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읽는 열네 곡, 생상스 동물의 사육제

생상스 〈동물의 사육제〉, 서랍에 갇혔던 열네 곡을 그림으로 여는 22분

SAINT-SAËNS · LE CARNAVAL DES ANIMAUX · R.125

동물들이 줄지어 지나가는 어린이 음악으로 알려져 있지만, 처음 이 곡을 마주한 사람들은 사순절 파티에 모인 어른들이었습니다. 남의 명곡을 꿰뚫어 봐야만 웃을 수 있는 농담이었거든요.
생상스는 이 장난이 자신의 평판을 무너뜨릴까 두려워, 살아 있는 동안 열네 곡 가운데 딱 한 곡만 세상에 내보냈습니다.

1886년 2월 작곡 1886년 3월 9일 살롱 초연 전 14곡 · 약 22분 연주자 열한 명

이 글의 일러스트는 모두 클래식노트가 직접 그렸습니다. 일러스트 © classicnot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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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세 개만 잡으면, 이 곡이 왜 서랍에 갇혀 있었는지 보입니다

사자와 코끼리라는 이름표만 보면 소리로 그린 동물 그림책 같습니다. 하지만 숫자 세 개를 먼저 붙잡으면 이야기가 달라지죠. 작곡가 본인이 이 유쾌한 곡을 죽을 때까지 감춰야 했던 이유가 단번에 드러나거든요.

14곡의 행렬

사자의 행진으로 문을 열고 피날레로 닫히는 열네 곡짜리 모음곡입니다. 30초 남짓에 끝나는 곡도 있어서, 전곡을 이어 들어도 22분이면 충분하죠.

1곡만 출판 허락

생전에 출판을 허락한 곡은 13번 〈백조〉 하나뿐이었습니다. 1887년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편곡으로 나왔고, 나머지 열세 곡은 악보째 묶여 있었거든요.

36년의 봉인

1886년 살롱에서 몰래 초연한 뒤 정식 공개 무대에 오르기까지 걸린 시간입니다. 봉인은 작곡가가 세상을 떠나고 두 달 뒤에야 풀렸죠.

고작 열 살에 데뷔해 평생 ‘진지한 대가’로 살아온 사람이었거든요. 그가 무서워한 상대는 아이들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현미경처럼 들여다보던 어른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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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네 곡을 여섯 묶음으로 나눠 들으면 길을 잃지 않습니다

곡이 짧고 성격이 제각각이라 1번부터 순서대로 듣다 보면 금세 흐름을 놓칩니다. 비슷한 장난끼리 묶어 여섯 덩어리로 보면, 어느 대목에서 무엇을 노렸는지 또렷해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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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과 2번개막 신호탄

두 대의 피아노가 트릴로 긴장을 깔면 현악이 사자의 행진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정작 포효는 피아노가 저음역에서 반음씩 미끄러지는 소리로 대신하죠. 이어지는 〈암탉과 수탉〉에서는 100년도 더 전 선배인 라모의 하프시코드 곡 〈암탉〉을 그대로 가져다 씁니다. 남의 명곡을 도마에 올리는 게임이 시작됐다는 신호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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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과 6번두 대의 피아노

〈야생 당나귀〉는 오케스트라를 치워버리고 피아노 두 대만 남겨 30초 남짓을 맹렬한 음계로 내달립니다. 〈캥거루〉는 정반대죠. 뛰어오를 때 빨라지고 내려앉을 때 느려지는 리듬 놀이 하나만으로 한 곡을 완성하거든요. 똑같은 악기 두 대가 극과 극의 걸음걸이를 만들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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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번과 5번패러디 결정타

〈거북이〉는 오펜바흐 〈지옥의 오르페우스〉의 캉캉을 끔찍하게 느리게 늘여 놓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춤을 가장 느린 동물에게 떠넘긴 셈이죠. 〈코끼리〉는 방향을 뒤집습니다. 베를리오즈가 공기 요정에게 붙여준 왈츠를 가장 육중한 콘트라베이스에게 안기고, 중간에는 멘델스존 〈한여름 밤의 꿈〉의 요정 음악까지 얄밉게 끼워 넣거든요. 음표는 그대로 두고 속도와 악기만 어긋내는 것, 이것이 이 곡의 웃음 공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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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과 9번과 10번소리로 그린 풍경

〈수족관〉에서는 두 피아노가 수면처럼 흐릅니다. 그 위로 글래스 하모니카가 물방울 같은 소리를 흩뿌리죠. 요즘 연주에서는 대개 글로켄슈필이나 첼레스타로 대신합니다. 〈숲속의 뻐꾸기〉는 클라리넷이 딱 두 음만 되풀이하며 숲의 여백을 넓히고, 〈새장〉은 플루트 한 대가 쉼표 없이 좁은 공간을 소리로 가득 채우죠. 여백과 충만이 나란히 붙어 있는 구간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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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번과 11번사람이 우리에 들어간다

〈긴 귀를 가진 이들〉에서 바이올린 두 대가 아주 높은 소리와 아주 낮은 소리를 번갈아 지르며 당나귀 울음을 냅니다. 이 당나귀가 사실은 음악 평론가를 겨눈 것이라는 해석이 오래전부터 따라다니죠. 확정된 기록이 남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평판에 유난히 예민했던 그를 떠올리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피아니스트〉에서는 아예 사람이 동물 목록에 들어가거든요. 두 연주자가 기초 음계 연습을 어설프게, 박자까지 엇갈려 뚱땅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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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번과 14번화석과 퇴장

〈화석〉에서 실로폰이 뼈다귀 부딪히는 소리를 내는데, 이 선율은 생상스 자신의 히트곡 〈죽음의 무도〉에서 떼어온 것입니다. 여기에 프랑스 옛 동요들과 로시니 〈세비야의 이발사〉의 아리아까지 층층이 겹쳐 놓죠. 피날레에서는 앞서 지나간 동물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고, 마지막에 그 당나귀 울음이 툭 튀어나오며 막이 내리거든요.

여섯 묶음 어디에도 들어가지 않는 곡이 하나 남습니다. 바로 13번 〈백조〉입니다. 인용도 농담도 없이 첼로 한 대가 처음부터 끝까지 진심으로 노래하는 이 곡만, 생상스는 살아 있는 동안 세상에 내보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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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 간판 뒤에 숨겨 둔 것들, 그리고 36년

열네 칸이 가로로 이어진 우리 그림. 사자와 수탉, 코끼리와 캥거루, 피아노 건반과 해골이 칸마다 하나씩 들어 있고 백조가 있는 열세 번째 칸만 환하게 빛나며 나머지 칸은 창살 그늘에 잠겨 있다

열네 칸 가운데 생전에 문이 열린 칸은 13번 〈백조〉 하나뿐이었습니다.

11886년 2월
도피처에서 작곡
21886년 3월 9일
살롱에서 비공개 초연
31887년
〈백조〉만 출판
41921년 12월
작곡가 사망
51922년 2월 25일
파리 공개 초연

인용의 출처를 한자리에 모으면 이렇습니다. 4번은 오펜바흐, 5번은 베를리오즈와 멘델스존, 12번은 자기 곡 〈죽음의 무도〉와 프랑스 동요들과 로시니. 원곡을 알수록 크게 웃게 되는 구조지만, 몰라도 사자는 사자처럼 코끼리는 코끼리처럼 들리거든요.

편성은 모두 열한 명입니다. 현악 다섯 / 플루트와 클라리넷 / 실로폰과 글래스 하모니카 / 피아노 두 대. 큰 무대가 아니라 살롱 응접실에 둘러앉아 연주하려고 짠 규모거든요.

제목의 ‘사육제’는 사순절이 시작되기 직전에 벌어지던 축제, 곧 카니발입니다. 가면 뒤에 얼굴을 숨기고 평소라면 엄두도 못 낼 장난을 쳐도 용서받던 시기죠. 근엄한 거장의 가면을 잠시 벗겠다는 심보가 제목에서부터 배어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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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듣는다면 이 네 곳부터 짚어보세요

전곡을 순서대로 완주하는 것보다, 농담이 가장 선명한 지점 몇 군데를 먼저 찍어 듣는 편이 훨씬 재미있습니다. 아래 네 곳만 기억하고 재생 버튼을 눌러보시죠.

① 13번 〈백조〉로 문 열기

첼로가 첫 음을 길게 끌 때, 그 아래에서 두 대의 피아노가 만드는 물결에 귀를 기울이세요. 첼로가 백조라면 피아노는 호수입니다. 이 모음곡에서 농담이 완전히 사라지는 유일한 몇 분이거든요.

② 4번 〈거북이〉는 캉캉과 겹쳐 듣기

현악이 켜는 그 느린 선율을 오펜바흐의 원래 캉캉과 머릿속에서 나란히 놓아보세요. 음표는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속도만 뺐을 뿐인데 전혀 다른 곡이 됩니다.

③ 5번 〈코끼리〉의 낮은 왈츠

콘트라베이스가 낑낑대며 켜는 저 왈츠가 원래는 공기 요정의 춤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들으면 훨씬 우습죠. 무거운 악기에게 가벼운 음악을 떠넘긴 장난이거든요.

④ 11번 〈피아니스트〉는 틀리게 치는 게 정답

두 연주자가 기초 음계 연습을 어설프게, 박자까지 엇갈려 뚱땅거립니다. 너무 완벽하게 치면 작곡가가 깔아둔 농담이 무너지거든요. 연주자가 얼마나 능청스럽게 서툰 척하는지 들어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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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만큼 재미있는 뒷이야기 둘

눈 내린 창가 책상에 두꺼운 가죽 장정 책과 흩어진 낱장 악보가 놓여 있고 펜을 쥔 손이 낱장 쪽으로 향한 그림
1886년 겨울참패하고 도망친 자리에서 나온 곡

쉰 살의 생상스는 독일 연주 여행이 처참하게 끝난 직후였습니다. 1870년 전쟁의 앙금이 양쪽에 남아 있던 시기라 프랑스 대표 작곡가를 반길 분위기가 아니었거든요. 그는 남은 일정을 모두 접고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로 물러났죠. 원래대로라면 교향곡 3번 〈오르간〉을 마무리해야 할 때였는데, 그 무거운 악보 대신 이 엉뚱한 곡을 써 내려갔습니다. 출판사에 보낸 편지에는 이런 변명이 적혀 있었죠: 그런데 이게 너무 재미있어서요.

어두운 무대에 한 줄기 조명이 떨어지고 백조 의상을 입은 무용수가 두 팔을 날개처럼 내리며 무릎을 꺾는 실루엣 그림
〈백조〉의 두 번째 삶작곡가의 손을 떠나 춤이 된 2분

유일하게 출판을 허락한 〈백조〉는 곧 작곡가만의 것이 아니게 됐습니다. 1905년 안무가 미하일 포킨이 이 선율에 짧은 발레를 붙였고, 무용수 안나 파블로바가 〈빈사의 백조〉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올렸거든요. 파블로바는 이 2분짜리 춤을 평생 수천 번 췄죠. 그래서 지금은 첼로 선율보다 마지막으로 날개를 파닥이는 백조의 모습이 먼저 떠오르는 음악이 되었습니다. 평판을 지키려 곡을 감췄던 작곡가에게, 세상은 정확히 반대로 답한 셈입니다.

동물 이름표 뒤에 어떤 곡이 숨어 있는지, 왜 평론가가 당나귀가 되었는지,
그리고 작곡가가 그토록 감추려 한 장난이 어쩌다 그의 이름을 가장 널리 알린 대표작이 되었는지. 열네 개의 우리를 하나씩 열어보는 이야기는 상세 해설에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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