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읽는 33분, 무소르그스키 전람회의 그림

무소르그스키 〈전람회의 그림〉, 그림 아홉 장으로 걷는 33분

MUSSORGSKY · PICTURES AT AN EXHIBITION · 1874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의 유작 전시회를 다녀온 작곡가가 스무날 만에 단숨에 써 내려간 곡입니다.
정작 그 전시회에 걸렸던 그림들은 대부분 흩어져 사라졌고, 오직 이 음악만 선명하게 남았죠.

1874년 작곡 연주 시간 약 33분 프롬나드 + 그림 10점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

이 글의 일러스트는 모두 클래식노트가 직접 그렸습니다. 일러스트 © classicnot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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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곡을 만든 재료는 단 한 번의 전시회 관람입니다

거창한 구상도 오래 다듬은 초고도 없었습니다. 무소르그스키가 손에 쥔 재료라곤 친구의 유작 전시회를 보고 나온 기억 하나뿐이었거든요.

10점의 그림

이 곡은 그림 열 점을 하나씩 음악으로 옮겨냅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를 ‘프롬나드’라는 걸음걸이 선율이 끈끈하게 이어 붙이죠. 전시장에서 액자와 액자 사이를 걸어가는 그 이동 시간까지 악보에 고스란히 적어 넣은 셈입니다.

20일의 폭주

1874년 6월 2일에 시작해 22일에 마쳤습니다. 서른세 분짜리 대작을 불과 스무날 만에 쏟아낸 겁니다. 무소르그스키 본인조차 편지에 소리가 넘쳐흘러 종이에 옮겨 적기가 벅차다고 털어놓았을 정도죠.

6점만 남은 원화

그 추모 전시에는 사백 점 남짓한 작품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음악과 짝을 맞출 수 있는 그림은 여섯 점 안팎뿐입니다.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져 행방을 알 수 없죠. 그림은 사라졌지만 음악이 그 빈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습니다.

전시회는 막을 내렸고 그림도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왜 이 음악만은 백오십 년이 넘도록 문을 닫지 않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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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이 멈추는 자리마다 펼쳐지는 그림 한 점

이 곡을 가장 쉽게 즐기는 방법은 여러분이 직접 전시장에 들어와 있다고 상상하는 겁니다. 걸음을 옮기면 프롬나드가 흐르고 멈추면 그림이 시작됩니다. 관람객의 발길이 오래 머무는 자리를 골라 보면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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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롬나드걷는 소리

산책이라는 뜻입니다. 금관악기가 당당하게 첫 주제를 뿜어내며 곡의 문을 엽니다. 박자가 5박과 6박을 오가며 들쭉날쭉한데, 이는 사람이 실제로 걷는 리듬을 흉내 낸 겁니다. 보폭이 일정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걸음이죠. 이 선율은 그림 사이사이마다 옷을 갈아입고 계속 다시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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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쟁이첫 번째 액자

하르트만이 그린 호두까기 인형 도안입니다. 다리를 저는 모양으로 디자인된 탓에 생김새가 무척 기괴했죠. 음악 역시 첫마디부터 잔뜩 비틀려 있습니다. 짧은 음형이 툭툭 끊기다가 비명처럼 튀어 오르고 이내 꺾여 웅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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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성색소폰이 노래하는 자리

중세 성채 앞에서 음유시인이 부르는 세레나데입니다. 훗날 모리스 라벨은 이 선율을 알토 색소폰에 맡겼습니다. 오케스트라 무대에서 좀처럼 독주로 나서지 않는 악기라, 그 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낯선 이질감이 그대로 깊은 쓸쓸함으로 번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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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 야가닭발 위의 오두막

슬라브 전설 속에 등장하는 마녀입니다. 커다란 닭발을 딛고 선 오두막에 산다고 알려져 있죠. 재미있는 건 하르트만이 실제로 그린 그림이 그저 청동 탁상시계 도안이었다는 점입니다. 무소르그스키는 그 작은 시계에서 마녀가 절구를 타고 밤하늘을 날아다니는 역동적인 장면까지 끌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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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의 대문마지막 액자

하르트만이 1869년에 그린 성문 도안입니다. 알렉산드르 2세 암살 미수 사건을 기리는 기념문 구상이었죠. 현실에서는 끝내 지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음악 안에서는 눈부시게 완공되었죠. 금관악기가 전부 쏟아져 나오고 장엄한 종소리가 겹겹이 쌓입니다.

여기서 이 곡의 진짜 설계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혼자 뚜벅뚜벅 걷던 첫 걸음의 선율이, 마지막에 대성당 종소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돌아옵니다. 곡 첫머리의 담백한 주제를 기억해 두셨다면 단순한 걸음걸이 하나가 어떻게 거대한 건축물로 부풀어 오르는지 그 경이로운 과정을 통째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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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분의 관람 동선을 그림 한 장으로

전시장 평면도 형태의 그림. 입구에서 출발한 동선이 복도를 지나 지하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 큰 문 앞에서 끝난다

전람회의 그림 33분 동선입니다. 걷고 멈추기를 되풀이하다가 지하를 한 번 통과한 뒤 마지막 문 앞에 도착합니다.

1첫 걸음,
혼자 입장
2액자마다 멈추고
다시 걷기
3지하묘지에서
걸음이 멈춤
4마녀의 오두막,
어둠의 마지막
5대문이 열리고
종이 울린다

걷는 구간과 보는 구간이 번갈아 나옵니다. 프롬나드가 나오면 이동 중이고 멈추면 그림 앞입니다. 그래서 이 곡은 가만히 앉아 듣는데도 계속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이 들죠.

중반의 지하묘지에서 흐름이 한 번 끊깁니다. 파리의 카타콤을 그린 그림 앞에서 관람자는 더 이상 그림을 보지 않고 죽은 친구에게 조용히 말을 건넵니다. 익숙한 프롬나드 선율이 여기서는 떨리는 반주 위로 희미하게 되살아나거든요.

마지막 두 곡은 쉬는 구간 없이 곧장 이어집니다. 마녀의 오두막이 사납게 몰아치다가 숨 돌릴 틈도 없이 대문의 빛으로 넘어갑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건너가는 이 이음매가 곡 전체의 하이라이트이자 결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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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들으면 완전히 다르게 들립니다

이 곡은 귀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인상이 크게 갈립니다. 그림 하나하나를 쫓는 대신 이번에는 관람객의 걸음 소리를 따라가 보세요.

① 프롬나드가 돌아올 때마다 표시해 보세요

같은 걸음걸이 선율인데 나올 때마다 악기와 표정이 확연히 바뀝니다. 방금 본 그림이 무거웠으면 걸음도 무거워지고 밝았으면 발걸음이 가벼워지죠. 관람자의 기분이 음악에 그대로 묻어나는 대목입니다. 참고로 피아노 원곡에는 다섯 번, 라벨의 관현악 편곡 버전에는 네 번 등장합니다.

② 첫 걸음과 마지막 걸음을 이어서 들어 보세요

곡 맨 앞의 프롬나드를 한 번 듣고 곧바로 마지막 곡의 끝부분으로 건너뛰어 보는 겁니다. 같은 선율이 맞나 싶을 만큼 극적으로 달라져 있습니다. 혼자 외롭게 걷던 소리가 웅장한 종소리에 둘러싸인 채 돌아오거든요.

③ 색소폰이 나오는 자리를 절대 놓치지 마세요

두 번째 그림인 ‘옛 성’입니다. 오케스트라에서 알토 색소폰이 혼자 노래하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라벨이 굳이 이 악기를 고른 이유가 소리를 듣는 순간 단번에 납득이 되죠. 익숙하지 않은 음색이라 오히려 그 쓸쓸함이 뼈저리게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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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수록 흥미로운 전시장 밖의 이야기

빈 액자들이 벽에 걸려 있고 그중 몇 개에만 그림이 남아 있는 전시장 벽면
사라진 원본그림은 흩어지고 음악만 남았습니다

1874년 추모 전시에는 사백 점 남짓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음악과 확실히 짝지을 수 있는 그림은 여섯 점 안팎에 불과합니다. 병아리 의상 스케치와 파리 카타콤 수채화, 키예프 성문 도안 정도가 남아 있죠. 정작 가장 유명한 ‘난쟁이’와 ‘옛 성’의 밑그림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관람객이 음악만 듣고 그림을 상상해야 하는 흥미로운 상황인 셈입니다.

제도용 삼각자와 펼쳐진 건축 도면 위에 놓인 검은 리본
서른아홉이 곡은 추도사이기도 합니다

빅토르 하르트만은 건축가이자 화가였고 무소르그스키의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1873년에 심장 동맥류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죠. 그의 나이 고작 서른아홉이었습니다. 이듬해 열린 유작 전시회를 보고 돌아온 무소르그스키가 스무날 만에 이 곡을 쏟아내듯 완성합니다. 마지막 곡에서 걸음걸이 선율이 종소리와 함께 거대해지는 대목은, 먼저 간 친구의 이름을 소리로 세워 올린 거룩한 기념비에 가깝습니다.

한쪽에는 피아노 건반, 다른 쪽에는 여러 관악기가 놓인 대비 구도
편곡라벨은 걸음 하나를 덜어냈습니다

원곡은 피아노 독주곡입니다. 1922년에 라벨이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옮겼고, 지금은 이 관현악 편곡이 원곡보다 훨씬 유명해졌죠. 그런데 라벨은 프롬나드 다섯 번 중 하나를 통째로 빼버렸습니다. ‘사무엘 골덴베르크와 슈뮐레’ 뒤에 오던 걸음이었죠. 음악의 흐름을 더 팽팽하게 조이려는 예리한 판단이었습니다. 원곡과 편곡을 나란히 들으면 이 빠진 걸음의 차이가 선명하게 들립니다.

닭 다리 모양 받침 위에 올려진 청동 탁상시계
과장의 기술탁상시계가 마녀로 둔갑한 사연

‘바바 야가’ 항목에서 하르트만이 실제로 그린 것은 러시아 전통 양식의 청동 탁상시계 도안이었습니다. 시계통을 닭발 모양 받침 위에 얹어둔 얌전한 스케치였죠. 무소르그스키는 여기서 마녀가 절구를 타고 험악한 밤하늘을 나는 역동적인 장면까지 밀고 나갔습니다. 그림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옮겼다기보다, 그림에서 출발해 상상력의 끝까지 내달렸다고 보는 편이 맞습니다.

프롬나드가 그림마다 어떻게 표정을 바꾸는지, 열 점을 하나씩 따라가는 감상 순서,
피아노 원곡과 라벨 편곡의 갈림길, 그리고 이 곡이 록 밴드와 신시사이저까지 건너간 궤적까지.
전람회의 전체 이야기는 본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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