창이 비명을 지릅니다. 심판은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부드러운 ‘룩스 에테르나’로 마음을 놓았던 청중을, 베르디는 마지막 순간에 다시 벼랑 끝으로 데려갑니다. 위로가 찾아온 듯 보이는 순간 공포를 되돌려 놓는, 지독하게 극적인 구성입니다.

바로 이 대목이, 로시니를 위해 5년 전에 써 두었던 그 조각입니다. 베르디가 묵혀 두었다가 다시 꺼내 다듬은 음악이죠. 폭풍이 잦아든 뒤, 소프라노는 여린 소리로 한 옥타브를 단숨에 뛰어올라 높은 시플랫을 짚어야 합니다. 크게 지르는 고음보다, 이렇게 작게 떠오르는 도약이 훨씬 어렵습니다. 슈톨츠의 목소리를 염두에 두고 쓴 그 자리에서, 지금도 모든 소프라노가 시험대에 오릅니다. 곡은 위로가 아니라 물음표로 끝납니다. 구원받을 수 있을까 — 답은 없습니다.

교회 옷을 입은 오페라?

다시 뷜로의 조롱으로 돌아가 봅니다. “교회 옷을 입은 오페라”라는 말에는 당시 독일권 비평가들이 이탈리아 음악을 낮춰 보던 시선이 묻어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음악은 결국 오페라에 머물고, 진지한 음악은 독일 전통에 있다는 식의 편견이었습니다. 뷜로는 그 편견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사람입니다. 더구나 그는 악보만 훑어봤을 뿐, 실제 연주는 듣지도 않은 채 그런 말을 내뱉었습니다.

그런데 독일 음악의 중심에 있던 작곡가 요하네스 브람스는 다르게 보았습니다. 브람스는 이 악보를 자세히 들여다본 뒤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뷜로가 제대로 바보짓을 했군. 이건 천재만이 쓸 수 있는 곡이야.” 오페라에서 길러진 극적인 힘이 이 미사를 오히려 더 절실하고 경건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브람스는 꿰뚫어 봤습니다.

뷜로 본인도 결국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그는 조롱을 내뱉은 뒤에도 오랫동안 이 곡의 실제 연주를 듣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연주장에서 전곡을 듣고 난 뒤에야, 그는 베르디에게 사과 편지를 보내 자신의 경솔함을 인정했다고 전해집니다. 무대 옷을 입었든 교회 옷을 입었든, 90분짜리 이 음악 앞에서 편견은 오래 버티지 못했습니다. 악보만 보고 판단한 사람이 가장 늦게 그 판단을 거둔 셈입니다.

성당을 나와 유럽을 돌다

밀라노에서 거둔 성공은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베르디는 이 작품을 직접 지휘하며 유럽 주요 도시로 가져갔습니다. 초연 이듬해 파리에서는 그가 지휘한 공연이 몇 주 사이 여러 차례 다시 열릴 만큼 인기를 끌었고, 빈과 런던에서도 큰 반향을 얻었다고 전해집니다. 성당 안의 의식 음악으로만 여겨지던 종교 음악이, 이 진혼곡을 통해 콘서트홀의 대표 레퍼토리로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초연 이후 150년이 지난 지금도, 베르디의 레퀴엠은 세계에서 가장 자주 연주되는 대규모 합창곡으로 손꼽힙니다. 전쟁이나 재난으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을 때, 이 곡은 추모 공연의 프로그램에 자주 오릅니다. 죽음의 공포를 정면으로 들려주던 음악이, 아이러니하게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서로를 위로하는 자리에서 다시 울려 퍼집니다.

💡 사실은요 — ‘레퀴엠’을 슬프고 차분한 장례 음악으로만 아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레퀴엠(Requiem)은 원래 죽은 이를 위한 미사의 첫 단어 ‘레퀴엠(안식을)’에서 온 이름입니다. 그래서 레퀴엠은 하나의 고정된 분위기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베르디처럼 죽음을 공포로 그릴 수도 있고, 포레처럼 자장가에 가깝게 부드럽게 그릴 수도 있습니다. 서로 분위기는 달라도, 모두 같은 라틴어 미사 텍스트를 바탕으로 한 레퀴엠입니다.

악보와 함께 듣기

악보가 함께 흐르는 전곡 영상. ‘디에스 이라이’에서 관현악이 어떻게 아래로 쏟아지는지 눈으로도 보입니다.

귀로만 듣던 ‘디에스 이라이’를 악보로 보면, 관현악 전체가 반음씩 미끄러져 내려가는 흐름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큰북이 어느 박에 터지는지, 여덟 대의 트럼펫이 어떻게 사방으로 흩어지는지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라틴어 가사 밑에 우리말 뜻을 떠올리며 따라가면, 이 곡이 왜 그렇게 극적인지 더 또렷해집니다.

악보 공유 사이트 IMSLP의 베르디 레퀴엠 악보 보기 (IMSLP) 페이지에서는 원본 총보를 누구나 무료로 열람할 수 있습니다.

어떤 연주로 시작할까

이 곡은 지휘자의 성향이 극명하게 갈립니다. 공포를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연주가 있고, 오히려 성당의 경건함을 앞세우는 연주가 있습니다. 성격이 다른 세 장을 골랐습니다.

👑 첫 감상 추천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합창단

EMI · 1964

공포와 경건함의 균형을 잡아 주는 기준점으로 삼기 좋습니다. 슈바르츠코프·루트비히 등 전설적인 독창진도 함께 들을 수 있습니다. 다만 요즘 녹음처럼 선명한 음질을 기대하면 다소 오래된 소리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레퍼런스

리카르도 무티 ·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합창단

CSO Resound · 2010

이탈리아 지휘자가 미국 최정상 악단과 만든, 힘과 정밀함을 겸비한 현대 녹음입니다. 이듬해 그래미상을 받았습니다. 줄리니의 온기보다 날카로움을 원하는 사람에게 맞습니다.

와일드카드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 NBC 심포니 오케스트라

RCA · 1951

베르디를 직접 만났던 지휘자의 불같은 해석입니다. 속도가 빠르고 한 치의 여유도 없이 몰아붙입니다. 낡은 모노 음질이라 첫 감상용으로는 권하지 않지만, 토스카니니식 직선적인 열기를 느끼고 싶다면 들어볼 만합니다.

베르디 레퀴엠은 왜 ‘오페라 같다’는 말을 듣나요?

베르디가 평생 오페라 무대에서 극적인 선율과 장면 전환을 다뤄 온 작곡가였기 때문입니다. 독창자는 인물처럼 노래하고, 관현악과 합창은 미사곡 안에서도 거대한 극적 폭발을 만들어 냅니다. 지휘자 한스 폰 뷜로가 초연 전 악보만 보고 “교회 옷을 입은 오페라”라 조롱한 데서 이 표현이 굳어졌습니다. 다만 브람스를 비롯한 많은 사람은, 그 극적인 힘이 오히려 이 곡을 더 경건하게 만든다고 봤습니다.

이 곡은 누구를 위해 쓴 건가요?

이탈리아의 국민 소설가 알레산드로 만초니를 추모하기 위해 쓴 곡입니다. 만초니는 베르디가 깊이 존경하던 인물로, 1873년 5월 22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베르디는 그 1주기에 맞춰 1874년 5월 22일 밀라노 산 마르코 성당에서 직접 지휘로 초연했습니다.

‘디에스 이라이’가 그렇게 유명한 이유가 뭔가요?

‘진노의 날’이라는 뜻으로, 최후의 심판을 그린 대목입니다. 큰북이 규칙적인 충격처럼 울리고 합창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로 몰아치는 3분 남짓한 이 대목은, 클래식에서 가장 강렬한 공포 장면으로 꼽힙니다. 영화 예고편이나 광고에서 무섭고 웅장한 합창이 나온다면 대개 이 부분입니다. 이 주제는 곡 후반의 ‘리베라 메’에서 한 번 더 돌아옵니다.

연주 시간이 얼마나 되나요? 처음 들어도 괜찮을까요?

전곡은 약 90분입니다. 처음이라면 2부 ‘디에스 이라이’부터 들어 보길 권합니다. 3분 남짓한 대목 안에 이 곡의 성격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거기서 마음이 움직이면 앞뒤로 넓혀 가면 됩니다. 라틴어 가사를 몰라도 감상에는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리베라 메’가 로시니 추모곡에서 왔다는 게 무슨 말인가요?

1868년 작곡가 로시니가 죽자, 베르디는 이탈리아 작곡가 열세 명이 한 곡씩 맡는 공동 진혼 미사를 제안하고 자신은 마지막 ‘리베라 메’를 맡았습니다. 이 공동 미사는 준비 과정의 갈등으로 실제 무대에 오르지 못했지만, 베르디는 자신이 쓴 ‘리베라 메’를 버리지 않고 다시 손봐 만초니 레퀴엠의 마지막 악장으로 되살렸습니다.

참고 자료

이어서 듣기 — 죽음을 노래한 다른 방식들

죽음을 다룬 음악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말합니다. 베르디가 심판의 공포를 앞세웠다면, 아래 작품들은 같은 주제를 위로와 체념, 춤, 그리고 지휘자의 해석으로 마주합니다. 나란히 들으면 ‘죽음의 음악’이라는 말 안에 얼마나 다양한 표정이 들어 있는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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