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장 사이 박수 금지? 200년 전 객석은 정반대였습니다

모차르트 《파리》 교향곡부터 바그너의 바이로이트까지

이 곡은 — 스물두 살 모차르트가 파리에서 일자리를 찾다 쓴 교향곡 31번 《파리》 K.297. 관객이 박수 칠 자리를 계산해서 넣은 곡입니다.

딱 하나만 듣는다면 — 1악장 첫머리. 낮은 현부터 위로 치고 올라가는 음계 한 줄에 파리 객석이 넘어갔습니다.

이 글에서는 — 1778년 파리부터 1876년 바이로이트까지, 객석의 규칙이 어떻게 지금과 정반대로 뒤집혔는지 남아 있는 기록으로 따라갑니다.

악장 사이에 박수를 치면 눈총을 받습니다. 어디서 배운 적도 없는데 다들 압니다. 지휘자가 팔을 내릴 때까지 기침도 참는 것, 그게 클래식 공연장의 기본이라고요. 그런데 이 규칙을 모차르트에게 보여줬다면 그는 아마 서운해했을 겁니다. 모차르트는 정확히 그 반대를 노리고 곡을 썼습니다.

1778년 여름, 파리에서 새 교향곡을 초연한 뒤 모차르트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1악장 한복판에서 박수가 터졌고, 자기는 그럴 줄 알고 마지막 악장에 같은 장치를 한 번 더 심어뒀다는 자랑입니다. 지금 기준으로는 매너 위반인 그 박수가, 작곡가에게는 성공의 증거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키는 그 침묵은 대체 언제, 누가 만든 규칙일까요.

바르바라 크라프트가 1819년에 그린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초상화
바르바라 크라프트가 1819년에 그린 모차르트. 파리에서 이 곡을 쓸 때 그는 스물두 살이었고, 일자리가 없었다.
작곡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곡명
교향곡 31번 D장조 《파리》, K.297(300a)
(Symphony No. 31 in D major “Paris”)
작곡 기간
1778년
악장
3악장
I. Allegro assai (D장조)
II. Andante (G장조)
III. Allegro (D장조)

1악장. 아주 빠르게
2악장. 걷는 빠르기로
3악장. 빠르게
편성
플루트 2, 오보에 2, 클라리넷 2, 바순 2, 호른 2, 트럼펫 2, 팀파니, 현 5부
초연
1778년 6월 18일, 파리 콩세르 스피리튀엘
(6월 12일 지킹엔 백작 저택에서 비공개 초연)
연주 시간
약 18분

스물두 살 실업자가 파리에서 노린 것

1778년의 모차르트는 우리가 아는 그 모차르트가 아니었습니다. 어린 시절 유럽을 돌며 신동 소리를 듣던 시기는 이미 십 년 전에 끝났고, 고향 잘츠부르크의 자리는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안나 마리아와 둘이서 일자리를 찾아 길을 떠납니다. 아우크스부르크를 거쳐 만하임을 지나 파리까지. 스물두 살 청년의 구직 여행.

파리에서 그에게 곡을 맡긴 사람은 조제프 르그로였습니다. 성악가 출신으로 콩세르 스피리튀엘이라는 연주 단체를 운영하던 흥행사입니다. 콩세르 스피리튀엘은 왕실이나 귀족 저택이 아니라 표를 팔아 사람을 모으는 공개 연주회 조직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정기 연주회에 가장 가까운 형태가 이 무렵 파리에서 이미 굴러가고 있었습니다.

모차르트는 이 무대를 계산하고 곡을 짰습니다. 우선 규모부터 키웁니다. 그때까지 그가 써 본 어떤 교향곡보다 악기가 많았습니다. 클라리넷을 처음으로 집어넣었고 트럼펫과 팀파니까지 동원했습니다. 파리의 오케스트라가 그만큼 컸으니까요. 초연 당시 현악기만 세어 봐도 바이올린 스물둘, 비올라 다섯, 첼로 여덟, 콘트라베이스 다섯입니다. 현만 마흔 명. 잘츠부르크에서는 구경도 못 할 규모였습니다. 무대가 커지면 소리도 커집니다.

거기에 미뉴에트 악장을 통째로 뺐습니다. 그 무렵 빈과 독일권에서 나온 교향곡은 네 악장이 보통이었는데 이 곡은 빠르게—느리게—빠르게 세 악장으로 끝납니다. 프랑스 취향에 맞춘 선택이었습니다. 아버지 레오폴트는 파리에서 나온 교향곡 악보들을 보고 “프랑스 사람들은 시끄러운 교향곡을 좋아하는 모양”이라고 적었는데, 아들은 그 취향을 정확히 겨냥한 셈입니다.

공개 초연은 1778년 6월 18일 성체 축일에 열렸습니다. 엿새 전인 6월 12일에 팔츠 선제후국 대사였던 지킹엔 백작의 집에서 먼저 비공개로 한 번 연주했으니, 파리 관객 앞에 정식으로 내놓은 건 이날이 처음입니다.

🎧 여기서 들으세요 — 1악장 시작. 낮은 현이 D음에서 출발해 계단을 뛰어오르듯 위로 솟구칩니다. 당시 만하임 악단이 잘 쓰던 수법이라 ‘만하임 로켓’이라고 부르는 장치인데, 파리 관객은 이 첫 몇 초에 자세를 고쳐 앉았습니다. 상단 영상에서 곡 전체를 틀어두고 읽어보세요.

박수가 터질 자리를 미리 심어뒀습니다

초연 보름 뒤인 7월 3일, 모차르트는 아버지에게 긴 편지를 씁니다. 그 편지에 당시 객석이 어떻게 반응했는지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1악장 한가운데, 자기가 공들여 쓴 대목이 지나가는 순간이었습니다. “객석이 완전히 넘어갔고, 엄청난 박수가 터졌다.”

곡이 끝난 것도 아니고 악장이 끝난 것도 아닙니다. 좋은 대목이 나오니까 그 자리에서 손뼉을 친 것뿐입니다. 그런데 진짜 놀라운 건 그다음 문장입니다. 모차르트는 이 박수를 미리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쓸 때부터 이 대목이 먹힐 줄 알았기에 마지막 악장에 같은 것을 한 번 더 넣어뒀는데 아니나 다를까 또 터졌다고. 그러면서 “다 카포!”라고 적습니다. 처음부터 다시라는 뜻입니다. 관객이 좋아할 자리를 곡의 앞뒤 두 군데에 심어놓고 박수가 두 번 터지도록 설계해 둔 거예요. 요즘 말로 하면 후렴을 두 번 배치한 셈입니다.

연주가 끝나자 그는 곧장 팔레 루아얄로 갑니다. 아이스크림을 하나 먹고, 성공하면 바치겠다고 마음속으로 약속해 둔 기도를 올린 뒤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스물두 살짜리가 큰 무대에서 처음 제대로 먹힌 날의 저녁 풍경입니다.

그런데 이 편지에는 다른 얘기도 함께 적혀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입니다. 안나 마리아는 파리에서 열나흘을 앓다가 바로 그날, 아들이 이 편지를 쓰던 1778년 7월 3일에 숨을 거둡니다. 안나 마리아가 묻힌 곳은 생퇴스타슈 성당 묘지였고, 그 묘의 정확한 위치는 지금 알 수 없습니다. 성공을 자랑하는 문장과 어머니의 임종이 편지 한 장 안에 나란히 있습니다.

어쨌든 여기서 한 가지는 분명해집니다. 악장 사이는 물론 악장 도중의 박수도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작곡가가 원하고 노리던 반응이었습니다. 좋으면 그 자리에서 표현하는 것, 그게 18세기 객석의 기본값이었습니다.

네 시간짜리 음악회, 난방은 고장 났습니다

객석이 그렇게 굴러갔다면 연주회 자체는 어땠을까요. 삼십 년 뒤 빈에서 열린 한 음악회가 그 답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1808년 12월 22일, 빈의 안 데어 빈 극장. 저녁 6시 30분에 시작한 음악회는 밤 10시 30분이 되도록 끝나지 않았습니다. 난방은 고장 났고 객석은 얼어붙을 듯이 추웠습니다. 그날 무대에 오른 곡은 모두 여덟 곡. 교향곡 5번과 6번, 피아노 협주곡 4번, 합창 환상곡이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지휘와 피아노 독주는 작곡가 본인, 서른여덟의 베토벤이 맡았습니다.

요제프 뮐러가 1804년경에 그린 젊은 베토벤의 초상화
요제프 뮐러가 1804년경 그린 베토벤. 1808년 그 저녁, 이 사람이 네 시간 동안 지휘와 피아노를 혼자 맡았다.

그 자리에 있던 작곡가 요한 프리드리히 라이하르트는 뒷날 이렇게 적었습니다. 저녁 6시 반부터 10시 반까지 지독한 추위 속에 앉아 있었다고. 네 시간짜리 초연, 반쯤 얼어붙은 객석, 그리고 무대 위에서 한 번 무너졌다가 다시 시작한 마지막 곡까지. 오늘날의 음악회 상식으로 보면 그날은 재난에 가깝습니다.

사정을 알고 보면 더 아득합니다. 그날 오케스트라는 급하게 끌어모은 연주자들이었고 제대로 맞춰볼 시간도 거의 없었습니다. 결국 합창 환상곡이 연주 도중에 박자가 어긋나 멈춰 섰고 처음으로 되돌아가 다시 시작하고서야 끝을 봤습니다. 지금 같으면 다음 날 기사가 났을 사고입니다.

중요한 건 이 난장판이 변두리 아마추어 무대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당대 최고의 작곡가가 자기 최고의 신작을 한꺼번에 처음 선보인, 나름대로 격식 있는 자리였습니다. 그날의 어수선함은 실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그 시절 연주회가 원래 그렇게 굴러갔기 때문입니다. 리허설은 부족한 게 정상이고, 프로그램은 길수록 표값이 아깝지 않으며, 객석은 네 시간 내내 조용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1808년 그 저녁 무대 위에서 한 번 무너졌던 합창 환상곡. 피아노 독주로 시작해 마지막에 합창까지 끌어들이는 구조라 사고가 나기 딱 좋은 곡이었다. (마르타 아르헤리치 · 오자와 세이지)

앙코르는 원래 방금 그 악장을 다시 하는 것이었습니다

박수가 여기서 그쳤다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시절 객석에는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습관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마음에 든 악장을 그 자리에서 통째로 되감아 다시 듣기. 연주가 다음 악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방금 그 악장 하나를 앙코르로 요구하는 문화였습니다.

대표적인 장면이 1813년 12월 8일 빈 대학 강당에서 벌어집니다. 하나우 전투에서 다친 병사들을 돕는 자선 음악회였고, 베토벤이 직접 지휘한 교향곡 7번이 이날 처음 연주됐습니다. 그중 2악장 알레그레토가 끝나자 객석은 그냥 넘어가 주지 않았습니다. 관객이 앙코르를 요구했고, 오케스트라는 그 느린 악장 하나를 통째로 다시 연주했습니다. 한 목격자는 A장조 교향곡이 대단히 마음에 들었고 그 경이로운 2악장은 앙코르됐다고 남겼습니다.

🎧 여기서 들으세요 — 200년 전 빈의 객석을 그 자리에 붙들어 둔 악장입니다. 낮은 현이 같은 리듬을 계속 두드리고, 그 위로 선율이 한 겹씩 쌓여 올라갑니다. 5분이 지나고 관객이 “한 번 더”를 외쳤다는 사실을 알고 들으면 곡이 다르게 들립니다.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 알레그레토. 1813년 초연 자리에서 앙코르로 다시 연주된 바로 그 악장이다. (런던 필하모닉)

이런 앙코르는 곡의 흐름을 아무렇지 않게 끊었습니다. 작곡가가 1악장부터 4악장까지 공들여 짠 순서 같은 건 객석의 흥 앞에서 얼마든지 뒤로 밀렸습니다. 좋은 악장은 두 번 듣고, 지루한 악장은 잡담으로 넘겼습니다. 지금 기준으로는 무례하지만 그때는 그게 음악을 즐기는 정상적인 방식이었습니다.

앙코르라는 말의 뜻 자체가 그사이에 바뀐 것도 이 대목에서 보입니다. 지금 앙코르는 프로그램이 다 끝난 뒤에 덤으로 연주하는 짧은 곡을 가리킵니다. 그때는 방금 들은 것을 그 자리에서 다시 들려달라는 요구였습니다. 같은 단어인데 가리키는 행동이 정반대에 가깝습니다.

객석은 감상하는 곳이 아니라 사교장이었습니다

객석이 이렇게 시끄러웠던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애초에 사람들이 음악만 들으러 온 게 아니었습니다. 17세기 중반에 표를 파는 오페라 극장이 처음 생겼을 때, 그 공간은 감상하는 자리라기보다 사람을 만나는 자리로 설계됐습니다. 무대에서 부챗살처럼 퍼져 나간 층층의 박스석. 귀족이나 돈 있는 시민이 그 작은 방을 통째로 빌려 손님을 대접하고 소문을 나눴습니다. 무엇보다 남에게 보이기 딱 좋은 자리였습니다.

18~19세기 이탈리아의 상류층을 떠올리면 그림이 선명해집니다. 오늘 무슨 곡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거기 가면 사교계 사람을 다 만날 수 있으니까 갔습니다. 마음에 드는 상대에게 눈길을 보내려고, 정치 얘기를 나누려고 극장에 갔습니다. 그런 얘기는 연주가 흐르는 동안에도 얼마든지 했습니다.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마르면 음료와 오렌지를 파는 상인을 불러 그 자리에서 사 먹었습니다. 쉬는 시간을 기다릴 필요도 없었습니다.

19세기 극장 박스석에 앉은 관객들을 그린 오노레 도미에의 그림
오노레 도미에가 그린 극장 박스석. 무대가 아니라 서로를 보러 온 사람들의 얼굴이다.

객석 조명도 지금과 정반대였습니다. 극장은 공연 내내 환하게 밝혀져 있었습니다. 서로의 얼굴이 보여야 사교가 됩니다. 촛불과 기름 등불로 밝힌 홀은 어두컴컴한 감상실이 아니라 무대를 배경으로 둔 밝은 응접실에 가까웠습니다. 낭만화할 것도 없습니다. 냄새와 소음과 잡담이 뒤섞인, 지금 기준으로는 꽤 어수선한 공간이었습니다.

극장 앞줄에 앉은 관객들을 그린 도미에의 석판화 캐리커처
1864년 파리의 풍자 신문 《르 샤리바리》에 실린 도미에의 극장 관객 스케치. 무대보다 옆자리에 관심이 더 많아 보인다.

이런 풍경은 빈 한 곳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파리도 런던도 이탈리아의 오페라 극장도 사정은 비슷했습니다. 사람들은 곡이 시작한 뒤에 느긋하게 들어왔고, 지루한 대목에서는 자리를 떴다가 재미있는 장면에 맞춰 돌아왔습니다. 값싼 자리의 관객은 서서 봤고, 무대 가까운 자리에서는 큰 소리로 평을 주고받았습니다. 지금 공연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미동도 없기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그런 규율은 이 시절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무대와 객석이 뚜렷하게 나뉘기는커녕, 객석도 무대만큼이나 주인공이던 시대였습니다.

박수를 돈 받고 대신 쳐주는 회사가 있었습니다

객석이 이렇게 자유롭게 반응하던 시절이라, 그 반응 자체가 사고파는 상품이 되기도 했습니다. 프랑스어로 클라크(claque)라고 부르는, 돈을 받고 조직적으로 박수를 쳐주는 사람들 얘기입니다.

돈으로 박수를 사는 발상 자체는 훨씬 오래됐습니다. 로마 황제 네로가 무대에 섰을 때 병사들이 동원돼 찬사를 외쳤다는 기록이 있고, 16세기 프랑스 시인 장 도라는 자기 희곡 표를 사서 박수를 쳐주기로 약속한 사람들에게 나눠줬습니다. 이 오래된 편법이 산업이 된 곳이 19세기 파리입니다.

1820년 파리에서 이 일은 아예 회사가 됩니다. 소통(Sauton)과 포르셰(Porcher)라는 두 사람이 ‘드라마의 성공을 보증한다’는 뜻의 회사, 라쉬랑스 데 쉬세 드라마티크(L’Assurance des Succès Dramatiques)를 차립니다. 이름 그대로 무대의 성공을 보증해 주는 사업이었습니다. 낮에는 돈을 걷고 밤에는 박수를 치는, 버젓한 직업이었어요.

더 놀라운 건 이 조직의 분업입니다. 우두머리인 셰프 드 클라크(chef de claque)는 공연 전에 대본을 미리 받아 어느 대목에서 어떻게 반응할지를 짰습니다. 그 아래로 역할이 촘촘하게 나뉘어 있었습니다.

  • 코미세르 — 작품을 통째로 외워두고, 좋은 장면이 나오면 옆자리 관객에게 짚어주는 사람
  • 리외르 — 희극에서 큰 소리로 웃는 사람
  • 플뢰뢰즈 — 주로 여성이 맡았고, 손수건을 눈에 대고 우는 시늉을 하는 사람
  • 샤투이외르 — 직역하면 ‘간질이는 사람’. 객석 분위기가 처지지 않게 계속 띄우는 역할
  • 비쇠르 — “비스! 비스!”를 외쳐 앙코르를 요구하는 사람

앞에서 본 앙코르 요청도, 어떤 자리에서는 돈을 받은 사람들이 맡았습니다.

1830년 무렵이면 이 사업은 완전히 자리를 잡습니다. 파리의 웬만한 극장은 저마다 전속 우두머리를 두었습니다. 어떤 자리에서 얼마나 크게 몇 번 박수를 칠지가 미리 계산된 채로 밤마다 공연이 돌아갔습니다. 무대에 선 배우나 가수 입장에서는 성공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뜻이었고, 안 사면 야유를 살 수도 있다는 협박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데뷔를 앞둔 가수나 작가에게 우두머리가 먼저 연락해 돈을 요구하는 일이 흔했습니다.

이 조직의 힘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바그너가 직접 겪었습니다. 1861년 3월 파리에서 《탄호이저》를 올렸을 때, 자키 클럽이라는 귀족 사교 모임이 동원한 클라크가 야유와 소음으로 공연을 대놓고 방해합니다. 바그너는 결국 파리 공연을 스스로 거둬들였습니다. 객석의 소음이 작품 하나를 무대에서 끌어내렸습니다. 이 사람이 나중에 객석 조명을 끄기로 마음먹은 데는 이런 밤들이 쌓여 있었습니다.

결국 19세기 객석의 박수는 지금처럼 순수한 감동의 표시만은 아니었습니다. 자발적인 환호와 돈 주고 산 환호가 한 공간에 섞여 있었습니다. 조용한 감상이라는 이상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습니다.

그럼 침묵은 언제 규칙이 됐을까요 — 바그너가 불을 껐습니다

지금 우리가 아는 조용한 객석은 그리 오래된 전통이 아닙니다. 악장 사이에 박수를 치지 않는 관습은 19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서서히 자리를 잡습니다. 그 변화를 밀어붙인 쪽은 관객이 아니라 작곡가들이었습니다.

멘델스존은 1842년 《스코틀랜드》 교향곡을 소개하면서 악장 사이를 끊지 말고 이어서 연주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슈만도 자기 협주곡과 교향곡에서 비슷한 요청을 했고, 뒷날 말러는 아예 악보에 악장 사이를 박수로 끊지 말라는 지시를 적어 넣습니다. 작곡가들이 하나둘 객석의 오랜 습관과 싸우기 시작합니다. 말러와 토스카니니가 지휘자로서 클라크를 몰아내는 데 앞장선 것도 같은 흐름이었습니다.

결정적인 한 방은 바그너였습니다. 1876년 8월 13일, 그는 자기 작품만을 위한 극장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을 엽니다. 여기서 바그너는 객석을 다루는 방식을 통째로 바꿉니다. 공연 중에 객석 조명을 어둡게 낮췄고 오케스트라를 무대 아래 구덩이에 숨겨 보이지 않게 했습니다. 무엇보다 사교의 무대였던 박스석을 없애고 좌석을 무대만 바라보도록 부챗살처럼 펼쳐 놓았습니다. 관객이 서로를 보지 못하고 오직 무대만 보게 만든 배치입니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의 부채꼴 좌석 배치를 보여주는 설계 도면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의 좌석 배치. 박스석을 없애고 모든 시선을 무대 하나로 모았다.

이 배치가 바꾼 건 시야만이 아닙니다. 조명이 꺼지면 서로 얼굴이 안 보이고, 얼굴이 안 보이면 사교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박스석이 사라지면 손님을 초대할 방도 없습니다. 극장에 왔는데 남은 일이라곤 무대를 보는 것뿐입니다. 침묵은 관객이 예의를 갖춰서 생긴 게 아니라, 다른 선택지를 없애자 남은 결과에 가깝습니다.

바이로이트에는 지금도 《파르지팔》 1막이 끝난 뒤 박수를 치지 않는 관습이 남아 있습니다. 이 곡은 1882년 두 번째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처음 무대에 올랐습니다. 관습의 유래로 널리 전해지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바그너가 진지한 분위기를 지키려고 끝까지 커튼콜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는데, 관객이 이 말을 1막 뒤에는 박수를 치면 안 된다는 뜻으로 알아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확정된 사실이라기보다 오래 전해 내려온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파르지팔》 1막 전주곡. 시작도 끝도 또렷하게 끊기지 않도록 짜여 있어 박수 칠 자리를 애초에 안 주는 음악이다. (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 · 제레미 로레)

여기에 20세기의 녹음 기술이 쐐기를 박습니다. 음반이 팔리기 시작하면서 악장 사이의 박수는 곡의 흐름을 깨는 잡음으로 취급됐습니다. 집에서 음반으로 듣는 경험이 표준이 되자, 공연장도 그 경험을 닮아 갔습니다. 조용히 앉아 끝까지 듣는 태도가 올바른 감상법으로 굳어졌습니다.

그러니 악장 사이의 침묵은 음악을 향한 태곳적 경의 같은 게 아닙니다. 관객을 조용히 앉혀 무대에 집중시키려 한, 19세기 후반과 20세기의 비교적 젊은 발명품에 가깝습니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지키는 그 규칙은, 200년 전 모차르트가 봤다면 오히려 섭섭해했을 겁니다. 그는 박수를 노리고 곡을 썼으니까요.

그때 vs 지금 — 객석은 이렇게 뒤집혔습니다

항목그때 (18~19세기)지금
악장 사이박수·환호 자유, 좋으면 도중에도침묵, 지휘자가 손 내릴 때까지
좋았던 악장그 자리에서 앙코르로 다시전곡이 끝난 뒤 커튼콜
객석 조명환하게 켜둠 (서로 보려고)어둡게 낮춤 (무대에 집중)
좌석귀족 박스석, 대화·음식·연애균일한 객석, 정숙 요구
박수의 출처자발적 환호 + 돈 받은 클라크원칙상 자발적 반응
공연 길이네 시간도 예사, 신곡 여덟 곡두 시간 안팎, 휴식 한 번
극장에 가는 이유사교·과시·오락음악 감상

왼쪽 칸이 무례해 보인다면, 그건 우리가 오른쪽 칸의 규칙에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어느 쪽이 더 옳다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왼쪽에는 열기가 있었고 오른쪽에는 집중이 있습니다. 다만 지금의 정숙한 객석이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 불과 백몇십 년 사이에 만들어진 규칙이라는 사실은 기억해 둘 만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언제 손뼉을 쳐야 할까요

역사가 이렇다고 해서 다음 공연에서 악장 사이에 마음껏 박수를 치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지금 객석의 약속은 지금대로 작동합니다. 다만 그 약속을 절대적인 예의가 아니라 백몇십 년짜리 합의로 알고 있으면, 공연장에서 훨씬 덜 긴장하게 됩니다.

실전에서 쓸 만한 기준은 몇 가지로 정리됩니다. 첫째, 지휘자의 팔과 어깨를 보면 됩니다. 팔을 완전히 내리고 어깨에서 힘이 빠지면 곡이 끝났다는 신호입니다. 악장 사이에는 팔을 반쯤 든 채로 멈춰 있거나 고개를 숙인 자세를 유지합니다. 둘째, 주변보다 반 박자 늦게 시작하면 틀릴 일이 없습니다. 셋째, 실수로 박수가 나갔다고 해도 큰일이 아닙니다. 모차르트라면 반가워했을 반응입니다.

반대로 박수를 아끼는 게 확실히 좋은 자리도 있습니다. 마지막 음이 사그라들며 끝나는 곡들입니다. 차이콥스키의 《비창》처럼 조용히 가라앉으며 닫히는 마지막 악장이나 말러의 몇몇 교향곡이 그렇습니다. 이런 곡은 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뒤의 몇 초까지가 작품의 일부입니다. 그 몇 초를 기다렸다가 치면 됩니다.

공연장 매너가 부담스러워 클래식 공연을 미뤄 온 사람이라면 이 사실 하나만 기억해도 충분합니다. 지금의 규칙은 음악이 만든 게 아니라 극장이 만든 겁니다. 200년 전이든 지금이든, 연주자는 규칙을 완벽히 지키는 태도보다 곡이 좋았다는 마음이 전해지는 순간을 더 반갑게 여깁니다.

악장 사이에 박수를 치면 정말 실례인가요?

오늘날 연주회에서는 대체로 자제하는 분위기입니다. 지휘자가 팔을 내리거나 곡 전체가 끝난 뒤에 치는 게 일반적입니다. 다만 이 관습 자체가 200년도 안 된 것이라, 절대적인 예의라기보다 근래에 자리 잡은 약속에 가깝습니다. 모차르트나 베토벤 시대의 관객은 오히려 좋은 대목이 나오면 곧장 박수를 쳤습니다.

모차르트 교향곡 31번 《파리》는 어떤 곡인가요?

모차르트가 1778년 파리에서 일자리를 찾던 시기에 쓴 D장조 교향곡으로, 작품번호는 K.297(300a)입니다. 공개 초연은 1778년 6월 18일 파리의 연주 단체 콩세르 스피리튀엘 무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모차르트가 클라리넷을 처음 넣은 교향곡이고, 당시 관행과 달리 미뉴에트 악장 없이 세 악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연주 시간은 약 18분입니다.

앙코르가 원래 곡 도중에 하는 거였다고요?

네. 지금은 앙코르가 전체 프로그램이 끝난 뒤 추가로 연주하는 곡을 뜻하지만, 18~19세기에는 방금 들은 악장 하나를 그 자리에서 곧바로 다시 연주하는 걸 가리켰습니다. 1813년 12월 8일 베토벤 교향곡 7번 초연에서 2악장 알레그레토가 그렇게 앙코르로 다시 연주된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돈 받고 박수 치는 ‘클라크’는 지금도 있나요?

19세기 파리에서는 1820년에 전문 회사까지 생길 만큼 공공연한 직업이었습니다. 우두머리가 대본을 미리 받아 반응을 짜고, 웃는 사람·우는 사람·앙코르 외치는 사람으로 역할까지 나뉘어 있었습니다. 이 관행은 20세기 중후반에 대부분 사라졌지만, 특정 팬이나 관계자가 분위기를 띄우는 일까지 완전히 없어졌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그럼 언제부터 악장 사이에 박수를 안 치게 됐나요?

한 사람이 정한 게 아니라 19세기 후반부터 서서히 굳어졌습니다. 멘델스존은 1842년에 악장을 끊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고 슈만과 말러도 비슷한 요구를 남겼습니다. 1876년 바그너가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서 객석 조명을 낮추고 박스석을 없애면서 흐름이 크게 바뀌었고, 20세기에 음반이 보급되며 조용히 듣는 태도가 표준으로 굳어졌습니다.

참고 자료

이어서 듣기 — 박수를 둘러싼 다른 이야기들

객석의 규칙이 이렇게 흔들려 온 이야기라면, 아래 다섯 편은 그 규칙과 정면으로 부딪친 곡과 사람들을 다룹니다. 부딪친 이유는 하나씩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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