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디 〈라 트라비아타 축배의 노래〉 — 스물셋에 죽은 여자를 위한 건배

초연 객석이 웃음을 터뜨린 1853년 베네치아

이 곡은: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1막 파티 장면에서 알프레도와 비올레타가 합창과 함께 부르는 약 3분짜리 건배 노래 〈라 트라비아타 축배의 노래〉입니다.

딱 하나만 듣는다면: 알프레도의 건배가 끝나고 비올레타가 받아 부르는 두 번째 절입니다. 같은 선율인데 가사가 “사랑의 기쁨은 피었다 지는 꽃”으로 바뀝니다.

음반: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지휘한 바이에른 국립오페라의 1976년 도이치 그라모폰 녹음. 비올레타는 일레아나 코트루바슈가 부릅니다.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
(Giuseppe Verdi, 1813~1901)
곡명
〈라 트라비아타 축배의 노래〉
(La traviata, Libiamo ne’ lieti calici)
작곡 시기
1852년 ~ 1853년 초
대본
프란체스코 마리아 피아베
(원작: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의 희곡 〈동백꽃 여인〉, 1852)
위치
1막, 비올레타 저택의 파티 · 알프레도와 비올레타의 이중창 + 합창
형식
브린디시(건배 노래) · 3/8박자 · B♭장조 · Allegretto
초연
1853년 3월 6일, 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
지휘 가에타노 마레스 · 비올레타 파니 살비니-도나텔리 · 알프레도 로도비코 그라치아니
연주 시간
약 3분

이 노래를 소개할 때는 종종 ‘흥겨운 술자리 노래’라는 설명이 붙곤 합니다. 하지만 가사를 나누어 보면 앞부분은 건배이고, 뒷부분은 여자 주인공이 부르는 “사랑의 기쁨은 피었다가 지는 꽃”입니다. 1853년 3월 6일 베네치아에서 이 노래를 처음 부른 소프라노는 서른여덟 살이었지만, 여자 주인공의 실제 모델은 그보다 6년 전 파리에서 스물셋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파티 손님들은 잔을 들고 후렴을 따라 부릅니다. 비올레타는 혼자 잔을 든 채 “즐거움이 아닌 건 전부 헛되다”고 노래를 잇습니다. 이 말이 사교계에서 웃으며 살아남아야 했던 비올레타의 삶에서 나왔다는 점을 알아야, 3분짜리 건배 노래가 세 시간짜리 죽음 이야기를 어떻게 품고 있는지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조반니 볼디니가 1886년에 그린 주세페 베르디 초상화
1886년 볼디니가 그린 일흔 넘은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를 세상에 내놓던 서른아홉 살 무렵으로부터 33년이 지난 얼굴이다.

〈라 트라비아타 축배의 노래〉가 1막 파티에서 맡은 역할

막이 오르면 파리의 비올레타 발레리 저택이 무대로 등장합니다. 시간은 자정 무렵이고, 비올레타는 부유한 남자들과 어울리며 사교계의 화려한 파티를 이끄는 여인입니다. 다른 파티에서 늦게 건너온 손님들이 먼저 잔부터 찾는 틈에, 가스토네 자작이 시골에서 올라온 청년 알프레도 제르몽을 데려오죠. 알프레도는 비올레타가 병으로 누워 있던 동안 매일 집 앞에 와서 안부를 물었지만, 그녀와 제대로 말을 나눠 본 적은 아직 없습니다.

가스토네가 노래 한 곡을 청하고 비올레타까지 거들자 알프레도가 잔을 듭니다. 이탈리아 오페라에서는 이런 건배 노래를 ‘브린디시’라고 일컫습니다. 말 그대로 건배를 뜻하는 단어로, 파티나 연회 장면에 자주 쓰이는 형태입니다. 베르디는 〈맥베스〉에서도 브린디시를 작곡했지만, 그 작품의 건배가 살인 뒤의 불안한 연회 분위기 속에서 울린다면 여기서는 첫눈에 반한 남자가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부르는 사랑의 건배입니다.

이 노래는 극 안에서 관객이 처음으로 기억할 만한 선율을 듣는 위치에 놓입니다. 한 전곡 영상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전주 4분, 손님들의 인사와 대화 5분이 지나고 막이 오른 지 9분 남짓 만에 이 장면이 등장합니다. 오페라 전체에서 관객이 처음으로 또렷하게 감상하는 본격적인 노래인 셈입니다. 1막 초반의 중심 노래는 건배로 막을 열지만, 작품의 마지막 장면은 임종으로 닫힙니다. 이 3분은 손님들의 잔을 채우는 흥겨운 순간이면서 동시에 비올레타의 삶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미리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알프레도의 ‘마시자’와 비올레타의 ‘꽃은 피었다 진다’

이 노래는 3/8박자, B♭장조이며 빠르기말은 알레그레토를 가리킵니다. 한 마디에 8분음표 세 개가 들어가는 3박자라서, 귀에는 가볍고 빠른 왈츠처럼 다가옵니다. 파티에서 몸이 저절로 흔들리는 바로 그 박자인 셈입니다. 곡의 형식도 단순하게 흐릅니다. 알프레도가 한 절을 부르면 손님들이 후렴을 받고, 비올레타가 한 절을 부른 뒤 다시 후렴이 이어집니다. 두 사람이 짧게 말을 주고받은 다음, 모두 마지막 후렴을 부르며 곡의 끝을 맺습니다.

1절: 시골 청년의 대담한 건배

알프레도가 부르는 절은 첫 줄부터 제목이 된 구절을 직접 꺼냅니다. “아름다움이 꽃으로 꾸민 즐거운 잔을 들고 마시자. 덧없이 흐르는 시간이 우리를 쾌락에 취하게 하자.” 이어 그는 “사랑이 일으키는 달콤한 떨림 속에서 마시자. 저 눈길이 심장을 곧장 찌르니”라고 노래를 잇습니다. 처음 만난 파리 사교계의 여인 앞에서, 시골 청년이 건배 노래를 핑계 삼아 사실상 사랑을 고백하는 대목입니다. 손님들이 이어 부르는 후렴은 더 노골적으로 흘러갑니다. “잔 사이에서 사랑은 더 뜨거운 입맞춤을 얻으리.”

🎧 알프레도의 첫 절: 상단 영상의 알프레도가 잔을 들고 첫 소절을 시작하는 지점에서는 오케스트라가 3박자의 흐름을 먼저 세우고, 테너가 그 위에서 건배의 선율을 시작합니다. 손님들은 아직 조용히 알프레도의 노래를 듣습니다.

2절: 같은 선율에 정반대 가사

비올레타 역시 같은 선율을 받아 부르지만, 같은 노래 안에서 가사가 향하는 방향은 달라집니다. “여러분과 즐거운 시간을 나누겠어요. 즐거움이 아닌 것은 이 세상에서 모두 헛된 일이니까요.” 뒤이어 이 곡에서 오래 남는 두 줄이 등장합니다. “즐겨요. 사랑의 기쁨은 덧없이 빨리 지나가는 것. 피었다 지는 꽃이라 다시는 즐길 수 없으니.” 알프레도가 사랑을 오래 붙잡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처럼 노래한다면, 비올레타는 사랑도 꽃처럼 피었다가 곧 사라진다고 답합니다. 손님들은 그 미묘한 차이를 눈치채지 못한 채 다시 잔을 듭니다.

🎧 비올레타의 절: 상단 영상의 비올레타가 “즐거움이 아닌 것은 전부 헛되다”를 시작하는 지점에서는 알프레도와 같은 선율이 다른 표정으로 돌아옵니다. 소프라노는 음을 잘게 흔들며 장식을 붙이는데, 그 장식은 느긋한 꾸밈보다 몸에 밴 사교계의 말투처럼 들립니다.

마지막 후렴: 네 줄 대화에 담긴 세 막

마지막 후렴 앞에서 두 사람은 짧게 대화를 주고받습니다. 비올레타가 “삶은 즐기는 데 있죠”라고 하자, 알프레도는 “아직 사랑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렇겠죠”라고 답합니다. 비올레타는 “모르는 사람에게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라고 밀어내지만, 알프레도는 “그 말이 제 운명입니다”라고 받아칩니다. 이 네 줄짜리 대화 안에는 오페라 세 막이 나아갈 방향이 거의 다 들어 있습니다. 비올레타는 지금 이 순간의 즐거움을 붙잡으려 하고, 알프레도는 그 말을 사랑의 운명으로 온전히 받아들입니다. 이어 파티 손님들이 “이 낙원에서 새날이 우리를 찾아내게 하자”고 합창으로 잇습니다. 하지만 그 새날은 축복이라기보다 현실이 밀려오는 순간에 가깝습니다. 비올레타는 이 파티가 끝나기도 전에 기침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 마지막 후렴: 상단 영상의 두 사람의 짧은 대화 뒤 손님 전원이 마지막 후렴으로 들어가는 지점에서는 파티 장면이 다시 큰 합창으로 커집니다. “이 낙원에서 새날이 우리를 찾아내게”라는 말로 끝나지만, 그 새날은 곧 비올레타의 병과 알프레도의 사랑을 함께 드러내는 시간으로 바뀝니다.

구간부르는 사람시작 지점(메트 2018 영상)가사 요지한 줄 포인트
전주오케스트라0:00손님들이 잔을 드는 사이현이 3박자 반주를 깔고 시작
1절알프레도0:23즐거운 잔으로 마시자, 사랑의 떨림 속에서테너가 3박자 위에 올라타며 첫 소절
후렴합창0:49잔 사이에서 사랑은 더 뜨거운 입맞춤을 얻으리손님 전원이 처음으로 합류
2절비올레타1:26즐거움이 아닌 것은 전부 헛되다, 꽃은 피었다 진다같은 선율에 정반대 가사
대화와 마지막 후렴두 사람 + 합창2:11삶은 즐김에 있다 vs 그게 내 운명네 줄 대화 뒤 전원 합창으로 마무리
에두아르 비에노가 그린 마리 뒤플레시 초상화
에두아르 비에노가 1845년에서 1847년 사이에 그린 마리 뒤플레시. 손에 든 꽃이 흰 동백이다.

1847년 파리, 스물셋에 죽은 마리 뒤플레시

비올레타의 실제 모델은 1824년 1월 15일 노르망디의 시골 마을 노낭르팽에서 출생한 알퐁신 플레시입니다. 파리로 올라온 뒤에는 마리 뒤플레시라는 이름을 썼고, 스무 살 무렵 부유한 남성들과 사교계를 오가던 코르티잔으로 널리 이름을 알렸습니다. 뒤플레시의 살롱에는 정치인과 작가, 화가들이 오가며 드나들었고, 그녀는 오페라 극장에 다니고 불로뉴 숲에서 말을 타며 파리 사교계의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일흔여덟 살의 슈타켈베르크 백작이 마들렌 대로의 아파트를 마련해 주었고,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와도 가까웠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에두아르 드 페레고 백작과는 잠시 결혼까지 했습니다.

마리 뒤플레시는 1847년 2월 3일, 스물셋의 나이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빚을 갚기 위해 가구와 옷과 보석은 곧바로 경매에 부쳐졌지만 장례식에는 수백 명이 찾아왔습니다. 뒤플레시의 무덤은 지금도 몽마르트르 묘지에 있습니다.

장례식 무렵 스물두 살이던 소설가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도 뒤플레시를 잊지 못했습니다. 그는 1844년 9월부터 1845년 8월까지 열한 달 동안 뒤플레시의 연인이었습니다. 유명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의 아들인 까닭에, 이름 뒤에 ‘피스'(아들)를 붙여 아버지와 구분한 인물입니다. 뒤플레시가 죽은 이듬해인 1848년, 스물셋의 뒤마 피스는 두 사람의 관계를 소설로 엮었습니다. 여주인공의 이름은 마르그리트 고티에이고, 제목은 마르그리트가 늘 동백을 달고 다닌다는 설정에서 나온 〈동백꽃여인〉입니다. 이 작품은 1852년 2월 2일 파리 보드빌 극장에서 연극으로 올려졌고 곧 성공했습니다.

한국과 일본에서 오랫동안 익숙하게 쓰인 제목 ‘춘희(椿姬)’는 동백꽃을 한자로 옮긴 일본식 번역입니다. ‘춘’은 동백을, ‘희’는 젊은 여성을 뜻하죠. 이 동백은 오페라 1막에서도 이야기의 중요한 표식으로 남습니다. 건배의 열기가 가라앉은 뒤, 비올레타는 알프레도에게 동백 한 송이를 건네며 “이 꽃이 시들면 돌려주러 오라”고 말합니다. 꽃이 꺾인 지 하루면 시들어버린다는 점을 생각하면, 사실상 다음 날 다시 찾아오라는 뜻입니다. 축배 노래에서 “피었다 지는 꽃”으로 불린 이미지는 1막이 끝나기 전에 알프레도가 받아 든 실제 동백 한 송이로 절묘하게 이어집니다.

1852년 2월, 파리 객석에 앉은 베르디와 스트레포니

베르디 역시 초연 몇 주 뒤 이 화제의 연극을 보았습니다. 그는 1851년 말부터 1852년 3월까지 파리에 머물렀고, 1852년 2월에는 소프라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와 나란히 객석에 앉았습니다. 훗날 베르디는 이 연극을 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곡을 쓰기 시작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베르디가 이 이야기에 끌린 배경에는 옆자리에 앉은 스트레포니의 삶도 겹쳐 있었습니다. 스트레포니는 1842년 라 스칼라에서 〈나부코〉의 아비가일레를 처음 부른 소프라노였고, 이 작품으로 이름을 알린 베르디에게도 중요한 가수였습니다. 그는 결혼하지 않은 채 아이를 여럿 낳았으며, 아이들의 아버지는 테너 나폴레오네 모리아니로 추정됩니다. 베르디와 스트레포니는 1847년 파리에서 연인이 되었고, 1849년 7월에는 베르디의 고향 부세토로 함께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은 두 사람의 동거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시선은 베르디의 가족과도 충돌했습니다. 베르디는 1851년 1월 부모와 인연을 끊었고, 5월 1일 스트레포니와 함께 산타가타의 새집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연극을 관람하기 한 달 전인 1852년 1월 21일, 베르디는 장인이자 은인이었던 안토니오 바레치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바레치는 베르디의 첫 아내 마르게리타의 아버지였고, 젊은 베르디를 오래 도운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베르디와 스트레포니가 결혼하지 않은 채 함께 사는 일만큼은 못마땅해했습니다. 베르디는 그 편지에서 스트레포니와 자신의 선택을 이렇게 변호했습니다. “내 집에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한 여인이 살고 있습니다. 나처럼 고독한 삶을 좋아하고, 자기 필요를 스스로 채울 재산이 있는 사람입니다. 나도 그 여인도 우리 행동을 누구에게 설명할 의무가 없습니다.”

이 편지를 쓴 지 한 달 뒤, 베르디는 파리에서 연극 한 편을 보았습니다. 상류층 집안이 매춘부 출신 여자를 아들에게서 떼어 놓는 이야기였습니다. 1849년부터 1853년 사이 베르디가 쓴 오페라 여섯 편의 여주인공이 모두 성 규범을 벗어난 여성으로 낙인찍혀 파멸한다는 점을 스트레포니의 처지와 연결해 읽는 연구자들이 있습니다. 그 관계를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베르디가 이 소재를 멀리 떨어진 남의 이야기로만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리라는 점은 편지에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1853년 1월 1일, 그는 로마의 친구 데 산티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베네치아용으로 〈동백꽃여인〉을 쓰고 있네. 제목은 아마 〈라트라비아타〉가 될 걸세. 우리 시대의 소재라네.” 트라비아타는 ‘길을 잘못 든 여자’라는 뜻입니다. 처음 붙였던 제목은 그냥 〈비올레타〉였습니다.

대본가 프란체스코 마리아 피아베의 19세기 사진
대본가 프란체스코 마리아 피아베. 베르디에게 혹독한 요구를 받으면서도 오래 함께 일한 협업자였고, 피아베가 죽은 뒤에는 베르디가 장례비까지 대준 친구였다 · 사진 Archivio Storico Ricordi · CC BY-SA 4.0

46일 간격으로 올린 〈일 트로바토레〉와 〈라 트라비아타〉

1852년 10월, 대본가 프란체스코 마리아 피아베가 산타가타로 내려와 베르디 집에 머물면서 대본을 씁니다. 1810년 베네치아의 유리 공예 섬 무라노에서 태어난 피아베는 라 페니체 극장의 상주 시인 겸 무대감독이었고, 베르디를 처음 만난 장소도 그 극장이었습니다. 그는 〈에르나니〉부터 〈운명의 힘〉까지 베르디 오페라 열 편의 대본을 담당했습니다. 그 열 편 가운데 〈리골레토〉와 〈라 트라비아타〉도 있습니다. 베르디는 피아베를 사정없이 몰아붙였고, 피아베는 대체로 군말 없이 따랐다고 전해집니다.

가장 큰 압박은 일정이었습니다. 베르디는 이때 로마에서 올릴 〈일 트로바토레〉도 동시에 붙들고 있었습니다. 1852년 12월 20일 무렵에는 로마에 머물며 두 작품을 나란히 작업했고, 1853년 1월 19일 로마 아폴로 극장에서 〈일 트로바토레〉가 초연됩니다. 1월 말에는 베네치아 쪽에서 계약 조건을 다시 확인하는 연락이 왔습니다. 3월 첫째 주 토요일 초연이 계약 조건이었으니, 남은 시간은 5주 남짓이었습니다. 〈라 트라비아타〉는 3월 6일에 막을 올렸고 두 초연 사이는 정확히 46일입니다. 오늘날까지 극장 단골 레퍼토리로 남은 두 작품이 일곱 주가 채 안 되는 사이에 차례로 무대에 오른 셈입니다.

피아베와 베르디의 관계를 혹독한 작업 방식만으로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1867년 12월 뇌졸중으로 피아베의 몸이 마비되고 말도 할 수 없게 됐을 때, 베르디는 피아베 가족의 생계를 도왔습니다. 1876년 3월 5일 피아베가 죽은 뒤에는 장례비를 내고 밀라노 기념묘지에 묻히게 했습니다. 작업할 때는 몰아붙였지만, 피아베가 쓰러진 뒤의 삶까지 외면하지는 않았습니다.

1837년 재건 직후 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 내부 그림
1837년 다시 문을 연 라 페니체 내부. 16년 뒤 이 객석에서는 〈라 트라비아타〉 초연을 보던 관객들이 웃음을 터뜨립니다.

1853년 3월 6일 라 페니체, 3막에서 웃음이 터져 나온 초연

라 페니체는 1792년에 문을 연 베네치아의 오페라 극장으로, 이름은 ‘불사조’라는 뜻입니다. 앞선 극장을 잃은 뒤 새 극장을 지으면서 ‘재에서 되살아난다’는 의미를 담았는데, 극장은 훗날에도 두 차례 더 불탄 뒤 다시 일어섰습니다. 1836년 난방 기구에서 시작된 불로 타 버려 1837년에 다시 지었고, 1996년에는 방화로 내부가 전소돼 2003년 12월에야 다시 열었습니다. 베르디에게 라 페니체는 안방 같은 극장이었습니다. 〈에르나니〉(1844), 〈아틸라〉(1846), 〈리골레토〉(1851)가 모두 이곳에서 초연됐습니다.

초연 전부터 두 가지가 어긋났습니다. 첫째는 시대 설정의 문제입니다. 극장 측은 ‘우리 시대의 소재’라던 베르디의 의도를 그대로 두지 않고, 무대 배경을 1700년 무렵으로 옮기라고 지시합니다. 그래서 현대 파리의 옷을 입은 비올레타가 무대에 서는 일은 1880년대에 가서야 가능해졌습니다. 둘째는 캐스팅이었습니다. 비올레타 역의 파니 살비니-도나텔리는 서른여덟이었고 체격이 넉넉했습니다. 베르디는 미리 피아베에게 “우아한 몸매에 젊고, 열정적으로 노래하는” 가수가 필요하다고 써 보냈지만 극장은 교체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1853년 3월 6일 밤, 지휘는 가에타노 마레스, 알프레도는 테너 로도비코 그라치아니, 아버지 제르몽 역은 바리톤 펠리체 바레시였습니다. 살비니-도나텔리의 노래 자체가 나빴던 것은 아닙니다. 1막 마지막 아리아의 빠른 장식음에는 박수가 터졌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3막에서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여자를 넉넉한 체격의 소프라노가 연기하자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졌고 누군가 “폐병은 안 보이고 부종만 보인다”고 외쳤다고 전해집니다.

다음 날 아침 베르디가 제자 에마누엘레 무치오에게 보낸 편지는 무척 짧습니다. “어젯밤 〈라 트라비아타〉는 실패. 내 잘못인가, 가수들 잘못인가? 시간이 말해 주겠지.” 축배 노래로 시작한 오페라의 첫날이 이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1853년 3월 6일 라 페니체 라 트라비아타 초연 안내 포스터
1853년 3월 6일 초연을 알리는 라 페니체의 인쇄물. 다음 날 아침 베르디가 ‘실패’라고 쓴 바로 그 공연이다.
2017년 라 페니체 신년 음악회. 소프라노 로사 페올라와 테너 존 오즈번, 지휘 파비오 루이지. 〈라 트라비아타〉 초연이 실패로 끝났던 그 극장은 지금 매년 이 노래로 새해를 엽니다.

14개월 뒤 산 베네데토 극장에서 뒤집힌 판정

초연 실패에서 마침내 성공작으로 인정받기까지 걸린 시간은 14개월이었습니다. 1854년 5월 6일, 같은 베네치아의 산 베네데토 극장에서 다시 올린 〈라 트라비아타〉는 크게 성공했습니다. 이때 비올레타를 맡은 가수는 마리아 스페치아-알디기에리였습니다. 초연 당시 객석에 있었던 피아베는 두 공연의 반응이 얼마나 달랐는지를 베르디에게 편지로 알렸습니다.

이후 〈라 트라비아타〉는 베르디가 살아 있는 동안 이미 그의 작품 가운데 손꼽히게 자주 무대에 올랐습니다. 지금도 해마다 집계되는 세계 오페라 공연 통계에서 언제나 최상위권에 듭니다. 출판사 리코르디는 1855년 무렵 피아노 반주용 성악보를 찍어 냈고, 그 판본의 표제지에는 베르디의 얼굴이 실렸습니다. 작품의 인기가 커지자 축배 노래도 오페라 밖으로 퍼져 나갔고, 오케스트라 연주회나 성악 콘서트에서 이 한 곡만 따로 떼어 부르는 관행으로 이어졌습니다.

1855년 무렵 리코르디가 낸 라 트라비아타 성악보 표제지
1855년 무렵 리코르디가 낸 피아노 반주용 성악보 표제지. 베르디의 얼굴을 표지에 올린 판본이다.

1948년 1월 명동 시공관, 한국 첫 오페라가 된 ‘춘희’

〈라 트라비아타〉는 한국 오페라사가 시작되는 첫 장면에도 등장합니다. 1948년 1월 16일, 서울 명동의 시공관에서 한국인 제작진과 성악가들이 직접 꾸린 첫 오페라 공연이 마침내 막을 올렸습니다. 무대에 오른 작품은 〈라 트라비아타〉였고, 당시 제목은 일본에서 쓰던 번역명인 ‘춘희’였습니다.

이 무대를 앞장서 이끈 사람은 이인선입니다. 의사이자 테너였던 그는 제작과 번역을 맡았고, 알프레도 역까지 직접 소화했습니다. 비올레타 역은 소프라노 김자경과 마금희가 번갈아 맡았으며, 김자경은 이 공연을 계기로 한국 첫 프리마돈나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공연은 1월 16일부터 20일까지 닷새 동안 하루 두 차례씩, 모두 열 번 이어졌습니다. 이때 한국 관객이 오페라 극장에서 처음 들은 〈라 트라비아타〉의 대표 선율 중 하나가 바로 이 축배 노래였습니다. 1853년 베네치아 초연 관객이 들었던 그 장면을 1948년 서울의 관객은 이인선이 우리말로 옮긴 대본으로 접했습니다.

초연에서 비올레타를 부른 소프라노 파니 살비니-도나텔리의 초상
1853년 베네치아 초연에서 비올레타를 부른 파니 살비니-도나텔리. 노래는 박수를 받았지만 병으로 죽어 가는 장면은 관객의 웃음을 샀다.

3분짜리 건배 노래가 세 시간을 미리 말하는 방식

이 노래를 다시 틀어 놓고 가사만 차분히 따라가면 작품 전체의 구조가 보입니다. 알프레도의 절은 마시고 취하며 입맞춤을 얻겠다는 미래형의 약속에 가깝습니다. 반대로 비올레타의 절은 지금 당장 즐기자는 현재형에 머물고, 그 기쁨도 곧 사라질 것이라고 못 박습니다. 오페라의 나머지 두 막은 이 두 절의 차이를 그대로 무대 위에 풀어냅니다. 2막에서 알프레도의 아버지는 비올레타를 찾아와 아들의 앞날을 위해 알프레도와 헤어져 달라고 요구하고, 3막에서 비올레타는 병든 몸으로 알프레도를 기다리다 끝내 죽음을 맞습니다. 처음에는 파티의 흥으로 들렸던 비올레타의 말이 결국 작품의 결말을 먼저 말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마리 알렉상드르 알로프가 1853년 파리에서 낸 석판화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
1853년 파리에서 구필 상회가 펴낸 마리 알렉상드르 알로프의 석판화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 초연이 열린 그해에 나온 판화로, 여주인공은 동백꽃을 달고 있다 · 레이크스뮤지엄 소장 · CC0

베르디가 진정 영리한 대목은 서로 다른 시간을 말하는 가사를 같은 멜로디에 얹어 놓았다는 점입니다. 비올레타에게 전혀 다른 곡을 붙였다면 관객은 1막에서 이미 결말의 그림자를 알아챘을 테고 파티 장면의 들뜬 공기도 깨졌을 겁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노래가 같은 3박자 위에서 흐르기 때문에 손님들도 관객도 비올레타의 말을 처음에는 그저 흘려듣습니다. 결말을 알고 다시 들으면 2절에서 소프라노가 붙이는 작은 장식음들이 사뭇 다르게 다가옵니다. 화려함을 뽐내는 장식이라기보다, 진심을 들키지 않으려고 웃음으로 덮는 장식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이 노래는 파티에서 틀어도 되고 혼자 들어도 좋습니다. 다만 축배의 흥으로만 즐길지, 비올레타의 예고까지 함께 짚어 들을지는 2절 가사를 알고 있느냐에 달렸습니다. 1853년 베네치아 객석도, 1948년 명동 객석도 처음에는 1절의 들뜬 기운에 먼저 반응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 글을 읽은 뒤에는 2절의 말들이 먼저 귀에 들릴 차례예요.

💡 사실은요: ‘축배의 노래’라는 제목 때문에 테너 혼자 부르는 노래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알프레도와 비올레타가 번갈아 부르고 합창이 더해지는 이중창입니다. 우리가 파티 노래로만 떠올리는 이 곡의 한가운데에는 비올레타의 대답이 놓여 있고, “피었다 지는 꽃”으로 옮겨지는 유명한 구절도 비올레타가 부릅니다. 원어 제목 ‘Libiamo ne’ lieti calici’, 곧 ‘리비아모 네 리에티 칼리치’는 “즐거운 잔으로 마시자”라는 뜻으로, 알프레도가 노래를 시작하는 첫 줄에서 온 말입니다.

1953년 마리아 칼라스와 프란체스코 알바네세, 가브리엘레 산티니 지휘 RAI 토리노 관현악단의 스튜디오 녹음. 2절의 장식음이 왜 ‘들키지 않으려는 장식’처럼 들리는지 확인할 수 있는 음원입니다.

악보와 함께 듣기

같은 선율에 가사만 바뀌는 구조는 악보를 눈으로 따라가면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아래 영상은 피아노 반주와 성부를 느린 템포로 함께 보여 주는 연습용 악보 영상이라, 알프레도 절과 비올레타 절의 음표가 어디까지 같고 어디서 장식이 붙는지 확인하기 좋습니다.

피아노 반주와 성부를 느린 템포로 따라가는 악보 영상. 2절에서 소프라노 성부에 붙는 장식음이 눈에 들어옵니다.

무료 악보 도서관 IMSLP의 〈라 트라비아타〉 악보 보기 (IMSLP) 페이지에는 오페라 전곡 악보가 수록되어 있어 전체 악보를 함께 대조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연주로 시작할까

2절의 쓸쓸함까지 들으려면 전곡 음반이 낫습니다. 성격이 다른 3종입니다.

👑 첫 감상 추천

카를로스 클라이버 · 바이에른 국립오페라 · 일레아나 코트루바슈 · 플라시도 도밍고

도이치 그라모폰 · 1976년 녹음

템포가 빠르고 합창이 정확히 맞물려 소음이 아니라 음악으로 들립니다. 다만 화려한 비올레타를 기대한다면 코트루바슈는 심심할 수 있습니다.

레퍼런스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 라 스칼라 · 마리아 칼라스 · 주세페 디 스테파노

EMI · 1955년 실황

2절 “피었다 지는 꽃”에서 칼라스는 파티 한가운데서 이미 혼자인 사람처럼 부릅니다. 모노 실황의 거친 음질은 감수해야 합니다.

와일드카드

카를로 리치 · 빈 필하모닉 · 안나 네트렙코 · 롤란도 비야손

도이치 그라모폰 · 2005년 잘츠부르크 실황

두 젊은 주역이 축배 장면을 진짜 파티처럼 밀어붙입니다. 정돈된 스튜디오 소리를 원한다면 실황 템포가 거칠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라 트라비아타 축배의 노래〉는 오페라 어디에서 나오나요?

1막 시작 직후, 파리에 있는 비올레타 저택의 파티 장면에서 나옵니다. 오케스트라 전주가 끝나고 손님들이 인사를 나눈 뒤 바로 이어지는 노래이며 연주 시간은 약 3분입니다. 오페라 전체에서 관객이 처음 듣는 본격적인 노래이기도 합니다.

원어 제목 ‘리비아모 네 리에티 칼리치’는 무슨 뜻인가요?

“즐거운 잔에 술을 채워 마시자”라는 뜻으로, 알프레도가 부르는 첫 줄입니다. 이 노래는 이탈리아어로 건배 노래를 가리키는 ‘브린디시’라고도 불립니다. 곡 전체의 가사는 대본가 프란체스코 마리아 피아베가 썼습니다.

테너 혼자 부르는 노래인가요?

아닙니다. 알프레도(테너)가 한 절을 부르고 비올레타(소프라노)가 다음 절을 이어받으며 파티 손님들이 합창으로 후렴을 받습니다. 그래서 이 곡은 테너 독창이 아니라 알프레도와 비올레타의 이중창에 합창이 붙는 장면입니다. “사랑의 기쁨은 피었다 지는 꽃”이라는 가장 유명한 구절은 비올레타가 부릅니다.

왜 한국에서는 이 오페라를 ‘춘희’라고 불렀나요?

원작 소설 〈동백꽃 여인〉을 일본에서 ‘춘희(椿姬)’, 곧 동백 아가씨로 번역했고 한국도 그 제목을 그대로 썼기 때문입니다. 1948년 1월 서울 명동 시공관에서 열린 한국 첫 오페라 공연도 ‘춘희’라는 제목으로 올랐습니다. 요즘은 원제 〈라 트라비아타〉를 더 많이 씁니다.

초연이 실패했다는 게 사실인가요?

사실입니다. 1853년 3월 6일 베네치아 라 페니체 초연 다음 날 베르디 본인이 편지에 “실패”라고 썼습니다. 특히 3막에서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비올레타를 맡은 소프라노의 외모와 연기가 배역의 이미지와 맞지 않아 객석에서 웃음이 났다고 전해집니다. 이듬해인 1854년 5월 같은 도시의 산 베네데토 극장 공연은 크게 성공했습니다.

참고 자료

이어서 읽기 — 잔을 내려놓은 뒤에 이어질 다섯 이야기

축배 노래의 2절까지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면 아래 다섯 편도 이어서 읽기 좋습니다. 베르디가 죽음을 다룬 방식, 오페라 속 유명 아리아가 작품 밖으로 퍼져 나간 과정, 파티 장면이 무너지는 다른 오페라, 그리고 한국 소프라노 조수미의 무대 이력까지 함께 볼 수 있습니다.