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가니니 전설의 진실: 악마와의 계약인가, 아니면 천재의 고독인가?

저게 사람이면 악마랑 계약한 거다

인물
니콜로 파가니니 (Niccolò Paganini, 1782–1840)
주요 작품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24개의 카프리스 Op. 1, 바이올린 협주곡 1·2번
활동
이탈리아 제노바 출생, 1828년부터 유럽 전역 순회공연
별명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는 역사상 가장 많은 전설과 루머를 거느린 바이올리니스트입니다. 이 글은 악마와의 계약설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그의 손끝을 가능하게 한 바이올린 기교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마르판 증후군 가설까지 차근차근 풀어봅니다. 클래식이 처음인 분도 부담 없이 읽도록, 이미 애호가인 분이라면 한 겹 더 깊이 들어가도록 짰거든요.

니콜로 파가니니 초상화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가 그린 파가니니 초상화 (1819)

악마가 오른 무대

1828년 3월, 빈의 한 연주회장. 무대 위로 해골처럼 마른 남자가 올라섰습니다. 검은 외투, 창백한 피부, 비정상적으로 긴 손가락. 그가 활을 들어 올리는 순간 객석 어딘가에서 누군가 속삭였지요.

“저 사람,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대.”

니콜로 파가니니(Niccolò Paganini).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역사상 가장 많은 악마 루머에 시달린 음악가입니다. 그의 연주를 들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했더군요. “인간이 저렇게 연주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들은 차라리 간단한 결론을 택했습니다. 저건 인간이 아니라고.

그런데 진짜 이야기는 악마 쪽보다 훨씬 드라마틱합니다. 도박으로 바이올린까지 날린 사내가 어떻게 유럽을 무릎 꿇렸는지, 그 과정을 따라가 보면 악마는 오히려 시시해지거든요.

선박 잡화상의 아들이 잡은 바이올린

1782년 10월 27일, 이탈리아 제노바. 파가니니는 선박 잡화상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안토니오는 장사가 시원찮으면 만돌린을 켜서 푼돈을 보탰다고 해요. 음악은 부업이었고, 가난은 본업이었지요.

다섯 살에 만돌린, 일곱 살에 바이올린. 동네 선생을 두엇 거쳤지만 소년의 실력은 금세 스승을 추월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파르마로 향했지요. 당대의 명교사 알레산드로 롤라(Alessandro Rolla)를 찾아간 겁니다.

롤라는 소년의 연주를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나는 이 아이를 가르칠 수 없습니다.” 그러고는 자기 스승인 페르디난도 파에르(Ferdinando Paer)에게, 파에르는 다시 자기 스승 가스파로 기레티(Gasparo Ghiretti)에게 소년을 떠넘겼습니다. 선생이 제자를 못 가르쳐서, 선생의 선생의 선생에게 보내야 했던 거예요. 일화의 과장을 감안하더라도, 어린 파가니니가 어떤 종류의 괴물이었는지는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열다섯 무렵 파가니니는 하루 열 시간 이상을 활에 매달렸습니다. 기존 기법은 이미 바닥까지 훑은 뒤였지요. 이제 그는 세상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 기법을 혼자 만들어내기 시작했더군요.

천재의 추락 — 도박, 그리고 사라진 바이올린

1797년부터 십 대 후반의 파가니니는 북이탈리아를 돌며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습니다. 명성과 돈이 한꺼번에 밀려왔지요. 그리고 그는 정확히 예상 가능한 짓을 합니다.

도박에 빠졌습니다.

방탕과 노름으로 건강을 갉아먹고 거액의 빚을 졌습니다. 끝내 연주에 쓰던 바이올린마저 노름판에 넘겼다지요. 천재라고 해서 자기 관리까지 천재인 건 아니었나 봅니다.

1801년 무렵부터 몇 년간, 파가니니는 무대에서 통째로 사라집니다. 한 귀부인과 토스카나의 저택에 머물며 바깥세상과 연을 끊었거든요. 연주회가 끊기자 사람들은 온갖 소문을 지어냈습니다. “애인을 죽이고 감옥에 갇혔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았지요.

하지만 그 침묵의 시간에 실제로 벌어진 일은 따로 있었습니다. 파가니니는 하모닉스, 중음주법, 왼손 피치카토 같은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주법을 그 사이 갈고닦고 있었더군요. 추락처럼 보였던 시기가 사실은 변신을 준비하던 잠복기였습니다.

‘일 카노네’ — 대포 같은 바이올린

은둔에서 돌아온 파가니니는 이전보다 한층 압도적인 연주로 무대를 휘어잡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평생 동반자가 된 전설의 악기는, 사실 그보다 이른 시기에 그의 손에 들어왔지요.

일 카노네 과르네리 바이올린
일 카노네(Il Cannone) — 과르네리 델 제수, 1743년 제작. 제노바 도리아-투르시 궁전 소장

리브론(Livron)이라는 부유한 사업가가 어린 파가니니에게 자기 바이올린을 빌려줬습니다. 이탈리아 크레모나의 전설적 제작자 주세페 과르네리 델 제수(Giuseppe Guarneri del Gesù)가 1743년에 만든 악기였지요. 연주가 끝나자 리브론은 악기를 돌려받기를 거부했습니다. “이 바이올린은 당신 손에 있어야 합니다.”

파가니니는 이 악기를 ‘일 카노네(Il Cannone)’, 곧 ‘대포’라 불렀습니다. 폭발적인 음량과 묵직한 울림 때문이었거든요. 그는 평생 이 바이올린과 붙어 다녔고, 눈을 감으며 제노바 시에 통째로 기증했습니다. 지금도 제노바 도리아-투르시 궁전에 전시되어 있고, 매달 한 번씩 관리자가 직접 활을 얹습니다. 악기는 켜야 살아남으니까요.

제노바에 보존된 일 카노네의 실물 영상. 도리아-투르시 궁전에서 촬영된 이 기록에서 280여 년 된 악기의 보존 환경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당대 최고의 제작자 장 밥티스트 뷔욤(Jean-Baptiste Vuillaume)이 일 카노네의 정밀 복제품을 만들었는데, 정작 파가니니조차 둘을 단번에 가려내지 못했다지요. 한참 음색을 더듬은 뒤에야 겨우 원본을 짚어냈다고 합니다. 그 복제품은 파가니니의 유일한 제자 카밀로 시보리(Camillo Sivori)에게 전해졌고요.

들라크루아가 그린 파가니니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가 그린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파가니니’ (1832)

악마의 기교 — 한 줄로 연주하는 법

파가니니의 무엇이 그렇게 사람들의 머리를 헝클어 놓았을까요. 답은 의외로 구체적입니다. 그는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의 물리적 한계를 하나씩 밀어붙여서, 동시대 어떤 연주자도 흉내 내지 못한 일들을 무대 위에서 태연히 해냈거든요.

첫째는 왼손 피치카토입니다. 보통 피치카토는 오른손으로 현을 뜯지요. 그런데 파가니니는 활로 선율을 켜는 동시에 왼손 손가락으로 다른 현을 뜯어, 한 사람이 두 사람처럼 들리게 만들었습니다. 둘째는 하모닉스예요. 현을 살짝 스치듯 짚어 휘파람 같은 고음을 뽑아내는 기법인데, 파가니니는 두 현에서 동시에 하모닉스를 울리는 이중 하모닉스까지 구사했다지요.

셋째는 리코셰 보잉입니다. 활을 현 위에 튕기듯 던져 한 번의 동작으로 여러 음을 쏟아내는 기교로, 마치 활이 저 혼자 춤추는 것처럼 보입니다. 넷째는 스코르다투라, 곧 변칙 조율이고요. 줄의 음높이를 일부러 바꿔 조여, 보통 손가락으로는 닿을 수 없는 화음과 음역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가장 극적인 장기. 무대에서 연주 도중 현이 끊어지면, 파가니니는 멈추지 않고 남은 줄로 곡을 마저 켰습니다. 급기야 그는 일부러 G선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를 모두 푼 채, 가장 굵은 한 줄로 곡 전체를 연주하는 묘기를 선보였지요. 관객은 환호했지만, 동시에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저게 정말 사람의 손으로 가능한 일인가.

여기서 통념 하나는 깨고 가야겠습니다. 그 끊어지는 현이 늘 우연은 아니었거든요. 파가니니는 이런 순간이 얼마나 극적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고, 처음부터 한 줄이나 두 줄만으로 켜게 짠 곡들을 따로 써 두었습니다. G선 하나로 펼치는 《모세 환상곡》이 대표적이지요. 끊어진 현 앞에서도 태연한 거장이라는 그림은, 절반쯤은 치밀하게 계산한 무대 연출이었습니다. 마법의 정체가 일부는 손기술, 일부는 쇼맨십이었다는 사실은 그를 깎아내리기는커녕 오히려 더 영리한 인물로 보이게 하지요. 진짜 천재는 자기 재능을 어떻게 팔아야 하는지까지 알았던 거예요.

악마처럼 묘사된 파가니니 캐리커처
장 피에르 당탕(Jean-Pierre Dantan)이 만든 파가니니 캐리커처. 깡마른 몸과 길쭉한 손가락을 익살스럽게 과장한 19세기 풍자 조형으로, 당대가 그를 어떻게 ‘괴물’로 소비했는지 보여줍니다.

악마 소문의 비밀 — 마르판 증후군?

기교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한 가지가 남습니다. 바로 파가니니의 몸이에요. 그는 4옥타브에 걸친 음역을 손쉽게 넘나들었고, 한 줄에서 곡 전체를 펼쳐냈으며, 양손 피치카토와 이중 트릴을 아무렇지 않게 던졌습니다. 2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의 카프리스를 온전히 소화하는 바이올리니스트는 손에 꼽거든요.

현대 의학자들은 그 비밀의 일부가 질병에 있었을지 모른다고 봅니다. 마르판 증후군(Marfan syndrome)이나 엘러스-단로스 증후군(Ehlers-Danlos syndrome) 가설이지요. 두 질환의 공통점은 비정상적으로 긴 손가락과 관절의 과도한 유연성입니다. 창백한 피부, 마른 체형, 기괴하리만치 긴 손가락이라는 파가니니의 외모 묘사와 신기하리만큼 겹칩니다.

물론 질병이 재능을 빚어준 건 아닙니다. 다만 하루 열 시간의 광적인 연습 위에 남다른 신체 조건이 얹혔다면, 그 조합이 빚은 결과물은 당시 사람들의 상상력으로는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가장 손쉬운 답을 골랐습니다. 악마와의 계약.

여기엔 파가니니 본인의 책임도 작지 않습니다. 그는 소문을 굳이 부인하지 않았거든요. 검은 옷, 음울한 표정,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사생활까지, 신비주의는 그의 흥행에 오히려 보탬이 됐습니다. 당대의 화가들은 그를 해골과 악마 곁에 세운 캐리커처로 그려댔고, 한쪽에서는 그가 잠든 사이 악마가 바이올린을 건네는 석판화까지 나돌았지요. 본인이 부추긴 신화가 결국 그의 무덤까지 따라붙게 될 줄은, 그때는 몰랐을 겁니다.

라 캄파넬라 — 종소리가 된 협주곡

파가니니가 카프리스로만 기억되는 건 조금 억울한 일입니다. 그는 바이올린 협주곡도 여섯 곡이나 남겼고, 그 가운데 2번 협주곡의 마지막 악장은 클래식을 잘 모르는 사람도 한 번쯤 들어본 선율을 품고 있거든요.

바로 ‘라 캄파넬라(La Campanella)’, 우리말로 ‘작은 종’입니다. 파가니니는 이 론도 악장에 오케스트라의 진짜 작은 종을 넣어, 주제가 돌아올 때마다 ‘딸랑’ 울리게 했지요. 거기에 독주 바이올린이 까마득한 고음에서 종소리를 흉내 내며 화답합니다. 제목 그대로, 협주곡 한복판에서 종이 울리는 것이지요.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2번 3악장 ‘라 캄파넬라’ — 에디 첸(Eddy Chen)·싱가포르 심포니. 주제가 돌아올 때마다 끼어드는 종소리와, 그것을 흉내 내는 독주 바이올린의 고음을 귀로 좇아 보세요.

이 선율에 가장 먼저 무릎을 꿇은 사람이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였습니다. 그는 라 캄파넬라를 피아노 독주곡으로 옮겨, 건반 위에서 종소리가 울리게 만들었지요. 오늘날 ‘라 캄파넬라’ 하면 바이올린보다 리스트의 피아노곡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더 많을 정도입니다. 원작자보다 편곡자가 유명해진, 음악사에서 드물지 않은 역전극이고요.

24개의 카프리스 — 바이올린의 구약성서

그래도 파가니니의 심장은 역시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24개의 카프리스 Op. 1》에 있습니다. 십수 년에 걸쳐 다듬은 이 곡집은 흔히 바이올린 문헌의 구약성서라 불리지요. 스물네 곡은 저마다 하나의 극한 기법을 물고 늘어집니다. 아르페지오, 이중 트릴, 급격한 포지션 이동, 리코셰 보잉. 바이올린으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불가능’이 이 안에 들어 있어요.

그중에서도 24번 카프리스. 이 짧은 곡 하나가 클래식 음악사에 남긴 발자국은 상상을 훌쩍 넘어섭니다.

오거스틴 하델리히(Augustin Hadelich)가 들려주는 카프리스 24번 라이브 (2024). 독일 태생 미국 바이올리니스트로, 오늘날 가장 신뢰받는 파가니니 해석자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힙니다.

파가니니는 이 곡집을 “예술가들에게(alli artisti)”라고 헌정했습니다. 특정 인물이 아니라 ‘예술가’ 모두에게 건넨 것이지요. 다만 그는 24번 곁에 짧은 메모를 따로 남겼습니다. “니콜로 파가니니, sepolto pur troppo(안타깝게도 묻혀버린).” 결국 자기 자신에게 바친 한 줄이었던 거예요. 그 메모가 훗날 얼마나 섬뜩한 예언이 되는지는, 글 말미에서 다시 만나게 됩니다.

한 주제가 낳은 200년

24번 카프리스의 a단조 주제는 묘한 중독성을 지녔습니다. 단순하면서도 어딘가 도전적인 이 여덟 마디가, 200년 동안 작곡가들의 손을 차례로 잡아끌었거든요.

리스트는 파가니니의 연주를 보고 이렇게 다짐했다고 전해집니다. “바이올린에 파가니니가 있다면, 피아노의 파가니니는 내가 되겠다.” 그는 《파가니니 대연습곡》을 써서 그 다짐을 건반 위에 실현했지요.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는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 35》로 같은 주제를 양손의 극한까지 밀어붙였고요. 그리고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ff)는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Op. 43》에서 그 선율을 거꾸로 뒤집어, 영화에까지 단골로 쓰이는 18번째 변주의 절절한 멜로디를 길어 올렸습니다. (그 곡의 사연이 궁금하다면 → 라흐마니노프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이야기) 20세기 들어서는 비톨트 루토스와프스키(Witold Lutosławski)까지 같은 주제로 변주곡을 썼지요.

한 사람이 던진 여덟 마디가 리스트와 브람스와 라흐마니노프를 차례로 통과했다는 사실. 이쯤 되면 파가니니가 정말로 무언가와 계약을 맺긴 한 것 같습니다. 악마가 아니라 시간과 말이지요.

유럽을 뒤집어놓은 록스타

1828년, 파가니니는 처음으로 이탈리아 바깥으로 나섭니다. 마흔여섯, 결코 이르지 않은 국제 데뷔였지요. 그러나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빈 공연은 미증유의 성공을 거뒀습니다. 거리의 상점마다 “파가니니 스타일” 양복과 모자, 장갑, 구두가 쏟아져 나왔지요. 19세기판 아이돌 굿즈인 셈입니다. 팬들의 열기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어요. 그가 피우다 버린 시가 꽁초를 브로치에 박아 목에 걸고 다니는 사람들까지 있었으니까요.

1829년 베를린, 1831년 파리, 이어 런던. 가는 곳마다 같은 광경이 되풀이됐습니다. 교황 레오 12세(Pope Leo XII)는 그에게 황금박차 훈장을 내렸고요. 파가니니는 19세기의 록스타였습니다. 다만 기타 대신 바이올린을 든.

힐러리 한(Hilary Hahn)이 연주하는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1번. 화려한 독주 카덴차와 오케스트라가 주고받는 대비가 돋보이는 파가니니의 대표 협주곡입니다. (다른 바이올린 협주곡 명곡이 궁금하다면 → 바이올린 협주곡 입문 가이드)

베를리오즈, 그리고 인간 파가니니

1833년 파리에서 파가니니는 젊은 작곡가 엑토르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를 만납니다. 파가니니는 그를 “베토벤의 부활”이라 불렀지요. 당시로서는 최고의 찬사였습니다. (베를리오즈의 대표작이 궁금하다면 → 《환상교향곡》 이야기)

파가니니는 베를리오즈에게 비올라를 위한 협주곡을 의뢰했습니다. 자신이 직접 무대에서 켜겠다는 생각이었지요. 베를리오즈는 《이탈리아의 해롤드(Harold en Italie)》를 완성해 그에게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파가니니는 악보를 훑어보더니 연주를 거절하지요.

이유가 그답습니다. 비올라 파트가 충분히 화려하지 않다는 거였어요. 그 곡은 비올라가 오케스트라와 대화하는 작품이었지, 비올라가 모든 조명을 독차지하는 작품은 아니었거든요. 무대 위에서 모든 시선을 가져가는 일이 파가니니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탈리아의 해롤드》는 비올라 문헌의 최고 걸작 가운데 하나로 남았습니다. 파가니니가 퇴짜 놓은 곡이 역사에 새겨진 거예요. 더 흥미로운 건 그다음입니다. 1838년, 뒤늦게 이 곡을 제대로 들은 파가니니는 베를리오즈 앞에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한 뒤, 거액을 선물로 보냈습니다. 가난에 쪼들리던 베를리오즈에게 그 돈은 숨통이었지요.

여기서 우리는 악마와는 영 딴판인 파가니니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사생아로 얻은 아들 아킬레(Achille)를 끔찍이 아껴 늘 곁에 두고 길렀고, 동료 음악가에게는 곧잘 지갑을 열었습니다. 무대 위의 음울한 마법사와 무대 밖의 다정한 아버지. 그 간극이야말로 파가니니라는 인간의 진짜 얼굴인지도 모릅니다.

악마에게 거부당한 시신

말년의 파가니니는 비참했습니다. 오래 앓던 병을 다스리느라 수은과 아편을 들이켰고, 그 부작용으로 몸이 급격히 무너졌지요. 후두를 잃어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고요. 1836년 무렵에는 파리에서 카지노 사업에 이름을 빌려줬다가, 일이 끝내 틀어지며 큰 손실을 떠안았습니다. 아끼던 악기와 소장품까지 경매에 부쳐야 했지요.

1840년 5월, 니스에서 한 사제가 종부성사를 하러 찾아왔습니다. 파가니니는 거절했지요.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고 여긴 겁니다.

그리고 며칠 뒤, 1840년 5월 27일. 사제가 다시 찾아오기도 전에 그는 내출혈로 숨을 거뒀습니다.

여기서부터 정말 기괴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가톨릭 교회는 파가니니의 시신에 정식 매장을 허락하지 않았거든요. 이유는 둘이었습니다. 종부성사를 받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악마와 결탁했다”는 그 소문. 살아생전의 인기를 만들어준 루머가, 죽어서는 무덤 한 평조차 빼앗아간 셈이지요.

시신은 제노바로 돌아왔지만 땅에 들지 못한 채 이리저리 옮겨 다녔습니다. 교황에게 탄원한 끝에 이송 허가는 받았어도, 정식 매장은 여전히 거부당했고요. 파가니니의 유해가 마침내 파르마의 땅에 묻힌 것은 1876년. 그가 눈을 감은 지 무려 36년 만이었습니다.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도 않습니다. 1893년, 체코의 바이올리니스트 프란티셰크 온드리체크(František Ondříček)가 파가니니의 손자를 설득해 관을 열어보았다지요. 반세기 넘게 잠들었던 사람의 모습이 어땠을지는, 상상에 맡기는 편이 낫겠습니다.

일 카노네를 켜는 사람들

전설은 박물관 유리장 안에서 박제되지 않았습니다. 제노바에는 여전히 일 카노네가 있고, 그 악기를 직접 켜는 일은 오늘날 바이올리니스트에게 가장 큰 명예 가운데 하나거든요.

1954년부터 제노바는 파가니니의 이름을 건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를 열어 왔습니다. 그리고 이 대회 우승자에게는 특별한 상이 따라붙지요. 바로 일 카노네를 직접 연주할 자격입니다. 280여 년 전 악기로 파가니니의 곡을 켜 보는 경험, 바이올리니스트라면 누구든 탐낼 만합니다.

우리에게도 반가운 이름이 이 명단에 있습니다. 2015년, 한국의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가 이 대회 정상에 올랐거든요. 이 글 상단의 영상이 바로 그의 파가니니 협주곡 1번 실황입니다. 악마의 바이올린이라는 별명이 무색하게도, 그 악기는 이렇게 한 세대씩 손에서 손으로 건네지며 멀쩡히 살아 있습니다. (바이올린 협주곡의 또 다른 명곡이 궁금하다면 →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악마는 없었지만 남은 전설

파가니니에게 악마는 없었습니다. 있었던 건 비정상적으로 유연한 관절, 하루 열 시간의 광적인 연습, 도박으로 바이올린을 잃은 뒤의 절박함, 그리고 침묵의 시간 동안 혼자 벼려낸 전무후무한 기법들이었지요.

그가 남긴 것을 헤아려 봅니다. 24개의 카프리스는 바이올린 기법의 성경이 되었습니다. 리스트와 브람스, 라흐마니노프,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까지 수많은 작곡가가 그의 선율을 빌려 자기만의 걸작을 빚었고요. “21세기의 파가니니”라는 수식은 지금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에게 붙는 최고의 찬사로 남아 있습니다.

파가니니는 24번 카프리스를 자기 자신에게 헌정하며 이렇게 적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묻혀버린, 니콜로 파가니니에게.” 자조인지 예언인지 알 수 없는 한 줄이지요. 실제로 그의 시신은 36년이나 떠돌았으니, 어쩌면 그 메모가 맞아떨어진 듯합니다.

하지만 음악만은 끝내 묻히지 않았습니다. 오늘 밤, 카프리스 24번을 한 번 들어보시겠어요? 악마의 솜씨가 아니라, 인간의 집념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5분짜리 기록이니까요.

비슷한 드라마를 가진 작곡가들

파가니니처럼 충격적인 사연과 전설을 거느린 작곡가들의 이야기입니다.

악보와 함께 듣기

카프리스 24번을 악보와 함께. a단조 주제가 제시된 뒤 열한 개의 변주와 피날레가 어떻게 한 음씩 표정을 바꿔 가는지, 음표를 눈으로 따라가며 들으면 한결 또렷하게 잡힙니다.

원본 악보는 IMSLP에서 누구나 무료로 열람할 수 있거든요. 파가니니 24개의 카프리스 Op. 1 악보 보기 (IMSLP)

자주 묻는 질문

파가니니는 정말 악마와 계약했나요?

아닙니다. 파가니니의 초인적 연주는 하루 열 시간이 넘는 연습, 마르판 증후군으로 추정되는 신체적 특성(비정상적으로 긴 손가락과 유연한 관절), 그리고 몇 년간 은둔하며 독자적으로 벼려낸 혁신적 주법이 함께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악마설은 그의 음울한 외모와 신비주의가 부추긴 소문이었어요.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일 카노네’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이탈리아 제노바의 도리아-투르시 궁전(Palazzo Doria-Tursi)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1743년 과르네리 델 제수가 만든 이 악기는 파가니니 사후 제노바 시에 기증되었고, 매달 관리자가 직접 연주합니다. 파가니니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 우승자에게도 이 악기로 연주할 기회가 주어지지요.

파가니니의 시신은 왜 36년간 매장되지 못했나요?

파가니니가 임종 직전 종부성사를 거부했고, 생전의 ‘악마와의 계약’ 소문이 겹치면서 가톨릭 교회가 정식 매장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840년 사망 후 여러 차례 탄원을 거쳐 1876년에야 파르마에 묻힐 수 있었습니다.

파가니니의 연주 기법은 무엇이 그렇게 혁신적이었나요?

왼손 피치카토, 이중 하모닉스, 리코셰 보잉, 변칙 조율(스코르다투라), 그리고 G선 하나만으로 곡 전체를 연주하는 묘기까지, 당대에는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기법을 무대 위에서 태연히 구사했습니다. 특히 24개의 카프리스는 바이올린의 물리적 한계를 넓혀 후대 연주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남겼습니다.

파가니니 카프리스 24번이 왜 그렇게 유명한가요?

24번 카프리스의 a단조 주제는 단순하면서도 중독적이어서, 200년 동안 수많은 작곡가의 손을 거쳤습니다. 리스트의 《파가니니 대연습곡》, 브람스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이 모두 이 한 주제에서 출발했지요. 한 곡이 낳은 가장 풍성한 후손이라 할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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