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곡은 18세기 베네치아 작곡가 알비노니의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연주되는 형태는 이탈리아 음악학자 레모 지아조토가 완성해 1958년 발표한 20세기 작품입니다.
한 대목에 집중한다면 오르간이 낮게 울리는 가운데 바이올린의 하강 선율이 세 번째로 등장하는 부분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같은 선율이 거듭될수록 긴장이 높아져 절정에 이릅니다.
처음 들을 음반을 찾는다면 카라얀이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한 도이체 그라모폰 녹음이 무난합니다.
장례식장이나 추모 방송에서 단골로 흐르고, 영화에서도 슬픔을 쥐어짜는 장면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곡이죠. 음반 표지마다 큼지막하게 ‘알비노니(Albinoni)’라는 이름이 박혀 있으니, 영락없는 300년 전 바로크 시대의 유산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정작 토마소 알비노니가 이 곡을 완성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거든요.
오늘날 연주되는 형태의 아다지오를 빚어내 세상에 발표한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20세기 이탈리아 음악학자 레모 지아조토입니다. 그가 곡을 내놓은 1958년은 바흐와 헨델이 눈을 감은 18세기 중반으로부터 무려 약 200년이나 지난 뒤였죠. 그렇다면 대체 이 20세기 작품에는 무슨 연유로 알비노니의 이름표가 찰싹 붙어 있는 걸까요.

음반 표지엔 알비노니, 악보 속엔 지아조토
먼저 족보가 꼬인 이름부터 정리하겠습니다. 이 곡의 정식 제목은 숨이 찰 만큼 길고 무척 낯설 거든요. 1958년 이탈리아 출판사 리코르디가 펴낸 악보를 보면 “토마소 알비노니의 두 가지 주제와 하나의 숫자저음에 바탕을 둔, 현과 오르간을 위한 g단조 아다지오”라고 당당히 적혀 있습니다. 한국어로 옮겨 놓은 제목이 제법 복잡해 보이지만 요점은 아주 선명하죠. 알비노니에게서 빌려온 것은 고작 일부 음악 재료일 뿐이고, 이를 뼈대 삼아 지금 연주되는 곡을 완성한 진짜 장본인은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제목에서 스쳐 지나간 ‘숫자저음’은 바로크 시대에 널리 쓰였던 기보 방식입니다. 악보의 저음 선율 아래에 숫자를 툭툭 던져 두면, 연주자가 그 숫자를 힌트 삼아 알아서 위쪽 화음을 채워 넣는 식이죠. 그러니까 오선지 위에 모든 음표를 빽빽하게 그려 넣은 친절한 악보라기보다는, 저음과 화음 구성의 단서만 앙상하게 남긴 기록에 가깝습니다. 지아조토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자신이 알비노니의 자료 더미에서 저음 선율과 숫자저음 등 일부 음악 재료를 발굴해 냈고, 이를 바탕으로 지금 연주되는 형태의 곡을 스스로 구성했다는 겁니다.
오늘날 이 곡의 뒤에는 ‘Mi 26’이라는 묘한 번호도 졸졸 따라붙습니다. 1958년 출판 당시부터 근사하게 박혀 있던 기호가 아니라, 수십 년이 흐른 뒤 영국 음악학자 마이클 탤벗이 알비노니의 작품을 갈래별로 분류한 현대 목록에서 이 곡에 턱 매겨놓은 기호거든요. 여기서 Mi란 협주곡이나 소나타처럼 뚜렷한 족보에 끼지 못하는 곡들을 한데 모아둔 항목입니다. 결국 이 번호는 지아조토가 스스로 훈장처럼 붙인 것이 아니라, 후대 학자가 ‘알비노니와 얽힌 곡’을 싹싹 정리하다가 편의상 붙여준 꼬리표인 셈입니다.
이 곡을 현재의 형태로 완성했다고 밝힌 사람은 레모 지아조토입니다. 그는 1910년 로마에서 태어나 1998년 피사에서 눈을 감은 이탈리아의 음악학자이자 비평가였죠. 젊은 시절부터 알비노니에 푹 빠져 지내며 연구를 거듭하더니, 1945년에는 전기를 펴냈고 그의 기악곡을 처음으로 체계적인 목록으로 묶어내기도 했습니다. 지아조토는 이처럼 알비노니를 깊이 연구한 학자였으며, 자신이 발견했다는 음악 재료를 뼈대 삼아 곡을 구성해 알비노니의 이름과 함께 세상에 발표했습니다.
이 대목에서는 꽤 중요한 저작권 문제도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이 아다지오는 엄연히 지아조토가 완성한 20세기 작품으로 취급되어 저작권 보호 대상이 되거든요. 지아조토가 1998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저작자 사후 70년의 보호 기간을 깐깐하게 적용하는 유럽 국가에서는 원칙적으로 2068년 말까지 그 권리가 고스란히 유지됩니다. 아무런 새로운 저작 요소가 더해지지 않은 18세기 원곡이라면 저작권 따위는 진작에 소멸해 누구나 자유롭게 악보를 이용할 수 있어야 마땅하죠. 따라서 현재 유통되는 판본이 300살짜리 바로크 원곡 그대로가 아니라, 지아조토의 기여가 반영된 20세기 판본으로 법적 취급을 받아 왔다는 점은 명확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만 구체적인 보호 기간과 이용 조건은 국가에 따라 고무줄처럼 달라질 수는 있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저작권 보호가 실제 작곡 경위까지 낱낱이 입증해 주는 것은 아니며, 21세기 후반까지 보호된다는 사실만으로 곡 안에 알비노니의 음악 재료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도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죠.
종이 장수 아들, 베네치아의 딜레탕테
작곡가 토마소 조반니 알비노니는 1671년 6월 8일 베네치아에서 세상의 빛을 보았습니다. 그의 아버지 안토니오 알비노니는 카드와 문구류를 팔아 제법 넉넉한 수입을 올리던 종이 상인이었죠. 이처럼 든든한 집안 형편 덕분에, 알비노니는 당장 팍팍한 생계를 걱정하며 전전긍긍할 필요 없이 한결 여유롭게 음악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당시 음악가들은 대개 교회나 궁정에 고용되어 일했습니다. 반면 알비노니는 어느 기관에도 전속되지 않은 채 비교적 자유롭게 작곡할 수 있었고, 악보 표지에는 스스로를 ‘베네치아의 딜레탕테(dilettante veneto)’라고 적어 넣곤 했죠. 당시의 딜레탕테는 지금처럼 ‘어설픈 아마추어’를 깎아내리며 조롱하는 말이 아니었거든요. 음악을 팍팍한 생업으로 삼지는 않더라도, 전문적인 수준으로 배우고 창작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에 가까웠습니다.
알비노니가 활동하던 베네치아는 당시 유럽에서 손꼽히는 음악 도시였습니다. 〈사계〉로 유명한 안토니오 비발디 역시 같은 도시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수많은 협주곡을 쏟아냈죠. 알비노니는 비발디보다 몇 살 위였고, 두 작곡가는 독주 악기와 현악 합주가 선명하게 대화를 나누듯 주고받는 베네치아 바로크 협주곡을 훌륭하게 발전시켰습니다. 알비노니는 비발디만큼 오늘날 대중에게 익숙하지는 않지만, 당대에는 작곡가로서 탄탄한 실력을 인정받았습니다. 다만 그의 후반생과 작품에 관한 기록 곳곳에는 듬성듬성 빈틈이 많았거든요. 무려 200년 뒤 지아조토가 알비노니의 이름을 떡하니 내세워 ‘새로 발견된 곡’을 발표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역설적이게도 이 명성과 기록의 공백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덕분이었습니다.
1705년에 마르게리타 리몬디와 결혼한 뒤에는 슬하에 여섯 자녀를 두었습니다. 궁정이나 교회가 달아놓은 주문과 마감이라는 족쇄에 매이지 않았던 그는 비교적 독립적인 환경에서 작품을 썼습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200년 뒤 그의 이름은 ‘폭격 속에서 겨우 건진 비극의 단편’이라는 한 편의 극적인 이야기 주인공으로 쓰이고 말았습니다. 생전에 제도권 밖을 자유롭게 누비며 활동했던 작곡가가, 죽고 나서는 출처가 불분명한 작품의 권위를 그럴싸하게 보증해 주는 이름이 된 셈입니다.

그렇다고 알비노니가 실제로 남긴 음악이 결코 적은 것은 아닙니다. 오페라를 쉰 편 넘게 썼으며, 스스로는 여든한 편을 작곡했다고 밝혔거든요. 현재 전해지는 기악곡만 세어봐도 소나타 아흔아홉 곡, 협주곡 쉰아홉 곡, 신포니아 아홉 곡에 이릅니다. 그중 오보에를 독주 악기로 앞세운 협주곡은 당시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었죠.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도 알비노니의 주제를 바탕으로 건반악기용 푸가를 두 곡 이상 썼고, 그의 저음 진행을 떼어다 화성 연습에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당대의 저명한 작곡가 바흐가 알비노니의 작품을 연구하고 작곡 재료로 삼았다는 점은, 그의 작법이 동시대 음악가들의 시선을 단단히 끌었음을 보여 줍니다.
알비노니가 직접 남긴 음악을 만나고 싶다면 g단조 아다지오 대신 오보에 협주곡부터 들어 보는 것도 좋습니다. 오보에의 부드러운 선율이 유려하게 노래하듯 이어지고, 독주 악기와 현악 합주가 선명하게 주고받는 바로크 협주곡 특유의 매력을 온전히 들을 수 있거든요. 이 곡들을 들어 보면 대중에게 익숙한 장중하고 느린 아다지오와 알비노니의 실제 협주곡이 선율과 분위기 면에서 얼마나 판이하게 다른지 선명하게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알비노니는 오페라 작곡가로 기억되지는 않습니다. 그가 무대에 올린 오페라 수십 편 가운데 대부분은 악보조차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죠. 18세기 오페라는 대개 특정 시즌의 공연을 위해 쓰이는 경우가 많았고, 공연이 끝난 뒤 악보를 체계적으로 보존하지 않는 일도 흔했습니다. 그 결과 그의 오페라 대부분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대신 출판의 힘을 빌려 널리 유통된 기악곡만이 알비노니라는 이름을 후대에 전해 주었죠.
알비노니는 1751년 1월 17일, 일흔아홉 살의 나이로 베네치아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사인은 당뇨병으로 전해집니다. 야속하게도 말년으로 갈수록 그의 생애와 창작 활동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드물어지거든요. 작품 상당수도 사후에 뿔뿔이 흩어져 자취를 감췄으며, 특히 1720년대 중반 이후에 쓴 음악은 남아 있는 것이 적습니다. 이처럼 생애와 작품 목록 곳곳에 공백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200년 뒤 지아조토가 불쑥 내놓은 ‘발견된 작품’ 이야기를 당시로서는 곧바로 반박하기가 어려웠던 겁니다.
드레스덴에서 왔다는 단편 여섯 마디
지아조토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난 직후, 그는 독일 드레스덴의 작센 주립도서관에서 알비노니의 트리오 소나타 중 느린 악장으로 추정되는 단편을 입수했다고 밝혔습니다. 온전한 악보가 아니라 도입부 몇 마디의 선율과 이를 아슬아슬하게 받치는 저음만 남은 자료였다는 것이죠. 지아조토는 바로 이 앙상한 뼈대를 바탕으로 나머지 살을 덧붙여 한 편의 절절한 아다지오로 완성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지아조토의 설명이 설득력을 얻은 데에는 드레스덴의 참혹한 전쟁 피해가 한몫을 했습니다. 드레스덴은 1945년 2월과 3월 연합군의 대규모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 작센 주립도서관 건물도 이때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죠. 이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알비노니의 작품 일부도 전쟁 중에 소실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바로 이런 배경이 “폭격으로 잿더미가 된 도서관에서 건져 올린 알비노니의 마지막 단편”이라는 이야기에 그럴듯함과 극적인 분위기를 불어넣은 겁니다.

여기에는 참으로 씁쓸한 아이러니가 숨어 있습니다. 알비노니의 작품이 실제로 사라졌다고 전해지는 도서관이, 이번에는 알비노니의 것인지조차 확인되지 않은 단편의 출처로 버젓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소실된 작품과 새로 발견됐다는 단편이 같은 도서관을 배경으로 엮이자 사람들은 두 이야기를 슬쩍 혼동하기 쉬웠죠. 실제로 잃어버린 작품이 있다는 사실이 단편을 되찾았다는 주장에도 묘한 설득력을 더해버린 셈입니다.
이 한 편의 영화 같은 이야기는 곡이 받아들여지는 방식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곡이 알려질수록 사람들은 폭격을 맞은 도서관과 잃어버린 악보를 자연스레 함께 떠올렸고, 아다지오 특유의 무겁고 슬픈 분위기가 그 배경과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린다고 여겼거든요. 하지만 지아조토가 발견했다는 단편, 곧 이 모든 이야기를 입증해 줄 원자료는 끝내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끝내 나오지 않은 종잇조각
처음에는 이 곡의 출처를 둘러싼 의문이 크게 제기되지 않았습니다. 알비노니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꼽히던 지아조토가 자기 이름을 떡하니 걸고 발표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다른 학자들이 곡의 화성과 짜임새를 요모조모 뜯어보면서 점차 의문이 커졌습니다. 18세기 음악으로 보기에는 훨씬 후대의 감각이 거듭 드러난 데다, 지아조토가 제시한 출처를 확인할 만한 뚜렷한 증거조차 나오지 않았거든요.
지아조토는 살아 있는 동안 그 단편의 실물을 단 한 번도 시원하게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더 결정적인 문제는 그가 발견 장소로 콕 집어 지목한 작센 주립도서관에도 해당 자료의 존재를 확인해 주는 공식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도서관 목록과 소장 이력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자, 많은 학자는 알비노니의 단편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 곡 전체가 지아조토의 20세기 창작일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이 곡이 음악사에서 대표적인 ‘음악적 날조(hoax)’ 사례로 거론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죠.
그런데 지아조토가 세상을 떠난 뒤, 이 논의를 다시 복잡하게 뒤흔든 증언이 나왔습니다. 그의 마지막 조수였던 음악학자 무스카 만가노가 지아조토의 유품을 정리하다 종이 한 장을 찾았다고 밝힌 겁니다. 이 종이는 빛바랜 오래된 원본이 아니라 현대에 옮겨 적은 사보였으며, 저음 진행과 제1바이올린 선율 단 여섯 마디가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만가노는 이 사보의 오른쪽 위 귀퉁이에 원본이 드레스덴에서 왔다는 뜻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고 설명했죠.
💡 작품의 이름과 실제 작곡자 —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라는 이름은 지금도 음반과 영화 크레딧에 그대로 쓰입니다. 그러나 현재 연주되는 형태로 곡 전체를 완성한 사람은 20세기 음악학자 레모 지아조토입니다. 알비노니가 썼다고 전해지는 단편은 현대에 옮겨 적은 사보만 알려졌을 뿐, 오래된 원본은 공개된 적이 없습니다. 영어판 위키백과와 여러 음악사전도 이 곡의 작곡자를 알비노니가 아닌 지아조토로 분류합니다.
만가노의 사보는 속 시원하게 논의를 끝내지 못한 채 새로운 가능성만 덩그러니 남겼습니다. 도장이 진짜라면 지아조토가 곡의 재료를 완전히 허공에서 뚝딱 만들어 낸 것은 아닐 수 있거든요. 그러나 이 종이는 엄연히 18세기 원본이 아니라 현대에 옮겨 적은 사본이므로, 도장 하나만으로 단편의 출처를 입증할 수는 없습니다. 사본이나 도장이 뒷날 누군가에 의해 슬쩍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죠. 출처를 확정하는 데 필요한 18세기 원본은 야속하게도 여전히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단편이 실제로 존재했는지, 존재했다면 정말 알비노니의 악보였는지를 100퍼센트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만가노가 공개한 사보 한 장만으로는 단편이 알비노니에게서 왔음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현재 연주되는 형태의 곡 전체를 빚어낸 사람이 18세기 베네치아의 알비노니가 아니라 20세기 이탈리아의 지아조토라는 점만큼은 안갯속에서도 분명합니다.
지아조토는 왜 자기 이름을 숨겼나
지아조토는 자기 이름을 쏙 감춘 정확한 이유를 끝내 밝히지 않았으므로, 남아 있는 정황을 바탕으로 조심스레 짐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그는 문헌만 파고들던 학자가 아니라, 라디오 방송을 위해 직접 곡을 쓰기도 한 어엿한 작곡가였거든요. 만년에는 이 아다지오가 알비노니의 단편에 기댄 작품이 아니라 자신이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쓴 곡이라고 인정했습니다. 이 발언대로라면 곡 전체를 제 손으로 직접 쓰고도 자기 이름 대신 알비노니의 이름을 떡하니 내세운 셈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가능한 설명은 알비노니라는 이름이 가진 묵직한 인지도입니다. 1950년대 청중에게는 ‘무명 현대 작곡가의 낯선 신곡’보다 ‘폭격 속에서 극적으로 되살아난 바로크 거장의 잃어버린 단편’이라는 이야기가 훨씬 더 큰 관심을 끌었을 수 있거든요. 지아조토가 작품의 판매와 홍보를 과연 어디까지 치밀하게 계산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알비노니라는 이름과 한 편의 영화 같은 극적인 발견담은 곡을 널리 알리는 데 무척 유리한 조건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결국 이 곡은 알비노니의 작품으로 소개되면서 세계 여러 무대에서 자주 연주되는 아다지오가 되었습니다.
이 곡의 기원을 둘러싼 견해는 크게 두 갈래입니다. 한쪽에서는 원본 단편이 처음부터 없었으며, 지아조토가 곡 전체를 작곡한 뒤 알비노니의 이름만 슬쩍 빌렸다고 봅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만가노가 공개한 필사 악보를 근거로, 지아조토가 아주 짧은 옛 악보 조각에서 출발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어느 견해를 따르더라도, 오늘날 연주되는 아다지오의 대부분은 지아조토가 완성한 것이라는 해석이 널리 받아들여집니다.
가짜 바로크가 이렇게까지 슬픈 이유
기구한 출생의 비밀은 이쯤 덮어두고, 이제 음악 자체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겠습니다. 곡은 사단조로 된 느린 한 악장입니다. 낮고 무거운 오르간 화음이 바닥에 묵직하게 깔리면, 그 위에서 현악기의 선율이 계단을 밟듯 한 음씩 아래로 내려갑니다. 이렇게 뚝뚝 하행하는 흐름이 곡 전체를 꼿꼿하게 지탱하는 뼈대가 되죠. 같은 흐름이 몇 번이고 집요하게 되풀이되는 동안, 그 위에 놓인 선율은 조금씩 더 높이 올라가며 허공으로 길게 뻗어 갑니다.
바이올린은 처음에는 숨을 죽인 듯 조심스럽게 선율을 시작합니다. 이윽고 같은 선율이 두 번째로 돌아오면 소리에 조금 더 단단한 힘이 붙고, 세 번째 반복에서는 가장 높은 음까지 가파르게 치솟아 그 음을 아득하게 길게 이어 가죠. 바로 이때 곡의 감정도 덩달아 절정에 이릅니다. 오르간은 아래에서 같은 저음의 흐름을 흔들림 없이 묵묵히 이어 가고, 바이올린은 그 위로 까마득히 솟았다가 다시 스르르 내려옵니다. 이 무거운 저음의 반복과 애절한 선율의 상승이 팽팽하게 맞물리기 때문에, 300년 된 곡이 아니라는 사실을 뻔히 알고 들어도 여전히 목이 멥니다.
폭풍 같은 절정을 지나면 곡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어깨의 힘을 뺍니다. 한껏 풍성해졌던 현악기의 소리가 하나둘 쓸쓸히 잦아들고, 마지막에는 처음 들었던 그 낮은 오르간 화음으로 스르르 돌아오거든요. 거창하게 매듭짓기보다는 그저 조용히 문을 닫고 퇴장하듯 끝납니다. 이처럼 감정을 한껏 끌어올렸다가 차분히 가라앉히는 흐름만 떼어 놓고 보면, 곡의 구조는 놀랄 만큼 단순합니다. 눈 돌아가는 화려한 기교나 복잡하게 얽히는 대위법 따위는 두드러지지 않죠. 감정을 어떤 구체적인 사연 하나로 꽁꽁 묶어두지 않는 이 여백 많은 단순한 구조 덕분에, 곡은 세상의 여러 슬픈 장면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어울립니다. 음악이 묵묵히 슬픔의 밑그림을 그려주면, 듣는 사람은 자신의 기억으로 나머지를 채우게 되는 셈입니다.
🎧 이 무지치 연주에서는 1958년 악보에 적힌 대로 오르간과 현악기만 사용한 담백한 편성이 잘 드러납니다. 곡을 지탱하는 낮은 저음과 그 위에서 길게 이어지는 현악기의 호흡도 또렷하게 들립니다.
이 슬픔의 어법에는 바로크의 흔적과 20세기의 감각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되풀이되는 저음 위에 선율을 차곡차곡 쌓아 감정을 끌어올리는 방식은 18세기 음악에서도 쓰였거든요. 그러나 화음을 선택하는 감각, 특히 반음씩 미끄러지며 긴장을 더하는 진행은 19세기 낭만주의 음악이나 영화음악의 어법에 더 가깝습니다. 지아조토는 바로크 음악의 형식을 슬쩍 빌리면서도 20세기 청중에게 익숙한 화성과 극적인 감정의 흐름을 더했습니다. 두 시대의 어법이 교묘하게 섞인 덕분에, 이 곡은 영화의 비극적인 장면이나 장례식에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알비노니의 오보에 협주곡과 나란히 들어 보면 두 음악의 결이 꽤 다르게 느껴집니다. 그의 협주곡에서는 오보에의 맑은 선율과 유연하게 이어지는 리듬이 무거운 긴장을 사르르 풀어 주거든요. 반면 이 아다지오는 처음부터 끝까지 어두운 정서를 끊임없이 이어 갑니다. 18세기 알비노니의 느린 악장에서는 춤곡에서 비롯된 리듬이나 맑은 선율이 긴장을 슬그머니 누그러뜨리기도 하지만, 이 곡에서는 그런 대비를 좀처럼 찾기 어렵죠. 지아조토는 20세기의 화성 감각을 활용해 슬픔을 짙고 단순하게 응축했습니다.
실제로 이 아다지오는 영화를 통해 널리 알려졌습니다. 영화감독 오슨 웰스는 1962년 영화 〈심판〉에서 이 곡을 썼죠. 감독 피터 위어의 1981년 전쟁 영화 〈갈리폴리〉에서는 젊은이들이 전장에서 스러지는 장면 위로 이 선율이 흐릅니다. 2016년 〈맨체스터 바이 더 시〉에 이르기까지 여러 감독은 비극적인 장면의 슬픔을 더 짙게 표현하는 데 이 곡을 사용했습니다. 록 밴드 도어스와 르네상스도 이 선율을 가져다 썼거든요. 짧고 단순한 구조는 서로 다른 비극적 장면에 쉽게 어울렸고, 300년 된 명곡이라는 이름표는 대중의 관심을 끌어 곡이 널리 퍼지는 데 힘을 보탰습니다.
곡이 널리 퍼지는 데는 음반도 큰 몫을 했습니다. 이탈리아 실내 합주단 이 무지치가 1960년에 남긴 녹음은 이 선율을 전 세계 청중에게 알리는 데 힘을 보탰고, 1980년대에는 카라얀과 베를린 필하모닉의 두툼한 음향을 담은 녹음이 이 곡을 ‘가장 슬픈 클래식’의 대표곡으로 각인하는 데 기여했죠. 두 음반의 표지에는 모두 알비노니의 이름이 큼직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지아조토의 이름은 작은 글씨로 들어가거나 아예 빠졌거든요. 지금은 표기 관행이 조금 달라져, 새로 나오는 음반과 악보에는 ‘알비노니 / 지아조토’를 나란히 적거나 지아조토를 실제 작곡가로 밝히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곡의 정체를 알고 난 뒤에도 감흥이 반드시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이 아다지오가 계속 연주되고 사랑받은 까닭은 300년 된 유물로 여겨졌기 때문만이 아니라, 감정이 절정에 이른 뒤 차분히 잦아드는 음악의 흐름이 지금 들어도 설득력을 지니기 때문이거든요. 전쟁의 잿더미에서 발견됐다는 이야기와 알비노니라는 이름표를 걷어내도 음악은 남습니다. 작곡가의 정체를 바로 알고 들어도 이 곡은 여전히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죠. 알비노니의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곡인 만큼, 이제는 실제 작곡가인 지아조토의 이름도 함께 기억할 때입니다.
악보와 함께 듣기
이 아다지오는 바로크 시대의 음악처럼 들리지만 훨씬 뒤에 완성된 작품이라, IMSLP 같은 무료 악보 도서관에서는 악보를 찾기가 어렵거든요. 대신 토마소 알비노니가 직접 작곡한 협주곡과 소나타의 악보는 IMSLP의 토마소 알비노니 작품 목록에서 무료로 열람할 수 있습니다.
어떤 연주로 시작할까
같은 곡이라도 연주에 따라 울림과 분위기가 크게 달라지죠. 현악 합주의 규모를 키워 웅장한 음향을 들려주는 해석이 있는가 하면, 지아조토가 발표한 악보의 편성을 살려 담백하게 들려주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처럼 성격이 서로 다른 음반 세 장을 골랐습니다.
참고 자료
- Wikipedia — Adagio in G minor (Albinoni / Giazotto)
- Wikipedia — Remo Giazotto
- Wikipedia — Tomaso Albinoni
- IMSLP — 토마소 알비노니 실제 작품 악보
이어서 읽기 — 명곡을 둘러싼 이름과 이야기의 진실
이 곡의 숨은 사연이 흥미로웠다면 아래 다섯 글도 함께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음악가와 명곡을 둘러싼 문서, 일화, 통념이 실제로 어떻게 생겨났는지 살펴봅니다.
- 모차르트의 편지 1,100통을 둘러싼 위조 논란과 천재 신화가 형성된 과정을 짚습니다.
- 헨델 〈수상음악〉이 화가 난 왕을 달래기 위해 연주됐다는 유명한 일화가 어떻게 전해졌는지 살펴봅니다.
- 쇼팽의 심장은 코냑에 보존된 채 그의 조국 폴란드로 옮겨졌습니다.
- 모차르트 독살설은 살리에리를 범인으로 지목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증거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 d단조〉는 공포 영화에 거듭 사용되면서 불길한 오르간 음악의 이미지로 널리 알려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