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보 해적판 전쟁 — 저작권 없던 시대, 작곡가가 도둑과 싸운 법

코렐리를 베낀 런던, 비발디를 판 암스테르담, 그리고 1777년 바흐가 이긴 재판

지금은 · 스트리밍에서 곡 하나를 재생할 때마다, 아주 적은 금액이지만 작곡가와 권리자에게 저작권료가 흘러갑니다.

그때는 · 곡을 세상에 내놓는 순간, 그 악보는 사실상 먼저 찍는 사람이 임자였습니다. 남의 곡을 베껴 파는 출판사를 작곡가가 곧바로 막기 어려운 시대였으니까요.

이 글에서는 · 1700년 로마부터 1886년 베른 협약까지, 작곡가가 자기 악보를 지키려고 벌인 실제 사건들을 짚어봅니다.

1802년 가을 빈의 악보 가게 진열대에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1827)의 새 현악5중주 Op.29가 놓였습니다. 그런데 같은 곡의 악보가 두 종류였습니다. 하나는 빈의 출판사 아르타리아가 찍은 판이었고, 다른 하나는 라이프치히의 출판사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이 찍은 판이었습니다. 판형도 달랐고 오탈자도 서로 달랐습니다.

서른한 살 작곡가는 격노했습니다. 그해 11월 브라이트코프에 보낸 편지에서 베토벤은 아르타리아를 “그 악당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자기가 팔지 않은 판본이 자기 이름을 달고 버젓이 팔리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이 사건은 베토벤 한 사람의 불운이 아니었습니다. 악보에도 주인이 있다는 생각이 아직 법과 관행으로 굳어지지 못했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약 100년 전 로마에서도 한 작곡가의 작품이 유럽 곳곳에서 허락 없이 베껴지고 팔렸습니다. 저작권이라는 말이 아직 법전에 오르기 전, 작곡가는 자기 악보를 어떤 방식으로 재산처럼 지키려 했을까요.

1711년 암스테르담 에스티엔 로제가 동판으로 찍은 비발디 〈조화의 영감〉 Op.3 표지
1711년 암스테르담에서 동판으로 찍힌 비발디 〈조화의 영감〉 표지. 이렇게 잘 만든 악보일수록 더 빨리, 더 멀리 복제됐다.

파리, 왕이 준 200년짜리 자물쇠

시작은 파리였습니다. 1552년, 프랑스 왕 앙리 2세는 악보 인쇄인 아드리앙 르루아와 로베르 발라르에게 “왕실 음악 인쇄인”이라는 특허를 내줬습니다. 왕의 이름으로 악보를 찍을 권리를 특정 가문에 몰아준 겁니다. 이 특허 덕분에 발라르 가문은 이후 200년 가까이 파리의 음악 인쇄를 사실상 독점했습니다. 확인된 사실

문제는 인쇄 방식에서도 드러났습니다. 발라르 가문이 고수한 방식은 음표와 오선을 금속 활자 한 조각에 새긴 뒤, 그 활자를 하나씩 맞춰 찍는 단일 활자 인쇄였습니다. 16세기에는 앞선 기술이었지만 100년이 지나자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네덜란드와 영국에서는 금속판을 통째로 파서 찍는 동판 인쇄가 퍼지고 있었거든요. 동판은 곡선과 화음 표기를 훨씬 곱게 뽑아냈고, 한 번 판을 파두면 필요할 때마다 다시 찍어낼 수 있었습니다.

발라르 가문은 새 기술로 옮겨 가기보다 왕이 준 특허에 기대 독점을 지키려 했습니다. 1713년, 크리스토프 발라르는 자기 독점을 지키려고 소송을 걸었다가 오히려 패소했습니다. 법원은 발라르의 특허가 옛 활자 인쇄에만 적용될 뿐, 새로 등장한 동판 인쇄에는 미치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이 판결로 프랑수아 쿠프랭 같은 작곡가들이 비로소 자기 곡을 동판으로 직접 찍어낼 길이 열렸습니다. 확인된 사실

결과만 놓고 보면 역설입니다. 왕의 보호를 가장 든든하게 받은 파리가, 바로 그 보호 때문에 낡은 기술에 발이 묶였습니다. 해석 독점은 안전했지만, 안전한 자리에서는 굳이 새 기술을 좇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사이 악보 인쇄의 주도권은 상업 활동이 더 자유로웠던 암스테르담과 런던으로 넘어갔습니다.

암스테르담과 런던, 악보를 찍어내는 복제 공장

암스테르담에는 에스티엔 로제라는 출판업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동판 인쇄로 찍은 이탈리아 음악 악보를 유럽 여러 도시로 유통시킨 인물이었습니다. 1711년, 베네치아의 안토니오 비발디(1678~1741)는 자기 협주곡집 〈조화의 영감〉 Op.3를 고향 출판사가 아니라 로제에게 맡겼습니다. 비발디가 이탈리아 바깥의 출판사를 고른 것은 이례적인 선택이었습니다.

비발디가 로제를 택한 이유는 그의 유통망이 그만큼 넓었기 때문입니다. 로제는 로테르담, 런던, 쾰른, 베를린, 라이프치히, 파리, 브뤼셀, 함부르크까지 대리인을 두고 있었습니다. 〈조화의 영감〉은 이 유통망을 타고 퍼졌고, 1743년까지 스무 번 넘게 다시 찍혔습니다. 한 작곡가의 협주곡집이 국경을 넘어 유럽 전역으로 팔려 나간 것입니다.

로제의 판본도 곧 다른 출판업자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런던의 존 월시는 로제가 찍은 악보를 거의 그대로 베껴 팔았습니다. 월시는 18세기 초 런던 최대의 악보 출판업자였고, 남의 인기 악보를 베껴 찍는 데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로제가 정리해 둔 코렐리 전집을 런던에서 그대로 복제한 것도 월시와 그 동업자들이었습니다.

악보를 든 아르칸젤로 코렐리 초상화, 휴 하워드 1697년경
1697년경 그려진 아르칸젤로 코렐리. 생전부터 이미 유럽에서 가장 자주 복제되던 작곡가 중 하나였다.

그중에서도 로마의 아르칸젤로 코렐리(1653~1713)는 특히 많이 무단 복제된 작곡가였습니다. 1700년 로마에서 초판이 나온 그의 바이올린 소나타집 Op.5는 출간 직후부터 50년 넘게 유럽 전역에서 복제되고, 편곡되고, 다시 찍혔습니다. 어떤 인쇄업자는 음표를 조금 바꿔 찍었고, 어떤 이는 자기 서문을 붙여 새 판인 척했으며, 또 어떤 이는 초보자용으로 쉽게 고쳐 팔았습니다. 확인된 사실

규모는 숫자로 보면 더 분명합니다. 1700년 초판이 나온 뒤 1800년까지 100년 동안, 코렐리 Op.5는 유럽 열 개 도시에서 쉰 번 넘게 다시 찍혔습니다. 무치오 클레멘티가 운영한 출판사도 이 소나타를 찍어낸 곳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출판업자들은 100년 가까이 된 소나타를 두고 저마다 새 판본의 주인 행세를 한 셈입니다. 확인된 사실

코렐리 바이올린 소나타 Op.5

🎬 코렐리 〈바이올린 소나타 Op.5〉. 유럽 전역에서 복제와 편곡을 거듭했던 작품을 직접 들어볼 수 있다.

월시는 헨델의 이름도 이용했습니다.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1685~1759)이 런던에 자리 잡자, 월시는 헨델의 인기곡을 무단으로 찍어 팔았습니다. 심지어 헨델이 쓰지도 않은 곡을 헨델 작품인 것처럼 광고해 판 정황까지 남아 있습니다. 해석 이 시장에서는 실제 저자가 누구인지보다, 잘 팔리는 이름을 붙여 팔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해졌습니다.

헨델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1720년 6월 14일, 헨델은 앞으로 쓸 모든 작품을 14년 동안 독점 출판할 권리를 국왕에게서 받아냈습니다. 이 특허는 지정된 출판업자만 헨델의 악보를 찍을 수 있게 한 조치였습니다. 문제는 그 지정 출판업자 명단에 바로 존 월시가 들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월시는 특허의 울타리 안에서도 밖에서도 계속 헨델의 악보를 찍어냈고, 그중에는 작곡가의 교정을 거치지 않은 오류투성이 판본도 있었습니다.

1777년 런던, 악보가 ‘재산’이 된 날

사실 영국에는 이미 저작권법이 있었습니다. 1710년 4월 10일에 발효된 앤 여왕법으로, 흔히 세계 최초의 저작권법으로 꼽힙니다. 그전까지 출판은 인쇄업자 길드가 자기들끼리 나눠 갖던 특권이었는데, 이 법이 처음으로 저작물의 권리를 저자에게 돌려줬습니다. 보호 기간은 새 책이 14년, 저자가 살아 있으면 14년을 더 갱신할 수 있었습니다.[1] 확인된 사실

문제는 악보였습니다. 이 법은 “책과 그 밖의 저술”을 보호한다고 적었지만, 악보를 따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출판업자들은 악보가 책이나 저술이 아니라 소리를 기호로 적어 둔 인쇄물에 불과하므로 저작권법의 보호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주장이 받아들여지는 한, 남의 악보를 베껴 찍어 파는 일은 사실상 막기 어려웠습니다.

악보를 든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 초상화, 토머스 게인즈버러 작
런던에서 활동한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 그의 소송은 악보도 저작권법이 보호하는 재산인지 묻는 사건이었다.

그 빈틈을 법정으로 가져간 사람이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1735~1782)입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막내아들인 그는 런던에 자리 잡은 뒤, 자신이 1769년에 쓴 건반 소나타 두 곡이 출판업자 제임스 롱맨과 찰스 루키에게 무단으로 인쇄·판매되자 소송을 냈습니다. 1773년에 시작된 이 다툼은 1776년에 왕좌부라는 상급 법정으로 넘어갔고, 마침내 1777년 6월 16일 판결이 나왔습니다.[2] 확인된 사실

판결을 이끈 사람은 당대 최고의 법관으로 꼽히던 맨스필드 경이었습니다. 그의 논리는 명쾌했습니다.

“음악은 하나의 학문이다. 종이에 옮겨 적을 수 있고, 그 관념을 전하는 방식은 기호와 표식이다. 따라서 악곡은 법이 말하는 ‘저술’에 해당한다.”

이 판단으로 악보는 법이 보호하는 재산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법원은 롱맨과 루키에게 두 소나타를 팔아 얻은 수익 전부를 바흐에게 돌려주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판결은 악보를 단순한 인쇄물이 아니라 작곡가의 권리가 붙은 저작물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유럽 음악 저작권의 역사에 뚜렷한 분기점으로 남았습니다.

빈, 출판사를 서로 경쟁시킨 베토벤

이 대목에서 다시 1802년 빈으로 돌아갑니다. 베토벤을 격노하게 한 현악 5중주 Op.29 사건은 단순한 해적 출판 문제가 아니라, 위촉자와 두 출판사, 그리고 작곡가의 이해관계가 한꺼번에 얽힌 일이었습니다.

스물여섯 살 무렵의 젊은 베토벤 초상 판화
스물여섯 살 무렵의 베토벤. 그는 출판사와 충돌하면서도, 출판사들 사이의 경쟁을 자기 협상에 이용할 줄 알았다.

프리스 백작은 이 곡을 위촉하면서 여섯 달 동안 독점권을 갖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백작은 그 기간 안에 필사본을 빈의 아르타리아에 넘겼고, 아르타리아는 그 필사본으로 출판을 준비했습니다. 이 사정을 몰랐던 베토벤은 같은 곡을 라이프치히의 브라이트코프에 따로 팔았습니다. 그 결과 1802년 가을, 같은 곡의 두 판본이 거의 동시에 세상에 나왔습니다. 베토벤은 아르타리아가 자신과 직접 계약하지도, 제값을 치르지도 않았다고 보았고, 편지에서 그들을 “악당들”이라 불렀습니다.

이 사건에는 또 다른 일화도 따라붙습니다. 아르타리아 판이 오류투성이라고 본 베토벤이 교정을 봐 주겠다며 사본 오십여 부를 받아 온 뒤, 붉은 잉크로 일부러 심하게 고쳐 되돌려 보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르타리아가 그 사본들을 팔지 못하게 만들려 했다는 설명입니다. 설(說) 다만 이 일화는 전기 작가들 사이에서 되풀이될 뿐, 1차 기록으로는 확인되지 않아 그대로 믿기는 어렵습니다.

베토벤은 이런 상황을 그저 견디기만 한 작곡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빈의 아르타리아, 라이프치히의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 고향 본의 짐로크, 그리고 런던의 출판사들 사이를 오가며 지역별로 판권을 나눠 팔았습니다. 해석 저작권이라는 안전망이 아직 국경을 넘지 못하던 시절, 베토벤은 지역 라이선싱에 가까운 협상 방식을 스스로 활용한 셈입니다. 한 나라에서 무단 출판 피해를 보더라도 다른 나라에서는 대가를 받을 수 있도록, 출판사들의 경쟁을 자기 쪽으로 끌어온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반격: 빌려주고, 팔아넘기고

알프스 남쪽 이탈리아의 사정은 더 험했습니다. 여러 나라와 도시국가로 나뉘어 있다 보니 한 지역에서 인정된 저작권이 국경을 넘어서까지 힘을 쓰기 어려웠고, 인기 작곡가일수록 무단 공연과 무단 출판의 피해가 커졌습니다. 조아키노 로시니(1792~1868)가 대표적입니다. 국경을 넘는 저작권 보호가 약했던 탓에 그의 오페라는 유럽 곳곳에서 로열티 없이 쓰였습니다. 극장 매니저든, 출판업자든, 번역가든 악보와 대본을 가져다 공연하고 팔아도 로시니에게 돈이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후속 공연에서 돈을 받을 수 없다면 로시니가 기대할 수 있는 수입은 초연 때 한꺼번에 받는 계약금에 가까웠습니다. 1815년, 로시니는 흥행주(임프레사리오)였던 스포르차체사리니 공작과 〈세비야의 이발사〉 계약을 맺으면서 자기가 쳄발로를 치며 지휘하는 첫 세 번의 공연이 끝나면 400로마 스쿠도를 받기로 했습니다.[3] 확인된 사실 같은 해 나폴리에서는 극장주 바르바야와 한 달에 200두카트를 받는 전속 계약을 맺었고, 그 조건에는 극장에 딸린 도박장 수익의 일부도 들어 있었습니다. 훗날 그 도박장이 문을 닫자 그 수입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19세기 밀라노의 리코르디 악보 인쇄소 건물
밀라노의 리코르디 인쇄소. 이 회사는 악보를 ‘팔지 않고 빌려주는’ 방식으로 해적판에 맞섰다.

밀라노의 출판사 리코르디는 다른 대응책을 마련했습니다. 리코르디는 주세페 베르디(1813~1901) 같은 작곡가의 오페라 총보를 아예 팔지 않고 극장에 빌려줬습니다. 총보를 시중에 인쇄해 풀어 놓으면 곧바로 복제될 수 있었기 때문에, 필사본을 직접 관리하며 공연 때마다 대여료를 받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해석 판매용 인쇄본을 내지 않고 대여 장부로만 관리한 이 방식은 악보가 여러 곳으로 흩어지는 일을 막으면서 수입은 계속 거두는 우회로였습니다. 리코르디는 이 방식으로 베르디와 반세기 넘게 협력했습니다.

작곡가들의 이런 각개전투에 마침표를 찍은 것은 결국 국제 협약이었습니다. 1886년 9월 9일, 스위스 베른에서 국경을 넘는 저작권 보호를 처음으로 약속한 협약이 맺어졌습니다. 창설 회원국은 벨기에·프랑스·독일·아이티·이탈리아·라이베리아·스페인·스위스·튀니지·영국 열 곳이었습니다.[4] 확인된 사실 한 나라에서 인정받은 권리를 다른 나라에서도 지켜 주기로 하면서, 코렐리와 헨델을 괴롭히던 국경 밖 무법지대는 비로소 좁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와 지금, 악보 한 장의 무게

그때 (1700~1880년대)지금
악보의 권리따로 없음. 먼저 찍는 사람이 임자창작하는 순간 저작권이 자동으로 생김
작곡가 수입한 번 팔면 끝. 후속 공연은 0원공연·방송·스트리밍마다 저작권료
해적판합법에 가까움. 유럽 전역에서 성행명백한 불법
국경을 넘으면무방비. 옆 나라에선 마음대로 복제베른 협약 등으로 국제 보호
분쟁 해결편지로 욕하거나, 드물게 법정 다툼등록·계약·소송의 체계

지금은 곡을 하나 만들면 그 순간부터 저작권이 생기고, 별도의 등록 절차도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코렐리에서 베르디에 이르는 두 세기 가까운 시간 동안 작곡가에게는 그런 자동 보호 장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왕의 특허에 기대거나, 법정에 서거나, 여러 출판사를 경쟁시키거나, 아예 악보를 쉽게 내주지 않는 방식으로 자기 작품을 지켜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이 곡은 이 사람 것”이라는 한 줄은, 악보를 둘러싼 이 오랜 싸움 끝에 남은 결론입니다.

이어서 읽기: 이 시대를 소리로 확인하고 싶다면

악보 해적판 전쟁의 당사자들, 그리고 같은 시대의 다른 풍경으로 이어지는 글들입니다. 함께 읽을 만한 이유를 한 편씩 짧게 덧붙였습니다.

  • 이 글에서 해적 출판의 피해자로 등장한 헨델의 대표곡 헨델 〈수상음악〉을 함께 읽을 수 있습니다. 월시가 무단으로 찍어 팔던 악보가 어떤 음악이었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 베토벤의 생애와 음악은 출판사들과 벌인 갈등까지 포함해, 한 작곡가가 자기 시대와 어떻게 부딪혔는지 넓게 보여줍니다.
  • 같은 ‘옛날 이모저모’ 시리즈인 베토벤 음악회 표 2굴덴은 악보가 아니라 표값 쪽에서 그 시대의 돈을 들여다봅니다.
  • 지휘자는 어떻게 제왕이 되었나는 프랑스 왕실 특허가 음악 권력을 만든 또 다른 사례입니다. 륄리가 쥔 오페라 독점과 발라르 가문의 악보 독점이 어떤 방식으로 닮았는지 함께 볼 수 있습니다.
  • 바그너 〈발퀴레의 기행〉은 작곡가가 자기 음악의 무단 연주를 막으려 했던 이야기입니다. 악보 해적판을 막던 싸움이 한 세기 뒤 공연 통제로 어떻게 이어졌는지 보여줍니다.

자주 묻는 질문

저작권이 없으면 작곡가는 어떻게 돈을 벌었나요?

악보 판매보다 더 큰 수입원은 따로 있었습니다. 귀족이나 교회가 의뢰한 작품료, 직접 연주하거나 지휘하며 받은 출연료, 제자를 가르친 교습료, 궁정 급여 등이었습니다. 로시니 같은 오페라 작곡가는 작품을 넘길 때 처음 한 번 작품료를 받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1815년 로시니가 〈세비야의 이발사〉로 받기로 한 돈은 로마 스쿠도 400이었고, 이후 공연 수입은 작곡가에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악보를 베껴 파는 게 정말 불법이 아니었나요?

1710년 앤 여왕법이 나오기 전에는 저작물 복제를 폭넓게 규율하는 법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 법이 나온 뒤에도 악보가 보호 대상인지 분명하지 않아, 인쇄업자들은 악보 복제가 합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애매함은 1777년 바흐 대 롱맨 판결에서 “악보도 저작물”이라는 결론이 나온 뒤에야 줄어들었습니다. 그전까지 남의 악보를 베껴 파는 일은 사실상 합법에 가까웠습니다.

왜 이탈리아나 독일이 아니라 암스테르담과 런던이 악보 인쇄 중심이었나요?

두 도시는 동판 인쇄 기술을 받아들이기 쉬웠고, 찍어 낸 악보를 유럽 시장에 유통할 상업망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파리는 발라르 가문이 왕실 특허로 옛 활자 인쇄를 독점하는 바람에 새 기술로 옮겨 가지 못하고 뒤처졌습니다. 반면 암스테르담의 에티엔 로제, 런던의 존 월시는 동판 인쇄로 선명한 악보를 비교적 빠르게 찍어 유럽 전역에 유통했습니다. 악보가 많이 복제되는 도시는 해적판이 퍼지는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베토벤은 정말 같은 곡을 여러 출판사에 팔았나요?

베토벤은 같은 곡이라도 지역별 판권을 나누어 여러 출판사와 계약했습니다. 빈의 아르타리아, 라이프치히의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 본의 짐로크, 런던의 출판사들에 서로 다른 지역의 판권을 주는 방식이었습니다. 저작권이 국경을 넘지 못하던 시절이라, 한 나라에서 무단 복제가 일어나더라도 다른 나라에서는 값을 받으려는 자구책이었습니다. 1802년 현악 5중주 Op.29를 둘러싼 분쟁도 이런 지역별 판권 거래가 어긋나면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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