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콥스키 백조의 호수 — 작곡가가 한 번도 못 본 그 발레

그가 죽고 나서야 사랑받기 시작한 발레

작곡가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
곡명
백조의 호수, 작품번호 20
(Swan Lake, Op. 20)
작곡 기간
1875년 봄 ~ 1876년 4월
구성
4막 (1877년 원전)
1895년 부활판은 3막 4장

주요 장면: 백조의 테마(2막) · 네 마리 백조의 춤 · 흑조 그랑 파드되(3막)
편성
플루트 2(피콜로 1), 오보에 2, 클라리넷 2, 바순 2, 호른 4, 코넷 2, 트럼펫 2, 트롬본 3, 튜바, 팀파니, 심벌즈, 큰북, 트라이앵글, 글로켄슈필, 하프, 현 5부
초연
1877년 3월 4일(구력 2월 20일), 볼쇼이 극장, 모스크바
율리우스 라이징거 안무 / 스테판 랴보프 지휘
연주 시간
전막 약 2시간 30분 (음악 약 150분)

1875년 봄, 모스크바 제국극장이 한 작곡가에게 발레 음악을 주문합니다. 보수는 800루블. 받아 든 사람은 그때까지 발레라곤 단 한 곡도 써본 적 없는 서른다섯의 차이콥스키였지요.

그렇게 태어난 《백조의 호수》는 오늘날 지구에서 가장 자주 무대에 오르는 발레가 됐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이름으로 사랑하는 무대를, 정작 차이콥스키는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초상 사진
젊은 시절의 차이콥스키. 백조의 호수를 맡았을 때 그는 발레를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신참이었다.

초연이 망했다는 거짓말

백조의 호수를 따라다니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1877년 초연이 처참한 실패였다는 거지요. 안무는 엉성하고 지휘는 둔했고, 관객은 등을 돌렸다고. 비운의 걸작이 뒤늦게 빛을 봤다는 서사는 달콤하고,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좋습니다.

그런데 기록을 한 줄씩 따라가 보면 이야기에 구멍이 납니다. 라이징거가 안무한 그 볼쇼이 프로덕션은 1877년부터 1883년까지 무대에 올랐거든요. 6년. 공연 횟수는 마흔한 번. 정말 망한 작품이라면 극장이 6년이나 끌고 갈 이유가 없습니다.

평론이 짚은 약점도 묘합니다. 너무 시끄럽다, 너무 바그너 같다, 너무 교향곡적이라 도무지 춤출 수가 없다 — 당시 비평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다시 말해 음악이 형편없어서가 아니라, 발레 반주치고는 음악이 너무 야심차고 무거워서 욕을 먹은 셈입니다. 칭찬과 비난이 같은 자리에서 충돌한 거지요.

초연 무대 자체도 매끄럽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무용수들은 낯선 음악에 애를 먹었고, 몇몇 장면에서는 차이콥스키의 곡 대신 추기 편한 다른 음악을 끼워 넣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거든요. 작곡가가 공들여 짠 흐름이 무대 위에서 토막 나 버린 셈입니다. 그러니 그가 느낀 실망에 까닭이 아주 없지는 않았겠지요.

정작 “실패”라는 단어를 가장 단호하게 쓴 사람은 평론가가 아니라 차이콥스키 본인이었습니다. 자기 음악이 받아 마땅한 환대를 못 받았다고 느낀 예민한 작곡가의 자기 판정. 그 판정이 130년 동안 사실처럼 굳어버린 겁니다. 그렇다면 애초에, 교향곡을 쓰던 이 사람은 왜 발레에 손을 댔을까요?

교향곡 쓰던 사람이 왜 발레를

1875년 9월, 차이콥스키는 동료 작곡가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편지를 씁니다. 발레를 맡은 이유를 이렇게 적었지요. “돈이 필요하기도 했고, 오래전부터 이런 음악을 한번 써보고 싶었거든요.” 솔직합니다. 낭만도 사명감도 아닌, 생활비와 호기심이 반반이었던 셈입니다.

당시 발레 음악은 작곡가에게 격이 낮은 일감이었습니다. 무용수가 다리를 들 때 박자를 깔아주고, 회전할 때 신호를 주는 기능음악. 진지한 작곡가가 이름 걸고 덤빌 영역이 아니었던 까닭입니다. 그런데 차이콥스키는 교향곡 작곡가의 머리를 그대로 들고 무용실에 들어왔습니다.

결과는 충돌이었습니다. 선율은 길고 화성은 복잡하고, 한 장면이 다음 장면으로 유기적으로 흐릅니다. 무용수들은 당황했지요. “이 박자에 어떻게 춤을 추라는 거냐”는 불평이 무대 뒤에서 흘러나왔습니다. 발레를 위해 쓴 음악이 발레보다 커져버린 것, 그게 이 곡의 첫 번째 비극이자 첫 번째 위대함이었습니다.

비교해 보면 차이가 선명합니다. 당시 제국극장에는 발레 음악만 전문으로 찍어내는 작곡가들이 따로 있었거든요. 무용에 딱 맞춰 박자를 깔고, 무용수가 돋보이게 슬쩍 비켜서고, 공연이 끝나면 잊혀도 그만인 음악. 그 자리에 차이콥스키는 끝까지 자기 목소리를 내려는 교향곡 작곡가의 고집을 들고 들어왔습니다. 반주여야 할 음악이 주인공 자리를 넘봤으니, 무대가 삐걱댄 건 어쩌면 예고된 일이었지요.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차이콥스키가 백조라는 소재를 처음 만진 건 이때가 아니라고 합니다. 1871년 무렵, 누이가 사는 카멘카 시골 별장에서 조카들을 즐겁게 해주려고 《백조의 호수》라는 작은 가정용 발레를 만들어 함께 놀았다는 거지요. 사료가 아주 단단한 일화는 아니지만, 백조라는 이미지가 그의 안에서 꽤 오래 헤엄치고 있었던 건 분명해 보입니다.

호숫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나

음악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야기를 짚어 두지요. 백조의 호수는 네 막에 걸쳐 두 개의 세계를 오갑니다. 한쪽은 햇빛 드는 궁정, 다른 쪽은 달빛 어린 호수예요. 1막은 지크프리트 왕자의 성년 잔치입니다. 친구들이 모여 그 유명한 왈츠를 추고 술잔이 오가지만, 정작 왕자는 “이제 신붓감을 정하라”는 어머니의 말에 마음이 무겁지요.

답답한 마음에 친구들과 호숫가로 사냥을 나간 그는, 믿기 힘든 장면과 마주합니다. 백조 한 마리가 달빛 아래 여인으로 변하거든요. 오데트 공주입니다. 악마 폰 로트바르트의 저주에 걸려 낮에는 백조로, 밤에만 잠깐 사람으로 돌아오는 신세지요. 저주를 풀 길은 단 하나, 누구도 사랑한 적 없는 사람이 그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것뿐입니다. 왕자는 그 자리에서 마음을 빼앗기고, 내일 무도회에서 너를 신부로 택하겠다 약속합니다.

문제는 로트바르트가 한 수 앞서 있었다는 겁니다. 무도회 날, 악마는 자기 딸 오딜에게 오데트의 얼굴을 씌워 데려오지요. 검은 백조입니다. 왕자는 감쪽같이 속아 오딜에게 사랑을 맹세하고, 바로 그 순간 진짜 오데트의 운명은 끊어집니다. 맹세는 한 번뿐이었으니까요. 뒤늦게 진실을 안 왕자가 호숫가로 내달리지만, 그를 기다리는 건 돌이킬 수 없는 작별입니다. 이 단순한 뼈대 위에 차이콥스키가 살을 붙인 방식, 그게 이제부터 들을 음악입니다.

백조는 오보에로 운다

2막. 무대가 어두워지고, 달빛 아래 호숫가가 펼쳐집니다. 하프가 잔물결을 긋고 현악기가 가늘게 떨면서 수면을 만들지요. 그 위로 한 악기가 홀로 멜로디를 들고 올라옵니다. 바이올린이 아닙니다. 오보에입니다.

백조는 오보에로 웁니다. 발레에서 가장 아름다워야 할 순간에, 차이콥스키는 가장 외롭고 가는 목관 하나를 무대 한가운데 세웠습니다. b단조. F음에서 시작해 으뜸음 B로 떨어지는, 솟구쳤다가 도로 주저앉는 짧은 선율. 이 테마가 곧 오데트입니다. 마법에 걸려 낮에는 백조로, 밤에만 사람으로 돌아오는 공주.

이 짧은 가락이 무서운 건, 한 번 듣고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곡 전체를 떠돌며 위기의 순간마다 다시 고개를 내밀거든요. 처음엔 가냘프게, 클라이맥스에선 오케스트라 전체가 그 선율을 받아 천둥처럼 쏟아냅니다. 같은 멜로디인데 처음엔 속삭임이고 나중엔 비명입니다. 한 인물의 운명을 음 몇 개로 묶어두는 솜씨, 이게 교향곡 작곡가가 발레에 들여온 무기였습니다.

왜 하필 오보에였을까요. 이 악기는 갈대 두 장을 맞물려 소리를 내는 탓에, 음색에 묘하게 우는 듯한 콧소리가 섞입니다. 시원하게 뻗는 대신 가늘게 떨리지요. 사람이면서 백조인, 자유롭지 못한 존재를 그리기엔 그만한 악기가 없었습니다. 거기에 하프가 물방울을 떨구고 현이 수면을 흔들면, 무대에는 안개 낀 호수 하나가 통째로 들어섭니다. 무용수가 등장하기도 전에, 음악이 먼저 그 세계를 깔아 두는 거예요.

2막 첫 장면 ‘정경’. 0분대에 오보에가 들고 나오는 그 선율이 백조의 호수 전체의 심장이다.

발목을 묶고 추는 네 마리 백조

백조의 호수에서 멜로디 하나만 꼽으라면 백조의 테마지만, 동작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네 마리 작은 백조의 춤》입니다. 광고에서, 예능에서, 패러디에서 수없이 베껴 쓰인 그 16마디. 네 무용수가 서로 팔을 엇갈려 깍지를 끼고, 머리를 좌우로 또각또각 까딱이며 종종걸음으로 무대를 가로지르지요.

음악은 얄미울 만큼 단순합니다. 바순이 똑딱똑딱 발걸음을 찍어주고, 그 위로 가벼운 가락이 통통 튑니다. 그런데 이 단순함이 무용수에겐 함정이지요. 팔이 묶여 있으니 한 명만 박자를 놓쳐도 네 명이 동시에 휘청합니다. 도망갈 곳이 없는 춤. 음악이 네 사람의 발목을 한 줄로 꿰어 버립니다.

이 깍지 낀 춤이 원래 다 자라지 못한 새끼 백조들을 그린 장면이라는 점도 재미있습니다. 그래서 동작도 종종걸음에 고갯짓이 콩콩거리지요. 보는 사람 눈엔 한없이 귀엽지만, 무대 뒤 무용수들 사이에선 “가장 환하게 웃으며 가장 이를 악물고 추는 장면”으로 통한다고 합니다.

군무도 마찬가지입니다. 호숫가를 가득 메운 백조 무리, 코르 드 발레가 같은 각도로 팔을 들고 같은 호흡으로 고개를 숙입니다. 여기서 음악은 지휘봉이 아니라 줄자예요. 스무 명을 한 사람처럼 보이게 만드는 건 무용수의 의지가 아니라 차이콥스키가 깔아둔 박절의 격자거든요. 차갑고 정확하고, 그래서 더 시립니다.

스페인, 나폴리, 헝가리 — 무도회의 여행

3막은 무대가 완전히 뒤바뀝니다. 시린 호숫가에서 촛불 환한 궁정 무도회장으로. 왕자의 신붓감 후보로 여러 나라 공주가 도착하고, 저마다 자기 고향의 춤을 선보이지요. 차이콥스키는 이 대목을 작은 세계 여행처럼 꾸몄습니다.

캐스터네츠가 또각이는 스페인 춤, 탬버린이 통통 굴러가는 나폴리 춤, 느리게 흐느끼다 불붙듯 빨라지는 헝가리 차르다시. 박자도 색깔도 제각각인 민족 무곡들이 줄지어 지나갑니다. 흥미롭게도 1895년 부활판에서 나폴리 춤과 헝가리 춤의 안무를 맡은 사람이 이바노프였거든요. 호숫가의 백조를 빚은 그 손이 무도회의 흥까지 함께 쥐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이 화사한 여행은 사실 덫입니다. 관객의 눈이 이국적인 춤에 즐겁게 풀어진 바로 그때, 진짜 사건이 무도회장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오거든요. 검은 드레스를 입은 낯선 여인과 함께 말이지요.

백조를 이긴 건 흑조였다

백조의 호수의 가장 잔인한 장치는 따로 있습니다. 순결한 백조 오데트와 그를 흉내 낸 가짜, 흑조 오딜을 한 무용수가 1인 2역으로 춘다는 점이지요. 흰 깃털과 검은 깃털, 사랑과 속임수를 같은 몸이 오가야 합니다. 발레리나에게 이건 배역이 아니라 시험입니다.

그 시험의 정점이 3막 흑조의 그랑 파드되에 박혀 있습니다. 오딜이 왕자를 홀리며 제자리에서 서른두 바퀴를 도는 푸에테 앙 투르낭. 한 발로 중심을 잡고 다른 다리를 채찍처럼 휘둘러 몸을 돌리는 동작을, 멈추지 않고 서른두 번. 1895년 초연에서 이탈리아 발레리나 피에리나 레냐니가 이걸 처음 선보였을 때, 객석이 뒤집어졌다고 합니다.

이 회전이 단순한 묘기가 아닌 건, 극의 가장 잔인한 순간과 겹치기 때문입니다. 오딜이 왕자를 홀리며 팽이처럼 도는 동안, 무대 한구석 창밖에서는 진짜 오데트가 날개를 퍼덕이며 소리 없이 절규하거든요. 화려함과 파국이 같은 음악 위에 포개지는 자리. 관객은 박수를 치고 싶은데, 동시에 가슴 한쪽이 무너집니다. 차이콥스키의 음악은 그 모순된 감정을 정확히 같은 박자에 묶어 둡니다.

피에리나 레냐니가 연기한 백조의 호수 오데트 오딜
1895년 부활판의 오데트 겸 오딜, 피에리나 레냐니. 32회 회전이라는 전설은 이 사람 발끝에서 시작됐다.

이 모든 비극의 설계자인 폰 로트바르트는 무대에서 흔히 거대한 부엉이나 검은 날개의 형상으로 등장합니다. 음악도 그를 따라 어둡게 깔리지요. 가녀린 오보에의 백조와 묵직한 저음의 악마가 같은 호숫가에서 맞부딪히는 구도, 선과 악을 음색으로 갈라놓는 이 단순하고도 분명한 대립이 두 시간을 끌고 가는 엔진입니다.

혹시 영화 《블랙 스완》을 봤다면, 나탈리 포트만이 백조와 흑조 사이에서 무너져 가던 그 광기를 기억할 겁니다. 그 영화가 빌려 온 게 바로 이 1인 2역의 구조예요. 한 사람 안에 선과 악을 동시에 욱여넣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차이콥스키는 그 질문을 음악으로 먼저 던졌고, 한 세기 뒤 할리우드가 그걸 받아 카메라로 되물은 거예요.

로열 발레가 추는 3막 흑조 코다. 끝부분, 제자리에서 멈추지 않고 도는 32회 회전을 눈으로 세어 보시길.

차이콥스키가 못 본 초연

이제 첫 문장의 수수께끼로 돌아가 봅시다. 차이콥스키는 1893년 11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그때 백조의 호수는 16년 전 볼쇼이에서 한 차례 올랐다가 서서히 잊혀 가던, 작곡가 본인이 실패작으로 분류해 둔 옛 곡이었지요.

반전은 그가 죽고 1년 남짓 뒤에 일어납니다. 1895년 1월 15일,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 두 안무가가 이 곡을 통째로 다시 세웠습니다. 마리우스 프티파가 궁정 장면을, 레프 이바노프가 호숫가 백조 장면을 맡았지요. 우리가 백조의 호수 하면 떠올리는 그 시리고 정갈한 군무, 달빛 아래 백조들이 줄지어 날개를 접는 장면은 거의 다 이바노프의 손에서 나온 겁니다.

안무가 레프 이바노프 초상
레프 이바노프. 오늘날 우리가 사랑하는 호숫가 백조 군무를 만든 사람인데, 정작 이름은 프티파의 그늘에 가렸다.

사실 부활의 불씨는 1894년 2월에 먼저 댕겨졌습니다. 차이콥스키를 추모하는 음악회에서 이바노프가 백조의 호수 2막만 따로 떼어 무대에 올렸거든요. 단 한 막이었는데도 반응이 뜨거웠습니다. 죽은 작곡가의 잊힌 발레가 추모의 밤에서 가장 빛나는 순서가 된 거지요. 이 한 막의 성공이 “이 곡을 전곡으로 제대로 다시 세우자”는 결정으로 이어졌습니다. 비극적이게도, 작곡가의 죽음이 그 작품을 살려낸 셈입니다.

악보에도 손이 갔습니다. 극장 지휘자 리카르도 드리고가 차이콥스키의 동생 모데스트의 동의를 받아 곡 순서를 바꾸고 일부를 덜어내고 보탰지요. 모데스트는 대본의 결말도 다듬었습니다. 원작에서도 두 연인은 죽지만, 이 부활판에서 오데트는 스스로 호수에 몸을 던지고 왕자가 뒤를 따르며, 두 영혼이 마지막에 함께 떠오릅니다.

안무가 마리우스 프티파 1898년 초상
마리우스 프티파. 부활판의 총괄이자 궁정 장면의 설계자였다.

그렇다면 1877년 라이징거의 원래 안무는 어떻게 됐을까요. 거의 사라졌습니다. 오늘날 어떤 무대도 그 첫 버전을 그대로 되살리지 않거든요. 우리가 100년 넘게 백조의 호수라 믿고 본 것은 처음부터 부활판이었고, 진짜 첫 모습은 빛바랜 기록 몇 줄로만 남았습니다. 원작이 잊힌 자리에 개정판이 원작 행세를 하게 된, 음악과 무용을 통틀어 보기 드문 경우지요.

그러니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극장에서 보고 박수 치는 백조의 호수는 1877년 차이콥스키의 원본이 아니라, 그가 죽고 난 뒤 프티파·이바노프·드리고·모데스트 네 사람의 손을 거쳐 다시 태어난 1895년 판본입니다. 안무도, 곡 순서도, 결말도 그가 모르는 것이지요. 우리가 박수 치는 백조의 호수는, 정작 작곡가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백조의 호수입니다.

세 발레 중 맏이

여기엔 운명의 장난 같은 구석이 있습니다. 차이콥스키는 백조의 호수에 데인 뒤 한동안 발레 근처에도 가지 않았거든요. 그러다 십수 년이 지나, 마리우스 프티파와 손잡고 《잠자는 숲속의 미녀》(1890)를 내놓습니다. 이번엔 대성공이었지요. 이듬해엔 《호두까기 인형》(1892)의 음악까지 남기는데, 초연 무대의 평은 미지근했어도 그 선율만큼은 오늘날 누구나 흥얼거립니다.

그러니까 백조의 호수는 차이콥스키가 남긴 세 편의 발레 중 맏이입니다. 가장 먼저 태어나, 가장 서툴게 데뷔하고, 가장 늦게 사랑받은 맏이. 동생들이 무대에서 갈채를 받는 동안 형은 구석에 잊혀 있었던 셈이에요. 그런데 정작 그 동생들을 빚어낸 프티파의 손이, 결국 형에게 돌아와 1895년의 부활을 이끕니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로 ‘교향곡 작곡가가 쓰는 발레’라는 공식이 이미 검증된 뒤였으니, 한때 너무 무겁고 교향곡적이라 외면받던 백조의 호수가 비로소 제 무게를 견뎌 줄 무대를 만난 거지요. 시대가 이 곡을 따라잡는 데 거의 20년이 걸렸습니다. 너무 일찍 도착한 음악의 흔한 운명이지요.

정치가 흔들리면 백조가 춤춘다

판본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지요. 백조의 호수는 결말이 공연마다 다릅니다. 누구는 두 연인이 죽어 영혼으로 결합하고, 누구는 악당 로트바르트를 무찌르고 살아남아 둘이 손을 잡습니다. 같은 곡인데 어떤 날은 비극이고 어떤 날은 해피엔딩인 거예요.

여기엔 정치가 끼어 있습니다. 소련 시절엔 관객을 우울하게 돌려보내는 비극적 결말을 꺼려, 밝게 끝나는 판본이 널리 유통됐거든요. 유리 그리고로비치가 볼쇼이를 위해 만든 1969년판도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낙관적 결말로 막을 내렸고, 2001년 개정에서는 다시 비극으로 돌아섰습니다. 발레 한 편의 결말이 시대의 기분을 따라 출렁인 셈입니다.

가장 기묘한 장면은 1991년 8월에 나옵니다. 소련 강경파가 쿠데타를 일으킨 그 며칠 동안, 국영 텔레비전은 뉴스 대신 백조의 호수를 종일 반복해서 틀었습니다. 정변을 가리는 커튼으로 하필 이 우아한 백조들이 동원된 거지요. 그 뒤로 러시아에는 농담이 하나 생겼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백조의 호수가 나오면, 바깥세상에서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고 있다는 뜻이라고. 차이콥스키가 들으면 기가 막힐, 가장 아름다운 곡의 가장 서늘한 쓰임새입니다.

한 나라가 가장 흔들릴 때 가장 우아한 발레를 화면에 내보낸다는 건, 곱씹을수록 묘한 그림입니다. 백조의 호수가 그만큼 ‘안전하고 고상한 것’의 대명사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발레 따위라며 격을 따지던 그 장르에서 출발한 곡이, 한 세기 뒤엔 한 체제의 마지막 체면을 가리는 커튼으로 쓰였습니다. 차이콥스키가 800루블에 떠맡았던 그 일감이 이렇게까지 멀리 헤엄쳐 갈 줄, 누가 알았을까요.

악보와 함께 듣기

이제 악보를 따라가며 2막을 통째로 들어볼 차례입니다. 오보에가 백조의 테마를 들고 나오는 순간, 하프가 물결을 긋는 자리, 오케스트라가 그 선율을 받아 무너지듯 쏟아내는 클라이맥스 — 음표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눈으로 따라가면 귀가 두 배로 열리거든요.

2막 전체를 악보와 함께. 백조의 테마가 처음 가냘프게 나왔다가 끝에서 어떻게 터지는지 보인다.

원본 악보는 IMSLP에서 누구나 무료로 열람할 수 있습니다. 백조의 호수 Op. 20 악보 보기 (IMSLP)

어떤 백조를 고를까

발레 영상이 아니라 음악만으로 백조의 호수를 통째로 듣고 싶다면, 전곡 녹음 셋을 권합니다.

앙드레 프레빈 / 런던 심포니 (EMI, 1976) — 전곡 녹음의 정본으로 꼽는 한 장입니다. 우아하고 균형 잡혀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거든요. 다만 심장을 후벼 파는 격렬함을 기대하면 점잖게 들릴지도 모릅니다.

샤를 뒤투아 / 몬트리올 심포니 (Decca) — 음색이 투명하고 녹음이 최상급이라 색채가 화사하게 살아납니다. 처음 입문하는 분께 특히 잘 맞아요. 대신 러시아적인 무게와 어둠을 찾는 귀에는 다소 가볍게 들릴 수 있습니다.

발레리 게르기예프 / 마린스키 (Decca) — 빠르고 격렬한, 아드레날린이 도는 연주입니다. 단 흔히 듣던 1895년 개정판이 아니라 곡 순서가 다른 편집이라, “내가 아는 그 순서”를 기대하면 당황할 수 있으니 참고하세요. 처음 한 장은 프레빈으로 시작하길 권합니다.

어떤 음반으로 듣든 한 가지만 기억해 두면 좋겠습니다. 지금 흘러나오는 그 백조의 호수는 차이콥스키가 1877년에 내놓고 스스로 실패로 분류했던 곡이 아니라,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다시 태어난 모습이라는 것을요. 초연의 실패는 관객이 아니라 작곡가 혼자 내린 판정이었고, 진짜 평결은 그가 끝내 듣지 못한 130년의 박수로 뒤늦게 내려졌습니다. 가장 외로운 오보에 한 줄에서 시작한 곡이 어쩌다 여기까지 헤엄쳐 왔는지, 오늘 밤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따라가 보시길.

백조의 호수 초연은 정말 실패였나요?

흔히 그렇게 알려졌지만, 1877년 볼쇼이 프로덕션은 1883년까지 약 6년간 마흔한 차례 무대에 올랐습니다. 망한 작품치고는 수명이 꽤 길었지요. 당시 비평은 음악이 “너무 시끄럽고 교향곡적이라 춤추기 어렵다”고 했는데, 이는 음악이 형편없어서가 아니라 발레 반주치고 너무 야심찼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실패’라는 판정을 가장 단호히 내린 건 차이콥스키 본인이었습니다.

지금 보는 백조의 호수가 차이콥스키 원작 그대로인가요?

아닙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무대는 차이콥스키가 죽은 뒤인 1895년, 마린스키 극장에서 마리우스 프티파와 레프 이바노프가 안무하고 리카르도 드리고가 악보를 손본 부활판을 바탕으로 합니다. 안무, 곡 순서, 결말이 1877년 원전과 다릅니다. 차이콥스키는 1893년에 세상을 떠나 이 판본을 보지 못했습니다.

결말이 공연마다 다른 이유는 뭔가요?

백조의 호수는 결말이 고정돼 있지 않습니다. 1895년 판본에서는 오데트가 호수에 몸을 던지고 왕자가 뒤를 따라, 두 영혼이 함께 떠오르는 비극으로 끝납니다. 한편 소련 시절에는 관객을 밝게 돌려보내려는 분위기 속에서 두 연인이 살아남는 해피엔딩 판본이 널리 쓰였습니다. 그래서 어느 극장의 어떤 연출이냐에 따라 결말이 갈립니다.

백조의 호수에서 가장 유명한 그 멜로디는 무슨 악기인가요?

2막 첫 장면(No. 10 ‘정경’)에서 오보에가 홀로 연주하는 b단조 선율이 그 유명한 백조의 테마입니다. 하프와 현악기의 떨림 위로 오보에가 올라오는데, 이 선율이 마법에 걸린 공주 오데트를 상징하며 곡 전체를 떠돕니다. 가장 화려해야 할 자리에 가장 외로운 목관을 세운 선택이 이 곡의 핵심입니다.

흑조의 32회 회전이 그렇게 어려운가요?

3막에서 흑조 오딜이 추는 ‘푸에테 앙 투르낭’은 한 발로 중심을 잡고 다른 다리를 채찍처럼 휘둘러 제자리에서 서른두 바퀴를 도는 동작입니다. 중심이 조금만 흔들려도 무대 밖으로 밀려나기 때문에 발레리나의 기량을 가늠하는 시험대로 통합니다. 1895년 부활판 초연에서 피에리나 레냐니가 처음 선보여 객석을 뒤집어 놓았다고 전해집니다.

호숫가에서 더 걸어 들어가면

한 곡을 깊이 듣고 나면, 그 곁에 선 다른 곡들이 다르게 들립니다. 백조의 호수를 만든 그 손이 교향곡에서는 어떻게 울었는지, 같은 시대의 무대 음악은 또 어떤 이야기를 품었는지 — 이어서 걸어 들어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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